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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피운 남편을 해고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 게시글에 시선이 멈췄다. ‘술김에 상사랑 사고 쳐서 임신이래요. 어떡하죠?’ 댓글 창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지극...
Chương (1)
第1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 게시글에 시선이 멈췄다.
‘술김에 상사랑 사고 쳐서 임신이래요. 어떡하죠?’
댓글 창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지극히 현실적인 두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상사가 솔로면 솔직하게 털어놓으시고, 유부남이면 군말 없이 지우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세요.’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데 그 순간, 원글 작성자의 답글이 새로 올라왔다.
‘상사는 유부남이에요. 아내가 딩크족이라는데, 남편은 술 취할 때마다 아이 갖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에라, 모르겠다. 방금 상사한테 톡 보냈어요. 일단 반응 좀 보려고요.’
그 찰나,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남편의 휴대폰 화면이 번쩍 켜졌다.
유 비서]라는 이름으로 도착한 메시지.
대표님, 아들 갖고 싶지 않으세요?
……
나는 딱 1초 동안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하게 내 생일 여섯 자리를 입력하자 잠금이 풀렸다.
방금 온 메시지 아래에는 구겨진 초음파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임신 3주 차라는 진단 결과였다.
공교롭게도 3주 전은 태오의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하던 날이었다. 피로연이 끝날 무렵 내게 미열이 있어 태오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자신은 뒤풀이에 참여하기 위해 다시 나갔다.
그날 밤 태오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 그는 너무 늦게 들어가면 내 잠귀를 깨울까 봐 근처 호텔에서 자고 왔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그날, 그의 옷깃에서 아주 미미하게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가 풍겼다.
시트러스와 아이리스가 섞인 미묘한 향.
전에 백화점 매장에서 시향만 해보고 차마 사지 못했던 바로 그 향수였다.
당시에는 태오가 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선물로 숨겨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의 가방과 옷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향수병은 보이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의 타래를 이어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단단한 두 팔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코끝으로 남편이 쓰는 익숙한 보디워시 향이 번졌다.
내 귓가에 닿는 그의 목소리에는 다정한 장난기가 묻어났다.
“불심검문 중이야?”
“그 여직원은 지난주에 진작 정리했어. 진아한테도 연락해서 그쪽 업체랑 진행하던 프로젝트 다 취소하라고 일러뒀으니까 푹 놓아도 돼.”
태오가 말하는 여직원이란, 얼마 전 아성 그룹의 전시 공간을 조율하던 대행사 책임자였다. 그녀는 태오에게 첫눈에 반해 그가 유부남인 것을 알면서도 공적인 자리를 빌려 호감을 표시하곤 했다. 심지어는 조수석에 은밀하게 자신의 스타킹을 흘려두고 가기도 했다.
그 일이 내 귀에 들어가자 태오는 주저 없이 내게 휴대폰을 넘겨주었었다.
“여보, 그 여자가 보낸 사적인 문자는 한 번도 답장 안 했어. 의심스러우면 언제든 봐도 돼.”
그때, 손바닥에 쥐고 있던 그의 휴대폰이 다시 두 번 진동했다.
유진아 비서가 보낸 새 메시지였다.
내가 화면을 터치하려던 찰나, 태오가 나보다 한발 빠르게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 무의식적인 순발력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업무 관련 급한 연락이라서 그래. 먼저 자고 있어, 내가 서재에서 처리하고 올게.”
제풀에 찔린 듯 어색하게 말을 흐린 태오는 서둘러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침대에 누운 나는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휴대폰을 켜고 아까 그 인터넷 커뮤니티의 게시글을 찾았다.
원글 작성자가 올린 ‘상사의 반응을 떠보는 중’이라는 글에는 이미 수천 개의 비난 댓글이 달려 있었다. 네티즌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가정을 망치려는 상간녀’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러자 작성자는 억울하다는 듯 대화 캡처 화면을 증거로 올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조작이라며, 관심을 끌기 위한 자작극이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화면을 확인한 내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내렸다.
비록 프로필 사진과 이름은 가려져 있었지만, 대화창 속 내용은 방금 전 태오의 휴대폰에 뜬 문장과 한 자도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태오의 답장은 이랬다.
- 어.
그의 평소 습관대로, 어떤 짧은 대답 뒤에도 늘 마침표를 찍는 그 문체 그대로였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고요한 거실로 나오자, 닫힌 서재 문틈으로 남편의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당분간 몸조리에만 신경 써. 아이만 무사히 태어나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
잠시 후, 그의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알잖아, 네게 정식 자리는 줄 수 없어. 착하지, 보채지 마. 지금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
이윽고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마주친 두 시선 속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디 가?”
“재무팀에서 데이터 오류가 크게 났다고 연락이 와서. 좀 골치 아프게 됐네. 회사 좀 다녀올게.”
그는 내 옆을 지나치며 버릇처럼 내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려 했다.
속에서 왈칵 비위가 상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무겁게 말을 뱉었다.
“회사로 가는 거야, 아니면 유진아한테 가는 거야?”
내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닿았다.
“방금 온 메시지, 나 다 봤어.”
태오는 찰나의 침묵 끝에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냥 장난친 거야. 내가 그런 멍청한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게다가 내가 약속했잖아, 평생 우리 사이에 아이는 없을 거라고.”
사실 그가 딩크족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은 나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다.
결혼 첫해, 회사의 기반이 채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20억 원 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태오는 밤낮없이 을을 자처하며 접대와 로비에 매달렸다. 한 달 넘게 그렇게 비위를 맞췄지만 상대 측은 교묘하게 계약을 미루며 그를 기만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나는 대학 동창의 인맥을 동원해 다른 대기업 투자처를 연결해주었다.
그 계약이 성사되자, 그동안 태오를 저울질하던 무리가 앙심을 품었다.
그들은 계약하러 가던 길목에 깡패들을 잠복시켜 태오에게 겁을 주려 했다.
그때 남편의 심장을 향해 날아들던 칼날을 몸으로 막아선 것은 나였다.
그 사고의 후유증으로 몸 상한 나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태오는 핏발 선 눈으로 내 병상 곁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미안해, 채원아. 내가 미련해서 널 지켜주지 못했어.”
그가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그가 업계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폭력배들과 배후의 업체를 완전히 공중분해 시켜 법의 심판대에 세운 것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걸어오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게 남편 복이 많다며 부러워했다.
태오가 나를 사랑했던 것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술에 취해 아이가 갖고 싶다고 울부짖던 그의 본심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결국 그날 밤 태오는 집을 나서지 못했다.
그는 내 눈앞에서 진아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없이 소리를 지르고 내게 사과하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해명했다.
“지난번에 회사 자재 업체를 급하게 바꾼 거 기억하지? 실은 그때 접대 자리에서 진아가 억지로 술을 받아 마시다가 정신을 잃고 몹시 험한 일을 당할 뻔했어.
미혼인 애가 그런 소문에 휘말리면 인생이 끝나니까 쉬쉬했던 거야. 아까 보낸 메시지는…… 우리에게 아이가 없으니, 자기가 낳을 아이를 우리가 입양해 줄 수 없겠느냐고 횡설수호한 거였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단칼에 거절했으니까. 진아한테는 장기 휴가를 주고 수술이 끝나는 대로 당장 권고사직 처리할 거야.”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박힌 가시는 뽑히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워서였는지 그날 밤은 유독 가위에 눌리며 깊이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서 나는 열여섯 살의 태오를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갔다.
마당에 서 있던 마른 체구의 소년. 뜰아래 아카시아 나무 아래 서 있던 그의 모습은 한 폭의 아련한 수묵화 같았다.
부모님은 내 손을 잡고 소년을 소개해주셨다.
“채원아, 이제부터 태오가 네 오빠란다.”
태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전우가 남긴 자식이었다. 아버지가 그를 거두신 데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훗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외동딸인 내가 거친 비즈니스 세계에서 홀로 상처받지 않도록 태오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그는 부모님이 내게 선물한 일종의 보디가드였다.
그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해 나는 온종일 참새처럼 그의 곁을 맴돌며 재잘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귀찮은 듯 거리를 두던 태오도,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내게 마음을 열고 장난을 걸어왔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오후, 아버지는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자던 태오에게 내가 몰래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하셨다.
더 이상 내 서툰 첫사랑을 숨길 수 없게 된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태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집을 나가서 이 업계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매장당하든가, 아니면 3년 안에 오직 제 손으로 10억 원을 벌어와 정식으로 내게 청혼하든가.
전자를 택하는 것은 파멸을 의미했다.
그 순간 내가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었는지, 나는 무작정 짐을 싸 들고나가는 그의 뒤를 쫓아 달렸다.
“오빠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같이 갈 거야. 그 돈, 나랑 같이 벌어!”
그 후의 3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시린 계절이었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며, 삼백 원짜리 식빵 한 봉지로 이틀을 버텼다.
태오는 낮에는 부둣가에서 짐을 나르고, 밤에는 뒷골목의 불법 사설 격투기 링에 올랐다. 오직 내게 따뜻한 코트 한 벌을 사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모았다.
그는 내게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매일 밤 그가 잠든 사이 셔츠를 들추고 그의 허리에 새겨진 10센티미터가 넘는 칼날 자국을 어루만질 때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고, 유언장에 따라 부모님이 평생 일구신 아성 그룹과 막대한 유산은 나와 태오의 몫이 되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다시 피어났다.
나는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미 통제할 수 없는 벼랑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옆자리가 썰렁했다.
태오는 집에 없었다. 아마 출근한 모양이었다.
감기 기운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웅웅거렸다. 약을 찾으려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려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낯익은 봉투를 발견했다. 뜯겨 나간 액상 수면제 껍질이었다.
그 순간, 모든 의문이 풀렸다.
태오는 어젯밤 내가 마신 따뜻한 우유에 수면제를 탔던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려다, 문득 휴대폰 알림에 뜬 유진아의 SNS 프로필을 눌러보았다. 두 시간 전에 올라온 사진이 있었다.
백운산 정상에서 붉게 타오르는 일출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품에 기대어 찍은 셀카였다.
남편의 얼굴은 잘려 있었지만, 그가 매고 있는 네이비색 체크 패턴의 넥타이는 너무나 낯익었다.
작년 태오의 생일에 내가 손수 이니셜을 새겨 선물한 것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우리 세 식구 함께 맞이하는 첫 일출. 아가야, 얼른 건강하게 자라렴!]
그리고 그 게시글 아래에는 태오의 아이디로 ‘좋아요’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내 시선은 유진아의 가늘고 하얀 목에 걸린 에메랄드 목걸이에 꽂혔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신 가장 소중한 예물이자 혼수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안방 드레스룸으로 달려가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은 처참하게 비어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보석 세트는 물론이고, 내가 몇 년 동안 모아두었던 골드바 10개마저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누구의 짓인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즉시 휴대폰을 켜 사설 탐정의 번호를 눌렀다.
“사람을 한 명 찾아주셔야겠습니다. 최대한 빨리요.”
한 시간 뒤, 나는 탐정이 보내준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찍고 양평의 한 산자락에 위치한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태오의 명의로 된 별장이었다. 매년 겨울 첫눈이 내릴 때면 나를 데려와 며칠씩 쉬다 가던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그는 진입로 공사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나를 한 번도 데려오지 않았다.
조금 전 탐정이 전해준 정보에 따르면,
이 별장은 재작년 10월 말에 이미 유진아의 명의로 이전되어 있었다.
그 시기는 유진아가 비서로 입사한 지 겨우 두 달째 되던 무렵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억누르며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현관문 도어락 비밀번호는 내 예상대로 유진아의 생일이었다.
내 생일로 잠금을 풀던 그의 다정함이 오직 나만의 특권인 줄 알았다.
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억 속의 아늑한 인테리어는 온데간데없고, 전혀 다른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화사한 핑크빛 벽지 위에는 두 사람이 다정하게 맞댄 사진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그가 출장을 핑계로 떠났던 세계 도처의 도시들마다, 유진아와 함께한 흔적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세계적인 명소 앞에서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더 안쪽으로 옮겼다.
오직 나를 위해 꾸며져 있던 피아노 방은 아기자기한 파스텔톤의 아기방으로 개조되어 있었다. 가구 모서리마다 세심하게 모서리 방지 테이프가 붙어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고가의 외제 유모차와 아기 장난감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부모가 될 두 사람의 정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방이었다.
그때, 2층 계단에서 발소리와 함께 태오의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젯밤에 억지로 채원이한테 사과하게 해서 마음 쓰였지? 어쩔 수 없었어. 일단 채원이 의심부터 가라앉혀야 했으니까.”
고개를 들어 올리자,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내려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진아는 그의 품에 깊이 안겨 울먹이는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요. 채원 언니가 전부 다 알게 되면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혹시라도 날 찾아오면 어떡해요?”
“내가 있잖아. 그 어떤 일도 너와 우리 아이를 다치게 두지 않을 거야.”
그들의 눈물겨운 대화 끝에, 내가 서늘하게 손뼉을 치며 나섰다.
“정말 눈물겨운 순애보네.”
나를 발견한 순간, 태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채원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머니 유품까지 훔쳐다가 상간녀한테 바친 내 남편이 여기 있는데, 내가 왜 없겠어? 백태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진아를 제 등 뒤로 숨겼다.
“훔친 게 아니라 잠시 빌려 간 거야. 미리 말한다는 걸 깜빡했어. 일단 진정하고 집으로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내 손을 잡으려는 그의 손길을 차갑게 쳐내며, 계단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자를 쏘아보았다.
“빌려 가? 휴가 중인 비서가 최고급 에메랄드 세트와 골드바 10개를 온몸에 두르고 참석해야 할 대단한 자리가 대체 어디인지 참 궁금하네.
지금 당장 내 물건들 돌려주지 않으면 경찰에 절도죄로 신고할 거야.”
태오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진아가 눈물을 쏟으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그녀는 제 목에 걸려 있던 에메랄드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얇은 체인이 살을 파고들며 허연 목덜미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죄송해요, 사모님! 제가 눈이 멀어 사모님 물건에 손을 댔어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절 때리시든 욕하시든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제 아이는 제발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진아가 내 발밑에 무릎을 꿇으려 하자, 태오가 기겁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빛에는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진아야, 왜 네가 고개를 숙여? 보석은 내가 가져다준 거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진아의 손에 쥐여 있던 에메랄드 목걸이를 빼앗듯 가로채더니, 내 얼굴을 향해 매섭게 던졌다. 분노로 이지러진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남이 쓰던 보석 따위 필요 없으니까 가져가! 이제 속이 시원해?”
묵직한 에메랄드 펜던트가 내 이마를 정통으로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마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보석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영롱한 초록빛 원석은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순간, 사방으로 요란하게 깨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 가슴속의 무언가도 처참하게 바스러졌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내게 화를 낸 적은 단 두 번뿐이었다.
첫 번째는 열여덟 살 무렵,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를 따라 집을 나오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였다. 그는 매정한 말로 나를 밀어내며 제발 돌아가라고 소리쳤지만, 실수로 나를 밀쳐 넘어뜨리자마자 사색이 되어 나를 품에 안고 꺼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오늘이었다.
그는 다른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내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일한 흔적을 제 손으로 박살 냈다.
이 유품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가 말이다.
태오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주우려다 날카로운 원석 끝에 손가락이 베여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품에 안긴 진아가 가냘프게 흐느끼자, 이내 그의 눈빛은 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서채원, 일이 이쯤 된 마당에 나도 더는 거짓말 안 해.
그날 밤 피로연 끝나고 진아랑 선을 넘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술에 너무 취해 있었고 고의가 아니었어. 진아가 임신한 건 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난 어떻게든 너한테 상처 주지 않고 우리 관계를 지키려고 애썼어. 그런데 네가 결국 이 판을 깨버린 거야.
나도 이제 내 아이를 갖고 싶어. 아성 그룹을 이어받을 내 핏줄이 필요해. 하지만 약속할게. 아이가 태어나면 네 호적에 올리고 네가 키우게 해줄게. 아성의 안주인은 영원히 너야. 그러니까 채원아,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기가 막혀 실소마저 나오지 않았다.
외도를 저지른 것은 그인데, 잘못은 전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내 탓이 되어 있었다.
제 회사를 이어받을 후계자가 필요하다며 뻔뻔하게 말하는 그 남자는 잊고 있었다. 아성 그룹은 내 부모님이 일군 회사이며, 부모님의 유언장에는 오직 ‘나와의 혼인 관계가 유지될 때만’ 그에게 경영권이 부여된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그는 두 번째 가정을 꾸렸고, 나 역시 더 이상 그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딴 년이 낳은 자식의 가짜 엄마 노릇 따위 더럽고 역겨워서 안 해. 백태오, 우리 이혼해.”
경악으로 물드는 그의 시선 앞에서, 나는 주저 없이 휴대폰을 꺼내 경찰 단축키를 눌렀다.
“수억 원 상당의 개인 귀중품 도난 신고를 하려고 합니다. 현장에서 용의자와 장물을 모두 확보하고 있으니 출동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