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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날 신부가 외도를 고백했다
반지 교환을 앞둔 찰나였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 맞은편에 서 있던 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치 오늘 날씨라도 이야기하듯 지극...
Chương (1)
第1章
반지 교환을 앞둔 찰나였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기가 무섭게, 내 맞은편에 서 있던 지안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마치 오늘 날씨라도 이야기하듯 지극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인 태윤과 바람을 피웠다고.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내 귀를 의심했지만, 지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네가 예복 피팅하러 갔을 때, 우리 바로 옆 칸에 있었어.”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그때 태윤이가 신음 소리를 못 참아서 네가 어디 아프냐고 한참 걱정했잖아. 기억나?”
“실은 그때 나, 네 바로 옆에 서 있었어. 다리가 너무 떨려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였지.”
지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음 송곳이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전신의 혈액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객석을 바라보았다. 태윤은 환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치켜들고 내 이름을 크게 연호하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내 어깨를 두드리며 꼭 행복해야 한다고 웃던 놈이었다.
“아까 너 헤어 메이크업 받을 때도, 나 태윤이 무릎 위에 앉아 있었어.”
지안의 목소리가 다시 내 사고를 비집고 들어왔다.
“너무 긴장해서 실수로 걔 입술을 깨물어 버렸지 뭐야.”
그녀는 아직 손가락에 끼워지지 않은 결혼반지를 내려다보며 남의 일인 양 무심하게 덧붙였다.
“강준우, 할 말은 다 했어.”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이 결혼, 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
……
1
식장 안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우리 엄마를 포함한 모든 하객이 아름다운 결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행복의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을 틀어막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채 그 자리에 박박 기듯 서 있을 뿐이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사지가 차갑게 식어갔다. 손에 든 반지가 수만 근의 무게로 나를 짓눌러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지안은 처참하게 무너진 나를 보며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태윤이 원망하지 마. 걔는 평생 너한테 비밀로 하자고 했으니까.”
“근데 준우야, 나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아.”
“걔 한번 만나려고 너한테 구구절절 거짓말하고 보고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태윤이가 나랑 잘 때마다 죄책감 어린 표정 짓는 것도 보기 싫고.”
태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지안의 미간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마치 나와 결혼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도 되는 양.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설레서 잠이 안 온다며 이불 속에서 배시시 웃었었다.
‘준우야, 내가 진짜 네 아내가 된다니 꿈만 같아.’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빨리 결정하라며 짜증스럽게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서지안, 이 파렴치한 년!”
나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반지를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하객들의 비명 섞인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식장을 뛰쳐나갔다. 나의 갑작스러운 파혼에 모두가 경악했다.
뒤따라온 태윤이 내 팔을 붙잡았다.
“준우야! 갑자기 왜 그래!”
“지안이가 또 고집 피운 거야? 응?”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초조하고 화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키스 마크였다. 너무나도 강렬하고 치욕스러운 흔적.
기억난다. 그에게 썸 타는 여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 내 첫 반응은 축복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대놓고 그 여자와 노골적인 통화를 하곤 했다. 심지어 하룻밤에 몇 번을 했는지 자랑까지 늘어놨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상대가 지안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조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임태윤, 내 여자랑 자니까 좋디?”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 찰나의 침묵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코끝이 시큰해지며 묻고 싶어졌다. 대체 왜냐고.
불과 세 시간 전, 신부 데리러 가기 게임을 할 때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게 태윤이었다. 들러리들이 문을 막아서자 고민도 없이 몸을 던져 문을 부수고 들어와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놈이다.
‘나 여기 있는 한, 내 형제 앞길 막는 놈은 다 죽음이야!’
‘너희 둘, 무조건 평생 행복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과 진실한 우정을 가졌다고 믿었다.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 시작되는 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추악한 풍자극이 되어버렸다.
2
태윤은 그 자리에 굳어 멀리 서 있는 지안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다 말해버린 거야?”
“오늘 너희 결혼식 날이잖아! 왜 하필 오늘이야!”
“준우야, 내 말 좀 들어봐. 이건 사고였어!”
사고?
지안과 싸우고 그녀가 가출할 때마다 네 전화기가 꺼져 있었던 게 사고라고?
지안과 함께 네 자취방에 놀러 갔을 때, 그녀가 나보다 더 익숙하게 물건 위치를 알았던 게 사고였냐고?
심지어 네가 키우는 강아지조차 나보다 지안이를 더 따랐던 이유가… 이제야 선명해졌다.
어쩌면 진작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속여왔을 뿐.
“임태윤,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
분노가 이성을 집어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가격한 후였다. 그때 지안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나를 밀쳐냈다.
“강준우! 너 미쳤어?”
그녀는 태윤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잘못한 건 맞는데, 그동안 태윤이가 너한테 얼마나 양보하고 살았는지 잊었어?”
“밥 먹으러 갈 때마다 항상 네가 좋아하는 메뉴만 골랐고, 지는 고열로 앓으면서도 네가 피시방 가자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갔어!”
“심지어 네 기분 상할까 봐 5년 동안이나 이 악물고 숨겼다고!”
“이제 한 번쯤 네가 태윤이한테 양보해주면 좀 어때서!”
지안의 고함에 머릿속에서 이명이 들렸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 8년, 그들이 몰래 만난 시간 5년. 그 5년 동안 그들은 내 눈앞에서 수없이 추잡한 짓을 저질러놓고, 뒤돌아서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의 사랑을 받아 챙겼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연극인가.
뒤따라온 엄마가 그 말을 들어버렸다. 엄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보셨다. 얼마 전 지안은 엄마 무릎 앞에 꿇어앉아 진심 어린 맹세를 했었다. 평생 준우를 아끼며 귀하게 살겠다고. 그 결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혼전 재산 명의를 전부 내 앞으로 돌리고, 신혼집 명의도 내 이름만 올렸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태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엄마가 친아들처럼 아끼며 키우다시피 한 태윤이 내 행복을 처참히 짓밟았다.
“태윤아… 네가 어떻게 준우한테 이럴 수 있니!”
엄마는 충격에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듯 쓰러지셨다. 태윤이 다급히 다가오려 했지만, 나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밀어냈다.
“꺼져!”
구급차 안에서 엄마의 손을 붙잡은 내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시야가 흐려지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 이 결혼 안 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눈 좀 떠봐.”
3
엄마의 입원 수속을 마치고 필요한 물품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벽에 붙은 빨간 ‘복’자와 ‘결혼’ 스티커가 눈을 찔렀다. 키가 작은 지안을 대신해 내가 안아 올려 붙여준 것들이었다. 침대 위의 붉은 침구 세트도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른 것이었다. 우리가 한 조각 한 조각 쌓아 올린 행복이 오늘 완전히 박살 났다.
캐리어를 펴자마자 지안이 들어왔다. 그녀는 안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내가 또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차갑게 뱉었다.
“이 집 명의 네 거니까 안 나가도 돼. 내가 나갈게.”
“예전에 준 돈도 돌려줄 필요 없어. 보상이라고 생각해.”
“대신 태윤이 좀 괴롭히지 마. 걔도 힘들게 내린 결정이야.”
그 마지막 한마디가 내 억눌렀던 감정을 터뜨렸다.
“서지안, 그 새끼가 힘들면 나는? 나는 어떠냐고!”
“내가 그때 널 위해서 내 모든 걸 다 버렸는데…!”
“그만해.”
지안이 짜증스럽게 말을 끊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너 그때 나 때문에 고생한 거 알아. 다 아니까 너한테 선택권을 준 거야.”
“준우야, 사람이라면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나는 순간 멍해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사랑했던 8년. 우리는 물이 새는 고시원 방에서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버텼다. 계란 하나 넣는 것도 아까워하던 시절이었다. 가장 찬란한 나이에 그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나는 고액 연봉의 직장을 그만두고 그녀의 창업을 뒷바라지했다. 부모님도, 태윤이도 나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는 내게 ‘만족할 줄 모른다’고 말한다.
붉어진 내 눈과 마주치자 지안이 잠시 멈칫하더니, 예전처럼 나를 달래듯 안아왔다.
“준우야, 말했잖아. 선택은 네 몫이야.”
“네가 그래도 결혼하고 싶다면 나중에 조용히 식 다시 올려줄게.”
“하지만 태윤이 정말 많이 힘들었어. 네가 나 안아줄 때마다 걔가 구석에서 훔쳐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알아? 넌 당당하게 햇빛 아래서 나랑 입 맞출 수 있지만 걔는 안 됐잖아. 늘 어둠 속에서 혼자 울었다고.”
지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가 내 심장을 도려냈다. 사실 모르지 않았다. 셋이서 여행을 갈 때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태윤이 배가 아프다고 하면 지안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약을 내밀었고, 멀미 때문에 같이 구역질을 할 때도 그녀는 나를 지나쳐 그의 등을 먼저 두드려주었다.
그때마다 태윤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지.
‘준우야, 역시 너를 사랑하는 여자는 네 친구까지 끔찍이 챙긴다니까! 이런 여자 없다, 너 진짜 잘해줘야 해!’
그 순간 지안의 눈에 스치던 서글픔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지안, 걔의 뭐가 그렇게 좋았어?”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머금고 비참하게 웃었다.
“태윤이 놈이 그러더라. 너희 제일 뜨거웠던 날, 하룻밤에 여덟 번을 했다고. 그렇게 좋디? 걔가 그렇게 너를 잘 녹여주던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태윤이 들어왔다. 모욕당한 명예를 지키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짓고서.
“준우야,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해?”
그의 손에는 내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고가의 시계 선물이 들려 있었다.
“사고였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우리를 더럽게 몰아가?”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또 대인배인 척 사과를 받아주고 화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탈진한 채 침대에 앉아 그의 연기를 감상했다. 나의 이 무기력한 침묵을 지안은 '냉혹함'으로 치부했다. 그녀는 태윤의 등을 토닥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우리 몸정 들어서 환장했다, 왜! 네 아빠 돌아가시던 날, 내가 전화로 위로해주면서 울먹였던 거… 그거 슬퍼서 그런 거 아냐. 태윤이가 너무 거칠게 밀어붙여서, 기분 좋아서 내던 신음 참느라 그랬던 거야!”
“서지안!”
태윤이 당황하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4
방 안은 죽음 같은 정적에 휩싸였다. 내 마음도 이 기괴한 현실 속에서 함께 죽어버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출장 중이라던 지안과 몸이 아프다던 태윤은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세상이 무너질 듯 울고 있을 때, 그들은 나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쾌락을 즐겼다. 아버지의 장례 기간 내내 지안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슬픔에 잠겨있던 나를 품에 안고 그녀는 달콤하게 속삭였었다.
‘괜찮아 준우야. 아버님은 하늘의 별이 되어 널 지켜주실 거야. 내가 아버님 대신 널 평생 지켜줄게.’
그 위로가 이토록 구역질 나는 진실이었다니.
정신을 차린 지안이 겁에 질린 듯 내게 손을 뻗었다.
“미안해 준우야, 내가… 내가 너무 흥분해서 실언했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방금 찍어온 웨딩 액자까지도.
“꺼져!”
액자 유리가 깨지며 파편이 우리 사이에 선명한 경계선을 그었다. 태윤이 내게 다가오려다 내가 던진 물건에 맞았다.
“아악!”
그가 얼굴을 감싸 쥐며 고통스럽게 떨었다. 지안의 눈에 잠시 서렸던 죄책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내 손목을 낚아채 물건을 뺏어 던져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앨범에서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안이 내게 고백하던 날.
내가 태윤이를 그녀에게 처음 소개해줬던 날.
내 생일에 셋이 나란히 앉아 케이크 촛불을 불던 날.
‘준우야, 무슨 소원 빌었어?’
‘우리 셋이 평생 지금처럼 함께하게 해달라고 빌었지.’
지안의 손에 힘이 풀렸다. 시선이 사진들에 머물렀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태윤이 선수를 쳤다.
“지안아, 나 이마가 너무 아파. 피… 피나!”
지안은 즉시 고개를 쳐들고 사진들을 짓밟으며 태윤에게 달려갔다. 스피커에 부딪힌 그의 이마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렀다. 지안은 다급하게 그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문가에서 그녀가 걸음을 멈췄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그래도 태윤이는 네 가장 소중한 친구였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야. 걔 이미 충분히 괴로워했어.”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완전히 사라졌다.
괴로워?
우리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걸 알기에 나는 늘 좋은 걸 그에게 먼저 줬다. 식탁 위의 고기반찬도, 엄마가 사준 새 장난감도. 그런데 이제 내 8년 연인까지 그에게 줘야 한단 말인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 찢겨 나갔다.
밤늦게 태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기운이 역력했다.
“준우야…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냐. 제발 용서해주면 안 될까? 나 너랑 끝내고 싶지 않아…”
“우리 같이 자랐잖아.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우정 버리지 말자, 응?”
흐느끼는 그의 목소리 너머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 영업 끝났습니다. 데리러 올 사람 없으면 그냥 길가에 두고 갑니다?”
한참을 침묵하다 결국 코트를 집어 들고 나갔다.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내가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이다.
도착한 곳에서 나는 보았다. 지안이 태윤을 벽으로 밀어붙인 채 까치발을 들고 격렬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임태윤, 나를 얼마나 더 밀어낼 셈이야!”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게 너라는 거 알면서 왜 자꾸 거절해!”
태윤이 그녀를 밀쳐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준우는 내 형제야! 걔 행복을 뺏을 순 없어!”
“그럼 너는! 네 행복은 어떡하고!”
지안이 그의 손을 잡고 절규하듯 물었다. 그 순간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한 듯 태윤이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해, 지안아… 하지만 준우는 어떡하냐고…”
그들의 흐느낌 속에서 나는 지안의 결심을 보았다.
“준우가 끝까지 허락 안 하면, 우리 그냥 멀리 떠나자.”
기둥 뒤에 숨어 지켜보던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태윤이 석 달 치 월급을 털어 내게 최신형 컴퓨터를 사줬던 날, 지안이 옆에서 과일을 깎아 내 입에 넣어주던 날. 서로 나에게 더 잘해주겠다며 유치하게 경쟁하던 두 사람.
하지만 다음 순간, 그 기억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 사랑과 우정은 과거에 박제되었을 뿐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메일함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해외 지사 발령 오퍼를 확인했다.
서지안, 너 때문에 이곳에 남기로 했었지만,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