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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정부 대신 피아니스트를 택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꾼 다음 날, 나는 회사 전체 단톡방에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지민혁 씨, 새 열쇠가 필요하면 저한테 직접 와서 받아 가세요.” ...
Chương (1)
第1章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꾼 다음 날, 나는 회사 전체 단톡방에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지민혁 씨, 새 열쇠가 필요하면 저한테 직접 와서 받아 가세요.”
휴대폰 화면이 밝아질 때, 나는 욕조에 받아둔 36.5℃의 미지근한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인턴에게서 온 답장이 가시처럼 내 눈을 찔렀다.
“시우 선배님, 며칠 전에 한 대표님이 편하게 쓰라고 보조키 하나 주셨어요. 괜찮아요.”
편하게? 나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침대 옆 탁자 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근탕을 손끝으로 쓸었다. 머릿속에선 욕실 배수구에 엉켜 있던 짙은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자꾸만 맴돌았다. 내 부드러운 흑발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뻣뻣한 감촉.
현관 열쇠 꾸러미에서 사라진 보조키의 행방이 드디어 밝혀진 순간이었다.
어젯밤, 한연서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말했을 때 주방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끓던 기름 솥 소리는 내 의구심을 삼켜버렸었다. 그녀는 평소에 도어락 번호만 쓰는데 말이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때 그녀가 내뱉은 “잃어버렸어”라는 말은 깃털처럼 가볍기 짝이 없었다.
나는 걸쳐두었던 슈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현관 조명이 바닥에 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보조 열쇠 꾸러미에서 은색의 작은 열쇠 하나가 정말로 사라져 있었다.
…
집에 돌아온 연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시우, 미쳤어? 회사 단톡방에서 대체 무슨 소릴 한 거야? 사람들이 걔를 어떻게 보겠냐고.”
나는 들고 있던 탕 그릇을 내려놓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럼 당신은 왜 열쇠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했어?”
그녀가 멈칫했다. 한참 뒤, 한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민혁이는 내 비서잖아. 드나들기 편하라고 준 거야. 거짓말한 건 네가 괜한 오해하고 유난 떨까 봐 그랬던 거고. 꼭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야겠어?”
나는 몇 초간 침묵하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내 열쇠까지 다 그 사람 줄까?”
“하시우!”
연서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민혁이 오늘 오후에 눈시울 붉히면서 퇴근했어. 나랑 걔는 그냥 상사와 부하 직원일 뿐이야. 제발 의처증 환자처럼 구지 좀 마.”
“그럼 욕실 벽에 겹쳐져 있던 손자국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무슨 손자국?”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욕실로 향했다. 벽에 남은 그 선명한 흔적을 가리키려 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연서는 내 손을 뿌리치며 코방귀를 뀌었다.
“너랑 싸우기 싫어.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스스로 좀 돌아보고 반성해.”
그 직후, 나는 단톡방에서 강퇴당했다. 이어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경영지원팀 비서인 나의 해고 통지서였다.
회색빛의 퇴장 메시지와 해고 통지서. 뺨을 세차게 얻맞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방에서 풍겨오는 연근탕 냄새가 더 이상 향긋하지 않았다.
2,485일.
그녀가 약속했던 그 종이 한 장(혼인신고서)을 받기도 전에, 나는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는 꼴부터 보게 되었다.
문득 아버지가 투신하고 어머니가 떠났던 그해 겨울이 떠올랐다.
나를 안아주며 충혈된 눈으로 약속하던 그녀의 모습.
“시우야, 잘 들어. 온 세상이 널 버려도 너한텐 내가 있어. 나 수술 못 하게 돼도 약 영업이라도 해서 너 먹여 살릴 거야. 우리 집 만들자. 꽃 키울 수 있는 테라스가 있는 집으로. 넌 진달래 심고, 난 다육이 키우고… 애들도 많이 낳고…”
그때 내 마음은 아플 정도로 녹아내렸었다. 나를 구하려다 차 사고로 양손을 망가뜨려 메스를 잡지 못하게 된, 그러고도 내게 미래를 약속하던 연서를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남았다. 촉망받던 피아니스트에서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집사로 변해버린 채.
마사지, 요리, 스케줄 관리… 내 삶의 모든 틈새에는 한연서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여자를 위해 네 인생과 꿈을 포기하는 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니?”
그때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지금, 따뜻한 조명 아래 여전히 아름답지만 갈수록 차가워지는 연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나와 연서는 냉전에 돌입했다.
그녀는 더 이상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평소처럼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도시락을 보냈다.
그 사이 지민혁의 SNS는 더 빈번하게 업데이트되었다.
예를 들면, 연서가 자주 쓰는 휴게실 문 앞에 놓인 검은색 슬리퍼 사진. 내 사이즈도, 그녀의 스타일도 아니었다.
또 연서가 새로 바꾼 탕 그릇 사진. 그녀라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어두운 색감이었다.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한 그릇의 탕을 나눠 먹으며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지민혁은 사진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는 사랑의 탕. 오래된 것들은 결국 퇴장하기 마련이죠.]
하지만 그 탕은 내가 4시간 동안 정성껏 끓인 것이었다.
버려진 그릇은 7년 전 내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커플 식기였다.
댓글창에는 지인들이 몰려와 떠들어댔다.
“한 대표님, 갈아타신 건가요? 전 사람보다 훨씬 잘 어울리네.”
연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다.
조명은 은은했고, 온풍기는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누른 그 가벼운 ‘좋아요’ 하나 때문에.
내가 모든 걸 쏟아부은 7년은, 타인의 눈엔 ‘오래된 것’이었고 그녀의 눈엔 그저 ‘전 사람’일 뿐이었다.
띠링, 지민혁이 SNS에서 나를 태그했다.
[시우 형님 죄송해요. 저번에 실수로 옷을 버려서 잠시 형님 욕실 좀 빌려 썼어요. 사과드릴게요. 한 대표님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제 지문도 시스템에 등록해 주셨으니까, 이제 형님한테 열쇠 달라고 번거롭게 안 할게요…]
이어지는 비웃는 듯한 이모티콘.
그는 기세등등할 만했다. 겉으로는 사과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연서가 자기 편이라는 걸 만천하에 공표하고 있었다.
지인 하나가 나 대신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사과야, 아니면 영역 표시야? 한연서, 너 가만히 있을 거야?”
“가만히 있으면 어때서? 딱 봐도 곧 주인 바뀔 분위기구만.”
댓글창은 아수라장이었다.
연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주인 바뀔 분위기’라는 댓글 아래에 웃는 이모티콘 하나를 남겼다.
나는 화면을 응시했다.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앱을 닫고, 지문 인식 설정에 접속했다.
새로 등록된 내 지문을 삭제했다. 이제 그 집의 주인은 그녀와 그 녀석, 둘뿐이었다.
연서는 사람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집사 노릇에 진저리가 났다.
그날 밤, 연서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악보 한 권을 내 품에 툭 던졌다.
“저번에 주기로 했던 거야. 가져.”
그녀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는 직접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내게 등을 돌린 채, 구부정한 자세로 서툴게 건반을 하나하나 찾아 눌렀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지민혁처럼 사진을 찍어 올렸을지도 모른다. ‘나를 웃게 하려고 애쓰는 여친님의 노력!’ 같은 문구와 함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
“언제부터였어?”
피아노 소리가 멎었다.
연서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설명도 했고, 나름 사과도 했어. 하시우, 대체 얼마나 더 해야 만족할래?”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집에 슬리퍼가 하나 늘었고, 처음 보는 남자 향수가 생겼어. 신형 게임기도 있더라. 침대 옆 서랍엔 우리가 절대 안 사는 딸기 향 초박형 콘돔이 몇 박스나 들어있고. 네 옷장엔…”
“그만해!”
거실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거칠어진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연서는 몇 초간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쥐고 있던 악보가 구겨졌고, 그녀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녀는 실망과 냉소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시우, 가끔은 네 아버지의 정신병이 너한테 유전된 게 아닌가 싶어. 이제 투신이라도 해서 나 협박할 생각이야?”
“네 엄마가 바람나서 떠날 때, 네 아빠가 죽음으로 붙잡으려 했던 것처럼?”
귀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터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변명하거나 부정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내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놓을 줄은 몰랐다.
“성인이라면 모르는 척 넘어가 줄 줄도 알아야지, 그게 예의야! 내가 밖에서 뭘 하든 넌 결국 내 옆자리에 있을 사람 아니야? 난 널 위해서 양손을 버렸고 의사라는 꿈도 포기했어. 대체 뭐가 더 불만이라서 의심병 도진 사람처럼 굴어?”
“민혁이가 네 욕실 쓴 거, 그래 잘못했어. 사과도 했잖아. 그러니까 적당히 해. 애꿎은 애 괴롭히지 말고!”
말을 내뱉을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커졌다. 차가운 눈빛과 날카로운 단어들.
마치 부하 직원과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을 넘나드는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나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의 눈에 서린 확신이 너무나도 눈부셔 눈이 멀 지경이었다.
들킨 자의 죄책감이 아니었다. 내가 갈 곳이 없다는 것, 감히 그녀와 끝낼 용기가 없을 거라는 오만함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목구멍이 꽉 막혔다. 더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양손을 못 쓰게 된 것, 의사의 꿈을 포기한 것만 기억했다.
자기를 위해 양손에 물을 묻히며 매일 주방에서 헌신했던 나의 7년은 잊은 채.
그녀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마비된 듯 건반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음은 여전했지만, 예전의 그 달콤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밤 우린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새벽녘, 연서가 조용히 집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민혁의 SNS가 다시 올라왔다.
사진 다섯 장. 밤하늘에 터지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다 모아보니 이런 문장이었다.
[한연서 사랑해 지민혁]
3년 전, 나도 똑같은 이벤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연서의 회사가 막 상장했을 때였다.
그날 그녀는 내게 빌리지 열쇠와 커다란 테라스를 선물했다.
장미와 작약, 그리고 다육이들이 가득했던 그곳.
포근한 사람 냄새가 나는 작은 집 같았다.
그날 밤에도 수만 개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그녀는 웃으며 크게 외쳤다.
“시우랑 약속한 거 지켰어! 평생 시우만 사랑할 거야!”
사람은 그대로인데,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만 바뀌어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머니의 답장이었다.
화면을 끄고 캐리어를 펼쳤다.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나머지 물건들은 전부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연서가 돌아왔을 때 본 것은 거실에 놓인 캐리어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가?”
“여행 좀 다녀오려고.”
“여행?”
그녀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비웃듯 말했다.
“7년 동안 나 수발드느라 집 밖에 하루도 안 나갔던 네가? 혼자서 갈 수나 있겠어?”
“시우야, 이런 식으로 시위해서 내 사과 받아내려는 거면 소용없어.”
“난 내가 틀렸다고 생각 안 해. 민혁이도 잘못 없어. 내가 7년을 먹여 살려줬으면 너도 이제 철 좀 들어야지.”
나는 아무 말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20인치 캐리어를 다시 옷장에 집어넣었을 뿐이다.
가벼운 가방이었다. 마치 내가 7년 동안 머물렀던 이 집, 7년 동안 기대했던 우리의 결혼처럼.
꽃길인 줄 알고 걸어왔는데, 돌아보니 온통 구멍 난 상처뿐이었다.
그제야 연서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코웃음을 쳤다.
“알아들었으면 됐어.”
“이 세상에서 나 말고 누가 너한테 집을 주고 테라스를 주겠니. 복 받은 줄 알아.”
확신에 찬, 그러나 너무도 비정한 말투였다. 그녀의 몸에서 낯선 딸기 향이 섞인 체취가 풍겼다.
뒤늦은 통증이 심장을 찔렀다.
“기억해. 넌 이제 무대 위에서 빛나던 하시우가 아니야. 넌 그냥 내 집사고,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망가진 남자일 뿐이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말 잘 들어. 그럼 계속 잘해줄 테니까…”
물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충분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른다.
내가 다시 넣어둔 캐리어 안에는 내 여권과 당장 떠날 옷가지들이 들어있다는 걸.
가지 않은 건,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다.
모레 떠나는 비행기 표를 예매해뒀기 때문이다.
다음 날, 연서가 웬일로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회사 송년회야. 파트너들이 다들 너 보고 싶어 해.”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 줘. 이 기회에 정식으로 나한테 프러포즈도 하고.”
심장이 잠시 빠르게 뛰었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설렘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응했다.
기대하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이 지독한 7년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 그녀는 사람을 보내 명품 시계 하나와 검은색 맞춤 슈트를 보내왔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었고, 내 몸에 딱 맞는 사이즈였다.
가슴 한구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연회장 문이 서서히 열리고, 내가 사람들 사이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을 때.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꽃으로 장식된 높은 무대 위.
연서는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색 드레스에 사파이어 목걸이를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민혁이 반지를 들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찬란한 조명이 두 사람을 비추고, 카메라 셔터 소리와 천장을 뚫을 듯한 축하 소리가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슬퍼해야 마땅한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역시나’ 하는 체념 섞인 안도감이 들 뿐이었다.
나를 발견한 연서가 먼저 다가왔다. 목소리를 극도로 낮춘 채 말했다.
“이 프러포즈 가짜야. 민혁이 생일 소원 들어주는 퍼포먼스일 뿐이야. 마침 들러리가 한 명 부족한데, 네가 좀 서 줘. 자세한 건 집에 가서 설명할게.”
그녀는 자기 말이 얼마나 황당한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나를 밀어 지민혁 옆에 세웠다.
나는 이 여자의 ‘진짜 남자친구’로서,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음을 지었다.
내가 7년 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내가 미리 준비해뒀던 결혼반지를 지민혁의 약지에 끼워주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수줍게 미소 짓고,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속에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귀를 멍하게 만드는 폭죽 소리. 기괴하게 일그러진 사람들의 웃음소리.
꿈속에서 수없이 보았던 장면이었다. 다만 그때마다 주인공은 나였다.
그런데 현실의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의 들러리가 되어 있었다.
연서가 축배를 들 때마다 지민혁은 숙취해소제를 들고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 음료에는 매실액이 섞여 있었다. 내가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그녀의 입맛에 맞춰 찾아낸 레시피였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었다. “평생 나한테 이 매실차 타주는 사람 해줄 거지?”
하지만 이제 그녀는 내가 밤잠 설쳐가며 만든 그 레시피마저 지민혁에게 넘겨주었다.
“한 대표님이랑 지 비서님, 정말 천생연분이네요. 이 기세면 내년에 바로 애 소식 들리는 거 아니에요?”
누군가 술잔을 들고 농담을 던졌다.
“덕담 감사합니다.” 연서가 웃으며 화답했다.
주변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지민혁은 나를 보며 더욱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하시우 씨, 당신이 7년을 기다려도 못 받은 프러포즈, 난 거짓말 한 번으로 받아냈네요. 당신도 당신네 죽은 아버지처럼 무능해. 그냥 아버님 따라가는 게 어때요? 죽으러.”
목소리는 작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들릴 만큼은 충분했다.
누군가는 술잔을 든 채 모르는 척 웃었고, 누군가는 눈을 크게 뜨며 낮게 혀를 찼다.
나는 연서를 보았다. 그녀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나는 옆에 있던 레드와인을 집어 들어 지민혁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서를 불렀다.
“나 부른 이유가 뭐야? 들러리 세우려고? 아니면 당신한테 얼마나 복종하는지 테스트하려고? 그것도 아니면 이 사람들 구경거리 만들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려고?”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연서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하시우! 내가 아까 설명했잖아. 왜 또 미친 짓이야?”
그녀는 지민혁의 앞을 가로막으며 보호하는 태세를 취했다.
나는 그녀를 보지 않은 채,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쪽이든, 당신 뜻대로 해줄게.”
“한연서, 우리 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