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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이 내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온종일 몰아치는 업무를 끝내고, 비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체온계는 39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손가락...
Chương (1)
第1章
온종일 몰아치는 업무를 끝내고, 비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웠다. 체온계는 39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저녁을 차려 먹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와중에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며 늦을 거라던 서준이 헐레벌떡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허둥지둥 구급상자에서 해열제를 찾아내더니,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툭 내뱉었다.
“다혜가 오늘 비를 맞아서 감기 몸살이 심하대. 자기가 먹기 편하게 부드러운 죽 좀 쑤어줘. 나 해열제 가져다주면서 같이 챙겨가게.”
순간, 협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 화면이 깜빡이며 요즘 SNS에서 한창 화제인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상대방이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나는 멍하니 서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글 아래 댓글을 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요. 그런데 다행인 건, 저 역시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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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등록되자마자 알림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수많은 사람이 답글을 달며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 열 때문에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오른 나를, 서준은 알아채지 못했다. 안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 한 벌을 챙겨 나오며 제 할 말만 이어갔다.
“그 녀석, 혼자서는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챙기잖아. 나 오늘 밤은 거기서 자고 올게.”
“죽 다 쑤면 문단속 잘하고, 얼른 씻고 쉬어.”
고열로 굳어버린 머리는 과부하가 걸린 낡은 컴퓨터처럼 삐걱거렸다. 그의 말을 뇌리에 새겨 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 몸이 너무 안 좋아. 필요한 게 있으면 네가 직접 해.”
숨을 내쉴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목구멍을 할퀴었다. 온몸이 펄펄 끓었지만, 어떻게든 약을 찾아 먹고 씻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 목소리에 서준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다혜도 아프고, 자기도 아프고.”
“은우야, 내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이젠 별 핑계를 다 대는구나.”
오늘 아침, 중요한 회의가 있어 부엌을 정리할 틈도 없이 바쁘게 나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무심결에 그에게 정리를 좀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식탁에 앉아 있던 서준은 나를 힐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었다.
“나 부엌일 싫어하는 거 알잖아. 요즘 나랑 할 말이 없으니까 일부러 관심 끌려고 이러는 거지?”
기가 막혀 이초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다툴 시간조차 없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무리 그가 심통이 났어도 최소한의 뒷정리는 해두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마주한 풍경은 처참했다. 싱크대에는 아침에 쓴 그릇들이 그대로 물에 불어 터진 채 쌓여 있었고, 빨래 바구니는 넘쳐나기 직전이었다. 심지어 내가 현관 한구석에 놔둔 쓰레기봉투조차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난, 그와 목소리를 높여 싸울 기력도 없었고, 구태여 따져 물을 마음조차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한은우, 왜 사람 무안하게 가만히 있어? 집에 왔으면 집안일 좀 해두면 안 돼?”
“밖을 좀 봐라. 너처럼 게으른 여자친구가 어디 있냐? 먹을 것 좀 만들어달라는 게 그렇게 죽을죄야?”
그의 날 선 원망이 가시처럼 날아와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슴이 시려 왔다.
“서준아,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나 지금 몸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서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리며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수화기 너머로 다혜의 가녀리고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 저 사고 싶은 차 골랐어요! 딜러분이 연락 주셨는데, 진짜 살 거면 내일 바로 출고할 수 있대요... 콜록콜록.”
“어, 알았어. 이제 말하지 말고 쉬어. 아픈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차 있으면 내 비서한테 말해둬, 바로 진행하라고 할 테니까.”
서준은 구급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상자를 통째로 품에 안고 현관으로 향했다.
“서준아...”
목구멍이 칼에 베인 듯 아파와 억지로 쥐어짜 낸 목소리에선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먹을 약만이라도 조금 남겨줘.”
내 애원에 서준의 발걸음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은우야, 그만 좀 해. 다혜는 지금 38도가 넘어. 약 제때 안 먹어서 문제라도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내가 아까 SNS 댓글에 추가로 적어 내린 문장은 보지 못한 채로.
[빗속을 뚫고 겨우 집에 왔을 때, 39도 고열로 쓰러져 가는 나를 외면하고 자신의 모든 다정함과 약 상자를 다른 여자에게 바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랑하니 마니 하는 마음 따위, 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어요.]
2
창밖은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주변 약국 and 편의점은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약을 살 길조차 막막해진 나는 대강 세수만 한 채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몸이 너무 고통스러워 잠조차 오지 않았다. 결국 멍한 눈으로 휴대폰을 켜 아까 달았던 댓글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쓴 글 아래로 누군가 남긴 댓글이 보였다.
[언니, 근데 왜 비 맞고 집에 갔어요? 남자친구한테 데리러 오라고 하지 그랬어요. 그것도 아니면 택시라도 타지 그랬어요.]
오늘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졌을 때, 서준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었지만 단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띡 하고 도착한 문자 메시지가 전부였다.
‘나 오늘 일이 좀 생겨서 데리러 가기 힘들 것 같아. 알아서 조심히 들어가.’
야속하게도 폭우 때문에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나는 다른 동료들처럼 쫄딱 젖은 채 공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빗속을 뚫고 와야만 했다.
내가 답글을 채 달기도 전에, 다른 네티즌이 먼저 대댓글을 남겼다.
[누굴 믿는 것보다 내 힘으로 서는 게 제일이죠. 님도 능력 키워서 본인 차 한 대 사세요. 내 차가 있어야 어디서든 기 안 죽고 당당하게 다닐 수 있어요.]
이어서 그녀는 어떤 SNS 인플루언서의 피드 캡처 사진을 올렸다.
[이분 제가 팔로우하는 일상 유튜버인데, 오늘 퇴근길에 비 맞아서 감기 걸렸더니 남자친구가 바로 차 선물해 줬대요. 비 오는 날 남의 차 부러워하지 말라면서요. 완전 스윗하죠?]
그 캡처 사진을 본 순간, 내 시린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사진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서준의 비서, 신다혜였다.
기묘한 호기심과 가슴을 짓누르는 예감에 이끌려 그녀의 SNS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다혜는 작년 입사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올린 모든 영상 속에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남자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처음에는 얼굴 없이 손만 등장했지만, 마디가 굵고 단정한 손과 낮고 매력적인 서준의 목소리는 그녀의 구독자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댓글창은 두 사람의 핑크빛 기류를 응원하는 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대표님이 우리 비서님 정말 아끼시네요! 제 친구가 대신 물어봐 달래요. 두 분 청첩장은 언제쯤 받을 수 있나요?]
다혜는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딱 두 글자를 남겼다.
[글쎄요.]
서준과의 관계를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그 가상의 연애를 즐기고 있었다.
피드를 하나씩 내려보던 내 시선이 오늘 올라온 가장 최근 영상에서 멈췄다. 낯선 거실 소파에 앉아, 뜨거운 죽을 불어가며 먹여주려는 서준의 모습이었다.
영상 속에서 다혜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공식 질문 하나 드려도 돼요? 왜 여자는 자기 차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세요?”
서준은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하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차가 있어야 당당해지니까. 내 차가 생기면 어디든 가고 싶을 때 가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살 수 있잖아. 비 오는 날 남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작년 여름,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퇴근길에 나를 태우러 온 서준에게 슬쩍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도 차 한 대 살까? 그럼 자기가 나 데리러 오느라 멀리 돌아오지 않아도 되잖아.”
그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었다.
“자기한테 차가 생기면 내가 남자친구 노릇을 어떻게 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난 자기를 데리러 가는 길이 조금도 귀찮지 않아. 평생이라도 돌아서 갈 수 있어.”
그리고 지난달, 급한 회의가 있어 회사까지 태워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훈계조로 쏘아붙였었다.
“너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아. 매일 데려다 달라 데리러 와라 하는 거 안 창피해?”
나는 아까 나에게 대댓글을 달아준 네티즌의 글에 답장을 보냈다.
[맞는 말씀이네요. 이제는 정말 제 힘으로 서야겠어요.]
3
어쩌면 그 답글을 보낸 순간, 내 마음속에서 강서준이라는 존재가 완전히 소멸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미련 없이 폰을 내려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흐릿한 의식을 깨우며 절친한 친구인 수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한은우! 너 진짜 바보야? 열이 그렇게 나는데 약도 안 먹고 나한테 연락도 안 해?”
“내가 타이밍 맞춰 전화 안 했으면 너 진짜 큰일 날 뻔했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렸지만, 그 이면에는 소중한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걱정시킨 게 미안해 사과하려 입을 열었지만, 거친 목구멍에선 낙엽 밟는 듯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미안해...”
“됐어, 목 상태도 엉망이면서 말하지 마.”
수아가 눈을 흘기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나저나 강서준은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전화를 몇 통이나 해도 안 받아? 옛날엔 네가 털끝만 아파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굴더니, 이젠 전화조차 안 되네.”
대학교 3학년 겨울, 갑작스러운 고열로 정신을 잃었을 때였다. 수아가 내 상태를 발견한 건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이었고, 혼자선 나를 업고 병원까지 갈 도리가 없어 서준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1년 중 가장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서준은 영하의 칼바람 속에서 의식을 잃은 나를 등에 업고 텅 빈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은우야, 정신 차려야 해. 조금만 참아, 거의 다 왔어. 제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그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의 눈빛에 서린 공포와 초조함은 지켜보던 의사마저 숙연하게 만들 정도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후, 의사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건넸었다.
“아가씨, 남자친구 참 잘 뒀네. 저렇게 애틋하게 아끼는 사람 만나기 쉽지 않아요. 꼭 소중히 여겨줘요.”
그 시선 끝을 따라가 보니, 옷매무새가 엉망이 된 서준이 병실 밖 차가운 대기실 의자에 웅크려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혹시 코라도 골아서 안 사람 깰까 봐, 들어가서 쉬라고 아무리 권해도 저기서 버티다가 겨우 잠들었더라고요.”
그때 그의 사랑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고 숨김이 없었다. 나는 바보같이 평생 이 남자와 함께하리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찬란했던 사랑이 불꽃놀이처럼 찰나에 불과할 줄은 미처 몰랐다. 고작 5년이라는 세월 속에 사그라질 줄은.
입원해 있는 이틀 동안, 서준에게선 단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터라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밟으며 수아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수아야, 시간 괜찮으면 나랑 차 보러 가줄래?”
수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 매일 서준이가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는데 갑자기 차는 왜?”
나는 묵묵히 입술을 깨물다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내가 펄펄 끓는 열에 방치되어 있을 때, 내 해열제를 들고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서준의 일까지 전부.
얘기를 듣던 수아는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어댔다.
“와, 그 자식이 그렇게 쓰레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양다리도 모자라 아픈 사람 약까지 뺏어다 딴 년을 줘? 진짜 죽고 싶나 봐! 헤어져, 당장 헤어져!”
이별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아팠던 탓에 정리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서준에게 이별을 고하는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나랑 차 보러 가줄 수 있지?”
나는 차뿐만 아니라 새로 머물 보금자리도 구해야 했다. 이별을 고했으니, 그의 집에서 더는 단 하루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차나 집이나 까다로운 조건은 없었기에, 결정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마음에 드는 오피스텔은 가전이 모두 갖춰져 있어 몸만 들어가면 되는 곳이었다.
계약을 마치고 수아에게 근사한 저녁을 대접한 뒤, 짐을 정리하기 위해 원래 살던 집으로 향했다. 수아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제안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거실 소파에 앉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서준과 마주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너 대체 어디 가 있었어? 왜 이틀 동안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와!”
4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직도 내가 집에 들어오고 안 들어오고에 신경을 쓴단 말인가. 막 입을 열어 대꾸하려는데, 그의 거친 다그침이 먼저 쏟아졌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은 왜 안 치우고 나갔어? 빨래통에 옷 넘쳐나는 거 안 보여? 쓰레기는 또 왜 저렇게 방치해 둔 건데? 온 집안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잖아!”
“네 집 아니라고 이렇게 막 쓰는 거야?”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그의 윽박에 손끝이 가볍게 떨려왔다. 이 집에 처음 이사 오던 날부터 가사 일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빨래, 청소, 요리는 물론이고 공과금 납부까지 전부 내가 도맡아 처리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나의 헌신을 이토록 철저히 묵살하고 나를 무능한 존재로 치부할 수 있는 걸까.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 입가에 맺힌 미소는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강서준, 내가 네 파출부야?”
“네가 나더러 같이 살자고 애원할 때 뭐라고 했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게 해주겠다고, 집안일은 전부 네가 도맡아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잖아.”
“근데 현실은 어때? 그 일들 중에 네가 단 하나라도 한 적이 있어?”
그가 음식 냄새가 싫다고 해서 요리를 시킨 적도 없었고, 일이 바쁘다 핑계 대서 청소를 도와달라 보챈 적도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 묵묵히 쓸고 닦았을 뿐이다. 내 노력을 그가 조금은 알아주리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하지만 그는 되레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다혜는 자기 집 청소도 혼자 싹 해놓고 불평 한마디 안 해. 은우 너는 왜 사소한 일 하나 가지고 이렇게 생색을 내는 거야? 툭하면 징징거리는데, 대체 어느 남자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겠냐?”
5년이란 시간 동안, 주변에서 우리 결혼 계획을 물어볼 때마다 나는 늘 서준의 입을 바라보았었다. 그의 청혼을 기다렸고, 그의 미래에 내가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는 늘 싱거운 미소로 얼버무리곤 했다.
“천천히 해야지, 아직 서두를 거 없어.”
그 무책임한 대답 하나로 늘 화제를 넘겨버리곤 했던 그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뇌리를 스치는 씁쓸한 기억에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서준아, 우리 헤어졌어. 내가 앞으로 누굴 만나 결혼하든 너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오늘 온 건 내 짐 챙기러 온 거지, 네 잔소리나 들으려 온 게 아니야.”
서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한은우, 너 진짜 미쳤어?”
“내가 어떤...”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도어록 작동 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다혜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 집인 양 문을 열고 들어서며 생긋 웃었다.
“대표님, 오늘 저 운전 연수해 주기로 하셨잖아요! 퇴근 정체 시작되기 전에 얼른 가요.”
말을 멈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짐짓 조심스러운 체하며 꼬리를 내렸다.
“어머, 은우 씨 계셨네요... 제가 방해한 건가요? 그럼 저 혼자 연습하러 갈게요...”
“잠깐만, 초보가 혼자 어딜 가. 위험하니까 같이 가자.”
서준이 다혜를 붙잡은 뒤,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한은우, 너 잘 생각해. 이 발로 나가는 순간 다시는 붙잡아 달라고 울고불고하지 마. 나도 두 번 다시 네 투정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그가 거침없이 뒤를 돌자, 다혜의 입가에 은밀한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은우 씨, 그럼 저희 먼저 가볼게요... 아 참, 냉장고에 제가 사다 둔 수박 진짜 달고 맛있으니까 꺼내 드세요.”
너무나도 당당한 어조. 마치 그녀가 이 집의 안주인이고, 나는 예고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 된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떠난 고요 속에서, 나는 묵묵히 방으로 들어가 내 흔적들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아파트 경비원이 서준을 불러 세웠다.
“강 대표님, 은우 씨가 방금 아파트 입주민 단톡방을 나가시더라고요. 앞으로 연락할 일 있으면 대표님께 직접 하라면서요. 혹시 공지사항 전달받으셔야 하니 단톡방 초대해 드릴까요?”
서준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은우가... 왜 나갔죠?”
경비원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두 분 헤어지신 거 아니에요? 이제 여기 살지도 않으시는데 굳이 단톡방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