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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털터리 트럭기사를 1200억 자산가로 만들었다
구청 문을 나서며 은행카드를 가방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러자 참아왔던 웃음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최지훈은 이혼 합의서를 ...
Chương (1)
第1章
구청 문을 나서며 은행카드를 가방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러자 참아왔던 웃음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최지훈은 이혼 합의서를 내 얼굴에 집어던지듯 내밀었다.
“서윤아, 내 혼전 재산 40억은 꿈도 꾸지 마. 지난 6년 동안 내가 먹여 살려줬으면,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그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이른바 그의 ‘첫사랑’이자 ‘잊지 못한 여자’인 주희가 서 있었다. 이제 막 4개월 차에 접어든 듯 살짝 부푼 배를 소중하게 감싸 쥐고, 그녀는 고결하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내 시야 위로 갑작스러운 자막, ‘단톡방 메시지’ 같은 환영이 스쳐 지나간 것은.
[당신은 지금 피폐물 소설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환영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 소설의 제3장에서 비참하게 퇴장할 엑스트라에 불과하다고 했다. ‘재벌가에 시집갔다가 빈털터리로 쫓겨난 속물 전처’라는 낙인이 찍힌 채로 말이다.
더 최악인 건, 3일 뒤에 나를 키워준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는 예고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유언장에는 내 재혼 상대까지 정해져 있었다. 강태혁. 마흔 살의 화물차 운전기사. 사별 후 혼자 딸을 키우며 연봉은 고작 8천만 원 남짓인 남자.
하지만 그 환영은 반전처럼 덧붙였다. 강태혁의 명의로 된 폐쇄된 물류 노선 부지가 하나 있다고.
그리고 3개월 뒤, 그 부지 일대가 국가 주도의 ‘제3기 신도시 및 대규모 물류 허브’로 지정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때 받게 될 토지 보상금은 자그마치 2천 억 원.
1
“사인해.”
최지훈의 변호사가 이혼 합의서를 내밀었다. 세 장짜리 종이 뭉치는 온통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문구들로 가득했다.
혼전 재산 40억은 최지훈의 소유.
결혼 후 취득한 부동산과 차량은 모두 시댁 명의이므로 최지훈의 소유.
지난 6년의 결혼 생활 동안, 윤서윤은 소득이 없었으며 개인 자산 형성 기여도가 전무함.
마지막 줄: ‘윤서윤은 모든 재산 분할 청구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함.’
최지훈은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왼쪽 약지에는 이미 결혼반지가 없었다. 그 옆에는 연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강주희가 앉아 있었다. 지훈의 대학 동기. 결혼 생활 6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서윤아, 얼른 사인해라.”
구석에 앉아 스마트폰을 뒤적거리던 시어머니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끌어봤자 의미 없어. 네 명의로 된 게 하나도 없는데, 법원까지 가서 망신당하고 싶니?”
눈앞에 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인하세요. 이 합의서는 당신의 유일한 면죄부입니다. 빈손으로 나간다는 건, 당신이 저 집안에 침묵을 지킬 의무를 포함해 그 어떤 부채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나는 펜을 들었다.
“잠시만요.” 주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지훈 씨, 서윤 언니가 그동안 고생했는데 너무 아무것도 없는 건 좀… 카드라도 하나 만들어서 생활비라도 넣어주는 게 어때요?”
지훈이 손을 휘저었다. “필요 없어.”
주희는 ‘난 최선을 다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배를 어루만졌다.
현장에 있는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울기를, 매달리기를, 무릎을 꿇고 제발 이혼만은 말아달라고 빌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원래의 ‘윤서윤’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지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부짖다가 보안 요원들에게 끌려 나가고, 그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재벌가에서 쫓겨난 속물녀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조리돌림 당했겠지.
하지만 나는 사인을 마쳤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동안 내 손은 단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다 됐습니다.” 나는 서류를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서윤.” 지훈이 나를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탁자 위로 밀었다.
“거기 500만 원 들어있어. 내… 마지막 성의다.”
주희가 얼른 말을 보탰다. “지훈 씨가 언니한테 정이 많아서 그래요.”
500만 원. 나의 6년.
나는 카드를 집어 들어 빛에 비춰본 뒤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고맙네.”
등 뒤로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나갔네. 애초에 수준도 안 맞는 근본 없는 애를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6년 동안 밥만 축냈지.”
자막이 스쳐 지나갔다.
[뒤돌아보지 마세요. 3일 뒤면 할머니가 떠납니다. 지금 당장 내려가야 해요.]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구청 정문을 나서자 뜨거운 햇살과 지열이 확 끼얹어졌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세 번 진동했다. 엄마였다.
“서윤아, 할머니가… 위독하시대. 빨리 내려와 봐라.”
2
서울에서 할머니댁이 있는 소도시까지 가는 무궁화호 기차 안. 4시간 동안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자막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당신의 이름은 윤서윤. 32세. 소설 속 설정: 허영심 많고 탐욕스러운 여자. 재벌가에 시집갔으나 아이를 못 낳아 쫓겨남. 원작에서 당신의 결말은 지훈의 재혼식 날 약을 먹고 자살하는 것. 첫사랑 주희는 당신의 죽음을 딛고 완벽한 안주인이 됨. 이 소설에서 당신을 동정하는 독자는 아무도 없음.]
‘아이를 못 낳아.’
나는 그 문장에 오랫동안 시선을 멈췄다.
자막이 이어졌다.
[당신은 불임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의 임신이 있었죠. 첫 번째는 3개월 만에 유산, 두 번째는 2개월 만에 유산. 당신의 시어머니가 음식에 약을 섞었습니다. 두 번째 유산 후 자궁이 손상되어 영구 불임 판정을 받게 된 겁니다. OO대학병원 산부인과에 당신의 진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기록 번호: HY-2019-03742.]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 객실 안이 잠시 어두워졌다.
창유리에 반사된 자막의 불빛이 창백하게 빛났다.
나의 두 아이들.
첫 번째 유산 때, 최지훈은 출장 중이었다. 시어머니는 병실로 보약이라며 홍삼액을 가져와 말했다. “젊으니까 금방 또 생기겠지.”
두 번째 수술대 위에서 동의서에 사인할 때, 의사는 말했다. “자궁벽이 너무 얇아졌어요. 앞으로 임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수술실 밖에서 전화를 받던 최지훈은 통화를 마치고 들어와 내게 말했다.
“됐어, 억지로 노력하지 말자.”
그가 ‘됐어’라고 말하던 말투는, 오늘 ‘필요 없어’라고 하던 그 말투와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자막이 다시 떴다.
[병원 기록은 15년 동안 보존됩니다. 시간은 충분해요. 하지만 지금은— 할머니부터 뵈러 가세요.]
기차는 작은 간이역에 멈춰 섰다.
나는 500만 원이 든 카드를 손에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도착하니 새벽 두 시였다.
병원 복도에서 졸고 있던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할머니가 하루 종일 너만 기다리셨다.”
병실 안은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꽂고 있는 할머니는 뼈만 남은 모습이었다.
“서윤아.” 나를 본 할머니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도장 찍었니?”
“네.”
“잘했다.” 할머니는 힘겹게 내 손을 쥐었다. “최 씨네 같은 집구석… 미련 가질 것 없다. 서윤아, 할머니가 사람 하나 남겨뒀어.”
“사람이라니요?”
“강태혁이라고, 네 할아버지 전우였던 분 손주야. 마흔인데, 부인이 세상 떠난 지 2년 됐어. 혼자 딸 키우면서 트럭 운전한다더라. 사람은 투박해도 심성이 곧아.”
할머니는 한참을 기침하셨다.
“서윤아, 그 사람한테 가라. 할머니가 사람 보는 눈은 안 틀려.”
3일 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장에는 동네 친척들이 모여 수군거렸다. “서윤이 걔, 최 회장네서 쫓겨났다며?” “빈손으로 나왔대. 6년 동안 애도 못 낳고 늙기만 해서 이제 어디다 시집보내나.”
나는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세 번 올렸다.
자막이 한 줄 지나갔다.
[강태혁의 번호는 할머니 베개 밑 붉은 주머니 안에 있습니다.]
나는 그 주머니를 찾아냈다. 그 안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과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쓴 번호가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의 신호음 끝에 연결됐다. 엔진 소음이 섞인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쇼?”
“윤서윤이라고 합니다. 그… 할아버지 전우분 손녀…”
“아, 할머니께 말씀 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돌아가셨습니까?”
“네.”
그는 몇 초간 침묵하다가 말했다. “지금 지방 내려가는 길이라 모레쯤 도착합니다. 거기서 기다리십쇼.”
전화가 끊겼다.
자막이 떴다.
[그가 옵니다. 당신의 2천 억도 함께.]
3
강태혁이 나타난 날, 그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파란색 25톤 덤프트럭을 끌고 왔다.
앞 유리에 금이 간 낡은 차였다.
운전석에서 뛰어내리는 그를 훑어보았다. 185c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큰 키,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 물 빠진 회색 티셔츠에 밑창이 다 닳은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마흔 살이라기보다 마흔다섯은 되어 보였다.
“윤서윤 씨?”
“네.”
그는 내 곁에 놓인 캐리어를 보더니, 다시 파란 트럭을 쳐다봤다.
“탑시다. 짐은 뒤에 실을 건데, 좀 굴러도 괜찮으면 넣고.”
내 캐리어는 지훈의 집에서 샀던 루이비통이었다.
내가 가방을 건네자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받아 짐칸에 던져 넣었다. 정말 ‘굴러도 상관없다’는 듯이.
“올라와요. 손잡이는 오른쪽에 있고.”
운전석은 아주 높았다. 원피스를 입은 나는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밑에서 지켜보던 태혁이 예고도 없이 내 허리를 받쳐 그대로 위로 밀어 올렸다.
“꽉 잡아요. 길 험하니까.”
그가 반대편으로 올라타 시동을 걸자, 트럭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거칠게 떨렸다.
트럭 운전석에 앉은 건 처음이었다. 시야가 높아서 길 위의 승용차 지붕이 다 내려다보였다.
에어컨 송풍구에 묶인 낡은 리본에서 경유 냄새가 섞인 바람이 나왔다.
30분 동안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자막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강태혁. 40세. 원작 비중 200자 미만. ‘서윤이 갈 곳 없어 대충 시집간 거친 남자’로 설정됨. 원작 독자들의 평가는 단 한 줄— “윤서윤 같은 속물녀가 결국 트럭 기사한테나 시집가네, 꼴좋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 소설의 가장 큰 숨겨진 변수입니다.]
차는 어느 낡은 물류 단지로 들어섰다.
바닥은 군데군데 패여 있고, 양철 창고들은 녹이 슬어 있었다. 태혁은 가장 안쪽에 있는 낡은 단층 주택 앞에 차를 세웠다.
“다 왔습니다.”
그의 집이었다.
벽지가 반쯤 일어난 방 세 개짜리 집. 대문 앞에는 헌 타이어 두 개가 쌓여 있고, 옆에는 잡초가 무성한 폐주차장이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왔다. 교복 차림에 포니테일을 한 아이는 아주 차가운 표정이었다.
“아빠, 데려온 사람이 저 아줌마야?”
“어.”
아이는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더니 내 하이힐에서 시선을 멈췄다.
“우리 아빠 돈 쓰러 온 거예요?”
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지민.”
“우리 아빠 돈 없어요.” 지민은 아빠 말을 무시하고 나를 쏘아봤다. “일 년 내내 운전해봤자 기름값 빼고 수리비 빼면 남는 거 별로 없다고요. 돈 보고 온 거면 당장 가세요.”
열두 살짜리치고는 제법 당차게 아빠 주머니 사정을 읊었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 네 아빠 돈 안 써.”
“그럼 왜 왔는데요?”
“돈 버는 법 가르쳐주러 왔어. 그래도 될까?”
지민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당신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될 겁니다. 먼저 이 관문을 통과하세요.]
저녁은 태혁이 직접 만든 제육볶음과 김치찌개였다. 고봉밥을 내 앞에 툭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먹어요.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갑시다.”
숟가락을 들려다 말고 나는 멍해졌다.
“그렇게 빨리요?”
태혁은 투박하게 밥을 씹으며 대답했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전화 받았어요. 서윤 씨 챙겨주라고. 어른 말씀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옆에서 지민이 ‘흥’ 하고 코방귀를 뀌며 밥만 먹었다.
[내일 혼인신고가 끝나면, 당신에게는 72일의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안에 모든 토지 임대차 계약 갱신을 마쳐야 해요. 신도시 공고가 뜨면 땅값은 100배로 뛸 거고, 그때는 10원 한 장 건질 수 없으니까요.]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72일.
충분했다.
4
혼인신고 날, 구청 직원은 우리 둘의 신분증과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쳐다봤다.
32세와 40세.
태혁은 구김 하나 없는 흰 셔츠를 입고 머리에 물까지 발라 넘겼지만, 그게 최선인 듯 보였다.
사진을 찍을 때 그의 목은 마치 시멘트 기둥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좀 웃으세요.” 사진사의 말에 태혁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그 표정은 누가 봐도 치통을 참는 사람 같았다.
빨간색 수첩을 손에 쥔 그는 그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갑시다. 오후에 배차 하나 잡힌 게 있어서.”
혼인신고 소식은 사흘 만에 서울까지 전해졌다.
최지훈의 어머니가 단톡방에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전 친구였던 선영이가 캡처해서 보내준 내용은 가관이었다.
[서윤이 걔 누구랑 결혼했는지 아니? 마흔 넘은 트럭 운전사래. 물류센터 옆방 한 칸짜리 집에 산다더라. 난방도 안 들어오는 그런 데.]
그 밑으로 ‘ㅋㅋㅋ’가 줄을 이었다.
[최 여사님 선견지명이 있으셨네. 그럴 줄 알았어.] [에휴, 불쌍하기도 하지.] [불쌍하긴 뭐가, 자업자득이지.]
10분 뒤, 주희의 SNS도 업데이트됐다.
지훈의 대저택 정원에서 찍은 사진. 바닥엔 장미꽃이 가득했다.
[겨울에 내 손을 따뜻하게 녹여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선영이는 ‘웃픈’ 이모티콘을 보내며 물었다. “서윤아, 너 괜찮아?”
나는 딱 다섯 글자만 답했다. “응, 바빠서 이만.”
정말 바빴다.
자막이 상세한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태혁의 명의로 된 폐물류 노선 부지는 총 6개의 필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중 3개는 태혁의 아버지가 30년 전 체결한 임대 계약으로 7개월 뒤 만료 예정이었고, 2개는 주차장 용지로 계약이 막 끝난 상태였다. 마지막 하나는 마을 공공 부지인데, 태혁의 물류 회사가 우선 사용권을 가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행사한 적이 없었다.
3개월 뒤, 이 6개 필지는 신도시 계획의 정중앙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계약이 만료되거나 권리가 소멸하면 보상금은 태혁과 아무 상관이 없어진다.
나는 차 밑에서 브레이크 패드를 교체하고 있는 태혁을 찾아갔다.
“강태혁 씨.”
“어?”
“아버님이 예전에 계약하신 토지 서류들, 찾을 수 있을까요?”
차 밑에서 스패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랍 두 번째 칸 철제 박스에 있을 거요. 뒤져봐요.”
서류를 찾아냈다. 종이는 이미 누렇게 변해 있었다.
만료일: 3개월 하고도 11일 뒤.
아슬아슬했다. 갱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갱신에는 돈이 필요했다. 보증금과 수수료를 합치면 적어도 3천만 원은 필요했다.
태혁의 1년 순수입이 5천만 원 남짓이니, 그에겐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액수였다.
기름때 묻은 얼굴을 닦으며 기어 나온 그가 내 손의 서류뭉치를 보았다.
“왜요?”
“이 땅들, 전부 재계약해요.”
“그걸 왜? 노선 끊긴 지가 언젠데. 차도 안 다니는 썩은 땅이오.”
“나 믿어요?”
그는 스패너를 쥔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무 말이 없었다.
“3천만 원으로 이 땅들 계약해요. 3개월 뒤에 그 3천만 원이 3천억이 되어 돌아오면, 할래요 말래요?”
“3천억?”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술 마셨소?”
“내가 돈 문제로 농담하는 거 봤어요?”
경유 냄새와 엔진 오일 향이 섞인 공기 속에 정적이 흘렀다. 폐주차장의 잡초가 바람에 스쳤다.
“침대 옆 서랍에 통장 있소.” 그는 스패너를 공구함에 던져 넣었다. “비밀번호는 111111.”
내가 돌아서려는데 그가 뒤에서 한마디 덧붙였다.
“윤서윤 씨.”
“네?”
“만약 날리면, 당신 나랑 3개월 동안 트럭 타면서 기름값 벌어야 합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은 시커멓게 더러웠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했다.
“좋아요.”
[그가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모르죠. 자신이 인생 최고의 베팅을 했다는 걸.]
다음 날, 나는 현금 3천만 원을 들고 시청 토지관리과로 향했다.
내 앞에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재계약 서류를 만지고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자막이 빨간색 경고창을 띄웠다.
[주의! 이 남자는 최지훈 회사의 법무팀장입니다. 그들도 이 지역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손에 든 서류를 꽉 쥐었다.
5
최지훈의 법무팀장, 오인규.
나는 그를 안다. 6년 전 결혼식 때 지훈에게 봉투를 건네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청바지에 운동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줄을 서 있는 여자가 예전의 그 ‘최 회장 댁 며느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한 모양이었다.
[최지훈의 부동산 개발팀이 내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신도시 주변 땅을 매집 중이에요. 그들의 목표 중 4개 필지가 태혁의 땅과 겹칩니다. 그들보다 먼저 갱신을 끝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원지주들에게 웃돈을 얹어 가로챌 겁니다.]
나는 오 팀장의 뒤에서 그가 제출하는 서류를 훔쳐보았다. ‘항만로 북측 3번 필지’.
태혁의 리스트에 있던 5번째 땅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뱄다.
내 차례가 왔다. 담당 직원이 서류를 훑었다.
“이 3개는 자동 갱신이라 비용만 내면 되는데, 나머지 2개는 법인 인감이 필요하고 절차가 좀 걸려요. 마을 공공 부지는 이장님 확인서가 있어야 하고요.”
“가장 빨리하면 며칠이나 걸릴까요?”
“보통 보름 정도 잡으셔야죠.”
보름. 너무 늦었다.
[꿀팁: 물류 단지 우선 지원 정책을 활용하세요. 태혁의 물류 회사는 등록된 지 5년이 넘어 '신속 처리 대상'입니다. 단지 관리 사무소에서 증명서를 떼오세요.]
나는 곧장 사무소로 달려갔다. 하지만 법인 대표가 직접 와야 한다고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을 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강원도로 철근 싣고 가는 중인데, 모레쯤 갑니다.”
“모레는 너무 늦어요. 다른 쪽에서 이 땅을 가로채려고 해요.”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누구쇼?”
“최지훈 회사요.”
다시 3초간의 침묵.
“전남편?”
“네.”
태혁은 왜 전남편 회사가 이 땅을 노리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만 했다.
“철근만 부리고 바로 차 돌릴게요. 내일 낮까지 갑니다.”
강원도에서 하차하고 다시 여기까지 600km가 넘는 거리였다. 그는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다음 날 오전 11시, 파란 트럭이 시청 앞에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려오는 태혁의 두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어디다 사인하면 됩니까?”
그의 등장으로 절차는 급물살을 탔다. 3개 필지의 갱신이 현장에서 완료됐고, 나머지도 신속 처리 절차에 들어갔다. 마을 이장님 댁을 세 번이나 찾아가 간곡히 부탁한 끝에 확인 도장까지 받아냈다.
사흘 뒤 오후, 6개 필지의 임대차 계약 갱신이 모두 끝났다.
최지훈의 법무팀보다 딱 24시간 빨랐다.
같은 날 오후 4시, 오 팀장이 매입 서류를 들고 지주들을 찾았을 때 지주들은 이렇게 답했다.
“미안하네, 오전 일찍 재계약이 끝나버렸어.”
오 팀장이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폰 너머로 지훈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계약을 누가 했다고? 누가?”
“강태혁이라고, 물류 쪽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최지훈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 강태혁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