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 종이반지를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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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종이반지를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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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젖어 있을 때였다. 남우는 그제야 느지막이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우산 아래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180센...

Chương (1)

第1章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젖어 있을 때였다. 남우는 그제야 느지막이 나타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우산 아래에는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체구는 그 사람을 거의 완전히 덮다시피 감싸 안고 있었다. 지나치게 기울어진 우산 탓에 그의 한쪽 어깨와 몸통은 반쯤 흠뻑 젖어 들어갔지만, 남우는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굳어졌다. “미안해, 시아청. 많이 늦었지.” 우산 밑에 있던 여자애가 안절부절못하며 얼른 사과를 건넸다. “언니, 죄송해요. 제가 남우 오빠 우산에 얹혀타는 게 버릇이 돼서요. 오늘도 뻔뻔하게 데려다 달라고 졸랐지 뭐예요. 오빠 품이 워낙 넓어서 그런가, 안겨 오는데 안정감이 정말 장난 아니더라고요.” 얹혀타는 게 얼마나 반복되어야 ‘버릇’이 되는 걸까.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그들의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그늘처럼 쫓아 달릴 뿐이었다. 앞머리를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목덜미를 적셨지만, 내 머리 위로 우산이 기울어지는 일은 끝내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밤새도록 이어지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깊은 밤, 남우가 깊이 잠든 후였다. 나는 그 우산을 펼쳐 들고 사진을 한 장 찍어 그 애에게 전송했다. [그렇게 좋으면, 평생 그 품에 안겨 살지 그래.] …… 다시 침실로 들어섰을 때도 남우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허공으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리고 낮게 웅얼거렸다. “채원아, 장난치지 마……” 채원. 그 여자애의 이름이었다. 얼마 전 남우의 밑으로 새로 들어온 비서이기도 했다. 잠꼬대로까지 이름을 부를 만큼 두 사람이 깊은 관계여서는 안 됐다. 하지만 남우는 기어이 그 이름을 불렀다. 나는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베개를 품에 안은 채 조용히 건너편 손님방으로 향했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아침 다섯 시.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쾅 소리를 냈다. “최시아, 어제 비를 맞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채원이한테 대체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인 건데?” 천장의 백색등이 칼날처럼 눈을 찔러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며 쉰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어제 늦은 건 내 잘못이고 사과도 했잖아. 그런데 굳이……” “주남우.” 나는 그의 말을 뚝 끊었다. “우산을 몇 번이나 씌워줬어야 그게 버릇이 되는 건데? 그 애랑 얼마나 살을 비볐길래 잠꼬대로까지 이름을 불러?” 사납게 몰아붙이던 남우의 입이 일순간 굳어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힌 사람처럼. 무거운 침묵이 몇 초간 방 안을 채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멋쩍음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가볍게 했다. “회사 신입이잖아. 내가 사수인데 좀 챙겨줄 수도 있지. 일을 많이 시키다 보니 입에 익어서 꿈결에 한 번 튀어나온 걸 가지고, 넌 어떻게 매번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받아들이냐?” 또 익숙함 탓이란다. 사실 정말 묻고 싶었다. 연인이라는 이름표만 없을 뿐, 연인보다 더 연인 같은 두 사람만의 ‘습관’이 대체 얼마나 더 존재하는지. 하지만 결국 나는 몸을 돌려 누우며 눈을 감아버렸다. “앞으로는 꿈속에서 누굴 부르든 네 마음대로 해.” “몇 번을 부르든 상관 안 할 테니까.” “최시아!” 남우의 목소리가 한 층 더 높아졌다. 등 뒤로 꽂히는 그의 시선에는 무거운 적의가 실려 있었다. “적당히 예민하게 좀 굴어. 어머니 돌아가신 지 겨우 일 년이야. 왜 그 유난스럽고 신경질적이던 성격까지 열 손가락 깨물어 그대로 닮아가는 건데?” 그 말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완전히 낯선 사람을 보듯 그를 응시했다. 나와 주남우는 어릴 적부터 같은 골목에서 자란 소꿉친구였다. 우리 집과 그의 집은 문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미쳐버린 어머니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시신을 거두어 준 것은 남우의 가족이었다. 어머니가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 나는 사실상 그 집의 수양딸처럼 자랐다. 먹을 것, 입을 것 모든 것에 남우의 어머니는 항상 내 몫을 똑같이 챙겨주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병원에서 스스로 손목을 끊어 생을 마감했을 때도, 남우는 사위의 자격으로 장례를 듬직하게 치러주었다. 그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붉어진 눈으로 맹세했었다. 평생 내 곁을 지키며 잘해주겠노라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은 그 하찮은 맹세와 약속을 보물처럼 붙잡고 살아간다. 동거 생활 10년 동안 우리는 부부나 다름없는 모든 일을 나누었지만, 끝내 청혼 반지는 내 손에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돌아온 것은 다른 여자의 머리 위로 기울어진 우산과, 잠결에 흐느끼듯 부르던 타인의 이름뿐이었다. 그를 따라 서울로 올라올 때, 단짝 친구인 지원이가 내게 신신당부했었다. “연애가 길어지면 남자는 반드시 질리게 되어 있어. 너 딴생각 품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려라.” 나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우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어둠 속에서 다른 여자를 위해 나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남우도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미간을 짚으며 낮게 욕설을 뱉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리고 십여 분 후.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틈을 타고 익숙하고 고소한 순두부찌개와 달콤한 단팥빵 냄새가 번져왔다. 남우는 내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식탁 앞에 앉혔다. 그리고 그 서툰 손길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해,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을 터였다. ‘소꿉친구가 남친이 되면 좋은 점. 이 다정함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달콤한 문구와 함께. 하지만 지금 내 눈빛은 그저 가라앉은 물처럼 고요했다. “이것들도 다 그 애에게 사다 준 적이 있는 것들이지?” 그 ‘그 애’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명백했다. 수저를 놓던 그의 손이 공중에서 굳었다. 이내 수저를 식탁 위로 툭 내려놓는 남우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내가 설명도 했고 사과도 했잖아. 나보고 대체 어쩌라는 건데?” 그는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를 치약 짜듯 조금씩 흘려보냈다. 이 모든 파국의 원인이 오직 나에게만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나는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손바닥 안에서 짓개고 있던 머리카락 뭉치를 슬며시 식탁 위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가 막 입을 열려 하자, 내가 차분하게 말을 가로챘다. “이건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이야. 내 머리는 검은색 단발이고. 만약 이걸로도 부족하다면 현관 선반 위에 놓인 레이스 장갑, 욕실에 놓인 토끼 슬리퍼는 다 누구 거지?” “시아야……” “고채원 거 맞지? 그 애가 우리 집에 왔었지? 한두 번이 아닐 거야. 내가 새로 뜯은 화장품이 반이나 줄어들어 있고, 손님방 침대에서 이 머리카락 뭉치가 나온 걸 보면 확실해.” “그만해!” 방 안이 무거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거친 숨소리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남우의 잘생긴 미간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은근한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그래, 그것은 명백한 혐오였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바라보던 그 끔찍한 눈빛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아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눈빛은 내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 나를 괴롭혔다. 너무 아파서 어머니에게는 차마 묻지 못하고, 어린 남우에게 매달려 물었었다. 당시 그는 내 손을 꼭 쥐며, 밤하늘의 별을 담은 것 같은 맑은 눈으로 속삭였다. “시아야, 아저씨는 눈이 멀어서 아주머니가 얼마나 좋은 분인지 몰랐던 거야. 난 아저씨랑 달라.” “난 네 좋은 점 다 알아볼 수 있어. 넌 평생 내 소중한 보물이야.” 어린 날의 순수했던 맹세가 기억의 벽을 뚫고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눈앞에 직면한 현실의 시선은 날카로운 실줄처럼 나를 옥죄어왔다.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만큼 숨이 막혔다. “그 애가 우리 집에 좀 오면 어때서? 남도 아니고, 여기서 하룻밤 편하게 자고 간 게 그렇게까지 매도당할 일이야? 네가 이렇게 날을 세우고 달려들 일이나 되냐고?” “넌 매일 똑같은 서류나 만지는 말단 직원에, 친구도 없고 사교 생활도 전혀 안 하잖아. 그렇다고 나까지 너처럼 아무것도 안 하는 한심한 인간으로 썩어가길 바라는 거야?”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한심한 인간?” 남우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더욱 완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좀 봐. 맨날 의심하고 겉돌기만 하는 네가 채원이보다 나은 게 단 하나라도 있어?” “채원이는 똑똑하고 눈치도 빠르고 예의도 발라. 근데 넌 맨날 구석진 주방에서 빵이나 굽는 게 고작이잖아. 최시아, 제발 채원이 반만이라도 닮아봐라.” 그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며 자신의 불만을 배설하듯 털어놓았다. 그 얇은 입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칼날 같은 말들을 뱉어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가만히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덜 아플 것 같아서. 십여 년 전, 내 고운 손을 어루만지며 어떻게 이렇게 예쁜 디저트를 만드냐고 부드럽게 속삭이던 소년은 없었다. 결국 그 소년은 자라나 나를 한심한 인간이라 욕하며, 제 마음속에 품은 달콤한 손녀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 남의 남자를 뻔뻔하게 탐내는 법을 배울까? 아니면 기어이 주인의 자리를 빼앗아 우산을 차지하고 진짜 주인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법을 배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의 집에 안방 주인인 양 기어들어 와 머리카락 흔적을 남겨놓는 법을 배울까? 아니, 나는 사양하겠다.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직전, 내게 나지막이 경고했었다. “시아야, 세상은 넓어. 나처럼 남자 하나에 미쳐서 바보같이 살지 마라.” 피와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의 유언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채원이가 그렇게 좋으면, 그 애랑 잘해봐.” “우리, 헤어지자.” 남우의 얼굴에 스친 첫 반응은 분노가 아닌 당혹감이었다. 마치 주인이 아무리 멀리 던져도 군말 없이 돌아오던 사냥개가 갑자기 뒤를 돌아서 가버리는 것을 본 듯한, 날것 그대로의 황당함이었다.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일부러 튕기는 거야? 안타깝지만 이런 시답잖은 수작, 나한테는 안 통해.” 그는 겉옷을 걸치고 소매 끝동을 정리한 뒤, 곁눈질로 나를 싸늘하게 훑어내렸다. “시아야, 채원이는 보통 집안 애가 아니야.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좀 예의 바르게 행동해. 어른답게 굴어야지, 언제까지 어린아이처럼 투정만 부릴래?”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내가 왜 내 남자의 곁을 맴돌며 여지를 남기는 불청객에게 예의를 갖추고 공손해야 하는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그는 내가 마침내 한풀 꺾였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에 바이어 접대 있으니까 기다리지 마.” 언제 돌아올지, 혹은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통보였다. 누구와의 약속인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 오늘 나갈 거야……” 내 마지막 한마디는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힘없이 묻혀버렸다. 나는 닫힌 문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그 문이 내 온몸을 내리쳐 뼈마디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나이가 들어 마음이 약해진 걸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비로소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식탁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정성스레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단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채원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연달아 도착한 사진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아기자기한 토끼, 조그만 말, 거북이, 그리고 앙증맞은 헬로키티 모양의 설탕 공예 디저트들이었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언니, 남우 오빠 손재주 진짜 예술이죠? 바쁜 회사 일 다 제쳐두고 저희 집까지 와서 이 고양이 만들어줬어요. 언니가 그동안 오빠 길을 아주 잘 들여놓으셨나 봐요!] [앞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뒷사람이 그늘을 누린다는 말이 딱 맞네요. 언니가 그동안 쏟은 정성, 제가 잊지 않고 잘 이어받을게요. 나중에 우리 공식 발표할 때 전 여친인 언니한테 꼭 감사 인사 올릴게요!] 노골적인 조롱과 도발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독한 말들이 맴돌았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결국 단 한 통의 답장도 보내지 못한 채, 손만 벌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시아야, 이 토끼 인형 너 닮지 않았어? 눈물 많은 게 딱 우리 토끼네.” “시아야, 이 고양이 너무 귀엽다. 너처럼 말이야.” “시아야, 너 말띠잖아. 내년에 네 생일 선물로 나무 말 하나 조각해 줄까?” 과거 나를 기쁘게 해주겠다며 조각도를 쥐고 씨름하다 손가락 열 개가 모두 빨갛게 부어올랐던 어린 날의 주남우. 결과적으로 그는 그때 다져진 솜씨를 고스란히 다른 여자에게 바치고 있었다. 나에게는 돈을 써서 산 순두부와 단팥빵을 던져주고, 뒤돌아서는 그 여자애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고귀한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고채원을 공손하게 대하라고 윽박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뼛속 깊이 빠져버린 것이리라. 우리가 처음 연인으로 맺어졌을 때도 그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이토록 배려하라고 당부한 적이 없었다. 식탁 틈새를 꽉 쥐고 있던 손톱이 툭 부러져 나갔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지러운 거실의 조명이 흔들리는 가운데, 나는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직 의사를 밝혔다. 지점장은 무척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사직이라니요? 결혼 준비라도 하시는 겁니까?” 회사 사람들은 모두 내가 남자친구와 오랜 시간 장거리 연애를 해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헤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수긍했다. “마음 정리되면 언제든 다시 연락해요. 늘 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남우의 말대로, 일개 경리 사무원의 자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다. 인수인계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서류 한 장으로 모든 정리가 끝났다. 하지만 남우는 잊고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쉽고 야근도 없는 단조로운 사무직을 자처했었는지. 그 옛날, 그가 배를 움켜쥐고 방바닥을 구르며 통증을 호소했을 때가 있었다. “시아야, 속이 너무 쓰려. 위가 찢어질 것 같아……” 그 떨리는 목소리 하나 때문에 나는 커리어를 포기하고 정시 퇴근이 보장되는 일자리를 택했었다. 그래야 남우가 집에 돌아왔을 때 따뜻한 국을 끓여 대접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 그의 위장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대신 내게 ‘한심한 인간’이라는 낙인을 남겼다. 캐리어를 현관으로 끌고 나오다 지퍼가 툭 풀리며 안의 내용물이 발등 위로 쏟아져 내렸다. 후두둑 떨어진 물건들을 확인한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콘돔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하나를 주워들어 포장지에 적힌 문구를 나직이 읽어내렸다. “상큼한 딸기 향, 멈출 수 없는 달콤함.”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촬영해 남우에게 전송했다. [그 애가 그렇게 널 미치게 해? 내 눈앞에서 이런 식으로 티를 내야 할 만큼?] 수신 확인이 되었음에도 저편에서는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정확히 8초 동안의 정적이었다.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가 화면을 덮었다. [이리로 와. 설명할 테니까.] 나는 그 피임 기구를 움켜쥔 채 가속 페달을 밟아 메시지에 찍힌 위치로 향했다. 야외 바비큐 장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고기를 굽고 있었다. 고채원은 남우의 친구들 사이에 마치 안방마님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고, 되려 멀찍이 서 있는 내가 불청객처럼 보였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이리 와.” 남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게 손짓했다. 그 눈빛에 담긴 귀찮음과 성가심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채원이 움직였다. 입가에 살가운 미소를 띤 채 다가온 그녀는 내 손목을 낚아채듯 잡고 바비큐 그릴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음성은 뱀처럼 독했다. “언니 아버지가 언니 어머니 칼에 맞아 돌아가셨다면서요? 어머니도 결국 정신병원에서 자살하셨고. 그럼 언니는 정신병자의 딸이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남우 오빠가 나랑 침대에서 다 말해준 거예요. 오빠가 그러는데……” 짝! 그녀의 비열한 폭로는 내 손바닥이 뺨에 부딪히는 마찰음과 함께 멈췄다. 세차게 휘두른 것은 나였지만, 통증에 온몸을 떨고 있는 것 역시 나였다. 주남우! 내가 슬픔에 잠길 때마다 내 눈을 가려주며 다 잊으라고 속삭이던 네가, 어떻게 내 평생의 피고름 같은 아픔을 침대 머리맡의 시시콜콜한 음담패설로 팔아넘길 수가 있어? 정신을 차린 고채원이 얼굴을 붉히며 나를 세차게 밀쳐냈다. 나는 중심을 잃고 뒤로 크게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뜨겁게 달아오른 바비큐 그릴과 쇠 지지대가 소리를 지르며 내 위로 엎어졌다. 타오르는 숯불과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판이 사정없이 내 맨살을 덮쳤다. 지독한 고통이 살점 위에서 화약처럼 터져 나갔다. 악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평생 나를 지켜주겠다던 주남우의 시선은 내게 닿지 않았다. 그는 붉게 부어오른 뺨을 감싸 쥐고 눈물을 흘리는 고채원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 애를 품에 안은 남우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 들어갔다. “아파? 괜찮아?” 채원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빠, 난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언니가 갑자기 뺨을 때리길래 나도 모르게 방어하느라……” 남우는 채원을 제 품 안으로 더욱 깊숙이 끌어당기며, 고개를 돌려 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최시아, 너 대체 언제까지 미쳐 날뛸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다치게 해놓고 네가 책임질 수 있어?” 나는 나를 향한 그의 눈빛 속에서 싸늘한 적의만을 읽어냈다. 그리고 붉게 물집이 잡혀 들어가는 내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를 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고통으로 허옇게 질려버린 내 안색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제가 소중히 여기는 채원이 뺨 한 대 맞은 사실만이 그의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그릴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긴 여자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주남우.” “저 애가 방금 나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아?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그게 사실이잖아!” 그는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내 말을 사정없이 끊어버렸다. 주변의 웅성거림 속에서, 내 귀에는 오직 이명만이 울려 퍼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따져 묻고 싶었고, 그의 뺨을 똑같이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젖어 드는 옷자락을 꽉 쥐고 눈물을 집어삼키며 비틀비틀 뒤돌아서는 것뿐이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휴대전화로 나를 촬영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웃음 섞인 낄낄거림도 들려왔다. 여린 울음소리를 흘리는 고채원의 울음은 내게는 승전고처럼 들렸다. 남우는 그녀를 달래면서도 멀어져가는 내 등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시아야, 오늘 밤 안으로 정중히 사과해. 안 그러면 정말로 내 옆자리가 바뀔 줄 알아!” 나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끝내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주남우, 우리 정말 끝이야.” 바람이 데인 상처를 스칠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육체의 고통은 그가 내 가슴에 내리친 칼날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용히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아주 오래되어 모서리가 다 닳아버린 종이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상처가 아파서가 아니었다. 나를 사랑해주겠다던 마지막 한 사람마저 마침내 나를 떠나갔다는 사실이 슬퍼서였다. 마치 예전의 아빠처럼, 그리고 엄마처럼. 병원에 들러 화상 입은 상처를 치료하고 비행기 좌석에 앉을 때까지, 내 휴대전화는 고요하기만 했다. 단 한 통의 위로나 안부도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아프지 않냐는 다정한 물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싸늘한 활자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먼저 고채원한테 사과해. 그 후에 다른 일들은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침내 화면이 까맣게 꺼져 내 얼굴이 비칠 때까지. 퉁퉁 부은 붉은 눈과 하얗게 질린 입술이 비쳐 보였다. 나는 주저 없이 유심칩을 뽑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비행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