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상은 당신 없이도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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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상은 당신 없이도 나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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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연애 3년. 한 달 내내 야근을 하며 겨우 시간을 내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홀로 꼬박 열 시간...

Chương (1)

第1章

장거리 연애 3년. 한 달 내내 야근을 하며 겨우 시간을 내어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을 때, 그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홀로 꼬박 열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그녀는 느긋하게 답장을 보내왔다. 수화기 너머로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태오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민우야, 깜짝 놀랐지! 여수 내가 먼저 한 바퀴 돌았는데 진짜 대박이더라. 윤서연이 가이드 노릇 하나는 끝내주게 하네!” 그는 서연의 휴대폰에 찍힌 서른 통의 부재중 전화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해맑게 여행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태오가 “아, 진짜 춥다” 하고 중얼거릴 때까지. 그제야 서연이 전화를 건네받아 짤막하게 말했다. “나 얘 호텔 먼저 데려다주고 갈 테니까 좀만 더 기다려.” 차가운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자, 나는 문득 물었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서연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네 친구잖아. 겨우 이런 일로 질투하는 거야?” 대놓고 타박하는 말투에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전화를 끊자마자 서울로 돌아가는 카풀 차량이 도착했다. 운전기사는 내 몰골을 힐끗 보더니 안타까운 듯 한마디 건넸다. “총각, 벌써 밤 열두 시가 넘었는데 여기 치안도 안 좋거든. 가족들이 어떻게 이런 데에 혼자 놔뒀대.” 나는 눈과 얼음에 젖어 축축해진 신발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그리고 엷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겁니다. 앞으로는 절대로요.” ........ 1 서연이 내가 사라진 걸 알아챈 것은 두 시간 뒤였다. 그녀의 벨소리는 해외에서 유행하는 팝 록이었다.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는 장르였다. 한때 내가 좋아하는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차가운 말투였다. “내가 사소한 것까지 다 오빠한테 맞춰야 해?”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서둘러 사과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친구 태오의 SNS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다. [어이없네. 세 달 전에 어떤 바보한테 추천해 준 노래인데, 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질린 걸 아직도 벨소리로 쓰고 있네.] 서연이 3분 전에 댓글을 달았다. [바보가 누구 보고 바보래?] [너 보고 바보라 그랬다!] 태오의 답글은 무척이나 빨랐다. 휴대폰은 끊임없이 진동을 울려대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서연은 도대체 심장이 몇 개 길래, 두 남자 사이를 이렇게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걸까. 전화를 받지 않자, 메신저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이 밤중에 적당히 좀 떼써. 나 진짜 피곤해.] 서연의 짜증 섞인 불평이 이어졌다. 뒤늦게 몰려오는 한기에 몸을 떨고 있을 때, 기사님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총각, 그거 몰라? 그저께 딱 그 정류장 앞에서 칼부림 사건이 있었잖아. 결국 피해자가 숨졌는데, 동네 전체가 난리도 아니야.” “그래서 오늘 거기서 호출 떴을 때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내가 부모였으면 걱정돼서 한숨도 못 잤을 거야.”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시선은 다시 액정 화면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철이 없어? 겨우 데리러 가는 게 좀 늦어졌다고 이래?] [태오는 멀리서 온 손님이잖아. 게다가 오빠 친구인데, 양보 좀 해 주면 어디가 덧나?] 휴대폰을 쥔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가슴 한구석이 칼로 도려내는 듯 아려왔다. 흐려진 눈 앞이 도리어 선명해지며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서연은 잠시 후 마지막 쐐기를 박듯 메시지를 보냈다. [됐다. 나 이제 오빠 달래는 것도 지친다. 머리 좀 식히고 연락해.] 스물여덟 개의 메시지 중 스물일곱 개 반이 나를 향한 원망과 탓이었다. 그러고는 지친단다. 파도 같은 피로가 밀려왔다. 전원을 끄고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차량은 이미 서울 내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사님은 내리면서도 따뜻한 인사를 잊지 않았다. “총각, 들어가면 얼른 신발부터 갈아 신어. 다 젖었네.” 마음속 깊은 곳이 울컥해 짧게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2 욕실에서 온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태오의 SNS가 다시 업데이트되었다. [인스타 맛집 밀크티 웨이팅 성공. 절친이 나 마시게 하려고 한 시간이나 줄 서줬는데 맛은 그냥 그렇네. 한 모금 마시고 남은 건 '그 사람' 주려고 포장함.] 사진 속 '그 사람'은 카메라를 향해 수줍게 미소 짓고 있는 서연이었다. 결벽증이 있어 나와는 같은 컵을 쓰는 것조차 꺼리던 내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가 입을 댄 음료를 스스럼없이 마신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 알았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화면의 하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회사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전에 말씀하신 그 해외 프로젝트, 제가 맡아도 될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뜻밖이라는 듯 반가워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어조가 묻어났다. “민우 씨, 드디어 결정을 내렸군. 그 프로젝트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특진이야, 특진. 겨우 1년 해외 파견인데 뭘 걱정해. 진짜 사랑이라면 1년의 공백쯤은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씁쓸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 이 일을 맡기로 결심한 순간, 내 안의 감정은 이미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 온수로 몸을 말끔히 씻고 밖으로 나오니, 태오의 SNS 게시글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있었다.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태오 그 녀석도 나름대로 켕기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서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 지금 일부러 시비 거는 거야?” “내 전화도 안 받고 답장도 안 하면서, 왜 태오 피드에 가서 행패를 부려?” 속사포처럼 쏘아붙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염려가 아니라, 태오를 보호하려는 날 선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단 한 번도 내게 보여준 적 없던 그 애틋함이 가슴을 후벼팠다. 깊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녀를 보기 위해 한 달 내내 야근하며 몸을 갈아 넣은 대가가 고작 이것이라니. “윤서연, 너는 도대체 누구 여자친구야?” 그녀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침묵하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차갑게 대답했다. “너 꼭 그렇게 매사를 옹졸하게 굴어야겠어?” “서연아, 아니면…… 내가 민우한테 직접 말할게.” 수화기 너머로 태오의 위태롭고 눈치 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아침 8시부터 지금까지 내내 같이 있었다는 뜻이다. “됐어.” “오냐오냐해주니까 자꾸 제멋대로 굴잖아.” “그래도 내 친군데……” 두 사람은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는 듯하더니, 이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어조에서 묻어나는 익숙함과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듯한 호흡. 그들의 선을 넘은 관계가 어쩌면 내 짐작보다 훨씬 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깨달았다. 방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지만, 얼어붙었던 발끝이 점점 부어올라 욱신거렸다. 간신히 목발을 짚고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동상 부위의 소독과 치료를 진행했고, 나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처방받은 약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익숙하고 싱그러운 향수 냄새. 넋을 잃고 쳐다보는 나를 향해 서연이 이례적으로 생긋 웃어 보였다. “네가 내 전화를 다 씹으니까,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잖아.” 3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었다. 입을 열어 뭐라 하려는데, 서연이 내 손에 들린 약봉투를 아무렇게나 가져갔다. “이게 뭐야?” “발이 좀 얼었어.” “아, 그래?” 그녀는 영혼 없는 대꾸와 함께 약봉투를 탁자 위에 툭 던져두었다. 왜 다쳤는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전혀 묻지 않았다. 이내 서연의 머리 아픈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수화기 저편에서 태오가 무어라 속삭였는지, 서연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리며 놀리듯 받아쳤다. “네가 오라는데 내가 감히 안 갈 수가 있나?” 내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피어올랐던 미련마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나는 절뚝거리며 탁자로 가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서연은 전화를 끊더니 뒤에서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만 삐쳐. 그날은 정말 무음이라 전화를 못 받았어. 자기가 가버린 거 알고 나 밤새도록 마음 아파 죽는 줄 알았다니까.” 비소가 새어 나왔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그녀의 밝은 미소는 도저히 슬픔에 잠겼던 사람의 표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걔가 요즘 들어 부쩍 자주 찾아와서 귀찮게 굴잖아. 얼른 떼어버리고 오빠한테 올인하려고 했던 건데……” 컵을 입에 대려던 내 손이 멈칫했다. “걔가 널 자주 찾아왔다고?” 그녀가 장난스레 웃었다. “질투하는 거야? 걱정 마. 태오 걔가 너만큼 잘생긴 것도 아닌데 내 눈에 차겠어? 나 눈 되게 높아.” “그냥 가끔 시간이 맞아서 같이 여행 다닌 것뿐이야. 오빠가 맨날 바쁘니까 그렇지.” 더는 이 주제로 말 섞기 싫은 듯, 서연은 씻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휴대폰을 품에 챙겨 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4 잠시 후, 안에서 잠옷을 가져다 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챙겨 욕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서연이 당황하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화면이 바닥으로 가도록 급히 엎어 놓았다. 그러고는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내게 생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 이내 문이 쾅 닫혔다. 하지만 나는 문앞을 떠나지 않았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다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태오의 얄궂은 웃음소리였다. [야, 왜 이렇게 꼭 바람피우는 사람처럼 눈치를 보고 그래?] 서연이 나른하게 대꾸했다. [말도 마. 네 친구 성격 알잖아. 속 좁아 터진 거.] 태오가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음흉하게 속삭였다. [아까 다 못 봤는데, 얼른 다리 좀 제대로 보여줘 봐.] 서연은 앙탈을 부리듯 쏘아붙였다. [변태 새끼!] …… 더는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서연이 욕실에서 나온 것은 한 시간 뒤였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볼과 열기에 젖어 반짝이는 눈동자가 숨길 수 없는 욕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처 불을 끄기도 전에 서연이 내게 안겨 왔다. 나는 차갑게 가슴팍을 밀어냈다. “콘돔 없어.” 서연은 멈칫하더니, 무의식중에 불쑥 말을 내뱉었다. “태오가 알려줬는데, 지금 안전기라 괜찮대.” 내 눈빛에 서늘한 혐오감이 스쳤다. “너는 생리 주기까지 걔한테 말하고 다녀?” “아니, 그게 아니라……” 서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다급히 핑계를 대려다, 내 눈빛을 읽고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한 듯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가 남도 아니고……” 서연의 목소리, 표정, 조그만 몸짓 하나까지 모두 태오의 편을 들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곳에서 이방인은 내가 아니라 나였다. 더 이상 그녀와 같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옆방 가서 자.” 서연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겨우 이것 때문에?” “내가 멀리서 오빠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손님방에서 자라고?” “넌 날 만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욕구를 채울 피사체가 필요했던 거잖아.” 서연이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차라리 지금이 깨끗하게 헤어질 수 있는 최선의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뗐지만, 채 말을 뱉기도 전에 그녀가 방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나는 조용히 침묵을 닫고, 불을 끈 채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아주 깊고 편안한 단잠을 잤다. 비몽사몽 간에 일어났을 때, 상무님으로부터 비행기 표 예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내일 정오 비행기네. 늦지 말게.] 나는 알겠노라고 답장을 보낸 뒤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당황해 급히 문을 닫으려는데, 등 뒤에서 거센 힘이 나를 스쳐 지나가며 문고리를 낚아채 확 닫아버렸다. “들어올 거면 노크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서연의 고함이 귀를 찔렀다. 내 집 화장실에서 타박을 듣는 기이한 순간이었다. “태오가 왜 여기 있어?” 서연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보고 싶어서 왔대.” 내가 이 집을 임대해서 살았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던 놈이, 서연이 올라오자마자 내가 보고 싶어졌다니. 참으로 대단한 우정이었다.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가만히 서 있자, 욕실에서 나온 태오가 멋쩍게 손을 흔들며 식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프라이팬에서 갓 꺼낸 계란 프라이를 대령했다. 한 입 베어 문 태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나 잘 아는 건 서연이 너밖에 없다. 딱 내 취향 맞춤형 반숙이네.” 서연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리고 내 몫의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너 삐치지 말라고 오빠 것도 구웠어.” 하지만 포크를 쥔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반숙 계란을 만질 줄만 알지, 절대 먹지 않는다. 6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면서도, 그녀는 이 사소한 취향 하나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서연아, 이따 밥 먹고 내가 버스 태워줄게!” 태오가 식탁 밑으로 서연의 발을 툭 건드렸다. “됐어, 너 맨날 똥 싸잖아. 같이 안 해.” “내가 왜! 나 다이아 정글러야, 다이아!” 흥분한 태오가 의자를 서연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두 사람의 허벅지가 밀착했다. 서연이 웃으며 몸을 흔들자, 얇은 티셔츠 너머로 실루엣이 가감 없이 비쳤다. 머릿속에 강한 경종이 울렸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태오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조용히 몸을 슬그머니 뒤로 물리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구토감이 명치 끝까지 밀려왔다. 탁, 소리가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오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리 이제 친구 아니라고.” 태오는 예상치 못한 직격타에 얼굴을 구기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둘이 싸웠어? 언제?” 나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사흘 전, 저 녀석이 너 보러 갈 때 나랑 같이 가겠다고 떼쓰던 걸 내가 거절했을 때부터.” 내가 자신을 밀어내자, 앙심을 품고 복수하듯 서연에게 먼저 접근했던 것이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서연은 여전히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비단 이 일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일 년간 태오는 집요할 정도로 나와 서연의 둘만의 시간을 훼방 놓았다. 내가 서연을 만나러 가려 할 때마다 태오는 아프다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며 나를 붙잡아두었고, 심지어 우리가 맞춘 커플 링과 흡사한 디자인의 반지를 사서 제 손가락에 끼고 다니기도 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 나는 최대한 조용히 그와의 관계를 정리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낯짝이 두꺼운 인간일 줄은 미처 몰랐다. 태오가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민우야. 내가 갈게.” 의자가 나동그라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연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태오의 앞을 가로막고 내게 쏘아붙였다. “태오 보낼 거면 나도 갈 줄 알아.” “그럼 너도 가.” 막힘없이 튀어나온 내 대답에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태껏 내가 그녀에게 가차 없이 가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격렬하게 싸워도 굽히고 들어가는 것은 늘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 끝없는 굴레가 넌더리가 났다. 서연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뺨을 팽팽히 굳힌 채 나를 쏘아붙였다. 태오가 콧방귀를 뀌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밖으로 이끌었다. “가자, 서연아. 지가 뭔데 우릴 이렇게 무시해? 너 자꾸 저런 소리 다 받아주니까 사람이 우스워 보이는 거야.” 결국 서연은 태오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비로소 묵직한 체증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탁으로 가 아무 미련 없이 계란 프라이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캐리어에 짐을 채웠다. 밤에 누워 눈을 감으려던 찰나, 다른 동창 친구에게서 헐레벌떡 메시지가 왔다. [야 민우야, 미친 것 같아. 나 방금 청담동에서 뭐 봤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