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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전남편이 개처럼 빌기 시작했다
나는 이 소위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로맨스 소설 속에서 5년 동안 여주인공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룸에서 남편 한태준과 그의 여비서를 ...
Chương (1)
第1章
나는 이 소위 ‘온실 속의 화초’ 같은 로맨스 소설 속에서 5년 동안 여주인공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룸에서 남편 한태준과 그의 여비서를 맞닥뜨렸다.
잔뜩 헝클어진 모습의 여비서는 두꺼운 뿔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사색이 되어 내게 사과를 늘어놓았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게 태준에게 이혼을 선언했다.
태준은 비서를 가소롭다는 듯 훑어보더니, 내 말이 농담이라도 되는 양 코웃음을 쳤다.
그는 여비서의 월급으로는 내 머리 손질 한 번도 못 한다며, 내 가방 하나가 평범한 사람들의 반년치 생활비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내가 자신을 떠나서 어떻게 이런 안락한 삶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오만한 질문과 함께.
그는 온 서울 시내가 나를 태준의 보살핌 없이는 살 수 없는 ‘능소화’ 같은 존재로 알고 있다며 자조 섞인 비아냥을 내뱉었다.
자신 말고는 누구도 나를 개처럼 떠받들며 비위를 맞춰주지 않을 거라면서.
내가 침묵에 잠긴 사이, 한동안 잠잠했던 시스템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시스템은 태준을 향해 혀를 찼다. 그의 개가 되고 싶어 줄을 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저 남자는 정말 모르는 거냐고.
나는 나직이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면 5년이라는 안온한 세월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그는 잊고 있었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자, 동시에 ‘기다려주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1
나는 말없이 태준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출근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우유를 데워주고, 칫솔에 치약까지 짜두었던 남자였다.
단 몇 시간 만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서울 사교계에서 윤서연은 한태준의 심장이고, 손안의 보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사생활이 깨끗했고, 이성과 단둘이 있는 법이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여비서 강희수를 곁눈질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다.
[숙주님, 사람 외모 가지고 뭐라 하긴 좀 그렇지만… 저 남자 눈이 삐었나요? 희수 씨랑 숙주님이 같이 서 있는데,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선택이 고민될 리가 없잖아요!]
나는 시스템의 말을 무시했다.
몸에 밴 교양 덕분에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저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을 한 번 했을 뿐이다.
“이유가 뭐야?”
희수가 옆에서 메추리처럼 바들바들 떨자, 태준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나가서 기다려.”
두 사람의 거침없는 친밀함에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대외적으로 태준은 늘 냉혹하고 과묵한 경영자였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그는 무자비한 포식자였고, 한강 그룹은 물론 재계 전체가 그를 경외하고 두려워했다.
그는 오직 나에게만 모든 다정함을 허락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내가 유일한 예외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태준은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저 여자는 커피 한 잔만 사줘도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고마워해. 그런데 당신은, 내가 수천만 원짜리 보석을 사다 줘도 혹시 이미 가지고 있는 디자인은 아닌지 눈치 보게 만들지.”
“서연아, 나도 좀 지쳤어. 내가 사랑하는 건 언제나 당신뿐이야. 다만 가끔은 나도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담배를 끄고 냄새가 가시길 기다렸다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하게 내 눈가를 어루만졌다.
“울지 마. 나한테 시간을 좀 줄래? 마음 정리할 시간.”
나는 익숙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옷자락을 꽉 쥐고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삼켰다.
“참 가련하게도 말하네. 하지만 그 어떤 말로도 불륜이라는 사실은 가려지지 않아, 한태준. 결혼할 때 말했지? 난 어떤 형태의 배신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우린 끝이야.”
태준의 안색이 변했다.
“당신, 일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해? 지난 세월 동안 당신 의식주 중에 내 손 안 거친 게 하나라도 있어? 나 떠나면 당신은 한 달도 못 버텨.”
시스템이 적절한 타이밍에 목소리를 높였다.
[남주인공의 캐릭터 설정 붕괴 감지. 그에게 부여된 모든 보너스 광광을 회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숙주님과의 결속이 깊어 회수 완료까지 한 달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나는 차갑게 웃었다.
“한 달이라. 충분해.”
지금 그의 세력이 막강할지 모르나, 내 세상에서 주인공은 오직 나뿐이다.
태준은 가식적인 미소를 거두고 오만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직접 겪어봐야 알겠군. 내 보호막 없이는 바깥세상이 얼마나 거친지.”
나는 가방을 챙겨 뒤도 안 돌아보고 방을 나섰다. 마지막 한 마디만 남긴 채.
“태준아, 내가 당신이랑 결혼해서 이 모든 걸 누리는 게 아니야. 반대지. 내가 당신을 선택했기 때문에 당신이 오늘날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문밖에는 여전히 희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보더니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사모님… 제가 모든 면에서 사모님보다 부족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한 대표님이 밤샘 근무로 위경련이 왔을 때 곁에서 따뜻한 물 한 잔 챙겨준 건 저뿐이었어요… 전 그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태준이 문가에 서서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집에 24시간 대기하는 영양사가 있는데, 고작 물 한 잔에 감동을 받아? 그동안 내가 챙겨준 위장약이며 보양식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희수를 차갑게 훑었다.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한참 모자라지. 그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와 수치심조차 없군.”
“그리고,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 앞으론 윤서연 씨라고 불러.”
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을 지나쳐 걸어갔다.
머릿속에서 시스템이 한숨을 내쉬었다.
[숙주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 소설의 유일한 주인공은 숙주님이에요. 마음이 변한 한태준은 이제 남주인공 자격 상실입니다. 다음 남자는 더 고분고분한 놈으로 골라보자고요.]
나는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담담하게 읊조렸다.
“이혼 숙려 기간이 딱 한 달이지. 정말 후회하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닐 거야.”
2
한태준의 실행력은 과연 대단했다.
그날 오후, 내 명의의 카드들이 정지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은행 문자는 간결했다.
주거래 카드 분실 신고 완료, 가족 카드 한도 제로.
시스템이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세상에, 한태준 저 남자 진짜로 자기가 숙주님을 먹여 살렸다고 믿는 건가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그렇겠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남자들의 공통된 질병이니까.”
지난 20여 년 동안 내 인생은 늘 탄탄대로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고, 청담동 사교계에서 언제나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5년 전, 내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내 삶은 그 자체로 완벽했다.
잘생기고 재력 있는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이 내게 정해진 시나리오였다.
수많은 구애자 중 내가 선택한 남자가 바로 한태준이었다.
그 선택 덕분에 그는 시스템의 가호를 받아 승승장구했고, 지금의 기세등등한 한 대표가 될 수 있었다.
비록 결혼 후 태준의 카드를 쓰긴 했지만, 나 윤서연은 애초에 명문가 집안의 딸이다. 카드 몇 장 정지된다고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집에 도착하자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사모님, 오늘 저녁은 제일 좋아하시는 해신탕 준비했어요.”
식탁 위를 보니 그릇 두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태준은 아무리 바빠도 저녁 식사만큼은 반드시 나와 함께했다.
몇 년 전 태풍이 몰아쳐 온 도시가 마비되었던 날도 있었다.
그는 폭우를 뚫고 차를 몰아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의 저녁 약속은 어기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문 안으로 들어설 때 그는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품 안에서 멀쩡한 케이크 상자를 꺼내며 환하게 웃었다.
“당신이 어제 먹고 싶다고 했던 거.”
젖은 머리칼 사이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의 눈빛만은 보석처럼 빛났었다.
그런 사람이 모든 다정함을 거두고, 고작 ‘좀 지쳤다’는 말로 모든 걸 끝내려 한다.
그때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희수가 SNS에 올린 게시물이었다.
두 사람은 어느 허름한 노포 식당에 앉아 매운 마라탕 한 그릇을 나눠 먹고 있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 났다.
한태준의 위장은 예민해서 보양식 하나도 수천만 원을 들여 공수해 왔다.
식단 하나하나 내가 세심하게 체크해 비서 편에 보냈던 것들이다.
나는 휴대폰을 덮고 무심히 말했다.
“앞으로는 1인분만 준비해 주세요.”
아주머니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라탕 한 그릇에 흔들릴 남자라면, 버리는 게 답이다.
상류층 사회는 넓은 듯 좁다.
나와 태준의 일은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가 희수를 데리고 어느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앞에서는 비위를 맞췄겠지만, 내게는 뒤로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연아, 미쳤나 봐. 한태준 제정신이니? 저런 여자를 데리고 나오다니, 비웃음 사려고 작정한 거야?]
[서연아, 그 성씨 가진 놈은 진작에 버렸어야 했어. 내가 괜찮은 애들 몇 명 아는데, 오늘 술이나 한잔할까?]
나는 바 라운지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어 그 메시지들을 읽으며 웃었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자 옆에 앉은 남자를 구두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나 못 걷겠어. 저기까지 좀 업어줘.”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연, 너 취했어. 난 한태준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도현. 과거 내 남주인공 후보 중 한 명이었고, 지금은 이강 그룹의 수장이 된 남자.
나는 그의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업어줄 거야, 말 거야?”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이내 내 앞에서 천천히 등을 내주었다.
나는 창밖의 달빛을 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한태준, 당신이 없으면 내 인생이 망가질 거라 생각했니? 천만에.
머릿속에서 시스템이 킥킥대며 웃었다.
[숙주님, 만약 이도현을 새 남주로 점찍으셨다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한태준의 기운 회수는 착착 진행 중입니다. 내일, 아주 재미있는 선물을 받게 되실 거예요.]
3
나는 일주일 동안 파리로 날아가 패션쇼를 즐겼다. 한태준의 빈자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그의 근황을 중계해 줄 뿐이었다.
시스템의 정산이 시작되자마자 한강 그룹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무산되거나 경쟁사에 뺏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지만, 너무 빠르게 정점에 올랐다.
본래 전통적인 재벌가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이제 시스템의 가호가 사라진 그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쇼핑 영수증에 서명을 하며 비웃었다.
“사랑만 있으면 물만 마셔도 행복하다며. 따뜻한 물 챙겨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 돈 좀 잃는 게 무슨 대수겠어.”
나는 내 일상을 SNS에 공유했다.
5분 뒤, 패션쇼 관계자가 공손하게 다가와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이도현 회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이번 시즌 신상품은 이미 다 정리해서 숙소로 배송해 드렸습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고마워.]
답장은 즉시 돌아왔다.
[내 전용기가 파리에 있어. 언제든 편할 때 연락해. 돌아오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
잠시 멍해졌다. 태준과의 시작도 저녁 식사 한 끼였다.
그날 이후 그는 서울에 있는 한 절대 저녁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
나는 휴대폰을 덮고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귀국 후, 지인의 초대로 승마장을 찾았다.
이 클럽은 철저한 회원제였고, 회원은 가족 한 명만 동반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친오빠의 명의를 썼지만, 결혼 후에는 당연히 태준의 명의로 이용해 왔다.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내 이름이 명단에 없다고 했을 때, 나는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그곳에 희수가 서 있었다.
“윤서연 씨… 정말 죄송해요. 얼마 전에 제가 진짜 말은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했더니, 대표님이 바로 절 데려오셨거든요. 본의 아니게 자리를 뺏게 돼서 어쩌죠…”
그녀는 뿔테 안경을 벗고 수천만 원짜리 명품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겉모습은 화려해졌을지 몰라도, 몸에 밴 저렴한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함께 온 지인이 한마디 거들려는 찰나, 태준이 걸어 들어왔다.
“서연아.”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리가 여전히 잉꼬부부인 양 내 이름을 불렀다.
“파리 다녀왔다며. 예전엔 이런 신상품들 내가 미리 주문해서 집으로 다 보내줬잖아. 당신 C사 VIP인데, 이번 시즌 고뜨 쿠튀르가 빠지면 컬렉션이 미완성이지 않겠어?”
하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오만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남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만 화 풀어. 사람 보내서 옷은 다 사다 놓을게. 오늘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랑 약속이 있는데, 그분이 희수 씨 대학 선배라 같이 가야 해. 그러니까 당신은 오늘은 그만하고 집에 가서 기다려, 알았지?”
나는 한 걸음 물러나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태준, 당신 눈엔 내가 고작 옷 몇 벌에 움직이는 여자로 보여?”
지인이 휴대폰을 꺼내 들며 분개했다.
“걱정 마 서연아, 내 동생도 여기 회원이야. 내가 전화할게.”
그녀는 태준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윤서연 씨, 괜찮으시다면 제 회원권을 쓰시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태준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서진우였다. 오늘 태준이 따내려던 프로젝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나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서 대표님.”
진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 “서연 씨를 도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나는 두 사람을 무시하고 태준을 스쳐 지나갔다.
등 뒤로 지인의 고소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한 대표님은 모르셨나 봐요? 옛날에 서 대표님이 서연이한테 고백하려고 한강 전체를 빌렸던 거. 신문 1면에도 대문짝만하게 났었는데.”
4
희수는 말 위에서 중심도 못 잡고 비명을 질러대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녀가 대학 선배라는 인맥을 동원했음에도 프로젝트 협상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태준이 승마장을 떠날 때, 그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진우가 내 말의 고삐를 잡으며 담담하게 웃었다.
“세월이 흘러도 서연 씨의 기품은 여전하군요.”
나는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과거 그는 저돌적으로 내게 구애했지만, 당시 나는 그런 요란한 성격이 취향이 아니었다.
그 후 진우는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고 홀로 상경해 사업을 일궜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본 그는 훨씬 차분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서 대표님이야말로 훨씬 멋진 분이 되셨네요.”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윤서연, 그때 넌 내가 집안 배경만 믿는 한량이라며 거절했지. 이제 나도 제법 자리를 잡았어. 듣자니 한태준이랑 이혼한다며? 나한테도 기회를 좀 주지.”
“알잖아, 난 너한테라면 뭐든 다 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
나는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마침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