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용품점에서 마주친 약혼녀와 파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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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품점에서 마주친 약혼녀와 파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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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전날 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간 총각파티의 마지막 행선지는 어느 성인용품점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그곳에서 똑같...

Chương (1)

第1章

결혼식 전날 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간 총각파티의 마지막 행선지는 어느 성인용품점이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건, 그곳에서 똑같이 파티를 즐기고 있던 내 약혼녀와 그녀의 소꿉친구였다. 소꿉친구인 도현은 정성스럽게 포장된 물건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고 있었다.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특수 제작한 거라며, 나중에 자기가 없을 때 대신 옆에 있어 줄 거라는 저속한 농담과 함께. 채윤은 얼굴을 붉히며 그 물건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제발 파혼하라는 소리 좀 그만하라며, 이건 자기가 직접 산 거라고 나한테 잘 설명할 테니 걱정 말라고 그를 다독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보 같게도 내 마음엔 안도감이 먼저 스쳤다. 적어도 그녀가 우리 관계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앞에 기이한 문구들이 탄막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남주야 제발 정신 차려! 저건 거절이 아니라 여지를 남기는 거야. 너랑 결혼은 하지만 마음은 도현이한테 있다는 뜻이라고!]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결국 그를 받아주는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그 장면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다. 그리고 곧장 SNS에 올리며 도현을 태그했다. [나중까지 기다릴 거 없어. 내일 당장 그쪽한테 시집보내 줄 테니까.] 게시물을 올린 직후, 나는 웨딩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결혼식 취소합니다. 예약금은 돌려받지 않겠습니다. 그냥 축의금 낸 셈 치죠.” … 한 시간 뒤, 빌라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코끝을 찌르는 술 냄새와 낯선 남자의 향수 냄새를 풍기며, 심채윤이 킬힐 소리를 내며 달려 들어왔다. “서진우! 너 미쳤어? 결혼식을 왜 취소해?!” 그녀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경악이 서려 있었다. 나는 어둠이 내린 거실 한복판에 앉아 그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이유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왜 나한테 묻지?” 채윤은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 지난 8년 동안, 내가 그녀에게 이런 서늘한 말투를 쓴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겨우 도현이가 준 선물 하나 때문에 이래? 고작 그런 일로 파혼을 하겠다고? 사람들을 다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야?!” 그때 다시 눈앞으로 탄막이 스쳐 지나갔다. [와, 고작 그런 일? 다른 남자 향수 냄새 풀풀 풍기면서 돌아와서 적반하장으로 소리 지르는 것 봐. 진짜 뻔뻔함의 극치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1도 없네. 무조건 남주가 속 좁은 거래.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에 나르시시스트네!!] [이 여자, 양다리 걸치고 싶은 거야. 역겹다. 남주야,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정신적 바람도 엄연한 바람이야!] 나는 탄막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래, 고작 그런 일 때문에.” 내 태도가 단호하자 채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이어 그녀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그녀는 평소처럼 내 손을 잡으려 다가왔다. “진우야, 제발 좀... 나랑 도현이 사이에 뭐가 있었으면 진작 있었겠지, 왜 내일 너랑 결혼하겠어? 응? 제발 착하게 굴자. SNS 글 내리고, 내일 결혼식은 예정대로 하자. 응?” 나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오기 전에 이미 하객들한테 결혼 취소 통보 다 돌렸어. 식장 정리도 끝냈고.” “짐 정리되는 대로 나갈 거야.” 채윤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굳어버렸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나를 바라보는 눈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네가 나간다고? 서진우,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나 해?” 그녀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 지인들 중 그 누구라도 내가 파혼을 선언했다는 소릴 들으면 뒤집어질 테니까. 대학교 시절, 임도현이 유학을 간다며 그녀를 차버렸을 때, 채윤은 세상을 잃은 듯 울며 내게 이별을 통보했었다. 나는 광대처럼 한겨울 인공호수 속으로 뛰어들어 그녀가 던져버린 반지를 찾아냈고,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그녀의 곁을 지키며 기분을 맞춰줬다. 사람들은 나를 심채윤의 ‘호구’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다시 웃을 수만 있다면.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봐주었을 때, “우리 사귈까?”라고 먼저 물어왔을 때,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구름 뒤에 숨었던 달빛이 드디어 나를 비추는 줄 알았다. 8년의 시간 동안 나는 그녀를 손바닥 위의 보석처럼 애지중지했다. 한 달 전, 약혼반지를 고르던 날 임도현이 귀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채윤은 직접 운전하며 저녁 거리를 사러 마트로 향하고 있었다. 차 안의 디스플레이 창에 갑자기 ‘임도현’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채윤은 그 이름을 본 것만으로 호흡이 흐트러졌고, 핸들을 잡은 손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녀의 시선은 화면에 박제된 듯 고정되었고, 앞에 길이 끊겼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채윤아! 조심해!” 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차는 통제력을 잃고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화단의 석축을 들이받았다. 2 쾅! 거대한 충격이 몰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쪽으로 몸을 날려 채윤을 감싸 안았다. 이마가 앞 유리에 강하게 부딪혔고, 뜨거운 피가 순식간에 눈으로 흘러내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귀에선 이명이 울리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채윤은 상처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휴대폰을 움켜쥔 채 화면 속 메시지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5초쯤 지났을까. 그녀는 뒤늦게 고개를 돌려 피범벅이 된 나를 발견했다. “진우야! 너 피 흘려!” 그녀는 당황하며 휴대폰을 치우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 나는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비릿한 혈액을 삼켰다. 머리의 상처보다 가슴이 더 시려 왔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녀의 첫 번째 반응은 내가 아니라, 그 남자의 메시지였다. 응급실 안은 소독차 냄새가 진동했다. 간호사가 내 이마에 박힌 유리 파편을 제거할 때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나는 채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쉴 새 없이 화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곁눈질 한 번 내게 주지 않았다.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채윤아, 무슨 일 있어?”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그러고는 억지로 굳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부모님이 심하게 다투셔서 그래.” 회피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나는 바보 같은 환상을 품었다. 임도현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정말 집안일일 수도 있다고. “그럼 먼저 가서 상황 봐. 나 치료 끝나고 네 집으로 갈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사면초가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떠났다. 나에게 괜찮냐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30분 뒤, 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그녀의 본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문을 열어준 부모님은 TV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채윤이? 안 왔는데? 우리 싸우지도 않았어.” 나는 문 앞에 얼어붙은 채 전신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내내 채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캄캄한 거실에 앉아 마흔일곱 통의 전화를 걸었다. 돌아오는 건 차가운 수신 거절 메시지뿐이었다. 거대한 공포가 나를 집어삼켰다. 새벽 2시, 드디어 휴대폰이 반짝였다. 그녀의 답장이 아니었다. 임도현의 SNS 업데이트 알림이었다. 사진 속에는 한 남자의 손이 잠든 여자의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 여자의 손목에 걸린 뱅글은 지난달 내가 약혼 선물로 사준 명품 브랜드의 것이었다. 사진 아래 적힌 문구가 가슴을 후벼팠다. [깊이 사랑했던 사람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된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분노보다 먼저 밀려온 건 전례 없는 두려움이었다. 8년의 헌신이 갑자기 나타난 첫사랑을 이기지 못할까 봐.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채윤이 돌아왔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임도현의 게시물이 띄워진 휴대폰을 그녀 앞으로 밀어 넣었다. “채윤아, 그 사람이랑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거면... 나 물러날게.” 채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면 나한테 기회조차 없었을 거 알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서진우!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목소리가 떨렸다. “도현이랑은 아무 일도 없었어! 어제 술에 너무 취해서 그냥 걔네 집에서 잠만 잔 거라고! 넌 나를 그렇게 못 믿니?” 그녀는 내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내 평생 결혼할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알겠어?!” 나는 그녀의 눈물을 보며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았다. “그래... 네가 나를 택한다면, 나도 널 절대 저버리지 않을게.” 그날 밤, 우리는 서로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껴안았고,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내 품에서 독한 맹세까지 내뱉었다. 나는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회상이라는 칼날이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 “진우야, 말 좀 해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채윤을 보았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내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정말 너만 사랑해. 그 사진은 도현이가 술김에 멋모르고 올린 거야. 제발 화 풀어, 응?” 간절하게 설명하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억누를 길 없이 흔들렸다. 8년의 세월이 어떻게 단칼에 아무 감정 없이 잘려 나갈 수 있겠는가. 그때, 다시 탄막이 흘러갔다. [전형적인 수법 등장! 걸리고 나면 본질 흐리고 동정심 유발해서 마음 약해지게 하기. 그러다 또 딴 마음 품겠지!] [눈물+맹세+애교. 남주는 매번 여기 속더라. 제발 깨어나! 이건 가스라이팅이야!] [이번에도 용서해주면 나중에 피눈물 쏟는다!] 흔들리던 마음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굳어버렸다. 나는 그녀가 움켜쥐고 있던 내 옷자락을 한 손가락씩 힘주어 떼어냈다. “너 취했어. 지금 제정신 아니야.” 나는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 내 목소리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차가웠다. “가서 자.” “내일 아침에 맨정신일 때, 헤어지는 문제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자.” 3 하지만 채윤은 뒤에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진우야, 우리 대학교 2학년 겨울 기억나? 내 반지 찾아준다고 얼음 호수에 뛰어들어서 죽을 뻔했잖아.” 그녀의 눈물이 셔츠를 적시며 뜨겁게 등에 닿았다. “우리 8년이야. 8년의 감정을 어떻게 이렇게 쉽게 놓을 수가 있어?” “결혼 취소하지 마, 응? 사람들한테는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자. 우리 내일 반지 교환해야 하잖아...” 목구멍이 꽉 막혀 왔다. 8년의 기억들이 신경을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그때, 익숙한 탄막이 다시 나타났다. [또 저 소리! 반지 찾아준 거 사골처럼 우려먹을 기세네?] [전형적인 도덕적 유죄 인간! 평소엔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 보험 사라지니까 과거 회상 시작하네!] [남주야 정신 차려! 쟤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널 편안한 ATM기 겸 하인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는 눈을 감고 입안에 맴도는 쓴맛을 삼켰다.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늦었어. 가서 자.” 거실엔 적막만 감돌았다. 소파에 주저앉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매캐한 연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자, 8년의 조각들이 제어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요리해주다 손가락을 데었던 모습. 청혼을 수락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좋아”라고 말하던 그 얼굴. 함께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 나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정말 이 8년을 전부 지워야만 할까? 어쩌면 그녀와 임도현 사이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닐까? 망설임이 고개를 들고, 그녀에게—그리고 나 자신에게—마지막 기회를 줘야 하나 고민하던 바로 그때.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담배를 끄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임도현이 서 있었다. 검은색 고급 쇼핑백을 든 채, 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진우 형, 채윤이 자요?” 나는 그를 차갑게 쏘아붙였다. “자니까 볼일 있으면 내일 해.” “아, 잠시만요.” 도현은 구두로 문틈을 가로막더니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채윤이가 너무 급하게 가느라 내 방에 뭘 좀 두고 가서요. 내일 결혼식 때 필요할까 봐 직접 가져왔어요.”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두고 가. 그리고 꺼져.” 하지만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도발해왔다. “형, 이게 뭔지 안 궁금해요?” 다음 순간, 그는 쇼핑백에서 아주 천천히 검은색 레이스 속옷 하나를 꺼내 들었다. “채윤이가 참 덜렁대요. 이런 속옷까지 흘리고 다니고.”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 머리끝까지 몰아쳤다. 그 속옷은 바로 지난주, 내가 백화점에 동행해 직접 골라준 디자인이었다. 귀에선 윙 소리가 나고 위장이 뒤집히는 듯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것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나의 존엄을 발가벗겨 바닥에 내팽개치고 짓밟는 행위였다. “임도현!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느새 맨발로 뛰쳐나온 채윤이 그 속옷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짝! 그녀가 달려들어 도현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가! 왜 돌아와서 내 인생을 망치려는 거야?!” 도현은 고개가 돌아간 채 잠시 멈췄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채윤의 손이 공중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그녀의 눈동자엔 찰나의 당혹감이 스쳤다. “미안해, 채윤아... 다 내 잘못이야!”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널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러더니 도현은 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두어 차례 더 내리치며 울먹였다. “하지만 너도 말해봐. 오늘 밤 나 보면서 마음 한구석도 안 흔들렸다고 자신할 수 있어?” 충혈된 눈으로 채윤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의 얼굴엔 고통과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채윤은 입을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탄막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우와, 역대급 신파극 찍고 있네!] [여주 연기 보소. 남편 앞에서 첫사랑이랑 절절한 멜로 찍네?] [남주야 당장 도망쳐! 저 둘은 환상의 짝꿍이야. 절대 방해하지 마!] 나는 이 가증스러운 한 쌍을 바라보며 구역질을 참았다. 나는 뒤돌아 소파 위에 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둘이 실컷 얘기해. 난 나간다.” 그때 채윤이 비명처럼 달려와 내 허리를 꽉 껴안았다. 손톱이 내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진우야! 가지 마! 내가 사랑하는 건 너뿐이야! 나 내일 너랑 결혼할 거야!” 그녀는 도현을 향해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너 당장 꺼져! 내가 사랑하는 건 진우야!” 그 말을 듣자 도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뒤틀렸다. 눈빛에 광기 어린 섬뜩함이 스쳤다. 그는 갑자기 주머니에서 접이식 과도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억지로 잡아 칼자루를 쥐어주더니, 칼끝을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게 했다. “진우 형!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못 참고 유혹한 거예요!” “차라리 절 죽이세요! 형 화가 풀리고 채윤이를 용서해줄 수만 있다면, 저 그냥 죽을게요!” 나는 동공이 확장되었다. 힘을 주어 손을 뿌리치려는 찰나. 푸석, 하고 날카로운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정막한 거실을 갈랐다. 뜨겁고 끈적한 선혈이 뿜어져 나와 내 손등을 적셨다. 4 “아악!” 채윤의 비명이 거실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내 손가락을 타고 뜨거운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나 아냐.” 나는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채윤은 맹수처럼 달려들어 나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서진우! 너 미쳤어? 왜 이 사람한테 칼을 휘둘러!” 복부를 움켜쥐고 피를 흘리던 도현은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졌다. 그는 소파에 기대어 채윤을 향해 창백하고 가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채윤아... 진우 형 탓하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형을 화나게 해서...” 탄막이 폭발했다. [미친! 저 남자 진짜 독종이다! 모함하려고 자기 몸에 칼을 꽂아?] [대박. 여주 지능 실화냐? 저걸 믿어?] [남주야 제발 도망쳐. 저 둘이 그냥 살게 둬. 진짜 역겹다.] 나는 손에 묻은 핏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가련한 연인들을 보며 차갑게 냉소를 흘렸다. 나는 티슈를 뽑아 대충 피를 닦아낸 뒤, 휴대폰을 꺼내 119를 눌렀다. 바닥에서 채윤은 두 손으로 도현의 상처를 지혈하며 통곡했다. “도현아, 조금만 참아! 죽으면 안 돼!” 도현은 떨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채윤아... 이번 생에 널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오늘 죽는 게 나아.” “그래야 네 마음속에 영원히 내 자리가 남을 테니까.” 채윤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약혼자인 내 앞에서, 그녀는 도현을 껴안고 울부짖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사랑해! 내 마음속엔 항상 너뿐이었어!” “살아만 줘! 네가 살면 나 뭐든 다 할게!” 다시 탄막이 흘렀다. [우웩... 남편 앞에서 당당하게 고백 타임? 양심 어디?]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네! 남주가 쓴 녹색 모자가 에베레스트급이다!] [빨리 파멸해라! 보는 내가 다 암 걸릴 것 같아!] 다른 남자를 위해 피눈물을 쏟는 그녀를 보며, 내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미련과 오기가 눈 녹듯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대원들이 들이닥쳐 도현을 들것에 싣고 빠르게 나갔다. 채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얇은 실크 잠옷 바람으로 맨발로 뒤를 쫓았다. 뼈를 깎는 듯한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는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당황해 도망치듯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3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그때도 그녀를 구하려다 내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며 도움을 청하던 내게, 그녀는 눈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무서워. 피... 나 피 못 본단 말이야.” 그때 나는 그녀가 그저 겁이 많은 줄로만 알고, 다친 몸으로 오히려 그녀를 달랬다.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내가 없었을 뿐이었다. 냉혹한 진실 앞에서 내 몸의 모든 온기가 빠져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복도에서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채윤이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거실 탁자 위의 휴대폰과 지갑을 챙기며 내뱉었다. “진우야, 나 올 때까지 기다려. 내일 다시 얘기해.”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내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병원에서 도현의 상처는 깊지 않다는 진단이 나왔다. 단순한 피하 손상이었다. 봉합 수술을 마친 그는 금세 안정을 찾았다. 병실에서 창백한 도현의 얼굴을 보며 채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내가 질투 때문에 도현을 찔렀다고 확신했고, 나에 대한 원망이 싹텄다. 하지만 취소된 결혼식이 떠오르자,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내게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진우야, 도현이 무사해. 어제 네가 너무 화나서 실수한 거 다 알아. 탓하지 않을게.” “근데 도현이가 너무 약해졌어. 혼자 두면 불안해서 안 되겠어. 당분간 우리 집에서 내가 돌봐주려고 해.” “너 오는 길에 영양제 좀 사 오고, 도현이한테 사과도 해. 그럼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할게.” 전송된 메시지엔 답장이 없었다. 채윤은 내가 아직도 삐쳐 있는 거라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두 시간 뒤, 그녀는 조심스럽게 도현을 부축하며 빌라 문을 열었다. “진우야, 우리 왔어.” 집 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따뜻한 밥 냄새도, 마중 나오는 내 모습도 없었다. 기분이 상한 채윤은 도현을 눕히고 곧장 안방 문을 열어젖혔다. 나를 훈계할 준비를 마친 채로. “서진우, 적당히 좀 해! 너 지금...” 그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