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그는 내 낙태 동의서에 서명해 주었다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을 가던 날, 나는 도현을 마주쳤다. 아침까지만 해도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던 남자가, 지금은 임신한 ...
Chương (1)
第1章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을 가던 날, 나는 도현을 마주쳤다.
아침까지만 해도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던 남자가, 지금은 임신한 입양 여동생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마침 잘 만났네. 여기 사인해 줘.”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서명을 하고 나서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부가 출장 중이라 서아가 혼자 검진받기 힘들대서 왔어. 당신이 또 예전처럼 예민하게 굴까 봐 회사 일 핑계 댄 거야.”
이제 막 임신한 서아의 발걸음은 걱정되면서, 임신 5개월 차인 내가 혼자 병원을 찾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악을 쓰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렸을 뿐이다.
나의 비정상적인 차분함에 당황했는지, 도현이 다급하게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참, 방금 사인하라고 한 거, 무슨 서류야?”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임신중절 수술 동의서.”
……
1
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서아가 그의 팔을 꼭 껴안았다.
서아는 가당치 않다는 듯 눈살을 짓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새언니, 도현 오빠가 나랑 같이 병원 와서 화난 건 알겠는데, 어떻게 그런 걸로 농담을 해?”
늘 그래왔듯, 도현은 서아의 말 한마디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냈다.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스르르 풀리며, 나를 향한 지긋지긋한 질책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지수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서아 검사 끝나는 대로 바로 집으로 갈 테니까.”
5년. 1,825일 동안 이런 식의 말을 삼천 번은 넘게 들었을 것이다.
연애 1주년 기념일에는 서아와 여행을 다녀온 뒤에 나와 정동진으로 일출을 보러 가자고 했었다.
결혼 후 맞이한 내 첫 생일날에는 서아의 쇼핑을 도와주고 나서 생일 파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을 때조차, 그는 서아의 열이 내리면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서아는 늘 새로운 핑계로 그를 불러냈고, 도현의 우선순위에서 나는 언제나 그녀보다 뒤처져 있었으니까.
나는 손에 쥔 수술 동의서를 꽉 움켜쥐고, 산부인과 진료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조심스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마음속으로 마지막 다짐을 했다. 정말 딱 한 번만,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마침내 대기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울려 퍼졌다.
“32번 환자분, 이지수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기계적인 음성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하얗고 긴 병원 복도 어디에서도 내가 그토록 기다린 익숙한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휴대폰의 예약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술 동의서 사진 한 장과, 회사 인사팀에 보내는 짧은 메일이었다.
[미국 지사 파견 근무를 자원합니다.]
……
하늘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았을 즈음, 모바일 메신저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어? 아직 안 들어왔어?]
아랫배를 움켜쥔 채, 창백해진 얼굴로 택시를 잡아타며 답장을 보냈다.
[지금 가는 중이야.]
택시 기사님은 넉살이 좋은 분이었다. 거울로 내 안색을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학생,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 것 같은데 얼굴이 너무 안 좋네. 보호자는 같이 안 왔어요?”
내가 차창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바빠서요. 시간이 안 되나 봐요.”
서아가 부를 때면 자다가도 뛰어나가던 남자였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밤, 낯선 남자가 뒤를 밟는 것 같아 공포에 떨며 그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바쁘다며 택시를 불러줄 테니 타고 오라고 했었다. 가로등도 밝고 길에 사람도 많은데 유난 떨지 말라면서.
그날 이후로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데리러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사님은 혀를 차며 내 남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아픈 사람을 이 밤중에 혼자 보내나...”
나는 그저 쓸쓸히 미소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흐트러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할 무렵,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비가 오네. 우산이 없는데 아파트 정문 앞으로 마중 나와 줄 수 있어?]
답장은 의외로 빨리 왔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택시가 정문에 멈추자, 기사님께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1분, 2분... 그렇게 30분이 흐르도록 도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일곱 번이나 신호음만 가다 끊겼다.
여덟 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그의 목소리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천둥 번개가 쳐서 서아가 너무 무섭다고 울잖아. 서아 집에 와 있어.”
“그럼 난 어떻게 들어가라고?”
수화기 너머로 서아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고, 도현의 신경은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시간조차 없다는 듯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평소에 건강하니까 비 좀 맞아도 괜찮잖아. 집으로 들어갈 때 생강차 사 갈 테니까 그거 마셔...”
‘마셔’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툭 끊겼다.
기사님의 눈빛이 깊은 동정으로 물들었다. 기사님은 뒷좌석으로 낡은 우산 하나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학생, 이거 쓰고 가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
휴대폰을 움켜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가슴 한구석이 짓눌린 듯 먹먹하게 아파왔다.
나는 조용히 우산을 받아 들고, 기사님께 몇만 원을 더 얹어 요금을 결제한 뒤 차에서 내렸다.
2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현관 선반 위에 고급스러운 요추 보호대가 놓여 있었다.
브랜드 이름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임신 초기, 허리 통증으로 고생할 때 갖고 싶어서 몇 번이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제품이었다. 가격은 자그마치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끙끙 앓을 때마다 도현에게 기대며 응석을 부렸었다.
그럴 때면 그는 나를 안아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곤 했다.
“조금만 참아, 자기도 금방 지나갈 거야.”
이제야 그걸 사 온 모양인데,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쇼핑백을 집어 거실 구석 수납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대충 몸을 씻고, 평소처럼 도현을 기다리기 위해 스탠드를 켜두는 대신, 모든 불을 끄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다급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이지수, 현관에 둔 쇼핑백 어디 갔어? 당신이 치웠어?”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무슨 쇼핑백...?”
도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요추 보호대 말이야! 내가 서아 주려고 사 온 거, 당신이 가로챈 거냐고.”
“서아가 임신 초기라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잖아. 당신은 형님이라는 사람이 왜 매번 서아 물건을 탐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역시 내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의 싸늘한 원망이 담긴 시선을 받아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납장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혀 쇼핑백을 꺼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
“안심해. 손도 안 댔으니까.”
예전 결혼기념일 날, 도현은 은색 벚꽃 모양 목걸이를 사 들고 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내 선물인 줄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목에 걸어보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에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물었다.
“어때, 예뻐?”
하지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당장 빼. 당신 거 아니야.”
멍하니 굳어 있는 내 반응이 답답했는지, 도현은 거칠게 내 목에서 목걸이를 낚아챘다. 얇은 체인이 피부를 긁고 지나가며 빨간 피막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미안해진 그가 내 목덜미에 약을 발라주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그 목걸이, 누구 주려고 산 거야?”
그의 눈빛은 마법처럼 다시 부드러워지며 미소를 띠었다.
“서아 주려고. 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내 반년 치 보너스 다 털었어.”
나는 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침묵했다. 결국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내 선물은 없어?”
그는 아차 싶었는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핑크색 머리핀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자, 이거 당신 거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핀은 목걸이를 살 때 끼워준 사은품이었다는 것을.
서아가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해서 내 손에 들어온 쓰레기였다.
사랑과 무관심의 차이는, 늘 그렇게 사소한 틈새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회상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내 손에 종이 쇼핑백 하나가 쥐어졌다.
요추 보호대를 챙긴 도현이 나를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비 맞았다며. 이거 마시고 몸 좀 녹여. 오는 길에 특별히 사 온 생강차야.”
나는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생각 없어.”
도현은 기어코 포장을 뜯어내며 나무랐다.
“임신 중이잖아. 투정 부리지 말고 마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내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내 배는 이미 전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 초기에는 내 손가락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던 남자였다.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찾느라 호들갑을 떠는 통에, 상처가 다 아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이 웃겨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장난을 치면, 그는 나를 품에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너에 관한 일인데 어떻게 대충 넘어가?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잖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달콤한 말은 전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에게는 오랜 시간 함께 자란 첫사랑이자 입양 여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억지로 헤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은 8년 동안 비밀 연애를 했다고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그의 상처를 덮기 위한 대체품일 뿐이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생강차가 내 손에 쥐어졌다.
“식기 전에 얼른 마셔.”
말다툼하기 싫어 머그잔을 들어 몇 모금 삼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목구멍이 좁아지며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고, 팔과 목덜미에 붉은 두드러기가 사정없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도현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여기에... 뭘 넣은 거야?”
도현 역시 사색이 되어 허둥댔다.
“그냥 흑설탕이랑 생강만 넣었는데... 왜 그래? 여보, 왜 그래?!”
“119, 그래, 구급차 부를게. 지수야, 정신 차려봐.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도현은 눈시울을 붉히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나를 껴안았다.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나를 위해 이렇게 가슴 졸이고 불안해했던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도현이 보호자 동승을 위해 차에 오르려던 찰나, 그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서아의 전용 벨 소리였다.
그는 단 1초 망설이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서아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오빠, 칼에 손목을 베였어... 피가 너무 많이 나. 무서워, 빨리 와줘...”
도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구급차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지금 갈게, 서아야! 울지 말고 상처 꾹 누르고 있어!”
구급대원들의 외침도, 산소마스크를 쓴 채 헐떡이는 내 비참한 모습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심각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나는 중환자실(ICU)로 이송되어 밤새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내가 깨어난 것을 본 엄마는 안도하며 내 이마를 짚었다.
“병원에서 연락받고 엄마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너 땅콩 알레르기 있는 거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평소에 그렇게 조심하던 애가 어쩌다 그걸 먹었어?”
대답하려던 순간,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도현이 눈가가 붉게 충혈된 서아의 손을 잡고 들어서고 있었다.
3
나는 도현을 차갑게 응시하며 물었다.
“생강차에 땅콩가루가 들어있었어. 당신 알고 있었어?”
서아가 소리쳐 울며 도현의 앞을 막아서서 가로막았다.
“미안해요, 새언니! 도현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제 탓이에요!”
“제가 어디서 임산부가 땅콩을 먹으면 아기 머리가 좋아진다는 글을 읽었거든요... 그래서 오빠가 끓이는 생강차에 제가 땅콩가루를 탄 거예요.”
나는 아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눈을 감았다. 화를 억누르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너 나 땅콩 알레르기 치명적인 거 뻔히 알면서 그랬지? 이거 살인미수야, 알아?”
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현이 그녀를 자기 등 뒤로 숨기며 나를 나직이 타박했다.
“이지수, 말이 너무 심하잖아. 서아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아기 생각해서 그런 건데,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몰아세워?”
곁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도현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소리쳤다.
“강도현, 네가 지금 사람 새끼로서 할 소리를 하는 거냐!”
“지수는 네 아내고, 네 아이를 뱃속에 품었던 애야! 그런 애한테 외인 편을 들며 핀잔을 줘?!”
뺨을 맞은 도현의 첫 반응은 억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이었다.
“장모님, 서아는 남이 아니에요. 제... 제 여동생이라고요.”
서아 역시 도현의 뒤에서 나와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엄마를 쏘아붙였다.
“어머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어떻게 사위 얼굴에 손찌검을 하세요?”
엄마는 그녀의 가당치 않은 연기에 기가 차서 손을 뻗었다.
“이 영악한 년이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우 짓이야...”
하지만 다음 순간, 엄마는 무자비한 힘에 의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머리가 침대 모서리에 부딪히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엄마를 밀쳐낸 도현이 서아를 자기 품에 꼭 안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장모님, 저 때리신 건 참겠습니다. 땅콩가루 건은 제 잘못이 맞으니까요. 하지만 서아는 임산부예요. 아무리 화가 나셔도 임신한 사람에게 손을 대시면 안 되죠. 자식 귀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지수 알레르기는 장모님 가슴 아프겠지만, 서아 뱃속의 아기는 제가 소중합니다.”
말을 마친 도현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싸늘하게 흘겨보더니, 가차 없이 선언했다.
“당신 화 풀릴 때까지 당분간 안 올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렇게 그는 서아를 부축하며 병실을 나가버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와 엄마를 부축하고 비명을 지르듯 의사를 불렀.
엄마가 상처를 치료받는 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원래 눈물이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뼛속까지 시려오는 후회가 밀려왔다.
왜 진작 이 진흙탕 같은 관계에서 도망치지 못했을까. 왜 미련하게 그의 곁을 맴돌며 상처를 자처했을까.
머리에 붕대를 감은 엄마는 도리어 내 손을 꼭 잡으며 나를 위로했다.
“지수야, 엄마는 괜찮아. 울지 마라, 아기한테 안 좋아.”
눈물을 닦아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엄마, 아기 없어.”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웠어. 그리고 도현이랑 이혼할 거야.”
무거운 침묵 끝에, 엄마는 나를 품에 안아주며 어릴 때처럼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그래. 네가 무슨 결정을 내리든 이 엄마는 네 편이야. 지수야, 슬퍼하지 마라. 엄마가 네 뒤에 있잖아.”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목놓아 울었다. 도현과 나누었던 그 지긋지긋한 세월의 감정 조각들이 눈물과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사흘 뒤, 미국 지사 발령장이 나왔고, 나는 그날 밤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4
짐을 정리하러 집에 들렀을 때, 늘 비어있던 집에 도현이 있었다.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임산부용 보양탕을 끓이고 있었다.
거실에는 내 슬립을 걸친 서아가 내가 고심해서 고른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감자칩을 먹으며 TV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우처럼 눈만 깜빡이며 말했다.
“새언니, 제가 임신 초기라 몸이 무거워서 못 일어나요. 편하게 앉으세요. 냉장고에 요거트랑 과일 있으니까 꺼내 드시고요.”
내 집에서 나보다 더 안주인처럼 구는 꼴이란.
주방에서 국자를 들고나온 도현은 나를 힐끗 보더니, 병실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은 듯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퇴원했으면 연락을 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마침 서아 주려고 삼계탕 끓였는데, 이따 서아 먹고 남으면 당신도 좀 먹어.”
나는 그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거운 걸음으로 2층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서아의 콧소리 섞인 질문이 들려왔다.
“오빠, 새언니 나 때문에 화난 거야?”
도현이 달래듯 대답했다.
“아니야, 원래 저런 성격이잖아. 며칠 지나면 풀릴 테니 신경 쓰지 마.”
늘 저런 식이었다.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 주는 문제들은 단 한 번도 직시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뜨뜻미지근한 방관과 방임으로 일관하다가, 내가 스스로 지쳐 화를 식히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어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이 지나면 이 고통스러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내려왔을 때, 도현은 서아에게 직접 수저로 국물을 떠먹여 주고 있었다.
내 손에 쥐인 가방을 본 그의 손길이 멈칫하더니,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웬 캐리어야? 어디 가?”
내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출장.”
그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5개월인 사람한테 무슨 출장이야? 회사가 미쳤어?”
말을 하던 그의 시선이 내 허리춤으로 내려앉았다.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당신... 배가 왜...”
그 순간, 뒤편에서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서아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그릇이 바닥에 나뒹굴며 뜨거운 국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가 몇 달을 고민해서 직구한 거실 카펫이 순식간에 기름지게 젖어 들었다.
도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아를 품에 안아 올렸다.
나를 지나쳐 현관으로 뛰어가던 도현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내가 당신 회사 대표랑 아는 사이니까 출장 취소하라고 전화할 테니까!”
나는 대꾸하지 않았고, 그 역시 내 반응을 기다려줄 여유 따윈 없다는 듯 허둥지둥 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간 살아온 집안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도현과 서아의 다정한 커플 사진이 놓여 있었고, 장식장 안에는 두 사람이 원데이 클래스에서 만들었다는 커플 머그잔이 나란히 서 있었다.
벽면을 장식한 액자 속에는 전국 곳곳을 누비며 찍은 그들의 추억이 가득했다.
이 넓은 집에서 내 흔적이라곤 지금 손에 쥔 작은 캐리어 두 개가 전부였다.
현관문을 닫고 나와 미리 불러둔 택시에 올라탔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미국 땅에 비행기가 바퀴를 내디디고 휴대폰 전원을 켜자, 도현에게서 걸려 온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와 셀 수 없는 메시지 알림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많은 알림에 휴대폰 화면이 잠시 먹통이 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