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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성 과거를 영원히 지우다
다시 얻은 삶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짓으로 점철된 과거의 흔적들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노신혜가 3년 동안 내게 보냈던 연애편지들...
Chương (1)
第1章
다시 얻은 삶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거짓으로 점철된 과거의 흔적들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이었다.
노신혜가 3년 동안 내게 보냈던 연애편지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찢어발겼고, 강연희와 찍은 사진들은 미련 없이 불태웠다. 지난 생의 나는 두 여자에게 휘둘려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힌, 그야말로 완벽한 ‘호구’였다.
연희는 입버릇처럼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녀를 위해 손에 쥐고 있던 해외 유학 기회까지 포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그녀는 "진우는 나 없으면 안 돼"라는 차가운 한마디만 남긴 채, 이진우를 데리고 홀연히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 후 껍데기만 남은 채 살아가던 내 곁을 지킨 건 신혜였다. 그녀는 매일 정성스레 도시락을 챙겨 오며 "난 8년이나 너를 기다렸어"라고 속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사랑을 만났다고 믿었다. 그녀는 밤늦게 돌아다니지도 않았고, 이성 관계도 깨끗했으니까.
하지만 그해 겨울,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던 7일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건 간호사들의 무심한 수다였다.
"12번 침대 환자 부인 말이야, 매일 오긴 하는데 정작 자기 남편 면회는 안 가고 옆방에 있는 이진우라는 환자만 지극정성으로 돌보더라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연희가 진우와 출국했던 건 그의 도박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였고, 그 막대한 자금을 대준 사람이 바로 신혜였다는 사실을. 그 세 사람의 지독한 치정극 속에서 나는 그저 이용하기 좋은 배경 소품에 불과했다.
이번 생은 결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나는 결심이 서자마자 집부터 매물로 내놓았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 지옥 같은 관계망에서 영원히 벗어날 계획이었다.
…
"12번 환자 진짜 불쌍하다. 아내는 매일 오는데 얼굴 한 번 안 비치네."
"그러게. 바로 옆방에 있는 이진우라는 사람한테만 붙어 있더라고."
병실 문 너머로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고로 온몸이 으스러진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기를 일주일. 의식은 또렷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신혜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 곁을 지키느라 바빴을 테니까. 내가 믿었던 구원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기극일 뿐이었다. 눈을 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시야 끝에 걸린 심전도 모니터의 선은 차갑게 수평을 그리며 멀어져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익숙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달력은 연희를 위해 유학을 포기하기 석 달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학과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교수님, 이번 교환학생 프로그램 확정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 교수님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서렸다.
"그래, 서안아. 잘 생각했다. 그 성적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기회였어."
맞다. 너무 아까웠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통째로 내던지려 했다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멍청한 짓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동산에 연락해 부모님이 남겨주신 집을 내놓았다. 조건은 단 하나, 전액 현금 결제에 빠른 잔금 처리였다.
처리를 마칠 때쯤, 연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안아, 진우 졸업 작품에 문제가 좀 생겼대. 네가 전공 지식 많으니까 가서 좀 도와줘."
또 이진우였다. 우리 사이엔 늘 그가 끼어 있었다. 전방의 나였다면 이 한마디에 사흘 밤을 새워가며 초안부터 완성본까지 다 만들어다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으로 상을 받는 건 오직 이진우 한 명뿐이었겠지.
당시 연희는 "진우는 몸이 약하잖아. 스펙이라도 쌓아야 취업을 하지"라는 말로 나를 구슬렸다. 나는 그 궤변을 사랑이라 믿으며 기꺼이 부속품이 되었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자료 보내줘."
"착하다, 우리 서안이."
전화 너머 들려오는 그 짧은 칭찬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과거의 내가 가련해졌다.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혜가 내가 좋아하던 맛집의 만두를 들고 찾아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식탁을 차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얼른 먹어. 요즘 연희랑 진우 일로 신경 많이 쓰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왔어."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연희에게 상처받을 때쯤 나타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진우의 이야기를 꺼냈다.
"진우 프로젝트가 좀 중요하긴 하잖아. 연희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걔 워낙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니까."
봐, 핑계는 차고 넘친다. 이진우는 약하니까, 아프니까 모든 게 허용된다.
나는 만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으며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알고 있어, 누나. 연희 곤란하게 안 해."
그제야 신혜는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내가 연희를 위해 무한정 희생하는 '서안'인 줄 알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노트북을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유학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자료를 찾던 중 멀지 않은 곳에서 연희와 진우를 발견했다.
진우는 연희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혈색이 아주 좋아 보였다. 몸이 약하다는 건 다 거짓말 같았다. 그는 연희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누나, 누나 없었으면 나 진짜 어쩔 뻔했어."
연희는 그를 내려다보며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바보 같기는."
물을 사러 가려던 연희가 고개를 돌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더니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의 등장이 그녀들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예전처럼 달려가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그녀를 향해 입꼬리만 살짝 올리고는 등을 돌려 서가로 향했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불쾌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진득한 관계도 곧 끝날 테니까.
이진우의 졸업 작품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이틀 뒤, 연희가 도서관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낚아채 책상 위로 거칠게 내던졌다. 쾅 하는 소리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쏠렸다.
"서안아, 내가 진우 좀 도와주라고 했지. 여기서 한가하게 네 책이나 보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그 뒤에 선, 무고한 척 표정을 짓고 있는 이진우를 바라봤다.
"나도 찾아볼 자료가 있어서."
"진우 졸업보다 중요한 자료가 대체 뭔데?"
연희는 몰아붙이며 진우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얘 이거 때문에 며칠째 잠도 못 잤어. 넌 어떻게 네 생각만 하니?"
진우는 타이밍 좋게 그녀의 소매를 붙잡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그러지 마. 서안이 형도 바쁜 일이 있겠지. 내가 그냥 어떻게든 해볼게."
그의 말에 연희의 분노는 더 거세졌다.
"들었어? 진우가 너보다 훨씬 철들었어! 서안,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일주일 안에 완성된 기획안 내 책상 위에 올려둬."
나는 한 편의 신파극을 보듯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연희는 내가 굴복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을 풀고 진우를 데리고 나갔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결국 연희의 참을성이 바닥났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서안! 너 대체 뭐 하는 거야? 제출이 일주일 앞인데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어?"
나는 세면대 물을 틀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렸다.
"미안, 할아버지 몸이 안 좋으셔서 계속 병원에 있느라 늦었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통하지 않을 거짓말이기도 했다.
"진우 졸업 작품이 걔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집안일은 잠시 제쳐두고 걔 일부터 끝내."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말투. 그녀의 눈에 내 유일한 혈육인 할아버지는 이진우의 과제보다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서안, 괜히 심술 부리지 마. 진우 졸업 못 하면 나 너 절대 안 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지난 생에 왜 이런 여자에게 목숨을 걸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이다, 이번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을 살 매수자가 나타났고, 전액 현금을 입금할 테니 오늘 당장 계약하자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부모님의 유품인 가구들을 옮겨야 했다. 혼자서는 무리였기에, 나는 늘 믿음직한 선배 역할을 하던 신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바빠? 집에 가구를 좀 처분해야 하는데 손이 모자라서."
수화기 저편에 정적이 흐르더니, 이내 신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안아, 어쩌지? 나 지금 좀 바빠서 갈 수가 없네."
배경음으로 이진우의 가냘픈 기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진우가 열이 좀 나서 내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 미안한데 이삿짐센터 부르면 안 될까? 비용은 나중에 내가 보내줄게."
또 이진우였다. 나는 가볍게 실소했다.
"아니야, 누나. 걔 잘 돌봐줘. 내가 알아서 할게."
전화를 끊고 곧장 유료 서비스를 불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굳이 구걸할 필요는 없으니까.
잠시 후, 나는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신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나... 나 위련이 너무 심해서 지금 시내 대학병원 응급실에 왔어..."
신혜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금방 갈게!"
나는 병원 응급실 로비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봤다. 30분 뒤, 신혜가 나타났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정작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달려간 곳은 반대편 정형외과 진료실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녀 뒤를 쫓았다. 진료실 앞, 휠체어에 앉아 발목에 붕대를 감고 우는 이진우가 보였다. 신혜는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달래고 있었다.
"자, 괜찮아. 울지마. 의사 선생님이 가벼운 염좌래잖아. 며칠 쉬면 나을 거야."
"하지만 너무 아픈걸요..."
진우는 콧소리를 섞어가며 어리광을 부렸고, 신혜는 지극정성으로 그의 발목을 살폈다. 지난 생, 내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보여준 가짜 눈물보다 훨씬 더 진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들 뒤에 멈춰 섰다. 지난 생, 중환자실에서 들었던 그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내 인기척에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신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서안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진우의 눈물은 순식간에 말랐고, 그의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도발이 서렸다.
"위가 아파서 약 타러 왔어."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너... 몸은 좀 어때?" 신혜가 허둥지둥 일어섰다.
"별일 아니야. 늘 있던 증상이지 뭐."
나는 그녀에게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누나 바쁜 것 같으니까 난 약 받고 갈게."
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그녀들은 내가 여전히 질투에 눈이 멀어 어쩔 줄 모르는 서안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집을 팔고 잔금을 모두 치른 날, 날씨가 무척 좋았다. 나는 돈을 새 계좌로 옮긴 뒤, 학교에 가서 휴학 및 유학 절차를 마무리했다.
주말, 과 동기들이 주최하는 노래방 모임이 있었다. 연희와 신혜도 올 것이 뻔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나도 참석했다. 방 안은 '진실 게임' 열기로 뜨거웠다. 몇 차례 술잔이 오가더니 진우가 주사위를 흔들며 제안했다.
"우리 '왕 게임' 해요! 왕이 된 사람이 시키는 건 무조건 하는 걸로!"
모두가 환호했고 연희와 신혜도 들뜬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판부터 진우가 왕이 되었다.
"2번하고 5번! 타이타닉 명장면 알지? 선상 포옹 재현하기!"
사람들이 카드를 뒤집었다. 내 손엔 2번이 들려 있었고, 연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5번 카드를 내밀었다.
"오, 서안! 기회 왔다!"
"연희야, 빨리 안고 끝내!"
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연희는 마지못해 내 앞에 섰다. 신혜는 옆에서 웃으며 부추겼다.
"연희야, 얼른 해. 서안아, 팔 벌려야지."
나는 뻣뻣하게 팔을 벌린 채 눈을 감았다. 연희의 표정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느껴져야 할 온기 대신, 등 뒤에서 거친 힘이 밀려왔다. 진우였다. 그는 뒤에서 나를 껴안으며 연희에게 소리쳤다.
"누나, 봐! 이렇게 해도 똑같죠?"
그가 나를 밀치듯 안는 순간, 중심을 잃은 나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뒷머리가 테이블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눈앞이 번쩍이며 아찔한 통증이 몰려왔다. 테이블 위의 술과 음료가 쏟아져 내 몸을 적셨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건 연희의 숨기지 못한 비웃음이었다.
"진짜 분위기 깨네."
그녀는 나를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신혜도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서안아,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냥 게임이잖아."
나를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은 나를 밀쳐놓고선 겁에 질린 척 눈시울을 붉히는 이진우에게 향했다. 연희는 즉시 그를 제 곁으로 끌어당겨 다독였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저 사람이 혼자 발을 헛디딘 거지."
뒷머리의 박동 치는 통증을 느끼며,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운 방을 빠져나왔다. 오직 한 가지만이 다행스러웠다. 집을 팔았고, 유학 준비가 끝났다는 것. 떠나기까지 이제 사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