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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진료:대표님의 달콤한 처방
“원해?” 권태혁이 새빨개진 얼굴로 품 안에 안긴 여자를 보며 나른하게 물었다. 병이 도진 온세아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1년이 ...
Chương (1)
第1章
“원해?”
권태혁이 새빨개진 얼굴로 품 안에 안긴 여자를 보며 나른하게 물었다.
병이 도진 온세아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나도록 남편 구형민은 온세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결국 지독한 방치 속에 온세아가 해리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말았다. 발작이 시작되면 욕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어느 깊은 밤, 언니의 사진에 대고 몰래 입을 맞추는 남편을 목격하고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언니의 대역일 뿐이라는 것을.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결국 병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젊고 잘생긴 남자 의사를 만났다. 병이 도져 그 자리에서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덮칠 뻔했다.
그런데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한 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제 온세아를 진찰했던 의사가 바로 새로 부임한 대표였다.
온세아는 모르는 척 도망치려 했지만 권태혁이 그녀를 비서로 발령해버렸다.
...
“대표님, 저 남편이 있어요. 불륜이라도 저지르겠다는 거예요?”
대표실, 권태혁의 다리에 앉아 화를 내며 씩씩거리는 온세아. 권태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자기야, 어젯밤에 날 여보라고 불렀던 거 까먹었어?”
결국 온세아는 미련 없이 이혼하고 보란 듯이 재혼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온 전 남편이 온세아를 잡고 애원했다.
“세아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재결합만 해준다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해줄게.”
온세아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미안한데 난 남자 구실 못하는 남자한테 관심이 없어.”
제1화
“벗고 누우세요.”
남자의 낮게 깔린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순간 온세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런 수치스러운 증세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도 몰랐다.
병이 도지면 욕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심지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그 욕구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온세아가 용기를 내어 이 병원의 산부인과에 진료 예약을 잡았다. 병원의 보안이 철저한 대신 진료비가 일반 병원의 몇 배에 달했다.
그런데 분명 40대 산부인과 여자 의사로 예약했는데 진료실에 앉아 있는 건 젊고 건장한 남자 의사였다.
“바지를... 꼭 벗어야 하나요?”
온세아가 잔뜩 긴장한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판 모르는 남자 앞에서 바지를 벗어야 한다니. 아무리 의사인 걸 알아도 설명하기 힘든 민망함이 밀려왔다.
권태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바지를 벗지 않으면 어떻게 검사하죠?”
“하지만 저...”
온세아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머뭇거렸다.
눈앞의 남자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눈빛만큼은 유난히 깊었고 뜻을 알 수 없었다. 문득 그가 그녀를 덮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세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그냥 의사야. 나 같은 환자를 하루에도 수십 명을 진찰할 텐데. 이게 이 사람의 일이라고.’
그녀는 계속 스스로를 다독이며 수치심을 꾹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지를 내리고 침대에 누웠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권태혁이 도구를 소독하면서 물었다.
그 질문에 온세아의 얼굴이 다시 화끈 달아올랐다.
“저 거기가...”
온세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권태혁이 담담하게 물었다.
“성관계 과다인가요? 상처가 났어요?”
그녀처럼 젊은 여성이 산부인과를 찾는 경우 대개는 그 문제였다. 온세아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성관계는 하지 않았어요...”
권태혁이 멈칫하더니 놀란 얼굴로 온세아를 힐끗 쳐다봤다.
눈앞의 여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피부도 하얗고 촉촉했다. 게다가 가녀리면서도 요염한 매력을 지녔고 화려하면서도 순수한 욕망이 어린 얼굴이었다.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이 정도 미모의 여성이라면 주변에 구애하는 남자가 끊이지 않을 텐데 놀랍게도 성관계가 없다고 했다.
“저... 그게... 거기가... 좀... 불편해요...”
권태혁의 어두운 시선 아래 온세아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소독한 프로브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온세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불편하다고요?”
온세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 설명하지?’
“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망설이며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오른 온세아의 얼굴을 보던 권태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몸속에 뜨거운 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자 욕구를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죠?”
온세아가 우물쭈물하며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그게... 제가...”
‘욕구가 강해서 너무나 하고 싶었다고 어떻게 말해.’
결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남편 구형민은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온세아의 욕망이 점점 더 커지고 갈망할수록 구형민은 오히려 그녀를 피했다.
심지어 온세아가 잠자리를 요구할까 봐 극도로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온세아는 하는 수 없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계속 원했고 더 많은 것을 갈망했다.
권태혁이 온세아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결혼했어요?”
온세아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권태혁은 왠지 모르게 실망감이 밀려왔다. 눈빛조차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일단 누우세요. 검사해볼게요.”
그녀는 침대에 고분고분 누워 주먹을 꽉 쥐었다. 얼굴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권태혁이 온세아를 보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온세아가 말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가뜩이나 수치심이 극에 달한 상태인데 이런 증세가 생기니 어떻게 얌전히 검사를 받을 수 있겠는가?
“혹시 여자 의사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온세아의 요구에 권태혁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저한테 불만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아닙니다...”
온세아가 황급히 해명했다.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태혁이 차갑게 거절했다.
“오늘 환자분이 예약한 건 제 진료예요. 치료받기 싫으면 나가세요.”
‘왜 이렇게 사나워? 이따가 컴플레인 걸어야지.’
하지만 병을 더 미룰 수 없어 일단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다른 뜻은 없었어요. 선생님, 제발 꼭 고쳐주세요.”
온세아가 간절히 부탁했다.
권태혁이 대진으로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특별한 여성 환자를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병이 발병한 원인이...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이건 남자의 자제력을 시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입 다무세요.”
권태혁이 호통치더니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장갑을 끼고 소독한 프로브를 든 채 온세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온세아는 수치심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남편 구형민도 보지 못한 걸 다른 남자에게 보여줘야 했다.
상대가 아무리 의사라고 해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웁.”
온세아가 저도 모르게 낮게 신음했다. 요염하면서도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권태혁이 손을 살짝 뗐다.
“아파요?”
온세아의 아름다운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붉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이성적으로는 지금 이 순간 참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병 때문에 자꾸만 저도 모르게...
그녀의 연약한 모습을 보면 차마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살살할게요, 그럼.”
권태혁이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진찰에 집중했다.
진찰이 끝난 후 온세아는 오히려 더 공허하고 참기 힘들어졌다.
“선생님, 상태가 심각한가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권태혁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해리성 장애입니다. 오랜 기간 성생활이 부족했던 것과 관련이 깊어요.”
‘성생활 부족?’
온세아가 고개를 떨궜다. 예쁜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성생활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 남편 구형민에게 심각한 결벽증이 있었다. 연애를 시작해서부터 결혼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스킨십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럴수록 온세아의 갈망이 더욱 커져만 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스킨십을 애타게 갈구하는 듯했다.
“호르몬을 조절할 수 있게 소염제 좀 처방해드릴게요.”
권태혁이 컴퓨터 앞에 앉아 처방전을 썼다.
“집에 돌아가서 남편분과 횟수를 좀 늘려보세요. 그러면 증상이 많이 호전될 겁니다.”
온세아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바지를 입고 침대에서 내려온 뒤 권태혁이 건넨 약 처방전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온세아가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흰 가운을 입은 여자 의사 한 명이 뒷문으로 들어왔다.
“권태혁, 내가 없는 사이에 감히 내 환자를 봤어?”
때맞춰 도착한 권민지가 분노하며 동생을 나무랐다.
권태혁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우리 의대 다닐 때 내가 늘 수석이었던 거 잊었어? 누난 항상 2등이었잖아. 내가 무료로 진료해주는 건 누나 환자들의 복이야. 그리고 이 병원 전체가 내 거라고.”
“너!”
권민지가 권태혁을 쏘아봤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나저나 평소 결벽증이 심하고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동생이 오늘 여자 환자를 진료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라웠다.
“날 반기지 않는 것 같으니까 이만 가볼게.”
권태혁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온세아가 사라진 쪽을 쳐다봤다.
“가긴 어딜 가? 오늘 우리 병원 흉부외과에 새로 선생님이 오셨어. 젊고 예쁜 데다가 의술도 뛰어나서 우리 병원의 퀸카야. 게다가 지금 솔로래...”
권민지가 황급히 동생을 불러 세우며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나중에.”
권태혁은 별 흥미가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휙 가버렸다.
제2화
온세아는 진료실을 나와 약을 받은 뒤 서둘러 병원을 떠났다.
조금 전 진료실에서 남자 의사의 명령에 따라 바지를 벗고 검사를 받았던 장면이 떠오르자 얼굴이 또 저도 모르게 화끈거렸다.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온세아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여자 의사한테 검사받아야겠어. 다시는 낯선 남자한테 검사받지 않을 거야.’
바로 그때 검은색 벤틀리 한 대가 온세아의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온세아는 그녀가 부른 택시가 도착한 줄 알고 유리창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신이 정성 들여 빚은 것처럼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어딘가 낯이 익은데? 저 눈빛... 아까 진료실에서 날 진찰했던 그 남자 의사 아니야?’
온세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르더니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병원 문 앞에서 또 마주쳤다고? 이런 우연이 다 있나.’
권태혁이 말했다.
“타세요. 가는 길에 태워다 드릴게요.”
온세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차에 덥석 탈 수는 없지. 게다가 아까 진료실에서 그런 검사까지 받았는데...’
지금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바로 권태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앞으로는 마주쳐도 모르는 척할 생각이었다.
권태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 여자에게 거절당한 게 생전 처음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남편이 금방 데리러 올 거예요.”
온세아는 그의 기분이 불쾌해졌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는 남편이라는 단어를 특히 더 강조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있는 몸이라는 걸 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권태혁의 입가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그는 곧장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했다.
멀어져 가는 벤틀리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온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 진료실에서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해리성 장애가 성생활이 장기간 부족해서 생긴 것이고 약은 보조적인 역할만 해줄 뿐이기에 완치하려면 남자와 관계를 많이 가져야 한다고 했다.
마침 출장 갔던 구형민이 오늘 밤에 돌아올 것이다.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온세아는 곧장 백화점으로 향하여 구형민이 좋아할 만한 섹시한 슬립과 분위기를 돋울 향수를 샀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아껴두었던 와인까지 꺼냈다.
우선 구형민과 술을 마시다가 그가 취하면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갖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구형민이 심각한 결벽증이 있어 부부 관계를 꺼리는 편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온세아가 꺼낸 잠자리 요구를 전부 다 거절했다. 그로 인해 온세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
이제 병까지 얻게 된 이상 이런 궁여지책이라도 써야만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문득 긴장감이 몰려왔다.
결혼 후 처음으로 작정하고 남편을 ‘유혹’하려는 것이라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온세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먼저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셨다.
...
밤 8시, 드디어 출장 갔던 구형민이 돌아왔다.
탁.
어두웠던 침실에 불이 켜졌다. 침대 위에서 자는 척하고 있던 온세아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서 있는 훤칠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여보, 왔어?”
온세아는 즉시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반갑게 달려갔다.
구형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와인색의 깊게 파인 슬립이 온세아의 눈처럼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고 완벽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거기에 청순하면서도 관능적인 얼굴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요물이 따로 없었다.
온세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유혹적인 향수 냄새가 코를 스쳤다. 남자의 본능을 끌어내려고 정말 최선을 다했다.
눈앞의 온세아가 섹시하고 매력적인 건 사실이었으나 구형민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구형민의 검은 눈동자에 일렁거리던 찰나의 욕망이 금세 사라졌고 대신 차가움과 소외감이 차지했다.
구형민이 본능적으로 온세아를 밀쳐냈다.
“피곤해.”
그 한마디에 뜨겁게 타올랐던 온세아의 마음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병 때문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기에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관계를 가져야 했다. 게다가 공들여 준비한 이 모든 걸 헛수고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여보, 내가 마사지해줄까?”
온세아가 구형민의 팔을 잡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필요 없어.”
구형민은 더러운 것이라도 몸에 닿은 것처럼 혐오 가득한 얼굴로 온세아를 뿌리치고는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옆으로 지나갈 때 여자의 향수 냄새를 정확히 맡았다.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향이었는데 온세아가 평소에 쓰는 향수와는 완전히 달랐다.
온세아가 멈칫한 그때 두 눈에 의심이 번졌다.
‘다른 여자가 생겼나?’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구형민이 사업 때문에 사람을 만날 일이 많았다. 어쩌다가 우연히 여자 향수 냄새가 뱄다고 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좀 지나친 것 같았다.
게다가 구형민에게 심한 결벽증이 있었다. 아내조차 건드리지 않는데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날 리가 있겠는가?
온세아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구형민에게 줄 와인을 따랐다. 원래 계획대로 그를 취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30분 뒤 구형민이 욕실에서 나왔다. 하얀 가운만 걸치고 있었는데 끈을 묶지 않아 탄탄한 가슴 근육이 언뜻언뜻 보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구릿빛 피부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길고 곧게 뻗은 다리, 그리고 금욕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잘생긴 얼굴을 본 순간 온세아는 넋을 잃을 뻔했다.
본능에 이끌린 나머지 입술이 다 바짝 타들어 갔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일까, 아니면 구형민의 태도가 늘 차가워서일까, 갑자기 마주한 이런 모습에 마음이 요동쳤다.
온세아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이 무심결에 그의 탄탄한 허리 아래로 향했다.
‘미치겠네, 정말. 욕구가 더 심해진 것 같은데?’
“뭘 그렇게 봐?”
구형민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그 소리에 온세아가 화들짝 놀라면서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구형민의 몸을 탐내고 있다는 걸 들키면 오히려 반감만 더 살 것이다.
온세아가 와인잔을 들고 웃으면서 구형민에게 다가갔다.
“여보, 한잔할래?”
구형민이 잠들기 전 술 한잔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온세아의 질문에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 순간 온세아는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계획이 들킨 건 아니겠지?’
“여보...”
온세아가 포기하지 않고 콧소리를 내면서 구형민에게 바짝 다가갔다. 술을 권하려던 찰나 뜻밖에도 구형민이 고개를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시간도 늦었는데 왜 아직 안 자?”
그 말에 온세아는 기쁨에 휩싸였다. 구형민이 그녀와 ‘잘’ 생각이 있는 줄 알고 와인잔을 침대 옆 서랍에 내려놓았다.
“지금 자려고.”
온세아가 설레는 마음으로 침대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가느다란 손이 구형민에게 닿기도 전에 구형민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눈썹을 치켜세우며 비웃듯 말했다.
“설마 오늘 밤에 내가 널 안아주기라도 할 줄 알았어?”
제3화
온세아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구형민이 그녀의 두 눈에 스친 실망감을 보고도 차갑게 말했다.
“미안한데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결벽증이 있다고.”
온세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
지금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하려면 남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냥 날 좀 도와준다고 생각해... 여보, 나 너무 힘들어...”
온세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애처롭게 바라봤다. 어느새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정말로 원했고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고 지워지지도 않았다.
구형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온세아가 그의 앞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걸 질색했던 그가 싸늘하게 호통쳤다.
“그렇게 원하면 혼자 알아서 해결해.”
차갑고 경멸 가득한 한마디가 온세아의 마음속 가장 나약한 부분을 찔렀다.
온세아가 상처받든 말든 구형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갑게 경고했다.
“앞으로 내 앞에서 이렇게 입지 마.”
온세아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씁쓸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남편은 여전히 그녀를 탐하지 않았다.
“알았어.”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낮게 대답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한방 쓰지 말자.”
구형민이 또다시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온세아를 쳐다봤다. 온세아가 고개를 들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여보...”
‘나랑 각방을 쓰겠다는 말이야?’
“난 옆방에서 잘 거야.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마.”
구형민이 차갑게 경고를 날린 후 침대에서 내려와 미련 없이 침실을 나갔다.
온세아가 멍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온세아와 구형민이 결혼한 지 벌써 1년이었다. 성생활 부족과 구형민의 냉대 때문에 이런 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남편 구형민은 온세아의 욕구를 채워줄 의사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별거하자고 제안했다. 온세아를 벼랑 끝으로 내몬 거나 마찬가지였다.
구형민이 나간 후 겨우 조금 온기가 돌았던 침실이 다시 지독하게 차가워졌다. 하지만 온세아 몸속의 열기는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고 되레 활활 타올랐다.
구형민의 냉랭한 태도에 상처를 받은 바람에 증상이 또 도지고 말았다.
온세아는 몸이 이상할 정도로 괴로웠다. 욕구 불만이 극에 달했다.
“괴로워 미치겠어. 너무 하고 싶은데...”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 오늘 진료실에서 봤던 그 남자 의사가 문득 떠올랐다.
‘맙소사.’
온세아가 고개를 힘껏 저었다.
‘그 남자 의사가 왜 떠오른 거지? 난 분명 결혼했고 남편도 있는데. 나도 모르게 다른 남자를 생각하다니. 언제부터 이렇게 대담하고 개방적으로 변한 거야?’
구형민은 온세아를 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남편이 있긴 하지만 없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온세아의 머릿속에 그 남자 의사가 또다시 떠올랐다. 특히 오늘 병원 앞에서 그녀에게 차에 타라고 했을 때 마스크 아래에 숨겨졌던 얼굴을 봤다.
‘엄청 잘생겼던데. 우리 남편보다도 더. 만약 그 남자랑 한다면...’
온세아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나쁜 생각을 멈추려고 고개를 저었다. 구형민이 그녀를 건드리지 않더라도 다른 남자를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이건 명백한 정신적 외도였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서랍을 열어 그것을 꺼냈다...
지난 1년 동안 구형민이 온세아를 거부할 때마다, 병이 도질 때마다 구형민을 생각하며 스스로 해결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조금 달랐다.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구형민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남자 의사였다.
...
한참이 지난 뒤 온세아가 정신을 차렸다. 입가에 물기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듯했다.
그녀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계속 이렇게 해결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가방을 열고 오늘 병원에서 처방받아 온 약을 꺼냈다.
침실에 따뜻한 물이 없어 물을 뜨러 아무 옷이나 걸치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구형민이 묵는 방을 지나던 그때 안에서 남자의 수상쩍은 신음이 들려왔다.
온세아는 더 이상 순진한 소녀가 아니었다. 이런 신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둑한 불빛 속에서 구형민이 침대 옆에 앉아 사진을 보면서...
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아정아, 내 와이프. 난 너만 원해... 너만 사랑해...”
쾅.
온세아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윙 했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정이? 새어머니의 딸? 온씨 가문의 큰딸 온아정을 말하는 거야?’
온세아의 아버지 온철환에게 아내가 두 명 있었다.
첫째 아내 심미란에게 딸 온아정이 있고 둘째 아내 성해연에게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있다.
아들 온석원이 온씨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라 태어나자마자 첫째 아내 심미란에게 양아들로 보내졌다.
오직 사랑받지 못하는 막내딸인 온세아만 성해연의 옆에서 자랐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 성해연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성해연은 그녀보다 아들 온석원과 첫째 아내의 딸 온아정을 더 예뻐했다. 온세아의 혼사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온철환과 심미란에게 모든 걸 맡겼다.
온세아가 구형민과 결혼하기 전에 직접 알아본 적이 있었다. 구형민이 온씨 가문의 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결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형민이 좋아하는 사람이 그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온세아의 착각이었다.
구형민이 마음속에 품었던 사람은 사실 온세아의 언니 온아정이었다. 구형민이 혼외자라는 이유 때문에 온아정과 함께할 수 없어 차선책으로 온세아를 택한 것이었다.
결혼 후 구형민은 심각한 결벽증을 이유로 온세아와의 스킨십을 거부했다. 어리석게도 온세아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신이 너무 순진했음을 깨달았다.
구형민은 스스로 해결할지언정 온세아를 단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 언니 온아정을 위해 순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온아정을 좋아했다. 온철환은 그녀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물처럼 여겼고 심미란과 성해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온세아만이 온씨 가문에서 가장 불필요한 존재였다.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친어머니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구형민이 좋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언니 온아정이었다.
온세아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편이 온아정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
문득 결혼 전 구형민이 온씨 가문에 몇 번이고 찾아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다정하고 인내심이 있는 젠틀한 신사였다. 온씨 가문에 올 때마다 온세아에게 선물을 챙겨주곤 했다. 하여 구형민에 대한 인상이 아주 깊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온씨 가문에 온 이유가 온세아가 아니라 언니 온아정 때문이었다.
제4화
온세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의 공허함과 마음의 충격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출근은 늦지 않았다.
온세아가 하품하며 회사에 들어선 그때 오늘따라 회사의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다.
“오늘 대표님이 새로 부임하신대...”
친구 이채린이 중대한 소식을 전했다.
알고 보니 신임 대표가 오는 날이었다. 어쩐지 온세아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여직원들이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더라니,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세아야, 왜 아직도 화장 안 고쳐?”
온세아가 그 소식을 듣고도 가만히 있자 이채린이 급히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화장이 너무 옅어. 내가 예쁘게 해줄게.”
그러자 온세아가 황급히 피하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대표님이 새로 오시는데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나 할 일이 태산이야.”
대학교 졸업 후 심미란이 온세아를 이 회사에 보냈다. 입으로는 다른 회사에서 경험을 쌓으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온주 그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온주 그룹은 나중에 오빠 온석원과 언니 온아정에게 물려줄 것이다. 친어머니인 성해연에게조차 미움받는 딸은 온주 그룹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온세아가 어릴 적부터 학업 성적이 늘 상위권이었고 오빠나 언니보다 훨씬 더 열심히 노력했지만 예쁨을 받지 못했다. 졸업하자마자 심미란이 그녀를 온주 그룹의 문밖으로 내쳤다.
그녀의 친어머니도 그녀를 위해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불공평한 대우를 겪었던 터라 온세아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심미란이 온세아가 잘나가는 걸 싫어하고 성해연도 그녀를 위해 나서주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난 2년간 이 회사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직원으로 묵묵히 일했다.
싸우지도, 경쟁하지도 않았고 오빠나 언니와의 이해관계 충돌을 최대한 피했다. 승진이나 월급 인상도 바라지 않았기에 새 대표가 오든 말든 온세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채린이 온세아를 자리에 앉히면서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새로 오신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어떡해? 너 사람 맞아? 지금 회사 직원 모두가 잘 보이겠다고 꾸미고 난리야. 첫눈에 대표님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네가 아무리 미모가 타고났다고 해도 이렇게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내가 알아봤는데 신임 대표님이 젊고 잘생겼대. 우리를 힘들게 하진 않을 거야...”
온세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너나 예쁘게 화장해. 난 정말 괜찮아. 할 일이 너무 많아.”
이채린이 온세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대표님의 눈에 들지 못한다면 너라도 들면 좋잖아. 내가 보니까 직장에서 지지 않으려면 뛰어난 능력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 외에도 든든한 배경이 있어야 해. 만약 새로 오시는 대표님이 우리를 눈여겨봐 주시면 앞으로 회사에서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괴롭히지 못할 거야.”
오전 10시, 회사 1층 로비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들 공손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입구를 보면서 대표가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이채린이 사람들 틈에서 겨우 온세아를 맨 앞줄로 끌어냈다.
“너무 앞으로 나온 거 아니야?”
온세아가 뒤로 물러서려던 그때 대표가 도착했다.
십여 대의 경호 차량이 늘어선 가운데 최고급 롤스로이스 한 대가 회사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양복 차림의 남자가 내렸다. 훤칠한 키에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모습이 왕을 방불케 했다.
남자가 수십 명의 경호원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 위세가 당당하고 패기가 넘쳤다.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운에 압도되었다.
온세아 역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봤다. 시선이 남자에게 닿은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온세아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 부임한 대표가 그날 병원에서 날 진찰했던 그 남자 의사라니. 말도 안 돼. 저 사람 의사 아니야?’
그녀는 순간 헛것을 본 줄 알고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남자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온세아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권태혁이 온세아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본 거라 그녀가 잘못 볼 리 없었다.
칼로 깎아낸 듯한 완벽한 얼굴, 바로 어젯밤 온세아가 상상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정말 그 사람이야.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온세아는 머리가 윙 했다.
권태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2초도 채 머물지 않고 이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온세아를 아예 모르는 것처럼 차갑게 외면했다.
잠시 후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걸어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온세아는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재빨리 손으로 자신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 이거 꿈이 아니야. 아니면 이런 가능성도 있어. 오늘 새로 온 대표랑 그날 봤던 의사가 얼굴은 똑같지만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온세아가 요행을 바라며 생각했다.
옆에 있던 친구 이채린이 놀란 얼굴로 온세아를 잡아당겼다.
“온세아, 너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야?”
온세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뭐?”
이채린의 눈이 다 반짝거렸다.
“방금 대표님이 네 앞에서 잠시 멈췄잖아. 혹시 너한테 반한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네가 잘못 봤어.”
그러고는 진정하려고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세수했다.
이채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
온세아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동료들이 신임 대표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거 들었어요? 대표님 어머님이 남제 병원 병원장이시고 아버님이 뉴스에 나왔던 사령관이시래요. 어릴 적부터 군인 관사에서 자랐고 나중에는 해외 유학 가서 의학이랑 금융학 복수 학위까지 땄대요. 원래는 어머니의 병원을 물려받는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우리 회사로 왔는지...”
온세아가 동료들의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료들이 말한 남제 병원이 바로 그녀가 얼마 전 진료받았던 병원이었다.
알고 보니 신임 대표의 어머니가 그 병원의 병원장이었고 그 역시 의학을 전공했다.
‘망했어. 망했어.’
모든 증거가 그가 바로 온세아를 진료했던 남자 의사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걱정했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날 진료를 마친 후 온세아는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가 온세아가 다니는 회사로 왔다. 그것도 대표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는 사장이었고 온세아는 눈에 띄지 않는 말단 직원이었다. 하여 만날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온세아가 스스로를 안심시키자마자 과장 하이솔이 갑자기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세아 씨, 대표님께서 사무실로 좀 오래.”
그 말에 온세아가 움찔했다. 사무실의 동료들이 놀란 눈으로 일제히 그녀를 쳐다봤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에 온세아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어떡해? 결국 피할 수 없는 건가?’
제5화
하이솔이 서슬 퍼런 눈으로 온세아를 쏘아붙였다.
“무슨 사고라도 쳤어?”
대표가 부임하자마자 온세아를 부를 거라고는 온세아 본인은 물론 직속 상관인 하이솔을 포함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온세아가 억울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고 불안함에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피하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엮이는 것 같았다.
하이솔이 경고를 날렸다.
“사고를 쳤으면 세아 씨가 알아서 책임져.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그는 심미란의 사람이었다. 온세아가 하이솔의 밑에서 일한 지난 2년 동안 심미란의 사주를 받아 온세아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오늘 대표가 오자마자 직급을 건너뛰고 온세아를 불렀다는 건 그녀가 대표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 확신했다.
만약 그녀가 벌이라도 받게 된다면 오히려 심미란에게 보고하기에도 좋았다. 심미란으로부터 어떻게든 온세아가 잘못을 저지르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지난 2년간 온세아는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잘못을 덮어씌우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대표가 불렀다. 그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잘못이 크면 클수록 심미란이 더 만족할 터. 다만 그전에 온세아 때문에 하이솔에게 불똥이 튀는 건 확실히 차단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온세아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녀가 나가려던 그때 하이솔이 그녀를 덥석 잡더니 귓가에 대고 협박했다.
“대표님 앞에서 헛소리했다간 앞으로 내 밑에서 편하게 못 살 줄 알아.”
온세아가 조롱 섞인 눈길로 하이솔을 훑어보았다.
‘누가 들으면 지난 2년간 편히 산 줄 알겠네. 심미란의 사주를 받고 날 압박하고 직장 내 괴롭힘을 주도했잖아. 지금 제 발 저려서 이러는 거지? 내가 대표님한테 고자질이라도 할까 봐 가기 전에 경고하는 거라는 거 다 알아. 그런데 걱정하지 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확인하려고 가는 거니까. 너 같은 하찮은 인간은 안중에도 없다고.’
그녀는 눈을 흘기고는 하이솔의 손을 뿌리치고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대표 전용 구역인 맨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이 회사에서 2년을 일했지만 12층 위로는 발을 들여본 적이 없었다.
비서가 온세아를 대표실 문 앞으로 안내한 뒤 노크했다.
“들어와.”
안에서 남자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세아가 숨을 크게 내뱉자 앞머리가 가볍게 날렸다가 가라앉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표실이 차가운 블랙과 화이트 톤으로 꾸며져 있었고 딱딱한 라인이 주인의 냉철한 성격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녀가 들어갔을 때 훤칠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낯이 익었다.
온세아의 존재를 잊었는지 그녀가 들어온 뒤에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려선 안 되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진료실 침대 위에서 그가 진찰하던 그 순간들...
‘세상에나.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스스로를 자책하던 그때 날카롭고 깊은 시선이 그녀의 몸을 훑는 게 느껴졌다.
온세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남자가 어느샌가 고개를 들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단 한 번의 눈맞춤이었지만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몰려왔고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날 보고 많이 놀랐나 봐?”
권태혁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지만 눈빛은 여전히 서늘했다. 전처럼 예의 바르게 굴지 않았고 상사의 카리스마를 뽐냈다.
긴장한 탓에 온세아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고 목소리도 심하게 떨렸다.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해서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습니다.”
권태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말은 나한테 반했단 뜻인가?”
“말단 직원인 제가 어찌 감히 대표님께 딴마음을 품겠어요. 그저 존경하는 마음뿐입니다.”
겁에 질린 온세아가 다급히 해명했다.
눈앞의 남자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풍겼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 같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권태혁이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
온세아는 다시 한번 멍해졌다. 권태혁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질문은 그날 진료실에서 그녀를 진찰했던 남자가 본인임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조금... 나아졌어요...”
온세아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어색하게 대답했다. 차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권태혁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세아 씨 그 병 쉽게 나을 병이 아니야.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
그 말에 온세아가 움찔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설마 그 욕구가 생길 때마다 해결해주겠다는 뜻인가?’
온세아가 괜한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권태혁을 만난 순간부터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사무실에 단둘이 있는 지금 이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욕망이 강렬하게 치솟았다.
‘망했다. 병이 또 도지려나 봐.’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용건이 없으시면 이만 내려가서 업무를 보겠습니다.”
온세아가 허벅지에 힘을 주면서 다급하게 말했다. 권태혁의 앞에서 더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 이 상황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 생각에 그녀는 서둘러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도 된다고 했어?”
뒤에서 권태혁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세아가 걸음을 멈추고 초조하게 물었다.
“다른 지시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온세아를 쳐다보는 권태혁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훤칠한 키에 넓은 어깨를 지녀 비율이 완벽했다. 검은색 양복바지 아래로 뻗은 다리가 길고 곧았다.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외모였다.
‘이런 남자랑 잠자리하면 어떤 기분일까?’
온세아가 혼자만의 상상에 빠졌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권태혁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권태혁이 어느새 다가와 온세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표님이랑 하고 싶어요...”
하마터면 본심을 내뱉을 뻔했다가 간신히 말을 돌렸다.
“일을요. 대표님 옆에서 일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권태혁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에게서 풍기는 진한 남성적인 향기가 온세아를 에워싸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의 남성적인 향기에 온세아는 더욱 더 갈망했다. 결국 욕망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졌다. 하마터면 속마음을 다 말해버릴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권태혁이 온세아를 빤히 내려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온세아가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졸였다. 조금 전 감히 권태혁의 몸을 탐냈던 마음을 들켰을까 봐 겁이 났다.
‘화가 많이 났겠지?’
당장 온세아를 해고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마침 비서가 필요했는데. 내일부터 내 비서로 일하도록 해.”
제6화
온세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 비서로 승진시켰어? 날 높이 띄워준 뒤에 떨어뜨리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대표님, 저 비서 업무를 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요...”
온세아가 본능적으로 거절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온통 권태혁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인데 비서가 되어 매일 그를 마주한다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권태혁이 깊은 눈으로 온세아를 쳐다봤다.
“승진하기 싫어?”
온세아가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생각에는...”
권태혁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이 회사의 대표가 나야, 세아 씨야?”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당연히 앞에 있는 대표님이시죠.”
권태혁이 거절을 허용할 수 없는 말투로 명령했다.
“가서 업무 인수인계하고 내일부터 대표실로 출근해.”
“하지만...”
온세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대표님의 몸을 탐하면 어쩌려고 이러시지? 만약 내가 자제력을 잃고 대표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권태혁이 다소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사표 써.”
온세아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권태혁은 그녀가 승낙한 것으로 간주하고 곧장 책상 앞으로 돌아가 업무를 처리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온세아는 하이솔의 비아냥거림과 호기심 어린 동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컴퓨터를 켜고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자 몸속을 달구던 뜨거운 기운도 꽤 많이 가라앉았다.
“온세아, 대표님이 왜 너만 따로 부르신 거야? 혹시 너한테 반하신 거 아니야?”
이채린이 고개를 쑥 내밀고 다가와 반짝이는 두 눈으로 물었다.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그분은 대표님이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한테 반할 리가 있겠어?”
온세아가 타이핑하면서 대답했다.
“네가 어디가 평범해? 이번 달만 해도 내가 대신 치워준 장미꽃이 스무 다발이 넘어. 이 외모에 이 몸매면 대표님이 첫눈에 반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지.”
‘첫눈에 반해?’
타이핑하던 온세아가 멈칫했다.
‘만약 대표님이 정말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면 잠자리할 기회가 있는 거 아니야? 훤칠한 키에 탄탄한 허리, 긴 다리까지... 그쪽으로 엄청 대단할 것 같은데.’
‘뭐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온세아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헛소리 말고 일이나 해.”
그녀는 계속해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그러다가 퇴근 전에 간신히 인사팀에 메일을 보냈다.
온세아가 짐을 정리하던 그때 하이솔이 서류 뭉치를 그녀의 책상에 던지며 차갑게 웃었다.
“이거 다 처리하고 퇴근해.”
그녀의 시선이 수북이 쌓인 서류로 향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하이솔이 또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심미란에게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온세아를 잘 ‘교육’해야지 않겠는가?
지난 2년간 이유 없는 야근이 일상이었다. 오늘 신임 대표의 부름을 받은 게 하이솔의 질투와 불만을 산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온세아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었다.
“과장님,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났어요. 죄송하지만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온세아가 하이솔의 요구를 가차 없이 거절했다. 그러자 하이솔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늘 순종적이던 온세아가 반기를 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오늘 대표님이 따로 불렀다고 해서 날 안중에 두지 않아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이 팀의 결정권자는 나야. 감히 상사의 명령을 거역해? 확 잘라버린다?”
하이솔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호통치든 말든 온세아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그럼 자르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정리한 짐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나섰다. 뒤에서 하이솔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온세아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걸었다. 이 시간이면 남편 구형민도 집에 없었다.
결혼 후 1년 동안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았다. 심지어 저녁을 같이 먹는 것조차 드물었다.
예전엔 그저 구형민의 성격이 워낙 차가워서 신혼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깨달았다. 그의 마음속에 온세아가 없었던 것이었다.
대충 저녁을 때우고 집에 들어갔을 땐 꽤 늦은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구형민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온세아를 보기 싫어해도 밤 9시 전에는 무조건 귀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밤 11시가 되는데도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온세아가 소파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용기를 내어 구형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신호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구형민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온세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아직 그녀의 번호조차 저장하지 않았다.
결혼한 지 1년이나 되는데 남편의 휴대폰에 아내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무슨 일이야?”
온세아인 걸 안 순간 구형민의 말투가 바로 차가워졌다.
“시간이 늦었는데 언제 들어와?”
온세아가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휴대폰 너머의 구형민이 잠시 침묵하더니 귀찮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응.”
‘응이라니? 언제 들어오느냐고 물었는데 이게 무슨 대답이야?’
그런데 온세아가 다시 묻기도 전에 구형민이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그녀가 휴대폰을 꽉 쥐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내로서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걱정해준 것뿐인데 불쾌하다는 티를 아주 팍팍 냈다.
온세아는 구형민을 더 기다리지 않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한 뒤 침대에 누웠다. 잠들기 전까지도 구형민이 들어오지 않았다.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가 들어오지 않은 바람에 잠자리가 매우 불편했고 악몽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회사에서 하이솔이 괴롭히는 꿈을 꾸다가 또 구형민이 그녀와 이혼하고 온아정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꿈까지 꾸었다.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사표를 냈으니 오늘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간밤의 악몽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몸속에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더니 또다시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온세아가 괴로움을 참으며 내려가 아침을 준비했다. 이렇게라도 주의를 돌려보려 했다.
구형민의 방을 지나가다가 방이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가 어젯밤에 외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몸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 병이 도진 것이었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몸을 움직였다. 머릿속에 구형민이 외박한 이유가 맴돌았다.
‘어젯밤에 온아정이랑 함께 있었던 걸까?’
생각하면 할수록 괴로웠다. 심리적인 고통보다 육체적인 갈증이 더 컸다. 가질 수 없을수록 더욱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권태혁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마침 온세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화를 받을 경황이 없었으나 실수로 화면을 건드린 바람에 통화가 연결되고 말았다.
권태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휴대폰 너머로 온세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