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은 나의 르네상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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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은 나의 르네상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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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창가로 향했다. 그곳엔 붓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죽은 동생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모습...

Chương (1)

第1章

새벽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내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창가로 향했다. 그곳엔 붓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죽은 동생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나는 붓꽃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세현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사랑은 꽃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는 3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 꽃다발을 보내왔다. 8년 전, 그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이후로 창가의 꽃은 끊겼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그가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다시 창가의 꽃이 매일 갈아치워지기 시작했다. 다만, 이번에 도착하는 꽃은 전부 붓꽃이었다. ... 창가의 붓꽃은 여전히 싱싱한데, 세현은 또다시 새로운 꽃다발을 들고 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꽃을 받아 들고 창가로 다가가 시든 꽃을 갈아 끼웠다. 손등 위로 순식간에 붉은 반점이 돋아났다. 촘촘하게 박힌 붉은 점들이 하루 지나 빛바랜 어제의 흔적 위로 덧칠해졌다. “엄마, 아빠 좀 그만 돌아다니게 해. 왜 자꾸 내버려 둬?” 딸 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꼭 그렇게 허영심 채우듯 꽃을 받아야겠어? 아빠 상태 안 보여? 아빠 지금 제정신 아니라고!” “지난번에도 아빠 엄마 줄 꽃 꺾으러 갔다가 길 잃어버려서 온 가족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잊었어?” “말조심해. 네 어머니한테 그게 무슨 태도냐?” 세현이 엄한 목소리로 서아를 제지하더니 내 손을 꽉 쥐었다. “이분은 너희 어머니이자, 내 아내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매일 꽃을 선물하는 건 우리가 젊은 시절에 했던 약속이야.” 옆에 있던 제자들이 웃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교수님이랑 사모님은 결혼하신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금슬이 좋으시네요. 정말 부러워요.” “맞아요! 두 분은 우리 대학 최고의 잉꼬부부시잖아요.” 쏟아지는 찬사 속에서 나는 조용히 세현의 손을 밀어냈다. 다정함도 진짜고, 사랑도 진짜다. 하지만 대상이 틀렸다. 1년 전, 알츠하이머 투병 8년째 되던 해에 세현은 마침내 기억의 조각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뒤엉켰고, 나를 내 동생 지수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내 손을 잡고 동생과 나누었던 시시콜콜한 추억들을 늘어놓으며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다 또 어느 순간에는 자신이 결국 나와 결혼했고 지수와는 오래전에 남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엇갈린 세월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그날 알게 되었다. 반평생 잉꼬부부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내 남편의 마음 깊은 곳에 줄곧 내 동생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두 사람은 나에 대한 책임감에 억눌리면서도, 서로를 향한 갈망을 멈추지 못했다. 그 긴 세월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절제된 시선으로 서로를 갈구해 왔던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진 채 나를 지수로 착각해 사랑을 속삭이는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다 반년 전부터 세현의 상태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의 기억은 서른 살 즈음에 멈췄고, 아주 가끔만 혼란을 일으켰다. “교수님이 투병하시는 동안 사모님께서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그나저나 교수님, 이번 관측이 정말 양자 상태를 붕괴시킬까요?” “사실 정보의 확정성이 중첩 상태를 단일화로 이끄는 것인데...” 제자들과 세현이 한데 어우러져 학술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곁에 서서 듣고 있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한때 내 자부심이었던 그 전공 지식들을 이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게 손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도망치듯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오직 익숙한 기름 냄새와 연기가 감도는 이곳만이 나를 안심시켰다. “잠깐만.” 딸 서아가 나를 불러세웠다. 그녀가 내 손등을 가리켰다. “그 징그러운 것들은 뭐야? 엄마 손 왜 이래?” 나는 서둘러 손을 숨겼다. “별거 아냐. 가벼운 알레르기야...” 하지만 변명은 끝맺지도 못한 채 끊겼다. “아, 진짜 보기 싫어. 바이러스 덩어리 같아.” 서아는 불쾌한 듯 인상을 썼다. “음식 하기 전에 손 소독제로 빡빡 씻어. 위생 좀 신경 쓰라고.” 나는 주방에 들어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거실에서는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도 울프 물리학상을 받으시다니, 교수님은 정말 천재세요. 인류 역사에 남을 천재.” 누군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나를 힐끗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혀를 찼다. “아깝네...” “결국 평범한 전업주부랑 결혼하시다니.” 딸 서아가 거들었다. “이번 울프상 후보에 지수 이모도 올랐다고 들었어요. 시상식 때 이모랑 아빠가 같이 서 있는 거 봤는데,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한 제자가 맞장구를 쳤다. “저도 봤어요! 두 분 케미가 장난 아니었죠. SNS에서도 난리였어요.” ... 우리 세 사람은 소꿉친구로 자랐다. 그들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물리학자가 되었다. 선남선녀, 천생연분. 그리고 나는, 그들의 가족이자 아내일 뿐이다. 하지만 누가 기억해 줄까. 열세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던 세현을 집으로 데려온 게 나였다는 걸. 스물세 살의 내가 울프상 후보에 올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스물네 살에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세현과 결혼하며, 그들이 말하는 '전업주부'가 되어버린 나의 과거를. 나는 거칠어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30년간의 집안일은 내 손의 고운 빛깔을 앗아갔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내 몸매는 망가졌고 군살이 붙었다. 난산 끝에 제왕절개를 하며 배 위에는 흉측한 흉터가 남았다. 그리고... 내 몸 곳곳에 남은 수많은 흉터들. 세현의 실험실이 폭발해 그가 매몰되었을 때, 만 하루 동안 맨손으로 흙더미를 파헤쳐 그를 구해내며 생긴 상처들이다. 그 모든 헌신의 대가는 남편과 동생이 더 잘 어울린다는 조롱 섞인 찬사였다. 사람들의 농담 섞인 칭찬에 동생 지수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내어갔다. 여느 때처럼 세현에게 밥을 먹여주려던 찰나, 평온하던 세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상을 엎어버렸다. 뜨거운 국물이 이미 붓꽃 알레르기로 붉게 달아오른 내 손등 위로 쏟아졌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데어 진물이 터져 나왔다. 세현은 빗자루를 들고 나를 쫓아내듯 휘둘렀다. “나쁜 여자! 저리 가! 내 몸에 손대지 마!” 몽둥이질이 내 등과 다리, 손을 가리지 않고 내리쳤다. “가버려! 지수가 보면 화낸단 말이야!” 나는 비참하게 몸을 피했다. 나를 쫓아낸 그는 지수의 손을 잡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지수야, 내가 저 나쁜 여자 쫓아냈어!” “난 너밖에 없어!” 사람들은 이 당혹스러운 난극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제가 할게요.” 지수가 씁쓸한 듯 미소 지으며 나섰다. “언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알잖아. 형부 병 도지면 정신이 없어서 헛소리하는 거.” 지수가 그릇을 건네받자 조금 전까지 발작하던 세현이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그는 지수가 먹여주는 밥을 고분고분 받아먹었다. 그의 눈동자는 오직 지수만을 향해 있었고, 그 안의 애정은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 같았다. ... “엄마, 아빠랑 이혼해.” 딸 서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사랑에 빠진 듯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서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오랫동안 지켜봤어. 이모랑 아빠가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죄책감 때문에 뒷걸음질 치는 거. 너무 안쓰러워.” “아빠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면, 내가 말해둘게. 이혼해도 아빠 재산 10%는 엄마 줄게.”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아들 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더 바라는 거야? 이 집 돈 다 아빠가 번 거잖아. 엄마는 수십 년 동안 집에서 편하게 쉬기만 했는데, 아빠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다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지?” “엄마, 이게 아빠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야. 제발 두 사람 좀 도와줘.” 나는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낳아 기른 두 남매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준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가 저 지경인데, 아직도 아빠를 놔주기 싫은 거야?” 동생 지수도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보았다. “미안해, 언니. 이제 세현 오빠 나한테 돌려줘.” “사실 오빠가 사랑했던 건 처음부터 나였어. 언니가 갑자기 임신해서 결혼하게 된 거, 사실 그때 도립 물리 경진대회에서 오빠가 나 이기게 해주려고 일부러 언니 임신시켜서 기권하게 만든 거야.” “오빠가 지난 세월 동안 매달 며칠씩 출장 갔던 거 기억나?” 그녀는 오랫동안 숨겨왔던 두 사람의 부정한 관계를 하나씩 뱉어냈다. “그거 나 보러 왔던 시간들이야... 오빠가 출장 다녀오면서 사 온 과자들, 언니가 싫어하는 달기만 한 것들이었지?” “언니가 몇 번이나 말해도 오빠가 계속 사 왔던 이유가 뭔지 알아?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나 주려고 샀다가 남는 거 언니한테 준 거야.” “그리고... 언니 마흔 살 때 큰 병으로 입원했을 때 오빠가 사흘 밤낮을 곁에서 지켰지? 감동했어? 실은 그 전날 나랑 싸웠거든. 나 질투 나게 하려고 일부러 언니 곁에 붙어 있었던 거야.” “오빠의 마지막 시간만이라도 내가 돌보게 해줘.” 지수는 세현을 껴안았고, 뜨거운 눈물이 그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지수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네 형부다.” 세현이 방금 전의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깨어난 듯했다. 그는 다시 서른 살의 남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나를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지만, 마음속으론 지수를 사랑하던 그 시절로. 그는 엄한 목소리로 지수의 손을 뿌리쳤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억눌린 갈망이 가득했다. “세현 오빠!” 지수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남은 생까지 우리 또 엇갈리고 싶지 않아.” 세현은 차마 그녀의 눈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내 손등의 붉은 발진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또 알레르기가 도졌어?” 그는 다급히 내 손을 잡고 약을 가져와 세심하게 발라주기 시작했다. “조심 좀 해. 자꾸 다치지 말고.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좀 쉬어.” “당신, 너무 수척해졌어.” “세현 오빠.” 지수가 세현의 말을 끊으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하얀 팔뚝 위로 흉측한 자해 흔적들이 가득했다. 서른 살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세현은 그 상처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게 다 뭐야...” 지수가 고개를 떨구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너무 힘들었어. 긴 밤마다 오빠 생각이 멈추질 않아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빠를 향한 그리움을 누를 수가 없었어.” 세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마.”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지우야, 미안해. 이제 알겠어. 내가 사랑하는 건 지수야.” “더는 헛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우리 이혼하자.” “응, 그러자. 근데 이미 이혼한 거나 다름없어.” 나는 방으로 들어가 담담하게 이혼 서류를 가지고 나왔다. “당신이 지난번에 제정신일 때 이미 얘기했었잖아. 그때 서류 접수까지 다 끝냈어.” “오늘이 이혼 숙려 기간 마지막 날이야.” “내일 법원 가서 확정만 받으면 우린 남남이야.” 언젠가 지수가 술집에서 취해 세현에게 데리러 오라고 울며 전화를 건 적이 있었다. 망설이는 세현의 모습에 내가 먼저 다녀오라고 말했었다. 그가 돌아온 건 한밤중이었다. 온몸에서 비릿한 꽃향기가 풍겼고 셔츠 깃에는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세현은 창가에 놓인 붓꽃을 밤새 지켜보다가 다음 날 내게 이혼을 요구했었다. 이미 모든 절차가 끝났고 내일이면 법적으로 끝이라는 말에 세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입을 뗐다. “이 집은 지수가 좋아하니까 지수 주고, 난 나갈게. 차랑 예금은 다 당신 줄게. 이건... 내 마지막 보상이야.” 아이들이 뭐라고 참견하려 했지만 세현이 단호하게 막았다. “내가 저 사람에게 진 빚이다.” “그래. 내일 구청 앞에서 봐.”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는 듯, 세현과 지수는 그 밤에 밖으로 나갔다. 나는 짐을 마저 정리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니 남은 흔적들을 지워야 했다. 정리하던 도중 스마트폰을 켜자 지수의 SNS 게시물이 떴다. 끝없는 해변을 배경으로 세현과 지수가 서로에게 기댄 모습. 그 아래로는 '영원히 행복하세요' 같은 댓글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그저 한 번 훑어보고는 화면을 껐다. 그리고 손에 든 물건들을 마저 태웠다. 다음 날, 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내내 우리는 지독히 침묵했다. 절차는 신속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이혼이 성립되었다. 방금 발급받은 빨간 이혼 신고 확인서를 들고, 나는 캐리어를 끌며 멀어졌다. 다시는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