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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은 더 이상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차가운 시스템 알람이 뇌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최종 단계 진입. 공략 종료까지 앞으로 10일.] [미션 실패 시, 당신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합니...
Chương (1)
第1章
차가운 시스템 알람이 뇌리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최종 단계 진입. 공략 종료까지 앞으로 10일.]
[미션 실패 시, 당신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소멸합니다.]
그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심설희의 청혼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참이었다.
우리가 연인이 된 지 정확히 6년째 되는 기념일. 그녀는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화려한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지난 6년을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를 손바닥 위의 보석처럼 아꼈다. 나무랄 데 없이 다정했고, 지나칠 만큼 세심했다.
하지만 나는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처음 연인이 되었던 날,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올랐던 호감도가 ‘0’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그녀를 공략하기 시작한 지 고작 사흘째 되던 날, 설희가 먼저 내게 고백해 왔다.
그리고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숫자는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프러포즈 현장, 내 시야를 가로지르는 실시간 댓글창이 마침내 그 잔혹한 진실을 들춰냈다.
[서브 여주 진짜 독하다. 남주 보호하려고 악역 조연이랑 6년이나 연기한 거야?]
[저 가짜 남친은 지가 진짜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아나 봐. 웃겨 죽겠네!]
혈액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0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반지를 받으려던 손을 거두고, 비어져 나온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미안해, 설희야. 이 공략 게임, 나 이제 안 해.”
1.
댓글창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허, 조연 눈빛 바뀐 거 봐.]
[진작 깨달았어야지. 설희 마음엔 남주밖에 없는데.]
[흑화해서 발광하는 거 기대 중—]
흑화?
아니.
나는 그저 지난 세월 속에 숨겨진 사소한 조각들이 떠올랐을 뿐이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는 걸 극도로 꺼리며 “나쁜 친구 사귈까 봐 걱정돼서 그래”라던 그녀의 목소리.
내가 일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다정하게 가로막으며 “내가 먹여 살릴게”라던 그 다정함.
그건 사랑이 아니라, 나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었다.
넋이 나간 채 텅 빈 저택으로 돌아와 기계적으로 짐을 쌌다.
서재를 지나칠 때, 댓글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컴퓨터 봐! 설희가 카톡 안 끄고 갔어!]
[미친, 대화 기록 보면 진짜 멘붕 올 텐데……]
[비상! 남주 보호막에 균열 생김!]
서재 안에서 맑은 알림음이 울렸다.
나는 홀린 듯 문을 밀고 들어갔다.
환하게 켜진 모니터 속엔 심설희와 구혜인의 대화창이 띄워져 있었다.
설희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이랬다.
「그가 갑자기 청혼을 거절했어. 며칠 동안 서준이 잘 보호해. 연지안이 근처에도 못 오게.」
구혜인의 답장은 빨랐다. 「걱정 마. 그동안 고생 많았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황당했다. 나 하나를 속이기 위해, 죽고 못 살던 두 라이벌이 동맹까지 맺다니.
나는 대화 기록을 위로 올렸다. 무딘 칼날이 살점을 천천히 포 뜨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구혜인: 「원작대로라면 연지안은 서준이 얼굴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사람 써서 겁탈까지 하려 할 텐데.」
「너도 참 대단하다. 그런 독한 놈이랑 매일 한 침대에서 자는 거 안 역겨워?」
심설희: 「서준이만 안전하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구혜인: 「그놈, 너를 점점 더 사랑하는 것 같던데. 진실을 알면 더 미쳐 날뛰지 않을까?」
심설희: 「알게 될 일 없어.」
「만약 알게 돼서 서준이한테 손끝 하나라도 대려고 한다면—」
「그땐 손발 다 부러뜨려서 정신병원에 처넣고 평생 안 내보낼 거니까.」
마지막 문장 뒤엔 서슬 퍼런 느낌표가 찍혀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손가락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댓글창은 환호했다.
[“아무것도 아니야”라니…… 설희 사랑 진짜 찐이다! 누굴 향한 사랑인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나만 소름 돋나? 남주 하나 지키겠다고 다른 사람 인생을 6년이나 이용하는 게 말이 돼?]
[윗분 진지충임? 쟤는 ‘악역’이라니까! 설희는 사회악을 처단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지키는 거야. 윈윈이지!]
[연지안 표정 봐…… 곧 흑화각인데?]
[지안아, 추하게 굴지 말고 그냥 도망쳐라.]
도망?
나는 아직은 온전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도망쳐야지.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을 땐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길가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짜 가네?]
[빨리 꺼져줘! 우리 남주랑 여주 꽁냥대는 것 좀 보게!]
[잠깐…… 저기 멀리 오는 차 설희 아냐?!]
어둠을 뚫고 쏟아진 헤드라이트 불빛. 익숙한 검은색 세단이 내 곁에 급정거했다.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차에서 내린 심설희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과 슬픔이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지안아, 미안해. 내가 너무 서둘렀지…… 네가 기뻐할 줄 알았어.”
그녀가 내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눈가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듯 발그레했다.
“가지 마. 우리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예전 같았으면 그 눈빛에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엔 ‘손발을 부러뜨려 가두겠다’던 서늘한 문장뿐이었다.
나는 반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의 손을 피했다.
“네 잘못 아냐.” 내 목소리는 바람처럼 가벼웠다. “그냥, 내가 질렸어.”
“질려……?”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가로등 불빛 아래, 그녀의 눈동자에 부서진 빛이 서렸다. 연기대상이라도 줘야 할 만큼 완벽한 연기였다.
댓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저 눈빛은 진짜 같은데…… 설희도 6년이나 옆에 둔 정이 있지 않을까? 좀 짠하다.]
그 문장이 나를 일깨웠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심설희.”
“지난 6년 동안, 단 1초라도…… 진심으로 행복했던 적이 있었어?”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수축했다.
답변은 없었다.
하지만 댓글창은 이미 난리가 났다.
[!!! 얘 설마 눈치챈 거 아냐?!]
[대박, 고능 지능 예고—]
[설희야 멍 때리지 말고 아무 말이나 지어내!!]
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쫓아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대신 내 머릿속에선 카운트다운만이 선명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9일 23시간 59분.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이제 규칙을 따를 생각이 없다.
2.
택시를 잡아타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손끝이 자꾸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흥분해서다.
6년간 입어온 가짜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것이 이토록 숨통 트이는 일일 줄이야.
시야엔 차가운 카운트다운이 깜빡였다.
9일 23시간 10분.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을 사람 때문에 남은 내 수명은 고작 열흘 남짓.
참으로 허망한 인생이다.
“학생, 어디로 갈까?” 백미러로 나를 살피던 기사님이 물었다.
나는 예전에 가장 좋아했던 강변 카페의 주소를 댔다.
설희가 “너무 시끄럽고 지저분하다”며 발길을 끊게 만들었던 곳이다.
댓글들이 내 눈앞을 지나갔다.
[어디 가는 거야? 빨리 멀리 도망가야지!]
[아까 심설희 마지막 눈빛 진짜 무서웠는데……]
[설희 블랙 코트 입은 거 진짜 간지 난다.]
창밖으로 도시의 네온사인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지난 6년, 나는 심설희가 필터링해준 풍경만을 바라보며 유리병 속에서 살아왔다.
이제 그 유리가 깨졌다.
열린 창틈으로 노점상의 불고기 냄새, 비릿한 강바람,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생경한 감각들이 너무나 생생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백발이 성성한 주인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안이 아니냐?”
“아저씨, 오랜만이에요.”
“진짜 너구나!” 아저씨가 서둘러 카운터에서 나왔다. “이게 대체 몇 년만이냐? 예전엔 저 창가 자리에 앉아서 라떼 한 잔 시켜놓고 온종일 글 쓰더니…….”
심설희를 만나기 전, 나는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쓰곤 했다.
당시 나는 영화과 학생이었고, 최고의 감독상을 꿈꾸며 대본 여백에 빼곡하게 메모를 남기곤 했다.
그런데 그 뒤로 어떻게 됐더라?
설희는 말했다. “영화판은 너무 힘들어. 내가 뒷바라지할게.”
그녀는 말했다. “연예계는 너무 지저분해. 너랑은 안 어울려.”
그녀는 말했다. “지안아, 나만 있으면 되잖아.”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촬영 기회들을 포기하고, 계약서를 찢고, 꿈을 서랍 속에 처넣은 뒤 열쇠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늘 마시던 걸로 줄까?” 아저씨가 물었다.
“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거기에 티라미수도 한 조각 주세요.”
설희가 “살찌면 화면에 안 예쁘게 나온다”고 타박해서 먹지 못했던 디저트였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살이 찌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강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강 건너 불빛들이 수면 위에서 부서진 금가루처럼 일렁였다.
티라미수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달콤한 크림과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향이 혀끝에서 녹아내렸다. 눈을 감았다.
정말 맛있다.
살아있다는 건, 바로 이런 감각이었다.
댓글창이 잠시 고요해지더니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게 먹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수명이 열흘뿐이면 나라도 저렇게 먹고 싶을 듯.]
[그나저나 심설희가 과연 지안이를 그냥 내버려 둘까? 난 안 믿어.]
나 역시 믿지 않았다.
그래서 휴대폰이 진동하며 ‘심설희’라는 이름이 떴을 때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안아, 어디야?”
“걱정 많이 했어.” 그녀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밥 먹고 있어.”
“집으로 돌아와, 지안아.” 그녀의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우리 둘 다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약속할게,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고 푹 쉬게 해줄게.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응?”
지겹도록 익숙한 말투였다.
지난 6년간 내가 투정을 부릴 때마다 그녀는 늘 이랬다.
다정하게, 끈기 있게, 나를 달래서 다시 감옥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이 반복됐다.
“심설희.” 나는 강물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내 대학 졸업 작품 기억나?”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그건 왜?”
“방 안에 갇힌 남자가 주인공인 단편이었어. 결국 남자는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신과 함께 타 죽지.”
숟가락으로 케이크를 한 번 더 떴다. “그때 네가 그랬잖아. 너무 극단적이라고, 현실에선 그런 멍청한 짓 할 사람 없다고.”
“이제야 알 것 같아.”
“그 남자가 멍청해서가 아니야. 그에겐 그 불꽃이 마지막 남은 전부였던 거야.”
수화기 너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남은 케이크를 입에 털어 넣었다. “남은 열흘 동안은 내 인생을 살겠다는 거야.”
“나 찾지 마. 방해하지도 말고. 우리 가족들 들먹이며 협박하지도 마.”
“열흘 뒤에도 내가 살아있다면……”
나는 가볍게 웃었다. “그때 다시 네 게임 상대를 해줄게.”
3.
나는 시내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에 체크인했다. 결제는 설희가 준 카드로 했다.
댓글이 쏟아졌다.
[스위트룸??? 즐길 줄 아네.]
[여주 돈으로 호캉스라니, 이건 좀 통쾌한데?]
[열흘 남았는데 저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캐리어를 입구에 던져두고 장미꽃잎을 띄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머릿속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8일 14시간 32분.
나에겐 아직 8일 반이 남았다.
휴대폰은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설희는 더 이상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심야, 나는 널찍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진짜 자는 거야? 배포 크네.]
[심설희 지금 뭐 하는지 알아? 얘 휴대폰 위치 추적 중임.]
[진짜 숨 막힌다, 저 감시 본능…….]
잠이 들락 말락 할 때쯤, 문을 부수는 듯한 거친 소음이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댓글창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방금 무슨 소리야?!]
[누가 문 부수고 들어오는데!!!]
[설희야? 설희 온 거야???]
[미친, 심장 떨려 죽겠네.]
대응할 틈도 없이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덩치 큰 경호원들이 길을 터주자, 그 사이로 눈이 벌겋게 충혈된 심설희가 나타났다. 그녀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연지안.”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가운 깃을 여몄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멈춰 섰고,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덮었다.
“서준이 어디 있어?”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뭐?”
“연기하지 마.” 그녀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뼈가 으스러질 듯한 힘이었다. “서준이 어디에 빼돌렸냐고! 말해!”
“무슨 소린지 몰라—”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그녀는 더 세게 쥐어 올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남주가 납치됐다고?]
[지안이가 납치했다고? 말도 안 돼, 얘 계속 호텔에 있었잖아.]
[시간대가 안 맞아. 납치 설계할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심설희 완전히 돌았네.]
“이거 놔, 심설희!” 통증에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임서준 본 적도 없어! 난 계속 여기—”
“연지안, 내가 널 너무 우습게 봤나 보네.”
“그렇게 비련의 주인공처럼 굴더니, 뒤로는 서준이를 납치해? 너 진짜 독한 놈이구나.”
“아니라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나를 침대 위로 거칠게 내동댕이치더니, 내 머리를 짓눌렀다.
“마지막 기회야. 서준이 어디 있어? 걔한테 무슨 짓 했어?”
얼굴에 닿는 그녀의 숨결에서 광기 어린 서늘함이 느껴졌다.
6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심설희의 모습이었다.
[여주 무서워 죽겠음……]
[근데 진짜로 지안이가 납치한 거면 쟤도 당해도 싼 거 아님?]
[눈이 있으면 좀 봐! 쟤가 언제 납치를 해?]
[이거 백퍼 오해다.]
“모른다고 했잖아.”
“심설희, 내 눈 똑바로 봐. 내가 지난 6년 동안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었어?”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찰나의 동요였다.
“서준이 휴대폰 위치가 마지막으로 끊긴 곳이,” 그녀가 독기 서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네가 갔던 그 카페였어.”
몸이 차갑게 식었다.
함정이다. 누군가 덫을 놓은 것이다.
“나 아니야, 정말 아니라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그녀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냈다.
심설희는 내 손을 틀어잡고 칼날을 내 손목에 갖다 댔다.
“연지안.” 그녀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낮게 가라앉았다. “네가 서준이 원망하는 거 알아. 걔가 내 마음 뺏어갔다고 생각하겠지. 원래 네 마음 같은 건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근데 서준이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마지막으로 묻는다. 서준이 어디 있어?”
칼날이 손목 피부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피가 울컥 쏟아졌다.
전신을 관통하는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설희 미쳤어 진짜 돌았어]
[지안이 진짜 불쌍하다…… 진짜 모르는 표정인데]
[지안아 아무 말이라도 해봐! 일단 살고 봐야지!]
나는 입을 벌렸지만, 터져 나오는 건 찢어지는 듯한 신음뿐이었다.
“나…… 정말…… 몰라……”
4.
새하얀 시트가 선명한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심설희의 손은 강철 족쇄처럼 내 손목을 옥죄고 있었다.
칼날이 살점을 가를 때마다 심장 박동에 맞춰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서준이 어디 있냐고.” 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보이는 건 얼음장 같은 그녀의 얼굴과 광기로 번득이는 눈동자뿐이었다.
[지안이 정신 잃는다……]
[심설희 이거 놔! 진짜 사람 죽겠어!]
[경찰에 신고 좀 해줘! 이건 명백한 살인 미수잖아!]
[시스템 뭐 해?! 이런 건 제재 안 해?!]
시스템은 여전히 침묵했다.
그래, 이 공략 게임에서 조연의 목숨 따위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나는 그저 주인공들의 사랑을 돋보이게 할 도구이자,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프다.
이 고통은 너무나도 생생한 실재였다.
“말 안 하겠다 이거지?” 심설희가 칼을 더 깊게 눌렀다.
살이 갈라지는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더 세차게 흘러나왔다.
눈앞에 검은 점들이 점멸했다. 낡은 TV 수신이 끊길 때처럼.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 싶던 그 순간—
설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녀는 곧바로 전화를 낚아챘다. “서준아!”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설희야…… 나, 겨우 도망쳤어…….”
“서쪽 외곽 폐공장인데…… 다들 도망갔어…….”
“……너무 무서워…….”
“걱정 마!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설희의 목소리가 단숨에 변했다.
방금까지의 살기는 온데간데없고,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떨림 가득한 다정함이었다.
“다친 데는 없어?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 금방 가.”
그녀는 전화도 끊지 않은 채 내 손목을 놓치고 밖으로 돌진했다.
칼날이 빠져나가며 한 번 더 날카로운 통증이 덮쳤다.
나는 침대 위로 허물어지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냥 가버린다고?!]
[손목에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구급차라도 불러줘야 하는 거 아냐?!]
[이게 설희가 말하는 사랑이야? 남주를 위해서 남의 목숨은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게?]
[내가 왜 여태껏 설희를 응원했지…… 역겹다.]
나는 떨리는 왼손을 뻗어 협탁 위의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시트는 이미 흠뻑 젖어 검붉은 얼룩이 계속해서 번져나갔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겨우 휴대폰 끝자락이 손끝에 닿았다.
댓글창이 긴박하게 움직였다.
[제발! 잡았다!]
[119 신고해! 빨리!]
[정신 차려! 자면 안 돼!]
화면을 열었지만 시야가 번져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1, 1, 9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호흡이 점점 얕아졌다.
—딸깍.
“네, 119 상황실입니다…….”
입을 열어 말을 하려 했지만 쇳소리만 섞인 가쁜 숨만 새어 나왔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호텔이라고, 피가 멎지 않는다고,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멀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카펫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안 돼!!!]
[누구 없어요?! 제발 좀 살려주세요!!!]
[호텔 직원들은 뭐 하는 거야?! 저 난리가 났는데 아무도 몰라?!]
[심설희 이 나쁜 년아!!!]
의식이 흩어졌다.
문득 내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피바다 속에 웅크린 채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린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댓글들이 눈앞을 스쳤다.
[설희가 서준이 만났어.]
[서준이가 설희 품에 안겨서 우네.]
[설희가 “다 끝났어, 괜찮아”라고 달래주고 있어.]
[서준이가 설희한테 키스했어.]
[……둘이 키스한다고.]
[지안이가 여기서 피 흘리며 죽어갈 때.]
댓글창이 몇 초간 멈췄다.
그리고 정서가 변하기 시작했다.
[진짜 역겹다……]
[지안이가 뭘 잘못했는데? 그냥 사람 하나 잘못 사랑한 죄밖에 없잖아.]
[6년 동안 바친 진심이 저런 칼날로 돌아오다니.]
[지안이가 죽으면 설희는 그냥 살인마야.]
[설희가 후회하는 꼴이 보고 싶어.]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란데…… 지안이가 그때까지 못 버틸까 봐 무서워.]
카운트다운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8일 9시간 01분.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조금 일찍 퇴장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