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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채로 불에 타 죽은 그의 아내
권도준과 결혼한 지 벌써 5년. 내일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그에게 놀라운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고 싶어 특별히 휴가까지 냈다. 다섯 시간을 비행해 ...
Chương (1)
第1章
권도준과 결혼한 지 벌써 5년. 내일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다.
그에게 놀라운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고 싶어 특별히 휴가까지 냈다. 다섯 시간을 비행해 그가 근무하는 지사가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회사 로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누군가 나를 새로운 단체 채팅방에 초대했다.
채팅창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형수님, 안녕하세요!'라는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메웠다. 입가에 달콤한 미소가 번졌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장거리 부부로 지냈다. 그는 늘 일이 바쁘다며 핑계를 댔고, 우리의 만남은 갈수록 뜸해졌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무려 다섯 달 전이었다.
이번 기념일만큼은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무작정 내려온 길이었다.
혹시라도 그가 이 중요한 날을 잊었을까 걱정했던 게 무색해졌다. 역시, 도준은 이미 모든 걸 준비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도준의 지인들이 단톡방에 송금 메시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송금 대상이 내가 아니었다. '작은 장미'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자였다.
성진이 가장 먼저 2천만 원을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 [형수님, 입방을 환영합니다!]
뒤이어 영호가 4천만 원을 보냈다. [형수님, 환영해요!]
준우는 아예 1억을 쐈다. 비고란에는 여전히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형수님 입방 환영!]
……
1
마지막 송금의 주인공은 내 남편, 도준이었다.
그는 그 '작은 장미'에게 무려 2억 원을 송금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채팅창을 열어 도준에게 그 여자가 대체 누구냐고 물으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그 방에서 강제로 퇴장당했다.
모든 것이 너무 순식간이었다. 방금 본 장면이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어머, 사모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향해 프런트 직원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내 옆에 서 있던 여자에게 다가갔다.
“권 대표님이 그러시는데, 이제 임신 5개월 차라 몸조심하셔야 한다고요. 함부로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배가 살짝 부른 여자가 서 있었다.
어린 나이, 앳된 얼굴. 웃을 때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
예쁜 여자였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의 나를 닮아 있었다.
“도준 씨는요? 아직 많이 바빠요?”
여자는 익숙한 듯 소파에 앉으며 생긋 웃었다. “퇴근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 저 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일하는데 방해되면 안 되니까.”
직원이 여자를 부축하며 다독였다. “네, 그럼요. 간식 좀 내드릴게요.”
여자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다.
“저기, 언니도 도준 씨 보러 오셨어요? 지금 회의 중이라 좀 걸릴 텐데.”
내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도준 씨랑… 어떤 사이죠?”
“제 남자친구예요. 곧 결혼할 사이이기도 하고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웃었다. “방금 도준 씨가 저를 친구들 있는 단톡방에 초대해 줬거든요. 다들 환영한다면서 용돈을 엄청나게 보내주는 거 있죠! 인사치레라면서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제 남자친구, 정말 책임감 강하고 멋진 사람이에요. 혹시 비즈니스 때문에 오신 거면 우리 도준 씨 좀 잘 봐주세요. 밖에서 고생하며 번 돈, 정말 피땀 흘려 모은 소중한 돈이거든요.”
“근데 저한테는 정말 아낌없이 써요. 사귄 지 3년 됐는데, 제가 갖고 싶다는 건 아무리 비싸도 다 사주거든요.”
여자는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거 보세요. 경매장에서 보고 예쁘다고 했더니 고민도 안 하고 낙찰받아 준 거예요.”
“아, 그리고 제가 집이 좀 좁아서 나중에 아기 태어나면 걱정된다고 했더니 바로 펜트하우스 한 채를 제 명의로 선물해 줬어요.”
여자는 혼자 신이 나 떠들다가 아차 싶은 듯 멈췄다. “어머, 죄송해요. 저 혼자 너무 말이 많았죠? 언니는 도준 씨 거래처 분이세요? 처음 뵙는 것 같아서요. 전 온채원이라고 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여자가 바로 단톡방의 그 '작은 장미'였다.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진실이 나를 덮쳤다.
10년을 사랑하고, 5년을 부부로 살았으며, 3년을 떨어져 지낸 내 남편 권도준이 바람을 피웠다.
상대는 스무 살 남짓한 어린 여자애였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졌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전신을 타고 흐르는 오한을 느꼈다.
도준은 내게 맹세했었다. 평생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우리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의사로서 환자를 구하기 위해 차에서 뛰어내렸고, 출장 중이던 그는 그 현장을 지나가다 나를 보았다.
그는 첫눈에 반했다고 했다. 이후 꽃과 집, 차를 보내며 끈질기게 구애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과로로 병원 복도에서 쓰러졌던 날, 그는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달려와 나를 병실로 옮겼다.
“하진아, 네가 잘못되면 나도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의 품에 안겨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마음을 열었다.
결혼 후 업무상 나는 서울에, 그는 부산에 남았지만, 그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나를 보러 비행기를 탔다.
그런 도준이, 프러포즈 때 영원을 약속했던 그 남자가 배신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언니, 괜찮으세요?”
내 기색이 심상치 않자 채원이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괜찮아요.”
세상의 소음이 순식간에 소거된 듯 고요해졌다. 심장을 날카로운 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에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채원아, 또 말 안 듣고 마음대로 왔어? 걱정되게.”
등 뒤에서 익숙한 저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도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서 다정함이 순식간에 박제된 듯 굳어버렸다.
“서하진… 네가 왜 여기 있어?”
2
“도준 씨!”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채원이 도준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이 언니, 도준 씨 찾아온 것 같아! 거래처 사람이야?”
“어… 그냥 손님이야.”
도준은 그녀를 감싸 안으며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밥 먹으러 가자. 우리 채원이랑 아기 배고프게 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저 언니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먼저 얘기 좀 나눠요. 난 괜찮아.”
도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채원을 소파에 앉히고 나서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휴게실로 들어와. 거기서 얘기해.”
그를 따라 들어간 휴게실은 2년 전과 딴판이었다.
모노톤이었던 인테리어는 온통 핑크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어린 여자애의 취향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갑자기 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도준은 소파에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가, 곧바로 비벼 껐다.
“채원이가 임신 중이라 금연 중이야.”
도준은 지독한 애연가였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하루에 한 갑을 비우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 여자를 위해 담배를 끊었다니.
“권도준, 나한테 할 말 없어?”
참으려 했지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울자 도준은 귀찮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 인턴 의사였어. 내가 위경련으로 쓰러졌을 때 나를 돌봐준 게 채원이었어. 넌 성숙하고 똑똑하잖아. 나 없어도 혼자 잘 살 수 있는 사람이고. 하지만 채원이는 나 없으면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애야.” 도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장거리 연애, 정말 힘들었어 하진아. 그 애가 옆에 있어 주지 않았다면 나 벌써 무너졌을지도 몰라.”
눈물이 뺨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도준의 뺨을 후려쳤다.
“이혼해. 둘이 잘 먹고 잘살아!”
도준은 내 손을 잡아채더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결혼할 때 말했잖아. 이혼하고 싶으면 내가 죽고 나서 하라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건 여전히 너야. 그리고 아이 안 갖겠다는 네 고집, 우리 어머니한테는 늘 대못이었어. 채원이가 아기 낳으면 네 호적에 올리자. 네 부담 덜어주려고 내가 내린 결론이야. 하진아, 이쯤 했으면 적당히 받아들여.”
눈앞의 남자가 생경했다. 내가 알던 권도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내 눈속의 경악을 읽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채원이가 곧 출산이야. 제대로 결혼식 올려서 보상해주고 싶어. 온 김에 며칠 쉬다 가. 사람 불러서 집으로 보내줄게. 채원이랑 식사만 하고 바로 들어갈 테니까.”
우리에겐 부산에도 집이 있었다. 함께 고르고 꾸몄던 곳.
도준의 어머니는 격이 맞지 않는다며 나를 싫어하셨기에, 나는 부산에 올 때마다 늘 그곳에 머물렀다.
“착하지? 채원이 임신 중이라 자극받으면 안 돼. 여기 있을 거면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할지 잘 알 거라고 믿어.”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휴게실을 나갔다. 따라 나가려 했지만, 어느새 나타난 경호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온 선생님과 떠나실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멀어지는 도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랑 도준이 이혼하길 원하셨죠? 결정했어요. 이혼할게요.”
“이제야 정신이 드니? 조건 있으면 말해봐라.”
“조건은 없어요. 그저 도준이가 이혼 서류에 빨리 사인하게만 해주세요.”
“그래… 내가 준비하마.”
경호원들의 감시하에 '문 테라스' 빌라로 돌아왔다.
5개월 만에 찾은 집은 변한 게 없었다. 내 손때가 묻은 가구와 소품들.
이혼하기로 했으니 이제 다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몇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짐을 쌌다. 나와 관련된 모든 흔적을 박스에 담아 현관에 쌓아두었을 때, 도준이 들이닥쳤다.
그는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며 분노를 쏟아냈다.
“네가 우리 엄마한테 채원이 얘기했어? 엄마가 채원이 절대 안 받아줄 거 알면서 왜 그랬냐고!”
3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난 어머니한테 채원 씨 얘기 꺼낸 적 없어!”
“끝까지 발뺌이야? 당장 따라와! 채원이랑 아기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너 절대 용서 안 해!”
그는 신발도 신지 못한 나를 소파에서 끌어내렸다.
“이거 놓아, 권도준! 아프다고!”
비틀거리며 끌려 나간 곳은 의외로 가까웠다.
그는 나를 바로 옆집으로 데려갔다.
문이 열리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채원이 보였다.
시어머니는 소파에 앉아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해봐라. 얼마를 주면 도준이 곁에서 떨어질 거니?”
“어머님, 저 도준 씨 정말 사랑해요. 제발 헤어지게 하지 마세요. 제 집안이 보잘것없는 건 알지만, 그건 제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상간녀 주제에 사랑을 논해? 내 아들놈이 하진이랑 결혼시켜 달라고 빌 때도 똑같이 말했단다. 겨우 5년 만에 바람이 나서 너랑 붙어먹는데, 그게 무슨 대단한 사랑이라고!”
“네? 그게 무슨…”
채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간녀라니요? 도준 씨 결혼했어요?”
“엄마!”
도준이 달려가 채원을 일으켜 세웠다.
“왜 채원이한테 이런 얘길 하세요! 임신해서 자극받으면 안 된다고요! 서하진, 네가 엄마 부추긴 거지?”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랑 무슨 상관이야?”
“너 아니면 엄마가 어떻게 알아! 채원이가 네 자리 뺏을까 봐 겁나서 엄마 이용해 협박하는 거잖아. 너 정말 독하다!”
“바람피운 건 당신이잖아. 당신이 안 그랬으면 어머니가 아셨겠어?” 내가 비소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채원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채원아! 채원아, 정신 차려!”
사색이 된 도준은 그녀를 안아 들고 병원으로 질주했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첩 자식 따위가 뭐가 저리 대단하다고. 내가 널 좋아하진 않지만, 온채원 같은 애보다는 네가 권가 며느리에 어울린다 생각했다. 어떻게든 붙여줘 보려 했는데, 관둬야겠구나.”
“감사해요. 하지만 저도 이제 이 결혼 유지할 마음 없어요.”
나는 시어머니가 그토록 아끼던, 권씨 가문의 며느리임을 증명하는 옥팔찌를 벗어 탁자에 놓았다. 한때는 내게 주기도 아까워하셨던 물건이다.
어머니는 결연한 내 태도를 보더니 짧게 답했다. “일주일 뒤에 이혼 서류 받게 해주마.”
어머니가 떠난 후, 나는 그 집을 둘러보았다.
거실 중앙에는 도준과 채원이 유원지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에게는 보여준 지 오래된,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이었다.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침대 위에는 노출이 심한 야한 잠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평생 입어보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협탁 서랍에는 쓰다 남은 콘돔 상자가 있었다.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이 탐닉했을 시간을 상상하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도준의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사모님,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어딜 가자는 건데!”
거친 손길에 공포가 밀려왔다. 발버둥 쳤지만 소용없었다.
병원 로비에 도착하자 벤치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도준이 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왔어?”
그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했다. “채원이, 아이 지웠어.”
4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지웠다고?
임신 5개월인데, 그게 가능한가?
“도준아…”
입을 뗐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도준의 손이 내 목을 강하게 압박했다. 숨이 막혀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서하진! 채원이가 아기 지우니까 이제 속이 시원해? 왜 기어이 엄마한테까지 달려가서 사달을 내냐고! 너 의사잖아. 어떻게 여자애한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어!”
그의 눈에 서린 증오와 목을 죄는 통박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이 아이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하진아, 내가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넌 왜 나한테 이래!”
그는 미친 사람처럼 나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나는 바닥을 구르며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모르는 일이야… 도준아, 믿든 안 믿든 난 어머님께 말 안 했어. 어머님이 직접 조사하신 거라고!”
“거짓말 그만해! 당장 들어가서 채원이랑 내 아기한테 사죄해!”
그는 나를 병실로 끌고 들어갔다. 채원은 나를 보자마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여자 왜 데려왔어! 당장 꺼져! 보기 싫어!”
그녀가 협탁 위의 꽃병을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꽃병이 내 이마에 맞고 산산조각 났다.
비릿한 피 냄새가 번졌다. 채원은 분노에 차 소리쳤다. “권도준, 너희 둘 다 꺼져!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도준이 손짓하자 경호원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들이 나를 깨진 도자기 파편 위로 거칠게 무릎 꿇렸다. 날카로운 조각들이 무릎을 파고들었다. 고통에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채원아, 사과시키려고 데려왔어. 우리 아기한테 사과하게.” 도준이 경호원들에게 눈짓했다. “머리 박게 해. 채원이가 용서할 때까지 계속.”
“권도준! 바람피운 건 너잖아!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 얼굴은 이미 피와 눈물로 엉망이었지만, 경호원들은 내 머리를 바닥으로 억지로 눌러댔다.
“채원이는 나한테 제일 소중한 사람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내 아기 죽지 않았어!” 도준은 확신에 찬 어조로 짖어댔다.
채원이 기절하듯 다시 쓰러지자 의사들이 달려왔다. “권 대표님, 환자가 수술 직후라 안정이 필요합니다. 일단 나가주세요.”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가는 도준의 뒤를 나는 비틀거리며 따랐다. 아는 사람이라곤 그뿐이었고,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끌려온 터라 갈 곳이 없었다.
그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가정부에게 상처를 치료하라고 시켰다.
“하진아, 날 원망하지 마. 네가 사과하는 걸 보지 않으면 채원이가 날 용서 안 할 것 같아서 그랬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엔 오직 시린 한기뿐이었다. 더는 그와 싸울 기운도 없었다.
순종적인 내 태도에 도준은 안심한 듯 보였다.
“내 아내는 오직 너뿐이야. 채원이 몸 추스르면 다시 아기 가질 거야. 너만 그 애랑 잘 지내주면 다시는 힘들게 안 할게.”
“알았어.” 영혼 없는 대답이 나갔다.
“다음 주에 채원이랑 결혼식 올릴 생각이야. 혹시 그 애가 네가 와주길 바라면…”
“갈게.”
“착하다. 그래야 내 하진이지.”
칭찬하는 그를 보며 나는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내 안의 빛은 이미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녘, 누군가 방에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손발이 묶인 채였다.
커다란 마대에 갇혀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5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입에는 테이프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
곧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채원아, 화 많이 났지? 아기 잃은 건 나도 가슴이 찢어져. 서하진 잡아 왔으니까 마음껏 화풀이해. 그러고 나면 나 용서해 주는 거다?”
“이 여자 죽인다고 내 아기가 살아 돌아와? 당신 나랑 결혼할 거야?”
“할 거야!” 도준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결혼식 열어줄게. 넌 내 진짜 아내가 될 거야!”
채원이 흐느끼며 물었다. “거짓말 아니지?”
“맹세해! 절대 안 속여.”
도준은 그녀의 손에 몽둥이를 쥐여주며 마대를 가리켰다. “서하진이 우리 아기를 죽인 거야. 어떻게 때리든 상관 안 해.”
“정말… 그래도 돼?”
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준이 먼저 몽둥이를 휘둘렀다.
‘퍽!’
등줄기를 가르는 격통에 몸이 떨렸다. 입안으로 억눌린 비명과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꾸짖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껴서가 아니라, 어떻게 고통을 줄지 이미 계산을 끝냈던 것이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을까.
‘퍽! 퍽!’
두 번째, 세 번째 타격은 성인 남성의 온 힘이 실려 있었다.
통증이 전류처럼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의식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끝이 보이지 않는 매질이 이어졌다.
피가 마대를 적시고 바닥으로 배어 나왔다. 고통이 한계를 넘어서자 몸이 경련하며 마비되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타격이 멈췄다.
도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힘들지? 이제 가서 쉬자. 몸 좀 나으면 바로 결혼식 올리자.”
“그럼 서하진, 내 결혼식 들러리 세워줘!”
도준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달콤하게 속삭였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때, 멀어지던 도준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대표님, 마대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돈 좀 줘서 보내. 채원이가 안에 있는 사람이 하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해서는 안 된다.]
6
지하실 바닥에서 눈을 떴다.
한기 가득한 타일 바닥이 상처 입은 살결에 닿아 희미한 감각을 깨웠다.
춥고, 아프고, 지독하게 목이 말랐다.
밖으로 기어 나가려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도준이 이토록 모질 줄은 몰랐다. 나를 때리는 것으로 모자라 지하실에 가두다니.
그날 밤부터 고열이 시작되었다. 몽롱한 정신 사이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맡에 물과 밥, 그리고 약간의 약이 놓였다.
“사모님 정말 가련하네. 내일 대표님이 온 선생님이랑 결혼한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결혼식 규모가 엄청나대요. 대왕대비 마마 같은 시어머니도 오신다던데. 이 사모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뿐이야? 온 선생님이 사모님 들러리 서라고 지정했대. 대놓고 망신 주려는 거지.”
절망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하지만 나는 죽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젓가락을 들어 입안에 밥을 밀어 넣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곧 도준과의 관계는 끝날 것이다.
문득 우리의 결혼식 날이 떠올랐다.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던 도준의 얼굴.
“하진아! 오늘부터 넌 내 아내야. 내 거야! 평생 내 곁에서 못 떠나!”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그가 이제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려 한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밖에서 폭죽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약속한 3일이 지났고, 도준과 채원의 결혼식 날이 밝은 것이다.
지하실 문이 열리고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가정부가 보였다.
“사모님, 대표님과 온 선생님은 이미 식장으로 출발하셨어요. 씻고 이 드레스 입으세요. 이제 가셔야 해요.”
지하실을 걸어 나오자 집안이 온통 잔치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처음 우리가 신혼집을 꾸몄던 날처럼.
“아, 이건 노부인께서 아침에 사람 보내 전달하신 거예요.”
가정부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급하게 열어본 봉투 안에는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이혼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
드디어 도준과 남남이 된 것이다.
나는 자유였다!
“사모님, 서두르세요. 모시러 올 차가 곧 도착할 거예요.”
가정부가 재촉하자 나는 이혼 서류를 챙겨 들고 드레스를 안은 채 밖으로 나갔다.
“혼자 갈게요. 드레스는 더러워질까 봐 식장에 도착해서 갈아입을게요.”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가정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작게 읊조렸다. “조심해서 가세요.”
떠나기 전, 나는 이 빌라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는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부산역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권도준, 부디 행복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