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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그녀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구 회장님이 내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아마 그는 우리 사이의 양자 입양 합의서에 찍힌 인장을 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시지 내용은 간단했다. [...
Chương (1)
第1章
구 회장님이 내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아마 그는 우리 사이의 양자 입양 합의서에 찍힌 인장을 만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메시지 내용은 간단했다.
[그녀에게 이제 더 이상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결혼 4주년 기념일이었다.
구유진이 내게 호텔 카드키를 건넸을 때, 그녀의 눈 속에 일렁이던 교활함은 마치 독을 바른 꿀 같았다.
“해원아, 널 위한 선물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생기 넘치는 설렘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방문을 여는 순간, 가장 익숙한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침대 위에서 엉켜 있는 두 그림자.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는, 나와 한 이불을 덮고 자라며 형제나 다름없던 강태준이었다.
유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느릿하게 샤워 가운을 여몄다. 그녀의 말투는 수술용 메스보다 더 차갑게 파고들었다.
“내 감정 부전증이 나은 게, 온전히 네 공이라고만 생각하지 마.”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욕망이 뭔지 가르쳐준 건 태준이야. 넌 날 떠나지 못할 거고, 태준이도 우리 우정을 깨고 싶어 하지 않아. 우릴 받아들여. 그러면 이 결혼은 유지될 수 있어.”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내가 수술대 위에 몇 번이나 올랐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본질적인 비밀은 따로 있다. 구씨 가문의 ‘민며느리’ 같은 존재로 입양되던 그날부터, 내 인생은 기한이 정해진 구원 투수일 뿐이었다는 것을.
1
유진은 태준의 몸 위로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더니, 맨발로 내 앞에 다가왔다.
“왜 울어? 나를 위해 기뻐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이제 너 말고도 내 무감각한 감정을 치료해 줄 사람이 생겼는데.”
나는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이 바닥으로 소리 없이 떨어졌다.
침대에서 일어난 태준의 쇄골 위에는 붉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해원아, 미안해. 정말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나를 때려도 좋고 욕해도 좋아. 하지만 유진이는 탓하지 마. 다 내 잘못이야.”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태준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태준이 겁주지 마. 네가 당황스러운 건 알겠지만, 이건 싸울 일이 아냐.”
“태준이는 명분을 바라지도 않아. 나 역시 태준이 때문에 널 버리지는 않을 거고. 너, 언제까지 그렇게 철없이 굴래?”
태준을 안고 있는 그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약을 먹으며 감정이 널뛸 때, 물건을 부수고 던지면 나는 묵묵히 파편을 치웠다.
반달 동안이나 한마디도 하지 않는 냉대를 퍼부을 때도, 나는 집안일을 돌보며 소리 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모든 서러움을 속으로 삼키며 우는 모습조차 들키지 않으려 애썼는데, 돌아온 것은 결국 ‘철없다’는 비난뿐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안 가득 고인 쓴물을 삼켰다.
“언제부터였어?”
유진은 휴대폰을 몇 번 두드리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직접 봐.”
마비된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사진들은 시간순으로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1년 전, 콘서트장에서 태준이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있고,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밝게 웃고 있었다.
2개월 전, 놀이공원에서 솜사탕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
지난주, 내가 홀로 수술 준비를 위해 병원에 갔을 때, 그들은 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있었다.
그토록 생기 있고 행복해 보이는 구유진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섯 살 때부터 그녀의 손을 잡고, 증세가 가장 심각했던 사춘기를 함께 통과해 왔다.
그녀가 조금 나아졌을 때 내게 말했었다.
“해원아, 난 온 세상을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오직 너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
그때 나는 내가 그녀의 세계에 들어간 유일한 사람인 줄 알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그저 그녀의 어둠을 함께 건너준 사공이었을 뿐, 그녀가 원하는 연인은 단 한 번도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날 꼬박 1년이나 속였어!”
“구유진,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나를 위해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겠다고, 내 곁에만 있어 주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그녀의 눈에 죄책감이나 미안함 따위는 없었다. 그저 덤덤한 어조였다.
“사람은 변해. 아플 때 했던 말을 진심으로 믿으면 곤란하지.”
“그만 좀 울어. 질척거리는 남편처럼 굴지 말고. 널 상처 주려는 게 아냐, 그저 더는 속이고 싶지 않을 뿐이야.”
“해원아, 네가 내게 준 건 습관과 의존이야. 넌 20년 동안 내게 ‘설렘’이 뭔지 가르쳐주지 못했지만, 태준이는 단 1년 만에 해냈어.”
그녀의 아이를 갖기 위해 수술대 위에서 통증을 견디며 홀로 눈물을 흘리던 그 순간에도.
그녀는 밖에서 태준과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지난 세월 혼자 짊어졌던 모든 것들이 떠오르자,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 20년을 바쳐 키워냈고, 수십 번의 시술 끝에 그녀의 아이를 얻었다.
그런데 그녀는 태준 덕분에 치유되었다고 말하며, 사랑을 깨닫자마자 다른 이를 사랑한다 말한다.
“이제 다 끝났어?” 유진의 목소리가 현실로 나를 끌어당겼다.
태준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유진아, 그만해. 해원이가 화내는 건 당연해. 내가 일단 갈게, 둘이 잘 이야기해 봐….”
유진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단호한 말투였다.
“너 아무 데도 못 가.”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네가 나가. 하지만 경고하는데, 너 나랑 보낸 세월이 몇 년인데 나 떠나서 누가 널 받아줄 것 같아?”
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뒤를 돌아 문으로 향했다.
뒤에서 태준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아, 홧김에 가지 마. 우리 잘 이야기하자.”
유진의 낮은 달램이 뒤를 이었다.
“신경 쓰지 마. 놔둬, 진정되게.”
2
집을 나온 후, 구 회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해원아, 고생 많았다. 이혼 문제는 내가 귀국한 뒤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나는 회장님이 예약해 준 호텔에 머물며 이틀을 몽롱하게 보냈다.
그러다 태준에게 연락이 왔다.
“해원아, 제발 돌아와 줘. 우리 제대로 얘기하자. 나 앞으로 그 사람 절대 안 만날게.”
우리는 보육원에서 함께 자랐다. 유진에게 입양되기 전까지 그는 내 유일한 혈육 같은 존재였다.
처음 내가 아픈 유진에게 장가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나를 껴안고 두 시간을 울었다.
그리고는 좋아하던 운동도 포기하고, 오직 그녀를 고쳐 내 결혼 생활을 평범하게 만들어 주겠다며 심리 상담사가 되었다.
“우리 해원이가 얼마나 착한데.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그때 나는 감동하며 그를 껴안았다. 이런 형제가 있다는 것이 내 인생 최대의 복인 줄 알았다.
그는 약속대로 유진의 심리 상담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병이 낫자, 그는 그녀의 침대까지 치료의 연장선으로 삼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만나기로 했다. 용서해서가 아니라,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였다.
집으로 돌아가자 태준은 나를 소파에 앉히고 따뜻한 꿀차 한 잔을 건넸다.
예전에 내가 유진 때문에 힘들 때면 그가 자주 만들어 주던 것이었다.
“해원아,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어. 한 입이라도 좋으니 마셔줘. 속죄할 기회를 줘.”
실랑이하기 싫어 차를 몇 모금 마셨다.
하지만 몇 분 뒤, 눈앞이 핑 돌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태준은 나를 부축해 침실로 데려갔다. 그곳엔 유진이 잠들어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찰나, 문가에 선 태준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온몸의 피부가 형언할 수 없는 충동으로 들끓었고,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차가운 유진의 몸을 갈구하며 뒤틀렸다.
갑작스러운 극심한 통증에 잠시 정신이 들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 돼… 제발, 멈춰줘….”
그러나 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무력하게 떨며 고통이 전신을 잠식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 복부에 찢어지는 듯한 경련이 일어났고, 다리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멈춘 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비웃었다.
“은해원, 정말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구나. 나를 붙잡으려고 자기 몸에 약까지 타는 저질스러운 짓을 해?”
그녀의 눈빛에 연민은 없었다. 오직 혐오와 멸시뿐이었다.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
태준이 약을 탄 거라고,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이 문을 쾅 닫고 나갈 때까지, 나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청소하던 가사 도우미가 나를 발견해 옮겼다고 했다.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몸조리 잘하세요. 아이는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눈물이 말라버린 듯 눈가가 따가웠다. 머릿속엔 주마등처럼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유진이 일곱 살 때, 어머니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아버지가 투신하는 장면을 본 뒤로 그녀는 입을 닫았다.
의사는 정서적 무감각증이라 했다. 표현할 줄도, 타인의 감정을 느낄 줄도 모르는 아이.
구 회장님은 보육원에서 나를 데려와 정략적으로 약혼을 시켰다.
내가 머리가 굵어진 뒤, 회장님은 유진이 완쾌되면 내 선택을 존중해 주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선택권은 스스로 던져버렸었다.
20년 동안, 그녀의 냉담함 앞에서도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고,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다.
결혼하던 날, 그녀는 엄숙하게 약속했다.
“우리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로 키울 거야.”
평생을 증오하며 살았다면서, 결국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똑같은 인간으로 자라 있었다.
3
병원에 있는 사흘 동안 유진은 단 한 통의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밟던 중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구유진 씨 보호자 되십니까? 준강간 혐의로 피소되어 지금 저희 서에 계십니다. 출석해 주셔야겠습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젊은 경찰이 상황을 설명했다.
“신고자는 강태준 씨입니다. 어제 구유진 씨와 다툼 끝에 강압적인 성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조사를 진행 중인데, 지금 강태준 씨가 전원을 꺼두고 연락이 안 됩니다. 고소를 취하하지 않으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취조실에서 나온 유진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이제 만족해? 네가 쓸데없이 가부장적인 권위 세우겠다고 집을 나가니까 태준이가 나랑 다툰 거 아냐!”
“태준이는 명분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그를 몰아붙인 거야.”
옆에서 기록하던 순경이 경악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다. 당당하게 내 탓을 하는 그녀를 보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부른 게, 태준이한테 고소 취하해달라고 설득하라는 거야?”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가서 사과하고 잘 좀 달래줘. 나랑 더 이상 싸우지 않게.”
그녀는 정말로 이 모든 게 내 잘못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너그럽지 못해 그녀를 경찰서까지 오게 만들었다고.
떠나기 전 더 큰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태준에게 연락해 그가 있는 카페로 향했다.
그는 턱을 괸 채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몸은 좀 어때? 벌써 퇴원했네?”
나는 군더더기 없이 본론을 꺼냈다.
“나한테 약 먹이고, 유진이를 신고하고.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태준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무릎 꿇고 비는 걸 보고 싶어.”
나는 악을 쓰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나직이 물었다.
“태준아, 예전에 나한테 잘해줬던 거, 다 거짓말이었니?”
“보육원에 있을 때, 맛있는 건 항상 나한테 양보했잖아. 누가 나 괴롭히면 네가 앞장서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버텼고.”
“나 입양되던 날, 대문 앞까지 쫓아와서 네가 아껴둔 사탕 봉지를 쥐여주며 꼭 행복해지라고 했잖아.”
눈물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난 네가 정말 내 형제인 줄 알았어. 내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줄 알았어.”
그의 가슴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잠시 멍해 보였던 그의 눈빛이 독기로 바뀌었다.
“처음엔 정말 친동생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점점 잘 나가는 걸 보니까 증오하게 되더라고.”
“해원아, 내가 너보다 훨씬 건강하고 뛰어난데 왜 구 회장은 내가 아니라 너를 선택했을까!”
“그 뒤로 나도 입양됐지만, 양어머니는 나를 성노리개로 취급했어. 네가 구씨 집안에서 비단옷 입고 맛있는 거 먹을 때, 나는 지옥에 있었다고. 유진이가 나무토막 같든 말든 너는 대저택에 살고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며 돈을 물 쓰듯 썼지. 내가 널 찾아갈 때마다 속이 뒤집혔던 거 알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오래전부터 나를 원망하고 있었을 줄이야.
태준이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운동 그만두고 심리학 공부한 건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 구 회장이 너 같은 타입을 좋아한다면 나도 그런 척하면 될 테니까.”
“집안에서 안 받아준다면 유진이를 직접 꼬셔내는 수밖에 없었지.”
말을 마친 그는 내가 무릎 꿇기를 기다리며 여유롭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태준은 만족스러운 듯 내 뺨을 툭툭 쳤다.
“고소는 취하할게. 나도 그 여자가 진짜 감옥 가는 건 아쉽거든. 근데 네가 구씨 집에 있는 건 꼴 보기 싫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유진은 평소처럼 우아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차갑게 뱉었다.
“태준이한테 들었어. 네가 시켜서 신고한 거라며?”
4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구유진, 나는 그런 비열한 짓 안 해. 그놈이 나를 다치게 하고 오히려 뒤집어씌운 거야!”
유진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비웃었다.
“네가 이렇게 영악한 줄은 몰랐네.”
“이야기 지어내는 실력도 늘었어. 정말 내 아이를 가졌다면 나한테 말 안 했을 리가 없지. 내가 세 살 어린앤 줄 아니?”
반박할 틈도 없이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태준이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뛰어 들어왔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셔츠는 찢겨 있었으며 얼굴은 눈물 범벅이었다.
유진의 안색이 변했다. “태준아, 왜 이래?”
태준은 공포와 억울함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가리켰다.
“해원이가 여자애들을 시켜서 골목에서 나를 덮쳤어. 겨우 도망쳐 나왔어….”
머릿속이 백지장이 되었다. 유진은 내 변명 따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입안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유진이 실망했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은해원, 너 정말 역겹다.”
“이런 장난질을 좋아한다고? 그럼 내가 제대로 놀아주지.”
잠시 후, 도우미가 지저분하고 험악해 보이는 여자 몇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에워싸고 옷을 잡아당기며 내 손목을 꺾어 바닥에 눌렀다.
저항하고 발버둥 칠수록 돌아오는 것은 더 거친 폭력이었다.
유진은 그 광경을 뒤로한 채 태준을 부드럽게 달래며 병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복부에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하체에서 뜨거운 피가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겁에 질린 여자애들이 수군거렸다.
“뭐야, 피가 왜 이렇게 많이 나? 죽는 거 아냐?”
그들은 뒷수습도 하지 않은 채 열린 문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서늘한 핏물 위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 회장님의 심복인 주 집사가 경호원들과 함께 황급히 들이닥쳤다.
“해원 도련님! 회장님께서 모시고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병원에서 태준의 상처를 치료해주던 유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할아버지, 귀국하셨어요?”
회장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 당장 본가로 오너라.”
유진은 코웃음을 쳤다.
“해원이가 고자질이라도 했나 보네요? 걔가 잘못을 했길래 정신 좀 차리라고 겁 좀 준 거예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른 뒤, 회장님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해원이는 이미 내가 데려갔다. 너는 와서 이혼 서류에 서명이나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