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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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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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파티가 끝난 밤, 10년 동안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던 소꿉친구와 사고를 쳤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옷을 챙겨 입으며 ...

Chương (1)

第1章

생일 파티가 끝난 밤, 10년 동안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던 소꿉친구와 사고를 쳤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옷을 챙겨 입으며 내뱉었다. “천박하게, 이딴 수법까지 써야 했냐?” 침대 곁에 놓인 빈 주스 잔을 보며 나는 아무 해명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온몸을 짓누르는 근육통을 견디며 집으로 돌아와, 그와 장장 석 달 동안 연락을 끊었을 뿐이다. 다시 그의 소식을 들은 건, 그의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가 우리 집 거실에 나타났을 때였다. “우리 집 이 못난 놈이 웬일로 철이 들었는지, 상견례를 한다지 뭐니! 해수야, 네가 실내 디자인 전공이잖니. 신혼집 인테리어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주방에서 과일을 깎던 내 손이 멈칫했고, 끓고 있던 찻물이 손등 위로 튀었다. 옆에 있던 엄마는 반색하며 내 팔을 쳤다. “너희 둘, 결국 잘 된 거야? 내가 그랬잖아, 우리 딸내미가 다른 건 몰라도 낯짝 하나는 두꺼워서 연우 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아낼 거라고. 너 복 터졌다, 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강연우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구해수, 헛소문 퍼뜨리는 것도 정도껏 해. 설령 우리 사이에 애가 생겼다고 거짓말을 한대도, 난 너랑 결혼 안 해.” 두 어머니는 동시에 굳어버렸다. 당황한 연우 어머니가 연신 사과하며 아들의 등짝을 후려쳤다.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해수가 얼마나 참한 애인데! 너 이놈, 미쳤니?”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줌마, 괜찮아요. 그런데 그 부탁은 못 들어드릴 것 같아요.” 나는 내 아랫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저 임신했거든요. 이제 딱 석 달 됐어요.”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 평온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걱정 마세요. 강연우 아이는 아니니까요.” … 한마디가 떨어진 순간, 정적이 흐르던 거실은 폭탄이 터진 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연우는 옆에 있던 의자를 거칠게 걷어차며 이를 갈았다. “이 상황에서 그런 질 나쁜 농담이 나와?” 나는 경악한 엄마의 시선을 뒤로하고, 주방에서 끓여온 삼계탕 한 그릇을 내와 식탁 앞에 앉았다.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농담 아냐. 정말 임신했고, 정말 네 애 아니야.” 나는 미안함이 전혀 섞이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전에 확인했어.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주머니. 인테리어는 다른 사람 알아보셔야겠어요.” 고개를 숙여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오늘 토종닭 사 오라고 한 거, 나 몸보신 좀 하려고 그랬어. 의사가 아기 영양이 좀 부족하대.” 분위기는 바닥까지 가라앉았고, 엄마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연우 아주머니는 서둘러 강연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을 나서던 강연우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었지만, 끝내 잔인한 말을 던지는 건 잊지 않았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난 내 자식으로 인정 안 해.”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엄마가 식탁을 쾅 내리쳤다. “강연우 그놈을 10년 넘게 좋아한 건 알지만, 아무리 홧김이라도 그렇지! 그놈이 약혼한다고 네 정조까지 팔아먹으며 농담을 해? 연애 한 번 안 하던 네가 애가 어디 있어!” 나는 주머니에서 초음파 검사 결과지를 꺼내 엄마 앞에 놓았다. [임신 12주]라는 선명한 글자가 엄마의 입을 막았다. 엄마는 체념한 듯 눈을 감더니, 문득 생각난 듯 내 손목을 낚아챘다. “방금 저놈이 사실이라도 인정 안 한다느니 어쩌니 했지? 너희 둘,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이거 연우 애 맞지?” 나는 삼계탕 국물을 들이켜며 나직하게 답했다. “엄마, 몇 번을 말해. 강연우 애 아니야.” 엄마는 화가 치밀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 애 아빠가 누군데! 네가 연애를 하든 말든 엄마는 반대한 적 없어. 서른이 다 되도록 선 자리도 마다하고 강연우만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아빠 없는 애를 가질 수가 있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입덧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국물을 싱크대에 비워버렸다. 엄마의 잔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정기 접어들면 말할게. 그 사람, 내 임신 알고 있고 책임지겠다고 했어.” 엄마는 내 뒤를 쫓아오며 가슴을 쳤다. “책임? 요즘 세상에 그걸 어떻게 믿어! 낳고 나면 입 씻고 도망갈 놈들이 한둘인 줄 아니?” 순간,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보여준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분명 책임질 사람이다.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자마자 내 계좌로 거액의 양육비를 보내주고, 아기 용품을 손수 알아봐 주던 사람. 적어도 강연우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고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엄마, 걱정 마. 나 바보 아니야. 출근할게.” 가방을 챙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 차 앞을 강연우의 차가 빈틈없이 막고 있었다. 평소처럼 그에게 전화해 차를 빼달라고 하려다, 가방을 뒤적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석 달 전, 그와 냉전을 시작하던 날 내가 차 키를 돌려주었다는 것을. 망설임 끝에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찾았다. [차 좀 빼줄래? 출근해야 해서.] 메시지 옆에 뜬 붉은색 느낌표가 눈을 찔렀다. 차단당한 것이다. 그의 SNS에 들어가 보니, 10년 동안 바꾸지 않던 농구 선수 배경 화면이 사라지고 낯선 여자와 손을 맞잡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차 키까지 돌려받았으니, 차단하는 게 그에게는 당연한 수순이었겠지. 차를 돌려 나가려는데, 발에 무언가 걸려 넘어질 뻔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백미러를 붙잡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바닥에는 내가 그동안 그의 차에 두었던 물건들이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술 취한 그가 추울까 봐 챙겨준 내 코트, 그의 평안을 빌며 전국 유명 사찰을 돌며 구해온 부적, 행여 아플까 봐 꼼꼼히 챙겨 넣은 비상약 상자까지…. 그 외에도 우리가 함께 놀러 갔을 때 내가 깜빡 잊고 흘렸던 립스틱이나 사소한 소품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내가 가치가 없어지니, 내 흔적들도 그저 치워야 할 오물이 된 모양이었다. 조수석 창문 너머로 보이는 차 안은 핑크빛 방석과 귀여운 인형들로 꾸며져 있었다. 심지어 대시보드에는 장난감 핸들까지 붙어 있었다. 예전에 내가 작은 키링 하나만 걸어둬도 “남들이 보면 여자 태우고 다니는 줄 알겠어. 당장 치워.”라며 면박을 주던 사람이었다. 목이 메어왔다. 아, 이게 바로 ‘특별한 사람’을 향한 유난스러운 애정이구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주워 근처 쓰레기통에 처박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인 소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수야! 강연우 그 자식 진짜 미쳤나 봐! 약혼한대!” 이미 알고 있던 소식이라 그런지 덤덤했다. “응, 방금 보고 왔어.” “너 걔 SNS 봤어? 우리 동창들 다 뒤집어졌잖아! SNS는커녕 사진 한 장 안 올리던 놈이 럽스타그램을 도배를 해놨더라! 신부가 당연히 너일 줄 알았는데… 세상에, 그게 누구래?”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 말을 잘랐다. “그거보다 더 놀라운 소식 알려줄까?” “뭔데? 빨리 말해봐!”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나 임신했어. 너 이제 애기 이모야.” “뭐?! 장난해?” “진짜야. 이제 3개월 됐어.” 임신 진단서를 사진 찍어 보내주자, 소희는 휴대폰 너머로 비명을 지르며 울먹였다. “난 네가 평생 강연우 그 나쁜 놈만 바라보다 늙어 죽을 줄 알았어. 이제 그만 미련 버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우리 해수 장하다! 직접 애까지 만들고! 최고야!” “그래서, 애 아빠는 누구야? 어떤 복 받은 놈인데?” 나는 말을 아꼈다. “며칠 뒤에 그 사람 일 마치고 귀국하면, 네가 제일 먼저 보게 해줄게.” 사무실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소희가 올린 게시글이 눈에 띄었다. [하늘이 도우셨다! 내 친구 해수가 드디어 엄마가 된다니! 나 이모 된다!] 너무 요란스러운 것 같아 연락하려던 찰나, 강연우가 그 밑에 댓글을 달았다. [? 너까지 같이 연기하는 거야?] 소희는 1초도 안 돼 대댓글을 박았다. [애 없는 놈들은 입 닫고 갈 길 가시죠? 병원 직인 안 보여? 눈이 삐었나.] 가슴 한구석에 얹혀 있던 체증이 소희 덕분에 조금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퇴근 무렵, 누군가 보내준 꽃바구니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러자 강연우가 기어코 또 댓글을 달았다. [자위하면 뭐가 달라져? 내가 보냈다고 헛소문 퍼뜨리지 마.] 그의 눈에 나는 여전히 관심에 굶주린 가여운 여자일 뿐이었다. 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회사를 나오니 익숙한 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내려가고 험악한 표정의 강연우가 나타났다. “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택시 불렀어.” “부탁하는 거 아냐. 타라고.” 어쩔 수 없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조수석으로 가려던 몸짓을 멈추고 그의 차가운 시선을 피해 뒤로 숨은 것이었다. 강연우는 거칠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스쳤다. 신호 대기 중, 그는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려다 내 아랫배를 힐끗 보고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짓이겨 버렸다. “그 애, 지워. 그날 일은 내가 보상할게. 하지만 책임질 수는 없어.” 아랫배를 감싸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치 그날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다시 말하지만, 책임질 필요 없어. 네 애 아니니까.” 강연우는 욕설을 내뱉으며 경적을 크게 울렸다. “언제까지 그따위 연극을 할 거야? 너한테 다른 남자가 꼬일 만큼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 백미러로 비친 그의 눈엔 노골적인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창문에 비친 내 초췌한 얼굴을 보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는 모두의 우상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데다 공부며 운동이며 못 하는 게 없는 ‘완벽남’. 그를 쫓아다니는 여자는 줄을 섰고, 덕분에 내 아침 식사는 늘 그를 연모하는 여학생들이 보낸 도시락으로 가득 찼다. 내가 평범하게 생긴 덕분에 그들은 나를 경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전해줬을 때, 연우는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야, 너 나한테 이런 거 왜 줘? 나 너 안 좋아해. 착각하지 마.” 나는 두꺼운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실대로 말했다. “내가 쓴 거 아니야. 전해달래.” “그럼 다행이고.”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한테 딴마음 품지 마. 나한테 넌 그냥 성별 없는 생명체니까.”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지만, 나는 바보같이 그 뒤를 3년 내내 쫓아다녔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같은 반이 되었을 때, 그는 농구를 마치고 땀을 흘리며 다가와 내 물병을 뺏었다. “한 입만. 목말라 죽겠다.” 노을을 등진 소년의 젖은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귀 끝까지 붉어진 채 그를 거부했다. “왜 안 돼? 친구 사이에 쩨쩨하게.” 그는 막무가내로 물병을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가고 난 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떨리는 손으로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안경을 벗고, 서툰 화장으로 얼굴을 물들였을 때 그는 무심하게 내뱉었다. “못생겼어.” 수능 점수 50점을 포기하면서까지 그와 같은 도시의 대학에 갔다. 게임을 핑계로 고백하고, 술김에 생떼를 쓰며 온갖 방법으로 마음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과 주변 사람들의 조롱뿐이었다. 마지막은 석 달 전 생일 파티였다. 감기약을 사 들고 룸으로 돌아가던 길, 문 너머로 연우와 친구들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연우야, 구해수가 또 너한테 들이대면 어떡할 거냐? 걔 고백만 만 번은 채우겠다.” 강연우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얼마든지 하라고 해. 난 그냥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야. 솔직히 여자친구로서는 별로지만, 셔틀로 부려먹기엔 그만한 애도 없거든.” 문고리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문을 열 용기가 사라졌다. 그날 밤 이후,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어떤 암시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티가 끝나고 그가 먼저 나를 붙잡았다.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화풀이라도 하듯 나를 호텔로 데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옷을 챙겨 입고는 그대로 연락을 끊어버린 것이다. 급브레이크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서 있었다. 나는 큰 결심을 하고 그날 밤의 진실을 말하려 했다. “강연우, 그날 밤 우리 사실….” ‘아무 일도 없었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는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이슬아, 무서워하지 마. 지금 갈게. 금방 갈 테니까 기다려.” 그는 단호하게 떠났다. 홀로 남겨진 나는 잠긴 차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그가 부른 ‘이슬’이라는 이름. 그가 유일하게 거절당했던 선배, 한이슬이었다. 차가운 차 안에서 새벽까지 그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드디어 손에 넣은 첫사랑인데, 나 따위 때문에 그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겠지. 소희에게 전화를 할까 생각했지만, 강연우가 또 나를 유난 떤다고 몰아붙일까 봐 무서웠다.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띵해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인 건 하얀 천장과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였다. “너 진짜 사람 새끼니? 해수가 임신한 거 알면서 차에 밤새 방치해? 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 사람도 아니야!” 연우 아주머니가 아들의 뺨을 후려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면서도 아주머니를 말리고 있었다. “됐어요, 아주머니. 해수 일어났으니까 됐어요.” 나는 마른기침을 하며 그들을 멈추게 했다. 엄마가 달려와 내 손을 꼭 잡았다. “해수야, 괜찮아? 의사가 몸이 너무 약해졌대. 아기 겨우 지켰으니까 다신 위험한 짓 하지 마, 알았지?” 말은 나에게 하지만, 시선은 강연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연우 아주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해수야. 몸조리 잘해야지. 다신 이 녀석이 너 귀찮게 못 하게 할게.” 마치 내가 자기 아들에게 매달리다 이 사달이 났다는 뉘앙스였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돌렸지만, 강연우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챘다. “내가 부른 거야. 엄마가 뭘 안다고 그래.” 그는 삐딱하게 다가와 영양죽을 내 입가에 들이밀었다. 나는 거리를 두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화가 났는지 그릇을 쾅 내려놓았다. “안 먹어? 애 잘못되면 나 원망하지 마!” 그 말에 실소가 터졌다. 자기 자식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 연극은 대체 뭘 위한 걸까. 그 뒤에서 아주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나를 보는 눈빛에 불쾌감이 서렸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애 아빠 따로 있으니 신경 꺼.”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너 임신 초기니까 참는 거야. 네가 산 물건들 다 집에 보내놨으니까 알아서 해.” 침대 옆을 보니 아기 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강연우는 여전히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참에 모두가 있는 앞에서 확실히 설명해야겠다 싶었다. 누군가 질투하며 서운해할지도 모르니까. 막 입을 떼려는데,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강연우는 나를 거칠게 밀어내듯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이슬아, 네가 여긴 왜 왔어? 친구 병문안이라고 했잖아.”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한이슬은 옛날 음악실에서 보았던 우아한 미소 그대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오래된 친구라길래 들러봤어. 우리 예전에 인사한 적 있죠?” 나는 미소로 답하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녀는 침대 옆의 아기 용품을 보더니 놀란 듯 말했다. “어머, 난 준비도 못 했는데. 다음에 꼭 챙겨줄게요.” 강연우가 서둘러 말을 가로챘다. “내가 다 샀으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고는 내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구해수가 사달라고 부탁해서 간 거야. 아니면 갈 일도 없었어.” 아주머니도 거들었다. “그래, 우리 연우가 워낙 정이 많아서 그래. 이슬 양, 오해하지 마요.” 한이슬은 애교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봤고, 평소 참을성 없던 강연우는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다음엔 꼭 같이 가자. 네 연습 방해할까 봐 혼자 온 거야.”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농구 연습을 하던 연우는 내 실력이 형편없다며 타박했다. 공을 주우러 가던 길, 창가에서 피아노를 치던 한이슬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 그는 10년을 바쳐 그녀를 쫓았다. 한이슬은 도도한 백조처럼 유학을 떠났고 소식이 끊겼었다. 그런 그녀가 돌아왔으니, 어떤 남자가 흔들리지 않겠는가. 난봉꾼처럼 살던 강연우가 갑자기 마음을 잡고 결혼을 서두르는 것도 이해가 갔다. 며칠 뒤, 내가 임신해서 퇴원했다는 소문이 동창 단톡방에 퍼졌다. 누군가 모임을 제안했다. [구해수 임신에 강연우 결혼까지, 겹경사네! 다 같이 모여야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 반응을 구경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소희가 대신 화를 내려는 걸 내가 말렸다. “그냥 모임일 뿐이야. 오랜만에 얼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모임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한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짝꿍이었던 우리는 이제 은하수 너머의 타인처럼 멀리 떨어져 앉았다. 강연우는 한이슬을 보석처럼 챙기며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즐겼다. 나는 묵묵히 과일만 먹었다. 사람들은 내게서 별다른 반응이 나오지 않자 흥미를 잃고 흩어졌다.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오지 않은 친구들의 이름을 꼽던 중, 한 명이 손뼉을 쳤다. “맞다, 그 뚱보 있잖아. 길 막혀서 좀 늦는다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아, 심승현! 걔 예전에 구해수한테 고백했다가 차이고 집 가서 울었다던 놈 아냐?” 누군가 나를 보며 낄낄거렸다. “승현이 걔도 참 제정신 아니었지, 구해수한테 고백을 다 하고. 며칠 뒤에 바로 전학 갔잖아. 집에서 치료라도 시킨 거 아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연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마디 했다. “임산부 앉혀놓고 조롱하는 게 재밌냐?” “그리고 구해수랑 걔는 아무 상관 없어. 해수는 이제….” 그가 뒷말을 흐리며 나를 보는 눈빛엔 묘한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우리 남편한테 관심 많은 건 알겠는데, 이제 곧 올 거야.” 사람들이 멍하니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훤칠하고 기품 있는 남자가 내게로 다가와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보, 많이 기다렸지?” 강연우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저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