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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연애편지
소채원과 나는 50년이라는 세월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숨 쉬며 살아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Chương (1)
第1章
소채원과 나는 50년이라는 세월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숨 쉬며 살아왔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평생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지독한 미련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몰아쉬던 내게, 채원은 울먹이며 고백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 책상 서랍에 들어있던 그 분홍색 러브레터는 실수로 잘못 놓인 것이었다고.
그녀가 정말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상대는 학교의 우상이자 모두의 첫사랑이었던 서강우였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강우는 자유로운 바람 같은 애잖아. 내가 곁에 묶어두기엔 그 애의 날개가 너무 눈부셨어.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 순 없었으니까.”
병상에 누워 이미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내 손을, 채원은 마치 대단한 순애보라도 쓰듯 꼭 쥐었다.
“도현아, 다음 생이 있다면… 나 그때도 너한테 시집갈래.”
나는 아주 미세하게, 온 힘을 쥐어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싫어.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아.
그녀를 향한 눈먼 사랑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한국대학교 입학을 포기했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자 인생의 모든 궤적이 어긋났다. 꿈꾸던 남극 연구원의 길 대신, 나는 평생 기름때 절은 주방 한구석에서 프라이팬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거짓말처럼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로 돌아와 있었다.
내 책상 서랍 속에 얌전히 놓여 있는 분홍색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편지를 움켜쥐고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이번 생만큼은, 나도 저 새처럼 나만의 산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
1
손가락 끝이 편지봉투에 닿자마자, 옆자리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대박! 임도현, 너 러브레터 받았냐?”
짝꿍의 목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 퍼지자, 아이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그 순간, 교실 저편에 서 있던 채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강우를 쳐다보더니, 이내 흠칫 놀라며 시선을 거두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빨리 편지를 열어보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채원의 눈동자가 나와 강우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녀의 미간에 번진 망설임과 초조함이 고스란히 읽혔다.
성급한 녀석 하나가 편지를 뺏으려고 손을 뻗자, 채원은 결국 체념한 듯 무거운 걸음으로 내게 걸어왔다.
“그거, 내가 넣은—”
채원의 말이 허공에서 뚝 끊겼다.
그녀는 제 자리에 굳어 버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그 분홍색 편지를 쓰레기통에 처박는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누가 장난쳐 놓은 모양이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수학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철저히 무시한 채 펜을 움직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채원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 책상 앞에 잠시 멈춰 서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지나쳐 강우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끝이, 강우를 향한 숨길 수 없는 뜨거운 연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아려왔다.
채원을 짝사랑했던 3년의 시간. 전생에서 그 편지를 발견했을 때, 나는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얼마나 기뻤던지, 채원과 같은 도시에 머물기 위해 평생을 바란 한국대학교 합격증마저 찢어버리고 지방의 삼류 대학에 남았다.
내 꿈을 기꺼이 시궁창에 처박고, 평생 부엌데기로 살며 세 아이를 키워낸 것도 오직 그녀를 사랑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병들어 쓰러졌을 때, 채원은 병실 텔레비전 화면 속 강우를 바라보며 한 서린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도현아, 매일 밤 눈을 감을 때마다 생각해. 만약 그때 내가 그 편지를 제대로 전달했다면… 우리 인생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고단하진 않았을까.’
나는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 강우는 세계를 누비는 탐험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해,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박수갈채를 받고 있었다.
그 찬란한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채원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내 거칠고 굳은살 박인 손을 보았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듯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야, 차라리 잘된 거지. 강우는 자유로운 바람이니까, 내 곁에 가둘 순 없었어. 도현아, 다음 생에도 난 너랑 결혼할래.’
그날 밤 나는 숨을 거두었다. 눈이 감기기 직전, 오랜 세월 억눌러왔던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다음 생에는 절대 소채원과 결혼하지 않겠다.
한국대학교에 진학하고, 남극 과학기지로 떠나 내 꿈을 이룰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을 짓누르던 미련과 슬픔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온 신경을 책 속에 묻었다.
방과 후 종소리가 울리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의 흐름을 깨달았다. 교재를 정리해 가방을 메고 일어서려는데, 짝꿍이 다급하게 내 가방끈을 붙잡았다.
“야, 소채원 안 기다려? 맨날 같이 가잖아.”
나는 뒤를 돌아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안 기다려. 이제 평생 그럴 일 없어.”
2
교실 문턱 너머로 서성이는 슬쓸한 그림자를 모른 척하며, 나는 한 걸음씩 단호하게 걸어 나왔다.
집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논문 자료를 검색하려던 참이었다.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깨져 미간을 찌푸린 채 메시지 창을 열었다.
채원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미 읽지 않은 알림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다.
[왜 오늘 같이 안 가? 이제 나 공부 안 가르쳐 줄 거야?]
[응, 수능 얼마 안 남아서 내 공부 하기도 바빠.]
성의 없이 답장을 보낸 뒤, 나는 채원의 연락처를 '즐겨찾기'에서 해제하고 알림을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더는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나는 화면을 뒤집어 놓은 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전생에서 나와 채원은 유치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늘 같은 학교, 같은 반을 맴돌던 소꿉친구였다.
하지만 똑같은 선생님 밑에서 배워도 내 모의고사 점수는 늘 전국 수석 수준인 790점대를 웃돌았고, 채원은 400점도 채 넘기지 못했다.
“상관없어. 난 공부 머리 체질 아니니까.”
늘 인생을 대충 살던 그녀가 수능을 몇 달 앞두고 갑자기 밤새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를 시작하더니, 내게 진지하게 매달렸었다.
“도현아, 나 좀 도와줘. 나 너랑 같은 대학 가고 싶어.”
그녀를 3년 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나는 그 말에 가슴이 터질 듯 기뻤다. 밤을 새워가며 핵심 요약 노트를 만들고 기출문제를 분석해 그녀에게 바쳤다.
하지만 그 두꺼운 필기 노트가 결국 도착한 곳은 강우의 책상 위였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모의고사를 완전히 망쳐버렸다.
성적이 발표되던 날, 늘 부동의 1등을 지키던 내 이름이 아래로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어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성적표를 노려보았다.
채원은 내 곁에 서서 내 어깨를 토닥이려다 슬며시 손을 거두며 성의 없이 말했다.
“괜찮아, 다음 시험에 잘 보면 되지.”
시간이 흘러 부부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아이들이 강우를 향해 '만년 2등'이라며 수군댔고, 자존심이 상한 강우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그래서 채원은 나를 이용해 내 성적을 떨어뜨려, 제 첫사랑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워주려 했던 것이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수십 년 만에 다시 펼친 고등학교 교과서는 낯설었지만, 머리는 빠르게 예전의 감각을 찾아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샘 공부를 하다가 결국 다음 날 늦잠을 자고 말았다.
허겁지겁 가방을 메고 골목길을 꺾어 도는데, 익숙한 자전거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 뒤에 기대어 서 있던 채원이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도현아! 빨랑 타, 내 자전거로 같이 가자!”
손목시계를 확인한 나는 이를 악물고 자전거 안장에 올랐다.
내가 페달을 밟자마자 채원이 가볍게 뒷좌석에 올라탔다.
“너… 아직 나한테 화났어?”
채원이 품속에서 온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단팥빵을 꺼내 내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주머니를 슬쩍 쳐다보았지만, 내 마음엔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 대꾸 없이 묵묵히 페달만 밟았다.
골목길을 막 벗어나 대로변으로 접어들 무렵, 뒤에서 채원이 내 어깨를 급하게 쳤다.
“도현아, 잠깐만! 세워봐, 빨리!”
다급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잡자 자전거가 거칠게 멈춰 섰다.
“강우 발목 삔 것 같아. 나 가봐야 해! 도현아, 너 먼저 가! 늦겠다!”
채원은 뒷좌석에서 미끄러지듯 내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골목 모퉁이로 뛰어가 버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우가 길가에 주저앉아 붉어진 눈시울로 제 발목을 만지고 있었다.
3
채원이 지극정성으로 강우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학교를 향해 걸어갔고,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자조적인 실소를 터뜨리며, 주머니 속 단팥빵을 길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결국 지각을 면치 못했고, 1교시 내내 교실 맨 뒤에 서서 벌을 받아야 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강우가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우유 한 팩을 억지로 손에 쥐여주었다.
“도현아, 정말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지각하고…”
채원은 강우의 뒤에 든든한 버팀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내 손바닥 위의 우유를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교실 쓰레기통에 수직으로 떨어뜨렸다.
강우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임도현,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강우는 순수하게 사과하러 온 건데, 꼭 그렇게 사람 무안을 줘야 해?”
채원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반 아이들이 다 듣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나 우유 알레르기 있어…”
“핑계 대지 마! 임도현, 내가 다른 애랑 말 한마디 섞었다고 사사건건 유치하게 심술부릴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원은 질렸다는 듯 말을 자르고는, 강우의 손을 잡아끌며 쌩하니 교실을 나가버렸다.
“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하루 종일 네 비위나 맞춰줄 의무 따위 없다고!”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실소가 터져 나왔다.
채원은 까맣게 잊은 것이다. 아주 어릴 적, 철없던 그녀가 훔쳐 온 딸기 두 알 중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었던 날을. 그날 밤 나는 중증 알레르기 쇼크로 응급실로 실려 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버텨야 했다.
퇴원하던 날, 채원은 엉엉 울며 평생 내 알레르기를 지켜주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했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내가 우유를 마시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 이후 채원은 일방적으로 나와의 대화를 단절했다.
대신 대놓고 강우의 급식 식판을 챙겨주고, 아침마다 나를 기다리는 대신 굳이 30분을 돌아서 강우의 집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과거 오직 나만을 향했던 그 다정함이, 이제는 강우를 향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찔렀다.
“난 당연히 임도현이랑 소채원이 사귈 줄 알았는데, 결국 서강우한테 뺏겼네.”
“원래 소꿉친구는 첫사랑을 못 이기는 법이지. 임도현 불쌍해서 어쩌냐.”
나는 귀를 닫고 오직 칠판과 책에만 집중했다.
소문이 마음에 걸렸는지, 며칠 뒤 채원이 쭈뼛거리며 내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강우 자존심 센 애야. 네가 애들 앞에서 대놓고 망신 주면 안 되는 거였어.”
그녀는 내 책상 위에 무언가를 툭 올려놓더니,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기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강우한테 사과만 하면, 우리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낡아서 모퉁이가 다 닳아버린,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화해 쿠폰'이라고 적힌 얇은 종이 쪼가리였다. 어릴 적 내가 울 때마다 채원이 내밀던 장난감 같은 물건.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종이를 집어 들어, 그녀가 보는 앞에서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뿌렸다.
채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섰다.
다음 날, 채원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내 대각선 방향이었던 그녀의 자리는 그렇게 강우의 바로 옆자리로 옮겨갔다.
수학 시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던 순간, 내 시선 끝에 두 사람이 책상 아래로 남몰래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걸려들었다.
이전의 냉대가 내 관심을 끌기 위한 유치한 밀당이었다면, 이제 채원은 나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상은 온통 서강우로 가득 차 있었다.
4
수능을 앞둔 마지막 모의고사가 끝나고, 나는 교무실로 호출되었다.
“도현아, 축하한다. 한국대학교 우수 인재 조기 선발 전형에 최종 합격했다.”
엄청난 기쁨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횡설수설 감사를 표했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든든하게 두드리며 웃으셨다.
“미리 대학 입학 준비를 할지, 남은 수능을 경험 삼아 치를지는 네 선택에 맡기마.”
벅찬 숨을 몰아쉬며 교무실을 나서자마자, 모퉁이에서 채원과 강우가 다정하게 걸어오는 것과 마주쳤다.
채원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스쳐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과 짧은 통화를 마치고, 나는 다음 주 월요일 바로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했다.
일정이 다소 촉박했지만, 한국대학교에서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달간 남극 과학기지 현장 실습 및 자원봉사 대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 평생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절호의 기회였다.
방에서 짐을 정리하던 도중, 채원이 예고도 없이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내 손에 들려 있던 휴대전화를 거칠게 쳐서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임도현! 너 진짜 비열하다. 어떻게 선생님한테 고자질을 할 수가 있어?”
날아간 휴대전화 모서리가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귓바퀴를 타고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채원의 등 뒤에서 강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도현아, 내가 채원이 양보할게… 그러니까 제발 선생님한테 오해라고 말해줘. 우리 부모님이 아시면 나 정말 죽어…”
상처를 움켜쥔 채 상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모의고사에서 강우의 성적은 평소보다 100점 가까이 폭락했다. 교실 커튼 뒤에서 몰래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을 눈여겨보던 선생님이 강우를 불러 훈계를 하셨고, 두 사람은 그 원인을 내 고자질 탓으로 돌린 것이었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둘이 교실 구석에서 입 맞출 때는 안 무섭더니, 들통나니까 이제 와서 나한테 화풀이야?”
나는 붉은 피가 묻은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차갑게 대꾸했다.
채원의 안색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녀는 강우를 제 뒤로 숨기며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네가 교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이 우릴 부르셨어!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 임도현, 넌 평생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
주말이 찾아왔고, 나는 조용히 방에서 서울로 갈 짐을 꾸렸다.
어차피 채원에게는 말할 필요도, 알릴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채원이 내 집 문을 두드렸다. 정말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도현아, 나… 강우랑 헤어졌어.”
채원은 내 눈치를 살피며 한 걸음 다가와 내 손을 잡으려 했다.
“그동안 공부 때문에 미칠 것 같았어. 아무리 노력해도 널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내 성적으로는 여기 있는 대학밖에 못 가니까… 도현아, 우리 어릴 때 약속 기억하지? 같이 대학 가기로 한 거, 아직 유효한 거지?”
어릴 적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다짐했었다. 어른이 되면 꼭 같은 대학 캠퍼스를 거닐자고.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거짓말을 할 때면 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한국대학교는 매년 우리 지역에서 단 한 명의 합격자만 배출해 왔다.
이번에 합격한 내가 빠져 주어야 2등인 강우에게 예비 번호가 돌아갈 터였다.
사랑하는 첫사랑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 싫어하는 내게 머리를 숙이고 거짓 사랑을 연기하는 그녀의 정성이 참으로 가륵했다.
“그래, 그러자.”
더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원은 내 순순한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기쁨에 취해 방 한구석에 놓인 트렁크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왜 벌써 짐을 싸?”
“엄마가 출장 가셔서 잠시 정리하는 거야.”
머릿속이 온통 강우에게 승전보를 전할 생각으로 가득 찬 채원은 내 변명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알았어! 그럼 우리 월요일에 학교에서 봐!”
급히 대문을 나서는 채원의 등 뒤로, 강우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목소리로 조잘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나는 마당 구석을 마지막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 채원과 함께 심었던 꽃나무는 이미 검게 말라 죽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 비행기에 몸을 싣기 직전, 나는 소채원의 번호를 포함한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고 완전히 삭제했다.
채원아, 이번 생은 네 꼭두각시 노릇을 해줄 생각이 전혀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