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건드린 치명적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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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건드린 치명적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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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진이 결재판을 책상 위로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번 달부터 총무팀 내 모든 비정규 수당, 전면 폐지합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열댓 명...

Chương (1)

第1章

1 조윤진이 결재판을 책상 위로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번 달부터 총무팀 내 모든 비정규 수당, 전면 폐지합니다." 회의실에 앉아 있던 열댓 명의 팀원 중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나는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펜을 쥔 손을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이다. 조윤진은 지난달 총무팀장으로 새로 발령받은 인물이었다. 본사에서 낙하산으로 꽂혔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부임하자마자 군기를 단단히 잡을 작정인 듯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칼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서도연." 그녀가 인사 기록부를 넘기다 내 이름을 부르며 노골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매달 받아 가던 그 100만 원짜리 번역 수당, 이번 달부터 지급 중단입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조 팀장님, 그 수당은 3년 전 강 대표님께서 직접 결재하신 건입니다. 제가 사내 모든 불어 서류 번역과 해외 바이어 의전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알아요." 그녀가 내 말을 날카롭게 잘랐다. "하지만 서도연 씨의 공식 직함은 총무팀 주임입니다. 번역은 당신의 업무 분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요. 지난 6년 동안 당신에게 번역 업무를 지시하는 공식적인 업무 지시서가 발부된 적, 단 한 번도 없었죠. 내 말이 틀립니까?" 나는 대답했다. "공식적인 지시서는 없었지만, 불어와 관련된 모든 실무는 줄곧 제가……." "그럼 된 거네요."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공식적인 지시서가 없다면 그건 정식 업무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직원이 자발적으로 야근하며 한 일에 회사가 추가 비용을 지불할 의무는 없어요. 이건 회사의 원칙입니다. 서도연 씨 개인을 향한 감정은 없으니 오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 과장이 나를 힐끗 보며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박 과장이 복도에서 나를 뒤따라왔다. "도연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저 여자 새로 와서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거야." "파악 다 한 겁니다." 나는 품에 서류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출근 첫날부터 제 인사 기록부를 전부 열람했어요. 제가 6년 동안 번역 일을 도맡아 온 걸 모를 리가 없죠. 그냥 기선 제압이 필요한 거고, 제가 가장 만만한 본보기가 된 것뿐입니다." 박 과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앞으로 불어 번역 건은 어쩌려고……." "팀장님 입으로 직접 정식 업무가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앞으로 안 하면 됩니다." 박 과장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자 이메일 보관함에 세 통의 불어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 프랑스 측에서 보내온 계약 조항 확인서였다. 예전 같았으면 오후 내로 번역을 끝내고 프로젝트 팀에 자연스럽게 넘겨주었을 업무였다. 나는 세 통의 메일을 모두 '읽음' 처리하고 창을 닫아버렸다. 정식 업무가 아니라면, 하지 않는다. 오후 4시, 프로젝트 팀의 이민지 대리가 내 자리로 달려왔다. "도연 선배, 프랑스 쪽에서 온 메일 확인하셨어요? 저희 팀 지금 번역본 기다리고 있거든요." "봤어." "그럼 번역은……." "조 팀장님한테 공식 업무 지시서 결재받아 와. 그럼 해줄게." 이 대리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 예전에는 그냥 선배가 바로바로……." "예전은 예전이지." 나는 그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조 팀장님이 그러셨어. 지시서 없는 일은 정식 업무가 아니라고. 나 일개 총무팀 주임이야. 주제넘게 월권행위 할 수는 없잖아." 이 대리는 내 자리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뒤돌아갔다. 저녁 7시, 퇴근 준비를 하느라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박 과장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달 말에 프랑스 최대 고객사인 소피 부사장이 온대. 3박 4일 비즈니스 시찰인데, 전 일정 불어 동행 통역이 필요하다네.] 나는 화면을 3초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저 총무팀 주임일 뿐인데. 프랑스 바이어가 온다는 소식은 다음 날 회사 전체에 쫙 퍼졌다. 소피. 프랑스 MBT 건설 그룹의 부사장. 태성건설의 가장 큰 해외 협력 프로젝트를 쥐고 있는 인물. 계약 규모만 자그마치 1,500억 원. 그녀는 매년 한 번씩 한국으로 시찰을 왔고, 그때마다 내가 전담 통역과 의전을 맡았다. 지난 6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서도연 씨, 잠깐 내 방으로 오세요." 조윤진이 팀장실 문가에 서서 나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가 문을 닫았다. "이달 말에 소피 부사장님 오시는 건 알고 있죠?" "들었습니다." "통역이랑 의전, 서도연 씨가 계속 맡으세요."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 팀장님, 지난주에 제 공식 업무가 아니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는데요."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특수한 상황이니까 예외를 두자는 겁니다. 이번엔 그룹의 가장 중요한 VIP가……." "그럼 번역 수당은 다시 복구되는 건가요?" 그녀가 말을 멈칫했다. "회사 규정을 뜯어고친 지 얼마나 됐다고 당신 한 명 때문에 예외를 만듭니까? 이번 건은 야근으로 처리할 테니 나중에 대체 휴무로 쉬어요." "대체 휴무." 나는 그 네 글자를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6년. 수천 건의 서류 번역, 수십 차례의 해외 바이어 의전, 스무 번이 넘는 비즈니스 협상 동시통역. 그 대가가 고작 대체 휴무 하루. "조 팀장님, 전문 통역 에이전시를 쓰시기를 권합니다." "무슨 뜻이죠?" "제 불어 실력이 미천하여, 자칫 회사에 큰 누를 끼칠까 염려되어서요." 조윤진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서도연,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나랑 기싸움하자는 겁니까?" "감히 그럴 리가요. 저는 일개 총무팀 주임이고, 통역은 제 업무 분장에 없습니다. 팀장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그녀는 나를 5초 동안 노려보았다. "나가 봐요." 팀장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자마자 박 과장이 슬쩍 다가왔다. "팀장이 뭐래?" "이달 말에 계속 통역 맡으랍니다."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박 과장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너 미쳤어?! 소피 부사장이야. 1,500억짜리 프로젝트라고!" "1조 5천억짜리라도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통역은 제 일이 아니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럼 저 여자는 어쩌려고 저래?" "통역 에이전시 알아본답니다." 박 과장은 잠시 침묵했다. "외부 에이전시 애들, 건축 공학 분야 전문 불어 통역 제대로 못 하는 거 너도 뻔히 알잖아." "압니다." "그런데도……." "팀장님이 제 수당을 돌려주지 않을 거란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이 일은, 이제 저와 무관합니다." 그날 오후, 조윤진의 팀장실로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그녀가 전화기에 대고 소리치는 소리가 문밖까지 흘러나왔다. "적합한 사람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건축 공학 전문 불어 통역사가 이 서울 바닥에 한 명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비용은 문제가 안…… 네? 3일에 1,500만 원이요? 강도질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뭐라고요? 아무리 빨라도 다음 주 수요일에나 일정을 맞출 수 있다고요? 소피 부사장님 당장 다음 주 월요일 입국입니다!" 수화기가 거칠게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손에 든 부서 비품 청구서를 조용히 정리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조윤진이 통역사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는 소식은 이내 강 대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사흘 뒤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대회의실로 호출이 떨어졌다. 상석에는 강 대표가, 그 옆에는 조윤진이 앉아 있었고, 프로젝트 팀, 영업 팀, 대외협력 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스물일곱 여덟쯤 되어 보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 슈트로 빼입은 남자였다. 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소피 부사장 입국이 당장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통역과 의전 문제는 오늘 내로 반드시 결론지어야 해요. 조 팀장, 현재 상황이 어떤지 보고하세요." 조윤진이 헛기침을 했다. "대표님, 제가 세 곳의 대형 통역 에이전시와 접촉해 보았으나, 건축 공학 쪽 불어 통역 인력이 워낙 희소한 데다 비용이 과도하게 높고 일정마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옆에 앉은 남자를 힐끗 보았다. "훨씬 더 나은 인재를 찾았습니다. 권지훈 씨. 프랑스 리옹 상경대 석사 출신으로 현지에서 3년간 유학 및 근무 경험이 있습니다. 불어 구사 능력이 매우 뛰어나며, 지난달 저희 총무팀에 새로 입사했습니다." 권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롭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프랑스에서 3년간 생활하며 일상적인 불어 소통은 완벽하게 마스터했습니다. 이전에도 비즈니스 통역 경험이 있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강 대표가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건축 공학 쪽 전문 용어도 숙지하고 있습니까?" 권지훈이 잠시 멈칫했다. "그 부분은…… 제가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면 됩니다." 강 대표의 시선이 조윤진을 향했다. "이전에는 서도연 주임이 전담하지 않았었나? 6년이나 이 일을 해왔고, 프랑스 측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일 텐데." 조윤진이 다급히 대답했다. "대표님, 서도연 씨의 본 직무는 총무팀 사원이며 번역은 그의 업무가 아닙니다. 이전의 업무 분장이 비정상적이었던 터라 제가 부임한 후 바로잡은 것입니다. 게다가 권지훈 씨는 정통 유학파 출신으로, 전문성 면에서 서도연 씨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강 대표가 나를 보았다. "서도연 씨, 본인 생각은 어때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님, 조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번역은 제 업무 분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난 6년간 번역을 했던 건 회사의 필요에 의해 거절하지 않고 도왔을 뿐입니다. 이제 조 팀장님께서 새로운 인력을 배치하셨고, 권지훈 씨가 프랑스에 3년이나 체류하셨다니 분명 저보다 훨씬 전문적일 거라 믿습니다." 조윤진의 입가에 찰나의 득의양양한 미소가 스쳤다. 강 대표는 미간을 좁혔지만, 더 이상 길게 묻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권지훈 씨가 준비하도록 하세요. 서도연 씨는 권지훈 씨를 도와서 그동안의 번역 자료들을 정리해 넘겨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권지훈이 복도에서 나를 가로막았다. "서 주임님, 예전 불어 번역 자료들,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넘겨주셨으면 합니다. 미리 숙지해야 하니까요." 어투는 정중했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두 눈에는 미묘한 우월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오후에 넘겨드리죠." 그가 픽 웃었다. "서 주임님,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 제가 주임님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조 팀장님께서 주임님이 총무 일에 번역까지 하느라 너무 고생하신다고 배려 차원에서 저한테 분담시키신 거니까요."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DALF C2 자격증 있으십니까?" 그가 멈칫했다. "네?" "프랑스어 능력 자격시험 최고 등급 말입니다. 취득하셨습니까?" "저는 상경대 출신이라 그런 거 안 따도……." "그럼 통번역대학원 졸업장이나 ITT 전문 통역 자격증은요?" "저는 비즈니스 실무 통역이라 굳이 그런 게……." "소피 부사장님이 이번 시찰에서 논의할 핵심 안건은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Prestressed concrete)를 활용한 조립식 건축 기술의 공동 연구 개발 협약'입니다. 구조 공학, 재료 역학, 시공 공법에 관한 방대한 전문 용어들이 쏟아질 거란 얘기죠."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권지훈 씨, 'précontraint'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준비 단단히 하십시오." 나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자리로 돌아오자 박 과장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너 왜 굳이 그 녀석을 도와줘? 그냥 실전에서 알아서 망신당하게 놔두지." "도와준 거 아닙니다." "그럼 방금 그 용어들은 왜 알려준……." "그 녀석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겁니다." 박 과장은 잠시 멍해 있다가 이내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나는 서랍을 열어 두꺼운 파일철을 꺼냈다. 6년 동안 쌓아온 모든 번역 기록, 용어집, 회의록이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오후에 나는 그 파일의 복사본을 권지훈에게 넘겼다. 원본은, 다시 내 서랍 깊숙한 곳에 자물쇠를 채워 넣었다. 자료를 받아 든 권지훈은 오후 내내 자리에 앉아 서류를 파고들었다. 곁눈질로 본 그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창백해졌다. 6년의 세월이 응축된 건축 공학 불어 용어. 자주 쓰이는 빈출 어휘만 세어봐도 300개가 넘었다. 심지어 모든 용어 뒤에는 어떤 문맥에서 써야 하는지, 소피 부사장의 개인적인 어투와 뉘앙스까지 꼼꼼히 주석으로 달려 있었다. 이건 그저 단어장을 달달 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권지훈은 눈 밑이 퀭해진 채 출근했다. 그는 내 자리를 지나칠 때 잠시 걸음을 늦췄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조윤진이 권지훈을 팀장실로 불렀다. 문이 꽉 닫히지 않아 틈새로 대화가 새어 나왔다. "준비는 어떻게 돼가요?" "팀장님, 이 전문 용어들이 너무 방대해서 제가 도저히……." "프랑스에서 3년이나 있었다면서요!" "하지만 제가 전공한 건 경영학이지, 이런 건축 공학 쪽이……." "그럼 처음에 나한테 불어 완벽하다고 큰소리칠 땐 왜 그 말 쏙 뺐어요?!" 권지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며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10분 후 팀장실 문이 열렸다. 권지훈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걸어 나와, 자리로 돌아가 다시 그 서류 더미를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박 과장이 내게 조용히 귀띔을 해주었다. "조윤진이 오늘 아침에 다른 에이전시 두 군데를 더 찔러봤대. 한 곳은 3일에 2천만 원을 불렀고, 다른 한 곳은 건축 공학 쪽 불어 통역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손사래를 쳤다더라." "2천만 원 승인 났답니까?" "아니. 강 대표님이 한도 500만 원으로 못 박아서 그 이상은 찍소리도 못 해." "그럼 답이 없네요." "그리고 또 하나." 박 과장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조윤진이 오늘 강 대표님한테 보고할 땐 권지훈이 준비 완벽하게 마쳤으니 통역에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장담했대." 반찬을 집던 내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권지훈이 못 버틸 거라는 걸 조 팀장도 알 텐데요." "당연히 알지! 근데 널 쳐내자마자 대타를 못 구했다고 어떻게 실토해? 자기 얼굴에 침 뱉기인데." "그래서 1,500억짜리 프로젝트를 담보로 도박을 하겠다는 거군요." 박 과장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오후가 되자 프로젝트 팀의 장 소장님이 나를 찾아왔다. 장 소장님은 현장 실무의 총책임자이자 프랑스 측과의 협력 세부 사항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 주임, 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권지훈 저 녀석 불어 실력으로는 소피 부사장 절대 감당 못 해."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어떻게 좀……." "소장님. 조 팀장님이 권지훈 씨를 책임자로 앉혔는데, 일개 총무팀 사원인 제가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닙니다." 장 소장님이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지금 누구 체면 세워주고 말고 할 때가 아니잖아! 소피 부사장이 이번에 오면 2차 프로젝트 기술 이전 조항을 매듭지어야 해. 기술 첨부 문서만 불어 원문으로 80페이지가 넘어! 저 녀석한테 저걸 번역하라고 맡길 셈이야?!" "조 팀장님께 말씀해 보시죠." "말했어! 권지훈이 알아서 완벽하게 할 거라잖아!" "그럼 완벽하게 하겠죠." 장 소장님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툭 내뱉었다. "서도연. 자네, 정말 변했군." "제가 변한 게 아닙니다. 제 업무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어준 분이 계실 뿐이죠." 장 소장님이 돌아간 후, 나는 다시 엑셀 창을 띄워 비품 청구서를 정리했다. 나는 지난 6년간 회사의 모든 통역을 전담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한 적이 없고, 단 한 번의 오역도 내지 않았으며, 단 1원의 야근 수당조차 청구한 적이 없다. 나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은 매달 100만 원의 번역 수당뿐이었다. 이제 그것마저 사라졌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각자의 능력대로 살아남는 수밖에.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서랍장 깊은 곳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네 장의 자격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랑스어 능력 시험 DALF C2, 최고 득점. 프랑스 파리 3대학 통번역대학원(ESIT) 수료증.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불과 수석 졸업. 국제회의통역사협회(AIIC) 정회원 인증서. 국내에서 AIIC 인증을 받은 불어 동시통역사는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뚜껑을 닫고 상자를 다시 서랍에 넣었다. 회사 내 그 누구도 내가 이 자격증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지난 6년 동안, 아무도 내게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금요일. 소피 부사장의 입국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권지훈의 상태는 눈 뜨고 보기 처참할 지경이었다. 그의 책상은 온갖 서류들로 난장판이었고, 수첩에는 손으로 빼곡히 적어 내려간 용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완전히 틀려먹었다. 그는 전문 용어를 한국어 뜻과 일대일로 매칭시켜 무식하게 달달 외우고만 있을 뿐, 그 용어들이 가진 건축 공학적 논리와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통역은 단어 시험이 아니다. 특히 기술 통역은, 그 개념의 본질을 완벽히 꿰뚫고 있어야만 대화의 흐름 속에서 정확한 언어로 치환해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조금만 다르게 돌려 말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버리게 된다. 오전 중 권지훈이 내게 다가왔다. "서 주임님, 바쁘지 않으시면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여기, 'béton fibré à ultra-hautes performances'라는 단어요. 주임님이 주신 자료에는 '초고성능 섬유보강 콘크리트'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사전에는 '고성능 섬유 보강 시멘트 복합체'라고 나오거든요. 어느 게 맞는 건가요?" "둘 다 맞습니다." "그럼 실전에서는 뭘 써야 하죠?" "문맥에 따라 다릅니다. 자재의 물성을 논할 때는 후자를 쓰고, 시공 계획을 논할 때는 전자를 씁니다. 그리고 소피 부사장님은 이걸 줄여서 'BFUP'라고 부르는 걸 선호합니다. 만약 부사장님이 약자를 쓴다면 망설이지 말고 '초고성능 섬유보강 콘크리트'로 바로 통역하시면 됩니다." 그는 허겁지겁 수첩에 그 말을 받아 적었다. "그리고 이것도……." "권지훈 씨."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 당신이 외워야 할 건 단순한 용어 나부랭이가 아닙니다. 소피 부사장의 화법 자체를 파악해야 해요. 그녀는 말이 엄청나게 빠르고, 불어 은어를 즐겨 쓰며, 살벌한 계약 조항을 논의하는 와중에도 불쑥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입니다. 그 리듬을 못 따라가면 회의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을 겁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럼…… 어떡해야 하죠?" "당장 조 팀장님을 찾아가서 본인의 역량 부족을 솔직하게 보고하는 게 최선일 겁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그가 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보았다.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이번 일 망치면 올해 인사 고과는 최하 등급으로 깔아버리겠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지훈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힘없이 돌아갔다. 오후 3시, 사무실의 고요를 깨는 사건이 터졌다. 프랑스 측에서 이번 시찰 일정의 공식 레터를 보내왔다. 100% 불어로 작성된 4장짜리 문서였다. 조윤진은 당연하다는 듯 그 레터를 권지훈에게 넘겼다. 한 시간 뒤, 권지훈이 번역본을 제출했다. 그리고 30분 뒤, 조윤진이 그를 팀장실로 불렀다. 문은 굳게 닫혔지만, 책상을 쾅 치며 윽박지르는 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clause de résiliation'을 '해상도 조항'이라고 번역해?! 이건 계약 해지 조항이잖아!" "죄,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사전을 잘못……." "'garantie décennale' 이건 뭐야? 10년 무상 수리? 이건 10년 책임 담보라는 법적 개념이라고! 이런 기초적인 법률 용어도 하나 제대로 구분 못 해?!" 권지훈은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팀장실을 빠져나왔다. 내 자리를 지나치던 그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서 주임님, 혹시 그 레터 원문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프랑스 비서실에서 공용 메일로도 보냈으니까요." "그럼…… 제가 오역할 거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프랑스 측이 보낸 그 레터는 표준 법률 불어입니다. 일상적인 비즈니스 불어와는 차원이 다른 체계죠. 리옹 상경대에서는 안 가르치는 영역입니다." 그의 주먹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일부러 그러셨군요. 제가 망가지는 걸 보려고 고의로 입을 닫고……." "권지훈 씨. 한 가지만 명심하십시오."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통번역의 세계에 꼼수나 지름길 따윈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3년을 구르든 30년을 살았든, 그게 당신이 전문 통역사가 될 수 있다는 자격 증명은 못 됩니다. 그저 불어 몇 마디 지껄일 줄 안다고 덤빌 바닥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짓이기며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이내 비참하게 돌아섰다. 옆에서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박 과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연아. 너 방금 좀 너무 매몰찬 거 아니냐?" "매몰찬 게 아닙니다. 저 친구가 지금 무슨 공포를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접니다. 6년 전, 처음 소피 부사장님 통역을 맡기 전날 밤, 저도 너무 떨려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까요." "근데 왜……."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저는 실전에 투입되기 전 4년 동안, 통번역사가 딸 수 있는 모든 자격증을 미친 듯이 따냈다는 겁니다." 박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저녁 8시,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서도연 주임님, 안녕하십니까. 소피 부사장님 수행비서 루카스입니다. 부사장님께서 이번 한국 방문에서 서 주임님을 다시 뵙게 되어 무척 기대된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주임님이 예약해 주셨던 북촌 한정식집이 너무 훌륭했다며, 이번에도 마지막 날 저녁 식사를 그곳에서 할 수 있는지 여쭤보십니다.] 나는 그 문자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지난 6년간, 소피 부사장이 방한할 때면 항상 마지막 날 밤엔 내가 직접 그 오래된 전통 한정식집으로 그녀를 모셨다. 그녀는 아직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문자를 삭제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토요일, 권지훈은 자진해서 주말 출근을 했다. 부서 단체 채팅방에 '혹시 기술 첨부 문서의 전문 용어 정리를 도와주실 분 계신가요?'라며 간절한 메시지를 올린 걸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팀은 불어를 몰랐고, 대외협력 팀은 영어밖에 할 줄 몰랐으며, 총무팀 내에서 그 불어 서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권지훈, 단 두 명뿐이었다. 나는 주말 내내 집에서 청소하고, 요리하고, 읽다 만 책을 읽으며 보냈다. 휴대폰은 딱 세 번 울렸다. 첫 번째는 박 과장. 조윤진이 토요일 출근까지 해서 사무실을 뒤집어엎고 권지훈을 30분 넘게 쥐잡듯이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두 번째는 장 소장. "진짜 눈 딱 감고 한 번만 다시 도와줄 생각 없나?" 하는 하소연이었다. 세 번째는 다시 그 낯선 번호, 루카스였다. [서도연 주임님, 소피 부사장님의 일정이 앞당겨졌습니다. 내일(일요일) 저녁에 미리 입국하실 예정입니다. 회사 측에 픽업 차량 배차가 완료되었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이 문자는 나에게만 온 게 아니라 회사 공용 메일로도 똑같이 전송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나에게 개인적으로 문자를 하나 더 보냈다. [소피 부사장님께서 공항에 사람 너무 많이 나올 필요 없으니, 서 주임님 혼자 마중 나와 주시면 충분하다고 전하셨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일요일 오전, 조윤진이 부서 전체에 긴급 공지를 띄웠다. [오늘 저녁 7시, MBT 그룹 소피 부사장님 인천국제공항 입국 예정. 권지훈 씨는 정장 착용 후 공항으로 마중 나갈 것. 회사 공식 불어 환영 서한 반드시 지참할 것.] 그리고 그 밑에 짧은 문장 하나가 덧붙여져 있었다. [서도연 씨는 참석할 필요 없음.] 박 과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도연아, 조윤진 저 여자 아주 작정을 했어. 널 어떻게든 안 보여주려고 기를 쓰네." "마음대로 하라죠." "근데 소피 부사장이 공항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으면 분위기 싸해지는 거 아니야?" "싸해지겠죠." "그럼 어떡해?" "제가 어디 있냐고 묻겠죠." 박 과장이 3초간 침묵했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조 팀장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발악하겠죠." 저녁 8시 반. 집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을 때,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단톡방이 터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