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당신 몫 나는 다 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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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당신 몫 나는 다 잊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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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그 숫자가 거대한 망치처럼 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혼탁한 의식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장 ...

Chương (1)

第1章

서른? 그 숫자가 거대한 망치처럼 내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혼탁한 의식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한 얼굴, 한설아였다. 그녀는 순백의 원피스를 입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던 강민재가 안도 섞인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준우야, 드디어 깨어났구나.” “한 달 넘게 혼수상태였어.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하지만 내 시선은 자석에 이끌리듯, 방금까지 맞잡고 있다가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감전된 듯 튕겨 나간 두 사람의 손등에 머물렀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한 달이나 누워 있는 동안, 너희는 아예 연애의 결실을 봤나 보네?” “맞다, 내가 그때 그 산은 위험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내 졸업 논문은 어떡해…… 너희 연애하느라 제출하는 거 잊은 건 아니지?” 그때 설아가 억눌린 화를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서준우! 제발 정신 좀 차려! 너 서른이야. 졸업 논문이 지금 말이 돼?” 그 한마디가 얼음 송곳처럼 내 뇌를 꿰뚫었다. 내 기억 속의 나는, 분명 이제 막 스물둘이 된 청춘인데. …… 01. 병실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정적이 감돌았다. 그제야 나는 침대 머리맡에 선 두 사람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과 설아는 사뭇 달랐다. 훨씬 성숙해졌고, 어딘가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이제는 원피스를 입어도 어른 옷을 훔쳐 입은 아이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곁에 고요히 서 있는 민재 역시, 늘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치던 그 가난한 장학생이 아니었다. 내 시선은 그의 가슴팍에 달린 샤넬 브로치에 멎었다. 기억이 났다. 저것과 비슷한 디자인의 브로치. 내 열여덟 살 생일에 아버지가 선물해주셨던 것과 똑같았다. 민재가 처음 과 대표로 단상에 올라 연설하게 되었을 때, 내가 내 브로치를 빌려줄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수줍게 웃으며, 두 보조개에 당혹감을 가득 담아 말했었다. “준우야, 이건 너무 비싸. 내 몇 년 치 생활비나 다름없는 걸 달고 나갈 순 없어.” 그런 그가 지금은 수천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명품 가방을 들고, 우아한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민재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입술을 달싹이며 변명하려 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선수를 쳤다. “우리 민재, 드디어 원하던 삶을 살게 됐구나. 축하해.” “그만해!” 설아의 고함이 내 추억을 난폭하게 찢어놓았다. 그녀의 고운 눈썹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서준우, 대체 언제까지 미친 척 연기할 거야? 이러면 내가 다시 널 좋아해 줄 줄 알아?” “꿈 깨.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나는 황당한 눈으로 설아를 바라보았다. “네가 나를 왜 좋아해? 이미 민재랑 사귀고 있잖아.” 민재가 드디어 기회를 잡은 듯 입을 열었다. 웬일인지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준우야, 내 말 좀 들어봐. 설아랑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우린…… 우린 아무 일도……”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의사가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서준우 환자분, 지금 몸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나는 베개에 머리카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그런데…… 다들 왜 저보고 서른이라고 하는 거죠? 올해 2018년 아닌가요?” “의사 선생님, 환자한테 이런 장난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의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결국 설아와 민재는 병실 밖으로 쫓겨나듯 나갔다. 그 뒤로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내 곁을 오갔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쯤,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환자분은 기억상실증입니다.” “2018년 산에서 추락했던 사고부터, 한 달 전 계단에서 구르기 전까지의 기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의사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정말 서른인 거야? 02. 기억의 파편은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신체 기능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며칠 더 입원해 있다가 퇴원 수속을 밟았다. 퇴원하는 날, 나를 데리러 온 건 설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최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차가웠다. 사실 설아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우리 삶에 민재가 끼어들기 전까지 나는 우리가 당연히 연인이 될 거라 믿었었다. 설아가 내 짐 가방을 트렁크에 거칠게 던져넣고는, 마지못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다치지 않은 쪽 손을 들어 항복하듯 흔들었다. “제발 봐줘. 널 운전기사 취급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남자친구 있는 여자 조수석에 타는 건 좀 그렇잖아.” 설아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서준우! 적당히 좀 해!” 그녀가 왜 또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그녀를 비켜 지나가 뒷좌석 문을 열고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다. 설아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차 문이 부서져라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가는 내내 차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질주했다. 마치 나를 단숨에 천국으로 보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창밖의 풍경은 낯설기만 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녔던 그 남부의 도시가 아니었다. 대학 시절의 그곳은 아기자기한 다리와 강물이 흐르는 다정한 풍경이었는데, 여기는 나와 설아의 고향이었다. 빽빽한 빌딩 숲 사이로 어린 시절 우리의 비밀 기지였던 낡은 공사 건물이 보였다. 이제는 완공되어 도시 한복판에 차갑게 우뚝 솟아 있었다. 아마 그 건물 안에는 우리가 나누었던 철부지 같은 말들이 박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함께 대학에 가자던 약속. 어른이 되면 같이 고양이를 키우자던 꿈. 그리고 설아가 얼굴을 붉히며 나에게 했던 말. “서준우, 나 나중에 꼭 너한테 시집갈 거야.” 차가 급정거했다. 격렬한 진동이 나를 아련하고 빛바랜 추억 속에서 낚아챘다. “내려.” 설아가 차 문을 열었다. 그녀의 실루엣이 내 위로 옅은 회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집에 들어가면 그 미친 척하는 연극 당장 집어치워. 내가 그 멍청한 의사들처럼 속을 줄 알아?” 그녀가 갑자기 내 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윤호 놀라게 하기만 해봐. 그땐 정말 가만 안 둬.” 갑작스러운 통증 속에서 나는 왜인지 코끝이 찡해졌다. 굵은 눈물 한 방울이 예고도 없이 설아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설아는 마치 뜨거운 불꽃에 데인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기억 속과는 너무나 다른 설아, 그리고 이 낯선 세상이 나를 덮쳐와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한 걸음씩 겨우 발을 떼며 그 화려한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집안으로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시야는 이미 눈물로 번져 기괴한 빛의 잔상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그 흐릿한 색채 속에서도 나를 향해 달려오는 작은 아이는 선명하게 보였다. 설아를 쏙 빼닮은 눈을 가진 아이. 나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굽혀 아이를 안아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 손을 거칠게 쳐내고는 설아의 품으로 직진했다. “엄마! 왜 이 아저씨를 또 데려왔어!” 나는 멍하니 굳어버렸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윤호야!” 민재가 아이의 뒤를 쫓아 급히 달려 나왔다. “말 버릇이 그게 뭐야!” 나는 민재를 향해 억지로 찌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재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역시 아닌 것 같아. 그냥 나가서 방 하나 구할게.” “너희 세 가족 오붓한 시간 방해하고 싶지 않아.” 03. 설아가 차갑게 비웃었다. “서준우, 네 방으로 꺼져.” “네 연극이 언제까지 가나 내가 똑똑히 지켜볼 테니까.” “기억상실증 코스프레가 그렇게 좋으면 마음껏 해봐. 그러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나면, 그때 나가겠다는 말을 하든가!” 말을 마친 그녀는 ‘윤호’라고 불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곁을 지날 때, 그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때 가서도 과연 제 발로 나가고 싶을지 궁금하네.” 텅 빈 거실에 나 혼자 남겨졌다. 민재는 내가 “세 가족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안쪽 방에서 설아와 아이가 민재를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게 차라리 편했다. 나는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장식장 위에는 세 사람의 단란한 사진이 놓여 있었다. 유원지인 듯, 거대한 불꽃놀이를 배경으로 설아는 민재의 품에 기대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윤호는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위를 올려다보며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재의 트로피, 커플 컵, 그리고 윤호가 쓴 ‘우리 아빠’라는 제목의 일기도 보였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우리 아빠 이름은 강민재다. 멋있고 자상한 남자다.’ 하나하나 훑어 내려갈수록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선명해졌다. 마지막 사진, 설아와 민재가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는 사진을 보았을 때는 허리를 제대로 펴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장을 봐온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창백한 내 얼굴을 본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 식재료를 내팽개치고 나를 부축했다. “서 선생님! 퇴원하셨군요!” “아이고, 식은땀 좀 봐. 일단 소파에 좀 앉으세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주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혹시 제 방이 어딘지 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디서 자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의아해하는 아주머니의 시선에 나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의사 선생님이 기억상실이래요. 지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아주머니는 나를 부축해 가장 구석진 방 앞으로 데려갔다. 문을 열자 눅눅한 습기와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난처해 보였다. 이 방이 환자가 머물기에 너무나 열악하다는 걸 본인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문을 닫으며 작게 한마디를 남겼다. “잊으신 게 차라리 다행일지도 몰라요.” 나는 삐걱거리는 좁은 나무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나를 ‘서 선생님’이라 불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집의 주인은 민재가 아니었나?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방을 둘러보던 중, 책상 귀퉁이에 버려진 만년필 하나를 발견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내가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던 물건. 이게 여기 있다는 건, 이 방이 내가 쓰던 방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왜 남의 집 식모방 같은 곳에 살고 있었던 걸까? 나에게는 내 집이 없는 걸까? 지독한 두통을 참고 책상 서랍을 뒤졌다. 그곳에서 내 일기장을 찾았다. 그리고 반지 하나를 발견했다. 설아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다음 순간, 일기장 첫 페이지에 정갈하게 끼워져 있는 종이 한 장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혼 합의서. 갑의 이름에는 한설아. 그리고 을의 이름 뒤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04. 나는 멍하니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충격이 해일처럼 밀려와 머릿속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새겼다. ‘혼인 중 출생한 자 서윤호의 양육권은 한설아에게 귀속된다.’ ‘두 사람은 성격 차이 및 감정의 회복 불능으로 인해 이혼을 합의한다.’ 하단에는 설아의 서명이 이미 휘갈겨져 있었다. 내 서명란만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을 넘겼다. 오랫동안 써 내려온 듯, 뒷부분의 여백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채워진 페이지들 곳곳에는 눈물 자국이 얼룩져 글자가 번져 있었다. 반 권 남짓한 분량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 지난 세월의 모든 슬픔이 농축되어 있는 듯했다. 그날, 그 산사태 속에서 나를 구해준 뒤 설아가 고백했던 환희의 순간. 청혼을 받았을 때의 떨림. 결혼식 날, 내 들러리로 서서 누구보다 펑펑 울던 민재의 모습. 그 뒤로는, 외도의 징조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설아의 외박이 잦아지고, 그녀의 옷깃에서 낯선 향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민재의 SNS에는 은근하게 그녀와의 흔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혼을 고민했을 무렵,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입덧이 심해 잠 못 이루던 그녀의 밤들을 지키며, 나는 어머니의 만년필로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임신은 힘든 일이니까,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마침내 윤호가 태어났다.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설아에게 제발 떠나지 말라고, 우리의 어린 시절 정을 봐서라도 마음을 돌려달라고 애원하던 내 모습이 글자 너머로 보였다. 눈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종이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스물두 살의 기억밖에 없는 나로서는, 몇 년 뒤의 내가 단 한 여자를 위해 이토록 처절하게 망가졌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던 그날, 사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었다. 설아와 이혼하기로. 하지만 그 결심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일시 정지된 채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문틈으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스며들었다. 일기장을 덮고 천장의 흐릿한 전구를 바라보며, 나는 내 가슴을 조용히 지긋이 눌렀다. “다행이야. 이제 난 다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던 스물둘의 서준우니까.” 나는 이 집에 머물기로 했다.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나에게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고, 또 하나는 이 이혼 합의서에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유책 배우자인 한 설아가 빈손으로 나가는 건 당연한 결과다. 증거를 수집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이 집에서 침묵하는 그림자처럼 살았다. 매일 요리를 하러 오는 장 아주머니만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지만, 그녀 역시 설아와 민재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피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온 뒤, 그들과 첫 번째로 격렬하게 충돌한 건 팔의 깁스를 풀러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은 마침 윤호의 초등학교 학부모 참관 수업 날이기도 했다. 평소 나를 벌레 보듯 하던 그 꼬맹이가 웬일인지 전날 밤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내일 학교에 나 데려다줘.” 아이는 설아나 민재에게 부리던 애교는 온데간데없이 딱딱한 말투로 명령했다. “안 가.” 변호사를 통해 요청한 설아의 은행 거래 내역을 훑어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너 강민재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며? 그 사람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악을 쓰며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 애들이 다 민재 아빠가 불륜남이래!” “나보고 상간남 아들이래! 이제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준단 말이야!” “다 너 때문이야!” 아이가 갑자기 내 방으로 돌진하더니 다친 팔을 세게 들이받았다. “네가 민재 아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욕하는 거 아냐!” 나는 밀려오는 통증에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나는 손을 들어 아이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