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내 아기의 피를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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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내 아기의 피를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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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하준을 처음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진 날은 모두 5월 20일이었다. 현재 나는 임신 중이고, 출산 예정일은 8월이다. 서하준의 어머니는 이 배 속...

Chương (1)

第1章

내가 서하준을 처음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진 날은 모두 5월 20일이었다. 현재 나는 임신 중이고, 출산 예정일은 8월이다. 서하준의 어머니는 이 배 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면 그제야 혼인신고를 허락하겠다고 못 박았다. 내 배를 어루만지며 하준은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더랬다. “우리 아기도 5월 20일에 태어나면 정말 기적 같지 않을까? 그럼 완벽할 텐데.” 나는 그저 그가 짓궂은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 5월이면 아이는 겨우 24주밖에 되지 않는다. 그때 수술해서 억지로 꺼낸다면 아이가 살아서 인큐베이터 밖을 나올 확률은 희박하니까. 하지만 도시락을 전해주러 그의 회사에 갔던 날, 사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내 모든 세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그는 의사 친구와 단둘이 이야기 나누는 중이었다. “5월 20일에 무조건 제왕절개 수술을 잡아야 해. 이 아이의 탯줄혈액이 설아의 각막 이식 거부 반응을 치료할 수 있대. 설아에게 줄 5월 20일 기념 선물이자, 우리 결혼 1주년 선물이야.” “그럼 임은수는? 은수 자식이기도 하잖아. 순순히 동의하겠어?” 의사 친구의 말투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아이 하나쯤이야. 살면 다행이고, 못 살면 다음에 또 하나 만들어주면 돼.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나봤자 꼬리표가 붙을 사생아일 뿐인데 뭐.” “부모님 돌아가신 뒤로,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애잖아.” “나 아니면 누가 걔를 책임져 주겠어? 명품 백 하나 쥐여주면 금방 풀릴 애야.” “정 안 되면 가짜 혼인신고서라도 만들어서 보여주지 뭐. 그럼 또 나만 믿고 맹목적으로 매달릴걸.”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잔인하리만치 다정하고 차가운 목소리. 나는 불러오는 배를 필사적으로 감싸 안은 채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쏟아냈다. 그는 정말로 내 뒤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날 밤, 해외에 나가 있는 오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올해 5월 20일은 오빠랑 같이 보내고 싶어.] …… 서하준의 회사를 빠져나온 나는 마비된 다리를 이끌고 백설아가 정기 검진을 받는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백설아의 각막은 하준의 죽은 첫사랑, 신혜원이 기증한 것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하준은 세상에 남겨진 첫사랑의 마지막 유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내 눈앞에서 대놓고 백설아를 보살폈다. 설아가 눈이 아프다고 칭얼거리기만 하면, 하준은 하던 일을 모두 제쳐두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나는 그저 ‘이미 죽은 사람인데 내가 왜 질투를 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내 오만이었다. 그 죽은 사람의 흔적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기괴한 특권을 부여하고 있었다. “산모님, 남편분께서 5월 20일 자로 정밀 분만 검진을 예약해 두신 게 맞네요…….” 간호사의 상냥한 목소리가 내 끈질긴 미련을 깨부수었다. 내가 늘 다니던 산부인과는 이곳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들었던 그 끔찍한 음모는 단 하나의 오차도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우리 아이에게도, 내게도 관심이 없었다. 하준을 처음 만난 건 6년 전 5월 20일이었다. 당시 그의 첫사랑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고, 그는 매일같이 술에 취해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연인이 된 건 5년 전 5월 20일이었다. 내 헌신적인 곁지기가 언젠가는 그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 후로 매년 5월 20일이 올 때마다 나는 그의 프러포즈를 기다렸고, 마침내 진짜 부부가 되기를 꿈꿨다. 명절이나 기념일이 되면 나는 항상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선물을 바치고, 집안일을 도왔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게 따뜻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제시간에 맞춰 방문하는 공짜 가사도우미 취급이었다. 5년 동안 세뱃돈 한 번 받아본 적 없었고, 그 집 식탁에 숟가락 하나 제대로 얹어본 적도 없었다. 설날 아침, 하준의 손에 이끌려 인사를 하러 가면 시어머니는 나를 곧장 주방으로 밀어 넣었다. 온종일 기름 냄새를 맡으며 상을 차려내도, 화려하게 차려진 원탁 위에 내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하준의 옆에 늘 비어 있는 자리가 있었다. 죽은 신혜원의 자리였다. 하지만 2년 전부터 그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백설아가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위한 의자는 없었다. 하준은 늘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은수야, 우리 어머니가 워낙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 보수적이셔서 그래. 아들을 낳아야 혼인신고를 허락해 주시겠대.” 나는 그 바보 같은 말을 일종의 약속이라 굳게 믿으며 미혼모의 길을 택했다. “은수야, 명절 때 이 한 끼만 고생하면 어머니도 널 예쁘게 봐주실 거야. 남은 날에는 내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줄게.” 실제로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함께하는 5년 동안 하준은 나를 향해 언제나 눈물겹도록 다정했다. 내게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었고, 어떤 철없는 투정도 넓은 품으로 다 받아주었다. 그는 잔잔하고 깊은 물처럼 늘 나를 감싸 안았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말없이 해장국을 끓여주고, 젖은 내 발을 닦아준 뒤 머리칼을 다정하게 말려주던 남자였다. 내 친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며, 그런 든든한 남편감을 얻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그가 야심한 밤에 백설아의 전화를 받고 급히 방을 나설 때도, 나는 아주 미미한 위기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나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훔쳐내고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내 아이를 단 1밀리미터도 다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5월 12일. 5월 20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8일뿐이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오빠가 보내온 답장이 깜빡이고 있었다. [내일 바로 귀국해. 집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내 부모님은 평범한 공장 노동자이셨지만, 누구보다 고결한 심성을 가진 분들이었다. 5년 전 여름, 고향에 들이닥친 큰 수해 속에서 두 분은 주저 없이 흙탕물 속으로 뛰어드셨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구조해 내고, 정작 두 분은 그 차가운 물속에서 돌아오지 못하셨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부모님의 의사상자 훈장을 정성스레 닦아내며, 참았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아빠, 엄마. 은수가 지금 너무 무섭고 힘든데 어떡해? 내가 울 때면 언제나 아빠는 주머니 속에서 하얗고 뽀얀 밀크 사탕을 꺼내 내 입에 쏙 넣어주곤 하셨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면 엄마가 따뜻한 품으로 나를 꽉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셨다. 빛바랜 가족사진을 품에 안은 채 소파에 멍하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창밖의 붉은 노을이 서서히 지며 방안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띠리링-. 고요를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이름은 서하준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소름이 끼쳤지만, 지금은 그의 경계심을 늦추어야 할 때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하준의 변함없이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수야, 어디야?” “……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잠깐 옛날 본가에 와 있어.” “저녁은 먹었어? 내가 그리로 가서 요리해 줄게.” “올 필요 없어. 배달시켜 먹으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 저편에서 낯익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백설아였다. “은수야, 미안한데 잠시만 기다려 줘. 설아가 불러서.”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왜 늘 내가 기다려야 해? 왜 그 여자가 아니라 나야?” 수화기 저편에서 하준이 미간을 찌푸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설아가 눈이 또 아프대. 환자잖아, 네가 조금만 양해해 줘. 은수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굴어줄 순 없어?” 어른스럽게, 또 어른스럽게! 나는 대체 언제까지 그 어른스러운 가면을 쓰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정실부인이 남편의 첩을 넓은 아량으로 들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난 정식 부인조차 아니었다. 그저 그림자처럼 숨겨진 정부에 불과했다. “내가 네 아내야, 아니면 백설아가 네 아내야? 우리 둘 중에 대체 누가 더 소중해?” 낮에 들었던 ‘사생아’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너지.” 하준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가서 얘기하자.” 그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임신 중에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더니 은수도 그런 모양이라고, 맛있는 걸 사다 달래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나는 조용히 홈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배경화면 속에서 다정하게 맞닿은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가증스러웠다. 나는 즉시 사진을 기본 이미지로 변경해 버렸다. 하준은 전화를 끊은 뒤, 카카오톡 즐겨찾기에 등록된 내 이름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가 이내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백설아가 다급하게 그의 옷소매를 붙잡아 당겼기 때문이다. “하준 씨, 눈이 너무 아파…… 꼭 혜원 언니가 자길 그리워해서…… 나더러 자길 불러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하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은수에게 가졌던 찰나의 미안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는 설아의 눈을 애틋하게 들여다보았다. 마치 그 투명한 눈동자 뒤에 살아 숨 쉬는 신혜원을 보듯. 6년 전, 연인이 된 지 겨우 한 달 만에 혜원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하준은 그녀의 마지막 투병 생활을 끝까지 함께 지켰다. 죽음을 앞두고 혜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준 씨, 내 각막을 기증할게. 세상 어딘가에서 내 눈을 가진 사람이 널 대신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마지막까지 천사 같았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준은 그녀가 남겨준 유일한 유품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백설아의 각막 거부 반응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기증받은 각막마저 괴사할 판이었다. 그러던 중 하준은 탯줄혈액을 이식하면 이 증상을 완벽히 치료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의 시선이 내 배 속으로 향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혜원을 향한 맹목적인 집착은 과학적인 검증조차 건너뛰게 만들었다. 의사가 다녀와 별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린 후에야 하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설아가 다급히 그의 손을 짚어왔다. “오늘 밤은 가지 마면 안 돼?” 하준은 차갑게 미간을 찌푸렸다. “은수 저녁 챙겨주러 가야 해.” “하지만 하준 씨 서류상 아내는 나잖아.” 하준은 설아의 손을 냉혹하게 뿌리쳤다. “그 서류 쪼가리가 뭐 어쨌다는 거지?” “넌 그저 혜원이의 눈을 보관하는 그릇일 뿐이야. 내 호적에 이름이 올라간 걸 평생 영광으로 알고 살아.” 하준은 장을 본 봉투를 들고 내 집 문을 열었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울고 있는 나를 보고 황급히 다가와 품에 안으려 했다. “은수야, 왜 울고 있어?” 나는 그의 단단한 팔을 차갑게 밀쳐냈다. “몸에 손대지 마.” 그를 마주하는 순간, 내가 피해자이자 동시에 불륜녀가 되어 있었다는 지독한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하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지적인 은테 안경 너머로 평온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 불편하면 손 안 댈게. 요리부터 하자. 뭐 먹고 싶어?” “새콤달콤한 탕수육 어때? 요즘 신맛 당긴다고 했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전부 그가 도맡아 했다. 나는 그저 그가 가져오는 비즈니스 업무만 서포트하면 되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신혜원을 완전히 대체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백설아만도 못한 존재였다. 하준은 부엌에서 능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을 잡았다. 만약 오늘 낮에 그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도 이보다 완벽한 남편은 없을 거라며 감동받았을 것이다. 그는 정말 내 배 속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세포만 한 크기에서 시작해 손가락, 발가락이 생겨나기까지 모든 초음파 검사를 빠짐없이 함께했던 그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굴 닮을지, 어떤 예쁜 이름을 지어줄지 밤을 새우며 재잘거리던 그 다정함은 전부 가짜였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가 갑자기 주방에서 몸을 반쯤 내밀며 미소 지었다. “와사비 크림새우도 해줄까? 마침 통통한 생새우를 사 왔거든.” “인터넷에서 보니까 요즘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유아식 메뉴라네. 미리 연습해 보려고.” “우리 아기가 크면 아빠가 매일매일 만들어 줄게.” “우리 집 큰 아기 은수랑, 작은 아기 한 명이랑!” 하준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게 웃었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5월 20일에 무조건 수술을 잡아야 해”라며 냉혹하게 명령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이?! 창밖으로 흐릿한 불꽃놀이의 파편이 튀어 오르더니, 내 가라앉은 눈동자 위로 무참히 바스러졌다. 그가 말하는 그 아기는 대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백설아를 위한 도구일 뿐이면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준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온종일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들끓던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서하준! 너 내 배 속의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똑바로 고백해!” 나는 짐승처럼 절규했다. 더는 억누를 수 없었다. 아직도 그 더러운 입으로 아이를 논하다니! 하준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듯 가스 불을 끄고 주방 도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늘 쓰고 있던 그 인자한 가면을 천천히 벗겨냈다. “은수야, 어디까지 들은 거야?” 나는 무너지듯 소리쳤다.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었어!” 하준이 내 어깨를 짚으며 다독이려 했다. “일단 앉아봐. 흥분하지 말고.” 나는 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이지? 오늘 은수가 회사에 다녀갔나?” 수화기 건너편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대표님…… 사모님께서 낮에 잠깐 오셨다가 금방 가셨습니다.” 하준은 전화를 끊고, 어둡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결국 오늘 나랑 지훈이가 나눈 얘기를 다 들었다는 거네.” “그래, 들었어! 너 우리 아이를 죽이려는 거잖아!” 하준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진정해! 내가 왜 내 아이를 죽여? 살려낸다고 했잖아.” “그럼 5월 20일에 제왕절개 수술을 하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소리야?!” 하준은 침묵했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뺨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제 변명조차 안 하는구나?”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꼽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5월 20일이면 겨우 24주야! 그 핏덩이가 어떻게 살아남아!” 하준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독하게 차분했다. 그 철벽 같은 침묵은 미쳐 날뛰는 나를 한낱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 같았다. “이미 국내 최고의 소아청소년과 인큐베이터 전문 팀을 대기시켜 놨어. 24주에 태어나도 충분히 정상적으로 살려낼 수 있어.” “살려내? 평생 인큐베이터의 약물에 의존하게 만들면서?” “남들보다 작고 왜소하게 자라나서 평생 열등감 속에 살 텐데!” “다른 아이들이 들판을 뛰어놀 때 내 아이는 평생 병원 침대에 갇혀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네 핏줄이잖아! 친부라는 작자가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하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흔들렸으나, 이내 특유의 얼음 같은 침착함으로 돌아왔다. 예전에는 그의 그 흔들림 없는 침착함이 든든한 방패 같았는데, 지금은 내 숨통을 죄는 족쇄가 되어 돌려받고 있었다. “하지만 혜원이의 눈은 어떡하라고? 그 애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마지막 유품이야!” “설령 이 아이가 잘못된다 하더라도 우린 젊어. 다음에 더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다시 가지면 돼.” “은수야, 넌 늘 현명하고 이해심이 깊은 사람이었잖아.” “네 부모님도 대홍수 속에서 타인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셨어. 그 숭고한 정신을 너도 눈곱만큼은 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겨우 아기 하나 희생해서 혜원이의 눈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다면, 그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야. 아이는 언제든 다시 낳으면 되지만, 혜원이의 각막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궤변에 나는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정말 뼈저리게 신혜원을 사랑하고 있었다. 내 잘못이었다. 나는 감히 죽은 첫사랑이라는 절대적인 성역과 경쟁하려 들었던 것이다. 나는 주방으로 돌진해 도마 위에 놓여 있던 식도를 쥐고 하준을 겨눴다. “내 아이 몸에 칼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봐. 그날은 너 죽고 나 죽는 날이야!” 그제야 하준의 단단하던 안색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임은수! 위험하니까 칼 내려놔! 다쳐!” 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기엔 무리였다. 그는 순식간에 내 손목을 꺾어 제압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의 뺨을 가볍게 스치며 한 줄기 붉은 선을 남겼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나는 그대로 암흑 속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턱 막히며 눈이 번쩍 떠졌다.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배를 만졌다. 아직 불룩한 태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다. 침대 머리맡에 낯익은 실루엣이 앉아 있었다. 나를 입양해 준 부모님의 아들이자, 내 유일한 오빠인 한태오였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참았던 눈물이 베갯잇을 적셨다. “은수야,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스스로 미련하게 버티지 못했던 탓이다. 태오는 어릴 적 유괴범에게 납치되었다가 우리 부모님의 손에 극적으로 구조된 아이였다. 친부모를 찾지 못해 우리 집에서 호적을 같이 쓰며 자랐다. 우리는 친남매보다 더 애틋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태오는 내게 품어서는 안 될 감정을 자각하고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부모의 연락을 받게 된 그는 그대로 한국을 떠나 국외에서 생활해 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오빠랑 같이 떠나자. 혼인신고도 안 했으니 절차 밟을 것도 없잖아. 내가 너랑 네 아이, 평생 책임질 테니까.” 태오가 내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 세상 끝에서라도 달려와 주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내 등 뒤에서 든든한 기둥이 되어 주던 존재. “오빠…… 내가 바보 같았어.” 처음 하준을 만난다고 했을 때 태오는 격렬하게 반대했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었던 나는 그 잔인한 조언들을 전부 한 귀로 흘려들었었다. ‘서하준은 신혜원을 사랑해. 그것도 가장 아름답게 박제된 상태로 죽은 사람을. 은수야, 넌 절대로 죽은 사람을 이길 수 없어.’ 태오가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네 방패가 되어 줄 테니 걱정 마.”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부모님이 떠나신 후, 태오는 내게 유일한 우주였다. 하지만 이혼이라니?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태오는 여태 우리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마친 부부인 줄 알고 있었다. 결혼식만 치르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 아내한테서 그 더러운 손 치워. 넌 어디로도 내 아내를 데려갈 수 없어.”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서하준이 걸어 들어왔다. 그의 한쪽 뺨에는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태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걸음에 다가가 그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하준은 피하지 않았다. 입술이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네놈이 감히 우리 은수를 아무도 없는 고아 취급하며 짓밟아?” 태오는 하준보다 체구도 크고 다부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막은 정확히 몰랐지만, 내 목에 난 흔적과 눈물만으로도 하준이 나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챈 것이다. 하준은 터진 입술을 닦아내며 침대 위의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지독하리만치 차분한 엘리트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은수가 요즘 임신 초기라 감정 기복이 심해서요. 제가 부족해서 서운하게 한 모양입니다. 제 잘못이니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태오는 그의 비열한 변명을 믿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완전히 마음을 굳힌 듯, 나를 기필코 데려가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옛날 집에 내 방 서랍장 깊은 곳에 작은 상자가 하나 있을 거야. 어릴 때 아빠가 사준 장난감이 들어있는데…… 그것 좀 가져다줄래?” “나중에 우리 아기 태어나면 꼭 만지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태오는 내가 하준과 단둘이 할 얘기가 있어 자신을 피신시키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간곡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하준을 뼈가 시리도록 노려본 뒤 방을 나섰다. 하준은 내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걸터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묘한 최면 같은 다정함이 묻어났다. “은수야, 어젯밤에 혼자 밤을 지새우며 깊이 반성했어. 내가 정말 미쳤었나 봐.” “혜원이의 각막도 소중하지만, 그건 결국 과거에 머문 죽은 이의 유품일 뿐이잖아. 우리 아기는 지금 살아 숨 쉬는 미래야.” “그 아이가 자라나 걷고 말하는 모습을 나도 함께 보고 싶어.” 그는 정성스레 깎은 사과 조각을 내 손에 쥐여주고는, 내 차가운 손을 감싸 쥐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은수야, 나 역시 너만큼이나 이 아이를 간절하게 기다려왔어.” “20일이 되면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자. 백설아와의 관계도 서류상 완전히 정리할게.” “설아가 각막에 문제가 생겼다며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협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엮여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어.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사람은 너뿐이라는 걸.” 그의 눈동자에는 참회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정말…… 진짜야?” 나는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질문을 흘렸다. 서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어제 그 잔인한 폭로를 들었을 때 내 세계는 완전히 박살 났었기에,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어제는 내가 회사 일에 치여서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어. 백설아의 안구 상태가 극도로 나쁘다는 진단을 받고 순간적으로 눈이 멀었던 거지.” “그리고 우리 아이의 유전자가 그 각막과 기적적으로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내가 어떻게 우리 아기를 사지로 몰아넣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은수야, 우리 함께한 지 5년이 넘었어. 나라는 사람을 아직도 그렇게 몰라?” 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끝내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나 정말…… 너무 무서웠어…… 진짜로 자기가 아이를 죽이려는 줄 알고……” 나는 숨이 넘어갈 듯 흐느꼈다. 하준은 내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은수야. 내가 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