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 팩과 파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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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스 팩과 파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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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사 주주총회 날, 낙하산 인턴이 대뜸 쌕쌕오렌지 계란과자로 투자자들을 대접하자고 제안했다. 내 약혼녀는 그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며 흔쾌히...

Chương (1)

第1章

투자사 주주총회 날, 낙하산 인턴이 대뜸 쌕쌕오렌지 계란과자로 투자자들을 대접하자고 제안했다. 내 약혼녀는 그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며 흔쾌히 수락했고, 다른 주주들도 덩달아 동조했다. 이전 생에서 나는 이를 악물고 반대했었다. 이번 유치는 우리 회사의 사활이 걸린 가장 중요한 투자 건이었으니까. 여기서 실패하면 자금줄이 막히고, 주주 전원이 막대한 채무를 짊어지게 될 터였다. 하지만 약혼녀는 나를 몰아세웠다. “밴댕이 소갈딱지같이 왜 이래? 그냥 준서가 너보다 젊고 감각 있으니까 질투하는 거잖아.” 다른 주주들도 귀찮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 “쌕쌕오렌지이 어때서? 요즘 트렌디하고 좋잖아. 어차피 투자자들은 우리 기술력을 보고 투자하는 거야.” 피땀 흘려 일군 회사였다. 모두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나는 회의 시작 직전, 그 유치한 음료와 과자들을 전부 치워버렸다. 대신 투자자들의 취향에 맞춘 고급 홍차와 우롱차, 신선한 과일 플래터와 정갈한 디저트를 준비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투자자들은 크게 만족했고, 회사는 무사히 투자를 유치해 코스닥에 상장하며 시가총액이 폭등했다. 하지만 그 인턴 녀석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울며 뛰쳐나갔고, 마침 지나가던 덤프트럭에 치여 두 다리가 마비되고 말았다. 그 후 녀석은 라이브 방송을 켜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내가 자신을 질투해 트럭 밑으로 밀어 버려 반신불수가 되었다는 억지 주장이었다. 거기에 내 약혼녀의 묵인은 나를 사회적 매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성난 군중들이 내게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였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으며,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의문의 뺑소니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쌕쌕오렌지으로 투자자들을 대접하겠다는 인턴의 얼빠진 제안이 내 귀에 다시 들려왔다. 나는 침묵했다. 쌕쌕오렌지이라니, 아주 훌륭한 생각이다. 거기에 계란과자까지 곁들이면 아주 찰떡궁합이겠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로 돌아서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지원 씨, 지난번에 제게 제안하셨던 스카우트 제의 말입니다. 높은 연봉에 지분까지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 아직 유효합니까?” …… 1 임준서의 라이브 방송은 눈물바다였다. 내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일삼으며 그의 프로젝트 성과를 가로챘다고 울부짖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한수아는 그런 녀석의 곁에 서서 나의 잘못을 대신 속죄하겠다며 준서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불타 죽은 내 영혼이 구천을 떠돌며 목격한 광경은 참혹했다.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을 때, 사적인 제재를 가하겠다며 몰려든 광분한 누리꾼들이 구급차를 막아섰다. 어머니는 단 한 문을 사이에 두고 차가운 방바닥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뺑소니를 당해 숨졌지만, 아무도 그 시신을 수습해 주지 않았다. 그 곁에서 임준서와 한수아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들개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훼손하도록 방치하면서 말이다. “윤도현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그 부모가 죗값을 치르는 것도 당연하지.” 나는 허공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들개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영혼의 손끝은 그 어떤 것에도 닿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며 다시 눈을 떴을 때, 준서의 억울해 죽겠다는 목소리가 현실로 파고들었다. “투자사 미팅 때 음료로 쌕쌕오렌지 좀 준비하는 게 어때서요? 도현 형은 왜 그렇게 사납게 굴어요?” “맞아, 도현아. 쌕쌕오렌지은 신선하고 좋잖아. 젊은 감각이라고 투자자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데 왜 기를 죽이고 그래?”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수아와 주주들이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허벅지를 아주 세게 꼬집어 보았다. 아프다.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나, 살아난 건가? 회귀한 것이다. 투자자들의 평균 연령은 쉰을 훌쩍 넘겼다. 대다수가 고혈압, 고지혈증, 고혈당을 앓고 있고, 그중 한 명은 유제품 알레르기까지 있었다. 그런데 쌕쌕오렌지이라니. 그들의 명줄을 단축하고 싶어서 환장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 대리 제안이 아주 좋네요. 저도 찬성입니다.” 이 회사는 나와 수아가 맨땅에 헤딩하며 일군 곳이었다. 주주들의 대부분은 우리의 오랜 친구들이었고, 자신들의 전 재산을 털어 넣은 이들이었다.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나는 쓸개가 빠지도록 술을 마셔가며 몇 번이고 응급실 신세를 졌고, 수아와 함께 밤낮없이 일하며 단 한순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는 모두의 피땀이 물거품이 될까 걱정되어 미팅 직전에 다과를 바꿨고, 덕분에 투자를 성공시켰다. 그 결과가 내 가족의 참혹한 죽음과 나 자신의 소사였다니. 이번 생에는 과연 그 달콤한 쌕쌕오렌지을 들이켠 투자자들이 이 회사에 몇 분이나 앉아 있을지,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리라. 이어지는 준서의 허황된 기획안 발표에는 흥미가 없어, 나는 뒷문으로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빈 사무실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윤 대표님, 어쩐 일로 먼저 연락을 다 주셨습니까? 설마 제 제안을 수락하시는 건가요?” “네, 수락하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절대적인 경영권과 거부권을 보장해 주십시오.” 수화기 너머로 서지원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진중하면서도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도현 씨가 원하는 조건은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같이 잘해봅시다.” 2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복도에서 준서와 수아가 마주 걸어왔다. “도현아, 중요한 회의 중에 어딜 그렇게 갑자기 가?” 준서가 입꼬리를 비죽이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혹시 주주분들이 도현 형 기획안 대신 제 아이디어를 채택해서 화나신 거예요? 제가 괜히 나서서 대표님 기분을 상하게 해드렸나 봐요……” “네 잘못 아니야, 준서야. 네 기획이 훌륭해서 채택된 건 당연한 일이야. 도현이 쟤가 속이 좁아서 그래. 도현아, 준서한테 사과해.”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이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 나는 늘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고, 그녀는 겉으로는 귀찮아하면서도 나를 끔찍이 아꼈다. 한번은 수아를 짝사랑하던 선배들이 골목길에 나를 가두고 윽박지를 때, 수아가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 내 앞을 가로막았었다. - 윤도현 내 남자친구야! 한 번만 더 얘 건드리면 나 가만 안 있어! “윤도현, 내 말 안 들려? 준서한테 사과하라고! 임원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속이 좁아?” 수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과거의 잔상을 찢어발겼다.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수아는 짜증스럽게 내 어깨를 밀쳐버렸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밀려난 나는 벽모퉁이에 손목을 크게 부딪쳤다. 뼈가 어긋나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수아의 얼굴에 찰나의 당혹감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준서가 코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도현 형, 엄살이 너무 심하시네요. 대표님이 세게 밀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멀리 나가떨어지시다니. 남들이 보면 대표님이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겠어요.” 그 말에 수아는 멈칫하더니 다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빨리 일어나. 지질하게 굴지 말고.” 회의실에서 나오던 주주들이 그 광경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윤 이사, 왜 그래? 또 대표님 화나게 한 거야? 결혼도 앞둔 녀석이 왜 이렇게 밴댕이처럼 굴어.” 주주들이 다가오자 준서는 기다렸다는 듯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도현 형이 제 제안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하셨나 봐요. 괜찮아요, 회사를 위해서라면 형한테 몇 대 맞는 것쯤이야 참을 수 있어요.” “윤도현, 너 진짜 왜 그렇게 쪼졸하게 구냐? 그릇을 좀 키워라. 사사건건 사람을 물어뜯어서야 쓰겠어?” “맞아, 나도 임 대리 아이디어가 아주 참신하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우리 회사가 업계 탑인데, 투자자들한테 쌕쌕오렌지 좀 대접하면 어때? 지들이 우리 아니면 어디다 투자하겠어?” 주주들의 빗발치는 비난을 들으며 욱신거리는 손목을 짚고 일어섰다. 속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임 대리 기획안에 불만 없습니다. 다만 제가 내일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투자 유치 미팅에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네요.” 수아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지며 내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윤도현, 적당히 해. 이 중요한 시기에 어디서 앙탈이야?” 중요한 시기인 건 아는 모양이네. 지금 회사는 당장 돌아갈 자금도 부족한 상태다. 이번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면 너희는 전부 길바닥에 나앉게 될 텐데. “도현아, 너 진짜 철 좀 들어라. 회사가 곧 상장하면 대표님 몸값도 뛸 텐데, 너 계속 이따위로 굴면 대표님이 너랑 결혼해 줄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임원 자리에 있으면 회사에 헌신할 생각부터 해야지.” 참으로 가관이었다. 이 회사의 모든 계약과 실적은 내가 온몸으로 부딪쳐 따낸 것들이었다. 영업을 뛰느라 병원 응급실을 내 집 드나들 듯했고, 지금도 위장약을 밥처럼 먹고 있었다. 그저 수아가 직원들 앞에서 기가 죽을까 봐 공을 전부 그녀에게 돌렸을 뿐인데, 이제는 내가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구걸하는 처지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그때 준서가 조심스레 쐐기를 박았다. “그럼 내일 브리핑은 제가 대표님을 도와서 대신할게요. 도현 형이 자료만 넘겨주시면요.” 수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준서 씨가 고생이 많네.” “아니에요. 대표님과 회사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생쯤은 기꺼이 해야죠. 도현 형이 하기 싫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들었어, 윤도현? 준서 반만이라도 닮아봐. 진짜 창피해 죽겠네. 나잇값 좀 해라. 네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갈 줄 알아? 넌 오늘부로 해고야.” 그제야 몇몇 주주들이 뒤늦게 현실을 자각한 듯 웅성거렸다. 3 “그건 좀 곤란하지 않나? 내일 브리핑이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 회사 비즈니스 모델을 가장 잘 아는 건 윤 이사잖아.” “도현아, 내일 일단 나와서 발표는 해라. 정 쌕쌕오렌지이 마음에 걸리면 다른 걸로 바꾸면 되잖아.” “그래, 정 안 되면 윤 이사 기획안대로 가자. 그것도 나쁘지 않았어.” 그러나 준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그들의 말을 잘랐다. “걱정 마세요, 주주님들. 저도 대표님 옆에서 지켜봐서 우리 회사 비즈니스는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절대 실수 안 해요.” 수아 역시 준서의 말에 힘을 실어주었다. “난 준서 믿어.” “다들 걱정 마세요. 설령 준서가 조금 서툴더라도 제가 있잖아요. 우리 실적은 다들 아시다시피 확실하니까 내일 미팅은 요식 행위에 불과해요.” 수아의 확신에 찬 말에 주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겠어. 내 자리로 가서 PPT 자료 넘겨줄게.” 자료를 전송하고 가방을 챙겨 막 일어나려는데, 준서가 내 앞을 막아섰다. “도현 형, 지금 가시면 안 되죠.” “대표님, 윤 이사님을 그냥 보내면 안 돼요. 내일 당장 큰 행사가 있는데, 도중에 앙심을 품고 훼방이라도 놓으면 어떡해요? 제가 사람을 나쁘게 보려는 건 아니지만, 내일은 대표님과 주주님들께 너무 중요한 날이잖아요……” 주주들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맞아, 윤 이사가 딴마음을 먹었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안전장치를 해야 해. 그냥 보내면 안 된다니까. 만약 회사에 문제 생기면 나 진짜 한강 가야 돼.” 황당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서가 말을 잘랐다. “말로만 그러는 걸 누가 믿어요? 일단 핸드폰부터 압수하고 아무 연락도 못 하게 격리해야 해요.” 수아가 내 팔을 억세게 잡아채고는 내 주머니에서 강제로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내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매서운 통증과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준서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도현 형이 밖이랑 꼼수 부리지 못하게 아주 은밀하고 단단한 곳에 격리해야 해요.” “아, 좋은 생각이 났어요! 대표님 새 집 지하창고 있잖아요. 거긴 신호도 안 터지고 방음도 끝내주던데.”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내리며 사지가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어릴 적,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이 고용한 베이비시터가 도박하러 가면서 나를 지하실에 가둔 적이 있었다. 낡은 지하실 문틈으로 유기견 한 마리가 침입했고, 고작 다섯 살이었던 나는 그 맹수 같은 개에게 물어뜯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곱 살이었던 수아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개를 쫓아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때 죽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지하실과 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가 되었다. “한수아, 안 돼…… 제발 지하실만은 안 돼. 나 내일 아무 짓도 안 해. 날 좀 믿어줘!” 수아가 새로 산 집은 우리의 신혼집이 될 예정이었다. 수아는 나를 위해 그 지하실을 완전히 폐쇄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온갖 자재들로 가로막힌 음습한 폐허일 뿐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문틀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수아야, 우리 함께한 세월을 봐서라도 제발 지하실에는 가두지 마. 나 거기 무서워하는 거 알잖아. 제발 부탁이야!” 처절하게 비는 내 모습에 몇몇 주주들이 머쓱한 듯 입을 열었다. “한 대표, 그냥 위층 방에 가둬두는 게 낫지 않나?” 수아의 눈빛이 흔들리는 찰나, 준서가 쐐기를 박았다. “위층 방에는 창문이 있잖아요. 탈출하면 어쩌려 그래요? 겨우 하루 가둬두는 거고 밥을 굶기는 것도 아닌데 엄살은. 저렇게 발악하는 걸 보니 분명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아니야, 수아야…… 나 지하실 정말 무서워한단 말이야, 제발……” “도현 형, 거짓말도 정도껏 하세요. 요즘 지하실은 불도 켜지고 아늑한데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그리고 어릴 때 무서워하던 건 커서 정면으로 마주해야 치료가 된다고요. 다 형을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걸 보니 내일 투자 망치려는 게 확실하네.” 준서의 가스라이팅에 주주들은 입을 닫았고, 수아는 잔인하게 나를 지하실 안으로 밀쳐 넣었다. 4 “내일 미팅 끝나면 바로 꺼내 줄게.” 내가 필사적으로 문틈을 부여잡자, 수아는 독하게 마음을 먹은 듯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가락이 문틈에 끼었다. 심장이 멎을 듯한 극심한 고통이 척수를 타고 뇌를 강타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고, 조건반사적으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철컥하며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나는 으스러진 손을 쥐어짜며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둠은 형체 없는 괴물이 되어 나를 집어삼켰고, 나는 구석에 웅크린 채 극한의 공포에 떨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 너머에서 자물쇠 소리가 들렸다.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어갔지만, 문은 아주 잠깐 틈을 보였다가 이내 다시 닫혔다. 찰나의 빛 속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안으로 거칠게 밀려 들어온 거대한 대형견 한 마리였다. 충혈된 붉은 눈을 한 맹견이었다. “악! 아아악—!” 아무리 몸을 피해도 좁은 지하실에서 광포한 이빨을 피할 길은 없었다. 허벅지, 팔, 옆구리가 사정없이 뜯겨 나갔다. 살점이 뜯기는 고통 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의식을 잃어가기 전, 희미한 환각이 보였다. 누군가 문을 때려 부수고 들어와 나를 품에 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천장은 하얗고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병상 옆에는 서지원 대표가 앉아 있었고, 내 온몸은 붕대로 두껍게 감겨 있었다. “꼴이 그게 뭡니까. 계약서 쓰려는데 연락이 안 돼서 온 동네를 다 뒤졌잖아요.” “겨우 찾아갔더니 안에서 개 짖는 소리랑 비명만 들리더군요. 대체 어떤 미친 인간들이 사람을 지하실에 가두고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지원 씨, 미안하지만 옷 한 벌만 구해다 주십시오. 첫 출근 기념으로 아주 큰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내가 투자를 방해할까 봐 가두었다고? 방해만 하는 걸로 끝날 성싶나. 아주 뿌리째 뽑아서 넘겨줄 테니 기대해라. 회사 로비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순간, 내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 어머니가 로비 바닥에 쓰러져 거품을 물고 계셨고, 경비원들이 그 몸에 더러운 구정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요즘 늙은이들은 아주 대담하게 자해 공갈을 하네. 여기 CCTV 있는 거 모르나?” “그러게 말이야. 그래도 임 대리가 현명했어. 이 더운 날 물을 아무리 뿌려도 안 일어나는 척 버티네.” “물이 덜 더러워서 그런가? 화장실 가서 소변이라도 좀 받아올까?” “크큭, 미친 새끼…….” 머릿속에서 이성이 뚝 끊어졌다. 눈이 뒤집힌 나는 경비원들을 미친 듯이 밀쳐냈다. “꺼져! 다 꺼지라고!” 어머니의 입술은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급성 심장마비였다. 그런데 이 짐승 같은 자들이 어머니를 이렇게 모욕하고 있었다니. 수아의 부모가 이혼했을 때, 갈 곳 없던 수아는 우리 집에서 먹고 자랐다. 우리 부모님은 그녀를 친딸처럼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내 어머니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어? 윤 이사님? 헉, 이 할머니가 윤 이사 어머니였어?” “저,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다 한 대표님이 시킨 일이에요……” “한 대표님이 자해 공갈단이니까 쫓아내라고 하셨고, 이 물 뿌리는 아이디어도 다 임 대리가 준 겁니다……”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던 경비원들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손 끝이 떨려오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전 생에서 어머니가 홀로 차가운 방에서 돌아가시며 느끼셨을 고포와 고통이 나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119 불러줘요! 제발!” 내게는 핸드폰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무릎을 꿇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애걸했지만, 다들 눈치만 볼 뿐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이미 신고했습니다. 구급차 금방 올 테니 걱정 마세요.” 지원이 달려와 나를 부축하고, 어머니를 응급처치하며 온몸에 묻은 더러운 오물들을 닦아내 주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해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자, 어머니의 호흡이 조금씩 돌아왔다. 어머니는 눈을 뜨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았다. “도현아, 너 수아랑 무슨 일 있니? 내가 수아 집 앞에서…… 수아가 웬 젊은 놈이랑 키스하는 걸 봤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다가갔더니, 그 남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깡패처럼 자기들을 위협했다고 소란을 피우더구나……”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입술을 깨물었다. 한수아, 어떻게 내 어머니에게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상처투성이인 몸을 억누르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엄마.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엄마는 치료에만 전념해요.” 구급차가 떠난 후, 나는 화장실에서 대충 몰골을 정돈한 뒤 곧장 주주총회 회의실로 향했다. 5 회의실 안은 이미 냉랭한 기류로 가득 차 있었다. 투자자들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앉아 있었다. 빔프로젝터는 켜지지도 않았고, 직원들은 갈팡질팡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모두 내가 꼼꼼하게 준비하던 것들이었다. 미리 에어컨을 켜 온도를 맞추고, 프레젠테이션 기기를 몇 번이나 점검하며, 따뜻한 웰컴 티를 준비해 놓았었다. 오늘 투자자들은 차가운 회의실에서 물 한 잔 대접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잠시 후, 준서가 입술에 붉은 립스틱 자국을 묻힌 채 능청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아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다과입니다.” 그가 투자자들 앞에 올려놓은 것은 달디단 쌕쌕오렌지 싸구려 계란과자였다. 순간, 투자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한 투자사 대표는 들고 있던 만년필을 테이블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장난합니까? 한 대표, 설명해 봐요. 그리고 윤도현 이사는 어디 갔습니까?” 수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준서가 쪼르르 나서서 깐족거렸다. “윤 이사는 이미 해고당했습니다.” “해고?” 투자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지금 장난해? 윤도현이 없는데 우리가 이딴 회사에 왜 투자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