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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순백의 웨딩드레스
3년 전,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결혼식 소동은 나를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전 남편이었던 지호는 식 도중 갑작스럽게 신부를 바꾸겠...
Chương (1)
第1章
3년 전,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결혼식 소동은 나를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전 남편이었던 지호는 식 도중 갑작스럽게 신부를 바꾸겠다고 선언했고,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 나는 그때부터 지독한 우울증에 갉아먹히기 시작했다.
그런 내 삶에 강태윤은 한 줄기 빛처럼 찾아왔다. 그는 다정함과 인내심으로 부서진 나를 조금씩 치유해 주었고, 하늘에 대고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고 믿었다. 오늘, 우리 결혼식이 시작되기 정확히 60분 전까지는.
태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신부 대기실에 들어와 내 앞에 들러리 드레스를 내밀었다. 이걸로 갈아입으라는 그의 말에, 순백의 웨딩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내 온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이러느냐고, 대체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달 떨렸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태윤은 가벼운 헛웃음을 내뱉더니 마치 오늘 날씨라도 말하듯 툭 던졌다.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네. 신부가 바뀌었어.
그 여자는 태윤이 곁에 끼고 돌던 '노리개' 같은 존재였다. 그녀가 제대로 된 자리를 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이번 결혼식의 신부 자리를 그녀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태윤은 그러면서도 가식적인 위로를 덧붙였다. 혼인신고서에는 내 이름이 올라갈 테니, 그 여자에게 주는 건 껍데기뿐인 가짜 명분일 뿐이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채원이 느릿느릿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반쪽 얼굴은 그림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지만, 나머지 반쪽은 마치 녹아내린 촛농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기괴하고 섬뜩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내 웨딩드레스를 거칠게 찢어발겼고, 나는 초라한 속옷 차림으로 내던져졌다.
채원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비아냥이 가득 섞인 말투였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녀는 3년 전, 내 전 남편 지호가 나를 버리고 선택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태윤은 내 눈앞에서 보란 듯이 채원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입을 맞췄다. 승리감에 도취한 얼굴이었다. 채원은 태윤의 품에 안겨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나를 훑으며 속삭였다. 전 남편 지호가 안목은 있었다고, 자기가 침대 위에서는 정말 끝내주지 않느냐고.
그 말은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한 번의 배신을 겪었던 내가, 같은 장소에서, 또 다른 남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버려질 줄이야. 모든 희망과 신뢰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절망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
"얼굴만 예쁘면 뭐 해, 또 남편 뺏긴 등신인데."
"그러게 말이야. 저 민채원이란 여자, 침대에서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래? 저렇게 흉측한 얼굴로 서울 최고의 미녀 남편을 두 번이나 뺏다니. 비결이라도 배우고 싶네."
"남자들 다 똑같지 뭐. 민채원은 신났겠어. 정부에서 정식 부인으로 올라서고, 원래 부인은 들러리로 세워버리고!"
"무슨 정부야, 이제 저 여자가 진짜 신부고 안주인이지."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화살이 되어 귓가에 박혔다. 손바닥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꽉 쥐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다. 3년 전과 똑같이, 내가 정성껏 준비한 모든 것은 결국 민채원의 전유물이 되었다. 단상 위에서 반지를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강태윤의 악마 같은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쟁쟁했으니까.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 네 그 식물인간 동생, 오늘 밤을 못 넘기게 해줄 테니."
내 안색이 백지장처럼 질린 것을 확인한 그는, 방금 전까지 채원과 입을 맞췄던 그 입술로 내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걱정 마. 쟤한테 질리면 다시 예전처럼 지내면 되니까."
"네 전 남편도 석 달 만에 쟤한테 질렸잖아? 조금만 참아..."
태윤은 내 반응을 살피며 즐거워했다. 내 눈이 붉게 충혈된 것을 보고서야 그는 쾌감을 느낀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바로 그 표정이야! 3년 전 지호한테 공개적으로 버려졌을 때도 딱 그 표정이었지!"
옆에 선 채원은 3년 전과 다름없는 승리자의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한심한 것."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갈가리 찢겨 나가는 심장을 움켜쥐고 태윤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그의 멱살을 쥐어뜯으며 악을 썼다.
"왜!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그는 건달 같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유가 어디 있어? 넌 왜 매번 그렇게 이유를 찾아?"
"처음 너한테 첫눈에 반했을 때도 넌 이유를 물었지. 지금 내가 다른 여자한테 미쳐 있는 것도 이유가 궁금해?"
"좋아, 말해주지. 걔가 너보다 훨씬 나를 기분 좋게 해주거든. 이 정도면 충분해?"
손끝이 제어할 수 없이 떨려왔다. 1년 동안 잠잠했던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태윤의 눈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고, 그는 허둥지둥 약을 꺼내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내 우울증이 호전된 지 1년이 넘었음에도, 그는 늘 내 약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마치 예전에 나를 조금의 상처로부터도 보호하려 했던 그때처럼.
결혼이라는 것에 트라우마가 깊었던 내가, 큰 결심을 하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까. 하필이면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그 여자와 함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태윤은 내 눈물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비릿한 조소를 날렸다.
"한지수, 넌 여전히 멍청하구나."
"남자 뺏기고 할 줄 아는 게 우는 것뿐이라니. 안타깝지만, 이번엔 널 구해줄 '두 번째 강태윤'은 없을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이 죽순처럼 쏟아져 나와 내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날카롭고 잔인한 질문들이 빗발쳤다.
"한지수 씨, 청첩장에는 신부가 본인이었는데 왜 들러리로 서 계신 거죠?"
"두 번이나 결혼식에서 파혼당한 소감이 어떠십니까? 앞으로 결혼은 꿈도 못 꾸시겠어요?"
"우울증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금 몸을 떠는 게 발작 증세인가요?"
"저렇게 추한 여자에게 두 번이나 남자를 뺏긴 기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분노에 찬 눈으로 태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입모양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지-호.'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3년 전, 지호가 공개적으로 채원을 신부로 선택했을 때, 나는 미쳐버린 채 단상 위에서 그의 뺨을 갈겼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우리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부모님은 즉사했고, 동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식물인간이 되었다.
당시 지호는 내게 말했다. "네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네 가족이 죽은 거야."
채원은 비웃었다. "네까짓 게 얼굴만 예쁘면 뭐 해? 결국 남자한테 버려지고 나한테 지는데."
태윤의 입모양은 반항의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기억해내라는 경고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기자들에게 답했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강 회장님과 신부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태윤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내 그 한마디로 나는 다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온 나라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밤이 되자 태윤은 나와 채원을 한 집에 데려갔다. 1년 동안 정부로만 지냈던 채원은 처음으로 강태윤의 저택에 발을 들였다. 내가 한 달 동안 정성 들여 꾸몄던 신혼집을 그녀는 한눈에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내 앞에서 태윤의 목을 끌어안으며 콧소리를 냈다.
"태윤 씨, 이제 내가 당신 부인이니까 여기 있는 거 다 내 거 맞지?"
채원의 기괴한 얼굴을 바라보며 태윤은 다정하게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그럼 저 여자는?"
채원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요염한 몸짓이었지만 나는 공포로 이가 부딪혔다. 예상대로 태윤은 그녀의 코끝을 톡 치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처분해."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태윤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뒤를 잡았다.
"동생은 생각 안 해? 감히 도망을 가?"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동생 지윤이는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내 반항 때문에 부모님을 잃었다. 이번엔 동생마저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몸을 돌린 나는 채원의 괴물 같은 얼굴과 마주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번을 봐도 반쪽 얼굴의 살점이 축 늘어진 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채원은 내 표정을 놓치지 않고 비웃었다.
"내 얼굴이 무서워?"
모공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 때문에 어릴 적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해왔고, 타인의 겁에 질린 시선이나 조롱 섞인 눈빛에 극도로 예민했다. 나를 죽여버릴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며 나는 공포를 억눌렀다.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채원은 폭풍 전야처럼 낮게 웃었다.
"태윤 씨, 나 저 여자 싫어. 그냥 죽여버리면 안 돼?"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가장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3년 전, 지호가 내게 부모님의 사고가 그녀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했을 때처럼. 저 여자는 저토록 악한데, 왜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던 남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미쳐버리는 걸까.
그녀의 말에 태윤의 눈에 귀찮음이 스쳤다.
"민채원, 네 처지를 아직도 몰라?"
"한지수는 어쨌든 내가 대외적으로 인정한 여자야. 너 같은 근본도 없는 게 어디서..."
채원의 안색이 변하며 불만이 가득 찼다. 나는 태윤을 바라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떼려는 찰나, 태윤은 나를 다시 지옥 끝으로 처넣었다.
"목숨만 붙여 놔. 나머진 네 알아서 해."
그 순간, 나는 완전히 절망했다. 채원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재빨리 칼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톱이 내 얼굴을 강하게 짓눌렀고,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내 뺨 위를 스쳤다.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선명한 핏자국이 생겼다.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나는 겁에 질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아냈다.
"제발, 내 얼굴만은 건드리지 마..."
내 얼굴은 돌아가신 엄마와 80% 이상 닮아 있었다. 이것은 내게 남은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하지만 채원의 심리는 이미 뒤틀릴 대로 뒤틀려 있었다. 그녀의 독설이 비수처럼 내 심장을 도려냈다.
"난 네 이 예쁜 얼굴이 제일 싫어."
"왜 너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두가 좋아하고, 나는 이 얼굴 때문에 모두에게 무시당해야 해?"
"서울 최고의 미녀라고? 내가 네 그 잘난 얼굴을 나처럼 추하게 만들어줄게!"
"너도 밖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기분이 어떤지 느껴봐야지!"
"안 돼! 강태윤! 살려줘, 당신은 알잖아... 이 얼굴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공포 때문에 제대로 된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모든 희망을 태윤에게 걸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내가 이 얼굴을 보며 엄마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 자신도 내 얼굴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설마, 설마 방관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태윤은 내 간절한 눈빛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보였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내게 초인적인 힘을 주었다. 나는 채원을 거칠게 밀어내고 바닥으로 고꾸라뜨렸다. 그녀가 칼을 놓치며 자신의 멀쩡했던 반쪽 얼굴을 그어버렸다.
그녀의 비명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문밖으로 달렸다. 하지만 문 앞에 대기하던 경호원들에게 가로막혔다. 등 뒤에서 태윤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야, 원래 나도 이 얼굴은 아까워했어."
그는 느릿느릿 걸어와 내 턱을 잡아 채원의 찢어진 얼굴을 보게 했다.
"그런데 네가 채원이 얼굴을 망쳐놨네."
"채원이는 자기 얼굴에 아주 예민하거든. 지수야, 이번엔 나도 못 도와주겠다."
채원의 눈빛은 갈수록 광기에 휩싸였다.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태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내 팔을 붙잡아 채원 앞에 직접 내던졌다. 칼날이 내 얼굴을 반복해서 찢고 베었다. 생살이 도려 나가는 고통에 눈앞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에서 태윤의 속삭임이 들렸다.
"괜찮아, 얼굴이 망가져도 내가 사랑해줄게."
"네 전 남편이랑은 달라. 그 자식은 네 얼굴만 사랑했지만, 난 아니거든."
점차 어둠 속으로 빠져들며 나는 꿈을 꾸었다.
2년 전, 태윤과 마지막으로 상담 치료를 받으러 갔던 날. 의사는 이제 약을 끊어도 된다고 했다. 태윤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선물을 사 오겠다며 나갔다. 그를 기다리던 중 나는 지호를 마주쳤다. 당시 나는 행복했고,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지호는 내 그런 모습을 가장 사랑했다. 그는 후회한다며 다시 시작하자고 매달렸고, 내가 거절하자 억지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 장면을 돌아온 태윤이 목격했다. 그는 내가 여전히 지호를 깊이 사랑하고 있으며, 우울증이 낫자마자 그와 다시 만나려 한다고 오해했다. 아니라고, 몇 번을 설명했지만 그는 침묵으로 답하며 그날의 소동을 끝냈었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눈을 떴다.
"태윤 씨, 검은색 스타킹이 좋아, 아니면 흰색?"
"둘 다 좋아..."
태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가시 돋친 덩굴에 조여지는 듯했다. 몸이 사정없이 떨렸다. 신체화 증상이 극에 달했다.
강태윤.
당신은 내 우울증을 치료해주었으면서, 동시에 내 우울증을 다시 도지게 만들었어. 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옆방의 신음 섞인 소리를 한참 동안 들어야 했다. 1분 1초가 도살장 위에 놓인 듯 고통스러웠다. 정사가 끝난 듯 태윤이 담배를 피우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가 잠귀가 밝다는 걸 알았다. 예전에는 내가 깊이 잠들 수 있도록 집 전체에 카페트를 깔고 가구 모서리마다 두툼한 패드를 붙였던 사람이었다. 이 집을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공간으로 만들었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밤새도록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소리를 들려주며 나를 깨웠다.
"슬퍼?"
증세 때문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태윤은 침대맡에 앉아 내 망가진 얼굴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난 널 버리지 않아. 그냥 네가 아팠으면 좋겠어."
"충분히 아프면, 너도 평생 나를 기억해주지 않을까?"
"이 모든 게 끝나면, 우리 둘만 영원히 함께하는 거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소리야? 강태윤, 내가 말했잖아. 난 이지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딴 자식, 이미 깨끗하게 잊었단 말이야!"
태윤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런데 지수야."
"넌 모르겠지만, 우리 결혼식 전날 밤, 너 자면서 계속 그 자식 이름을 불렀어."
"그날만 그런 게 아냐. 매일 밤! 매일 밤마다 그랬다고!"
그의 눈은 광기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고작 잠꼬대 때문에 이런 복수를 한단 말인가? 나를 기억하게 하려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강태윤, 제발 믿어줘. 난 정말..."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태윤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안 믿어."
그리고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동생이 있는 병실의 실시간 CCTV 영상이 떠 있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네 동생 호흡기가 멈출 거야." 태윤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수야, 날 원망하지 마. 난 그냥 네가 그 자식을 계속 기억하는 게 싫을 뿐이야..."
"안 돼, 제발..."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핏줄을 잃을 순 없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나는 몸의 통증도 잊은 채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