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을 오빠에게 바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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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오빠에게 바친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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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그 끔찍했던 장기 기증 수술이 끝나고 얼음처럼 차가운 병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나는 의도치 않게 입양된 여동생 서윤과 그녀의 절친한 의사 ...

Chương (1)

第1章

5년 전, 그 끔찍했던 장기 기증 수술이 끝나고 얼음처럼 차가운 병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나는 의도치 않게 입양된 여동생 서윤과 그녀의 절친한 의사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독을 바른 비수처럼 날아와, 지난 5년간 내가 쌓아온 모든 신뢰를 잔인하게 찔러 죽였다. 서윤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준혁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다고. 그녀의 친구는 기가 찬 듯 몰아붙였다. 고작 모준혁의 뒷바라지를 하겠다고 제 손으로 강 씨 집안을 무너뜨리고, 양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것도 모자라 내게 네 번이나 기증 수술을 받게 했느냐고. 오직 내 타고난 고결한 '운명'을 모준혁에게 갈아 끼우기 위해서.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진실한 사랑이라 믿었던 서윤의 헌신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기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5년 전, 내 인생은 결혼식 당일 처참하게 붕괴했다. 국내 굴지의 자산가였던 부모님은 갑작스러운 파산 선고를 받았고, 내가 보는 앞에서 고층 빌딩 아래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그 광경을 본 약혼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파혼을 선언하더니, 곧바로 신흥 재벌의 아들인 모준혁에게 달려가 안겼다. 절망의 끝에서 나를 잡아준 건 입양된 동생 서윤이었다. 그녀는 내게 청혼하며 함께 가문을 일으키자고 했다. 그때의 나는 눈물겹게 감동하며,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을 찾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그 빛은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도깨비불이었음을. 1 병실 안, 인공호흡기의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방금 수술대에서 내려온 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침대 머리맡의 대화를 들었다. 서윤의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 오빠랑은 같은 보육원 출신이야. 예전에 약속했어. 어디에 있든 서로의 앞길을 편하게 만들어주기로.” “게다가 강진우는 어릴 때부터 가질 만큼 가졌잖아. 준혁 오빠한테 그 좋은 팔자 좀 나눠주는 게 뭐 어때서?” 하지만 그녀의 친구 지수는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날을 세웠다. “모준혁이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강 씨 그룹을 공중분해 시키고, 권력이 필요하다니까 진우 씨 약혼녀를 꼬드기게 방치했어. 이제는 진우 씨 몸을 축내가며 5년 동안 네 번이나 수술하게 해서 모준혁 건강을 챙겨줘?” “서윤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설마 마지막엔 강진우 목숨까지 빌려줄 셈이야?” “준혁이는 가질 거 다 가졌잖아. 이제 그만 손 떼고 진우 씨랑 평범하게 살면 안 돼?” 지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윤이 날카롭게 반박했다. “안 돼. 준혁 오빠랑 강진우의 명이 같아야만 운명을 옮겨올 수 있단 말이야. 내가 여기서 멈췄다가 준혁 오빠가 잘못되면 어떡해?” 지수는 친구의 집착에 질렸다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강 씨 집안도, 강진우도 너한테 빚진 거 하나 없어! 진우 씨가 부모님 자살하는 거 보면서 피눈물 흘리는 거 네가 옆에서 다 봤잖아. 빚 갚으려고 비굴하게 남들 발밑을 기면서도, 너한테는 털끝만큼의 피해도 안 주려고 애지중지했어. 그런데 넌, '건강을 위해 기증 한 번만 더 해달라'는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었지.” “서윤아, 그 사람도 사람이야.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처음엔 피, 그다음엔 골수, 세 번째는 신장…. 그런데 이번엔 심장 검사 보고서를 만들게 해? 모준혁한테 심장까지 주려고? 너 정말 강진우를 생각하긴 하니?” “진우 씨가 나중에 전부 다 알게 돼서 너랑 모준혁한테 복수하면 어쩌려고 그래?” “전부 내가 한 짓이야. 준혁 오빠랑은 상관없어!” 서윤이 악에 받친 듯 내뱉었다. “내 남은 인생을 걸고 저 인간이랑 결혼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준혁 오빠의 액받이가 되게 하려는 거였어!” “그리고 팔자만 바꾸는 거지, 정말 죽는 건 아니잖아? 수술만 끝나면 저 사람도 괜찮아질 거야.” “……설사 정말 잘못된다 해도, 준혁 오빠한테 복수만 안 한다면 내 목숨을 대신 내놓을 수도 있어.” 병실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잠시 후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나간 뒤, 마취 기운 때문에 잠들어 있어야 할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참 우스운 일이다. 내가 겪은 이 모든 고통이, 단지 내 팔자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니. 모준혁에게 몇 번이고 명줄을 대줄 수 있을 만큼 과분하게 좋아서. 집안이 파산했을 때 이상하리만큼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누군가 뒤에서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윤이 함께 가문을 지탱하자고 말해준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회사가 경영 부주의로 넘어갔다는 말도, 부모님이 빚더미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말도, 그녀가 내게 요구한 반복적인 기증이 우리 가족의 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나는 전부 믿었다. 오히려 내 팔자가 사나워 부모님을 죽게 했다고 자책하며 살았다. 수술 후 깨어날 때마다 텅 빈 병실에서 느꼈던 그 지독한 고독조차, 내 업보라 여겼다. 정말 가증스럽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은, 서윤이 제 인생을 희생해서라도 나를 감시하고 모준혁의 소모품으로 쓰기 위해 쳐놓은 거미줄이었다.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했다. 울컥, 입안 가득 비릿한 피가 쏟아졌다. 피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고, 생명 유지 장치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려댔다. “환자 보호자 어디 있습니까? 거부 반응이 너무 심해요! 빨리 와서 서명하세요!” “진우 씨!” 2 “다행이야, 드디어 깨어났어.” 다시 눈을 떴을 땐, 또다시 익숙한 병실이었다. 침대 곁의 서윤은 눈시울을 붉히며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내 손을 꽉 쥐었다. “진우 씨, 왜 이렇게 심한 거부 반응이 온 거야? 정말 당신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이제 이런 수술 다시는 하지 말자, 응? 우리가 할 만큼 했어. 앞으론 평안하게 지내자.” 그녀는 내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나를 소중히 여기는 척했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 마치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들었던 대화가 지독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깨어나면 여전히 서윤은 나의 다정한 아내이자, 유일한 혈육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모습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겠지만, 지금은 그저 텅 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부터 네 번의 기증 수술까지…. 서윤아,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이 계속 사라져 가고 있어. 이제 나도 버틸 힘이 없어.” 그러니 제발 나를 놓아달라고, 자유롭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제 내 몸엔 모준혁에게 내줄 팔자도, 목숨 말고는 남은 게 없으니까. 하지만 서윤은 침묵 속에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게 다 운명이야. 당신 팔자가 잠시 사나워진 것뿐이야. 당신마저 무너지면 난 어떡해?” “걱정 마. 당신 절대 죽게 안 둬. 내 곁에서 아주 오래오래 살게 할 거야.” 결국, 죽는 순간까지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가 모준혁에게 바치겠다는 뜻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서윤의 애틋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리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웃었다. “내 팔자가 박복해도, 당신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서윤은 내 말에 멈칫하더니, 기쁜 듯 내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 순간, 그녀의 주머니에서 특별한 벨 소리가 울렸다. 액정에는 '오빠'라는 두 글자가 떠 있었다. 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내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고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간 사이, 나는 미리 챙겨둔 수면제를 우유 컵에 밀어 넣었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가 미안함 섞인 얼굴을 할 때, 나는 다정하게 달래며 그 우유를 마시게 했다. 서윤이 깊은 잠에 빠지자마자, 나는 그녀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는 모준혁의 생일이었다. 잠금이 풀리자마자 모준혁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서윤아, 네 덕분에 살았어. 이제 몸이 정말 가벼워진 게 느껴져.] [내일 내 생일인데, 진우 씨랑 같이 와서 내 새로운 인생을 축하해주지 않을래?] 3 [진우 씨가 내키지 않아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난 그저 당신들한테 내 좋은 기운을 나눠주고 싶어서 그래.] 망설임 없이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서윤의 대화창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볼 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스크랩함을 열었다. 그곳엔 모준혁을 향한 서윤의 뒤틀린 사랑이 담긴 일기 캡처본들이 가득했다. [오늘 준혁 오빠가 울면서 말했다. 내가 입양되면 더는 오빠의 동생이 아닐까 봐 겁난다고. 그럴 리가. 오빠는 내 유일한 오빠야. 내가 약속했으니까.] [준혁 오빠가 우리 집보다 가난하다고 자격지심을 느낀다. 용한 무당을 찾아갔더니 강진우의 명을 빌려오면 된다고 한다.] [준혁 오빠가 강진우의 약혼녀를 좋아하게 됐다. 다른 여자를 보고 웃는 오빠를 보니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다. 하지만 그 여자를 죽일 순 없다. 오빠가 슬퍼할 테니까.] [오늘 강진우와 결혼했다. 하객석에서 나를 보는 준혁 오빠를 보니, 저 자리에 서 있는 게 오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강진우를 오빠라고 생각하며 이 연극을 계속하는 수밖에.]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나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화면을 내렸다. 그녀는 매년 모준혁의 생일마다 최신형 명품 시계를 선물했고, 사람이 많은 비행기를 싫어하는 그를 위해 개인 전용기까지 사주었다. 그 모든 돈은 우리 집이 망하기 전, 가문의 금고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녀는 모준혁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고, 내게는 끝없는 고통만을 남겼다. 심지어 우리 집이 파산한 뒤, 내가 밤낮없이 피땀 흘려 다시 세운 회사의 지분 절반을 그에게 넘겼다. 회사의 지분으로 모준혁의 커리어를 뒷받침하면서, 정작 회사를 키운 나는 집에 가두어 둔 채 반복되는 수술의 고통 속에 방치했다. 눈물을 참고 끝까지 읽어 내려가자, 가장 초창기에 작성된 주식 양도 계약서가 나타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였다. 부모님의 마지막 길을 편히 모시라며 나를 안심시키던 그날, 그녀는 몰래 가문의 남은 지분과 고객 정보, 인맥을 통째로 모준혁에게 넘겼다. 내가 부모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모준혁은 내 집안의 피를 빨아먹으며 새로운 재벌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의 자비로 거두어준 새끼 늑대가 이토록 잔인한 배신자가 될 줄이야. 우리 집에 발을 들인 15년 전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이토록 철저하게 본심을 숨길 수 있었을까. 서윤, 너는 정말 모준혁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구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증거들을 내 휴대폰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곧바로 변호사 출신의 친구에게 연락했다. 그는 지금 강원도 깊은 산 속 사찰에서 은둔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운명을 뺏기는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물었다. “이틀 뒤에 그리로 갈게.” “그리고 이혼 서류도 좀 준비해줘.”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고, 곁에서 잠든 서윤을 바라보았다. 이틀만 지나면, 이 저주 같은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4 다음 날, 서윤은 이른 아침부터 정성스러운 식사를 준비하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내가 보약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자, 그녀가 생글거리며 다가와 내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병원에만 있으니까 답답하지? 차라리 퇴원해서 주치의를 집으로 부르는 게 당신 기분 전환에도 좋을 거야.”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당신한테 쓸 돈은 충분해.” “진우 씨, 우리가 예전처럼 화려하게 살 순 없어도 당신이랑 나, 둘만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부부잖아.” 그럴까? 나는 고개를 돌려 서윤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가식으로 점철된 얼굴. 어제 그 메시지들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그녀가 나를 위해 집으로 데려가려는 줄 믿었을 것이다. 모준혁의 생일 파티에 나를 끌고 가서 그의 '좋은 기운'이나 나눠 받게 하려는 속셈인 줄도 모르고. 애초에 서윤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집은 망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내 모든 것을 빼앗길 때, 그녀는 모준혁의 새로운 탄생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 모든 사실이 역겨울 정도로 황당했다. 내가 계속 침묵하자, 서윤은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 “진우 씨, 사실 준혁 오빠 생일이거든. 우리를 초대했어.” “예전에 오빠가 당신 약혼녀를 데려간 건 미안한 일이지만, 벌써 몇 년이나 지났잖아. 지금은 내가 당신 옆에 있고…. 그리고 지금 우리 회사 사정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모준혁 쪽이랑 잘 지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뻔히 보였다. 구태여 입씨름하기 싫어 말을 끊었다.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할게.” 그제야 서윤은 병실 밖에서 대기하던 메이크업 팀을 불러들였다. 그녀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우 씨, 고마워. 역시 당신뿐이야.” 5 준혁의 장모가 될 한 여사는 권력은 있지만 실속은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내가 재벌가 아들이었을 때 우리 집과 사돈을 맺으려 했던 것도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오직 돈뿐이다. 연회장 중앙, 수많은 하객에게 둘러싸인 모준혁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몸에 딱 맞는 수트 차림에 여유로운 미소. 예전부터 나를 못마땅해하던 한 여사도 그를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고만장한 모습이었다. 모준혁이 먼저 우리 부부를 발견하고 한 여사에게 소개했다. “어머님, 저만 챙기지 마시고 저기 강진우 씨도 보셔야죠. 인사 나누세요. 예전 같았으면 어머님이라고 불렀을 사람인데.” 모준혁의 말에 한 여사는 웃음기를 거두고 군중 너머로 나를 멸시하듯 쳐다봤다. 초라한 내 옷차림을 보더니 파산한 집안의 떨거지를 보듯 표정을 굳혔다. 예전에 우리 집이 잘나갈 땐 내 앞에서 설설 기던 사람이었다. 이제 권력을 쥔 모준혁을 사위로 맞이하게 되자, 나를 짓밟지 못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저런 게 감히 누굴 어머님이라 불러? 준혁 서방이 우리 딸이랑 결혼 안 했으면, 저 부모 잡아먹은 살 낀 놈 때문에 나까지 제명에 못 죽었을 거야.” “그나저나 초대장도 없는 놈을 누가 들여보낸 거야? 사위 생일잔치에 거지꼴을 하고 와서 물을 흐려? 부모가 없으니 가정교육이 이 모양이지. 예전엔 꽤 반듯하더니, 이젠 염치까지 갖다 버렸나?” 그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그 잘나가던 강 씨 그룹 아들이야? 꼴 좀 봐, 정말 처량하네.” “말도 마요. 우리 회사 빚 갚겠다고 남편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던 사람이야.”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농담거리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파혼당하던 그날의 수치심이 되살아났다. 모든 이가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진창에서 구해준 유일한 구원자라 믿었던 여자는 내 수치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눈은 오직 모준혁의 표정 하나하나를 쫓느라 바빴다. 모준혁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서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서윤아, 오랜만이야. 와줘서 고마워.” 서윤은 준비해온 선물들을 줄줄이 들여보냈다. 강남의 펜트하우스부터 명품 액세서리, 심지어 갓 퇴원한 모준혁을 위해 최고급 간병인 팀까지 붙여주었다. 그 수많은 선물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맨 위에 놓인 '지분 양도 계약서'였다. 하객들의 눈이 뒤집힐 만한 액수였다. 한 여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모준혁은 서윤을 친근하게 한 여사에게 소개했다. “장모님, 이쪽은 제 보육원 동생 서윤이에요. 지금 강 씨 그룹을 이끌고 있는 실력자죠.” 그러다 구석에 말없이 서 있는 나를 보더니, 서윤을 향해 가식적인 걱정을 내비쳤다. “서윤아, 아무래도 이 선물들은 다시 가져가는 게 좋겠어. 이렇게 과한 걸 주면 진우 씨가 화내지 않겠어?” 6 모준혁이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기 전까지, 서윤은 내가 옆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오늘 내가 입은 옷과 구두는 전부 서윤이 골라준 것이었다. 모준혁에게 준 명품 시계의 백 분의 일도 안 되는 저렴한 브랜드였다. 주변 하객들의 보석과 비교해도 한참 뒤떨어지는 수준.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며 태연하게 와인을 들이켰다. 내가 당당하면 무시당할 이유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은 내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드물게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진우 씨, 난 그저 준혁 오빠를 친오빠처럼 생각해서 챙겨준 것뿐이야. 당신이 좀 너그럽게 이해해 줘.” 친오빠처럼 생각했다면서, 나와는 법적 남매였음에도 결혼까지 했나? 서윤아, 네 변명은 정말이지 역겹기 짝이 없구나. 내가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자, 서윤은 당황한 듯 말을 덧붙이려 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비명에 가로막혔다. 고개를 돌리니 모준혁이 실수인 척 와인을 서윤의 드레스에 쏟아버린 뒤였다. “아, 어쩌지? 서윤아, 정말 미안해…. 나랑 같이 올라가서 좀 닦자.” “어차피 우린 남매 같은 사이고, 네가 귀한 선물까지 줬는데 내가 대접해야지.” 모준혁은 보란 듯이 서윤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홀로 남아 하객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받아내야 했다.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정말 낯짝도 두껍지. 부모 잡아먹고 집안 말아먹은 놈이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와서 재수를 옴 붙게 해?” 가시 돋친 말들에 참다못해 받아치려는데, 옆에서 구경하던 한 여사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진우 씨, 웬만하면 참는 게 좋을 거야. 젊은 혈기 부릴 때가 아니잖아.” “결국 강 씨 그룹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7 그 비릿한 협박 한마디에 나는 주먹을 풀 수밖에 없었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하객들에게 술을 권했다. 회사가 망해가는 판국에, 이름뿐인 강 씨 그룹의 간판이라도 지키려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자존심 따위는 이미 수년 전 수술대 위에서 다 갈려 나갔으니까. 몇몇의 조롱을 견뎌내고 술잔을 든 채 바람이나 쐬러 테라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모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아, 너도 봤지? 한 씨 집안 사람들도 네 체면 봐서 나를 대접해주는 거야.” “수술하고 몸은 건강해졌는데, 마음은 더 괴로워. 너랑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 같아서.” “서윤아, 나 너무 춥고 힘들어. 옛날처럼 한 번만 안아주면 안 돼?” 모준혁은 굴욕을 참는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윤은 거절하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서윤의 나직한 맹세가 들려왔다. “오빠, 걱정 마. 오빠 몸은 내가 반드시 낫게 해줄 거야….” “오빠 마음도….” 창문에 기대어 선 서윤은 나를 등지고 있었고, 모준혁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나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소리 없는 도발이었다. '봤지? 내가 원하면 네 모든 건 내 거야.' 테라스 문을 열려던 내 손이 멈췄다. 모준혁이 서윤이 제 운명을 뺏어다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들고 있던 와인을 한 입에 털어 넣고 거칠게 문을 열었다. 경악하는 모준혁의 눈앞에서, 나는 5년 동안 사랑했던 이 여자를 향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강서윤, 오빠라고 부르는 놈들하고는 전부 자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진우 씨, 취했어? 준혁 오빠랑은 어릴 때부터 각별한 사이잖아. 포옹 좀 한 게 뭐가 어때서 그래!” 서윤은 반사적으로 모준혁을 제 뒤로 숨기며 나를 쏘아붙였다. 마치 방해한 내가 죄인이라는 듯한 기세였다.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강서윤, 너랑 결혼한 지 7년이야. 네가 우리 집 양딸로 들어온 순간부터 치면 20년이라고!” “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네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난 이제 다 알아.” “너도 이제 그만 꿈 깨야지.” 그녀가 내 말을 들을 리 없다는 걸 안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지난 5년, 무너진 가문과 부모의 죽음 앞에서 나는 고통 속에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해왔다. 하지만 이제 더는 피하지 않겠다. 피 칠갑이 된 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생각이다. 질문을 던지려다, 모준혁을 보호하려는 서윤의 필사적인 몸짓을 보니 모든 게 덧없게 느껴졌다. “서윤아, 여기까지 다 봤으니 이제 이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