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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일기장에 두 엄마가 있었다
학부모 상담이 끝나고, 나는 몸을 숙여 딸아이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의 작문 숙제에 등장했던 '또 다른 엄마'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은이는 눈...
Chương (1)
第1章
학부모 상담이 끝나고, 나는 몸을 숙여 딸아이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아이의 작문 숙제에 등장했던 '또 다른 엄마'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하은이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빠가 매번 데려다주는 그 아줌마인데, 아빠가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것이다.
교문 앞, 남편 도준은 평소처럼 차에 기대어 서서 웃는 얼굴로 선생님이 딸아이의 글짓기를 칭찬해 주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하은이의 작문 노트를 돌돌 말아 가방에 쑤셔 넣으며, 집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상담 시간, 선생님이 하은이의 글을 낭독했을 때 교실 안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하은이는 자기에게 엄마가 둘이라고 썼다. 한 명은 집에 살고, 다른 한 명은 아빠의 '다른 집'에 산다고.
몇몇 학부모가 풋,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고 선생님은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다음 장을 넘겼다. 맨 뒷줄에 앉아 있던 내 손안에서 생수병이 찌그러지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1.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준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카오디오를 켜서 동요를 틀었다. 하은이는 뒷좌석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도준의 시선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세 번이나 훑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은이는 손을 씻으러 갔고, 나는 소파에 앉아 그 작문 노트를 다시 펼쳤다.
삐뚤빼뚤한 연필 글씨.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흔적.
「아빠의 다른 집에는 어떤 아줌마가 산다. 아줌마는 나한테 아주 잘해준다. 케이크도 만들어준다. 아빠는 그 아줌마도 내 엄마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아줌마는 머리가 아주 길고 기타를 잘 친다.」
그 아래에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긴 머리 여자와 그 곁에 선 키 큰 남자. 남자는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노트를 덮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도준이 주방에서 물 한 컵을 떠와 나에게 건넸다.
"상담 때 선생님이 뭐래?"
"하은이가 표현력이 좋고 상상력이 풍부하대."
그는 빙긋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다행이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 남자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결혼한 지 7년, 대학 시절부터 따지면 거의 10년이다. 그의 웃음은 늘 이랬다. 눈가에 잔주름이 잡히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아주 진실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지금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니, 그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 위의 작문 노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버릇처럼 문질러댔다.
나는 그 동작을 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그의 오랜 습관이다.
"도준 씨."
"응?"
"하은이 작문에 나온 그 아줌마, 누구야?"
물을 마시려던 그의 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한 모금을 삼켰다.
"아줌마라니? 애가 지어낸 거겠지."
"당신이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던데."
"아, 그 회사 동료 말인가 보다. 저번에 야유회 때 하은이 데려갔더니 동료 한 명이 장난친 거야."
그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너무나 매끄러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 밤 그가 하은이를 재우는 동안, 나는 거실에 앉아 그의 블랙박스 클라우드 백업을 열었다. 내비게이션 기록에는 매주 목요일 오후마다 차가 멈춘 곳이 있었다. 시 외곽의 낡은 아파트 단지. 오후 2시쯤 도착해서 저녁 6시쯤 떠났다. 정확히 네 시간,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었다.
나는 그 기록을 캡처해 휴대폰에 저장했다.
새벽 2시, 내가 잠든 줄 안 도준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조심스레 베란다로 나갔다. 유리문 너머로 낮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겁내지 마. 내일 아침에 병원 정기검진 같이 가줄게."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오직 나에게만 들려주던 그 말투였다. 아니, 한때는 그랬던 말투였다.
다음 날, 나는 반차를 내고 그의 지난 반년치 은행 거래 내역을 조사했다. 매달 고정적으로 150만 원씩 이체된 내역이 있었다. 수취인 이름은 '이은수'. 6개월 동안 단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은행 로비의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가방에서 검은색 노트를 꺼내 새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이름과 금액을 적어 넣었다. 내 글씨가 지나치게 정갈해서 스스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오후, 나는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던 주소로 차를 몰았다. 1층 베란다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남성용 화이트 셔츠 한 벌이 널려 있었다. 지난달 내가 직접 다리미로 다렸던, 깃 부분에 내가 단추를 다시 달아주었던 바로 그 셔츠였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동네 할아버지가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1층 강 선생 여동생인가 보네?"
"네."
"오빠가 참 대단해. 부인이 몸이 안 좋아서 휠체어 타는데, 매일같이 맛있는 거 해다 나르고... 집안 교육을 참 잘 받았어."
그의 부인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네, 그이가 워낙 가정적이라서요."
그날 저녁, 도준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밤 케이크를 사 들고 귀가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케이크를 잘랐다. 옆에서 신발을 벗던 그가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하냐며 물었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당신 그 화이트 셔츠 소매가 다 해졌더라. 내일은 다른 거 입어."
2.
그는 자기 소매를 쓱 보더니 허허 웃었다.
"오후에 교재 창고 정리하다가 긁혔나 봐. 다음부턴 조심할게."
너무나 당당한 웃음이었다. 하마터면 내가 미친 건가 착각할 정도로.
주말, 하은이가 거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휠체어에 앉은 긴 머리 여자를 그렸다. 나는 다가가서 물었다.
"우리 공주님, 누구 그린 거야?"
"은수 아줌마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서 우리가 가족처럼 돌봐줘야 한대요."
가족이라니. 나는 하은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녁 식사 후, 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며 수돗물을 세게 틀어놓았다. 시어머니 한 여사가 입구에서 식탁을 닦고 있었다. 나는 슬쩍 말을 던졌다.
"어머니, 하은이가 요즘 은수 아줌마라는 분 얘기를 자주 하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한 여사의 손에 들려 있던 행주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행주를 줍는 동작이 평소보다 두 템포는 느렸고,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서윤아... 도준이가 워낙 정이 많은 애잖니. 그 집 아버지가 옛날에 우리 애 아빠 때문에 일을 당하셔서... 은수네가 우리 집 은인이야. 도준이가 빚을 진 거지. 네가 아내로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라."
나는 수돗물을 잠갔다. 차가운 대리석 싱크대 상판을 양손으로 짚었다.
온 가족이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만 철저히 바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집안의 유일한 광대였다.
월요일, 하은이 약을 타러 시립병원 소아과에 갔다. 약을 받고 산부인과 복도를 지나치는데, 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휠체어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담요를 두른 채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도준이 멈춰 서더니 자기 겉옷을 벗어 그녀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그리고 반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옷자락을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나는 10미터 뒤 기둥 뒤에 숨어 하은이의 약봉지를 꽉 쥐었다. 손톱이 벽을 파고들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추가 마침내 바닥으로 떨어진 듯한 무력한 감각뿐이었다.
간호사가 카트를 밀고 지나가며 내 시야를 가렸다. 카트가 지나갔을 때 도준이 무언가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지만, 나는 이미 비상계단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대학 동창인 혜경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계법인에서 감사팀장으로 있는 언니였다.
"언니, 혼인 중 공동재산 조사하는 법 좀 배우고 싶어. 시간 돼?"
전화기 너머로 3초간 침묵이 흘렀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뼈를 발라주듯이 알려줄게."
밤늦게 귀가한 도준이 내 뒤에서 나를 껴안았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그의 목소리가 낮고 피곤하게 들렸다.
"서윤아, 이렇게 너를 안고 있어야 내가 살아있다는 게 실감이 나."
나는 눈을 감았다. 그를 마주 안아주지 않았다. 옷을 뚫고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예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온기가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다른 여자에게 닿아 있었다는 사실을.
3.
도준은 빈번하게 출장을 가기 시작했다. 화요일에도, 목요일에도, 가끔은 주말에도. 나는 낮에는 평소처럼 출근했고, 밤에는 그가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그의 휴대폰 속 모든 기록을 촬영했다.
메일함에는 부동산 계약서 한 부가 들어있었다. 대출 없는 완불, 방 두 개짜리 소형 아파트. 명의는 시어머니 한 여사였다. 주소는 이은수가 살고 있는 바로 그 단지였다. 같은 동, 같은 라인.
나는 계약서를 촬영해 저장했다.
셋째 날,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떤 사랑은 책임이고, 어떤 사랑은 은혜예요. 도준 씨는 너무 지쳤어요. 그에게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안식처가 필요해요.]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캡처해서 저장했을 뿐이다. 이런 부류와 말싸움을 하는 건 내 손만 더럽히는 일이니까.
그 목요일 심야, 하은이가 갑자기 고열과 함께 경련을 일으켰다. 40.2도. 아이는 온몸을 떨며 입술이 보랗게 질려갔다. 나는 도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전원이 꺼져 있다.
두 번째, 전원이 꺼져 있다.
세 번째, 여전히 차가운 기계음만 돌아왔다.
나는 혼자 하은이를 안고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뛰어들어 택시를 잡았다. 열에 취한 하은이는 내 품에 안겨 침과 눈물로 내 목을 적셨다. 비가 너무 거세서 택시들이 서지 않았다. 나는 겉옷을 벗어 아이를 감싸고 맨팔로 길가에 8분 동안 서 있었다.
결국 멈춰준 건 낡은 승합차였다. 기사는 원래 손님을 안 태우는데 내가 너무 절박해 보여서 세웠다고 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접수하고, 수납하고, 채혈까지... 혼자서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간호사가 보호자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새벽 4시, 하은이의 열이 겨우 내리고 잠이 들었다. 약제실 창구로 약을 받으러 가는데, 도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응급실 대기실 저편에서 흠뻑 젖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옷은 뒤집어 입어 상표가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그가 우리를 찾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은수, 위경련입니다. 응급실 처방전 나왔어요."
그는 나에게서 채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다른 여자의 위경련 때문에 세상을 잃은 듯한 얼굴을 하고서. 내 딸이 40도가 넘는 고열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그때 한 여사도 나타났다. 복도 끝에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그녀가 도준의 팔을 붙잡았다.
"은수는 괜찮니? 얼른 가서 곁에 있어줘. 걔 마음 약해서 딴 생각 할지도 몰라."
어머니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아니, 그녀의 눈엔 애초에 내가 없었다.
나는 약제실 창구 앞에 서서 하은이의 해열제를 꽉 쥐었다. 다른 여자를 위해 안달복달하는 그 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눈도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철저하게, 가루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아침 7시, 도준은 마침내 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소아과 병동으로 뛰어 들어온 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서윤아 미안해,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서... 회사에 큰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내가..."
나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내 손을 잡으려는 그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닦아냈다.
"괜찮아. 다음부턴 꺼두지만 마."
내 목소리는 너무 낮아 나조차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멍하니 서서 입을 뻥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에서 깬 하은이가 아빠를 보고 팔을 뻗었다. 도준이 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딸을 안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방금 전에도 그는 저런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안아주었을까.
4.
보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출근했고, 밥을 지었으며, 그와 대화했다. 하지만 내 개인 예금은 전부 친정엄마 계좌로 옮겨두었다. 회사에는 반년 동안 해외 파견 편집 프로젝트를 신청했고 승인까지 받아냈다. 혜경 언니를 통해 도준의 명의로 된 모든 자산 리스트도 뽑아두었다.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자기 말을 믿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결혼 7주년 기념일, 그는 시내에서 가장 비싼 프랑스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룸 안에는 촛불과 꽃이 가득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벨벳 케이스를 꺼내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나 깊어서, 만약 내가 진실을 몰랐다면 감동받아 울었을지도 모른다.
"서윤아, 이 시기만 지나면 하은이랑 셋이 아이슬란드로 오로라 보러 가자. 우리 다시 시작하자, 응?"
쉰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 나는 그를 보며 이 상황이 기괴할 정도로 황당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어떻게 골수까지 배신을 저지르면서 저렇게 진실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릴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내려다보는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호흡의 리듬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썰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급한 일이면 가봐."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하지만 오늘 이 문을 나가는 순간, 도준 씨, 우리 관계는 끝이야."
그의 몸이 굳었다. 목울대가 두어 번 크게 들썩였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수가... 손목을 그었대. 나 걔한테 목숨 빚이 있어. 미안해 서윤아, 맹세코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는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나갔다. 룸의 문이 닫히고 촛불이 일렁였다.
나는 텅 빈 긴 식탁 앞에 홀로 앉았다. 접시에 담긴 핏기가 가시지 않은 스테이크를 작은 조각으로 썰어 하나씩 입에 넣었다. 아주 천천히 씹어 삼켰지만 목구멍이 아려왔다.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공허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계산을 마치고 나는 그 낡은 아파트로 택시를 타고 갔다. 밤 11시, 가을바람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나는 1층 창문 아래 서서 반쯤 열린 커튼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피 흘린 흔적 따위는 없었다. 손목을 긋지도 않았다.
도준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이은수는 그의 품에 안겨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한 여사가 주방에서 깎아놓은 과일 접시를 내오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 딸 하은이는 이은수의 무릎에 기대어 있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달콤하게 속삭였다.
"엄마, 아빠한테 화내지 마세요. 우리 가족 영원히 같이 살아요."
도준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하지만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한 가족사진 같은 풍경이었다. 네 식구의 단란한 모습.
위장이 뒤틀리며 신물이 올라왔다. 나는 허리를 숙여 무릎을 짚고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 서서 내 왼쪽 약지의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7년을 끼고 있었더니 금속 고리가 손가락에 옅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빼내어 잠시 바라보다가, 발밑의 하수구 구멍으로 던져버렸다. 반지가 철창에 부딪히며 가벼운 금속음을 냈다.
강도준, 네가 빚진 목숨은 네 목숨으로 갚아. 나는 더 이상 어울려줄 생각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