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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알레르기만 잊은 당신에게
결혼 4주년이 되던 어느 날, 자혁은 망고 쉬림프 볼 한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렸다. 나는 그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가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
Chương (1)
第1章
결혼 4주년이 되던 어느 날, 자혁은 망고 쉬림프 볼 한 접시를 식탁 위에 올렸다.
나는 그 접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가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나직이 상기시켜 주었다.
순간 그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는 오히려 나에게 되물었다. 망고 알레르기 아니었냐고.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망고 알레르기였던 적이 없다는 걸.
냉장고 문 오른쪽 상단에는 그가 4년 전 직접 적어 붙여둔 포스트잇이 있었다. 거기엔 나의 알레르기 유발 항원이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새우, 페니실린, 버드나무 꽃가루.'
그 포스트잇은 4년째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종이 모서리는 이미 돌둘 말려 올라갔고, 그는 하루에 최소 다섯 번은 냉장고 문을 연다. 고개만 조금 숙여도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망고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접시에서 새우를 골라내고 남은 망고를 먹었다. 망고는 지독하게 달았다.
그는 그제야 안도하는 눈치였다. 이 일이 이렇게 대충 넘어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밤늦게 주방을 정리하며, 나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그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종이가 붙어 있던 자리에는 깨끗하고 하얀 자국이 남았다.
나는 종이를 예쁘게 접어, 그가 매일 아침 챙겨 나가는 차 키 밑에 눌러 두었다.
내일 아침, 그가 키를 집어 들 때 아마 이 종이를 보게 될 것이다.
만약 그가 종이를 보고 왜 떼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직 그 위에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기억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차 키만 들고 나가버린다면, 그때는 나도 떠나야 할 때다.
1
"여보, 나 다녀올게."
오전 7시 28분. 여느 아침과 다름없었다. 그는 안방에서 나왔고, 머리카락은 아직 다 마르지 않아 살짝 젖어 있었다.
그는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구두를 갈아 신었다.
현관 선반 위, 차 키가 그 접힌 포스트잇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주방 문틀에 기대어 그를 지켜보았다.
그의 손이 키를 향해 뻗었고, 손가락 끝이 종이 모서리에 닿았다.
약 0.3초 정도 멈칫했을까.
이내 그는 손가락을 오므려 키를 움켜쥐었다. 키 밑에 있던 종이는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현관 타일 위를 굴렀다.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왼발로 바닥을 딛고 일어서며, 구두 밑창으로 그 종이를 짓밟았다. 회색 먼지 자국이 종이 위에 선명하게 남았다.
문이 닫혔다.
복도 저편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띵' 소리가 들렸고, 그 후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현관으로 걸어가 몸을 숙여 그 종이를 주웠다.
회색 구두 자국은 '윤서아 알레르기'라는 다섯 글자 위에 가로질러 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내 이름을 정면으로 덮고 있었다.
그걸 10초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접힌 부분은 이미 닳아서 너덜너덜했다. 나는 그것을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이제, 갈 시간이다.
짐을 싸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4년의 결혼 생활 동안, 온전히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물건은 우스울 정도로 적었다. 몇 벌의 계절 옷, 다 쓰지 못한 섀도 팔레트 하나, 여권, 주민등록증.
서재 금고 안에는 챙겨야 할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자혁이 중증 우울증을 앓던 해부터 내가 기록해온 '구자혁 관찰기록'.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스레 그려온 그림들과 일기들이었다.
그 안에는 나의 모든 원화 초고가 끼워져 있었다.
비밀번호는 내 생일이다. 금고를 열어 그것을 꺼낸 뒤 캐리어 안쪽 주머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퍼를 닫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자혁이 아니었다.
그의 비서인 주 실장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인스타그램 스토리 캡처본 한 장을 보내주었다.
'친한 친구' 공개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나만 쏙 빠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노란 망고 스무디 한 잔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배경으로는 짙은 회색 정장 소매 끝자락이 살짝 보였다.
[작은 기호까지 기억해 주는 다정함... 너무 좋아!]
게시자는 강하나. 인턴사원이다.
사진 오른쪽 하단에는 자혁의 회사 층수가 위치로 찍혀 있었다.
주 실장이 짧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사모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 요즘 좀 선을 넘는 것 같아서요.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보냅니다.]
나는 캡처본을 저장했다.
카카오톡을 빠져나와 비즈니스 호텔을 예약했다. 택시를 부르고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비쳤다. 울지 않았다. 눈가가 붉지도 않았다.
다만 입술이 너무 메말라 껍질이 일어나 있었다. 언제부터 물을 안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호텔 프런트 직원이 웃으며 물었다. "몇 박 하실 예정인가요?"
"확실하지 않네요."
카드 키를 꽂자 커튼이 자동으로 열렸다. 23층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허공처럼 공허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오후 2시 17분. 자혁이었다.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 2시 19분.
세 번째, 2시 21분.
네 번째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수락 버튼을 눌렀다.
"너 오늘 또 왜 이래?" 그의 목소리 너머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다른 일을 하며 전화를 받는 중이리라. "집은 엉망으로 해놓고 어디 간 거야?"
"포스트잇, 내가 뗐어." 내가 말했다. "당신 못 봤지."
"무슨 포스트잇?"
2초간의 침묵.
그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했다.
"냉장고에 붙어 있던 거."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4년 동안 붙어 있던 그 종이. 당신 차 키 밑에 뒀는데, 당신이 밟고 지나갔어."
저쪽의 키보드 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짜증이 섞인 웃음이었다. "겨우 그 새우 한 접시 때문에 그래? 서아야, 너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
"새우 때문 아니야."
"그럼 뭔데?"
"당신이 직접 생각해 봐."
"나 너랑 수수께끼 놀이 할 시간 없어."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집에 가 있어. 작작 하고."
나는 담담히 말했다. "구자혁, 당신은 내 알레르기가 뭔지도 기억 못 해. 우리 사이에는 냉각기가 좀 필요한 것 같아."
수화기 너머로 그가 비웃듯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냉각기? 얼마나 그러고 있을 건데? 내일 회사 분기 보고회 있고, 모레는 거래처 만찬 있어. 꼭 이럴 때 초를 쳐야겠어?"
"바쁘면 일 봐."
전화가 끊겼다.
창밖의 도시에는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나는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천장에 박힌 화재 감지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깜빡이는 빨간 불빛이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눈동자 같았다.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진 건 밤 11시 3분이 되어서였다.
자혁의 카톡이었다.
[윤서아 너 도대체 어디야. 돌아와서 제대로 말해.]
답장하지 않았다.
두 번째 메시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40분 뒤에 온 세 번째 메시지: [그래, 네 마음대로 해봐 어디.]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화면이 바닥으로 향하게 두었다.
망고 스무디 캡처본이 머릿속에서 잔상처럼 떠올랐다. '작은 기호까지 기억해 주는 다정함.'
그래.
참 좋겠네.
2
"사모님?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다음 날 점심, 호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자혁의 비서인 주 실장이었다. 그녀는 짙은 갈색 종이 가방을 든 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복도에 서 있었다.
"대표님이 보내셨어요. 이거 드시고 화 푸시라고..."
종이 가방 안에는 우유 빛깔 상자에 금박 로고가 박힌 케이크 상자가 들어 있었다.
내가 잘 아는 곳이었다. 한남동에서 줄을 서도 30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유명 디저트 숍. 내가 한 번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나중에'라고 대답했었다.
"그 사람은요?"
"회사에 계세요." 주 실장이 말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오후 회의 끝나면 직접 모시러 오겠다고 하셨어요."
나는 케이크 상자를 받아 들었다.
"고생하셨어요, 주 실장님."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사모님... 몸 잘 챙기세요."
문이 닫힌 뒤 나는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올리고 열었다.
3단 무스 케이크 위에는 정교하게 썰린 망고 조각들이 가득 덮여 있었다.
망고.
작은 포크로 무스 윗부분을 걷어내자, 안쪽 필링도 망고였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재미있어서 웃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새우를 못 먹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새우 알레르기인지 망고 알레르기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과를 하겠다며 사 온 케이크가 하필이면 망고 맛이라니.
구자혁의 머릿속에 있는 '윤서아 취향 리스트' 중에 제대로 된 게 하나라도 있긴 할까?
오후 3시 반, 그가 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팔에는 정장 재킷이 걸쳐져 있었고, 셔츠 소매는 두 번 걷어 올린 상태였다. 급하게 달려온 듯한 모습이었지만,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는 습관적인 몸짓—그는 시간을 체크하고 있었다.
"케이크 먹었어?" 그는 들어오자마자 테이블부터 확인했다.
열려 있는 상자 안의 케이크는 거의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한 입 먹었어."
"어때? 거기 줄 엄청 길더라."
"당신이 섰어?"
그는 잠시 멈칫했다. "인턴 시켜서 받아오게 했어. 주문은 내가 직접 했고."
인턴.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자혁아." 나는 창가 의자에 앉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케이크, 망고야."
"어."
"나 망고 안 좋아해."
그의 표정이 찰나의 순간 일그러졌다가 곧 펴졌다. "너... 망고 알레르기 아니라고 했잖아."
"알레르기가 없는 거랑 좋아하는 건 다른 문제야. 당신이랑 결혼하고 4년 동안 우리 집 냉장고에 망고가 들어온 적이 없었어. 이거 사면서 도대체 누구 입맛을 생각한 거야?"
정적이 흘렀다.
그는 재킷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 두 손으로 테이블 끝을 짚었다. 고개를 숙인 채 나를 보지 않았다.
"너 꼭 일을 그런 쪽으로 몰고 가야겠어?"
"어느 쪽?"
"알잖아."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강하나는 그냥 이제 막 졸업한 애야. 회사 인턴으로 들어왔으니까 내가 좀 챙겨준 것뿐이라고—"
"그 애가 당신 때문에 '친한 친구' 스토리를 올렸던데."
그의 입이 다물어졌다.
"'작은 기호까지 기억해 주는 다정함'— 당신이 그 애한테 따로 배달 시켜준 적 있지? 망고는 빼달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하면서."
"그건 걔가 첫 출근 날에 동료들이 시켜준 망고 음료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이 퉁퉁 부어올랐으니까! 당연히 기억해야지, 상사로서 기본적인 매너—"
"그럼 남편으로서의 기본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그는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는 서 있고, 나는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폭발했다.
"윤서아 너 진짜 적당히 좀 해." 그가 의자를 거칠게 끌어당겨 앉았다. "어린애가 망고 알레르기 좀 있다는데, 상사가 부하 직원 사정 아는 게 바람피우는 거야? 너 요즘 전업주부로 너무 오래 지내더니 사회랑 격리돼서 의부증이라도 생긴 거야?"
전업주부. 격리. 의부증.
식상한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4년 전, 그가 사업에 실패하고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는 먹지도 씻지도 않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나는 다니던 화실의 원화가 일을 그만두고 24시간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새벽 세 시에 악몽을 꾸며 죽고 싶다고 울부짖는 그를 위해 집 안의 모든 날카로운 물건을 치웠다. 그리고 그 '관찰기록'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매일매일 상태를 기록하고, 그가 밥 먹는 모습, 우울증을 앓고 처음으로 웃었던 그날 오후를 그렸다.
그 기록들이 그를 가장 어두웠던 반년의 시간 속에서 버티게 했다.
그런데 이제 와 그는 나더러 사회와 격리되었다고 말한다.
"구자혁, 당신은 기억력만 나빠진 게 아니라 양심도 나빠졌어."
그가 입을 열려 했으나 내가 가로막았다.
"케이크 가져가." 나는 일어나 캐리어를 잡았다. "나 혜리네 집으로 갈 거야."
"너—"
"따라오지 마."
나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 로비를 빠져나왔다. 춥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닿는 바람이 거칠게 느껴졌다.
체크아웃을 할 때 프런트 직원이 물었다. "택시 불러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길가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자혁의 메시지였다. [그래, 친구네 가서 며칠 지내면서 머리 좀 식혀.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마치 외출 허가라도 내주는 듯한 말투였다.
답장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건넜다.
3
"사모님? 대표님이 꼭 참석해달라고 하셔서요."
일주일 뒤. 혜리네 집 테라스에서 이불을 말리고 있을 때 주 실장에게 전화가 왔다.
자혁의 회사 설립 4주년 기념 파티였다.
"그 사람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요?"
주 실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게... '윤서아가 지난 4년 동안 고생한 건 다들 아니까 꼭 참석해야 한다, 가장 좋은 자리에 배치해라'라고 하셨습니다."
거실에 있던 혜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모양으로 '재수 없어'라고 속삭였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5초간 침묵했다.
"몇 시죠? 장소가 어디예요?"
"토요일 저녁 7시, 서초동 메리골드 호텔 18층 연회장입니다. 드레스는 제가 보내드릴까요 아니면—"
"아뇨, 제 거 입고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혜리가 달려들었다. "너 진짜 가려고? 미쳤어?"
"가야지."
"윤서아 정신 차려. 이건 대놓고 너한테 항복하고 들어오라는 판 깔아주는 거잖아—"
"항복하러 가는 거 아니야." 나는 이불을 털었다. 햇빛 속으로 하얀 먼지들이 흩날렸다. "내 자리가 지금 누구한테 넘어가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토요일 저녁 6시 55분, 나는 도착했다.
연회장 입구에서 안내 데스크 직원 두 명이 명단을 확인하다가 나를 보고 멈칫했다. 한참을 뒤지더니 이름을 찾아냈다. "윤서아 님... 자리는 헤드 테이블 A구역, 3번입니다."
3번 자리.
자혁이 1번이었다.
나는 연회장의 불투명 유리를 밀고 들어갔다.
짙은 붉은색 식탁보가 깔린 원형 테이블 중앙에는 화려한 꽃장식이 세워져 있었다. 자혁은 상석에 앉아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우윳빛 실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깔끔한 재단에 쇄골 라인이 드러나는 드레스, 깃에는 작은 진주 브로치가 꽂혀 있었다.
나는 내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같은 브랜드, 같은 라인. 색상만 다른 옷이었다. 그녀가 입은 건 올해 새로 나온 봄 한정판이었다.
강하나.
스물세 살, 둥근 얼굴에 눈썹을 살짝 덮은 앞머리. 이제 갓 졸업한 대학생처럼 순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녀는 2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오른쪽, 즉 자혁의 바로 옆자리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자혁의 접시에 담긴 양파를 골라내 접시 가장자리에 쌓아주고 있었다.
지난 4년 동안 내가 했던 일이다. 자혁은 생양파의 매운맛을 싫어해서 먹지 않는다.
그녀는 나보다 더 능숙하게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어, 사모님 오셨네요!"
강하나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카펫 위를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서 앉으세요. 제가 방금 대표님 축사 원고 정리해 드리느라 잠시 자리를 헷갈렸네요. 죄송해요."
목소리는 경쾌했고, 웃음은 눈가까지 번져 있었다.
자혁도 슬쩍 일어나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왔어? 저쪽 건너편에 앉아. 거기가 시야가 좋아."
건너편.
원래 내 자리는 그의 옆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나더러 맞은편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강하나는 아직 선 채로 내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걸어가서 3번 자리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다들 잔 들어주세요."
건배 제의가 시작되었다. 한 바퀴가 돌고 나니 자혁은 꽤 마셨는지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세 번째 순서로 기술부 팀장이 다가와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권했다.
자혁이 잔을 받기도 전에, 강하나가 먼저 일어났다.
"이 잔은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잔을 가로채며 팀장에게 미소지었다. "사모님은 평소에 안 오셔서 잘 모르시겠지만, 대표님이 요즘 위가 안 좋으셔서 찬 건 조심하셔야 하거든요."
팀장이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동료들이 분위기를 띄우려 한마디씩 거들었다. "강 비서님 정말 세심하시네."
위가 안 좋다고.
구자혁의 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는 지난주부터 항생제를 복용 중이었다. 오른쪽 사랑니가 염증이 생겨 3일 치 약을 처방받았다.
항생제를 먹을 때는 술을 입에 대선 안 된다.
그녀는 그걸 몰랐다. 그저 그가 최근 술을 잘 안 마시는 걸 보고 '위가 안 좋다'는 핑계를 지어내며 다정함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어갔다.
강하나의 손에서 그 와인잔을 뺏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모님—"
나는 그 와인을 그대로 테이블 위에 쏟아버렸다. 차가운 화이트 와인이 튀면서 식탁보 절반을 적셨다.
"위가 안 좋은 게 아니라 항생제 먹는 중이야."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항생제에 술 섞어 마시면 사람 잡는 거 몰라? 그런 것도 모르면서 어디서 함부로 술을 대신 마시겠다고 나서?"
테이블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강하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모님, 전 그냥 대표님 걱정돼서 그런 거지, 약 드시는 줄은 몰랐어요..."
"아는 거 많잖아." 내가 말을 잘랐다. "양파 못 먹는 것도 알고, 축사 원고도 정리해 주고, 입맛까지 다 꿰고 있으면서. 당신 스물세 살이야, 아니면 스물세 개월이야? 어떤 술을 마시면 안 되는지도 구분 못 하면서 그렇게 급하게 대역 마누라 노릇 하고 싶었어?"
자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윤서아 너 진짜 미쳤어? 적당히 좀 하라고!"
그는 테이블을 돌아 단숨에 달려와 강하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앞을 '보호하듯' 막아섰다.
"사람이 호의로 도와주는 건데, 꼭 그렇게 몰상식하게 굴어야겠어?"
"호의?"
"너 진짜—"
나는 왼쪽 약지에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를 뺐다.
아주 가벼운 플래티넘 링 안쪽에는 우리 결혼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그가 앉아 있던 자리 앞, 그녀가 정성스레 골라둔 양파 무더기 위에 내려놓았다.
"기념 파티, 둘이서 실컷 즐겨." 내가 말했다. "구자혁, 미리 축하할게. 당신의 화려한 솔로 복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는 순간, 뒤편에서 강하나가 울먹이며 "대표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4
"인사드려요, 강하나라고 합니다."
그 목소리가 들린 건 사흘 뒤였다.
서재 금고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물건, '구자혁 관찰기록'을 챙기러 아파트에 들렀을 때였다.
문을 열자마자 나는 굳어버렸다.
금고가 열려 있었다. 텅 빈 채로.
비밀번호는 내 생일이었으니, 자혁이 알려줬다면 누구든 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곧바로 자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기록물, 당신이 가져갔어?"
"아, 그거." 그의 목소리는 마치 사무용품 하나 빌려준 것처럼 태연했다. "강하나가 이번에 우울증 관련 삽화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영감이 안 떠오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참고하라고 며칠 빌려줬어. 네 원화 초고도 거기 있었지? 다 쓰고 돌려준대."
휴대폰을 쥔 손이 떨렸다.
"그건 내 개인 소유물이야."
"결혼했으면 우리 둘 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팔아치운 것도 아니고 빌려준 건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휴대폰 너머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여자의 웃음소리였다.
"그 애 어디 살아?"
"너 찾아갈 생각 마—"
"주소 불러."
그가 짜증을 냈다.
"성수동 청록아파트 2103호야. 가서 사고 치지 마라."
전화를 끊고 곧장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공기 중에 보랏빛 라벤더 향수 냄새가 감돌았다.
강하나는 좁은 오피스텔 책상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 관찰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더 이상 기록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페이지를 하나하나 뜯어내 커터칼로 그림의 테두리를 따라 잘라내고 있었다. 내가 그린 삽화와 일기 텍스트 부분을 분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잘린 그림들은 스캐너 옆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7~8장 정도는 이미 스캔을 마친 상태였다.
책상 위에는 종이 부스러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잘려 나간 일기 구절들. '오늘은 죽을 반 그릇이나 먹었다', '처음으로 웃었다', '당신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같은 간절했던 필적들이 불규칙한 조각들로 찢겨 있었다.
발밑에서 무언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떨어져 이미 여러 번 짓밟힌 그림 조각이었다. 우리 집 늙은 고양이를 그렸던 작은 크로키 조각.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예의 바른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아, 사모님 오셨네요. 자료 정리 중이었어요. 대표님이 참고해도 된다고 하셔서... 정말 잘 그리셨더라고요. 대표님이 왜 소중히 간직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이건 내 개인 수첩이야." 나는 다가갔다. "내놔."
"하지만 대표님이 허락하신 건데—"
나는 책상 위에 아직 뜯기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다. 절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녀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사모님, 급하게 굴지 마세요. 스캔만 다 뜨고 돌려드릴게요."
"손 떼."
"이렇게 억지 부리시면 곤란해요. 이건 대표님이 주신—"
나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녀는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일어서서 한 손으로는 수첩을 꽉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무언가 번뜩였다.
커터칼이 아니었다. 문구용 가위였다.
일어나면서 무의식중에 집어 들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도 놓지 않았고, 그녀도 놓지 않았다.
실랑이 끝에 그녀의 손이 미끄러졌고, 가위 끝이 내 오른손 등을 긁고 지나갔다.
살짝 스친 정도가 아니었다.
살점이 훅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감각은 의외로 느리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차가웠고, 그다음에는 통증이 밀려왔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속도는 통증보다 빨랐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부터 새끼손가락 뿌리까지 깊게 패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하얀 속살이 보일 정도로 깊었다. 핏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 수첩의 한 페이지를 적셨다. 하필이면 자혁이 주방에서 요리하던 모습을 그린 페이지였다.
"악!" 강하나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가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당신이 흘린 피예요! 내 탓 아니야, 당신이 억지로 뺏으려고 해서—"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이 구부려지지 않았다.
나는 왼손으로 피 묻은 수첩 절반과 책상 위에 흩어진 그림 몇 장을 가슴에 안았다.
문가로 가려는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혁이 도착했다.
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엉망이 된 현장—흩어진 종이 조각, 쓰러진 의자, 구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강하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걸어왔다. 나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강하나를 보호하듯 제 등 뒤로 숨겼다. 그리고 나를 홱 돌아보았다. 눈에 핏발이 선 채로, 마치 화난 짐승처럼 소리쳤다.
"윤서아 너 미쳤어?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
"남의 집?"
"하나가 겁먹어서 울고 있잖아. 도대체 너란 여자는—"
"구자혁."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피가 손목을 타고 내려가 짙은 색 코트 소매를 적시고 있었다. "똑바로 봐."
그는 1초 정도 멍해졌다. 시선이 내 손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강하나의 붉어진 눈시울을 쳐다보았다.
"...사람을 저렇게 겁을 줬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손 좀 베인 거 가지고 유세 떨지 말고 가서 병원이나 가. 이렇게 소란 피울 일이야?"
그냥 베인 게 아니었다.
칼날이 뼈 위를 긁고 지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마비감이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것도 오른손잡이.
어릴 적 미술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너의 오른손은 네 밥줄이고, 눈만큼 소중한 거라고.
"경찰 불렀어." 내가 말했다. "오고 있을 거야."
그의 안색이 변했다.
"뭐라고?"
"10분 전에 신고했어. 상해죄, 주거침입 및 절도 미수. 내 초고들 저 컴퓨터에 다 스캔 되어 있지? 증거 확실해."
그의 등 뒤에서 강하나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대표님, 저 훔친 거 아니에요! 대표님이 가져가라고 하셨잖아요! 참고하라고 빌려준 거라고—"
자혁의 입술이 일직선으로 굳었다.
복도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입니다. 신고받고 왔습니다."
나는 왼손으로 피 묻은 수첩을 품에 안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를 스쳐 지나갈 때, 그는 그제야 내 오른손에서 떨어지는 피를 응시했다.
피가 그의 번쩍이는 구두 위로 떨어졌다.
어제 아침, 현관에서 내 마음을 짓밟았던 그 구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