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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껍질을 벗은 여자
그날 밤, SNS 피드를 넘기던 내 손가락이 돌연 멈춰 섰다. 유채리의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 호텔 거울 앞에서 찍은 셀카는 묘하게 은밀한 기운...
Chương (1)
第1章
그날 밤, SNS 피드를 넘기던 내 손가락이 돌연 멈춰 섰다.
유채리의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 호텔 거울 앞에서 찍은 셀카는 묘하게 은밀한 기운을 풍겼다. 그녀의 손 곁에는 커다란 리본이 달린 고급스러운 란제리 박스가 놓여 있었다.
[남친이 새로 사준 건데, 예쁜가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낮에 내 손에서 택배 상자를 가로채며 주소를 잘못 기입했다며 당황해하던 비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불과 며칠 전, 남편 도준은 내게 물었다.
“요즘은 와이어 없는 브라가 더 편하다며?”
그때 나는 그가 드디어 내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며 바보처럼 웃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남자는 철이 늦게 드는 게 아니라, 마음을 쏟을 대상을 바꿀 뿐이라는 것을.
나는 아무 말 없이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그 화면을 캡처해 남편에게 전송했다.
[세트로 사면 20% 할인되는데. 당신 살림 재주 참 없다.]
……
“사모님, 제가 주소를 착각했습니다.”
비서는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며 어색하게 해명했다. “아직 안 열어보셨죠?”
택배 봉투 겉면에는 품명이 없었지만, 이 브랜드의 상자 감촉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손 안 댔으니 가져가 봐요.”
비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어젯밤, 강도준은 뜬금없이 내게 물었었다.
“여보, 여자 속옷은 노와이어가 더 편해?”
선물을 준비하려는 줄 알았다. 나는 그를 위해 데운 우유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내 사이즈는 알아?”
내 사이즈는 기성복과 달라 늘 직접 입어보고 사야 했다. 결혼 생활 내내 도준은 내게 제대로 된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기념일마다 성의 없이 돈을 입금해주며 알아서 사라고 했을 뿐이다.
모처럼의 관심이 고마워 나는 브랜드와 디자인, 사이즈 고르는 법까지 세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심지어 잊은 척 그의 베개 옆에 내 속옷 하나를 흘려두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은 내 생일이었다. 기대로 가득 찼던 아침, 택배가 도착했다. 하지만 택배 기사의 뒤를 따라온 건 선물 상자가 아닌 그의 비서였다.
……
1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사이즈가 틀려서 바꾸려나 보다, 남자는 이런 쪽으론 문외한이니까.
하지만 오후가 다 지나도록 도준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뉴스가 내 눈을 찔렀다.
[배우 유채리, 유선 종양 수술로 ‘골든 벨 어워즈’ 불참.]
올해 여우주연상의 유력한 후보였던 그녀의 소식은 인터넷을 집어삼켰다.
거실 한편에서 스마트폰을 하던 딸 지우의 화면이 보였다. 얼핏 지나가는 사진을 자세히 보려 하자, 지우가 돌연 휴대폰을 엎어버렸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아이의 눈빛에 당황하던 찰나, 쿠션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왜 엄마가 아니라 채리 언니가 아픈 건데? 왜!”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 내게 이 말을 한 게 누구인지 확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내 기억 속의 지우는 늘 수줍음 많고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지난 1년 사이, 아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욕설을 입에 달고 살며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괴물로.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아이를 훈육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지우가 소파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그때 엄마가 우리 아빠 꼬시지만 않았어도, 지금 내 엄마는 채리 언니였을 거야! 이 몰염치한 아줌마야!”
아이는 내 가슴에 대못을 박듯 비명을 질렀다.
“엄마 팬들은 더 역겨워. 채리 언니 아픈 게 당연하다고 악플 달더라? 그럼 나도 엄마가 죽으라고 기도할 거야. 그래서 채리 언니가 내 진짜 엄마가 되게 만들 거야!”
짝!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지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뺨을 감싸 쥐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가… 날 때렸어? 감히 날!”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해봐. 다시는 그 입 못 놀리게 해줄 테니까.”
지우는 증오가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거울이나 봐. 난 엄마 같은 사람이 내 엄마라는 게 정말 치욕스러워!”
아이는 울며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막이 흐르는 거실에서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지우의 휴대폰 화면에는 채팅창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하 사진이 가득한 곳. 나의 안티 카페였고, 내 딸이 그곳의 방장이었다.
고통이 마비될 정도의 통증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었다. 지우가 방금 올린 공지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 오늘 그 ‘메두사’ 광장 테러 간다.
메두사. 내가 배우 시절 가졌던 묘한 눈매 때문에 붙은 멸칭이었다. 은퇴한 지 12년이 지났는데도 안티들은 여전히 활발했다. 하지만 더 숨이 막히는 건, 내 딸이 나를 이토록 증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고개를 들자 TV 화면에 비친 내 둔해진 몸이 보였다. 12년이라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찬란했던 과거는 사라지고, 나는 그저 비대하고 혐오스러운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어둠이 깔린 거실 TV에서는 시상식 중계가 흘러나왔다. 유채리는 현장에 없었지만,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사회자가 대리 수상을 발표하자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대리 수상자가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강도준에게 유채리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슴 한구석에 품어온 '첫사랑이자 뮤즈'였다. 엔터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계약한 연예인도 그녀였고, 그는 늘 그녀의 방패를 자처했다.
반면 나는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자리를 꿰찬 악독한 서브 여주인공 취급을 받았다.
도준은 늘 내게 속삭였다. 그녀와는 그저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훤칠한 슈트 차림의 남편이 관중들의 묘한 시선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오르고 있었다.
“채리 씨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제 마음속에 채리 씨는 언제나 최고의 배우입니다.”
그는 나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유채리뿐이었다.
창밖은 칠흑 같았다. 8월의 밤이었지만, 나는 뼈가 시리는 한기를 느꼈다.
방에서 튀어나온 지우가 나를 유령 취급하며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는 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생일 음식들과 케이크를 보지도 못했다. 아니, 보지 않은 척 쓰레기통 옆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가장 아끼는 화이트 스니커즈를 짓밟고 나갔다.
아이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어 했다. 나를 향한 악의를 숨기지도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시지 하나 없었다. 모두가 나의 생일을 잊었다.
작년에도 그랬다. 도준은 바쁘다는 핑계를 댔고, 지우는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나 홀로 덩그러니 앉아 케이크를 먹던 그 비참한 풍경.
나는 이 집안의 웃음거리였다. 벌떡 일어나 거실의 풍선들을 찢어버렸다. 케이크는 쓰레기통으로,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은 변기에 쏟아부었다.
그때, 도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회의가 길어져 늦는다는 뻔한 변명.
답장을 하려던 순간, 유채리의 SNS가 업데이트되었다.
[수많은 계절을 지나와도, 사랑하는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네요.]
그녀의 곁에 놓인 리본 달린 속옷 상자가 너무나 선명했다. 어제 내가 도준에게 열심히 설명했던 바로 그 브랜드였다.
이어 지우의 게시물도 올라왔다.
[오늘의 주인공은 누구? 바로 우리 언니! 유채리가 내 엄마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완전 가족사진 그 자체!]
함께 올린 사진 속에서 유채리와 도준, 그리고 지우는 4단 케이크를 앞에 두고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회의라더니, 유채리의 축하 파티에 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사진 속 유채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보다 세 살 어린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기억이 났다. 몇 년 전 내 생일날, 유채리가 SNS에 ‘취하고 싶은 밤’이라고 올리자 도준은 비바람을 뚫고 달려 나갔다. 몰래 뒤따라간 곳에서 나는 보았다. 바에서 나오는 그녀를 자신의 재킷으로 감싸 안고 비를 맞던 남편의 뒷모습을.
차창에 비친 내 뚱뚱한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다행이다, 저 재킷에 가려지려면 난 너무 뚱뚱하니까.’
나도 한때는 이 바닥에서 미모로 손꼽히던 배우였다. 어떤 스타일도 소화해내던 몸매 덕에 모델 제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우를 낳고 호르몬 이상으로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운동을 해도 소용없었고, 지금의 나는 90kg에 육박하는 거구가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도준의 태도가 헌신에서 방관으로, 그리고 혐오로 변해간 것이.
그는 1년 넘게 나를 만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이 가정을 지키려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헌신은 그들에게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다.
진심으로 사랑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이 떠나가는 순간을 예민하게 알아챈다.
나는 두 사람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뒤, 캡처해서 남편에게 보냈다.
[세트로 사면 할인된다니까, 참 살림 못 하네.]
그리고 전원을 껐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