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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는 돌려드리겠지만, 선택은 제가 하겠습니다
익명의 유저, ‘user0505’의 짝사랑 일기가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자, 댓글 창은 온통 그녀의 섬세한 짝사랑 서사에 감동했다는 반응으로 가득 찼다...
Chương (1)
第1章
익명의 유저, ‘user0505’의 짝사랑 일기가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자, 댓글 창은 온통 그녀의 섬세한 짝사랑 서사에 감동했다는 반응으로 가득 찼다.
인터넷은 온통 5월 5일 어린이날이 생일이라는 이 주인공을 찾느라 난리가 났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갑자기 내게 그 영상을 공유했다. 게시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며,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으니 같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녀의 생일이 바로 5월 5일이었다.
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그녀를 그토록 오랫동안 한결같이 좋아해 준 멋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축복해 주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를 본 순간, 내 입가의 미소는 완전히 얼어붙고 말았다.
‘서지한이야. 사실 나도 걔 꽤 좋아했거든.’
‘근데 어제 나한테 전화해서 자기 결혼한다고 털어놓더라. 그 글은 그냥 청춘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는 것뿐이니까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말래.’
‘참 내, 끝까지 솔직하지 못하긴. 전화기 너머로 말하는데 목소리가 꼭 울 것 같더라니까…….’
내 눈물이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나는 머리가 빈 것처럼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
친구는 반은 장난으로, 반은 진심을 담아 내게 물었다.
‘야, 내가 가서 결혼식이라도 난입하면 걔 나랑 도망칠까?’
……
1
나는 고개를 치켜올렸다. 하지만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아무리 애를 써도 멈추지 않았다.
“채아야?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목소리의 떨림을 억누른 채 물었다.
“너 고등학교 때는 지한이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공부만 하는 샌님 같다고 싫다더니, 갑자기 왜……”
임서윤의 목소리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그땐 너무 어렸잖아. 마음과 달리 뾰족한 말만 내뱉느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았네.”
“고등학교 연극부 시절에 지한이가 수석 극작가를 맡았었잖아. 걔가 쓴 극본은 늘 어둡고 비극적이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맡은 역할만큼은 늘 따뜻하게 배려받는 느낌이었어. 지한이의 모진 성격에도 다른 사람들은 다 비극을 맞이할 때, 유독 내 캐릭터만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서지한을 짝사랑하며 그 고등학교 3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쓴 모든 대본을 수집해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이름 없는 단역부터 시작해 뼈를 깎는 고통을 버텨낸 끝에야 비로소 무대 위에 서는 배우가 되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정말 간신히, 아주 간신히 그의 발걸음을 따라잡았는데.
겨우, 아주 겨우 서지한의 시선이 내게 머물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마침내, 우리 둘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왜 하필 지금에서야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나는 갑자기 나타난 임서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청혼해 놓고도 여전히 과거의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서지한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
오직 나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나는 도망치듯 전화를 끊고 침대에 엎드려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를 듣고 다급히 방으로 들어온 매니저가 경악했다.
“어머, 채아야! 울면 안 돼! 절대 안 돼! 조금 이따가 오디션 있단 말이야!”
“잊었어? 네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지안과 삼 년》 캐스팅 날이잖아! 몇 년을 기다려 겨우 영화화되는 작품인데, 눈이 이렇게 부어서 가려고 그래!”
매니저는 안절부절못하며 냉동실에서 아이스팩을 꺼내 내 눈과 얼굴에 사정없이 짓눌렀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가운 감각에 겨우 이성이 돌아왔다.
나는 아이스팩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깊은 침묵에 빠졌다.
《지안과 삼 년》은 서지한의 인생작이자 그가 가장 젊은 날에 집필한 최고의 걸작이었다.
그리고 그 소설 속 여주인공은 그가 유일하게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고 인정한 캐릭터였다.
서지한의 뒤를 쫓아온 세월 동안, 나는 그가 소설가로 전향해 첫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압도적인 재능 덕분에 그의 커리어는 막힘없이 탄탄대로를 달렸다.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손에 넣은 탓인지, 그는 매사에 초연하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고, 오히려 그런 차가운 매력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인간 서지한의 냉정함과 그가 창작해 내는 뜨겁고 강렬한 감정선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온라인상에서 《지안과 삼 년》은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작품이었고, 여주인공 ‘하지안’은 독자들에게 가장 특별한 캐릭터였다. 작가의 유례없는 편애 속에서 온갖 비극을 비껴가며 유일하게 완벽한 행복을 움켜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평소 신중하기로 소문난 내 매니저조차 이번 캐스팅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며 호언장담했다. 이 역할을 따내기만 하면 그야말로 배우 인생 최고의 정점을 찍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평생을 보장할 메가 히트 캐릭터가 될 터였다.
그녀는 나와 서지한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내 약지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캐릭터의 실제 주인공이 너 맞지?”
“남편이 원작자인데 이 역할은 당연히 네 따놓은 당상이지! 우울해할 시간 없어! 이제 우리 앞길엔 꽃길만 열릴 텐데!”
2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대중은 《지안과 삼 년》의 하지안이 나를 모티브로 탄생한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서지한이 그 소설을 집필하던 시기, 그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당연히 내가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죄송합니다, 채아 씨. 채아 씨는 하지안이라는 역할에 그리 어울리지 않네요.”
임시로 마련된 오디션장, 눈이 멀 것 같이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서지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현장은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로서, 그는 캐스팅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이곳에 앉아 있었다.
스태프들은 내 손가락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며 내가 그저 형식상 오디션을 보러 온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안 역할은 이미 나로 내정되어 있을 거라 짐작하면서.
하지만 서지한이 나를 대본 리딩 단계에서 가차 없이 떨어뜨릴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받은 충격과 상처 입은 눈빛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일까.
서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인물 관계도를 뒤적이더니,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조연 캐릭터 하나를 대충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역할이라면 줄 수 있어.”
나는 더욱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가 다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꼭 하지안이어야만 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전 꼭 하지안이어야 해요.”
서지한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그 미소가 내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가 말했다.
“말했잖아. 이 캐릭터는 실제 모델이 따로 있다고.”
“너는 아니야.”
현장에서는 이미 몇몇 이들이 몰래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이 영상이 유출되는 순간, 내 소셜 미디어는 그야말로 비난 여론으로 초토화될 것이 뻔했다.
나를 지지해 주던 팬들과 착각 속에 살던 나를 향해 온갖 비아냥과 조롱이 칼날처럼 날아와 꽂힐 터였다. 내 배우 커리어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 캐릭터의 수혜를 누리기는커녕, 평생 조롱거리로 남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억울한 마음을 억누르며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대체 누구를 캐스팅하려는 건데요? 누가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건데요?”
서지한은 누군가를 떠올린 듯, 조금 전까지 팽팽하던 기색을 거두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내뱉었다.
“당연히, 실제 주인공을 데려와야지.”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매니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나를 다급히 차로 데려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그녀는 서지한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미친 거 아냐? 이제 곧 가족이 될 사이인데 실제 주인공이 다 무슨 소용이야! 당연히 네가 맡았어야지!”
“채아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글 쓰는 인간들이 원래 유난 떠는 걸 좋아하잖아!”
하지만 정작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걱정은 이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는 것이었다.
서지한의 거절 방식은 너무나 가혹했고, 이 사실이 인터넷에 퍼진다면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불어 닥칠 것이 자명했다.
결국 그녀는 회사의 홍보팀과 긴급회의를 거쳐 결단을 내렸다.
하루빨리 나와 서지한의 결혼 소식을 대외적으로 공식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오디션 탈락 건은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예술가로서의 신념’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매니저는 열애 공식 발표를 위해 다정한 커플 사진을 요구했다.
나는 무심코 휴대폰 사진첩을 열었다가 순간 손을 멈췄다.
없었다…….
단 한 장도 없었다.
지난 7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영혼을 다 바쳐 연애를 해왔건만, 우리의 친밀함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은 오직 내 약지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뿐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현실이었다.
매니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지금은 악플러들과 시간싸움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녀는 급한 대로 손 모양이 서지한과 가장 비슷한 남성 스태프를 섭외했다. 나와 손가락을 맞잡고 다이아몬드 반지가 돋보이도록 연출한 사진을 찍어 공식 계정에 업로드했다.
오디션 거절 영상이 유출되기 직전, 간발의 차로 우리의 결혼 발표 기사가 먼저 세상에 나갔다.
인터넷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천재 작가와 톱스타의 로맨스에 오랫동안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해 오던 대중은 열광했다.
내 소속사 식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품 브랜드의 광고 제안들이 쏟아 들어오기 시작하자 사무실 분위기는 축제 쪽으로 기울었다.
그때, 홍보 팀장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나지막이 욕설을 뱉으며 내게 걸어왔다.
“채아 씨, 이것 좀 봐봐요.”
평소 개인 소셜 미디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던 서지한의 계정에 짧은 글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제 손이 아닙니다.]
3
그것은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매니저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분노로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이건 단순한 고집이 아냐! 대놓고 너를 매장하려는 짓이라고, 채아 씨!”
“채아 씨, 우리 같이 일한 세월이 몇 년인데 솔직하게 말해줘. 그 사람, 진짜 너한테 청혼한 거 맞아? 혹시 네가 혼자 만들어낸 환상은 아니지?”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허공에 둔 손이 멈추지 않고 가늘게 떨렸다.
마침 서지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나랑 상의 한마디 없이 마음대로 결혼 발표를 해?”
나는 말문이 막혔다.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내가 네 숨겨둔 정부라도 돼? 아니면 네 원수야? 우리 관계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추잡한 비밀이라도 되는 거냐고?”
서지한 역시 차갑게 비웃으며 나를 조롱했다.
“결국 이렇게 날 협박해서 하지안 역할을 뺏고 싶었던 거잖아.”
“이런 식으로 머리 쓰면 내가 고분고분 배역이라도 넘겨줄 줄 알았어?”
우리가 만나는 동안 이토록 거칠게 감정을 부딪치며 싸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방관자처럼 덤덤했고, 이렇게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기색조차 보인 적이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하지안이라는 가상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 캐릭터는 예비 신부인 나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 순간, 목구멍 끝까지 치욕스러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의 가시 돋친 말들이 내 얼굴을 매섭게 때리는 것 같았다. 무너져 내리는 자존심을 간신히 움켜쥐며, 나는 마음에도 없는 독설을 내뱉었다.
“그래!”
“나 하지안 역할 욕심나서 그랬어. 안 주면, 우리 그냥 끝내!”
이별을 선언하는 마지막 단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오늘만큼은 가슴속에 쌓인 찌꺼기들을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 마음을 완전히 비워내야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울 테니까.
“서지한, 너 나를 위해 글 한 줄이라도 써본 적 있어?”
“나를 바라보며 영감을 얻은 적은 있느냐고.”
“네 창작의 열망과 욕구는 도대체 누구를 향해 있는 건데?”
결국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안과 삼 년》의 실제 주인공이 임서윤이야? 인터넷의 그 ‘user0505’도 네가 쓴 글이지?”
수화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직 서로의 거친 호흡과 심장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칼로 에어내는 듯한 심장의 통증, 멈추지 않는 눈물, 처참하게 짓밟힌 꼴. 그것이 현재 나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혼식 날짜도 5월 5일로 잡은 거였구나. 그 애 생일에 맞춰서.”
한참의 정적 끝에 서지한이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약속한 대로 너랑 결혼할 생각이니까.”
“그 계정에 대해서는 서윤이한테도 이미 다 설명했어. 그냥 지나간 청춘의 아쉬움에 끄적인 낙서일 뿐이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일 아니라고.”
“난 단지 네가 다른 남자의 손을 빌려 결혼을 발표한 게 기분 나빴을 뿐이야. 대중에게는 조만간 내가 알아서 해명할 테니까 네 커리어에 지장 생기는 일은 없을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손 사진을 빌려 써야 했는지, 정작 본인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만난 오랜 세월 동안 다정한 커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던 건 그가 기록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기록을 남기기 싫어했던 그의 성정 탓에, 나의 10년에 걸친 짝사랑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묻혀버렸다. 나의 진심 어린 헌신 역시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나는 눈동자의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홍보 팀장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채아 씨, 서지한 씨 계정에 새로 글이 올라왔어요. 두 분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네요. 지금 여론은 다행히 우호적인 편이고 화제성도 엄청나요.”
“다만…… 진행 중이던 몇몇 광고 계약 건들이 일단 보류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당장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내 계정으로 들어가 소셜 미디어를 확인해 보았다.
서지한의 계정 홈을 새로고침하자마자, 새로운 피드가 올라온 것이 보였다. 《지안과 삼 년》의 공식 여주인공 캐스팅 소식이었다. 새로 캐스팅된 인물은 연예계 경험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작품 속 캐릭터 하지안의 실제 모델임을 공식 인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임서윤이었다.
관계 인정 기사를 올린 지 정확히 30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공식 발표를 빌미로 하지안 역할을 억지로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 서둘러 임서윤의 캐스팅 소식을 만천하에 공표해 버린 것이다.
나는 약지의 반지를 끊임없이 빼내었다가 다시 끼우기를 반복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반지는 점점 기괴하게 거대해져 갔고, 마치 머리를 들이밀면 그대로 갇혀버릴 단단한 감옥의 족쇄처럼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잘게 떨었다.
새벽 12시가 되어서야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밴에 올라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때 소셜 미디어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채아 너한테는 진작에 귀띔해 줬잖아.]
[우리가 한때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조심스럽게 알려줬던 거야. 정말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거든.]
4
나는 그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묵묵히 스케줄을 소화해 나갔다.
결혼식을 고작 사흘 앞두고서야 서지한은 아직 식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미간을 짚으며 촬영장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함께 생활하던 집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웨딩 전문 업체에 전부 맡겨서 일괄 처리하도록 하자.”
“우리끼리 다 챙기기엔 사흘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해.”
나는 아무런 반발 없이 그의 제안을 따랐다.
그리하여 서지한은 결혼식을 고작 3일 남겨둔 시점에 급하게 대행업체를 구해 모든 준비를 위탁해 버렸다.
초대할 하객 명단조차 작성하지 않은 채 말이다.
당황한 웨딩플래너가 그에게 하객 명단을 요청하기 위해 촬영장으로 연락을 취했을 때, 그는 지나치게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겨우 연결된 통화에서 그가 내뱉은 대답은 심플했다.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업체 직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직원들이 내게 전화를 걸어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나 역시 초대할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수많은 결혼식을 치러왔을 노련한 웨딩플래너조차 이런 기괴한 상황은 생전 처음 겪는 듯했다.
결혼식이라기보다는 마치 기한 내에 해치워야 하는 지루한 서류 작업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혼식 바로 전날 밤, 서지한은 충혈된 눈으로 집에 돌아왔다.
단 세 장짜리 대본을 수없이 고쳐 쓰며, 특정 장면에 온통 빨간 줄을 쳐가며 집요하게 매달려 있었다.
대충 훑어보아도 하지안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일에 그토록 태만하고 무관심하던 서지한이, 유독 그 가상의 인물에게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엄격하고 진지하게 굴었다.
그는 손에 펜을 쥔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고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내일 늦지 않게 깨워줘. 결혼식 가야 하니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태도였다.
이튿날 아침, 나는 제시간에 일어나 차분하게 신부 화장을 받았다. 마치 저예산 독립영화 촬영장에 투입되는 가난한 신부 역할을 연기하는 것처럼 차분하고 냉정하게.
서지한은 끝내 깨우지 않았다.
결혼식은 정오 1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몽환적이고 넓은 예식홀에는 오직 소수의 스태프들만이 서성이고 있었다.
텅 빈 홀을 둘러보며 스태프들은 신랑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매니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단상 아래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무기력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그녀는 속이 타들어 가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시간이 되자 잔잔하고 로맨틱한 웨딩 마치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나는 새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며 홀로 버진로드를 걸어 나갔다. 아무도 서 있지 않은 텅 빈 단상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직업적인 본능으로 카메라의 앵글을 확인했다. 오늘 결혼식에서 몇 장의 인생 사진이라도 남겨둔다면 나중에 팬들에게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이 결혼식 자체는 무의미했으나, 내 커리어에는 반드시 필요한 연출이었다.
하지안이라는 역할을 박탈당한 지금, 나는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이미지 타격까지 입은 상태였다. 평생의 꼬리표가 될 조롱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정당성을 입증해 줄 결혼식이라는 방패막이가 절실했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나는 차분하게 지시했다.
“카메라 각도를 오른쪽으로 좀 더 틀어주세요. 나중에 남편 사진을 합성하기 편하게 빈 공간을 충분히 확보해 둬야 해요.”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예식장의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임서윤이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단상 위의 나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서지한!”
“나 너 잡으러 왔어—!”
넓은 예식홀에는 오직 감미로운 음악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임서윤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한채아! 지한이 어디다 숨겼어?”
화가 끝까지 치민 내 매니저가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기도 전에, 잠에서 깨어 허겁지겁 달려온 서지한이 매니저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천천히 단상 아래로 걸어 내려가 약지의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매니저를 내 등 뒤로 보호하듯 감싸 안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서지한의 얼굴을 향해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던졌다. 그리고 차갑게 내뱉었다.
“꺼져.”
매니저가 내 등 뒤에서 낮게 속삭였다.
“대표님 귀국하셨어. 이 일 알고 완전히 꼭지 도셨으니까 지금 오고 계셔. 일단 저 쓰레기들부터 쫓아내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당장 꺼지라고 손짓했다.
서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비아냥거렸다.
“나더러 꺼지라고? 그럼 또 대역 신랑이라도 구해서 올릴 셈이야?”
그는 지난번 대역 손 사진 사건을 교묘하게 언급하며 나를 조롱했다.
“결혼하자고 매달린 건 너 아니었어? 이제 와서 이런 쇼를 벌여서 내게 하지안 역할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야? 아니면 나중에 사진 합성이라도 하려고? 지겹지도 않아?”
내가 미처 반박하기도 전에, 예식장의 문이 구두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난폭하게 열렸다.
그리고 넓은 공간을 장악하는, 지독하려치만큼 오만하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채아!”
“내가 뉴욕 상장식에서 종 한번 치고 온 사이에, 기어코 사고를 쳐?”
“내가 네 몸값 올리려고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그딴 쓰레기 시나리오 하나에 무릎을 꿇어? 업계 최고 조건의 대본들을 네 앞에 통째로 바쳐도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겨우 여기서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멍하니 서 있는 임서윤을 싸늘하게 훑어보더니 이죽거렸다.
“오호라? 동종 업계 경쟁자인가?”
“신랑 탈취가 취미인가 본데, 나도 끼워주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