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을 잃고 당신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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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잃고 당신을 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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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빙벽의 틈, 그 서늘한 죽음의 경계로 돌아와 있었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극지 탐사대에 자원했...

Chương (1)

第1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빙벽의 틈, 그 서늘한 죽음의 경계로 돌아와 있었다.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극지 탐사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임무 수행 중, 아내의 가슴속에 평생 '지우지 못한 첫사랑'으로 남은 강지훈과 함께 빙하 틈새인 크레바스로 추락했다. 생사의 기로였다. 아내가 던져준 구명 밧줄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구하려던 손을 멈추고, 삶의 기회를 지훈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생의 처절한 기억 때문이었다. 지난 생에서 나는 극적으로 구조되었지만, 강지훈은 끝내 얼음 아래 묻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그가 죽고 난 뒤, 아내 오세아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녀는 즉시 탐사대를 탈퇴하고 태교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날, 그녀가 지은 아이의 성은 내 성인 '송' 씨가 아닌 강지훈의 성인 '강' 씨였다. 그리고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을 내 가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오세아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증오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건 지훈이와 나의 아이야. 당신 때문에 이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아빠를 잃은 유복자가 됐어.” “그 사람이 죽었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살아 있어? 지옥에 가서 그 사람한테 사죄해!” 그녀는 나를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려 자살로 위장했고,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1. “빨리 밧줄 잡아!” 멀리 서 있는 오세아가 던진 밧줄이 내 손 근처에 떨어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등 뒤에 강지훈이 보였다.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서, 나와 그는 빙벽 끝에 매달려 겨우 버티고 있었다. 발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었다. 구명 밧줄은 내게 가장 가까웠지만, 세아의 힘으로는 한 번에 한 명밖에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며 옆에 있는 지훈이 밧줄을 볼 수 있게 비켜주었다. “지훈아, 빨리 밧줄 잡아! 내가 끌어올려 줄게!” 다음 순간, 지훈이 밧줄을 꽉 움켜쥐었다. 곁눈질로 본 세아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끌어올렸다. “다쳤잖아, 빨리 기지로 돌아가야 해!” 지훈이 구조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눈보라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 채 부축하며 멀어졌다. 떠나기 전, 세아는 바닥에 떨어진 밧줄을 옆으로 툭 던져버렸다. “정우 씨, 다른 사람들 보내서 구해달라고 할게!” 이 악물고 버텼지만, 온몸의 기력이 다했다.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내 손은 미끄러졌고, 나는 그대로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했다. 다행히 결정적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장비가 틈새에 걸려 추락이 멈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찢어진 방호복 사이로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감각이 사라진 손가락으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을 때,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송정우, 걔 벌써 죽은 거 아냐?” “여기 떨어지면 답 없지. 누가 그렇게 잘난 척하고 나오래?” 나는 필사적으로 구조 요청을 보냈고, 마침내 지상의 대원들이 이 틈새를 발견했다. 고개를 드니 대원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본 탐사대원들은 동시에 침묵에 빠졌다.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고, 내가 조금씩 미끄러지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정우 씨, 이제야 좀 잘못을 알겠어?” “누가 강지훈을 억지로 이런 위험한 데로 끌고 오래? 지훈이 해치려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이라니까.” 누군가 비웃으며 얼음 조각을 아래로 던졌다. 그것이 내 안면 마스크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를 냈다. 미세한 충격에도 신경이 곤두섰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비굴할 정도로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마치 광대를 구경하듯, 그들은 틈새 주위에 둘러앉아 조롱 섞인 표정을 지었다. “쫄지 마, 남자답게 굴라고.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까 알아서 기어 올라와 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도 그들은 농담을 지껄였다. 손가락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체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그들이 내 처참한 꼴을 충분히 감상한 후에야 밧줄 하나가 내려왔다. 하지만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그냥 혼자 올라와. 우린 간다.” 온몸이 굳어버릴 것 같은 배신감에 고개를 들자, 그곳엔 오세아의 얼굴이 있었다. “세아 고마워, 조금만 더... 밧줄 좀 건네줘.” '세아'라는 그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얼굴은 혐오감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도와주기는커녕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차가운 목소리로 뱉었다. “왜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해? 오늘 내가 여기 없었으면 지훈이는 당신 때문에 죽었을 거야!” “혼자 힘으로 올라와. 살아서 돌아오면 반드시 지훈이한테 사과해. 그 사람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우리 당장 이혼이야!” “당신은 우리 아이 아빠가 될 자격도 없어!” 멀어지는 발소리. 기력이 다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비굴하게 구조를 요청했지만, 누구 하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는다. 2. 가만히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지막 도박을 하듯, 나는 지탱하던 손을 놓고 구명 밧줄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행히 손에 닿았다. 온 힘을 다해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을 때, 심장 소리가 귀청을 때릴 듯 크게 울렸다. 사방은 온통 하얀 눈세상이었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 나를 버리고 떠났다. 내가 사는지 죽는지,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기지까지는 아직 십여 킬로미터가 남았다. 사선을 넘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GPS 장치가 있어도 이 몸으로 걸어가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금니를 깨물고 눈보라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극심한 추위 속에서 기지의 기기들은 오작동하기 일쑤였다. 장갑을 낀 채로는 수리가 어려워 벗어두었는데,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얼어붙은 손가락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기상학자로서 나는 이 환경이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눈발은 굵어지고 시야는 10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다. 본부와의 교신도 끊긴 상태. 추위와 허기에 몸을 떨며 나는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임신한 세아를 위해 국내 연구직도 포기하고 극지 탐사대에 자원했다. 그녀가 고생할까 봐 내가 더 힘들고 어려운 일만 골라서 했다. 하지만 결국,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었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었고, 가장 믿었던 반려자는 나를 버렸다. 다리가 마비된 채 걷고 또 걸었다. 온몸이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떨려왔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간신히 숨줄기를 붙잡고 걷다 보니 멀리 기지의 불빛이 보였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당겼다. 한 번, 두 번...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리 두드려도 요지부동이었다. 밖은 살을 에는 칼바람이 불었지만, 안의 사람들은 따뜻한 난로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세아는 지훈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고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 “질기기도 해라, 기어코 살아 돌아왔네.” “난 처음부터 저 사람이 탐사대 들어올 때 알아봤어.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세아는 지훈의 다리에 난 가벼운 찰과상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대원들 앞에서 누구도 문을 열어주지 못하게 했다. 손가락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고 다리도 얼어붙어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멈추지 않고 구조를 요청했다. 마침내...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든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지훈이 나를 보며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들어오고 싶으면, 무릎 꿇고 사과부터 해.” “어머, 그렇게 쉽게 용서해주면 너무 무르잖아.” 세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훈과 장난을 쳤다. 밖에서 내가 울부짖는 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훈이 그녀의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경쾌하게 말했다. “괜찮아, 난 상관없어. 어쨌든 아이 아빠고 당신 남편이잖아.” “난 탓하지 않아. 내가 나쁜 놈이지. 그때 내가 유학만 안 갔어도 당신이 이런 사람이랑...” 뒷말은 잇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에는 깊은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세상에 내 자리는 없었다. 가슴이 뒤틀리듯 아파왔다. 이미 겪었던 일인데도, 참을 수 없이 비참했다.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순간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후원금으로 겨우 자라난 내게, 대학 시절 만난 오세아는 빛이었다. 첫눈에 반했지만 그녀 곁엔 늘 강지훈이 있었다. 그 마음을 영원히 묻어두려던 어느 날, 세아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정우 씨, 우리 사귈래요?” 인생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운명이라는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간이라도 빼줄 듯 잘해줬다. 그녀의 꿈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녀가 극지 탐사를 가고 싶어 하면 내가 집안일을 도맡았고, 그녀가 임신하자 직장까지 휴직하고 이곳까지 따라왔다. 세아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새 생명을 기다리던 그 순간들이 내 생애 가장 큰 축복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나는 지독하게 멍청했고, 모든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안에서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문 하나가 두 세계를 갈라놓았다. 내가 무릎을 꿇었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가슴에 박혔다. “당신이랑 오기로 사귀지 않았으면, 내가 왜 송정우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겠어.” “세아 알잖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는 거. 그때 유학만 안 갔어도 우린...” 세아의 복부 위에 얹힌 지훈의 손이 다정했다. 온몸에 눈이 쌓여가는 와중에 나는 세아의 그 낯선 다정함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둘이 잘해보지 그래? 어차피 그 배 속의 아이도 강지훈의 아이인데. 3. 어디서 죽든 상관없지만, 적어도 기지 문 앞은 아니어야 했다. 마지막 남은 숨을 몰아쉬며 겨우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받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났지만, 마지막 몇 발자국은 기어서 들어가야 했다. 내 꼴을 본 세아는 더욱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만해, 송정우. 그 구역질 나는 피해자 코스프레 좀 치워.”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온기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옷에 묻은 눈이 녹아 바닥을 적셨다. “더러워 죽겠네. 다 닦아놔.” 추위에 몸이 떨려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왼손 손가락 몇 개는 여전히 감각이 없었다. 세아는 지훈의 찰과상이 걱정되어 기지 의사에게 그를 봐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내가 의사를 찾아가려 하자, 그녀는 문을 막아서며 한 발자국도 못 지나가게 했다. “뭐 하려는 거야? 여긴 얼씬도 마!” “의사 선생님 바쁘신데 당신 같은 사소한 일로 귀찮게 하지 마. 지훈이 근처에 오지도 말고 꺼져!” 그녀는 나를 몰아세우며 방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옷을 갈아입었지만 손가락은 여전히 변색된 채 죽어 있었다. 나는 겁이 나 그녀를 밀치고 지나가려 했다. “의사 선생님 얼굴만 좀 볼게. 나 지금...” '찰싹!' 말이 끝나기도 전에 뺨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세아는 눈을 부라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대원들의 야유 섞인 웃음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연극 좀 그만해. 크레바스에서도 기어 올라오고 여기까지 걸어온 주제에 무슨 일이 있겠어? 당신은 명줄이 길어서 괜찮아. 지훈이는 다르다고!” “내일 가봐. 오늘 밤은 의료실 근처에 오기만 해봐, 가만 안 둘 테니까!” 뺨이 화끈거렸다.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다른 대원들이 나를 방으로 떠밀었다. “됐으니까 들어가서 잠이나 자!” “자기 마누라가 임신했는데 손찌검이라도 하려고? 내일 가, 내일.” “우리 세아 씨가 말하면 좀 듣지, 찌질하게 왜 저래?” 강지훈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대원들의 욕설이 들리자 그는 입 모양으로 내게 속삭였다. '병신.' ... 방으로 쫓겨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메시지로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세아가 지훈의 품에 안겨 달게 잠든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덜미엔 붉은 자국이 선명했고 입술 끝은 살짝 터져 있었다. 지훈이 의도적으로 찍어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질투가 아니라 의사였다. 기지의 유일한 의사는 세아의 명령에 따라 지훈을 '간호'하느라 바빴다. 그녀는 밤새 의료실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감시했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손가락... 이미 동상으로 괴사가 진행됐네요.” “기지 장비로는 한계가 있어요. 당장 민간 병원으로 이송해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예상했지만, 직접 듣고 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극지에서 병원까지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만, 지금은 다른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장애인이 될 수는 없었다. 손을 지켜야 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본부에 구조 요청을 보냈고, 답신이 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에서 헬기를 보내준다고 했다. 제시간에 치료만 받는다면... 하루 종일 방에서 버티다 헬기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두 사람이 헬기 앞에 서 있었다. “우리가 환자예요! 지훈이가 다쳐서 병원에 가야 해요. 나도 보호자로 갈 거고요!” 나를 본 세아는 싸늘한 표정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헬기에 올라타려 했다. “한 번에 두 명밖에 못 탄대. 나 산부인과 검진도 받아야 하니까.” “정우 씨, 당신은 다음 헬기 타.” 다음 헬기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크레바스에 버려졌을 때보다 더 시린 한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결연한 세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세아, 나 더 지체하면 안 돼. 내 손이...” “시끄러워, 빨리 출발해요!” 지훈은 세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마스크 너머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자처럼 내게 손을 흔들며 조종사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굉음이 고막을 울렸다. 이륙 직전, 세아는 나를 보며 진저리 난다는 듯 뱉었다. “그만 좀 해. 역겨우니까.” 4. 반복되는 거절 속에서 내 안의 무언가가 타올랐다. 다른 대원들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나는 자료와 짐을 챙겨 다시 본부에 연락했다. 마침내 두 번째 구조 헬기가 도착했다. 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드러내자 의사가 숨을 들이켰다. “검사부터 합시다.” 기지에서 받은 응급처치는 너무나 미비했다. 가장 심각한 손가락 세 개는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피부와 근육, 신경까지 손상된 4도 동상. 의사는 절단을 권고했다. “조직 괴사가 심각해서 감염 위험이 큽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절단 수술을 해야 합니다.” “유감입니다만...” 예상했던 결과였음에도 막상 그 말을 듣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한참 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해 주세요.” 지난 생에서 세아는 내가 지훈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잘된 일이다. 적어도 이번 생엔 지훈의 목숨도, 내 목숨도 살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수술 동의서에 사인을 하는데,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건 멈출 수 없었다. 오세아를 사랑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전혀 가치가 없는 일이었다. 멍하니 있는데 옆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의사는 괜찮다고만 하니, 정말 직업윤리라고는 없네요.” “지훈 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예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가만 안 둘 줄 알아요.” 세아와 지훈이었다. 그들도 이 병원에 있었던 모양이다. 지훈은 고작 찰과상일 뿐인데 세아는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다. 소란을 피우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군중 속의 나를 발견했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송정우, 당신이 설명 좀 해봐! 왜 지훈이보다 저 사람들이 먼저 치료받아야 해? 지훈이가 최우선이어야 하잖아!” 옆에서 피를 흘리며 실려 가는 환자와 멀쩡히 서 있는 지훈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더 급한지는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 “화내지 마. 당신 임신 중인데 태교에도 안 좋아...” 위로하려던 말이었지만, 세아는 내 얼굴에 검사 결과지를 집어 던졌다. “알면 좀 도와야 할 거 아냐! 지훈이가 누구 때문에 다쳤는데!” “당신 때문에 지훈이도 다치고, 나도 놀라서 하복부 통증까지 생겼잖아!” 분노의 화살이 내게로 향하는 것을 보며, 내 마음속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실낱같은 애정이 완전히 휘발되어 사라졌다. 그녀는 지훈의 입원을 요구했고, 본인도 안정이 필요하다며 나보고 수발을 들라고 했다. 의사가 내 상태를 말하려 했지만 내가 제지했다. 어차피 나도 이 병원에 있어야 하니까. 모레, 나는 손가락을 자르는 수술을 받는다. 세아는 지훈의 바로 옆 VIP실을 요구했다. 수시로 그를 '간호'하기 위해서였다. 매일 그 '가련한 연인들'을 지켜보면서도 내 마음엔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나는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 수술이 끝나면 탐사대를 탈퇴하고 그녀와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 감정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세아는 오직 지훈에게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내 방에 있던 연구 논문을 발견했다. 훑어보던 그녀는 펜을 들어 내 논문 위에 무작위로 줄을 긋기 시작했다. “이 연구 보고서, 당신 혼자 성과로 올리면 안 되지. 지훈이가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까, 지훈이 이름을 공동 저자로 올려!” 그녀는 제멋대로 지훈의 이름을 적어 넣더니, 뒷장을 넘길수록 표정을 구겼다. “이 좌표들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당신은 그냥 기상 관측 요원이잖아. 지훈이는 빙하 두께랑 지층 전문가라고. 당신 의견은 전혀 근거가 없어!” 그녀는 논문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이겼다. 경멸 어린 시선이 내게 꽂혔다. “관둬. 당신이 쓰는 게 다 쓰레기지 뭐.” “지훈이는 내일 탐사대로 복귀할 거야. 당신이 표시한 그 지점들부터 조사할 거니까 두고 봐.” “그가 당신의 이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낼 거야.” “당신이 무능하다는 걸 말이지.” 나는 번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지훈이 가려는 그곳이 어디인지 듣고 말리려 했지만, 그녀의 비웃음만 샀을 뿐이다. 결국 나는 그녀가 지훈을 배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창밖으로 지훈이 세아를 껴안으며 내게 도발적인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등 뒤에서 의료진이 문을 두드렸다. “송정우 님, 수술 준비하겠습니다.” “네.” 떠나기 전,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