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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 엄마를 구해줘
엄마의 처절하다 못해 비참했던 결혼 생활을 목도한 후, 나는 기적처럼 과거로 돌아가 10년 전의 젊은 엄마를 만났다. 과거의 엄마는 볼을 붉히며 설렘...
Chương (1)
第1章
엄마의 처절하다 못해 비참했던 결혼 생활을 목도한 후, 나는 기적처럼 과거로 돌아가 10년 전의 젊은 엄마를 만났다.
과거의 엄마는 볼을 붉히며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소율아, 네 아빠 비밀 임무 끝나고 나한테 멋진 결혼식 올려줬어? 우리 결혼식은 전통식이었어, 아니면 서양식이었어? 나 드디어 서울에 학군 좋은 아파트도 샀니?"
나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쓰라린 씁쓸함을 애써 삼키며, 하나씩 답해나갔다.
"결혼식 같은 건 없었어. 아파트도 사지 못했고. 아빠는…… 이미 다른 가정이 있었어."
엄마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 내가 엄마의 가슴을 쥐어짜듯 받아쳤다.
"엄마, 제발 아빠한테서 도망쳐. 그 사람 곁에 머물면 엄마는 결국 불행해질 뿐이야."
"그 사람의 진짜 아이는 내 유치원 동급생인 채은이야. 아빠는 언더커버 형사 같은 게 아니야. 서울의 거대 기업인 한성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야. 엄마를 완벽하게 속이려고 내내 가난한 척했던 거라고."
"나중에는 채은이 엄마한테 들켜서 직장도, 살던 집도 다 잃고…… 결국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스스로 세상을 등지게 돼."
엄마의 눈가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오늘 어린이날이지? 아빠가 다른 모녀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놀러 간 걸 분명 봤을 거야, 그렇지?"
"그 사람들을 따라가서 그 아줌마한테 직접 물어봐. 물어보면 다 알게 될 테니까."
……
엄마는 다섯 살의 나(꼬마 소율)를 품에 안고 채은이 엄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꼬마 소율이와 채은이가 유치원 동급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우리에게 캐릭터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자고 다정하게 권했다.
그녀는 신이 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 콘을 주문하더니, 엄마의 시선이 자신의 부푼 배에 머무는 것을 보고 소박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 남편은 유난히 저를 애지중지해서요. 임신했다고 찬 건 입에도 못 대게 하잖아요. 먹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곧 출산 예정이신가 봐요?"
"네, 아마 이번 달 말쯤요. 아들이래요."
엄마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남편분이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그럼요. 첫째도 아니고 둘째인데도 아주 난리법석이에요."
엄마가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두 분 참 다정해 보이시네요."
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설희의 얼굴에 은근한 우월감이 스쳤다.
"나쁘진 않죠. 예전에 제가 홧김에 외국으로 훌쩍 유학을 가 버렸을 때도, 그 먼 곳까지 쫓아왔었거든요."
"제 철없는 허영심 채워주겠다고 웨딩 화보만 아흔아홉 벌을 갈아입으며 촬영해 준 사람이에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엄마가 내게 입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아빠와의 '운명 같은 사랑'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서울로 대학을 온 엄마는 가난한 고학생이던 아빠와 첫눈에 반했고, 졸업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다.
엄마는 비밀 요원이라는 아빠의 특수한 직업을 배려해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혼인신고서 한 장만을 소중히 쥐었을 뿐이다. 심지어 신고서에 붙인 사진마저 아빠가 같이 찍을 시간이 없어 합성한 것이었다.
그 혼인신고 바로 다음 날, 아빠는 해외 임무를 맡았다며 출국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아빠는 집에 오지 못했고, 나를 단 한 번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았다.
엄마는 매번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거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잔혹한 진실은 엄마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예정이었다.
설희는 여전히 달콤한 투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이 저를 너무 과보호해서 탈이에요. 산후조리원도 강남에서 제일 비싼 곳으로 예약해 뒀더라고요. 아무것도 못 하게 하니까 이대로 바보가 되는 건 아닌가 싶다니까요."
유모차를 잡은 엄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엄마가 제대로 산후조리조차 하지 못한 채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평생 뼈마디가 시리는 후유증을 얻었다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일 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던 엄마였다.
이때 설희가 문득 가벼운 어조로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이 아버님은요? 어린이날인데 바빠서 같이 못 오셨나 봐요?"
엄마가 씁쓸하게 웃자, 대충 짐작이 간다는 듯 설희가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사실 남자들이란 다 비슷해요. 저번에 제가 해외에 가 있을 때, 저희 남편도 밖에서 여자를 하나 만났더라고요."
"웃기는 건, 그 여자한테 돈이라도 뜯길까 봐 내내 가난한 척 연기를 했다는 거예요. 명색이 대기업 후계자라는 사람이 길거리 떡볶이만 사 먹이고 다녔다니, 제가 다 가련할 지경이라니까요."
엄마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래요?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설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딸아이 하나를 낳았대요. 가짜 혼인신고서 하나 들려주고, 지금은 저기 구석진 변두리 어디선가 살고 있겠죠."
"솔직히 참 비참한 인생이죠. 남편이 자기가 비밀 요원이라느니 핑계를 대서 집 한 채도 제대로 못 얻어줬다던데. 대체 뭘 믿고 우리 남편을 만난 걸까요? 진짜 사랑이라도 한 건가?"
바로 그 순간, 우리 뒤편에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희야, 나 몰래 또 찬 거 먹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10년 전의 아빠가 서 있었다.
설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다정함과 약간의 핀잔이 섞여 있었다.
"의사가 차가운 건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잖아."
설희가 콧소리를 내며 그의 품에 안겼다. "딱 한 입만 먹었어. 너무 무섭게 그러지 마."
나는 슬그머니 엄마의 안색을 살폈다.
엄마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시선은 아빠의 등 뒤에 가 닿은 채 굳어 있었다.
아빠의 시선이 우연히 엄마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잔잔했다. 마치 길 가던 낯선 행인을 보는 것처럼,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엄마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따질 줄 알았지만, 엄마는 그저 다섯 살의 나를 품에 꼭 안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야 엄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내밀어 보인 휴대폰 화면에는 아빠가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
[소란 피우지 마.]
나는 엄마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었지만, 눈물은 마를 줄을 몰랐다.
"엄마, 울지 마. 그 사람은 그럴 가치도 없어."
그날 밤, 아빠는 엄마가 살고 있는 변두리 빌라로 찾아왔다. 엄마는 그의 가슴을 쥐어박고 주먹질을 하며 가슴이 찢어지도록 울부짖었다.
"왜 나를 속였어? 내가 당신한테 도대체 뭐였는데?"
"우리 딸이 그동안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외롭게 자란 걸 알기나 해?"
아빠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엄마의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 10억 들어있어. 이거 받고 설희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용히 해줘."
그동안 가난한 연기를 하느라 매달 생활비로 겨우 몇십만 원 남짓 보내던 사람이, 이제 와서 선심 쓰듯 10억을 내밀다니.
엄마는 카드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한태준, 당신이 나를 속인 10년의 세월이 고작 이 카드 한 장 값이었어?"
"그런 뜻이 아니야. 소율이 곧 학교 가잖아. 대치동에 학군 좋은 아파트 사고 싶어 했잖아."
"집은 내가 어떻게든 알아볼게. 하지만 지금은 곤란해. 설희네 집안 감시가 심해서……"
엄마는 카드를 아빠의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당장 나가. 다시는 찾아오지 마."
"이현아, 진정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내가 벌떡 일어나 아빠의 허리를 밀쳐냈다.
"당장 나가요!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말고!"
아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엄마를 매섭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쟤는 누구야? 왜 너를 엄마라고 불러?"
엄마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를 밖으로 사정없이 밀어내고 문을 걸어 잠갔다.
사위가 고요해진 뒤, 엄마는 달 한 조각 보이지 않는 탁한 밤하늘을 창 너머로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이 해외 출장이다, 특수 임무다 핑계를 대고 떠났던 그 모든 시간들이…… 전부 저 모녀와 여행을 다녔던 시간이었을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머나먼 타국에서 그가 밥은 굶지 않을까 잠은 잘 잘까 가슴 졸이는 동안, 그는 윤설희와 함께 눈 덮인 겨울 나라를 거닐며 영원을 약속하고 있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상류층 사이에서 한태준의 지극한 아내 사랑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날, 엄마는 출근하자마자 해고 통보를 받았다.
다음 달 방세와 생활비 걱정에 엄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해고라니요! 고발하겠어요!"
하지만 사장은 콧방귀를 꼈다.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한성그룹 대표님 전화 한 통이면 그쪽 앞길 막히는 건 일도 아니니, 헛수고하지 마시죠."
엄마는 쫓겨나듯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집주인이 엄마의 짐을 길바닥에 내팽개친 뒤였다.
"더 이상 계약 연장은 없으니 오늘 당장 짐 빼서 나가요."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희 이모가 알아챈 게 분명해. 빨리 속초로 내려가자."
내 등장으로 인해 미래의 비극이 더 빠르게 당겨진 것이었다. 윤설희는 겉으로는 남편의 외도에 태연한 척했지만, 실상은 지독한 질투심으로 무장해 엄마를 짓밟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의 젊은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고집스럽고 강했다. 서울에서 피땀 흘려 버텨온 5년의 세월을 이대로 허무하게 포기할 수 없다며, 간이 비즈니스호텔에 방을 잡고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력서를 넣는 족족 무참히 거절당했다.
어떤 회사의 인사담당자는 대놓고 전화를 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성그룹 후계자의 내연녀로 사는 게 편할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십니까?"
설상가상으로 윤설희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엄마를 상간녀로 낙인찍는 글을 올렸고, 남편에게 10억을 뜯어내려 한 파렴치한이라고 폭로했다. 순식간에 수만 개의 악플이 쏟아졌다.
엄마는 굴하지 않고 아빠의 기만적인 대화 내역을 올리며 맞섰지만, 그 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조리 허위사실 유포라는 명목 하에 차단당했다.
꼬마 소율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 내 품에 안겨 울었다.
"언니, 친구들이 나보고 사생아래…… 채은이 아빠를 빼앗아 갔다고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줘……"
엄마는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소율아, 엄마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몇 번의 시련을 겪고서야 엄마는 마침내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속초행 KTX에 몸을 싣기 직전, 다섯 살 소율이가 갑자기 고열로 쓰러졌다.
엄마는 기차표도 팽개친 채 아이를 들쳐업고 응급실로 달렸다.
"죄송합니다, 현재 소아과 응급 의료 인력이 부족합니다."
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요, 의사 선생님. 제 아이가 다섯 살밖에 안 됐어요. 숨을 제대로 못 쉬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의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성그룹 한태준 대표님의 첫째 따님이 가벼운 감기 증세로 입원하는 바람에, 소아과 전문의들이 전부 그쪽 특별 센터로 차출되었습니다."
엄마는 미친 사람처럼 병원을 뛰쳐나갔다.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의 온갖 병원을 수소문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쓸 만한 소아과 의사들은 전부 윤설희의 친가인 윤성재단 산하의 사립 병원으로 불려 가 있었다.
엄마는 눈앞이 하얗게 캄캄해졌다. 떨리는 손으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태준…… 우리 소율이가 죽어가…… 제발 도와줘, 제발 살려줘……"
하지만 수화기 너머 아빠의 대답은 잔인했다. 그는 윤설희에게 라이브 방송을 켜고 고개를 숙여 사과할 것, 그리고 스스로가 상간녀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야만 의사를 붙여주겠다고 했다.
엄마가 겪을 치욕의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울며 말렸지만, 엄마는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나를 돌아보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손가락질 좀 받으면 어때. 우리 소율이만 살릴 수 있다면 엄마는 다 괜찮아."
아빠는 윤설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친히 라이브 방송의 트래픽을 유입시켰고, 채팅창은 순식간에 악독한 비난으로 뒤덮였다. 실시간 검색어 1위에 [강이현 불륜 사죄]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제야 아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의사를 부르려 했다.
바로 그때, 윤설희가 배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의사들은 소율이를 내팽개치고 설희의 침대로 몰려갔다.
엄마가 다급하게 의사를 붙잡았다. "우리 아이 먼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숨이 넘어가요……"
의사는 차갑게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한 사모님이 하혈을 하십니다! 비키세요!"
엄마는 밀려나 벽에 거칠게 부딪혔다. 내가 얼른 다가가 엄마를 부축했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자신의 아픔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들의 뒤를 비틀거리며 쫓아갔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 아이 한 번만……"
그때 의사 하나가 사색이 되어 분만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대표님, 사모님 대출혈입니다! 당장 수혈해야 합니다!"
아빠가 소리를 질렀다. "당장 혈액원에서 피 구해와!"
"사모님이 특이 Rh 마이너스 희귀 혈액형이라 병원 내에 여분이 없습니다……"
엄마의 어깨가 덜컥 떨렸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내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
그 순간, 아빠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섯 살 소율이에게 꽂혔다.
"소율이…… 소율이도 Rh 마이너스였지?"
엄마는 뒷걸음질을 쳤다.
"안 돼, 우리 애는 아직 너무 어린아이에요…… 몸에 피가 얼마나 있다고, 그 작은 애 피를 뽑겠다는 거야……!"
비서가 조심스럽게 만류했다. "대표님, 다른 병원에 기증자를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립니다."
"시간이 없어!" 의사가 다급하게 재촉했다. "사모님 혈압이 계속 떨어집니다!"
수술실 안에서 들려오는 설희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경호원들이 몰려와 엄마의 팔을 무자비하게 붙잡았다.
"한태준, 네가 사람이니! 이제 겨우 다섯 살이야!" 엄마가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내가 가로막으려 하자, 경호원 하나가 내 가슴을 걷어찼다. 나는 차가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빠는 엄마의 품에서 억지로 다섯 살 소율이를 빼앗아 안았다. 엄마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다.
"한태준, 놔! 다섯 살짜리 피를 뽑으면 애가 죽는다고!"
처치실 문틈으로 간호사의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표님, 아이가 너무 어리고 쇠약해서 최대 100ml가 한계입니다. 그 이상은 위험해요."
아빠의 명령은 단호했다. "100ml로 누굴 살려? 적어도 200ml는 뽑아."
"하지만 이건 규정에 어긋납니다……"
"뽑아! 무슨 일이 생기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이윽고 처치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꼬마 소율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엄마는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에 휩싸여 주저앉았다.
"한태준, 소율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평생 너 죽여버릴 거야!"
잠시 후, 윤설희가 휠체어를 탄 채 유유히 걸어 나왔다.
"왜 그렇게 징징대? 태준 씨가 말 안 하던가? 네 딸년의 쓸모는 원래부터 내 비상 수혈용 피 주머니였다는 걸."
"사실대로 말해주지. 너 임신 7개월 때 골목에서 교통사고 난 거, 우연 아니야. 태준 씨가 설계한 거지."
"근데 나중에 네 딸 혈액형이 나랑 똑같은 희귀 혈액형이라는 걸 알고, 내 걸어 다니는 피 주머니로 쓰려고 일부러 살려둔 거야. 그러니까 네 딸이 태어난 걸 감사하게나 생각해."
나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래의 엄마는 내게 임신 당시 불의의 사고로 나를 잃을 뻔했으며, 곁에 아무도 없이 홀로 어두운 병실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말했었다. 그 모든 비극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바로 아빠였다니. 그는 애초에 내 탄생을 축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엄마는 생기를 잃은 눈으로 작은 소율이를 품에 안았다.
엄마가 텅 빈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미안해…… 엄마가 네 말을 의심해서 미안해……"
가슴이 아려와 눈물이 핑 돌았다.
"괜찮아 엄마, 아직 늦지 않았어."
소율이가 수액을 맞고 있는 동안, 윤설희는 영안실에서 싸늘한 성인과 아동의 시신 두 구를 조용히 옮겨오게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네년들의 결말이 이렇게 될 거라는 끔찍한 협박이었다.
분노로 온몸을 떨던 엄마는 그 길로 병실 구석에 불을 질러버린 뒤, 우리를 데리고 그 지옥 같은 병원을 영원히 탈출했다.
한편, 대치동 아파트 계약 서류를 들고 엄마의 서명을 받으려던 한태준은 병원 꼭대기 층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그때 비서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한태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비서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강이현 씨가 있던 특별 병실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