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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배남준과 같은 도시로 떠나기로 한 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어쩌면 아마 평생 가도 고향에 간다고 짐을 싸고 내려간 내가 왜 갑자기 연...
Chương (1)
第1章
배남준과 같은 도시로 떠나기로 한 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어쩌면 아마 평생 가도 고향에 간다고 짐을 싸고 내려간 내가 왜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는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며칠 후, 나는 뻔뻔하게도 배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자마자 잔뜩 화가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윤주, 나랑 헤어질 작정이야? 연락은 왜 안 받아?”
나는 주변에 둘러싸인 철창과 높은 담벽들을 바라보며 일부러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나 곧 해외로 출국해.”
“그러니 다신 연락하지 말자.”
제1화
5년 후, 난 한 여행지의 야시장에 노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여행객들에게 네일아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옆에는 수공예품을 쌓아 놓고 팔았다.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옆 가게 사장님이 들어갈 준비를 하며 나에게 소리쳤다.
“윤주 씨, 비도 오는데 안 들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루종일 개장을 못해서 이대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안쓰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윤주 씨,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야.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은데 그럼 안 돼. 건강부터 챙겨야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점포 앞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네일아트 한번 하는데 얼마예요?”
여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며 네일아트 샘플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님 의자를 깨끗이 닦은 뒤에 제품 소개를 했다.
“기본은 만 원, 복잡한 디자인은 2만 원 받아요. 손님이 마음에 든다면 여기 있는 인형 하나를 서비스로 드릴게요. 다 제가 직접 만든 거거든요.”
여자는 인형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심한듯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로 할게요. 인형은 됐어요. 이런 듣보잡 제품은 거들떠도 안 보거든요.”
옆에 있던 남자는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워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비오는 날에 네일아트 한다고 나오는 여잔 너밖에 없을 거야.”
공구를 들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래전에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였고 평생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리였다.
그랬다. 배남준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몰래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좀 빠졌고 더 준수해졌다.
순간 폭풍우가 심장을 강타하는 것처럼 요동치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배남준은 의자를 당겨다가 앉으면서도 우산을 잡은 손은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대학교 때 매번 비 올 때면 기숙사 앞까지 찾아와서 날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애정과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옆에서 그 여자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거 다 지워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손을 빼가더니 손등을 호호 불며 말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손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손에 무슨 가시가 박힌 줄 알았어요. 어찌나 거칠던지 내 손이 다 아프잖아요.”
“손이 그래 가지고 어떻게 손님에게 네일아트를 해줘요? 사장님 장사할 줄 정말 모르네.”
나는 그제야 갈라터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기간 재봉일을 하다 보니 손가락 마디마디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순식간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가슴이 갑갑했다.
옆에 있던 배남준은 웃으며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더니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여기 돈 받으시고 네일아트는 지워주세요.”
말을 마친 그는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돈을 꺼내려던 그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안면근육이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한때는 너무 따뜻해서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예쁜 눈망울에 선명한 증오심이 서렸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더니 손가락을 닦으며 그에게 물었다.
“뭐야? 남준 씨 아는 사람이야?”
그는 갑자기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지갑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내 머리에 던지며 싸늘히 말했다.
“몰라. 그냥 불쌍해 보이잖아.”
“거지한테 선심 쓴 셈 치고 이만 가자.”
그 말은 예리한 송곳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우린 그렇게 몇 년 만에 재회했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초라한 모습일 때에.
제2화
하지만 배남준은 모를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든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던 그해, 나와 배남준은 같은 도시로 가서 취직하기로 약속했다.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짐을 싼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마자 악몽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의붓아버지가 엄마의 위에 올라타서 한손으로는 머리를 짓누르고 한쪽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돌아온 내 모습을 본 그는 동작을 멈추기는커녕, 더 심하게 폭행을 가했다.
“돈밖에 모르는 년! 너랑 네 딸 다 똑같아! 흡혈귀처럼 내가 벌어온 돈을 쪽쪽 빨아먹으면서도 내가 뭐 좀 하라면 그렇게 안 내키지.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순간 엄마의 애처로운 비명과 의붓아버지의 욕설이 한데 섞여 내 신경을 아프게 자극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달려가서 그를 밀쳐 쓰러뜨렸다.
하지만 여자인 내가 건장한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바로 몸을 일으킨 그는 인정사정없이 내 귀뺨을 후려갈겼다.
엄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애는 때리지 마세요. 윤주 앞으로 돈 벌어오면 되잖아요.”
돈 얘기가 나오자 그 짐승은 더욱 화를 냈다. 그는 엄마를 밀치고는 다가와서 내 목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나는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의 순간에 나는 책상 위에 놓여진 과일칼을 발견하고 한치 주저도 없이 그것을 집어 상대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방금 스무 살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나는 그렇게 살인자가 되었다.
최종 심판이 있던 날, 나는 배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에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냐고 따지고 들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처음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를 자극했다.
“배남준, 솔직히 말할게. 나 곧 출국하기로 했어.”
“누가 너 같은 거지랑 평생 같이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마음과는 전혀 상반되는 그 말들은 그때 당시 괜찮은 월세방 하나 마련할 돈이 없었던 배남준에게 크나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후회하지 말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우린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날 최종 심판에서 나는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되어 유기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선고 후 닷새가 지나 엄마는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와 엄마를 동시에 잃었다.
너무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배남준은 참 좋은 애인이었고 나에게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살인죄가 인정되던 날, 이십 년간 쌓아온 나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출소하고 한동안은 어떤 회사도 받아주지 않아서 힘들게 배달직을 찾아서 일했다.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나를 예뻐하던 사장님도 내가 범죄이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태도가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거 본사에서 알면 우리 가게 문 닫아야 해! 이게 누구 인생 망치려고! 꺼져! 당장 안 꺼져?”
명문대 졸업생이 내가 배달일조차 거절당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결국 나는 교도소에서 배운 재봉기술로 노점을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에 나가서 밤중에 돌아오면서 힘겹게 일을 해야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배남준이 오늘 나한테 뿌려준 돈은 거의 내 한 달치 생활비였다.
하지만 이 돈은 받고 싶지 않았다.
돈에 맞은 볼이 얼얼하고 아팠지만 더 아픈 것은 상처입은 내 마음이었다.
잠들기 전, 나는 대학교 때 룸메이트였던 지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가 출소한 후에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였다.
“윤주야, 다음 달 내 결혼식에 배남준 초대했어. 우리 아빠가 걔랑 같이 사업하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꼭 와줄 거지? 이거 우리 대학교 때부터 약속한 거잖아.”
나는 아까 미처 돌려주지 못한 돈을 곱게 정리하고는 담담히 대답했다.
“괜찮아. 안 그래도 돌려줄 게 있었어.”
이 돈을 돌려주면 나도 그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제3화
지은이의 결혼식은 지은이 아버지의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떠난지 5년만에 처음으로 이 도시에 돌아왔다.
다시 사회로 나온지 좀 됐지만 그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찾아왔다.
“윤주야, 편하게 있어.”
지은이는 내 어깨를 다독이며 긴장을 풀라고 말했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서 신부대기실로 들어가라고 그녀를 재촉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착석하기 시작했고 내가 앉은 테이블은 대학교 동창들 테이블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배남준이 그날의 그 예쁜 여자와 함께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쏠렸다.
“배 사장도 곧 결혼식 올리겠네.”
그는 전혀 어색해하는 기색 없이 대범하게 여자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그러고는 내가 있는 방향을 힐끗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소정이 결혼할 때 다들 와서 축하해 주는 거 잊지 마.”
그 여자의 이름이 소은정이었구나.
나는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존재감을 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한소정의 눈에 띄어 버렸다.
“저 사람 그날 내 손톱 해주던 사람이잖아?”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드디어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았다.
“너… 임윤주! 맞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자세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알아본 친구가 허벅지를 탁 치며 감탄했다.
“진짜였네! 그런데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내 기억에 너 전에 엄청 예뻤는데 왜 지금은 영양실조 걸린 사람처럼 누렇게 떴어?”
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억지미소만 지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 중에 배남준과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나를 향해 비아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한성대 여신이 어쩌다가 이 처지가 되었을까? 설마 천벌을 받았나? 몇 년 동안 소식도 없어서 다들 네가 전염병이라도 걸려서 죽은 줄 알았잖아.”
이런 비웃음은 참을 수 있었다.
사실 교도소에 있을 때 당했던 괴롭힘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오늘은 가장 소중한 친구 지은이의 결혼식이었기에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되자 나는 내 앞에 있는 반찬만 집었다.
배남준이 피식 웃더니 한소정의 접시에 반찬을 챙겨주며 말했다.
“우리 임 여신은 해외에 오래 살더니 한국 반찬이 입맛에 안 맞나 봐?”
나는 멍한 상태로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들 천천히 먹어. 난 이만 가볼게.”
그 말을 할 때 내 눈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테이블에 한때 같이 공부했던 동창들이 앉아 있는데도 나는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나는 지은이에게 인사도 못한 채,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배남준에게 돌려주려고 가져왔던 돈도 돌려주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 호텔을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배남준은 무슨 생각인 건지, 성큼성큼 나를 쫓아오더니 무작정 내 손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는 음침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임윤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잘살 거라며 해외로 나갔잖아? 왜 돌아왔어?”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애들 말이 맞아. 이게 네가 날 버린 대가야.”
“질투 나? 나 지금 돈도 권력도 다 가졌어. 예쁘고 상냥한 여자친구도 있고.”
“가장 중요한 건 소정인 날 사랑한다는 거야. 걔는 절대 아무 이유도 없이 날 버리지 않아! 그리고 너, 버려진 사람은 너야!”
그는 그동안 쌓았던 분노와 원망을 모두 나에게 쏟아냈고 그의 그런 감정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던 순간에 밖으로 달려나온 지은이가 숨을 헐떡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배남준,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너 윤주가 얼마나….”
“지은아!”
나는 다급히 지은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아까 미처 못 돌려줬던 돈뭉치를 배남준의 손에 쥐여주고는 지은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평생 오해 받고 미움 받더라도 그에게는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제4화
그날 밤, 지은이는 시간 내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주야, 거기 있지 말고 우리 아빠 호텔로 와.”
나는 불안감에 섣불리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말… 괜찮을까? 너희한테 민폐 끼치는 거 아니야?”
지은이는 괜찮다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괜찮아. 그냥 임시 객실 서비스 직원이야. 사람들 앞에 얼굴 내밀 일 없고 어쨌든 너 거리에서 인형 파는 것보다는 많이 벌 거야.”
나는 갑자기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일터를 옮긴지 3일째 되던 날, 누군가가 파티홀에 생일파티를 예약했다.
나랑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지배인님이 나한테 서빙하는 거 좀 도와주라고 요청이 왔다.
파티홀에 온 뒤에야 나는 생일 주인공이 배남준인 것을 알았다.
먹고 살기 바빠서 그의 생일마저 잊고 있었다니.
수많은 대학 동창들과 사회에 나와서 알게 된 인맥들이 모두 자리한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은이를 찾았다.
여기서 저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뭘 두리번거려? 여기 너 구경하라고 왔어?”
파티홀 담당자님이 술잔을 담은 판을 나한테 넘기더니 고급 샴페인을 따르며 핀잔을 주었다.
그녀는 한쪽을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저쪽이야. 빨리 가. 저기 메인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나는 거절할 틈도 없이 팀장님에게 등 떠밀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술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메인 테이블에 접근하고 있다가 갑자기 뒤돌아선 한소정 때문에 비틀거리다가 판을 놓치며 술을 모두 바닥에 쏟고 말았다.
챙그랑 하는 아찔한 소리와 함께 고급 샴페인잔이 깨지고 술이 사방으로 튕기며 한소정의 하이힐과 치맛자락을 더럽혔다.
“뭐 하는 거야? 눈을 어디다 두고 다녀?”
“죄송합니다.”
나는 무감각하게 사과를 하고는 다급히 바닥에 떨어진 파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소정은 무척 화가 나 보였다.
“사과가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신발 얼마짜리인 줄 알아? 당장 신발부터 닦지 못해?”
나는 저도 모르게 배남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다가와서 중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빨리 닦으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이 호텔 서비스 직원들 다 이 모양이야?”
결국 나는 갖고 다니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신발을 닦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채 닦지도 못했는데 정수리 위에서 한소정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오늘 오신 손님들 중에 이 여자 아는 분 좀 많죠? 다들 이 여자가 몇 년 동안 왜 사라졌는 줄 알아요?”
나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걸까?
그녀는 마치 고고한 여왕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임윤주 맞지? 너 사라진 시간 동안 어디 있었는지 내가 사람들한테 말해줘?”
나는 그제야 한소정이 나에 대해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그녀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서 내 과거를 까발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은정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들이 그런 나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무슨 선택을 해도 피하지 못할 거라면 저들에게 놀림을 당하고 죽는 것보다 나 스스로 뛰어내릴 것이다.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배남준, 그리고 친구들을 바라봤다.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수고스럽게 그러실 것 없어요. 제가 직접 얘기하죠.”
“몇 년 전 난 실수로 사람을 죽였고 사라진 시간 동안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어.”
나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솔직해지기로 했다.
난 단지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배남준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눈이 휘둥그레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