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네 부서진 왕관을 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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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네 부서진 왕관을 원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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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스폰서 세계에는 누구나 알면서도 쉬쉬하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서그룹의 젊은 대표, 서연우가 그의 첫사랑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지난 5년 ...

Chương (1)

第1章

상류층 스폰서 세계에는 누구나 알면서도 쉬쉬하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서그룹의 젊은 대표, 서연우가 그의 첫사랑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곁에 끼고 살던 여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의 널찍한 침실, 연우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가은아, 벌써 5년이야. 이제는 남채원의 얼굴조차 가물가물해." "결혼해서 내 아이를 낳아줘. 우리 이제 평범하게, 예쁘게 살자." 그의 빛나는 눈동자 속에 소용돌이치는 애정을 바라보며, 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 그의 곁을 지켰으니, 마침내 연우의 차가운 마음을 녹인 줄만 알았다. 정말 그런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바로 앞둔 그날 밤, 신혼집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이혼하고 막 귀국했다는 그의 첫사랑, 채원이 방 안에서 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서연우, 나를 붙잡겠다고 겨우 그런 싸구려 여자랑 결혼해서 나를 모욕하려는 거야?" 내가 5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는 그 소리를 듣고 콧방귀를 뀌더니, 이내 더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때 넌 그 자식 손을 잡고 아주 미련 없이 떠났잖아." "이제는 너도 똑같이 당해봐야지.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어떤지 말이야." 방 안에서 이어지는 나지막한 대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울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저 내가 마음을 정하고 떠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1 방 안에서 채원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며 떠보는 듯한 어조로 변했다. "연우야, 네가 정말 사랑하는 건 나잖아. 임가은이라는 그 여자한테 너무 불공평한 짓 아니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낮고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설령 가은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그저 호감일 뿐이라 해도, 난 결혼할 거야." "적어도 그 애는 날 등지고 다른 남자와 떠나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무려 5년 동안이나 말이지!" 연우의 목소리가 가라앉자, 방 안을 감돌던 묘한 공기는 순식간에 빙점 아래로 얼어붙었다. 이내 채원의 표독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연우! 난 오직 너 때문에 남편이랑 이혼까지 하고 돌아왔어." "그런데 정말로 내일 그 여자랑 식장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짧은 침묵 끝에 옷가지를 매만지는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연우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 냉정한 톤을 되찾고 있었다. "채원아, 네가 나타나기만 하면 내 마음이 쉽게 바뀔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내일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 "하객석에 앉아, 내가 가은이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 문밖에 서 있던 내 손에는 방금 병원에서 받아 든 검사 결과지가 쥐어져 있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내게는 저 문을 열고 들어갈 자격조차 없었다. 마침내 고통의 끝에 찾아온 행복이라 믿었던 지난 5년의 동행. 하지만 연우에게 그것은 그저 옛 연인에게 복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나는 악을 쓰며 방 안으로 처 들어가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조용히 밀어 넣고, 이내 차가운 가을바람이 부는 서울의 밤거리로 걸어 나갔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연우는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를 보자마자, 그는 아이처럼 자랑스럽게 포장된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밀었다. "가은아, 식장 전체가 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리시안셔스로 가득 찼어." "내일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거야." 말을 마친 그는 뒤에서 나를 품에 꼭 안으며, 갈구하듯 내 머리칼에 턱을 비벼댔다. "역시 네 곁에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 "임가은, 넌 평생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지?" 나는 그 품에 안긴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만약 신혼집 문틈으로 흘러나온 채원과의 대화를 듣지 못했더라면, 나는 또 그가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피곤했을 거라며 마음을 쓰고,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 굳게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까워질수록, 내 코끝을 찌르는 낯선 여자의 짙은 향수 냄새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철저히 길들여진 나의 인내심으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미동 없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허공에 머물던 연우의 팔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지난달에 선물했던 넥타이핀은 어디 갔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아주 잠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태연한 척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아, 술자리가 길어져서 어디 흘렸나 봐. 내일 비서 시켜서 찾아볼게."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나는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머물며 오만함이 몸에 밴 그의 눈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서연우, 남채원 씨가 너 때문에 이혼까지 하고 돌아왔잖아." "내일 결혼식, 취소하자." 그 순간, 연우의 입꼬리에 걸려 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5년 동안 늘 온순하게 굴던 내가 먼저 이 판을 깨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듯했다. 눈동자에서 다정함이 서서히 걷히고, 낯선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임가은, 내 결혼식은 네가 취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서그룹 사모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그는 한 걸음씩 다가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짓눌렀다. "마지막 순간에 네 분수를 잊지 마." 2 연우는 늘 나를 두고 '직접 굴러 들어온 새장 속 새'라고 불렀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그저 연예계 변두리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던 무명 배우였다. 기름진 중년 스폰서들의 품을 전전하며 남은 인생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연말 시상식 뒤풀이 자리, 연우가 개인 화장실로 향하는 틈을 타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내 소개를 건넸다. 어두운 조명 아래, 연우는 손가락 끝에 끼워진 담배 연기 사이로 오만하게 나를 훑어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그날 이후, 화면 위에서 반짝이던 여배우의 얼굴은 사라졌다. 그리고 서연우의 저택에는 말 잘 듣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갇히게 되었다. 비서가 계약서를 건네며 흘리던 부러움 섞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임가은 씨, 아주 운이 좋으시네요. 서 대표님은 그 누구도 밤늦게 곁에 머물게 두지 않으시는 분이거든요." 밤새도록 그와 처음 만났던 순간의 꿈을 꾸다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호텔 신부 대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화려한 예식도, 나를 데려갈 신랑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서그룹의 나이 지긋한 집사가 다가와 멸시가 담긴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임가은 씨, 사모님께서 어젯밤 다급히 역술인을 불러 궁합을 다시 보셨습니다." "오늘 기운이 아주 흉하여 혼사를 치르기에 부적절하다고 하시는군요. 결혼식은 일단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재벌가에 순수한 사랑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거대한 자본과 권력 사이에서 힘없는 자가 치러야 할 대가일 뿐이었다. 휑한 대기실 안에는 에어컨 바람만이 시리도록 차갑게 불고 있었다. 소파에는 초조하게 굳어 있는 내 부모님과,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간신히 품위를 지키며 그들 앞으로 걸어갔다. "엄마, 아빠, 죄송해요. 식에 차질이 생겨서요..." 나는 허리를 굽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부모님은 안절부절못하며 손만 비볐고, 친구들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수근거렸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남편이 될 남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말하지 못했었다. 갑작스럽게 대단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가, 이제는 그 결혼이 무산되었다는 비참한 현실을 고해야 했다. 자존심이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되어 바닥에 사정없이 흩뿌려진 기분이었다. 부모님을 달래기도 전에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강렬한 붉은색 명품 드레스를 입은 채원이 거만한 걸음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슨 식장 준비에 차질이 생겼다는 헛소릴 믿어?" "서 회장님이 내가 돌아온 걸 아시고, 널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신 거야!" 내가 사색이 되어 굳어 있자,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하게 다가와 이죽거렸다. "회장님께서 그러시더라. 돈으로 몸뚱이 산 연예인 따위가 감히 드레스를 입고 서 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탐내냐고." 어머니의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고, 아버지는 분노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당장이라도 채원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나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아버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내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뺨이라도 갈겨주려던 찰나, 크고 따뜻한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어느새 도착한 연우가 나를 등 뒤로 숨기며, 살기 띤 눈빛으로 채원을 노려보았다. "누가 이 여자를 안으로 들여보냈지? 한 번만 더 이딴 분풀이를 했다간, 다시는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주마." 채원은 순식간에 안색이 변했고, 이내 경호원들의 손에 붙잡혀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무거운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연우는 내 부모님 앞에서 내 손을 꼭 쥐며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실은 식을 미룬 진짜 이유는, 가은이가 제 아이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산모의 안정이 최우선이라 판단되어, 결혼식은 아이의 백일잔치와 함께 올릴 생각입니다." -------- 하객들이 모두 떠나고 대기실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나는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나도 모르게 어루만지며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서연우, 방금 어른들 앞에서 한 말... 진심이야?" 피곤한 듯 미간을 짚고 있던 연우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내 배 위에 얹어진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비웃음이 섞인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임가은, 설마 진짜로 내 아이라도 낳을 생각이었어?" 내가 당황해 진실을 말하려던 순간, 그의 싸늘한 조소가 내 귓가에 꽂혔다. "오늘 내가 그 말을 지어내지 않았다면, 내일 아침 서그룹의 주가는 예비 며느리를 내쫓았다는 스캔들로 곤두박질쳤을 거야." "그리고 채원이가 나갈 때 충분히 비참해 보였잖아. 질투심에 며칠 밤은 지새우게 만들어야 버릇이 들지."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며, 그는 장난감을 다루듯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스폰서나 받고 살던 애가 주제넘게 감정을 품고, 아이까지 낳아 안주인이 되려 하다니. 그런 소설 같은 일이 실제로 있을 법해?" "임가은, 너랑 나는 원래 사는 세상이 달라. 내가 지불한 돈에는 네 감정 값 따윈 포함되어 있지 않아." 3 그 후 보름 동안 연우는 단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거실에 놓여 있던 리시안셔스 꽃다발은 완전히 말라비틀어져 바닥에 지저분하게 흩어졌지만, 나는 그것을 치우지 않았다. 다시 그의 소식을 접한 것은 텔레비전 뉴스 채널에서 송출된 서그룹의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서였다. 카메라 앞에 선 연우는 맞춤 정장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그 정장은 옛날 약혼식 날을 위해 내가 손수 고른 디자인이었다. 그때는 거추장스럽다며 입기 싫어하던 옷이었는데, 지금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채원의 손을 잡은 채 플래시 세례를 받고 있었다. "5년 전 저와 남채원 씨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음 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식장에서 제 아내를 위한 뒤늦은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회장이 술렁였다. 안면이 있는 한 기자가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서 대표님, 그렇다면 이전에 보도되었던 임가은 씨와의 결혼 발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순간, 연우의 입가에서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그는 완벽하게 선을 그으며, 지독하게 냉담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임가은 씨는 제가 아이를 몹시 바란다는 점을 악용해, 서 씨 가문의 며느리 자리를 차지하려 임신 진단서를 위조했습니다." "제 곁에 그런 영악하고 꿍꿍이가 가득한 여자를 둘 수는 없습니다." 나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신길 작고 부드러운 노란색 양말을 뜨개질하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은아, 부잣집 시집살이는 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다더니..." "엄마는 네가 부자로 사는 걸 바라지 않아. 제발 남들한테 손가락질받으며 뼈가 닳는 짓은 하지 마라." 순간 손끝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바늘이 손가락을 찔렀고, 붉은 피 한 방울이 부드러운 레몬빛 털실 위에 떨어져 붉게 번졌다. 나는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위로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깊은 피로감이 몰려와 몸을 일으켜 화장대 앞으로 걸어갔다. 서랍 가장 깊숙한 곳을 열었다. 5년 전에 서명했던 스폰서 계약서 옆에는, 3개월 된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사진 속의 아주 작은 음영은 심장박동을 내고 있었고, 제법 척추의 윤곽까지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나는 마스크를 쓴 채 서그룹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립 병원으로 향했다. 산부인과 과장은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 깍듯이 대했다. 그러나 내가 내민 중절 수술 동의서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다급히 책상 위의 유선 전화를 붙잡았다. "임가은 씨, 이 건은 제가 먼저 서 대표님께 보고를 드려야..." 나는 수화기를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으며, 힘없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만 뒤에서 딴주머니 차라는 법 있나요? 여자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요." "전화하지 마세요. 그 사람 아이 아니니까." 의사는 미친 사람이라도 보듯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재벌가의 치명적인 스캔들이라 지레짐작한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서둘러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나는 서류를 챙겨 수술실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침대에 누워, 동의서 맨 밑바닥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내려갔다. 상실이란 언제나 양방향으로 흐르는 법이다. 서연우가 미련 없이 버린 자식이라면, 나 또한 그보다 더 모질게 털어낼 수 있었다. 두 시간 후,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병원 문을 나섰다. 이른 봄의 살랑이는 바람이 한강 유역을 스쳐 지나갔다.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듯 믿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혼잡한 거리 한복판에 서서, 나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해외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람이 내 목소리를 흩뜨려 놓았다. "나한테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줘. 최대한 빨리." "평생, 서연우가 날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거야." 4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연우와 마주했다. 마취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연우는 의식적으로 나와 거리를 두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기자회견 날 무례하게 질문을 던졌던 기자는 이제 서울에서 일하기 힘들 거야." "지상파 방송사 대표들에게도 이미 손을 써 두었어. 네 나이도 이제 적지 않으니, 앞으로는 평범한 사람으로 얌전히 살아."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묘하게 아쉬움이 깃든 눈빛으로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5년 동안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사실을. "가은아, 네 집안 배경이 조금만 더 좋았어도 난 정말로 널 내 아내로 맞이했을 거야." 나는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응." 순순한 내 반응에 연우는 서류 봉투 두 개를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지난 5년 동안 내 비위를 맞추느라 고생 많았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두 채야. 그동안의 보상이라고 생각해." "앞으로 살아가면서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 비서에게 연락해.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더 바라보지 않고, 펜을 들어 서류 하단에 거침없이 내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시원한 필체였다. 서명을 마친 부동산 양도 계약서를 한쪽으로 밀어 두고, 나는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도 흔쾌히 사인을 마치자, 연우는 오히려 약간 당황한 듯 굳어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임가은, 이것 말고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서연우, 내가 여기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을까. 너와 나 사이에 놓인 계급의 격차는 평생 좁혀질 수 없는 바다와 같은데. 바라는 것이 많아질수록 멀어질 뿐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말했다. "서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담배는 좀 줄이세요." 우리의 마지막 저녁 식사는 그렇게 쥐 죽은 듯 조용히 끝났다. 나는 가방 하나만을 든 채 대기하고 있던 마이바흐 뒷좌석에 올랐다. 밀려드는 복통에 몸을 웅크렸다. 차가 저택 정문을 벗어날 때, 채원을 태운 붉은색 스포츠카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짙은 선팅 창문 너머로, 나는 저택 2층 안방에 따스한 불빛이 켜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커튼 너머로, 가냘픈 여자의 실루엣이 남자의 목에 매달리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임가은 씨, 대표님께서 한강 아파트로 모시라고 하셨는데, 바로 출발할까요?" 나는 시선을 거두고 창밖으로 멀어지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아니요, 공항으로 가 주세요." ... 저택 안, 내가 떠난 뒤 연우는 왠지 모를 초조함에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위층에서는 채원이 내가 쓰던 사소한 물건들을 더럽다는 듯 문밖으로 집어 던지며 투덜거렸다. "싸구려 냄새가 진동하는 물건들을 어떻게 안방에 버젓이 두고 살았대?" 그녀의 불평과 함께, 제대로 닫히지 않은 황색 종이봉투 하나가 계단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가볍게 날아올라 연우의 발끝 곁에 멈춰 섰다. 그 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이 삐져나와 바닥에 펼쳐졌다. 종이에 선명하게 적힌 단어들을 확인한 순간, 연우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는 그 얇은 종이 한 장조차 제대로 집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휴대폰을 낚아채 세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가은이 데리고 아파트에 도착했어?" 수화기 너머, 겁에 질린 기사의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흘러나왔다. "대, 대표님... 임가은 씨는 아파트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공항으로 가 달라고 하셔서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챈 연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뜯어내며 밖으로 내달렸다. "잡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잡아두란 말이야! 비행기 이륙을 막아! 당장!" 하지만 기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늦었습니다, 대표님." "가은 씨는 이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제게 한 가지 말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