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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은 후에 모든 것을 놓아주기로 선택했다
언니를 대신해 서울 사교계의 정점이라 불리는 강도준과 결혼한 지 벌써 3년째다. 그 3년 동안, 그가 그토록 염원하고 아끼며 품어온 존재는 우리의 딸...
Chương (1)
第1章
언니를 대신해 서울 사교계의 정점이라 불리는 강도준과 결혼한 지 벌써 3년째다.
그 3년 동안, 그가 그토록 염원하고 아끼며 품어온 존재는 우리의 딸이었다.
그런데 최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복귀한 언니 하은이 시상식 무대 위에서 돌연 과거를 들먹였다.
자신과 첫사랑 사이에 아이가 있었지만, 상대는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폭탄선언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6년 전, 도준을 버리고 결혼식 당일 도망친 건 언니였다는 것을.
내가 아이를 낳던 날, 도준은 나의 무사안녕을 빌며 북한산 산길을 만 번이나 절하며 올랐다. 무릎이 다 해지도록 오직 나만을 위해 기도를 올렸던 남자였다.
미디어는 굶주린 짐승처럼 언니와 도준의 과거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카메라 앞에서 도준은 그저 서늘하게 웃으며 "미쳤군"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언니가 연기에 너무 몰입해 미쳐버린 모양이라며, 남의 행복을 시기하는 것도 병이라고 일축했다. 죽고 나서야 인터뷰에 응해주겠다며 서슬 퍼런 경고도 잊지 않았다.
업계 사람들은 다 안다. 지금의 강도준은 둘도 없는 애처가에 딸바보라는 걸.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언니가 정말로 약을 먹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줄은.
언니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그날 밤, 강도준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1
도준이 자해했다는 소식은 그의 비서에게서 전해 들었다.
"사모님, 상황이 위중합니다. 보호자 사인이 필요해요."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정말로 따라 죽기라도 작정한 것처럼.
여름 밤공기가 물기 어린 수증기처럼 무거웠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나의 스물네 번째 생일이다.
오후까지만 해도 도준은 내게 꽃과 선물, 그리고 세 달 동안 정성껏 직접 만들었다는 수공예품 사진을 보내왔다.
화면 속의 그는 여전히 청초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엔 이제 막 아버지가 된 남자의 성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요염할 정도로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내 사랑, 당신만 보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오늘 밤엔 당신이 좀 달래주면 안 될까?"
나는 그러겠노라 답했다.
"레스토랑 예약해뒀어. 늦으면 안 돼."
그가 오만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게 한 적 있어?"
평소라면 상관없었다. 그저 바빠서 그런 거겠거니 이해했을 테니까.
하지만 언니가 보낸 문자 메시지는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도준이는 그저 나를 너무 오래 보지 못한 것뿐이야.]
[개라는 짐승은 조건반사를 다시 깨워줄 필요가 있거든.]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의 물결이 몇 번이나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설레던 기대는 메마른 기다림이 되었고, 나중엔 비참한 갈구로 변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내가 이기게 해달라고, 신에게 구걸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졌다.
도준은 자신이 내뱉은 핑계가 얼마나 조잡한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잘못 걸린 척 걸려온 언니의 전화는 더 가관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노골적인 소리들.
분풀이라도 하듯 거칠게 부딪히는 소음.
성인이 된 이후, 도준이 이성을 잃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미친 들개처럼 낮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증오해, 죽여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고! 하은, 대체 왜 돌아온 거야!"
언니가 내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 입으로 내 아내 이름 올리지 마. 죽여버리기 전에."
"입이 그렇게 심심하면, 그냥 닥치고 내 밑에서 울기나 해."
2
밤 8시.
도준에게서 뒤늦게 전화가 왔다.
"내 사랑, 업무 처리가 덜 끝났어. 자정은 넘겨야 할 것 같아. 기다려줄 거지? 응?"
나는 언니와 똑같이 닮은 내 목소리를 죽이며 그를 기다렸다.
예전에 도준에게 말한 적이 있다.
정말 견디기 힘들 만큼 슬픈 날에는 자정이 될 때까지 버틴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의 일들은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자정이 되면 호박 마차는 사라진다.
현실에 동화 따위는 없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그의 목소리에 묘한 초조함이 서렸다.
무언가를 확인받고 싶은 듯한 말투였다.
"자기야, 오늘만큼은 꼭 나를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요람 속의 딸아이가 우유 거품을 내뿜으며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도준이 물었다. "원이는 자?"
"아빠 금방 간다고 전해줘."
사람이 아무리 운이 없어도, 수십 년을 내리 질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알았어, 도준아. 기다릴게."
그게 밤 8시의 대화였다.
그리고 지금.
거실의 고전 시계가 열두 번 울렸다.
신인 여우주연상이 자택에서 약물 자살을 시도했다는 속보가 떴다.
그리고 '우연히도' 같은 시각, 장석그룹의 강도준 대표가 손목을 긋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실시간 검색어 10위권 안에는 내 이름도 끼어 있었다.
[하윤-도준, 백년해로하는 잉꼬부부].
백년해로라.
내가 아이를 낳다 과다출혈로 사선을 넘나들었을 때, 도준이 거금을 들여 절 문 앞에 새겨넣은 비석의 문구였다.
별의 이름을 사는 게 유행하던 해에, 그는 내 이름을 딴 별을 사주기도 했다.
서울의 그 수많은 인파가 모두 볼 수 있는 곳에 광고를 내걸며 그가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우주의 모든 별도 다 알 거야. 우리가 백 년을 함께할 거라는 걸."
제길.
웃기지도 않는군.
3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대부분 모르는 번호였다. 재벌가의 은밀한 비극을 한 조각이라도 떼어먹으려는 기자들이리라.
여배우가 약을 먹은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왜 멀쩡하던 강 대표가 손목을 그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겠지.
1년 전, 언니가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기자가 인생의 후회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언니는 "첫사랑은 몰라요, 저와 그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는 걸"이라고 답했다.
당시 나는 출산 중 하혈로 생사를 오간 지 고작 열흘째였다.
도준은 나를 살리기 위해 무릎이 깨져라 산을 올랐고, 은퇴한 명의를 찾아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다리는 그때 얻은 부상으로 1년 내내 완치되지 않아 걸음걸이가 미세하게 뒤틀려 있었다.
기자들은 과거의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재회를 기대하며 도준을 취재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미쳤군요."
카메라를 향해 그는 서늘하게 웃었다.
"그 여자, 과거 화려한 거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노이즈 마케팅 상대를 잘못 고르셨네요."
"볼일 다 보셨으면 비켜주죠. 집에 가서 아내랑 아이 달래줘야 하니까."
기자들은 허탕을 쳤고 여론은 언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집으로 불려간 내게 부모님은 뺨을 내리치며 꾸짖었다.
"도준이는 이제 몸값이 천정부지인데, 네 언니는 상만 받았지 상업적 가치가 떨어져서 고전 중이야."
"둘이 옛 정으로 엮여서 화제가 되면 서로 손해 볼 것 없잖아!"
나는 도준이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날 밤, 그는 내 품에 안겨 밤새 울었다.
출산 후 배에 남은 수술 자국에 입을 맞추며, 젖은 눈으로 내게 속삭였다.
"어떻게 나를 남에게 넘겨주겠다는 말을 해? 우리에겐 딸도 있는데!"
부모님은 믿지 않았다.
"도준이가 예전에 하은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뻔히 아는데. 아주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며 살았단 말이다."
나는 도준이 내게 주입했던 말을 부모님께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그건 옛날 일이죠. 지금의 도준 씨는 내 사람이에요. 내가 1순위고요."
딸아이가 2순위.
하지만 1년이 지난 오늘,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조롱을 당하고 말았다.
아, 이게 운명이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지독하고 깊은 첫사랑의 역사는 이길 수 없는 거구나.
4
병원으로 가는 길, 도로 위에는 네온사인과 차량의 행렬이 가득했다.
신호 대기 중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귓가에는 부모님의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차라리 널 찾지 말걸 그랬어!"
"언니가 마음 약해서 너를 거둬주자고만 안 했어도!"
"길 잃고 헤매던 년을 데려왔더니, 살인마 밑에서 자란 천성이 어디 가겠니!"
"도준이는 원래 네 언니 거였어. 언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그냥 죽어버려..."
언니는 억울해했다. 사람은 가지 못한 길을 미화하기 마련이니까.
그녀는 도망친 결혼을 후회한다며, 도준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었다.
[도준이가 너랑 결혼한 건, 네 얼굴이 나랑 닮아서야. 몰랐니?]
그 문자를 본 도준은 평소의 다정함을 버리고 처음으로 불같이 화를 냈다.
"하윤아, 너 바보야? 남편 뺏겠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게!"
나는 무언가를 쟁취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감내하는 것에 익숙했다.
도준은 나를 품에 꼭 안고 내 휴대폰을 뺏어 들었다.
[도준인데, 용기 있으면 나한테 직접 연락해. 병이야, 그거.]
전송을 누른 후, 그는 어린 소년처럼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하윤아, 꼭 기억해. 내가 만약 널 대역으로 생각했다면, 언니가 파혼한 날 바로 너랑 결혼했을 거야."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깨달을 때까지, 널 2년이나 쫓아다니지 않았을 거라고."
그랬다. 언니가 도망친 후 도준은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비에 젖은 유기견처럼 처량하게.
언니 대신 내가 도준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해온 나는 운명의 축복이라 믿었다.
처음 도준을 찾아갔던 날, 그는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짐승처럼 사나운 손길이었지만,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할까? 하은이의... 대역이라도."
그는 내가 수치심에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껍데기 속에 숨어 조용히 약혼녀의 역할만 수행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 공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 다른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날, 도준은 뒤늦게 후회하며 나를 호텔에서 끌고 나왔다.
상대 남자를 때려눕히고 내 위로 올라타 정신없이 몰아붙이던 순간, 그가 울먹이며 부른 이름은 언니가 아닌 바로 나였다.
이 세상에서 끝까지 나를 선택해 줄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준만은 다를 거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너무나도 비참하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번지고 고막에는 이명이 울렸다.
미친 듯이 달려오는 대형 트럭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차 안에 앉아, 나의 황당하고도 허무한 결말을 받아들였다.
5
설마 나에게 '열여덟 살로의 회귀'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닷새 후면 언니는 결혼식장에서 도망칠 것이다.
그리고 오만한 표정으로 도준을 내게 하사하듯 말하겠지.
"형부 될 사람 사진 보면서 자위나 하던 네 수준에, 이 정도면 감지덕지 아냐? 좋아 죽겠지?"
좁고 조용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작은 액세서리부터 신발과 옷가지까지, 모든 것이 언니가 쓰다 버린 '적선물'이었다.
열여섯에 데뷔해 스물에 자리를 잡은 언니는 협찬품이 넘쳐났고, 질린 물건들을 내게 던져주곤 했다.
"뭐 해? 멍청하게 서서."
"지난번에 준 스터드 백 내놔. 다시 가져가야겠어."
촌스럽다고 내게 던져준 가방이 최근 해외 셀럽 덕분에 가격이 폭등하자 다시 뺏으러 온 것이다.
나는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그녀가 주는 것들은 내게 사용권만 있을 뿐, 소유권은 없었다는 것을.
물건뿐만 아니라, 강도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귀 먹었어? 가져오라고!"
그녀가 나를 발로 찼고, 나는 뒤로 밀려나며 책상에 부딪혔다.
카메라 앞에 서는 연예인들은 실제론 해골처럼 말라 있다.
억눌린 식욕은 신경질적인 분노가 되어 타인에게 쏟아지곤 했다.
손바닥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보니 붉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공예용 칼이 놓여 있던 자리에 손을 짚은 모양이었다.
울컥 솟아오르는 신선한 피는 독을 품은 장미색이었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찌그러진 차체에 끼어 죽음을 기다리던 그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바람처럼 누군가 다가와 내 손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익숙한 시트러스 향기가 났다.
"아파? 하윤아, 말 좀 해봐. 많이 아파?"
도준의 목소리에 과할 정도의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오빠가 봐줄게."
올해 그는 스무 살.
가장 유치하고 충동적이며, 사랑을 맹목적으로 믿는 나이.
고개를 들어보니 언니는 눈을 치켜뜨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오지 말라니까 왜 와서 난리야?"
"담 넘다 다리 부러져서 또 울며불며 매달리지 말고 가."
말을 마친 언니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6
도준은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오직 내 상처를 살피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칼끝이 깊게 들어갔는지, 솜으로 눌러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도준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곧 어깨 전체로 번져나갔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할게요."
내가 솜을 치우자 다시 피가 울컥 쏟아졌다.
도준은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목이 부서져라 꽉 쥐었다. 피부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날 정도였다.
"왜 그래요, 도준 오빠?"
그는 창백해진 얼굴을 들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냐... 잠깐 피를 봐서 어지러운 것뿐이야."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과 안도감으로 일그러졌다.
젖은 눈가가 붉게 물들며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살아있어... 살아있었어..."
그의 두 손이 내 뺨 근처에서 허공을 맴돌았다.
닿고 싶지만 감히 닿지 못하는 절박함.
피를 보고 구역질을 한다고?
스무 살의 강도준은 거칠고 폭력적이며, 오직 언니에게만 충성하는 남자였다.
뒷골목에서 주먹질로 잔뼈가 굵은 그가 피를 보고 어지러움을 느낄 리 없었다.
피를 보면 공황을 일으키는 건, 스물여섯 살의 강도준뿐이다.
내가 아이를 낳던 날, 멈추지 않는 하혈로 하얀 시트가 붉게 물들고 내 심박수가 멈춰가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그날 이후의 도준.
그날 밤 이후, 그는 붉은색만 보면 과호흡을 일으키고 눈물을 흘렸다.
회의 중에 PPT의 붉은 도표만 봐도 모든 걸 팽개치고 달려와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며 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던 남자.
"설날 같은 거 싫어! 온통 빨간색뿐이잖아.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매일을 살아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아!"
그렇다면, 그도 돌아온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