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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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죽는 날까지 나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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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등학교 시절의 비밀을 털어놓는 어느 커뮤니티 게시판에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글이 하나 있다. - 내 학창 시절은 우정이 세상의 전부였어. - 고...

Chương (1)

第1章

내 고등학교 시절의 비밀을 털어놓는 어느 커뮤니티 게시판에 추천을 가장 많이 받은 글이 하나 있다. - 내 학창 시절은 우정이 세상의 전부였어. -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가 정말 잘사는 집안에 얼굴도 예쁜 애였는데,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독히 가난한 고학생을 좋아했어. 심지어 그 애를 위해 유학까지 포기하려 했지. - 그 남자가 친구의 집안 재산이나 노리는 기생충 같은 놈이 될까 봐 걱정돼서, 친구가 쓴 러브레터를 집안끼리 잘 아는 다른 소꿉친구 남사친한테 전해줘 버렸어. -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친구는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집안이 망했고, 그 가난했던 남자는 자수성가해서 포브스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대기업 회장이 됐어. 글 아래에는 순식간에 수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 조회수 가장 높은 베스트 댓글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 글 추천해서 당사자가 꼭 보게 하자. 기생충 같은 친구는 인생에서 빨리 차단하라고.] 작성자는 빠르게 답글을 남겼다. - 그 친구는 이미 내 곁을 떠났어. 암에 걸려서, 3년 전에 죽었거든. - 할 수만 있다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서, 야간 자율학습 시간 내내 밤새도록 수다나 실컷 떨고 싶어. -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돌아갈 수 없어. 이 글은 순식간에 올해의 레전드 글로 등극하며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이야기 속 남주인공인 심도현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막 밤샘 비행을 마치고 입국하는 길이었고, 품에는 딸에게 줄 작은 토끼 인형을 소중히 안고 있었다. … 휴대폰 액정에 도현과 아내 유채원, 그리고 딸 다은이가 함께 찍은 사진이 떴다. 전화를 받자마자 다은이의 보조개가 움푹 패며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아빠, 왜 아직 안 와?” 도현의 얼굴에서 피로가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그의 눈빛에 다정한 애정이 서렸다. “다은이 인형 사느라 줄 서서 늦었어. 금방 갈게.” 다은이가 전화기 저편에서 신이 나 방방 뛰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채원이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녀의 눈매는 온화했고, 입가에는 난처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다은이 생일 파티는 내일 다시 해줘도 되는데.” 어두운 터널 속에서 도현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반짝였다. 그는 화면 속 채원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다은이 때문만은 아냐. 당신도 보고 싶었어.” 채원은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도현 씨는 참 사랑 표현을 잘하네요. 누가 그렇게 잘 가르쳐줬어요?” 도현의 대답은 모호했다. “그냥…… 배운 대로 흉내 내는 것뿐이야.”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그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도현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사랑을, 그는 고스란히 마음속에 담아두었었다. 서툴게 배우고 모방하더니, 이제는 더 큰 사랑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도현은 마침내 사랑하는 법을 배웠지만, 그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었고, 다은이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들었다. 채원은 화면 너머로 도현에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건넸다. 그녀는 SNS를 넘겨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 레전드 글을 도현에게 읽어주기 시작했다. 다 읽은 채원이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에, 너무 안타깝다. 그 친구가 중간에서 훼방만 놓지 않았어도 두 사람 정말 행복했을 텐데.” 태블릿으로 서류를 검토하던 도현의 손끝이 일 순간 굳었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 운명이지. 하늘도 두 사람이 이어지길 바라지 않았던 거야.” “안 될 인연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법이니까.” 가슴 한구석이 홧홧해지며 쓰라린 거품이 일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도현은 그런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운명 따위는 우리가 개척하면 된다고 말하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용감했던 소년은 내 단짝 친구인 지수에게 모진 모욕을 당하고, 내가 다른 남자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영영 사라져 버렸다. 내가 죽은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실망과 상처로 얼룩진 나약한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하서연, 난 그냥 네가 키우는 개일 뿐이었어?’ 조수가 몸을 돌려 도현에게 내일 일정을 보고했다. “내일 모교 청아고등학교에서 강연이 있으십니다.” 도현의 곁에서 3년 동안 영혼으로 머물며 지켜본 덕에, 나는 그의 목소리 톤만으로도 진짜 기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실상은 전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감과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조수가 일정을 재차 확인하며 덧붙였다. “자랑스러운 동문 자격으로 강연하시는 거라 회사 이미지 제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그리고 참석자 명단도 확인해 봤는데, 회장님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 하실 만한 인물은 없습니다.” 도현은 가죽 시트에 몸을 천천히 묻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지. 일찍 끝내고 돌아오자고.” 도현의 등장으로 학교 기념 행사장 전체가 들썩였다. 소란스러운 자리를 피해 도현은 홀로 조용히 교정을 거닐었다. 화려한 타이틀을 내려놓은 그는 잠시 고등학교 시절의 소년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교실, 자율학습실, 도서관, 수영장…… 우리가 함께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나누던 공간들은 모두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대로였다면 도현은 지독한 혐오감을 느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을 테니까. 후원의 잔디밭에 다다랐을 때, 도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제야 떠올랐다. 이곳은 내가 소꿉친구인 준우에게 고백했던 장소였다. 그날 나는 꽃과 촛불, 풍선으로 이곳을 화려하게 장식했었다. 그때 도현 역시 지금 그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도현?” “네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네.” 내 단짝 친구였던 한지수의 목소리가 내 회상을 깨뜨렸다. 지수는 내 기억 속 모습보다 훨씬 수척해져 있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머리는 벌써 반백이 되어 있었고, 예전의 생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도현은 담담했고,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듯 품위 있게 말을 받았다. “사업가는 이익을 따르는 법입니다. 제게 득이 되는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지수가 씁쓸한 한숨을 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때 일은 오해야. 서연이 너무 원망하지 마.” “그 애는 집안 뜻대로 유학을 떠났지만, 가자마자 집이 파산했어. 하룻밤 사이에 모든 걸 잃고 타지에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너 이제 가질 거 다 가졌잖아. 잊을 건 이제 그만 잊어줘.” 도현의 눈에 조소 섞인 냉기가 서렸다. “하서연의 대변인으로 오신 겁니까?” “이번엔 몸값을 얼마로 책정했답니까? 5억? 아니면 10억?” “4년 전보다는 저렴하겠군요. 그때 10억에 팔려 갈 때는 처녀였지만, 지금은 가치가 많이 떨어졌을 테니까.” 4년 전, 집안이 완전히 파산했을 때였다. 큰아버지는 사채 빚을 갚기 위해 공장에서 일용직으로 연명하던 나를 강제로 어떤 자산가의 침대로 밀어 넣었다. 내게 약을 먹이기 직전, 큰아버지는 나를 10억에 넘겼다고 말했다. “10억이면 네 부모님이 남겨주신 회사를 살릴 수 있어. 서연아, 우리 다 같이 길바닥에 나앉아 굶어 죽을 수는 없잖니. 우린 네 유일한 혈육이잖아!”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기어들어 간 침대의 주인은 도현이었다. 도현 역시 약 기운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붉게 달아오른 나를 향해 이를 악물고 모진 말을 내뱉었다. “하서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질이구나.” “내 라이벌과 짜고 나한테 약까지 먹이다니. 내가 예전처럼 네 개가 되어 네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줄 알았어?” “그 10억짜리 이중 계약서, 내 모든 걸 걸고 법적으로 물고 늘어질 거야.” 그때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모르겠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피가 나도록 도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도와줘.” “네가 나를 안아주기만 하면, 우리 가족을 살릴 수 있어.” 도현은 나를 얼음이 가득 찬 욕조 속으로 사정없이 밀쳐 넣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 정신을 잃어가던 찰나, 도현이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깨진 유리 조각으로 제 손바닥을 깊게 긋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나와 닿는 것을 거부했다. “하서연, 더러워.” “네 가족을 살리겠다고 발악하면서, 내 가족은 안중에도 없었지?” “우리 엄마…… 너 때문에 차에 치여 돌아가셨어. 난 이제 엄마가 없어, 영원히.” 지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녀는 한참 동안 감정을 억누른 뒤에야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하서연은 이제 너를 찾아오지 않아.” “서연이 암이었어. 4년 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돌아온 뒤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어.” “그리고 3년 전, 이 서울 땅에서 죽었어.” 도현은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자신이 계약서를 거꾸로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 번째 지적을 받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는 여전히 이런 면에서 서툴렀다. 열일곱 살, 나를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당시 나는 부모님이 남겨두신 신탁 자금을 펑펑 쓰며 수많은 학생을 후원하고 있었다. 내 비위를 맞추며 아양을 떠는 아이들 사이에서, 도현은 유독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늘 하얗게 물이 빠진 셔츠 깃을 빳빳이 세운 채, 굳은 표정으로 무리 밖에 서 있었다.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장 먼저 시선을 피했고,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이곤 했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그를 내 개인 과외 교사라는 핑계로 옆에 두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해 냈고, 놀이공원에 가서는 바이킹을 타다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도 내가 원하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함께 타주었다. 그는 늘 내 뒤를 졸졸 따르는 꼬리표 같았고, 오랫동안 온기 없이 비어 있던 내 삶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하루는 허리를 숙여 내 풀린 운동화 끈을 묶어주는 도현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 나 좋아하지?” 도현은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좋아했어.” 그날 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면을 겪었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나 역시 도현에게 고백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나는 지수에게 내 러브레터를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벅찬 설렘에 눈이 멀어 있던 나는 지수의 불만 가득한 눈빛을 읽지 못했다. “너는 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만약 개천에서 난 용 같은 야망 찬 놈이면, 너 단물만 다 빨아먹히고 버려질지도 몰라.” 나는 하늘을 두고 맹세할 수 있었다. 도현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약속 장소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소꿉친구 준우였다. 준우는 쉴 새 없이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내 귀에는 단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시선 끝에는 온몸에 피를 묻힌 채 넋이 나간 얼굴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도현만이 서 있었기에.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도현의 어머니는 내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하루 종일 골목 시장을 돌며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셨다. 그러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옆 동네 빵집의 케이크가 생각나 길을 건너던 중 참변을 당하신 거였다. 도현의 온몸에 묻어 있던 피는 전부 그의 어머니의 피였다. 도현을 찾아가 울부짖는 나를, 그는 싸늘하게 밀쳐냈다. “내가 너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 알아. 네가 한 번도 나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도. 하지만 난 네가 내 마음에 답해주길 바란 적 없어. 내 순정이었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해. 내 보잘것없는 마음 때문에 우리 엄마가 죽었으니까.” “하서연, 지난 2년 동안 네 개처럼 살았으니 이제 우리 비긴 걸로 하자.” 나는 울며 매달렸지만, 그는 유리문 너머로 소독약을 뿌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닦아낼 뿐이었다.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도현은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큰아버지에게 끌려가 일주일 동안 방에 갇혀 지내다, 쫓기듯 유학길에 올랐다. 도현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해외 경제 뉴스 채널을 통해서였다. 그는 세련된 수트를 입고 자수성가 스토리를 덤덤히 늘어놓으며, 카메라를 향해 제 네 번째 손가락의 결혼반지를 보여주었다. - 제 아내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스토랑 주방에서 접시를 닦고 있던 나는 손을 떨어 그 자리에서 여덟 장의 접시를 깨뜨렸다. 그리고 바로 그날, 나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나는 전 재산을 털어 가장 빠른 서울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리운 집으로 돌아갔지만, 대문에는 붉은 압류 딱지가 가득 붙어 있었다. 큰아버지 일가는 회사의 남은 자금을 모두 챙겨 야반도주했고, 나를 하씨 가문의 족보에서 완전히 파내 버린 뒤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울 거리를 걸으며, 나는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돈이 없으니 치료는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남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도현과 같은 하늘 아래서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리 나쁜 마무리는 아니었다. 뒤늦게 나를 찾아낸 지수는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통곡했다. “심도현이 너한테 과분하다고 생각해서 네 편지를 준우한테 줬어…… 내가 도현이 앞을 가로막고 평생 밑바닥 인생이나 면치 못할 가난뱅이라고 모진 소리를 퍼부었어. 네가 사랑에 눈이 멀어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 정말 너한테 이런 비극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지수의 집안도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유학 중인 이복 남동생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쪼들리는 상황이었지만, 지수는 제 전 재산을 털어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화해와 치료의 과정에서 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하자, 지수는 망설임 없이 제 머리도 밀어 함께 민머리가 되어주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는 날에도, 나는 병상에 누워 고통에 신음할 뿐이었다. 지수의 눈가는 늘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버릇처럼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지수가 내게 마지막 소원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은, 도현의 얼굴을 단 한 번만이라도 멀리서나마 보고 싶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병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세기의 결혼식 중계 화면을 보는 순간, 그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나 바라는 거 없어. 지금 충분히 행복해.” 날카로운 일정 알람 소리가 도현의 깊은 사색을 깨뜨렸다. 도현은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그의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일은 도현의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채원은 눈치껏 자리를 비워주며 도현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었다. 이튿날, 하늘은 잔뜩 흐려 부슬비가 내렸다. 도현은 이른 아침부터 묘지를 찾았다. 어머니의 묘비를 정성껏 닦아내고 그 앞에 하얀 국화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오전 열 시에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도현은 우산에 가려진 채 서 있는 지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수는 내 묘비 앞에 작은 초 하나를 켜두고 나지막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올해 구운 케이크는 네가 좋아하던 크림 케이크야. 요즘 아주 유행이래.” “망고는 빼고 만들었어. 너 망고 싫어하잖아.” 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지만, 마음만은 달콤함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때 촛불이 훅 꺼지자 지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말 다 안 끝났는데 성급하게 굴긴.” 내가 장난스레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신기하게도 꺼졌던 초에 다시 불이 붙었다. 지수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시야에 명품 수제화 한 켤레가 나타났다. 도현의 시선이 지수의 등 뒤, 내 이름이 정갈하게 새겨진 묘비에 닿았다. 비문에는 소박하게 적혀 있었다. [하서연, 여기 잠들다.] 도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지갑에서 오만 원권 지폐 다발을 꺼내 들었다. “대단하군요. 지난번 오해 작전보다 공을 많이 들였어. 이젠 이런 도구까지 완벽하게 준비하다니.” “내 동정심을 자극해서 강준우로도 모자라 내 정부 자리라도 꿰차고 싶은 겁니까?” 붉은 지폐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려, 지수가 방금 깨끗하게 닦아놓은 내 묘비 위로 어지럽게 떨어져 내렸다. 지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현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녀는 붉어진 눈으로 가방 안에서 낡은 러브레터 한 장을 꺼내 그의 가슴팍에 내던졌다. “서연이는 준우를 좋아한 적 없어! 그 애가 사랑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다고!” “그 편지를 가로채고 너희 둘을 갈라놓은 건 나야. 원망하려거든 날 원망해!” “제발…… 서연이의 마지막 품위만큼은 지켜줘.”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실을 마주한 도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도현은 종이에 적힌 내 글씨체를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고, 그의 시선이 마지막 문장에 고정되었다. [심도현,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더없이 잔인하고 우아한 손짓으로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날렸다. “이깟 낡은 편지 조각 하나로 내 지갑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하씨 일가가 내 경고를 잊은 모양이군. 하서연에게 단돈 1원이라도 쥐여주는 날엔 하 회장 본인의 목줄을 죄어버리겠다고 했을 텐데?” 지수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새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마…… 서연이가 집안에서 쫓겨나고 상속권까지 박탈당한 게 전부 네 짓이었어?” 도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어조였다. “나를 기만하고 덫에 빠뜨렸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 것뿐입니다.” 그 순간, 지수의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 그녀는 악에 받쳐 도현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너 때문에 서연이는 치료비조차 없었어! 비싼 항암 치료제는커녕 기본 약물도 쓸 돈이 없어서,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치료를 멈춰달라고 빌었다고!” “심도현! 네가 서연이를 죽인 거야! 네가 그 애를 죽인 살인자라고!” 지수의 어깨가 사정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늘게 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현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거대한 분노와 균열을 마주하며, 지수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보고 나서 날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