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때문에 우리 결혼 생활이 파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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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때문에 우리 결혼 생활이 파탄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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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드라마의 성공을 축하하는 종방연 자리, 누군가 요즘 유행하는 AI 키워드 매칭 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서로의 추억이 담긴 요소들을 AI에 입력해...

Chương (1)

第1章

새 드라마의 성공을 축하하는 종방연 자리, 누군가 요즘 유행하는 AI 키워드 매칭 게임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서로의 추억이 담긴 요소들을 AI에 입력해 합치도가 90%를 넘으면 운명의 동반자라는 게임이었다. "우리도 해보자, 연우 씨." 나는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함께 찍은 사진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전부 시스템에 등록했다. 쏟아지는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그의 아내라는 내 위치를 확고히 굳히고 싶었다. 구연우는 천재 작가였고, 그가 대본에 써 내려간 그 절절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다. 그는 조금 귀찮은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가 화면에 떠올랐다. 우리의 합치도는 고작 10%. AI가 내놓은 평가는 잔인했다. [일방적인 헌신, 공명 없음.] 순간 장내가 술렁였고,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밀려드는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나도 재미 삼아 한번 해볼까?" 그때, 연우의 오랜 라이벌이자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연출가 민채아가 슬그머니 키워드 몇 개를 입력했다. 동시에 거대한 스크린이 다시 밝아졌다. 수치가 빠르게 치솟더니, 믿을 수 없는 숫자가 박혔다. 100%. 늘 차갑고 흐트러짐 없던 구연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손에 쥔 술잔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의 대본 속에서 수많은 관객의 눈물을 훔치게 했던 애절한 인물들. 그 모든 인물의 진짜 모델은, 자신의 꿈을 위해 그를 가차 없이 버리고 떠났던 민채아였다. … "진짜 대박이네요!" 눈치 없는 사회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민채아를 구연우 앞으로 떠밀었다. 채아가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작게 비명을 지르며 연우의 품으로 쓰러졌다. 평소라면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렸을 그가, 지금은 채아의 어깨를 부스러질 듯 움켜쥐고 있었다. "이게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건가 봐요!" 객석의 기자들은 미친 듯이 셔츠를 눌러댔고,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이 눈이 시릴 정도로 터져 나왔다. 심지어 관객 중 일부는 오늘 종방연을 두 사람의 약혼식으로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나는 그 화려한 조명 바깥으로 완전히 밀려나 있었다. 스크린에 박힌 숫자가 마치 거대한 손바닥이 되어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 "저 여자 감독, 누구예요?" 내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옆에 있던 조감독이 허벅지를 탁 치며 흥분조로 속삭였다. "아, 서우 씨는 3년 전에 합류해서 모를 수도 있겠네요." "민채아 감독이 연우 작가 대학 동기인데, 당시에 업계에서 천재로 진짜 유명했어요." "근데 어느 날 갑자기 유학을 가버리면서 둘이 연락이 끊겼거든요." 조감독이 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연우 작가 데뷔작에 나오는 그 지독한 첫사랑이자 영원한 뮤즈, 실제 모델이 바로 저 사람이에요." "이제 돌아왔으니, 대본 결말이 통째로 바뀌게 생겼네요." 나는 민채아의 얼굴을 멍하니 응시했다. 웃을 때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각도가 나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난 세월 동안 내가 구연우의 손에 이끌려 서서히 그 아이의 모습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 녹슨 칼날이 들어찬 것처럼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내가 안색이 창백해지자 조감독이 분위기를 수습하려 말을 돌렸다. "에이, 그냥 게임이잖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무언가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우리의 추억들을 다시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구연우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저 화면 속에서 깜빡이는 로딩 바만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합치도는 여전히 10%에서 단 1%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은 온통 비굴할 만큼 그 비위를 맞추려 애쓴 흔적뿐이었고, 그의 기억 속에는 내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새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스템 오류가 분명해요!" 조감독이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서우 씨가 연우 작가 작품의 전속 여배우인데, 케미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들은 대충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업계에는 나와 구연우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투자 유치를 돕기 위해 위출혈이 일어날 때까지 술을 마셨던 일, 대본 영감을 주겠다며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반년 동안 함께 보냈던 일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혼자 매달리는 처량한 존재일 뿐이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와 구연우는 이미 법적 부부였다. 하지만 이제야 깊은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동안 그가 나를 바라보던 그 수많은 다정한 눈길들이, 정말 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 너머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었던 걸까. "연우야,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가 아파." 민채아가 연우의 소맷자락을 쥐며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친근하게 속삭였다. "우리 먼저 나가면 안 돼?" 눈치 빠른 투자자가 즉시 차 키를 던져주었다. "구 작가님, 민 감독님 좀 데려다줘요. 이게 진짜 중요한 일이지!" 나는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채아를 부축해 곧장 출구로 향했다. "먼저 보내고 갈 테니까,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 두 사람은 대기실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행사장의 소음은 계속되었지만, 내 세계는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 채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입꼬리가 경련하듯 굳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지독한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서우 씨." 조감독이 퇴근하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일 밤에 연우 작가님이랑 중요한 발표 하신다면서요? 좋은 소식 기대해도 되죠?" 그 말에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겨우 입꼬리를 올렸다. "발표 안 해요." 세 달 전, 이 공식 발표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커플링이 가방 속에서 무겁게 덜컹거렸다. 그 반지를 더는 그에게 건네고 싶지 않아졌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텅 빈 행사장에는 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에게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구연우는 단 하나도 확인하지 않았다. "저기, 손님.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서요." "아, 네.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려다, 내 숄을 연우가 채아의 어깨에 둘러준 채 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초봄의 서늘한 밤비가 옷깃 사이로 가차 없이 파고들어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는 새벽까지 차가운 길가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구연우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였다. "아직 행사장이야? 비 오니까 꼼짝 말고 거기서 기다려." 20분 뒤, 그의 차가 도로변에 멈춰 섰다. 조수석 문을 열자 싸늘한 향수 냄새와 옅은 담배 연기가 확 풍겼다. 민채아가 가장 좋아한다던 그 특유의 향이었다. "채아 기분이 좀 불안해 보여서 달래주느라 늦었어." 그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대답을 하려던 순간, 시트 틈새에 구겨진 채 버려진 메모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를 펼치자, 구연우의 거친 필체로 적힌 새로운 대본 구상이 보였다. [재회 후의 첫 입맞춤은, 오월의 서늘한 빗속에서 이루어진다.] 손에 쥔 종이가 마치 뜨겁게 달궈진 쇠붙이처럼 느껴져 지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거기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구연우가 내 젖은 바지 밑단을 슬쩍 보더니, 뒷좌석에서 담요 한 장을 던져 내 무릎 위에 얹어주었다. 그의 취향이 아닌 낯선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나는 담요를 받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민채아가 누구야?" 차 안이 순간 죽음 같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같이 일하는 감독 동료야." "그냥 동료?"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럼 왜 그 게임에서 두 사람 합치도가 100%가 나와?" "왜 조감독은 네 대본 속 첫사랑이 그 여자라고 해?" 그리고 나는 뭐였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그저 네가 채아의 모조품으로 빚어낸 인형에 불과했냐고. "기계가 멋대로 뱉은 수치일 뿐이야. 그걸 진짜 믿는 건 아니겠지." 그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기자들이 쫙 깔린 자리였어. 맞춰주지 않으면 채아가 곤란해지고, 나도 모양새가 안 사니까 받아준 거야." "그 친구, 자존심이 세서 남들 앞에서 창피당하는 거 못 견뎌 해." "그럼 나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남편이 다른 여자를 부축해서 떠나는 걸 멀쩡히 지켜봐야 해? 이 차가운 빗속에서 두 시간 동안 서서 널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이야?" 그는 구태여 변명하려 하지 않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는 늘 이랬다.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침묵이라는 거대한 벽을 세워 나를 가두었다. 애초에 우리가 혼인신고를 했던 것도, 구 씨 집안 어른의 유언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마침내 내 사랑이 결실을 맺은 줄 알았다. 드레스도, 제대로 된 예식도 없었지만 그저 그 곁을 지킬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손을 내밀었다. "그 메모지 이리 줘."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구연우, 너 아직 그 여자 사랑하지." "쓸데없는 소리 마." "그럼 이 종이에 적힌 첫 입맞춤은 누구랑 하겠다는 건데?"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한서우, 적당히 좀 해." "우리 이미 법적으로 부부고, 한 씨와 구 씨 집안의 비즈니스도 얽혀 있어. 대체 뭘 더 의심하는 거야?" "내가 떼를 쓰는 거라고?" 내 가슴속 한구석이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럼 왜 나한테 내가 싫어하는 향수를 뿌리게 강요했어? 왜 걸음걸이부터 말투, 연기 톤까지 네 입맛대로 가르쳤는데?" "너 지금 그 여자의 껍데기를 복제하고 있었던 거잖아!" 구연우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가 실소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착각이 심하네." 그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 사람 대역이라도 되고 싶은 모양인데, 넌 그럴 자격조차 없어." 그는 다시 시동을 걸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2층 서재로 올라가 문을 쾅 닫고 걸어 잠갔다. 나는 침실로 들어와 아직 전해주지 못한 반지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침대 머리맡에는 우리가 찍은 유일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구연우가 시상식에서 상을 타던 날, 내가 억지로 프레임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남긴 사진이었다. 사진 속 그의 시선은 비스듬히 아래를 향해 있었고, 나만 바보처럼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동안은 수줍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이제 보니 그의 시선이 머물던 곳은 카메라 렌즈가 아니라, 관객석 아래 텅 비어 있던 민채아의 지정석이었다. 구연우는 물질적으로는 나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그가 선물한 것들은 대부분 경매장에서 사들인 고가의 보석들이었다. 값비싸지만 서늘한, 일종의 보상금 같은 것들. 그는 나와 함께 쇼핑을 간 적도 없었고, 내 생일을 기억한 적도 없었다. 심지어 매번 몸을 섞을 때마다 그는 방 안의 불을 전부 끄고, 짙은 어둠 속에서 내 뺨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몇 번이고 만지작거렸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어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실에서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슬그머니 나가 보니 그가 새로 준비 중인 드라마 시놉시스가 출력되고 있었다. 용지가 스르륵 넘어가다가, 이내 암호가 걸린 비밀 폴더의 요약본에서 멈췄다. 나는 내 생일을 입력해 보았다. 오류. 우리의 결혼기념일. 오류. 잠시 머뭇거리다 손가락을 떨며 민채아가 유학을 떠났던 그 날짜를 입력했다. 창이 열렸다. 그것은 그가 지난 10년 동안 남몰래 숨겨온 비밀 서랍이었다. 관객도 없이, 오직 그 혼자서만 써 내려간 지독한 독백극. [채아에게. 오늘 어떤 애가 나한테 거두어 달라고 애원하더라. 웃는 모습이 널 정말 많이 닮았어.] [채아에게. 내가 네 데뷔작 속 역할을 그 애에게 가르치고 있어. 아주 잠깐, 네가 돌아온 줄 착각했어.] 한 장 한 장이 피눈물로 가득한 연서였다. 그는 사랑을 속삭일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그 고백을 건넬 가치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내려 오늘 새벽에 등록된 글을 확인했다. [10년 만에, 그 빗속에서 마침내 첫 입맞춤을 완성했다.] [한서우에게 그 숄을 걸쳐주었더니 뒷모습이 너와 정말 비슷하더라. 하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역시 네가 아니었어.] 시야가 눈물로 흐려졌다. 테이블을 짚고 서서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채아와 꼭 닮은 이목구비. 나는 그를 위해 내 모난 부분을 깎아냈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며 연기를 배웠다. 결국 나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불량 모조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폴더의 마지막에는 그가 방금 몰래 찍은 듯한 흐릿한 뒷모습의 사진이 있었다. 내 숄을 걸치고 창가에 서서 비를 바라보는 여자의 실루엣. 사진 밑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채아에게. 오늘 내리는 비가 너와 입 맞추던 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네.]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이른 봄의 차가운 밤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구연우, 이 결혼생활을 나는 정말 더는 지속할 수 없어. 화면 속 문장들을 쳐다보고 있자니 위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라 토할 것만 같았다. 그를 위해 수수한 롱드레스만 입고, 말할 때는 턱을 약간 내리며, 연기 수업이 끝날 때마다 내 점수를 매겨달라고 애원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려는 애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자기 마음에 드는 예술품을 조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10년을 바쳐 얻은 것은 아내로서의 존엄이 아니었다. 언제든 진짜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벗겨질 가짜 껍데기일 뿐이었다. 나는 침실을 뛰쳐나와 복도 끝에 굳게 닫혀 있던 창고 방으로 향했다. 구연우가 나에게 절대 접근하지 못하게 했던 그 방. 오늘만큼은 기필코 들어가 봐야겠다 싶었다. 도구를 찾아와 단단히 잠겨 있던 문고리를 부수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문을 연 순간, 온 방 안을 가득 메운 '민채아'의 흔적들이 내 영혼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방에는 온통 여성용 의류들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스무 살 때 출국하며 입었던 드레스부터, 외국에서 수상할 때 입었던 붉은 원피스까지. 구연우는 똑같은 옷들을 구해다가 이곳에 고스란히 걸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있는 마네킹에는 아직 미완성인 웨딩드레스 한 벌이 입혀져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재단 방식의 드레스였다. 수없이 그에게 이런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때 그가 뭐라고 했더라. "서우야, 네 지금 분위기로는 이런 과감한 디자인 소화 못 해. 조금 더 기다려." 내가 소화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옷의 진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 아래쪽 상자에는 부치지 못한 편지 수십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편지들의 날짜는 신기하게도 내가 그의 곁에서 큰 고비를 넘겼던 날들과 일치했다. 내가 큰 병을 앓고 겨우 회복했던 날, 그가 그녀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애가 아파서 안색이 창백해졌는데, 네가 떠나던 날의 그 연약한 눈빛과 정말 닮았더라.]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되던 날의 편지에는, [집안 어른들의 압박이 심해서, 너랑 제일 닮은 사람을 골라 명분만 채웠어.] 내 지난 10년의 세월은 그의 손끝에서 다른 여자의 그림자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누가 여기 맘대로 들어오랬어?"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어느새 구연우가 문가에 서서 나를 험악한 표정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에 들려 있던 편지들을 거칠게 빼앗더니 나를 바깥으로 세차게 밀쳐냈다. 내 이마가 단단한 옷장 모서리에 사정없이 부딪혔고, 눈앞이 번쩍이며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구연우, 너 진짜 소름 돋는다." 나는 그 방 안의 모든 쓰레기 같은 수집품들을 가리키며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나를 평생 대용품으로 삼아놓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구연우는 내가 다친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편지지의 구겨진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한서우, 네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 그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씨 집안이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결혼해 달라고 애걸복걸한 게 누구였지?" "지난 10년 동안 네가 내 아내라는 타이틀을 달고 가로챈 작품 배역들이 몇 개인데. 그것도 내가 일일이 세어줘야 해?" 그의 잔인한 언사들에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너질 것 같은 다리로 옷장을 짚고 겨우 일어섰다. "이혼해."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결연했다. "구연우, 우리 이혼해." 늘 여유만만하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어금니를 질러 물었다. "이혼? 한서우, 정신 차려." "내일 밤이 새 드라마 제작 발표회이자 두 집안의 계약 연장일이야." "네가 지금 이혼하겠다고 깽판을 치면 내일 당장 모든 걸 잃게 돼. 너 이제 서른이야. 구 씨 집안의 후광 없이 이 바닥에서 배역이나 딸 수 있을 것 같아?" "상관없어.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한이 있어도, 네 마음속에 들어앉은 그 망령의 대역 노릇은 이제 안 해!" "그래, 어디 해봐." 구연우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 발밑으로 툭 던졌다. "지금 당장 장인어른한테 전화해. 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한 씨 집안의 마지막 동줄을 제 손으로 끊어버리겠다고 말해봐." "그분들이 참고 살라고 하실지, 네 사랑을 응원해 줄지 어디 한번 보자고." 나는 입술을 깨물며 바닥에 떨어진 전화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내 절규를 들은 아버지는 한참의 침묵 끝에 차가운 한마디만을 남겼다. - 서우야, 구 작가처럼 글 쓰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예민해서 원래 좀 그런 면이 있다. - 남자들이란 밖에서 좀 돌아다녀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야. 네 자리만 잘 지키고 있으면 돼. -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말 들어라. 툭, 끊긴 통화음이 마치 내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구연우가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 거 봐. 온 세상이 너더러 그 아내 역할을 계속 연기하라고 하잖아." "얌전하게 굴어, 서우야. 그러면 평생 그 자리는 보장해 줄 테니까." 나는 그의 가면 같은 다정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끼며 그 손을 뿌리쳤다. 비틀거리며 내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가출을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내일 밤 행사장에 안 나타나기만 해봐." "한서우, 그 뒷감당은 네가 해야 할 거야."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는 순간, 가방 구석에 들어 있던 임신 진단서가 손끝에 닿았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구연우, 너도, 그리고 이 축복받지 못한 아이도 전부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