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은 500원짜리 수도 고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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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은 500원짜리 수도 고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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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벽지가 누렇게 뜬 낡은 자취방에서 중병에 걸린 할머니를 수발하며 살았다. 매일 할머니의 끼니와 대소변을 챙겼고, ...

Chương (1)

第1章

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벽지가 누렇게 뜬 낡은 자취방에서 중병에 걸린 할머니를 수발하며 살았다. 매일 할머니의 끼니와 대소변을 챙겼고, 매달 잊지 않고 수도요금을 납부했다. 할머니는 돋보기를 고쳐 쓰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시곤 했다. “우리 서윤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우리 강아지.”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마주한 유언장은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공증인은 내게 5,000원짜리 수도요금 미납 고지서 한 장을 내밀었고, 남동생에게는 10억 원이 든 통장을 건넸다. “유언장은 사흘 뒤에 정식으로 효력이 발생합니다. 그전까지는 통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공증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동생 현준은 통장을 낚아챘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고지서를 뺏어 들더니 배를 잡고 웃어댔다. “누나, 할머니는 죽어서도 누나한테 물값이나 내라고 하시네!” 그가 비아냥거리며 덧붙였다. “정 돈 없으면 나한테 빌어봐. 이 5,000원 정도는 내가 내줄 수도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엄마가 현준의 어깨를 툭 쳤지만, 입가에 번지는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얘, 이건 네 누나가 할머니한테 효도할 마지막 기회야. 방해하지 마라.” 아빠 역시 현준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내 몸 위로 고지서를 툭 던졌다. “할머니 마지막 유언이라지 않냐. 잊지 말고 가서 내라.” 고지서 위에 적힌, 지난 5년간 수천 번도 더 봐서 외워버린 고객번호를 내려다보자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5년 내내 할머니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았던 남동생은 할머니의 평생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착한 아이’였던 나는 고작 5,000원짜리 미납 고지서 한 장을 받았다. 현준은 사흘 뒤 유산을 받으면 살 고급 빌라를 고르느라 들떠 있었고, 부모님은 그런 아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 화목한 세 식구의 풍경 뒤로, 나는 철저히 혼자 버려져 있었다. … “여보세요? 부동산이죠? 제가 빌라를 좀 사려고 하는데, 내일 당장 집 좀 보러 갑시다!” 현준은 보란 듯이 자취방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온 복도에 목소리가 울리게 통화를 했다. “안방은 두 개면 돼요. 우리 부모님 드릴 거 하나, 내 거 하나. 남는 방은 전부 게임 룸으로 개조할 겁니다!” 침을 튀겨가며 세 식구의 찬란한 미래를 설계하던 현준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뒤에 서 있던 나를 힐끗 보았다. 얼굴에는 가식적인 미안함이 가득했다. “아차, 누나! 내 정신 좀 봐. 부모님이랑 내 생각만 하느라 누나 방 만드는 걸 깜빡했네?” “그래도 걱정 마. 몇십 평짜리 대저택인데 누워 잘 곳이 없겠어?” “나중에 놀러 오면 거실 구석에 텐트나 하나 쳐줄게. 거기서 자면 돼.” 기세등등한 현준의 모습에 나는 차가운 실소를 흘렸다. 엄마가 다가와 내 어깨를 대충 토닥이며 상황을 수습하려 들었다. “서윤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할머니가 너한테 수도요금을 내라고 하신 건 네가 그만큼 세심하고 착해서 그러신 거야.” “너에 대한 할머니의 깊은 뜻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 세심하고 착하다. 5년 전, 엄마는 바로 그 두 단어를 써가며 눈물로 나를 속였다. 대학을 휴학하고 돌아와 할머니를 모시게 만든 것도 그 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엄마는 다시 그 단어들을 방패 삼아 남동생과 다투지 말라며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내 앞길을 희생하며 버틴 결과가 왜 고작 이런 굴욕이어야 할까. 나는 손에 쥔 고지서를 꽉 쥐었다. 한마디 쏘아붙이려 입을 떼려는 찰나, 아빠가 엄마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뭐 하러 길게 해?” “현준이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독자야.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을 손주한테 물려주는 건 천지개피할 일이지!” 그러더니 아빠는 적선이라도 하듯 지갑에서 5,000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거칠게 쑤셔 넣었다. “자, 이 수도요금 5,000원. 이 애비가 대신 내주마.” “지난 몇 년간 할머니 모시느라 고생한 값이라고 생각해.” 꼬박 5년이었다. 스물둘에서 스물일곱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해야 했을 5년의 세월이 아빠의 눈에는 고작 5,000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 망연자실하게 돈을 내려다보는 내 모습에 아빠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왜, 적어서 그러냐?” “송서윤, 오늘 이 애비가 인생의 진리 하나 가르쳐주마.” “사람은 제 분수를 알고 살아야 하는 법이야!” 엄마가 상징적으로 아빠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됐어요, 서윤이도 마음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좀 내버려 둬요.” 아빠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머니는 이름난 환경학자셨어. 머리도 명석하고 사람 보는 눈도 정확하셨지!” “왜 저 계집애한테 고지서 따위를 남기셨겠어? 제 신분을 똑똑히 알고 쓸데없는 욕심 품지 말라는 뜻 아니겠냐!” 화가 덜 풀린 아빠를 엄마가 끌고 나갔다. 현준은 휘파람을 불며 내 곁을 지나갔다. “누나, 5년 동안 할머니 옆에서 뙤약볕 쬐며 연구 도와드리면 뭐 해? 결국 할머니가 제일 아끼는 건 이 몸인데.” 현준이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좁은 자취방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방 안에는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한약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 마음처럼, 지독하게 썼다. 나는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할머니가 생전에 애지중지하시던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액정 화면에는 카운트다운이 표시되어 있었다. [03:00:00] – 정확히 사흘. 타이머는 낡아서 케이스 곳곳이 갈라져 있었다. 예전에 새것으로 바꿔드리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셨다. “오래된 물건은 오래된 친구 같아서 버리기가 아깝구나.” 할머니는 어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기 직전까지도 떨리는 손으로 이 타이머를 맞추고 계셨다. 사흘. 유언장이 정식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경고하려고 하셨던 걸까? 하지만 유언장에 이미 모든 것이 명확히 적혀 있는데, 굳이 이런 수고를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할머니는 평생을 환경 연구에 바치셨다. 연세가 드셔서도 산에 올라가 샘플을 채집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살아있는 동안 발아래 땅을 더 밟아보고, 이 세상의 온기를 느끼고 싶다 하셨다. 제자들이 돕겠다고 해도 한사코 거절하시던 분이었다. 그러다 5년 전, 할머니는 산기슭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의사는 상태가 위중하니 누군가 곁에서 상시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타지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 건 그 무렵이었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통곡을 했다. “서윤아, 할머니가 너무 편찮으셔… 곁에 아무도 없는데 어떡하니.” “네가 장손녀인데 모른 척하면 안 되잖니!” 당시 나는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지도 교수님은 내 졸업 논문만 통과되면 학교에 연구직으로 남겨주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엄마의 울음소리에 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엄마, 일단 현준이가 한 달만 좀 맡아주면 안 될까? 나 졸업 심사만 끝나면 바로 내려갈게.” 현준은 나보다 고작 반 살 어린 연년생이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는 더욱 서럽게 울부짖었다. “현준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 아빠랑 내가 지금 중환자실 앞에서 교대로 밤을 새우고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곧이어 아빠의 고함이 들려왔다. “네 동생이 죽다 살아났는데 그런 소리가 나와? 너는 동생 죽이고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냐!”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 날 아침 바로 휴학계를 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와 알게 된 사실은 참담했다. 현준의 사고는 부모님이 꾸며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서 나는 영원히 희생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퇴원한 할머니는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고집스럽게 산에 올라 샘플을 채취하려 하셨다. 집에서 쉬시라고 만류했지만,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서윤아, 곧 세상이 뒤집어질 거다. 할머니는 단 1분 1초라도 아껴서 연구해야 해. 안 그러면… 너무 늦어버려.” 노학자의 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매일 새벽마다 할머니를 부축해 산을 올랐다. 할머니는 기력이 없어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셨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할머니의 체중을 내 몸으로 받아내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가파른 산길에서 할머니가 발을 헛디딜 때면 내 몸을 던져 할머니를 감쌌다. 할머니를 지키려다 구르고 넘어진 탓에 내 몸은 흉터와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뙤약볕 아래서 보낸 5년. 백옥 같던 내 피부는 검게 그을리고 거칠어졌다. 한번은 시내에 나갔다가 대학 동기였던 민주를 만났다. 민주는 1분 가까이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서윤아? 송서윤 맞아? 너 그동안 아프리카 광산이라도 다녀온 거야?!”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사실 거울을 보는 것조차 두려운 내 몰골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민주는 안쓰러운 듯 내 손을 잡았다. “서윤아, 그때 교수님이 너를 제일 아끼셨잖아. 네가 갑자기 휴학만 안 했어도 그 연구직 자리는 네 거였을 텐데…” 그녀의 말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내 심장을 후볐다. 나는 대충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원래 부모님은 내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하라고 강요했었다. 현준의 장가 밑천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졸음을 쫓으려 컴퍼스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하루에 4시간만 자고 공부했다. 결국 수능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전액 장학금을 따내고 대학에 갔다. 지긋지긋한 원가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기적인 거짓말은 내 꿈을 산산조각 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산을 오르다 겪은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갑작스러운 산사태였다.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와 돌덩이 속에서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할머니를 품에 안았다. 커다란 돌덩이가 내 오른쪽 팔을 강타했고,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가 났다. 응급실에서 피범벅이 된 나를 보며 할머니는 다급하게 부모님께 전화를 거셨다. “서윤이가 크게 다쳤다! 어서 시립병원으로 와라!” 하지만 부모님은 이번엔 핑계조차 대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나를 보며 가슴 아파하는 할머니의 눈빛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상처를 꿰매는 동안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날 밤, SNS에 올라온 동기들의 졸업식 사진을 보며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매달렸다. “엄마… 나 복학하고 싶어. 현준이가 당분간만이라도 할머니 좀 봐주면 안 될까?” 엄마는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네 남동생 요즘 사업 준비하느라 얼마나 바쁜데! 누나라는 게 이 중요한 시기에 동생 발목을 잡아서야 되겠니?” 사업? 부모님이 쌈짓돈까지 탈탈 털어 현준에게 차려준 건 작은 술집이었다. 현준은 손님 접대는커녕 매일 밤 자기가 취해 쓰러져 잤다. 개업 반년 만에 매달 백만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내가 졸업해서 연구직으로 일했다면 한 달에 몇백만 원은 벌었을 텐데. 돈만 축내는 무능한 아들은 온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앞날이 창창했던 딸은 부모의 손에 미래가 꺾였다. 나는 결국 폭발해 울부짖었다. “왜 맨날 희생하는 건 나야? 왜 나만 참아야 하냐고!” 엄마는 대답 대신 전화를 아빠에게 넘겼다. 아빠의 입에서 나온 건 당연하다는 듯한 분노였다. “왜냐고? 네가 이 집안의 장녀니까 그렇지! 할머니 모시는 건 당연한 네 책임이야!” 전화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끊겼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건 차가운 신호음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죽여 울었다. 현준의 자랑 덕분에 다음 날 유언장 이야기는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자취방을 빼러 부동산에 갔을 때, 중개인은 비굴할 정도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송 양, 남동생이 유산으로 10억이나 받아서 빌라를 산다면서요?” 나는 아무 대답 없이 체크리스트만 확인했다. 중개인은 민망한 기색도 없이 계속 아는 척을 했다. “마침 나한테 좋은 매물이 몇 개 있는데, 남동생한테 내 얘기 좀 잘해줄 수 없겠어요?” 나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바로 돌아섰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중개인의 얼굴이 싹 바뀌더니 뒤에서 빈정거렸다. “송 양! 모레 집 비울 때 수도요금 5,000원 잊지 말고 내고 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나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재촉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니 옆집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 “서윤아, 할머니가 남동생한테만 유산을 다 남기셨다며?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주셨니?”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고지서를 가리켰다. “이거 주셨어요.” 아주머니가 고지서를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뭐? 고작 5,000원짜리 미납 고지서?” 아주머니는 연신 혀를 찼다. “할머니 참 정정당당하신 분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렇게 편애를 하신다니!” “네가 5년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산을 타서 몸에 성한 구석이 없는데! 그놈의 남동생은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아주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윤아, 너무 상심하지 마. 앞으로 살길이 구만리인데…” 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 나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윤아, 내일 단오인데 집에 와서 밥이나 먹어라. 네 동생 축하 파티도 좀 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내가, 아무 노력 없이 횡재한 남동생을 축하해줘야 한다니.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인연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집으로 향했다. 식탁에 앉자마자 현준은 이미 빌라를 골랐고 계약금 1억 원도 입금했다고 떠벌렸다. “아빠, 엄마. 두 분 방은 2층 남향이에요. 바다 전망이라 아주 끝내줄 겁니다.” 엄마는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다. “내 아들이 역시 효자네!” 아빠는 현준을 자기 인생 최고의 역작을 보듯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현준이 나를 힐끗 보더니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누나, 그래도 우리가 가족인데 내가 누나 방도 하나 마련해뒀지.” 사진 속에는 2평도 안 되는 비좁은 창고 방이 찍혀 있었다. 나는 서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너나 가져.” 엄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송서윤! 네 동생이 호의로 방까지 줬는데 고마운 줄도 몰라?” 아빠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은혜도 모르는 것! 당장 네 동생한테 사과해!” 사과? 꿈도 꾸지 마. 나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절연 합의서를 꺼내 탁자 위에 내던졌다. “할머니 돌아가셨으니 제 책임도 끝났어요.” “오늘부로 부모님, 그리고 얘랑 인연 끊겠습니다.” 현준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할머니 유언장이 내일 효력이 생기는데 지금 와서 이 쇼를 하는 건 좀 늦은 거 아냐?” 아빠는 거침없이 합의서를 낚아채더니 자기 이름을 갈겨썼다. 그리고 문밖을 가리키며 소리 질렀다. “나가!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애물단지 필요 없으니까 당장 꺼져!” 나는 합의서를 챙겨 들고, 숨 막히는 그 집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타이머를 보니 이제 하루 남짓 남았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수도요금 5,000원을 납부하려 했다. 그런데 납부 앱을 켠 순간, 나는 멍해졌다. [미납 요금이 없습니다.] 앱 오류인가 싶어 수도사업소에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이 집은 수도요금이 밀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즉시 고지서를 들어 전등 아래 비춰보며 자세히 살펴봤다. 그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고지서 오른쪽 하단에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숫자들이 전등 불빛에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978328]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숫자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반복해서 읊조리던 번호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할머니는 꺼져가는 숨을 몰아쉬며 내 손을 잡으셨다.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다. 꼭 기억해야 해.” 당시 나는 할머니가 병세 때문에 헛소리를 하시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숫자는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견딜 수 없는 고열에 잠에서 깨어났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실내 온도가 32도까지 치솟아 있었다. 밖은 무려 40도였다. 이제 겨우 6월 초인데, 이런 비정상적인 폭염이라니. 불안함이 엄습할 때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할머니의 옛 동료였던 장 교수님이었다. 나는 얼른 그를 안으로 모시고 물을 떠 오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만류하며 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서윤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내 말을 꼭 믿어야 한다.” 장 교수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5년 전, ‘세계의 방주’라는 팀이 우리 같은 최고 학자들에게 연락을 해왔단다.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 끔찍한 예측을 내놓았지.” “5년 뒤인 오늘부터, 전 세계를 휩쓰는 ‘종말의 폭염’이 시작될 거라고 말이야.” 나는 멍하니 장 교수님을 바라봤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그 팀은 우리에게 셸터 입주권을 제안했어. 조건은 단 하나, 5년 안에 인류의 문명을 이어갈 소중한 연구 문헌을 완성하는 것이었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말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