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대신 총알받이가 되어주는 그저 임시 여자친구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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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대신 총알받이가 되어주는 그저 임시 여자친구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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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할 전세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진통제 값마저 아꼈다. 온갖 병을 참아내며 키웠다가 한꺼번에 해결할 요량으로, 5일 동안 무려 다섯 번의 수술을 연...

Chương (1)

第1章

결혼할 전세 자금을 모으기 위해 진통제 값마저 아꼈다. 온갖 병을 참아내며 키웠다가 한꺼번에 해결할 요량으로, 5일 동안 무려 다섯 번의 수술을 연달아 받았다. 그 덕에 병원에서는 독한 환자라며 전설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바로 그날, 나와 똑같이 찢어지게 가난한 줄만 알았던 남자친구가 VIP 병동에서 누군가와 심각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은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재벌가 자제들은 꼭 신데렐라 놀이에 목을 매더라. 우진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대체 그 여자애한테 언제 사실대로 말할 건데?” 남자친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솔직히 우진이만 그랬지, 난 달라. 내가 중간에 끼어든 건 우진이가 다시 그 애한테 흔들릴까 봐, 그래서 소희가 상처받을까 봐 그런 것뿐이야.”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임우진은 나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별을 고했던 전 남자친구였다. 당시 나는 분수도 모르고 부자를 넘본 속물이라며 온갖 모욕을 당했고, 그의 어머니가 내 머리 위로 쏟아부은 레드와인 한 잔과 함께 가차 없이 버려졌었다. 그 상처를 겪은 후, 내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평범한 사람을 만나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 그런데 결국, 또다시 누군가의 잔인한 유희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 온몸의 감각이 무너지며 고통이 밀려왔다. 수술 후 가까스로 가라앉았던 통증들이 일제히 살아나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처음 등 뒤에 흑색종이 발견되었을 때, 의사는 악성으로 변할 위험이 있으니 하루빨리 수술로 절제해야 한다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만 더 버텨보자며 미뤘다. 마침 요즘 위장도 좋지 않았으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한꺼번에 입원해서 해결할 요량이었다.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저 미련한 요행을 바랐을 뿐이다. 우리 같은 들풀들은 아무 데나 던져두어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병을 모았다가 한 번에 치료하면 입원비를 아낄 수 있었고, 처방받는 진통제 값도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다섯 번의 수술을 한 번에 받게 된 것이다. 내 무모한 요구에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만류했었다. “마취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수술을 연달아 하면 몸이 너무 상해요. 안전이야 어떻게 확보한다 쳐도, 엄청나게 아플 텐데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럼에도 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의 나는 구서준의 승진을 축하해 줄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그는 성과급을 받게 되었다며, 앞으로 월급이 10만 원 더 나올 거라고 자랑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정말 헛웃음만 나온다.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했을까. 나는 바보같이 감동하며 우리가 꿈꾸던 평범한 미래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5년의 연애 동안, 나는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달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가 걱정할까 봐, 그가 지방 출장을 간다고 했던 기간을 골라 몰래 수술을 예약했었다. 그런데 이런 추악한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가슴속에서 억울함과 분노가 불길처럼 솟구쳤다. 그들은 왜 이토록 쉽게 남의 마음을 짓밟는 걸까. 평범하게 사랑할 권리마저 빼앗아 가면서. ‘분수도 모르는 속물녀.’ ‘돈 보고 접근한 꽃뱀.’ 그 지긋지긋한 비난들이 다시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처음 우진과 만났을 때, 내게도 아주 작은 기대는 있었다. 겨우 열여덟 살,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돈 많고 다정한 동기 앞에서, 나는 내가 청춘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양 천진난만한 환상을 품었었다. 내가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면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졸업 즈음, 그가 가족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데려간 모임 자리에서 나는 그의 어머니가 끼얹은 레드와인으로 온몸이 젖어야 했다. 그리고 몇 장의 만 원짜리 지폐가 내 뺨을 스쳤다. “너희 같은 애들 몸값은 대충 이 정도면 되지?” 우진은 그저 방관한 채 서 있었고, 그날 이후 나와 연락을 끊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 침묵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거절이었다. 낙인찍힌 채 조롱당하던 내게 우산처럼 나타난 것이 서준이었다. 그는 내 어깨에 자신의 겉옷을 덮어주며 사람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었다. “돈 몇 푼 있다고 사람 마음 가지고 놀아도 되는 겁니까?” 그때의 따뜻함이 떠올라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일반 병동으로 걸어왔다. 간호사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병실로 부축했다. “조기 퇴원은 절대 안 돼요. 내일 상태를 보고 경과가 좋으면 그때 보내줄 테니까 누워 계세요.” 나는 마리오네트처럼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지난 5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밤이 되자 서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여기 날씨 되게 좋다. 뭐 사 갈까? 맛있는 거 있으면 포장해 갈게.] 답장을 하지 않았다. 서준은 늘 다정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라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퇴근 후에 나를 위해 찌개를 끓여주고, 마트의 야채 가격을 하나하나 꿰고 있었으며, 뜯어진 내 옷가지를 서툴게 꿰매주기도 했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어떤 간장이 더 맛있는지 다투기도 했다. 우리는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거짓말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못했다.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평범한 연인이라고 믿었으니까. 나는 그를 내 가족에게 소개했고, 우리 부모님은 그를 친아들처럼 아끼고 보듬어주셨다. 내 삶의 유일한 동반자로 그를 마음에 들여놓았다. 그렇기에 내 집 마련을 위해 그토록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것이다. 우리 같은 서민도 평범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환상은 버린 지 오래였고, 그저 발을 땅에 딛고 단단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한참 동안 답장이 없자 서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망설임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다은아, 여기가 본가랑 좀 가깝거든. 본가에 며칠 내려갔다가 올라갈게.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대충 대꾸를 하고 전화를 끊은 뒤 그의 SNS를 열었다.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부모님과 함께 찍은 소박한 사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부모 역시 그가 고용한 대역 배우들이었음을. 그 피드마저 오직 나만을 속이기 위해 정성껏 꾸며진 무대였음을. 눈가가 시려왔다. 연애 3년 차에 우리는 서로의 부모님을 뵙기로 했었다. 당시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내 부모님 역시 격식을 차리기 위해 일까지 하루 쉬고, 정성껏 고른 선물들을 바리바리 준비하셨다. 그때 서준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번거롭게 안 하셔도 되는데. 그냥 몸만 오시지 그랬어요.” 그때는 그저 배려인 줄 알았는데, 참 우스운 일이다. 진짜 부모가 아니었으니 격식을 차릴 필요도, 선물을 받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 가족의 진심 어린 정성이 그에게는 얼마나 우스운 연극으로 보였을까. 어쩌면 결혼식 당일에도 가짜 혼인신고서로 나를 속였을지 모른다. 그의 소꿉친구 기소희가 우진과 행복하게 결합할 때까지, 우진이 나를 찾아오지 못하게 막아두는 충직한 사냥개 노릇을 하면서. 참 대단한 희생정신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미련 없이 퇴원 수속을 밟았다. 오직 일만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거래처로 외근을 가던 길에 우연히 우진을 마주쳤다. 몇 년 만에 만난 그는 낯설기만 했다. 과거의 원망도 희미해져 그저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처럼 느껴졌다. 그를 피해 돌아가려 했지만, 우진이 내 앞을 막아섰다. “너, 구서준이랑 안 어울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낀 걸까, 아니면 심심풀이로 착한 사람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걸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 내 손목을 부러질 듯 움켜잡고 뒤로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고 복도 테이블 모서리에 허리를 세게 부딪히고 나서야 눈앞의 남자가 서준임을 깨달았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우진을 노려보았다. “내 여자친구한테서 떨어져.” 손목이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서준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사나운 짐승처럼 우진만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건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진이 내게 다시 흔들려 소희의 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가 내 곁에 머문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니까. 서준은 나를 억지로 이끌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낮게 읊조렸다. “저 사람은 네가 감히 넘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제발 주제를 좀……” 순간 끊어져 있던 이성이 차갑게 돌아왔다. 나는 그의 손을 세차게 내치고 뒤돌아 달렸다. 누구도 내게 분수를 훈계할 자격은 없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 관심이 없다. 서준에게도, 우진에게도. 그날 저녁, 서준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멍든 허리에 약을 바르는 모습을 보더니 그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미안해, 낮에는 내가 너무 흥분했어. 네가 다칠까 봐 걱정돼서 그랬어.” 이제는 변명에 대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서준의 시선을 피하며 닿지 않는 허리 뒤쪽에 손을 뻗었다. 서준의 눈빛에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고, 그가 내게서 약병을 건네받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말없이 겉옷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소희는 자신의 SNS에 우는 이모티콘 하나를 올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회사에서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평화롭던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내 등을 찔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리 승진을 약속했던 부장이 굳은 얼굴로 서류 봉투를 건넸다.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부장은 시선을 피하며 해고 예고 수당을 얹어주었다. 그리고 넌지시 덧붙였다. “다은 씨, 혹시 위선에서 눈 밖에 날 만한 사람이랑 엮인 적 있어? 법인 주주 쪽에서 압박이 들어왔어. 미안하네.” 대충 짐작은 가면서도 믿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내가 이 직장을 잡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흙수저가 서울에 자리를 잡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지 말이다. 가슴을 찌르는 씁쓸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집에 돌아오니 서준이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붉은 고추가 잔뜩 들어간 매운 갈비찜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용서를 구하는 신호였다. 그는 매운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하면서, 내가 화가 풀릴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함께 먹어주곤 했다. 과거에는 그 모습이 눈물겹도록 고마워 어떤 서운함도 눈 녹듯 사라지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성이 기괴하고 오싹하게 다가왔다. 내 인생을 망쳐놓고 짓는 그 자상한 미소가 끔찍했다. “서준아, 우리 헤어지자.” 주방에서 서성이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집게를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회사 일 때문에 속상해서 그래? 괜찮아. 그 사람들 화가 좀 풀리면 내가 어떻게든 알아볼게.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더 좋은 데 들어가면 돼. 그쪽 사람들이랑만 안 엮이면 아무 문제 없어.” 봐라. 나는 이유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처참하게 바스러졌다. 그들의 눈에 우리 같은 존재는 바람 한 자락에 날아갈 종이 인형에 불과하겠지.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흘린 피땀 눈물 따위는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소희는 아무 노력 없이도 모든 사람의 비호를 받으며 살아가는데, 왜 내 소박한 삶은 이토록 짓밟혀야 하는 걸까. 눈물이 차올라 시야가 흐려졌다.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소희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나만을 위해 움직여주는 내 보디가드, 언제나 고마워.] 그 게시물에 하트를 누른 계정 중 낯익은 프로필 사진이 보였다. 서준이었다. 5년을 함께 살 부대끼며 살아왔으니 그의 부계정을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가 교묘하게 숨겨둔 사생활 속에는 그의 진짜 부모가 찍혀 있었다. 한국 재계 순위에 이름을 올린 대기업 회장 부부. 그 자식인 구서준. 그는 출장을 간 게 아니라, 소희의 화려한 요트 파티에 참석해 잔을 부딪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구직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스물일곱이라는 애매한 나이와 갑작스러운 권고사직 이력 때문인지 면접을 보는 곳마다 차갑게 거절당했다. 온몸의 진이 빠져 고향 집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무렵,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다은아, 밥은 잘 먹고 다니지? 요즘 회사 일은 힘들지 않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 외할머니를 간병하느라 웬만해서는 전화를 먼저 걸지 않는 사람이다. 불길한 예감이 궤도를 따라 흘러들었다. 다그치듯 캐묻자 엄마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실토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니던 중견 기업 지사에서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하셨다는 것. 한 달에 수백만 원씩 고정적으로 들어오던 수입이 끊겼고, 그 충격으로 쓰러지신 외할머니는 급하게 중환자실로 이송되셨다고 했다. 엄마는 내 결혼 자금에 손이 갈까 봐 끝까지 숨기려 하셨던 것이다. “엄마가 미안해, 다은아. 너 서준이랑 식장 알아보고 있을 텐데…… 돈은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결국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급한 병원비라도 송금하기 위해 은행 앱을 켰지만, 청천벽력처럼 계좌가 정지되어 있었다. 머릿속에 서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분노로 몸이 떨렸다. 나는 위치 공유 앱을 켜고 그가 있는 프라이빗 바의 주소로 단숨에 달려갔다. 밀폐된 룸의 문을 열기 직전, 두꺼운 원목 문틈 사이로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준아, 너 진짜 독하다. 그 여자애 해고시킨 것도 모자라 부모 일자리까지 다 날려버리냐? 이제 기가 죽어서 우진이 형 앞에는 얼씬도 못 하겠네.” “근데 서준이 진짜 대단하긴 해. 우진이 형은 적당히 놀다 치우려고 했는데, 넌 신분까지 속이고 5년 동안 가난뱅이 연기를 한 거잖아. 소희 지키려고 그렇게까지 하냐?” 심장에 깊숙이 대못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사지가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우리 부모님은 그를 사위가 아닌 친아들로 여기며 겨울이면 따뜻한 내복을 지어 보내고, 봄이면 김치를 담가 보내셨다. 그 모든 정성이 저들의 술안주 거리로 전락해 비웃음을 사고 있었다. 방 안의 조롱 섞인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5년 전, 대학 졸업식 날 밤에 느꼈던 그 모멸감이 온몸의 핏줄을 타고 다시 흘렀다. 그 충격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던 어리석은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직 서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잠시 후, 묵묵히 듣고 있던 우진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그만해라. 다은이 나 만날 때 돈 바란 적 없어. 내가 매달려서 시작한 연애야.” 우진이 서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너도 적당히 해. 내 일에 그만 간섭해. 소희랑 나 알아서 잘 살 테니까 너나 잘하라고. 적어도 선은 지켜야 사람이지.” 서준이 우진과 눈을 맞추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 적의가 서렸다. “왜, 아직도 미련 남았냐? 경고하는데 다은이 건드리지 마. 걔 지금 내 여자야.” 순식간에 룸 안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다른 친구들은 숨을 죽인 채 눈치만 살폈다. 당장이라도 주먹다짐이 일어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눈치를 보던 친구들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일어섰다. “우리 먼저 가볼게.” 그들이 문을 열어젖히다 문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듯 멈춰 섰다. 나는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얼어붙은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