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 출신의 말 못하는 아내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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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 출신의 말 못하는 아내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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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 전화를 거는 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쇳소리가 섞인 듯한 갈라진 ...

Chương (1)

第1章

할아버지께 전화를 거는 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쇳소리가 섞인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온 회장님 댁 그… 모자란 손녀분, 아직 살아있나요? 저, 그 집안이랑 정략결혼 하겠습니다.” 어젯밤, 서재 밖에서 들었던 그 대화만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3년간 내 온 세상을 지탱해 온 믿음이 단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내 약혼녀. 3년 전, “이번 작전만 끝나면 바로 네 남자가 될게”라며 떠났던 전설적인 블랙 옵스 요원 심채윤. 그녀는 자신의 부하에게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하고 있었다. “진우현이랑 그 아이 일, 절대로 시준이가 모르게 해.” 부하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별이가 벌써 두 살이에요. 팀장님 친자식이잖아요! 애 낳으려고 일부러 S급 장기 잠입 임무라고 거짓말까지 하셨으면서…” 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바쳤던 기다림은, 고작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기 위해 꾸며낸 연극의 배경일 뿐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눈가에 서린 피로함이 치열한 사투의 흔적인 줄로만 알았다. 이제 보니 그건 두 남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느낀 권태였을지도 모르겠다. 3년 전, 떠나기 직전 내 귓가에 속삭였던 맹세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 기억은 독을 바른 얼음 송곳이 되어 내 심장을 꿰뚫는다. ‘별이’라고 불린 그 아이는 벌써 두 살이 넘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우리 둘의 미래만을 설계하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차가운 백색 전등 아래 비친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이 관계의 추악한 진실은 그보다 더 처참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의 썩은 동아줄뿐이었다. 그것만이 이 배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다. 1 “시준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아이가 아니면 안 된다고 3년을 버티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온가 대가댁 아가씨는 어릴 적 사고로 지능이 낮아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단다.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할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아줄 테니, 너…” 할아버지께 뭐라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랬다. 서울 사교계에서 내가 내 경호원이었던 심채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열여덟 살에 만나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 내 5년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3년 전, 그녀가 긴급한 S급 임무를 맡게 되었다며 떠나던 날, 그녀는 내게 약속했었다. “내가 돌아오는 날, 네 남편이 될게.” 그 한마디를 믿고 3년을 기다렸다. 그사이 수많은 루머가 돌았다. 심채윤이 작전 중에 죽었다느니, 아니면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느니. 나는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오직 달력에 엑스표를 쳐가며 그녀가 돌아와 내 곁에 안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 강남 바닥에서 송씨 집안의 후계자 송시준은 비즈니스에선 냉혈한이지만, 경호원 심채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순정남으로 통했다. 할아버지의 의구심은 당연했다. 나조차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3년 임무가 거대한 거짓말이었다니. 내가 침묵하자 전화 너머 할아버지는 내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으신 듯 잠시 침묵하시더니 나직이 말씀하셨다. “정말 결심이 선 거라면, 이 할아비는 네 결정을 따르마. 온가네 세력이면 평생 네가 어디 가서 홀대받을 일은 없을 게다.” “모레, 모레 사람을 보낼 테니 주변 정리부터 해두거라.” 전화가 끊기고도 나는 한참 동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들었던 채윤과 부하의 대화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심장에 만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박힌 듯한 통증이 사지로 번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채윤은 이미 3년 전에 바람을 피웠다. 다른 남자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3년 임무’라는 가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3년 동안, 그녀의 직업적 특수성과 보안 문제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연락해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소식이 끊길 때마다 나는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봐, 혹은 영영 소식이 끊길까 봐. 잠 못 이루는 무수한 밤을 우리 둘의 5년 치 추억으로 버텼는데. 그렇게 돌아온 그녀가 내 곁에 있는데. 망연자실해 있을 때, 채윤이 침실로 들어오다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 “시준아! 바닥이 차가운데 왜 여기 앉아 있어? 어디 안 좋아?” 2 채윤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소중해 보였다. 3년 전의 5년, 그리고 돌아온 지 한 달이 된 지금까지도 그녀는 내게 지극정성이었다. 그래서 더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 화면을 끄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갑자기 빈혈이 좀 와서 그래. 잠깐 휘청한 거야. 괜찮아.” 그제야 채윤은 안심한 듯 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내일 제주도 가자. 비서한테 비행기 표 예약해두라고 했어. 너 바다 좋아하잖아. 우리 웨딩 사진, 바닷가에서 찍는 거 어때?”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함이었지만, 진실을 알아버린 지금 그 목소리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웠다. “아니, 별로야.” 채윤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개어 왔다. “왜 그래, 시준아.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약속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속이지 않기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채윤아,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너한테 숨길 게 뭐가 있겠어.”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자자, 좀 피곤하네.” 다음 날 아침, 정적을 깨는 거친 노크 소리에 잠이 깼다. 채윤이 문을 열자, 그곳에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한 남자가 두 살 남짓 된 남자아이를 안고 서 있었다. “채윤아… 애가 계속 엄마만 찾아.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울기만 해. 너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나도 이제 한계야…” 채윤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더듬었다. “시준아, 오해하지 마. 이쪽은 우리 팀 주치의였던 진우현 씨야. 내 동료이자 친한 언니였던 분의 남편인데, 그 언니가 작전 중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 부자가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좀 챙겨줬던 것뿐이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진우현이라는 남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송시준 씨, 두 분 곧 결혼하신다는 거 압니다. 채윤이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애가 아직 너무 어려서 자꾸 엄마만 찾으니까 저도 어쩔 도리가…”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채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애가 엄마를 찾네. 채윤아, 네가 저 아이 엄마야?” 채윤은 진우현을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내게 변명하듯 쏟아냈다. “아니야, 시준아! 애가 벌써 두 살이 넘었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큰 애가 있겠어. 그냥 별이 엄마가 나 대신 죽은 거나 다름없어서 내가 마음이 쓰여서 돌봐줬더니, 애가 날 엄마로 착각하는 거야. 다 오해야.” 나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이목구비가 채윤과 소름 끼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내일 밤이면 할아버지가 보내준 차를 타고 이곳을 떠난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심장을 짓누르는 통증을 견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믿을게. 두 사람 잘 달래서 보내. 난 좀 더 자야겠어.” 내가 계단을 올라가자 채윤이 다급하게 뒤를 쫓아왔다. “시준아, 화난 거 아니지? 응? 걱정 마, 절대로 우리 관계에 방해 안 되게 할게…” 하지만 채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아래층에서 진우현의 가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윤아, 네가 가고 나서 한 달 동안 애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서 몸이 말이 아니야. 병원 좀 같이 가주면 안 될까? 난 여기 지리도 잘 모르고 아는 사람도 너뿐이라… 나한텐 별이밖에 없는 거 알잖아. 이 애마저 잘못되면 난 정말 못 살아.” 나는 고개를 돌려 채윤을 보았다. 그녀는 입을 떼지 못했지만, 눈빛만큼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걱정하고 있었다. 그 남자가 아니라, 그 아이를.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아프다는데 큰일이네. 병원 같이 다녀와. 어쨌든 널 구하려다 돌아가신 분 아이라며.” 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목소리조차 가벼워졌다. “그럼 얼른 병원만 들렀다 올게! 시준아, 고마워.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현관으로 달려가 익숙한 몸짓으로 아이를 건네받았다. 너무나 능숙한, 엄마의 손길이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잠옷 차림에 겉옷만 대충 걸친 채였다. 나는 채윤의 어깨에 의지해 안겨 있는 아이와,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심장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3 하늘이 완전히 어둑해진 뒤에야 채윤과 우현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나는 온종일 방 안 침대에 틀어박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오는 채윤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채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준아, 애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 의사 선생님이 장기적인 케어가 필요하다는데, 얘네 부자가 한국에 연고가 없잖아.” “집도 넓은데…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게 하면 안 될까?” 나는 눈을 질겁게 감았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비참함을 억누르려 애썼다. 오늘 아침, 분명히 약속했었다. 우리 생활에 절대 지장 없게 하겠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 부자를 집안으로 들이겠단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입을 떼려던 찰나, 어느새 진우현이 아이 손등을 잡고 방 문턱까지 다가와 서 있었다. “시준 씨, 채윤이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그냥 애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요. 이 아이,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어요. 채윤이가 그때부터 제 아내 대신 엄마 노릇을 해줘서 애가 유독 따르는 거예요.” “애한테 채윤이가 엄마가 아니라고 설명할 길도 없고… 그래도 정 불편하시다면 저희가 나갈게요…” 우현의 가증스러운 ‘피해자 코스프레’가 이어졌지만, 내 시선은 아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고정되었다. 숨이 턱 막혔다. 이불을 쥔 손끝이 떨렸고, 눈물이 통제력을 잃고 툭툭 떨어졌다. 나는 채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소름 끼칠 만큼 갈라져 있었다. “저 아이 목에 걸린 거… 뭐야?” 내가 열여섯 살 때, 할아버지는 거금을 들여 채윤을 내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하셨다. 딱히 위험한 일은 없었지만,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채윤이 과거 원한 관계에 얽힌 킬러들에게 쫓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상대가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그녀를 밀치고 대신 그 치명적인 총탄을 맞았다. 상대는 현장에서 제압됐고 채윤은 목숨을 건졌지만, 내 심장 불과 0.5cm 옆에는 구멍이 났다.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채윤은 내 침대 곁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울고 있었다. “오늘부터 내 목숨은 송시준, 네 거야.” “심채윤의 인생에 송시준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녀는 내 가슴 속에서 꺼낸 그 탄두를 가공해 목걸이로 만들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은 채 경건하게 그 탄두에 입을 맞췄다. “이 순간부터 매 순간 기억할게. 내 목숨이 누구 덕분에 붙어 있는지.” “이 목걸이는 내 부적이야. 내가 살아있는 한, 이건 절대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날 채윤의 붉어진 눈시울이 너무 진실해 보여서였을까, 아니면 목걸이에 입 맞추던 그 뒷모습이 너무나 애틋해서였을까. 나는 그저 그날, 내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것만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죽어도 몸에서 떼지 않겠다던 그 목걸이가 저 아이의 목에 천연덕스럽게 걸려 있었다. 채윤은 입술만 달싹일 뿐, 차마 어떤 변명도 내뱉지 못했다. 반면 진우현의 눈동자에는 찰나의 승리감이 스쳤다. “아, 이 목걸이요? 별이가 조산으로 태어나서 아주 위험했거든요. 채윤이가 애 걱정된다고 선물로 준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차고 있었죠.” “근데 정말 신기하죠? 이 목걸이 덕분인지 애가 큰 병 한 번 없이…” 우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윤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만해! 입 닥쳐!” 4 채윤은 우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 아이는 겁에 질려 자지러지게 울었지만, 나는 더는 신경 쓸 기력조차 없었다. 머릿속엔 오직 방금 우현이 했던 말들만 맴돌았다. 채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쾌한 신음 섞인 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는 진우현의 방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뼈마디가 녹아내릴 듯 달콤했다. “이러지 마… 시준이 집에 있잖아. 들키면 어떡하려고.” 남자의 목소리는 욕망에 짓눌려 헐떡이고 있었다. “괜찮아. 문 잠갔어. 안 들려. 이리 와, 채윤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응?” 그 뒤로 이어진 상황은 뻔했다. 공기 중의 외설적인 열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채윤의 몸 위에 있던 우현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도발적인 그의 눈빛을 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우현은 일부러 문을 열어둔 것이었다. 내가 이 모든 추잡한 광경을 목격하게 하려고. 그들의 실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하려고. 나는 시선을 떨구고, 친절하게 그들의 방문을 닫아주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식탁에는 별이 혼자 앉아 있었다. 아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해물 죽을 오물오물 떠먹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아이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송 아더띠, 일어났어여? 죽 먹을래여? 마시떠여…”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이는 숨이 막히는 듯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입을 틀어막고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나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려 다급히 다가갔다. 어른들 사이의 일이지, 아이가 내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걸 방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때 진우현의 고함이 정적을 깼다. “송시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는 맹수처럼 달려들어 나를 밀쳐내고는 쓰러진 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가 반응이 없자 그는 별이가 먹던 그릇을 확인하더니, 충혈된 눈으로 나를 향해 포효했다. “송시준 씨! 우리 부자가 여기 있는 게 싫으면 그냥 나가라고 하면 될 거 아냐! 왜 애한테 이런 짓을 해! 고작 세 살이라고요! 애 죽일 셈이야?” “별이 해산물 알레르기 심해서 내가 입에도 안 대게 하는데, 세상에 어떻게… 어떻게 해물 죽을 먹여!” 쏟아지는 추궁에 나는 멍해진 채 본능적으로 부인했다. “아니야… 내가 준 게 아니야…” 하지만 우현은 내 변명을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당신이 아니면? 세 살짜리가 혼자 배달 앱으로 해물 죽이라도 시켰다는 거야? 애가 뭘 안다고!” 채윤은 나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서 괴로워하는 별이를 번쩍 안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만해. 일단 병원부터 가야 해.” 그녀는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5년을 함께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나를 탓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곁을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채윤의 손목을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심채윤, 나 아니야.” 채윤의 발길이 멈췄다. 미간에 짜증 섞인 빛이 스쳤다. “놓아줘. 별이부터 살려야 하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현이 나를 세게 밀쳐냈고, 두 사람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나는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허리 끝이 거실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벼락같은 통증이 전신을 휩쓸어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미간만 찌푸려도 세상을 잃은 듯 달려왔을 채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내 비명은 들리지 않는 소음일 뿐이었다. 그녀의 온 신경은 오로지 품 안의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핸드폰이 울렸다. 할아버지의 문자였다. [차 도착했다. 짐 챙겨서 나오너라.] 나는 눈물을 벅벅 닦아내고 허리의 통증을 참으며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건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오직 신분증과 카드만 챙겨 집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보내준 차 뒷좌석에 앉아, 채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헤어지자, 심채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