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생아는 내 상속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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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생아는 내 상속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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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뒤덮인 설산 자락, 심설아가 내 약지에 프로포즈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자마자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젯밤에, 나 네 친구랑 잤...

Chương (1)

第1章

하얀 눈이 뒤덮인 설산 자락, 심설아가 내 약지에 프로포즈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주자마자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어젯밤에, 나 네 친구랑 잤어."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멍하니 그녀의 입술이 부지런히 달싹이는 모양을 바라만 보았다. "우리 묵었던 그 트윈룸 있잖아. 네 옆 침대에서." "너 깰까 봐 걔가 이 악물고 신음을 참는데, 그게 그렇게 자극적이더라." "매트리스가 흔들릴 때마다 네 눈치 보면서 내 허리를 부서질 듯 안고 흔들어 대는데…… 극도로 억누르면서도 결국 이성을 잃어버린 그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나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말았어." 나는 굳어버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려 나왔다. "설아야, 오늘 우리 프로포즈하는 날이잖아. 이런 악질적인 장난은 치지 마." 하지만 설아는 눈꺼풀을 내리깔며 저만치 서 있는 임하준 쪽으로 턱끝을 살짝 까딱였다. 담담한 어조였다. "장난 아니야. 못 믿겠으면 저기 뒤돌아서 직접 봐." 목뼈가 삐걱거리는 것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향해 부케를 흔들어 보이는 하준이가 보였다. 그의 셔츠 깃은 풀어헤쳐져 있었고, 목덜미와 쇄골에는 붉게 달아오른 손톱자국과 키스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설아는 내 창백해진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더니,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걔 만날 때마다 너한테 죄책감 느끼면서 거짓말하고 싶지 않아." "시우야, 혹시 후회된다면 지금이라도 반지 빼.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 사방에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 그녀의 온기로 따뜻해졌던 몸이 순식간에 빙판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메스꺼운 위산이 울컥 치밀었다. "왜 하필 오늘 이야기하는 거야?" 말라붙은 목구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비집고 나왔다.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가 뼈를 파고드는 것처럼 아팠다. 설아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 하준이가 차 뒤에서 혼자 울면서 담배 피우고 있더라. 눈이 시뻘개져서." "내가 너한테 프로포즈할 때 사람들이 다 환호하는데, 걔만 저 구석에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어." "시우야, 나 걔가 우리 사이에서 더는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 그녀의 말투에 가득 묻어나는 애틋한 배려가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내 귓가에 숨을 몰아쉬며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그녀였다. 내가 평생 결혼하고 싶은 유일한 남자라며 매달리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귀찮다는 얼굴로, 내가 목숨처럼 아끼던 내 형제 같은 친구와 몸을 섞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쪽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하준이가 담배를 비벼 끄며 다가왔다. "시우야, 무슨 일 있어?"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설아는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준의 손목을 잡아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하준아, 연기하지 마. 시우한테 다 말했어." 하준의 온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며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설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극도의 당혹감 때문에 목소리마저 거칠게 갈라졌다. "심설아, 너 미쳤어?! 우리 이 일은 평생 가슴에 묻어두기로 약속했잖아!" "오늘 시우 프로포즈하는 날인데 너 미쳤다고 이걸 말해!"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시우야…… 미안해…… 내가 어젯밤에 진짜 술김에 눈이 뒤집혀서 그랬어. 너랑 설아 사이를 망치려던 마음은 추호도 없었어…… 정말이야……." 그의 얼굴에 서린 죄책감과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내 심장이 찌르는 듯 아파왔다. 왜 하필 그였을까. 고등학교 시절, 옆 학교 양아치들에게 골목길에 갇혀 린치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하준이는 망설임 없이 소주병을 깨부수며 내 앞을 가로막았고, 나 대신 벽돌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보름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내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친척들을 다 찾아다녀도 항암치료비를 구하지 못해 절망하고 있을 때였다. 하준이는 군말 없이 제 가게를 차리려고 모아둔 창업 자금을 통째로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시우야, 네 뒤엔 내가 있으니까 절대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마.’ 그런데 내 목숨을 빚진 그 소중한 친구가,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한 침대에서 살을 섞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술김에 그랬다고? 눈이 뒤집혀서?" 나는 눈이 핏발이 선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럼 내가 영원히 모르기만 했다면, 너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내 곁에서 계속 붙어먹었을 거란 소리네?" 하준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미안하다…… 시우야, 전부 내 잘못이야……." 그가 내 손을 붙잡으려 다가왔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밀쳐냈다. "내 몸바닥에 손대지 마!" 그 모습을 본 설아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녀는 나를 세차게 밀쳐내더니, 마치 하준이를 지키려는 듯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강시우, 너 왜 이렇게 히스테릭하게 굴어!" 그녀는 나를 쏘아보았다. 마치 내가 이 모든 사달을 일으킨 천하의 죽일 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동안 하준이가 너한테 뼈가 부서지도록 헌신하고 인생까지 다 바친 거나 다름없는데, 너는 겨우 이 실수 하나를 넓은 아량으로 눈감아주지 못해?" 그녀의 밀침에 비틀대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남자를 온몸으로 감싸고 도는 그녀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허탈함과 황당함을 느꼈다. 10년의 뜨거웠던 우정, 7년의 애틋했던 사랑이. 이 한순간에 셈조차 할 수 없는 지저분한 빚잔치로 전락해 버렸다. 입술을 달싹여 보았지만, 단 한 마디의 원망조차 나오지 않았다. 위장에서부터 메스꺼움이 끊임없이 밀려왔고, 뼈마디가 저려오는 지독한 추위만이 온몸을 감쌌다. "넓은 아량?" 나는 자조 섞인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두 사람한테 축의금이라도 두둑이 쥐여주면서 백년해로하라고 큰절이라도 올려야 하니?" 설아는 하준의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이내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시우야, 우리 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잖아. 사랑이랑 결혼은 별개라는 거, 너도 받아들여야 해." "머리 식히고 잘 생각해 봐. 네가 진정되면 다음 달 약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니까. 어차피 내 법적인 남편은 너 하나뿐이야." 말을 마친 그녀는 하준이를 부축해 SUV 차량에 태웠다. 쿵 하고 무겁게 문이 닫히고 엔진음이 굉음을 내며 멀어지자, 하얀 눈바람이 내 얼굴 위로 거칠게 휘몰아쳤다. 휴대폰 화면에 뜬 '서비스 불가능 지역'이라는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실소와 함께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기기 시작했다. 거센 눈보라가 목덜미를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허벅지 아래로는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가슴속을 후벼 파는 이 지독한 통증만큼은 갈수록 뚜렷해졌다. 이런 폭설이 내리던 날, 우리 셋은 함께 걸은 적이 있었다. 대학 시절, 내가 급성 위천공으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였다. 두 사람은 꼬박 며칠 밤을 내 병상 곁을 지키느라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퇴원하던 날, 눈이 쌓여 빙판이 된 길 위에서 두 사람은 내 양팔을 단단히 붙잡고 조심스레 발을 맞추어 걸었다. 하준이는 하얀 김을 뿜으며 장난스레 웃었다. ‘시우 형, 오늘부터 나랑 형수님이 형 좌우 호위무사니까, 하늘이 무너져도 형은 걱정 마!’ 그때 그들은 서로 나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따뜻한 진심에 감동해, 나는 설아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하곤 했었다. "하준이가 참 의리 있고 착한데, 은근히 덜렁대잖아. 너가 나 대신 많이 좀 챙겨줘."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 '챙겨준다'는 다정한 배려가, 결국 침대 위에서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짓거리로 변질될 줄은. 10킬로미터가 넘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나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 하나로 기어가듯 걸어 펜션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카운터에 있던 펜션 사장님이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머, 손님! 왜 이 추운 날에 혼자 걸어왔어요? 얼굴이 완전히 얼었네!" 나는 대답 대신 카운터 옆에 붙어 있는 사진 장식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여사장님은 내 시선 끝에 닿은 사진을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아, 저 예쁜 커플 보고 계셨구나? 나도 매번 볼 때마다 참 부럽다니까요." "남자분도 훤칠하고 여자분도 인형처럼 예쁜데, 겨울마다 우리 펜션에 눈 보러 오거든요. 금슬이 아주 깨가 쏟아져요." 나는 벽에 핀으로 고정된 누렇게 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사진 속에서 하준이는 뒤에서 설아의 허리를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볼을 꼭 맞댄 채, 서로 장난을 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 모퉁이에는 수성펜으로 정갈하게 날짜가 적혀 있었다. 2년 전, 12월 24일. 그날은 내 어머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홀로 병원 대기실에서 화장 동의서에 서명하던 날이었다. 지독하게 추운 밤이었고, 나는 온기가 가시지 않은 어머니의 유골함을 품에 안은 채 차가운 병원 복도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 밤, 너무 무섭고 외로워 설아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거친 숨소리와 이내 다급하게 끊기던 수신음이 떠올랐다. 뒤이어 그녀는 중요한 프로젝트 회의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문자를 보냈었다. 절박한 마음에 하준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거래처 접대 때문에 술자리에 묶여 있어 갈 수 없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미안해했었다. 바빠서 곁에 있어 줄 수 없었던 게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곁에 있어야 할 소중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깊은 겨울 산속 펜션은, 나를 속이고 두 사람이 은밀한 정사를 나누던 그들만의 아지트였다. 어쩐지 이번 여행을 준비할 때, 두 사람이 숙소 예약이며 코스 짜는 일을 귀신같이 막힘없이 해낸다 싶었다. 오직 나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설레며 이 프로포즈 여행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시큼한 통증이 콧등을 시리게 찔러왔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떠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휴대폰을 켜서 내일 아침 가장 빠른 서울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나와 하준이가 함께 쓰던 방으로 돌아오자, 트윈룸 공기 중에는 여전히 어렴풋하고 눅눅한 정사의 냄새가 잔여물처럼 남아 있었다. 속이 다시 뒤집히는 것을 참아내며, 나는 캐리어를 열어젖히고 기계적으로 내 옷가지들을 쑤셔 넣었다. 시선은 원치 않아도 옆 침대로 향했다.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 위에는 물이 번진 듯한 얼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헛웃음과 함께 깊은 자조감이 밀려왔다. 오늘 아침, 하준이는 허리를 주무르며 이 펜션은 다 좋은데 매트리스가 너무 딱딱해서 허리가 부서질 것 같다고 칭얼댔었다. 나는 바보같이 웃으며 요령 피우지 말고 운동이나 하라며, 더 좋은 호텔을 잡지 못한 내 탓을 하곤 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간밤에 두 사람이 밤새도록 격렬하게 뒤엉켰던 흔적이었을 뿐이다. 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그 영롱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인연이니, 더는 미련을 둘 이유가 없었다. 사장님께 방을 하나 따로 달라고 요청하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렸다. 설아와 하준이가 차례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펼쳐진 캐리어와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본 설아의 미간이 단숨에 찌푸려졌다. "강시우, 짐은 왜 싸는 거야? 아직도 삐쳐서 투정 부리는 거야?" "너 산중턱에 내버려 두고 온 건 내가 미안해. 하지만 나중에 걱정돼서 차 돌려서 데리러 갔었잖아. 네가 먼저 고집 부리고 걸어가 버린 거잖아."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목소리를 한결 부드럽게 낮췄다.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내가 너한테 반지를 줬다는 것 자체가 내 마음속에서 네 자리가 가장 크고 확실하다는 뜻이잖아." "내려가자. 다들 아래층 대기실에서 너 기다리며 술 마시고 있어. 나랑 하준이도 너 때문에 가슴을 졸였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내밀어 오는 손길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옆 침대의 그 지저분한 흔적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했다. "나를 걱정했다고? 이 침대 위에서 뒹굴면서 걱정한 거야, 아니면 아래층 사진 벽 앞에서 끌어안고 웃으면서 걱정한 거야?" 설아의 내밀어진 손이 공중에서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하준이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입술이 눈에 띄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우야…… 너, 너 설마 다 본 거야……?"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붉어진 눈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시우야. 내가 정말 죽을죄를 지었어. 내 아랫도리 하나 단속하지 못해서 네 여자를 건드렸어." "하지만 시우야, 나 정말 설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어. 나도 어떻게든 마음을 접고 떠나보려고 미친 듯이 노력해 봤는데…… 그게 안 됐어…… 정말이야……." 설아는 옆에서 눈물을 흘리는 하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를 향해 차가운 독설을 내뱉었다. "강시우, 너 진짜 양심도 없니?" "하준이도 피해자야. 그동안 우리 눈치 보느라 혼자 음지에서 마음 썩어가며 얼마나 고통받았는데. 넌 7년 동안 내 곁에서 온갖 사랑과 대접은 다 받고 살았으면서, 겨우 이 상처 하나 안아주지 못해?" 나는 주먹바닥을 꽉 쥐었다. 뼈마디가 하얗게 튀어나왔고, 속에서 피눈물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억누르고 있던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둑을 무너뜨리며 폭발했다. "심설아, 너는 그냥 꼬리 치며 앵겨 붙는 수컷이면 개든 돼지든 다 안아주고 싶은 성도착증 환자라도 되는 거니?" "우리 어머니 장례식 날, 너희 둘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도 결국 이 짓거리를 하느라 그랬던 거였지?" "남의 어머니 상가 집에서 그렇게 발정이 나서 물고 빨고 싶었니?" 설아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이성을 잃은 듯 비틀린 실소를 터뜨렸다. "어, 맞아! 우린 그런 날 것의 자극이 미치도록 좋아! 네 엄마 죽은 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장례식장 지하 화장실 거울 앞에서 걔가 날 안아 올렸을 때 그 짜릿함이 어땠는지 알아? 이 펜션 테라스에서 눈 맞으며 박힐 때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알아?" "하준이가 나한테 선사해 준 그 압도적인 만족감과 오르가슴은, 하반신 병신이나 다름없는 성불구자 새끼인 너는 평생 죽어도 나한테 줄 수 없는 거야!" 방 안이 얼어붙은 듯 적막해졌다. 내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는 어머니 유골함의 서늘한 감촉과, 그날 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내 뇌리를 잔인하게 짓밟았다. 숨을 쉴 때마다 허파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고통이 한계치를 넘어서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하준이는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설아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설아라…… 제발 그만해…… 그런 말은……." 설아는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하준의 손을 잡고 문가로 걸어갔다. "조금 있다가 아래층에서 게임 판 시작할 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어." 문턱에 멈춰 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준이가 울면서 너 좀 데려오라고 애걸복걸해서 억지로 온 거야. 내려올 마음이 있으면 내려오고, 말 거면 관둬." 쿵! 거칠게 닫힌 문틈으로 문틀에 쌓여 있던 얇은 먼지가 힘없이 흩날렸다. 나는 힘이 완전히 풀린 채, 두 사람의 흔적이 끈적하게 남아 있는 침대 머리맡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오열했다. 머릿속에는 어머니를 땅에 묻던 날, 화장터의 차가운 눈발과 쓸쓸히 흩날리던 국화꽃 잎만이 환영처럼 맴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은 이미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감각이 마비된 다리를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가운 물로 눈물을 씻어내고, 남은 짐들을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비행기 표는 내일 아침이었지만, 단 1분 1초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아래층에는 우리와 얽힌 대학 동창들과 지인들이 수두룩했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완벽한 종지부를 찍는 편이 나았다. 아래층 대기실은 불을 밝힌 채, 천장이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와 야유로 소란스러웠다. "설아 누나! 대박! 걸렸으니까 무조건 진실 게임이야!" "솔직하게 말해봐요. 올해 들어 가장 기뻤던 일이 뭐예요?" 나는 2층 계단 난간 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발걸음을 멈췄다.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잦아들며, 모두가 설아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렸다. 잠시 후, 설아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드는 소리와 함께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지난달에 임신했어. 하준이 아이야." 대기실 안의 모든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심장이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듯 경련을 일으켰다. 몇 년 전, 그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차량 앞부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지고 연료탱크가 터져 불길이 치솟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맨손으로 찌그러진 문을 뜯어내 그녀를 구해냈다. 그녀를 끌어안고 구르는 순간 차량이 폭발했고, 나는 그녀를 감싸 안느라 골반과 하부 척추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의사는 생식 신경이 손상되어 향후 자연 임신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내렸다. 그때 그녀는 내 병상 옆에서 펑펑 울며, 평생 잠자리가 없는 부부로 살아가더라도 나만을 사랑하며 내 곁을 지키겠다고 피눈물 어린 맹세를 했었다. 그런데 그 절절했던 맹세의 잔해 위에서, 그녀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아이를 가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래층의 소음이 내 정신을 억지로 현실로 낚아챘다. 평소 내 절친을 자처하던 이찬우가 의자를 거칠게 밀치며 벌떡 일어나 샴페인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와! 설아 누나 진짜 대단하다! 하준 형도 완전 대박이네! 이걸 여태 숨기고 있었어?" "근데 임신한 몸으로 설산까지 온 거예요? 하준 형이 아주 눈에 넣어도 안 아프게 모셔야겠네." "야, 이 아이 태어나면 대부는 무조건 나다! 아무도 태클 걸지 마!" 또 다른 소꿉친구인 장민재도 웃으며 하준의 어깨를 툭 쳤다. "지난달에 제주도에서 비밀 결혼식 올린다고 난리 피울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쩐지 번개불에 콩 볶아 먹듯 서두르더라니, 다 계획이 있었구나!" 설아는 잔을 들어 그들의 축하에 답하며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시우가 예전에 나 구하다가 몸을 크게 다쳐서 평생 자기 아이를 가질 수 없잖아." "아이가 태어나면 시우 호적 밑으로 올려서 대를 잇게 해줄 생각이야. 내 나름대로 시우한테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의리지." "하준이도 나를 위해 이렇게 음지에서 희생해 줬는데, 제주도에서 조촐하게 식이라도 올려준 건 당연한 보상이고." …… 제주도 결혼식? 내 호적에 입적? 그 단어들이 둔기가 되어 내 뒤통수를 가차 없이 내리쳤다. 눈앞이 빙빙 돌았다. 지난달 설아는 내게 해외 출장 건으로 한 달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었다. 내가 독감에 걸려 40도에 육박하는 고열로 신음할 때도 비행기 표가 없어 갈 수 없다며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던 그녀였다. 그 시간에 그녀는 제주도의 푸른 바다 앞에서 임하준과 서약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나를 "시우 형", "내 형제"라 부르며 웃어대던 새끼들은 전부 그 현장에 하객으로 참석해 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철저한 바보로 만들며 비웃고 있었다. 끝도 없는 모멸감과 배신감이 온몸을 잠식하며 손끝이 부르르 떨렸다. 결국 꽉 쥐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놓쳐버렸다. 쿵! 타당탕! 무거운 캐리어가 계단을 따라 거칠게 굴러떨어졌다. 그 둔탁한 파열음이 대기실의 정적을 무자비하게 깨뜨렸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위 어둠 속에 서 있는 나에게로 쏠렸다. 내 모습을 확인한 사람들의 얼굴에 낭패감과 당혹감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하준이었다. 그는 급히 계단 아래로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시우야…… 이 눈보라가 치는 밤에 짐은 다 싸 들고 어디 가려는 거야?" 나는 얼어붙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급하게 내 소매를 붙잡으려 했다. "어디 가든 내가 같이 갈게. 이 날씨에 너 혼자 보내는 건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 그때 이찬우가 혀를 차며 다가와 하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강시우, 너 또 왜 심술이야? 네가 눈 보고 싶다고 징징대서 우리 다 생업 제쳐두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거잖아." "이제 와서 혼자 가겠다고 깽판을 쳐? 우리가 네 뒤치다꺼리나 해주는 비서들로 보여?" "설아 누나는 임신 초기라고. 네 병신 같은 몸뚱이 힘든 건 둘째치고, 임산부 배려 좀 해라. 하준이가 네 불임 처지 생각해서 호적까지 빌려주고 자식 대를 이어주겠다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꼬여서 지랄인데?" 의기양양하게 나를 다그치는 가증스러운 얼굴들을 보며,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눌렀다. 과거 이찬우와 장민재가 돈 한 푼 없이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을 때, 내 인맥과 자금을 끌어다 그들의 입에 밥숟가락을 얹어준 것은 바로 나였다. 이제 배가 부르니, 물어뜯기 가장 쉬운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들개 무리와 다름없었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 발에 채이는 와인 잔 파편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리고 이찬우와 장민재를 서늘하게 쳐다보며 잔인할 정도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귀하신 임산부님이시지." "방금 내 친구랑 눈이 맞아 식까지 올렸으니 뼈마디가 얼마나 나른하시겠어." 문 앞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은 채, 마지막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너희 그 기특하고 충성스러운 들러리 새끼들이 평생 보디가드나 하면서 잘 모셔라." "나 같은 불임 병신의 부정한 기운이 묻지 않게 각별히 조심들 하고." 내 가시 돋친 독설에 대기실에 있던 무리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갔다. 설아가 차가운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와 하준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보내줘." 그녀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눈으로 나를 내리눌렀다. "동정심 구걸하겠다고 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질린다 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마." "대신 경고하는데." "강시우, 너 이 문 나가는 순간 우리 약혼이고 결혼이고 전부 끝이야." 사방이 일시 정지된 것처럼 고요해졌다. 나는 설아의 얼굴을 몇 초간 빤히 응시하다가, 내 인생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실소를 흘렸다. "그래." 내 갈라진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심설아, 안 해. 그 더러운 결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문을 밀쳐 열고 매서운 겨울바람 속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펜션 앞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SUV 차량에 몸을 실었다. 차 문이 닫히자 후끈한 온풍이 내 뺨을 감싸 안았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펜션 여사장님이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 한 잔을 건넸다. "총각, 탁월한 선택이야. 꽉 잡아, 누나가 인천공항까지 날아가 줄 테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받아 마셨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예전에 보류해 두었던 본사 프랑스 파리 지사로의 인사 발령장이 도착해 있었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수락' 버튼을 눌렀다. 과거의 나는 이 거짓된 사랑의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내 하반신과 인생의 절반을 바쳤었다. 이제는 나 자신만을 위한 진짜 내 길을 걸어갈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