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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속죄 도구가 아닙니다
남자친구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의사였고,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재벌가 외동딸이었다. 전쟁 지역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는 ...
Chương (1)
第1章
남자친구는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의사였고,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이 곱게 자란 재벌가 외동딸이었다.
전쟁 지역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는 징계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친 환자들을 내팽개친 채 미친 사람처럼 폐허 속으로 뛰어들어 나를 파냈다.
“너한테 손톱만큼이라도 상처가 나면, 나 진짜 미쳐버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먼지투성이가 된 내 손을 꼭 쥐고 지옥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노트북을 빌려 아버지께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부 이메일을 보내려던 순간, 그가 가슴속 깊이 묻어둔 첫사랑에게 쓰다 만 임시 저장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그 사고에서 내가 너를 이렇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우리, 헤어지지 않았을까?]
01
내 이름은 한소희.
아빠는 늘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겪어본 시련이라곤 시럽을 깜빡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정도일 거라고 말씀하셨다.
과장된 농담이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랑과 비호를 받으며 자랐고, 의식주 모든 면에서 남들이 완벽하게 차려준 밥상만 받아왔다. 살면서 가장 피곤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백화점 세 층을 연달아 걸어 다니며 쇼핑을 했던 기억이 전부일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하필 내 마음을 빼앗아 간 사람이 서준우였다.
그는 평범한 가정환경에, 말수가 적고 차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남들처럼 대학병원에 남아 탄탄대로의 미래와 체면 서는 연봉을 챙기는 대신, 늘 가장 고되고 척박한 재난 지역만 골라 찾아다녔다.
남들은 그를 두고 현실 감각이 없는 이상주의자라느니, 고집이 너무 세서 미련하다느니 떠들어댔다. 그런 사람은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거나 주변 사람들을 전부 떠나보내고 말 거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준우는 나에게만큼은 정말이지 진심을 다했다.
내가 해산물 알레르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내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의 메뉴판을 통째로 외웠고, 한번은 내가 한밤중에 갑자기 고열로 앓아눕자 먼 지방에서 밤새 차를 몰고 달려와 밤을 꼬박 새우며 내 곁을 지켰다. 안전벨트가 답답하다고 내가 몰래 풀기라도 하면, 그는 무서운 얼굴로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가 다시 벨트를 멜 때까지 묵묵부답으로 시위를 하곤 했다.
그땐 그저 잔소리가 너무 많은 남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럴 때면 그는 가만히 내 옷깃을 매만져 주며 잠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소희야, 이런 걸로 나랑 고집 피우지 마.”
내 친구들은 준우를 두고, 딱 봐도 네 돈이나 배경을 바라고 만날 사람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아빠 역시 그 점만큼은 인정하셨다.
실제로 지난 3년 동안 준우는 내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고가의 시계를 선물하면 너무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거절했고, 아빠가 병원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도 그 자리에서 단칼에 사양했다. 심지어 내가 우리 재단 물품 전달식을 핑계로 그들의 구호 프로젝트 현장에 봉사하러 가겠다고 우겼을 때조차, 아빠를 보름 동안 끊임없이 조르고 매달려서 간신히 허락을 받아낸 기회였다.
출발하기 전날 밤, 아빠는 화가 나 탁자를 탁 치셨다.
“그런 위험한 곳에 기어코 왜 가겠다는 게냐? 네 몸뚱이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그 고생을 어떻게 견디려고!”
나는 아빠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딱 이틀만 있다가 준우 얼굴만 보고 바로 올게요.”
아빠는 눈을 흘기며 말씀하셨다.
“서준우 그 녀석이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널 가게 둬선 안 되지.”
하지만 현지에서 준우를 만났을 때,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결국 무거운 숨을 내쉬며 내 머리에 헬멧을 씌워주었다.
“딱 이틀만이야.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나는 일부러 심술을 부렸다.
“만약 내가 함부로 돌아다니면 어떻게 할 건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너 장난 받아주는 휴양지가 아니야.”
나는 입술을 삐쭉 내밀며 내심 섭섭해했다.
그다음 순간, 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톤을 낮추었다.
“얌전히 있어. 한국 돌아가면 우리 어머니 소개해 줄게.”
나는 순간 멍해졌다.
결혼이나 부모님을 뵙자는 얘기를 그가 먼저 주도적으로 꺼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로?”
“응.”
“그럼… 나랑 결혼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야?”
그는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고, 그의 목줄기가 긴장된 듯 크게 일렁였다.
“네가 원한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이번 힘든 여정에 자원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 구호 물품 임시 보관소 근처에서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머리 위로 콘크리트 잔해들이 무서운 속도로 쏟아져 내렸다.
02
돌더미에 완전히 깔렸을 때, 내 뇌리는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아스라한 소음 너머로 부상자를 다급하게 외치는 비명과 들것을 찾는 목소리, 그리고 다급하게 서 선생님을 연호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미친 듯이 절박한 목소리였다.
“소희야!”
그가 그런 톤으로 울부짖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목구멍에 피가 고인 듯 끝 음이 날카롭게 찢어지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그를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 선생님, 이쪽에 더 급한 중상자가 있습니다. 일단 여기부터—”
“비켜, 저리 꺼지라고!”
나는 차가운 먼지더미 아래 누운 채, 머리 위의 돌덩이들이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소리를 들었다.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 얼굴과 눈을 가득 덮쳤다.
주변 사람들이 징계니, 수칙 위반이니, 현장 무단 이탈이니 하는 무거운 단어들을 쏟아내며 그를 말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마침내 틈새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스며들었을 때, 핏발이 가득 서 충혈된 그의 붉은 눈이 보였다.
그는 폐허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맨손이 이미 피투성이가 되도록 돌을 걷어내고 있었다.
“소희야, 이제 괜찮아. 내가 왔어.”
그가 거친 손길로 나를 부서진 돌 틈 사이에서 낚아채듯 안아 올렸을 때, 그의 단단한 팔은 사정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품속으로 깊이 파고들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너 다쳤잖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손이 엉망진창이야.”
“나 괜찮다고 했잖아!”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붉은 눈 속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소희야, 너한테 손톱만큼이라도 상처가 나면, 나 진짜 미쳐버려.”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그가 나를 정말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특별편은 우리 가문 재단 측에서 급하게 손을 써 조율한 노선이었다.
비행기에 올라탄 뒤에도 나는 사지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얼굴과 손은 흙먼지 범벅이 되어 평소의 우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꼴이었다. 준우는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손을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비행기가 기수를 띄우자, 그는 고개를 숙여 내 먼지 가득한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눈시울이 따뜻해지며 마음속이 온통 몽글몽글한 안도로 가득 찼다.
“아빠한테 나 괜찮다고 메일 한 통 보내야겠어.”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개인 노트북을 건넸다.
“비밀번호는 예전 그대로야.”
그의 모든 기기 비밀번호는 늘 내 생일이었다.
메일함 프로그램을 켜고 새 편지를 쓰려던 찰나, 화면 위에 임시 저장된 발송 대기 메시지 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수신인 이름: 심지희.
[그때 그 사고에서 내가 너를 이렇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우리, 헤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방금 전까지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내 손등에 간절하게 입을 맞추던 준우는, 지친 듯 등받이에 머리를 기댄 채 까무러치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03
준우는 미동도 없이 곤히 자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쉬지 않고 연이어 수술과 진료를 감당한 탓인지 눈밑에는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턱 주변에는 거뭇한 수염이 자라 까슬해 보였다.
하지만 그 옆에 가만히 앉아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문득, 3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나눈 이 남자가 우주 저 멀리 있는 타인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차에 탈 때마다 유독 유난을 떨며 브레이크의 상태와 안전벨트 체결 여부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던 그의 행동. 내가 과속하는 것을 병적으로 혐오하여, 한번은 운전기사가 그저 평범하게 차선 추월을 했을 뿐인데도 그의 안색이 무섭게 굳어 차 안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일. 보조석은 사고 발생 시 가장 사망률이 높은 위험 구역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뒷자리에만 태우려 들던 일. 한번은 내 마음대로 바이크를 배워보겠다고 가볍게 투정을 부리자 차가운 얼음장 같은 얼굴로 나와 30분 넘게 다투다 마침내 내 헬멧을 바닥에 집어 던질 뻔했던 일까지.
당시 나는 친구들에게 내 남자친구가 겉대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일거수일투족에 노심초사하는 집착남이라며 짐짓 투정 섞인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들을 더는 곱씹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극도로 두려워했던 대상이 정말 '나'를 잃는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다른 누군가를 잃었던 사건'의 끔찍한 기시감이었을까.
비행기가 착륙하자 아빠가 미리 대기시켜 둔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이 출구 앞에 늘서 있었다.
준우는 내 캐리어를 한 손으로 끌며 걱정스레 미간을 모았다.
“소희야, 우선 집으로 갈래? 아니면 병원에 들러 정밀 검사부터 받아보는 게 좋겠어?”
“집으로 갈래.”
“집 안까지 데려다줄게.”
“아빠 사람들이 와 있어서 괜찮아.”
그는 예상치 못한 차분함에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소희야,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아무것도 아냐.” 나는 시선을 피하며 낮게 읊조렸다. “그냥, 많이 피곤해서 그래.”
그는 내 상태가 이질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육감적으로 느꼈을 테지만, 막 폭발 사고를 겪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돌아왔으니 일시적인 심경의 변화라 짐작했는지 더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손을 뻗어 내 이마를 부드럽게 짚어줄 뿐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몸 좀 추스르고 푹 쉬어. 상태가 좀 나아지면 정식으로 아버님 찾아뵙고 인사드릴게.”
“다음에 얘기하자.”
나는 그 건조한 한마디를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기 중인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아빠는 내 이마에 옅게 긁힌 상처를 보시자마자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 나를 품에 와락 끌어안으셨고, 그 얌전한 성품에 입 밖으로 험한 욕설을 뱉으실 뻔했다.
“그러게 내가 뭐라더냐! 그 험지에 왜 사서 고생을 하러 가! 서준우 그 등신 같은 녀석은 대체 애를 어떻게 보살핀 거야?”
평소 같았으면 준우의 이름만 나와도 내 일처럼 방어막을 치며, 아빠가 손톱만큼의 비난이라도 제기할라치면 온갖 변명을 동원해 감싸기 바빴을 나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달싹일 뿐, 아무런 대꾸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내밀한 조사를 지시했다.
타깃은 단 한 사람, 심지희였다.
그녀와 준우는 대학 동기였으며, 학창 시절 같은 의료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인터넷의 바다를 조금만 뒤져봐도 그들의 풋풋한 시절 사진들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낡은 사진 속에서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 시절 대학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과에서 공인하는 예쁜 커플이라며 그들을 응원하는 댓글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스크롤을 더 내려갔을 때, 수년 전 사회 면에 실렸던 짤막한 아카이브 뉴스 기사 하나가 화면에 걸렸다.
[여대생 교통사고로 영구 장애 판정, 가해 차량 현장에서 그대로 뺑소니 도주]
첨부된 사진은 노이즈가 가득해 흐릿했지만, 구급차 들것 옆에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있는 남자가 준우라는 사실을 나는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04
나는 준우와 사흘 동안 차가운 냉전을 유지했다.
그 사흘 동안 그는 매일 지치지도 않고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침에는 다리가 붇지 않았는지 살피고, 점심에는 제때 끼니를 거르지 말라 신신당부했으며, 밤에는 편안한 잠을 청하라 위로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이런 그의 세심한 정성에 금세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려, 그가 조금만 몸을 굽히고 들어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겼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다정한 안부 문자를 마주할 때마다, 뇌리 깊숙이 박힌 그 메일의 잔상이 유령처럼 되살아났다.
[그때 그 사고에서 내가 너를 이렇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사흘이 지나 네 번째 날 해 질 무렵, 그가 예고도 없이 내 집 앞마당으로 찾아왔다.
한 손에는 내가 유독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의 미니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짙은 남색 벨벳 케이스가 조심스럽게 들려 있었다.
“다리는 좀 어때? 통증은 없고?”
“응.”
“이마 상처는?”
“거의 아물었어.”
그는 머뭇거리다 벨벳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봐.”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상자를 응시했다.
그는 이내 정적이 흐르자 직접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 보였다.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가 단정히 박혀 있었다.
“원래 네 다가오는 생일날 서프라이즈로 프러포즈하려던 거였어.”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직이 고백했다. “근데 이번 폭발 사고를 겪고 나니까, 더는 우리의 시간을 미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만약 그 임시 저장 메일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어린아이처럼 그의 품에 안겨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긴장된 눈빛으로 나를 지시하듯 올려다보았다.
“소희야, 나랑 평생—”
“서준우.” 내가 조용히 그의 말을 잘라냈다. “너 옛날에, 정말 네 영혼을 다 바쳐서 좋아했던 여자 있었지?”
순식간에 사방의 공기가 영하로 얼어붙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내 질문에 대답해 줘.”
그는 입술을 굳게 가로지르며 침묵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마른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다 흘러간 과거일 뿐이야.”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다 흘러간 과거라서 아직도 그 사람 메일함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는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고, 단단히 각진 턱관절 주변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씹어 내뱉듯 물었다.
“그 위험한 폭발 현장에서 네가 목숨 걸고 나를 돌무더기 속에서 파내 품에 안았을 때, 네 머릿속을 채웠던 건 정말 나였니? 아니면 그 사람의 그림자였니?”
“소희야.”
“대답해 봐, 준우야.”
그의 눈빛에 순간 혼란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다급하게 내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나는 차갑게 뒤로 물러서며 손길을 거두었다.
“그건 그저 보내지 못하고 남겨진 예전 드래프트일 뿐이야. 그때 현장 상황이 너무 극단적이었고 내 멘탈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 휩쓸려 쓴 글이지, 다른 의도는 추호도 없었어.”
“다른 의도가 없었다고?” 내가 매섭게 추궁했다. “의도가 없는데 그런 문장을 굳이 구상해서 적어 내려간단 말이야?”
그는 또다시 입을 닫았다.
내가 진짜로 견딜 수 없었던 건 사소한 말다툼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 이미 스스로 명확하게 규정지은 정답이 있으면서도, 나를 잃을까 두려워 끝끝내 비겁하게 입을 닫아버리는 그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그때, 그의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음과 함께 화면이 밝게 빛났다.
액정 위로 새 메시지 팝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발신인: 심지희.
05
나는 그 자리에서 난동을 부리지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정말 비참해지는 순간은 남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자기 가치가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을 뻔히 인지하면서도 미련하게 매달려 구걸하고 따져 물을 때라고.
그래서 이튿날 저녁,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우리 가문 재단이 주최하는 자선 리셉션 파티에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해외 의료 구호 프로젝트의 기금 마련을 도모하는 뜻깊은 자리였기에, 아빠는 내게 대외적으로 얼굴을 비추고 관련 인사들과 교류를 넓히고 오라고 조언하셨다. 본래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불참하려 했으나, 비서가 올린 VIP 귀빈 명단을 확인한 순간 마지막 페이지에서 익숙한 세 글자를 발견하고 마음을 바꾸었다.
심지희.
파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식장에 들어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단 실무자 한 분이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여성을 내 쪽으로 정중하게 안내해 왔다. 이번 의료 사업의 파트너 측 수석 코디네이터라고 소개했다.
“한소희 실장님, 이쪽은 이번 아프리카 구호 연합의 심지희 팀장이십니다.”
그녀는 내 짐작보다 훨씬 조용하고 이지적인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차분하게 뒤로 묶고 심플한 블랙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인사를 건네며 몸을 가볍게 돌릴 때 왼쪽 다리가 다소 부자연스럽게 절뚝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 역시 예의 바른 가식의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지희 씨.”
“준우 씨에게 소희 씨 얘기 아주 많이 들었어요. 참 우아하고 눈부신 분이라고 하더니, 오늘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과연 과장이 아니었네요.”
지극히 통상적인 외교적 수사처럼 들렸지만,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준우의 이름이 불려 나오자 묘하게 귓가에 가시처럼 돋아나 찔려왔다.
나는 담담하게 미소를 유지하며 응수했다.
“준우 씨 역시 제게 지희 씨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곤 했어요.”
그녀의 정갈한 미소 끝자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 정말인가요?”
“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무래도 마음 한구석에 평생 잊지 못할 부채감으로 남은 분이니까요.”
그녀는 그 사실을 구태여 부인하지 않았다.
“소희 씨,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가벼운 한숨을 섞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준우 씨와 제 개인적인 관계는 이미 아주 먼 옛날에 완전히 정리가 끝난 사이니까요.”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요.”
나는 이 대화가 이 정도 선에서 우아하게 매듭지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기어코 쐐기를 박듯 불필요한 사족을 덧붙였다.
“그이는 지난 세월 동안 평생 마음에 씻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때 내 다리가 그렇게 부서진 사고가 바로 그이 눈앞에서 벌어졌거든요. 자신이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형벌 속에서 자학하며 살아왔죠.”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래서요?”
“그래서 자신이 소중히 아끼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남들보다 훨씬 이성을 잃고 제어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녀가 눈꼬리를 살짝 휘며 나를 연민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니 소희 씨가 준우 씨를 너무 탓하지는 말아줬으면 해요. 일부러 소희 씨 마음을 다치게 하려고 그런 비정상적인 집착을 부리는 건 아닐 테니까요.”
‘탓하지 말라’는 그 한마디가 참으로 오만했다. 흡사 자신이 서준우라는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이해하고 통제하는 본처라도 된 양 굴지 않는가.
참지 않고 쏘아붙이려던 찰나, 내 등 뒤로 묵직한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준우였다.
“지희야, 다리도 불편한데 왜 이렇게 오래 서 있어?”
그는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가냘픈 팔뚝을 부축해 올렸다. 아주 오랫동안 몸에 익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배려의 몸짓이었다.
그제야 내 존재를 인식한 그가 동공을 크게 키웠다.
“소희야?!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왜, 내가 여기 오면 안 될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는 즉각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지한 듯, 안색이 하얗게 굳어버렸다.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더는 그 구차한 변명의 변론을 들을 가치를 느끼지 못해 즉각 몸을 돌려 연회장을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준우가 황급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지만,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 도착했을 때 비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소희 씨, 준우 씨가 오늘 밤 심지희 씨를 데리고 함께 식장을 떠났습니다.”
06
나는 그날 밤 단 일 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떠오르자마자, 나는 그 반지가 든 벨벳 케이스를 고스란히 종이봉투에 담아 운전기사에게 건네며 준우의 오피스텔에 배달하고 오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돌아온 기사는 봉투를 돌려주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준우 씨가 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대신, 병원 뒤편에 위치한 사설 재활 클리닉 건물 주차장에 준우 씨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습니다.”
재활 클리닉.
그 단어를 듣자마자 심지희의 얼굴이 유령처럼 머릿속에 자동 연상되었다.
이성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여기까지만 하라고. 한 남자의 마음에 온전히 내가 서 있지 않음을 확인하는 작업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네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미련이라는 감정은 참으로 모순적이어서, 이미 칼날이 가슴 깊숙이 박혀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기어코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지저분하게 곪았는지를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야만 비로소 체념하는 법이다.
결국 그 끈질긴 미련을 이기지 못하고 오후 늦게 그 재활 센터로 향했다.
주차장 구석 차 안에서 약 40분을 죽치고 기다린 끝에, 마침내 센터 유리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준우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바로 떠나지 않고 계단 비상구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윽고 심지희도 밖으로 따라 나왔다.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을 때, 마침 그들의 대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여자친구가 눈치챈 모양이지?”
준우는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뱃불을 비벼 껐다.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내 온몸의 혈액이 순식간에 차갑게 빙결되는 기분이었다.
심지희가 다시금 나긋하게 물었다.
“정말 그 애를 놓아줄 수 있겠어?”
바람이 그의 낮은 목소리를 산산이 흩어놓았지만, 내 가슴에는 활자처럼 또렷하고 선명하게 박혔다.
“내가 너한테 진 빚이 있잖아. 어떻게든 갚아야지.”
그 순간, 나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 한 양동이를 사정없이 뒤집어쓴 것 같은 소름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