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랄한 여자 조연 캐릭터가 그녀의 목숨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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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여자 조연 캐릭터가 그녀의 목숨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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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악녀'였다. 억지로 떠밀리듯 부여받은 악역의 서사를 모두 끝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떴을 때, ...

Chương (1)

第1章

나는 소설 속 '악녀'였다. 억지로 떠밀리듯 부여받은 악역의 서사를 모두 끝마치고 나서야, 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열여덟 살의 그해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벌게진 눈으로 휴대폰을 뒤져 나의 앙숙, 온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준아, 나 집을 못 찾겠어. 빨리 나 데리러 와줘.” 수화기 너머로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온성준! 너 지금 안 오면 너희 부모님한테 다 말할 거야! 네가 나 괴롭혔다고!”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조금은 위태롭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려.” 단 두 마디였지만, 마치 기나긴 시간의 강을 건너온 듯한 목소리였다. 그 시각,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던 온성준은 붉게 물든 욕조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분명 1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랍스터를 먹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거리 한복판이었다. 나는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낯설면서도 익숙한 동네에서 예전 우리 집 아파트를 찾아냈다. 하지만 경비원은 완강하게 나를 가로막으며, 우리 집은 이미 2년 전에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경비원이 직접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생판 모르는 남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방금 전까지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밖으로 튕겨 나오더니 집이 사라졌다고? 이게 말이 돼? 생각할수록 앞뒤가 맞지 않았다.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보니 고작 몇 천 원뿐이었다. 지나가는 행인에게 간절히 빌어 휴대폰을 빌렸다. 우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야 했다. 행인의 휴대폰 기종이 좀 이상하리만큼 최신형이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긴장감 속에 번호를 눌렀지만, 돌아오는 건 '결번'이라는 기계적인 안내음뿐이었다. 정말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온성준의 번호를 눌렀다. 성준이는 나의 소꿉친구이자 앙숙이다. 유치원 때부터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재수 없는 녀석. 녀석이 내 지우개를 뺏으면 나는 녀석의 숙제장을 찢었고, 내 책가방에 송충이를 넣으면 나는 녀석의 의자에 본드를 발라놓았다. 중학교 때 녀석이 전교 1등을 하면 나는 죽어라 공부해 2등을 차지했다. 고등학교 때 녀석이 반장이 되면 나는 부반장에 출마해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우리는 그렇게 10년 넘게 치고받으며 서로를 꼴도 보기 싫어했지만, 정작 떼어낼 수도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녀석뿐이었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나는 녀석이 비웃을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분명 특유의 그 재수 없는 얼굴로 낄낄거리며 나를 비꼬겠지.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 낯설고도 익숙한 세상에서 녀석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돌아온 것은 죽음 같은 정적이었다. 연결된 건 확실한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성준아, 나 집을 못 찾겠어. 빨리 나 데리러 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 소리를 질렀다. “온성준! 너 지금 안 오면 너희 부모님한테 다 말할 거야! 네가 나 괴롭혔다고!” 어릴 때부터 써먹던 우리만의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아무리 대판 싸워도 성준이네 부모님은 늘 내 편이었고, 결국 녀석은 마지못해 져주곤 했으니까. 잠시 후, 남자의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단 두 마디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성준이의 목소리인데, 내가 기억하는 열여덟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성인 남자의 묵직하고 깊은 음색. 게다가 지독히도 무력하고 갈라진 소리였다. 왜 갑자기 세상이 이렇게 변해버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그건 성준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성준이가 아니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몸에 딱 맞는 블랙 셔츠와 슬랙스를 입고 있었고, 훤칠하게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이었다. 이목구비는 소년 시절의 윤곽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은 듯 선이 더 굵고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건 그의 눈빛이었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타버린 잿더미 같은 눈.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차마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겉모습은 지독하리만큼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 그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본 순간, 찰나의 불꽃처럼 일렁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성준아?” 그의 울대뼈가 크게 한번 요동치더니,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타.” 나는 주춤거렸다. 외모는 성준이와 닮았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열여덟의 온성준은 오만하고 당당하며 '세상에 나보다 잘난 놈은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애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 남자는 온몸에 억눌린 슬픔과 피로를 두르고 있었다. “너…… 정말 온성준 맞아?”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어, 나야. 일단 타. 밖이 춥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 안은 엔진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나는 앞좌석에 앉은 성준이를 훔쳐보았다. 옆모습이 지나치게 창백했고 입술엔 핏기가 없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짙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본능적으로 녀석의 몸을 살피던 내 눈에 셔츠 소매 끝에 묻은 붉은 얼룩이 들어왔다. 나는 홀린 듯 녀석의 팔을 잡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미 붕대를 감아놓았지만, 상처가 깊은지 피가 계속 배어 나와 붕대와 셔츠 소매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스스로 손목을 그은 자국이었다. 나는 덜컥 화가 치밀어 소리쳤다. “온성준! 너 미쳤어? 왜 이랬어!” 우리가 앙숙이긴 했지만 원수는 아니지 않은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죽으려고까지 한단 말인가. 차 안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성준이는 부정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룸미러를 통해 뚫어지게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엔 슬픔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내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겁내는 사람처럼. 나는 다급하게 운전석을 향해 외쳤다. “기사님, 제일 가까운 응급실로 가주세요!” 기사는 곤란한 듯 백미러로 성준이의 눈치를 살폈다. 성준이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더니 낮게 읊조렸다. “……그렇게 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의사를 불렀다. 의사가 붕대를 풀자 성준이의 손목에 깊고 흉측하게 파인 상처가 드러났다. 피가 여전히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마치 내가 다친 것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자 성준이는 오히려 당황한 듯 서투르게 나를 달랬다. “울지 마. 나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 이게 어떻게 안 아파……!” 상처가 저렇게 깊고 피를 저렇게 많이 흘렸는데,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얘졌는데 안 아플 리가 없다. 분명 무지하게 아플 텐데. 그런데 성준이는 정말 아무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다독였다. 의사조차 황당하다는 듯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상처가 워낙 깊어 성준이는 곧바로 처치실로 옮겨졌다. 복도 벤치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보는데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 고였다. 녀석은 진심이었다. 장난도, 실수도 아니었다. 철저히 계획해서 자신의 생을 끝내려 했던 거다. 하지만 왜? 그렇게 오만하고 거침없던 온성준이 왜 이런 선택을 했단 말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그때 간호사가 밖으로 나왔다. “보호자 분?” 나는 벌떡 일어났다. “네, 저예요.” “환자분이 출혈이 심해서 수혈이 필요한데, 지금 혈액형 재고가 부족하네요…….” “제가 할게요! 저랑 쟤랑 혈액형 똑같아요.” 간호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툭 뱉어버렸다. “……여자친구예요.” 간호사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수혈실로 나를 안내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마침내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상처 처치는 끝났습니다만, 환자분 심리 상태가 매우 불안정해 보입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아보시는 게 좋겠어요.”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심리 상담요?” “네. 상처의 깊이나 위치로 보아 계획적인 자살 시도였습니다. 다행히 발견이 빨랐지, 안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나는 의사의 뒷말을 듣기도 전에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성준이는 침대에 누워 왼쪽 손목에 두꺼운 붕대를 감은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텅 빈 눈동자를 보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성준아.” 침대 곁으로 다가가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초점이 서서히 맞춰지더니, 이내 픽 웃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울보네.” 나는 벌게진 눈으로 녀석을 쏘아붙였다. “너 죽을 뻔했어! 내가 안 울게 생겼냐고!” 그런데 녀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래도 난 좋아.” “너 진짜 미쳤구나?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난 네가…… 네가 정말 가버리는 줄 알고……!”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녀석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도대체 왜 그랬어? 말해봐, 이유가 뭐야!” 내 다그침에 성준이는 그저 침묵하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은 수만 개의 흉터 같았고, 동시에 다시 피어오르는 희망 같기도 했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눈에 담았다. 그러더니 남은 오른손을 들어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성준이의 손은 차가웠지만, 손길은 지독히도 조심스러웠다. 내 체온이 닿자 그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진짜 너구나.” 나는 그의 손을 쳐냈다. “뭐가 진짜야, 딴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성준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설명해도 넌 이해 못 할 거야.”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말을 하라고!” 돌아오는 건 깊은 늪 같은 침묵뿐이었다. 그 슬픈 눈빛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졌다. 성준이는 입원을 거부했다. 의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신신당부한 뒤 퇴원을 허락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녀석의 붕대 감긴 왼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속이 자꾸만 울렁거렸다. “성준아.” “어.” “앞으로 다신 이런 짓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안 돼.” 고개를 돌려 녀석을 똑바로 쳐다봤다. “알았어?” 녀석은 살짝 웃으며 낮게 대답했다. “……알았어.” 차에 타자 주변 풍경들이 새삼 낯설고 신기하게 다가왔다. 나는 길거리의 모든 것을 성준이에게 물어봤다. “저건 뭐야? 처음 보는 건데.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 세련되게 변했어?” “와, 저건 또 뭐야? 진짜 신기하다!” 마치 시골 사람이 처음 상경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한참을 달린 차는 어느 대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나는 지나치게 화려한 집 외관을 보고 멍해졌다. “여기가…… 네 집이야?” 성준이는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어, 들어와.” 내부는 심플하면서도 곳곳에 은근한 사치가 묻어나는 인테리어였다. 거실은 광활했고 통창 너머로 잘 가꿔진 정원이 보였다. 현관에 서 있자니 모든 게 현실 같지 않았다. 내 기억 속 성준이네 집도 유복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건 평범한 부자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저택이었다. 성준이가 뒤돌아 나를 보았다. “뭐 해? 안 들어오고.” 나는 녀석을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집안은 깨끗했지만 묘하게 썰렁했다. 사람 사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모델하우스 같은 서늘함. 나는 무심코 물었다. “성준아, 우리 엄마 아빠는? 전화해봤는데 결번이더라고.” 성준이의 뒷모습이 찰나의 순간 경직됐다. “……해외로 이민 가셨어. 번호 바뀐 지 꽤 됐을 거야.” “그래? 아니, 그래도 나한테 말도 없이? 하나뿐인 딸을 두고? 진짜 너무하시네!” 사실 성준이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나에게 너무나 낯설고 기이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건 눈앞의 온성준뿐이었다. 성준이는 담담하게 "어"라고 대꾸할 뿐이었다. 나는 녀석을 곁눈질하며 마음속 의문을 던졌다. “성준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세상이 나한테 이렇게 낯설어? 그리고 너 말이야…….” 왜 이렇게 늙었어? 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성준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냐. 그냥 지난 몇 년간 좀 힘들었어.” 이렇게 성공해놓고 힘들긴 뭐가 힘들다는 건지. 분명 나에게 숨기는 게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곳은 내가 살던 시공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아직 이렇게 어린데, 녀석은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나는 12년 뒤의 미래로 건너온 것이리라. 웹소설 독자 짬밥이 어디 가진 않으니까. 녀석의 파리한 안색을 보니 가슴 한쪽이 아릿해졌다. 성준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커다란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손목을 그을 리가 없지.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성준이를 위해 아침을 준비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녀석이 회복될 때까지는 내가 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막 국수를 삶았을 때, 성준이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나는 서둘러 녀석을 불렀다. “성준아! 네가 좋아하는 토마토 달걀 국수 했어. 얼른 와서 먹어.” 성준이는 몇 초간 멍하니 서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네.” “당연하지. 너랑 10년 넘게 이웃 사촌이었는데 내가 네 입맛을 모르겠냐? 이번엔 네가 싫어하는 고추 안 넣었으니까 걱정 말고 먹어.” 성준이는 자리에 앉아 국수 한 입을 먹더니, 갑자기 허겁지겁 국수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급해 보여 나는 당황해서 녀석을 말렸다. “천천히 먹어, 천천히!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누가 뺏어 먹냐? 안 급해, 우리 시간 많아.” 내 말에 그제야 녀석의 속도가 잦아들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먹어야지. 앞으로도 계속해줄게. 네가 질려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성준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국수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녀석의 눈물이 뚝 하고 국수 그릇 안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서른이나 된 남자가 뭐 저렇게 눈물이 많아. 내가 괴롭힌 것도 아닌데 말이야. 흥,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식사를 마치고 성준이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을 다 듣진 못했지만 회사에서 온 전화인 듯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두르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내가 먼저 입을 뗐다. “볼일 있으면 나가봐. 나 집에 잘 있을게. 안 도망가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성준이가 주춤하며 대답했다. “……안 나가.” “급한 일 아니었어?” 성준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말했다. “상대적으로 보면, 안 급해.” 상대적으로? 몇 초 뒤에야 그 말뜻을 이해한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예전의 온성준은 저런 간지러운 말은 절대 못 하던 녀석이었는데, 역시 나이를 먹으니 입만 살아서 여자 꽤나 울렸겠구나 싶었다. “가려면 얼른 가!” 나의 재촉과 몇 번의 다짐 끝에 성준이는 마지못해 집을 나섰다. 현관문 앞까지 배웅하며 신신당부했다. “올 때 그 집 케이크 사 오는 거 잊지 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알지? 실망하게 하지 마라.” 성준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녀석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준이가 나를 해치지는 않겠지만,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이렇게 바보같이 살 수는 없었다. 마침 일하시던 아주머니도 시장에 가셔서 집안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성준이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녀석이 업무용으로 쓰는 듯한 컴퓨터가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최첨단으로 보이는 컴퓨터는 처음이라 좀 주눅이 들었지만 용기를 냈다. 전원을 켜자 비밀번호 입력창이 떴다. 기억나는 숫자를 다 넣어봤지만 모두 틀렸다고 나왔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내 생일을 입력했다. ……풀렸다. 컴퓨터가 켜지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브라우저 검색창에 우리 가족 성씨인 '서씨 가문'을 검색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정확한 내용을 찾기 위해 내 이름 '서다혜'를 덧붙였다. 첫 번째 뉴스를 본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맞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유명 기업 서씨 그룹 파산, 서 회장 부부 사업 붕괴 후 잇따라 별세] 눈이 침침해진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오타가 아니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스크롤을 내리자, 그보다 조금 앞선 시점의 기사가 보였다. [서씨 그룹 외동딸 서다혜 사고사, 향년 28세] 사고사. 향년 28세.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