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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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오랜 기간 지병을 앓고 있고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유지영은 정왕 세자 배준형과 혼인하고 삼 년 동안 지아비를 살뜰히 섬기며 현모양처 역할...

Chương (1)

第1章

황제는 오랜 기간 지병을 앓고 있고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유지영은 정왕 세자 배준형과 혼인하고 삼 년 동안 지아비를 살뜰히 섬기며 현모양처 역할을 했다. 본디 그녀는 밖에서 길러진 태후의 딸이었다. 태후는 딸을 어여삐 여겨 배준형을 태자의 자리로 올렸다. 책봉식 전, 유지영은 정왕부를 위해 불공을 드리러 산속 사찰로 갔다가 길을 잃고 산적들에게 붙잡혔다. 삼일 간 온갖 혹형과 능욕을 당한 후, 경성의 성문 앞에 짐짝처럼 버려졌다. 체면을 보전하기 위하여 배준형은 진실을 조사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회임한 그녀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다. 숨이 끊어지기 전, 사촌동생 유선주는 산적은 자신이 매수하였으며 이제 곧 태자비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유선주는 더러운 술수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고 그녀의 자리와 모든 것을 차지했다. 그 배후에는 배준형의 침묵과 관용도 빠질 수 없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유지영은 성년례 전날로 회귀했다. 그녀는 수구를 던져 망나니로 알려진 경왕 세자 배현준과 혼인을 약속했다. 경성 사람들 모두 그녀를 비웃었으나, 결국 배현준은 태자가 되었고 그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반면 배준형은 반역에 패배하며 정왕부 일가가 죄인으로 몰리게 되었다. 사슬을 차고 지나가던 배준형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유지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영아, 너는 본디 내 부인이었어야 했어!” 제1화 7월의 장안 거리는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마차 한 대가 성문 입구에서 멈추었다. 털썩! 유지영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마대에 담겨 바닥에 내던져졌다. 온몸으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특히 하반신에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읍….” 지나가던 백성들이 소리를 듣고 마대를 풀어주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사내의 옷가지를 걸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얗고 가는 목덜미 아래에는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이 사람은 정왕 세자비 아닌가?” 누군가가 유지영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옷매무새가 이 모양인 것을 보아 불결한 일을 당한 것 같군. 참 어여쁜 처자였는데 안됐어.” 유지영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도움을 구하고 싶었지만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흘 전, 그녀는 사찰로 불공을 드리러 가다가 중도에 납치를 당해 눈이 가려진 채 인적 없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 뒤로 매일이 고통이었다. 죽도록 맞았고, 고통 속에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나면 또다시 고통이 이어졌다. 그렇게 그녀에게 지옥을 선물한 자들은 사흘째 되던 날, 마차에 그녀를 싣고 번화가로 가 짐짝처럼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하기는커녕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다. 유지영은 해명하고 싶었지만, 독을 당해 목소리를 잃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뻔뻔하게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정신이 제대로 된 처자라면 결백을 잃은 후에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자결했을 테야.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 세상인데.” 마침내 한 시진 후, 소식은 정왕부에 전해졌다. 정왕부에서는 마차를 한 대 보내왔다. 두 시종은 그대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그중 한 명은 그녀의 얼굴에 침까지 뱉으며 비아냥거렸다. “차라리 밖에서 죽지. 정왕부의 명성에까지 먹칠하면서 살아 돌아올 건 뭐야.” 유지영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들것에 실어 왕부로 끌고 갔다. 태비는 지팡이를 짚은 채 음침한 얼굴로 내전으로 들어섰다. 마침 병풍 뒤에서 시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달려나온 시녀는 노태비의 싸늘한 눈빛에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태… 태비마마, 세자비께서 하혈이 심하신데, 어의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막돼먹은 것! 외간사내에게 순결이 더럽혀진 불결한 것이 무슨 자격으로 어의의 진찰을 받는단 말이냐! 여기서 집안 망신을 더 시키라고!” 태비의 분노한 호통에 내전 안에는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태비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는 배준형을 불러 세웠다. “준형아, 세자비 유씨는 이미 순결이 더럽혀졌는데 너는 어찌 처리할 생각이냐?” 배준형이 놀란 얼굴로 태비를 바라보았다. “할머니….” “유씨가 정체 모를 자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거의 벌거벗겨진 채 성문 앞에 내던져졌다. 이 상황에서도 저 아이를 두둔할 생각이냐?” 말을 마친 태비는 지팡이로 힘껏 바닥을 쳤다. “폐하께서 중병으로 앓아누우시고 슬하에 황위를 이을 황자가 없으신 상황이다. 최근 들어 태후께서 네 아버지를 빈번히 궁으로 부르시어 너를 태자로 책봉하실 뜻을 내비치셨다. 유씨의 상황이 안타깝긴 해도 제 팔자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태비의 눈에는 살기가 담겨 있었다. 겁에 질린 시종들이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할머니,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배후에 숨은 범인을 찾는 일이 아닙니까?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마차는 경왕 세자의 마차였다고 합니다. 제가 경왕부를 찾아가 지영이의 억울한 한을 풀어줄 것입니다!” 짝! 듣고 있던 태비가 배준형의 뺨을 후려쳤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하얀 얼굴에는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 일을 어전까지 끌고 갈 생각이냐? 어차피 증거를 잡는다고 해도 태후께서는 곤장 몇 대 치고 끝내실 것이다. 이미 명성이 더럽혀진 아이다. 네가 일을 크게 만들수록 우리 정왕부의 체면만 깎이는 것을 왜 모르느냐! 어찌 이리 어리석으냐!” 태비는 분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유지영은 병풍 뒤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하반신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간신히 입술을 깨문 채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로 병풍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끝에는 역겨운 피 냄새가 진동했다. 태비의 각박한 말들이 예리한 칼이 되어 그녀의 지친 가슴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결백을 잃은 여인은 죽어 마땅하다!” 태비는 병풍을 노려보며 거침없이 악담을 이어갔다. “준형아, 유선주 그 아이도 너와 어린 시절부터 정을 쌓아온 아이 아니더냐. 그 아이의 아버지와 오라비 모두 조정의 중임을 맡은 대신들이고 어여쁘기까지 하니, 그 아이와 혼인한다면 네 앞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이야. 유지영 저 아이는 그냥 잊어버리거라.” 유지영은 숨이 턱 막힐 듯했다.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지만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배준형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그와 혼인하고 3년, 한때는 서로를 공경하고 연모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작게 들린 “알겠다”는 한마디가 청천벽력처럼 그녀의 귀를 강타했다. 그녀는 더 이상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놓아버렸다. 태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명을 내렸다. “여봐라! 가서 유씨 집안 사람들을 불러 세자비가 위독하니 속히 왕부로 오라고 전하여라!” 분부를 받든 시종은 허겁지겁 대문을 향해 달려가며 세자비가 곧 세상을 떠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유씨 집안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다름 아닌 유선주였다. 그녀는 병풍을 돌아 유지영 앞에 나타났다. 그러고는 멀찍이 서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더니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 짓을 하였나요. 할머니께서 아시면 얼마나 상심하시겠어요.” 목소리는 울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침상에 가득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깝게 되었네요. 의원 말을 들어 보니 사내아이였다고 하던데, 이 아이를 3년이나 바라왔던 언니는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유지영은 증오에 찬 눈으로 유선주를 노려보았지만 비명 한마디 지를 수 없었다. 납치를 당한 당일, 그녀는 혼란을 틈타 납치범들의 입에서 유선주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납치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히 유선주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언니, 안심하고 가세요. 미래의 태자비, 아니 미래의 황후 자리는 내가 언니를 대신해 잘 지킬 테니까요.” 유선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 참. 그래도 한때 가족이었는데 가기 전에 왜 이리 되었는지 연유는 알려줘야겠죠? 언니 곁의 시녀들은 모두 내가 매수했어요. 언니가 산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날 언니를 납치한 사람도 경왕 세자가 아닌 내 아버지 사람들이고요.” “경왕 세자를 끌어들인 것은 준형 오라버니를 그 자리에 올리기 위함이었죠. 그 멍청한 놈은 언니가 청운산에서 길을 잃고 갇혔다는 말을 듣더니 정말 사흘 밤낮을 청운산을 떠나지 않고 수색했더라고요? 흔적을 잔뜩 남겨서 우리가 손을 쓸 필요도 없었죠. 언니가 떠나 있는 동안 세자 오라버니의 곁을 지킨 것도 나예요. 나와 세자 오라버니야말로 진정한 사랑이었다고요.” “하!” 유지영은 안간힘을 써서 손을 뻗어 유선주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손에 비녀 하나가 쥐어졌고, 유선주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제 어깨를 힘껏 찔렀다. “언니!” 그러더니 유선주가 당황한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주저 없이 주먹을 유지영의 어깨에 휘둘렀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녀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선주야, 괜찮느냐?” 배준형은 안쓰러운 얼굴로 유선주를 부축했다. 유선주는 다친 왼쪽 어깨를 손으로 잡더니 배준형의 품에 몸을 기댔다. “제가 오라버니의 세자비가 된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배준형은 잔뜩 실망한 눈으로 유지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실망이다, 지영아! 내가 선주와 혼인하려 한 것도 모두 정왕부의 명예를 위함이었거늘. 어찌 죄 없는 선주를 원망할 수 있어? 어렸을 때부터 넌 선주를 괴롭히고 매사에 선주에게 시비를 걸었지. 오늘 네가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하늘이 알고 천벌을 내린 것이야!” 천벌이라는 말에 유지영은 그저 웃고만 싶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눈을 찌르고만 싶었다. ‘내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너희는 내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구하고 나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구나.’ “더 이상 입씨름할 것도 없다.” 태비의 싸늘한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전해졌다. “처결하거라!” 손에 비수를 든 어멈 둘이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 오라버니, 저… 너무 무섭습니다.” 유선주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배준형은 그런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며 작은 소리로 위안했다. “살아서 모두의 비난을 받으며 목숨만 붙어 있기보다는 차라리 열녀라는 명성을 남기고 세상을 뜨는 것이 지영이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도 지영이를 위해서 이러는 게야.” 어멈들은 양쪽에서 유지영의 어깨를 꽉 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유지영의 가슴에 비수를 찔러 넣었다. 예리한 칼끝이 피부를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관통했다. 유지영은 오래전 혜공대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 아이는 전반생에 일생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대사의 예언이 맞았던 것 같았다. 다음 생이 정말 존재한다면, 반드시 내게 해를 가한 모두에게 피의 복수를 하리라! 제2화 종령각 이층 누각. 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 전생의 배준형도 성년례 하루 전에 인주에 도착해 그녀에게 혼약을 청했다고 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고, 정원에 들어서니 비단옷을 입은 호위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부인, 지영이는 제게 그저 여동생 같은 사람이고, 선주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입니다. 만약 이런 감정을 가지고 지영이와 혼인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지요.”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이번 생에 저는 선주 한 사람만 사랑할 것이고,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왕부가 유씨 집안과 혼약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확히 누구와 혼인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늘, 어찌 선주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배준형은 대전에 우뚝 서서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한때는 유지영도 그런 그를 마음에 품었던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배준형은 유씨 저택에서 일 년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정왕부로 돌아간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매년 명절 때는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양가는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거 그녀는 그의 나약함과 가식적인 면모를 뼈저리게 증오했었다. 한때 절절했던 사랑도 결국 그가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과거 서 태후는 입궁하기 전 혼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모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술가의 말이 궁중에 계신 선제에게 전해져 강제로 입궁해 황후가 되었다. 그때 태후는 뱃속에 유지영을 품고 있었다. 서 태후가 선제와 어떤 협상을 이뤄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제는 서 태후가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했다. 단지 아이의 출생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한때 친우이자 유씨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담혜정에게 딸을 맡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담혜정은 유지영이 여섯 살 나던 해에 지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의 슬하에서 컸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배준형은 이 진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짝, 짝!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송씨는 외출할 때마다 유지영과 유선주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동갑인 두 자매는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났다. 겉으로는 딸인 유선주와 유지영을 제 자식처럼 아끼며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세가의 서녀 출신인 송씨가 유지영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전생에 유지영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고, 유지영의 화려한 외모 또한 마음에 들었기에 신혼 초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유지영에게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고, 정왕부는 황위 경쟁 한복판에 있었기에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속도 모르고 허구한 날 애정을 갈구했고, 배준형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훗날 유지영이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을 때는 역겨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그녀가 빨리 죽어주기만을 바랐다.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유지영보다는 착하고 대범한 유선주가 좋았다. 유선주는 유지영처럼 그를 아래에 두고 자존심을 짓밟지 않고, 늘 공경하는 시선으로 우러러보았다. 게다가 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도 있었으니, 경성의 모든 사내가 욕심내는 신부감이었다. 결국 그는 그런 유선주와 혼인해 온 경성의 부러움을 샀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만큼, 배준형은 한시라도 빨리 유선주와의 혼사를 정하고 싶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송씨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대전 안의 시녀들마저 비웃음을 머금었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가 앙칼진 목소리로 명했다. “감히 언니의 정혼자를 탐내다니! 내 이것을 그냥!”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송씨의 말에 유지영도 차가운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송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유지영의 공격적인 말투와는 달리, 유선주는 대범하게 예를 행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송씨가 계속 재촉했다.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선주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내가 꼭 너여야만 한다고 한 거니까.” 유선주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장녀는 지영 언니이니 저는 언니의 정혼자를 빼앗을 수 없어요. 게다가 내일이 바로 언니의 성년례이고, 집안에서는 이미 대외적으로 언니가 내일 혼약을 정할 거라고 선포하였는데 어찌 저 때문에 가문의 체면에 먹칠할 수 있겠어요. 세자 오라버니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아는 유선주는 온순하고 욕심이 없는 착한 처자였다. 그리고 유지영은 그녀와 반대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지영은 배준형의 입에서 더 듣기 싫은 말이 나오기 전에 유선주의 말을 가로챘다. “세상에 사내가 정왕 세자 한 명뿐인 것도 아닌데, 네가 좋으면 가지면 되지 왜 굳이 내게 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거니?” 유선주는 고개를 들더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지영을 보았다. “언니?” “선주야!” 배준형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싸늘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도 허락하였으니 너는 그저 정왕부의 혼약을 받아들이면 된다. 아마 내일 성년례에서 지영이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유선주는 불안한 눈으로 송씨를 바라보았다. 송씨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유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지?’ 제3화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 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손녀를 총애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유씨 노부인은 담혜정이 남기고 간 거액의 지참금과 매년 담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풍성한 선물들 때문에 그녀를 떠맡았을 뿐이었다. 유지영이 말이 없자 유씨 노부인의 안색이 차갑게 바뀌었다.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느냐? 이제는 이 할미 말도 듣지 않겠다는 거니?” 말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표독스럽게 번뜩이는 눈에서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지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 배준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들은 끝까지 강요하더니 이제는 불효의 죄명까지 씌우려는 듯했다. “언니, 할머니 뜻대로 하세요.” 유선주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배준형을 돌아보았다. “세자는 저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보아하니 선주는 세자와의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군요. 제게 자꾸만 혼사를 강요하는 걸 보면 말이죠. 제가 보기엔 유씨 가문과 정왕부는 사주가 맞지 않아 사돈이 될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세자도 더 이상 선주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배준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영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 조급해진 송씨의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지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자께서는 선주와의 혼인을 원한다고 하셨는데, 정작 선주는 계속 사양하면서 자꾸만 저를 끌어들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 혼인을 원치 않으니 혼약을 없던 일로 하자는데,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다시 삶을 살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가식적인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모조리 벗겨낼 생각이었다. “너….” 송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배준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선주에게 물었다. “정녕 이 혼사를 원치 않는 것이냐?” 유선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저는 그저 언니를 위해 그런 건데 어찌 저에게….” 말을 마친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유지영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자께서는 오늘 예물까지 준비해 여기까지 오셨어.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쌍 같구나. 내일 내 성년례에서 어찌할지는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모두의 시선이 유지영에게 쏠렸다. “지영이가 왜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나 했더니 이미 마음에 둔 이가 있었구나. 누구니? 내가 아는 사람이니? 너도 참,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송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궁금한 얼굴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반면 유씨 노부인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호통쳤다. “수치도 모르는 뻔뻔한 것! 너 때문에 집안 망신을 다 당하게 생겼구나!” 노부인은 연유도 묻지 않고 유지영을 단죄했다. “언니, 어느 집 공자와 눈이 맞았나요?” 유선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만 하면 어머니께서 그 집안을 찾아가 혼약을 주선해 주실 거예요.” 송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넌 이미 결백을 잃었으니 좀 부끄럽긴 해도 내가 나서서 혼약을 청하러 가마.” 세 사람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유지영을 파렴치한 죄인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지영에게 쏠렸다. 유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숙모님께서는 할머니가 저를 잘못 가르쳐서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는 뜻인가요?” 송씨는 음침하게 변한 유씨 노부인의 안색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 다급히 말했다. “허튼소리!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네 입으로 내일 성년례 때 대비책이 있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니? 정왕 세자께서 너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 마당에 혼약을 정할 상대가 따로 있다면 분명 외간사내와….” 그녀는 끝내 사통이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담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언니, 사람들 앞에서 언니가 직접 한 말이잖아요.” 유선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난 분명 내일 성년례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혼약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송씨 모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선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 원래 계획이 틀어졌으니 저도 이제 마음에 없는 사람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유씨 가문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내일 수구(양반가 규수가 공개적으로 신랑감을 간택하는 행사에서 예비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비단 공)를 던져 현장에서 정혼자를 정하겠어요.” 유지영이 말했다. “내일 저택에 적지 않은 사람이 몰릴 테니 수구를 받길 원하는 미혼의 사내들을 모두 참석시키도록 하죠. 수구를 받은 자가 누구든, 혼약이 없고 도박 같은 악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송씨를 돌아보았다. “숙모님, 이래도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은 건가요?” 송씨는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 말에 유씨 노부인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무모한 짓을 하려는구나!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수구로 신랑감을 고르겠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유씨 집안 딸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 아니냐!” 유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지영아, 사실 내게 혼약이 없는 친정 조카가 한 명 있단다. 너와 나이도 비슷한데 네가 원한다면 숙모님이 주선해 주마. 송씨 가문으로 시집가면, 장차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집에서 너를 홀대하진 않을 것이다.” 송씨는 매우 신중한 어투로, 마치 다 너를 위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송씨가 말한 그 조카에 대해 유지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낙마한 탓에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적출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죄 없는 시녀들을 괴롭혀 죽인 못된 인물이었다. 열여덟 살에 술에 취해 귀족가 규수를 희롱했다가 상대 집안에서 몽둥이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도, 송씨 집안에서는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 쓰레기를 감히 추천하다니! “어머니, 지영이는 고집이 세서 너무 높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선주는 태어날 때부터 복덩이로 불렸으니, 정왕부로 시집가면 장차 분명히 세자의 앞길에 도움이 될 거예요.” 송씨는 웃으며 유씨 노부인을 재촉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겹경사로 치고 내일 둘이 동시에 혼약을 맺는 게 어떠신가요?”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유지영을 훑어보다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숙모님도 다 널 위해 한 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 혼사를 참 급하게 정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작은어머님의 제안에 저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허나 저와 정왕부의 혼약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이 일 역시 담씨 가문에서 주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혼녀가 선주로 바뀌었으니, 그쪽에서 불쾌하게 생각해 숙모님이 욕심에 혼약을 바꾸었다고 여긴다면 유씨 가문의 명성과 작은아버지의 승진에 영향이 가지 않겠어요?”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꿈에도 경성으로 돌아갈 날만 그리고 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경성의 생활을 경험한 욕심 많은 늙은이가 어찌 인주의 삶에 만족하겠는가? 마침 담 대인은 이부상서로, 관원들의 승진을 관장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훼방을 놓는다면 유씨 가문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역시나 노부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수구를 던졌는데 송가의 아들이 받는다면 어떡할 거냐?” 송씨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럼 그것도 인연이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선주와 정왕 세자의 사이를 의심하지도 않을 테고요.” 그 말을 들은 송씨는 노부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사실 지영이 말도 일리가 있네요. 유씨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지영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유선주도 다급히 거들었다. “할머니,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해요.” 노부인은 두 사람이 졸라대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말했다. “그럼 누가 되든 후회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럴 일은 없어요.” 유지영은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유씨 노부인은 한심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사람을 시켜 무대를 만들게 하고, 내일 가문의 장녀가 수구로 정혼자를 택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게 했다. 곧이어 유씨 노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준형과 유선주는 사주단자를 교환했다. 유선주와 혼인하기 위해 배준형은 중매 어멈까지 데리고 왔다. 유지영은 그들이 뭘 하든 관심이 없었기에 조용히 자리를 떠 종령원으로 돌아왔다. 정원에 들어서니 조용히 마당을 쓸고 있는 홍주가 보였다. 전생에도 그녀에게 충성하던 아이였는데, 실족사로 죽었었다. “홍주야!” 유지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홍주를 불렀다. 홍주는 제 귀를 의심하며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가씨, 소인을 부르셨나요?” “외출할 테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거라.” 홍주는 놀란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소인은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삼등 시녀일 뿐인데, 어찌 저를 데리고 외출하신단 말씀이신가요?” 주향이 입을 삐죽이며 경멸 섞인 어투로 말하자, 유지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누굴 데리고 나가든 시녀인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 주향은 당황하더니 싸늘한 얼굴의 유지영을 보고 다급히 사죄했다.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꿇어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어나지 말고 반성하고 있거라!” 유지영의 명령에 주향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정원에 무릎을 꿇었다. 유지영과 홍주가 정원을 나서자, 그녀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저러니 정왕 세자께도 버림을 받지.” 제4화 측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른 둘은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향하다가 골목을 지나 취선루에 도착했다. 홍주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문앞에서 잘록한 허리를 씰룩이며 호객하는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 아가씨, 저희가 올 곳이… 아닌 것 같은데요.” 유지영은 이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그가 왔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전생에 그녀가 배준형과 혼약을 정한 뒤, 그는 찾아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커다란 야명주만 선물로 보내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만약 배현준이 도와준다면 앞으로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유지영은 품에서 은표와 초대장을 꺼내 홍주에게 쥐여주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홍주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 소인은 못하겠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면 너를 일등 시녀로 올려 주고, 매달 녹봉으로 은 세 냥에다가 끼니마다 닭다리를….” 끼니마다 닭다리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홍주의 두 눈이 번쩍이며, 곧바로 은표를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홍주가 헐레벌떡 뛰어나오며 말했다. “아… 아가씨, 잘 전달했습니다.” 그녀는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경왕 세자께서 소인에게 주신 포상이에요. 소인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은표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꿈만 같아요!” 그녀는 그저 유지영의 지시에 따라 은표를 포주 어멈에게 전하고, 경왕 세자가 있는 곳을 알아낸 뒤 그에게 향낭을 보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경왕 세자는 주변 사람들을 물리더니 홍주를 가까이 불러 말을 전하라고 했다. “소… 소인은 지영 아가씨의 명으로 초대장을 전하러 왔습니다. 아가씨께서 내일 성년례에서 수구로 정혼자를 간택하실 예정인데, 세자께서 꼭 와 주셔서 수구를 받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일생이 달린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경왕 세자는 곧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경왕 세자이지 정왕 세자가 아니다!” “아가씨께서 경왕 세자께 꼭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배현준은 멈칫하더니 초대장을 받았다. 익숙한 필체를 본 그는 배준형이 오늘 유씨 저택을 찾아가 유선주와 혼약을 정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은표 뭉치를 꺼내 홍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서 너희 아가씨께 꼭 갈 테니 안심하라고 전하거라!” 마차에 돌아온 홍주는 지금도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유지영은 실소를 터뜨리며 홍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앗! 아픕니다!” 홍주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만지작거리더니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꿈이 아니었네요!”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거리에서 백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국공부의 선주 아가씨와 정왕 세자께서 혼약을 정했다더군.” “정왕 세자라면 장녀인 지영 아가씨와 혼약이 있었던 분 아닌가? 어쩌다 약혼녀가 선주 아가씨로 바뀌었대?” “지영 아가씨는 온화하고 성품이 부드러운 선주 아가씨와 달리 성정이 사납다더군. 듣자 하니 정왕 세자께서 직접 저택을 찾아가 혼약을 청했다더라.” “몇 년 전부터 유씨 가문에서는 장녀의 성년례에서 혼약을 정한다고 공표했는데, 정혼자가 다른 이와 혼약을 맺었으니 그 장녀는 대체 누구와 혼약을 정한다는 거지?”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홍주는 그 말을 듣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달려가려 했다. “저것들이 감히 아가씨를 험담하다니! 제가 가서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거기 서!”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홍주에게 말했다. “한두 사람의 입을 막을 수는 있어도 모두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없다. 내일 다시 보자꾸나.” 불과 한 시진 만에 인주성 전체가 유지영이 정왕 세자에게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왕부에서 둘째인 유선주와 혼약을 정하면서, 장녀인 그녀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유지영이 성년례에서 수구를 던져 약혼자를 간택한다는 소문은 날개 돋친 것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깊은 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침상에서 내려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은한 술향기와 함께 준수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영아, 진심으로 내가 수구를 받길 바라느냐?” 배현준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홧김에 내린 결정은 아니고?” 유지영은 정중히 답했다. “아닙니다.” 그녀의 입에서 확신의 답을 듣게 되자 배현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옥패를 떼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걱정 말거라. 내일 던지기만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로챌 테니!” 만약 누군가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검으로 찔러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수구를 받아 낼 것이다. 유지영은 그의 능력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전생에 배현준과 배준형은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었다. 온화하고 글공부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배준형은 경성에서 모두에게 칭송받는 귀공자였다. 반면 배현준은 먹고노는 데 정신이 팔린 악명 높은 망나니였다. 배현준은 어머니인 선대 경왕비가 돌아가신 뒤, 경왕이 새 장가를 들면서 새 왕비를 데리고 영지를 떠나는 바람에 홀로 경왕부에 남아 지내게 되었다. 경왕은 슬하에 아들 셋을 두고 있었는데, 적장자인 배현준은 진작에 포기한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또한 틈만 나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배현준을 세자에서 폐하고 차남을 세자의 자리에 올려달라 청했다. 물론 황제는 매번 거절했지만 경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지영은 전생에 그가 복면을 쓰고 창을 휘두르며, 단지 그녀가 떨어뜨린 향낭을 찾기 위해 홀로 산적 소굴을 소탕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가 취미로 지은 시가 세상에 알려져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때 그녀는 궁금증에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나쁜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다니나요?” 배현준은 그런 그녀를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괜한 간섭은 하지 말라며 자리를 떴더랬다. 문무와 용모 모두 배현준이 배준형보다 훨씬 뛰어났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실종된 삼일 동안, 그가 꼬박 사흘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맸다는 점이었다. 그에 비해 부군인 배준형은 그녀가 살아 돌아온 것조차 수치스럽다며, 태비의 손에 그녀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모두가 배준형을 올곧은 귀공자라고 칭송하지만 유지영은 그의 가식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랑 대화 중인가요?” 소리를 들은 주향이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유지영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가에 서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인, 분명 사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주향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방 안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유지영은 느긋하게 의자에 앉았다. 낮에는 배준형과의 혼약을 물리느라 바빴고, 이제는 종령원의 사람들을 정리할 차례였다. 그녀는 주향이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는데도 가만히 지켜볼 뿐, 제지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주향은 무심코 중얼거리다 유지영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아가씨, 소인 정말 방 안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단 말입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유지영은 곧바로 명을 내렸다. “쳐라!” 홍주가 달려와 주향의 귀뺨을 날렸다. “어디서 감히 그런 허튼소리를 지껄여? 아가씨께서 낮에 외출하실 때 널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고 이런 식으로 아가씨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거야?” 주향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홍주를 노려보았다. “네가 감히 날 쳐?” 유지영은 음침한 얼굴로 주향을 노려보았다. 살기등등한 그 눈빛에 주향은 겁에 질려 목을 움츠리더니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들은 운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서 고씨 어멈을 불러오거라.” 유지영이 지시를 내렸다. 운교는 주향과 홍주를 번갈아보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 시간도 늦었는데 어멈까지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주향도 아가씨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시 결례를 범한 것 같은데, 이만 화를 푸시고 편히 쉬세요.” 운교를 필두로 유지영의 신변에는 네 명의 측근 시녀가 있었는데, 마침 오늘은 운교와 주향, 두 사람이 당직이었다. 과거에도 일만 생기면 운교는 조용히 덮고 넘어가라고 그녀에게 권고했었다. “내일이 성년례인데 일이 커지면 아가씨께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쉬러 가세요.” 운교는 재빨리 주향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주향이 씩씩거리며 일어서더니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쾅! 유지영은 탁자 위의 찻잔을 들어 집어던졌다. 자기 조각이 바닥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내가 언제 일어나도 된다고 했느냐? 이제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는 것이냐!” 주향이 화들짝 놀라 다시 주저앉았다. 운교마저 안색이 창백해졌다. “홍주, 가서 장 부관을 불러오너라. 지금 당장!” 명을 들은 홍주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예, 아가씨!” 관리 어멈에서 저택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부관까지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유지영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또 다른 시녀, 운성과 운단 자매가 안으로 들어왔다. 애교 많은 운성이 앞으로 나서며 유지영을 달랬다. “아가씨, 부디 노여움 푸세요. 이러다 몸 상하시면 아가씨만 손해입니다. 화가 안 풀리면 차라리 저희에게 매질이라도 하세요.” 옆에 있던 운단도 정신을 차리고 거들었다. “그래요, 아가씨. 고작 세자가 무슨 대수인가요? 노부인께서 아가씨를 총애하시니 그보다 더 좋은 짝을 찾아주실 거예요.” 한자리에 모인 네 시녀를 보자 유지영은 지난날이 떠올랐다. 삼 년을 빌고 또 빌어 겨우 아이가 생기자, 기쁜 마음에 감사 불경을 드리러 가던 길이었다. 그녀는 이 넷에게 이끌려 산에서 길을 잃었고, 이들은 흩어져 사람을 찾아보겠다며 자리를 뜨더니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진작부터 유선주에게 매수된 자들이었다. ‘내가 눈이 멀었지!’ 잠시 후, 부름을 듣고 도착한 장 부관이 유지영에게 예를 올렸다. “찾으셨습니까, 아가씨.” “이들을 내 처소에서 내보낼 것이니, 넷 모두 중매시장에 팔아 버리세요!”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며 눈앞의 네 시녀를 가리켰고, 그 넷은 온몸이 굳은 채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아가씨, 저희를 팔아 버리신다고요?” 운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장 부관마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네 사람이 유지영의 심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가씨, 밤도 깊었는데….” 유지영은 장 부관의 입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비웃음 어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장 부관도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요?” 장 부관은 크게 노한 유지영을 보고는 곧바로 태도를 고쳐 사죄했다. “소인, 곧 알아보겠습니다.” 털썩! 운교가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며 따져 물었다. “소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화가 나셨습니까! 수년간 곁을 지킨 저희입니다. 어찌 이런 식으로 내치려 하십니까!” 유지영은 더 이상 이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냉혹하고 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이 주인을 무시하다니. 갈수록 분수를 모르는구나. 특히 주향, 저 아이는 어서 천한 노비로 팔아 넘기세요!” 제5화 주향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나머지 셋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당황한 채 무릎을 꿇고 빌었다. “부관, 저들의 입을 틀어막고 모조리 끌어내세요!” 유지영은 저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혔다. ‘배은망덕한 것들 같으니!’ 장 부관은 하는 수 없이 하인들을 불러 넷을 모두 끌어내게 하고 중개 어멈을 부르라고 일렀다. 유지영은 그것마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중개인은 필요 없으니 이만 나가 보세요.” 게다가 시간도 늦었으니, 내일 성년례가 끝난 뒤 차차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 저택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갔다. 유지영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자 홍주가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노부인 곁의 고씨 어멈께서 오셨는데, 아가씨께서 일어나시는 즉시 노부인 처소로 오라 하셨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어제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할머니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씻어 단장한 뒤 유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그러다 문 앞에서 송씨와 유선주를 마주쳤다. 유선주는 은은한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송씨는 푸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딸과, 아직 젊은 시절의 미모가 남아 있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양어머니인 담혜정이 죽은 뒤 큰댁에는 안주인이 없었기에, 유국공부의 집안 살림은 거의 송씨가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송씨는 그녀를 보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영아, 숙모가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만, 세자에게 파혼당했다고 시녀들에게 화풀이하고 그것도 모자라 팔아버리겠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유지영은 문지방을 넘어서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숙모님께서는 제게 편견이 많으신가 보군요. 어찌하여 이유도 묻지 않고 제 잘못이라 단정하시는 겁니까?” 송씨는 말문이 막혔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공손히 유씨 노부인께 예를 올렸다. “제가 어제 방 안에서 시집을 읽고 있었는데, 주향이 갑자기 들이닥치더니 제가 방에 사내를 숨겼다며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습니다. 화가 나 훈계를 좀 하려 했더니 나머지 셋은 제 말을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그런 사람들을 어찌 계속 곁에 둘 수 있겠어요? 제가 그리 잘못한 건가요?” “허나 주향이 어제 네 방에서 분명 사람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구나.” 송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그래서 주향이 사람을 잡기라도 했습니까?” 송씨는 다시 할 말을 잃었다. “할머니, 저는 이미 선주에게 세자비 자리를 양보했는데도 어찌하여 숙모님께서는 이리도 사람을 몰아붙이며 제 명예를 더럽히려 하시는지요. 오늘 성년례에는 귀한 손님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유지영의 얼굴에 냉기와 분노가 서렸다. 유씨 노부인은 담씨 가문의 세력을 생각해 눈살을 찌푸리며 송씨에게 말했다. “고작 시녀 아니더냐. 꼴 보기 싫으면 내치고 새로 들이면 되지. 그게 뭐라고 아침부터 이리 소란을 피워 기분을 잡치게 하느냐!” 노부인의 호통에 송씨는 가슴이 답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머니, 저는 억울합니다. 집안 살림은 제 담당이 아닙니까. 갑자기 시녀를 넷이나 바꾸겠다 하니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입니다.” “그만하거라!” 유씨 노부인은 송씨를 노려보며 차갑게 호통쳤다. “어쨌거나 영광이든 치욕이든 함께 나누는 가족이다. 지영이의 평판이 나빠지면 선주에게도 영향이 간다는 걸 왜 모르느냐?” 송씨는 오늘 있을 성년례를 생각해 일단 참고 넘기기로 했다. 노부인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넷은 어떻게든 입막음을 해서 멀리 보내 버리거라. 절대 이 일로 우리 유씨 집안의 평판에 흠이 가서는 안 된다. 황실의 일원이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친정의 평판이다.” 경고 섞인 노부인의 말에 송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이때 문지기가 들어와 손님들이 도착했다고 전했다. 노부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유지영의 손을 다독였다. “오늘은 네 성년례이니 나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하러 가자.” 앞뜰에는 손님들을 모실 연회상과 무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원 중앙의 호수에는 작은 나룻배가 떠 있었고, 호숫가에는 수영에 능한 시녀들과 어멈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연회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었고, 남녀 귀빈들의 쉼터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따로 마련한 데다 많은 시종까지 배치해 두었다. 국공부 대문 앞에는 벌써 수많은 마차가 당도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한 손님들로 정원이 꽉 차게 되자, 유씨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송씨를 불러 물었다. “원래 이렇게 손님이 많았느냐?” 송씨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유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마도 지영이가 수구를 던진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듯합니다.” 노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유지영을 봤는데, 그녀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지영 아가씨, 듣자 하니 오늘 수구를 던지신다면서요? 누가 받든 그분과 혼인하실 생각인가요?” 인파 속에서 한 소녀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유지영에게로 쏠렸다. 분홍빛 치마폭에 상아색 저고리를 입고 연지만 살짝 바른 맑은 얼굴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 빼어난 절색이었다. 게다가 최상급 비단으로 지은 의복에 목에는 양지옥 목걸이, 머리에는 금빛 찬란한 비녀를 꽂아 올린 모습은 참으로 눈부시고 아름다워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나비 모양의 저 비녀는 태후께서 담씨 가문에 하사하신 것을 담 부인이 유지영에게 준 것으로, 인주에서는 단 하나뿐인 귀한 물건이었다. 귀티라는 말이 유지영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유씨 노부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태연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쨌거나 집안의 적장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손녀였다. 유지영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은 곧 유씨 가문의 체면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 유씨 가문은 삼대공에 속한 국공 가문이거늘, 어찌 한번 뱉은 말을 번복하겠는가?” 송씨가 여유만만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송씨의 뒤에는 유선주가 서 있었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는 훤칠한 키에 귀공자의 풍모를 자랑하는 배준형이 서 있었다. 태후께서 여러 왕부의 세자들 가운데 정왕 세자 배준형을 가장 아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 황제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줄곧 후사를 보지 못하셨으니, 장차 여러 친왕 세자 가운데 후계를 골라 황위를 물려주실 터였다. 그리고 그들 중 배준형의 승산이 가장 컸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소녀들의 볼이 붉어졌다. 배준형은 유지영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국공부의 적녀인 네가 고작 나와의 자존심 다툼 때문에 이렇게 격을 낮추는 일을 하다니.” “세자,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국공부에서는 일찍이 지영이의 성년례 날에 혼사를 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송씨가 옆에서 거들었다. 유지영은 오히려 웃음이 났다. ‘이 자식은 아직도 내가 자신에게 목을 맨다고 생각하나?’ “여러분, 염려하지 마세요. 수구를 받은 분이 아직 혼약이 정해지지 않았고 첩실을 두지 않았으며 나이도 제게 걸맞다면, 신분을 막론하고 혼인할 것입니다.”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진지한 얼굴로 선언했다. 배준형은 비웃음을 가득 담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인파가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분은, 겨… 경왕 세자 아닙니까?” “설마 경왕 세자께서도 수구를 받으러 오셨단 말이오?” “오늘따라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막 이홍루에서 나오는 길이겠지요.” 경왕 세자 배현준이 등장하자 비웃음이 쏟아졌다. 배현준은 검은 비단옷에 금색 허리띠를 두른 채 늠름한 자태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야 사람들은 그가 오늘 유난히 성대하게 차려입고 왔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머리에는 옥관을 쓰고 비단 도포를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신분을 상징하는 현색 옥패가 달려 있었다. 이처럼 정중한 차림의 배현준은 모두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설마 내 혼사를 방해하러 온 거야?” 배준형은 배현준을 보자마자 안색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이내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평판으로 무슨 면목이 있어 이런 자리에 온 것이냐?” 배현준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준수한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이 자식이!” 배준형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배현준은 피식 코웃음 치더니 그의 곁으로 가 우뚝 섰다. 그는 배준형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정교한 이목구비에서 묘한 매력도 흘러 넘치고 있었다. 이렇게 나란히 서서 비교해 보니 외모로는 오히려 배준형이 많이 밀리는 듯했다. 배현준은 고개를 돌려 공손히 유씨 노부인께 인사를 올렸다. “노부인께 인사 올립니다.” 유씨 노부인은 평판도 좋지 않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배현준을 힐끗 흘겨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저 그가 수구를 받으러 온 것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유씨 저택에 몰려든 수많은 이목은 모두 유지영에게 쏠려 있었다. 길시가 되어 성년례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찬자는 담씨 가문의 큰부인으로, 즉 유지영의 외숙모를 초대했다. 큰부인 한씨가 예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자, 유지영은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 뒤 손님들에게 곱게 인사를 올렸다. 이어 한씨는 유지영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 주며 말했다. “좋은 날 좋은 시각에 성년례를 올리노니, 어린 시절의 철없음을 버리고 덕목을 갖추어 참된 어른이 되거라.” 유지영은 감사를 표한 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 붉은 비단치마를 입은 그녀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또다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지영 아가씨는 참으로 절세미인이로군요.” “그러게요. 몸에 밴 기품을 보세요. 역시 노부인 곁에서 자라서 그런지 기품과 분위기가 남다르군요.” 송씨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지영아, 이제 수구를 던질 차례지 않니?” 수구야말로 오늘 모든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행사였다. 송씨 가문에서도 오늘 여러 사람이 와 있었기에 송씨는 자신만만했다. 유지영이 아무리 아니꼬워도 다른 집안에 주기에는 아쉬운 아이였기에, 송씨 가문은 어떻게든 그녀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정실이 될지 첩실이 될지는 나중에 정해도 늦지 않았다. 제6화 수구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 아래 서서 예식을 구경하던 배준형도 말이다. 유지영은 담담히 붉은 수구를 한 손에 쥔 채로 무대 위에 섰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훤히 보였다. 그저 구경만 할 생각으로 몰려온 어중이떠중이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를 본 외숙모 한씨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꾸짖었다. “혼약이 있거나 신분에 맞지 않는 자가 함부로 뛰어들었다가는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말을 마친 한씨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지영아,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아.” 어제 유지영은 외숙모에게 전갈을 보냈다. 오늘 수구를 던지게 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알렸기에, 한씨도 더는 그녀를 말릴 도리가 없어 우선 성년례에 맞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외숙모,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삼십여 명의 사내가 서 있었고,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배현준이었다.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었다. 유씨 노부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배현준을 보며 뭐라 말하려다 송씨가 붙잡는 바람에 결국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교지 도착이오!” 그때 앙칼진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서 태후의 최측근인 창 내관이 황색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창 내관을 본 사람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유국공부 장녀의 성년례에 궁중의 태후까지 축사를 보낼 줄이야! 이를 지켜본 유선주의 얼굴도 질투심으로 일그러졌다. 유지영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지영 아가씨, 금일이 아가씨의 성년례인 것을 아신 태후마마께서 특별히 명을 내리셨습니다.” 창 내관이 아부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유지영은 담담히 무릎을 꿇었다. “소녀 유지영, 명을 받들겠습니다.” 창 내관은 그제야 두루마리를 펼쳤다. “유씨 집안의 적녀 유지영은 빼어난 학식을 갖추고 예의 바르며 단정하고 현숙하여 모든 귀녀들의 본보기가 되기에, 본 태후의 마음에 깊이 들었으니 금일 성년례를 맞아 장녕이라는 봉호와 함께 군주의 작위를 내리노라. 아울러 최상급 비단 백 필과 금 만 냥을 내리니 삼가 받들거라!” 전생에 서 태후는 그녀에게 군주의 작위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와 배준형이 사람들 앞에서 혼약을 맺은 뒤 배준형에게 관직을 하사했을 뿐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혼약을 맺지 않았기에 하사품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소녀, 태후마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유지영은 교지를 받들어 예를 올리고 황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큰절을 올렸다. 창 내관은 곧바로 그녀를 부축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군주 전하, 태후마마께서 오늘 수구를 던져 배필을 고르신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소인에게 조금 더 기다렸다 돌아가 결과를 보고하라 분부하셨습니다.” 이 말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지영의 성년례에 황궁에서 이토록 많은 하사품을 내릴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수구 의식에까지 이토록 관심을 두고 계시다니! 하사품만 봐도 금은보화와 최상급 비단 모두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귀한 것들이었다. 송씨의 안색이 퍼렇게 질리자 눈치 빠른 시녀가 그녀에게 귀띔해주었다. “태후께서는 돌아가신 큰부인과 돈독한 사이였지 않습니까. 큰부인의 체면을 생각해 지영 아가씨를 가엾게 여기셨나 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송씨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훑어보다가 유선주에게 말했다. “하사품이 많을수록 좋지. 네 사촌 오라비들 중에 혼인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으니, 앞으로 누구에게 시집을 가도 네 발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야.” 징이 울리자 유지영은 다시 수구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사이 무대 아래에는 공을 쟁취하러 온 사내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호시탐탐 탐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지영은 검은 인영을 힐끗 바라본 뒤 홍주가 건넨 천으로 두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씨 노부인의 손에는 어느새 땀으로 가득해졌다. 어찌 이리도 대담할 수가! 징이 울리자 유지영은 수구를 공중 높이 치켜들었다가 힘껏 던졌다. 무대 아래에서 아우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세자,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찌 이런 자리에서 주먹질을 하십니까!” “아니!”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유지영은 눈을 가렸던 천을 벗었는데, 그 순간 검은 인영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배현준은 허공으로 날아올라 수구를 단단히 품에 안았다. 등 뒤에 있던 자들이 빼앗으려 달려들었지만, 그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쾅! “소문은 들었지만 어찌 이리 난폭할 수가!” “이건 인정 못합니다!” “저도 인정 못합니다!” 배현준의 주먹에 맞은 송가네 아들들이 얼굴에 피멍이 든 채 소리를 질렀다. 수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배현준은 피식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수구는 원래 능력 있는 자가 차지하는 법이지. 빼앗긴 자들이 말이 많군.” “그게 무슨!” 송가네 아들들의 얼굴에 이내 분노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할머니, 경왕 세자께서 수구를 쟁취하셨고 저는 이 혼사에 이의가 없습니다.” 유지영은 무대에서 내려오며 담담히 말했다. 배현준의 능력으로 수구를 차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에,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유씨 노부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창 내관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노부인, 금일 유씨 가문에 경사가 세 가지나 생겼군요. 정말 감축드립니다.” “군주 책봉에 혼약이 정해진 것뿐인데 경사가 세 가지라니?” 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창 내관은 배현준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제 경왕 세자께서 입궁하시어 태후께 혼인을 하사해 달라 청을 올렸습니다. 태후께서는 경왕 세자께서 수구를 쟁취한다면 혼인을 하사하겠노라 약조하셨지요.”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충격이 번지며, 배준형의 안색도 일그러졌다. 유선주와의 혼사가 정해지자마자 배현준은 입궁해 혼인을 청한 것이다. 게다가 인주와 경성은 왕복으로 적어도 네 시진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그는 꼬박 밤을 새워 궁을 다녀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창 내관이 두 번째 교지를 낭독했다. 사람들은 재차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금일 장녕 군주의 정혼 간택에서 경왕 세자가 승하였으니, 이 또한 인연이며 더없이 어울리는 천생연분이노라. 이에 혼인을 하사하노니 돌아오는 10월 8일에 혼례를 올리도록 하라.” 유지영과 배현준은 큰절을 올렸다. 창 내관은 배현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원성취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세자. 귀경하시면 매일 자녕궁으로 문안드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태후마마께서 경왕부 일가를 모두 경성으로 부르신다며, 남은 반년 동안 혼례를 차질 없이 준비하라 이르셨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또 술렁이기 시작했다. 송씨도 더는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창 내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건 아닙니까? 태후께서는 평소 정왕 세자를 따로 자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경왕 세자로 갑자기 바뀐 겁니까?” 창 내관은 송씨를 힐끗 보고는 싸늘하게 답했다. “태후께서는 경왕 세자의 진심에 감동하셨다며 이번 혼사가 참으로 기쁘다 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송씨는 말문이 막혔다. 단지 혼사 하나 때문에 태후께서 배현준에게로 마음을 돌리셨단 말인가? 그녀는 음침한 얼굴로 배준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배준형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딸이 배준형과 혼인하면 앞으로 탄탄대로만 걸을 거라 생각했는데, 유지영과 배현준이 영광을 가로챌 줄이야! “창 내관께서는 안심하십시오. 귀경하는 즉시 궁으로 가 태후마마께 문안 올리겠습니다.” 배현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말했다. 볼일을 마친 창 내관은 위풍당당하게 돌아갔다. 성년례의 주인공은 단연 배현준이 되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아부하려 몰려들었다. 혼사가 정해지자 유지영도 한시름 놓였다. 이번 생에 배준형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배현준은 조금 전 사람을 보내 경성에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간다고 전했고, 유지영도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손님들은 유씨 가문 족장들의 안내를 따라 앞뜰로 가고, 여자 손님들은 뒤뜰에 남게 되었다. 곧이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지영에게 다가와 축하를 건네려고 했는데, 송씨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지영아, 경왕 세자와의 혼인은 안 된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송씨를 바라보았다. “우리 유국공부는 정왕부와 한배를 탄 운명이다. 다른 후보와 엮여 봐야 좋을 게 없어. 경왕 세자는 어리석고 평판도 좋지 않으니, 숙모님도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지영아.” 배준형도 다가오자,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왕 세자는 이제 저를 장녕 군주라 부르며 예를 갖추세요.” 전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말투와 심드렁한 표정에 배준형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송씨 가문 자제와 혼인하는 게 너에겐 최선의 선택이다. 선주를 봐서 나도 장차 너를 홀대하진 않을 테고. 배현준과 혼인하면 나중에 고생하는 건 너다.” 유지영은 저 역겨운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주고 싶었다. ‘내가 왜 너희들 안배에 따라줘야 하지?’ “정왕 세자는 태후마마의 결정을 거역하시려는 겁니까?” 유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날 위해서’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거죠?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유지영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싸늘하게 몰아붙였다. 이전부터 그러고 싶었지만, 오늘을 위해 참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난 이상 더는 거리낄 것도 없었다. 제7화 “언니, 설마 이미 경왕 세자와 혼약을 정한 건 아니죠?” 그때 갑자기 다가온 유선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젯밤에 주향이 언니 침소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경왕 세자인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유선주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으며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언니, 일부러 말한 건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하지만 언니도 참 어리석네요. 어찌 홧김에 경왕 세자 같은 분과 그런….” 짝! 유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유선주의 뺨을 때렸다. 주변이 다시 고요해졌다. 이내 유선주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유지영! 선주에게 어서 사과하지 못할까!” 배준형이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유선주는 마치 큰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유지영은 턱을 치켜들고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내 성년례 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라는 핑계로 언니인 나를 모함하고도 뭘 잘했다고 울어? 너는 대체 어리석은 거니? 아니면 원래 이렇게 간악한 아이였던 거니? 밤중에 내 침소에 사내가 들었다고? 증거는 있어?” “시녀가 증언했잖아요.” “시녀가 그 사내를 직접 보았다고 했어?” 유선주는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배준형의 말에 유지영은 비웃듯 되물었다. “동생이 입을 더럽게 놀리기에 언니로서 따끔하게 혼내 준 것뿐인데, 왜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논리라면 저도 세자께 묻고 싶군요. 어제 갑자기 찾아와 혼약 상대를 바꾸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세자와 선주도 진작부터 서로 눈이 맞았나요?” “허튼소리! 난 그런 적 없어!” 유선주가 빨갛게 부은 눈으로 반박하자, 유지영은 냉소를 보였다. “여인의 결백이 얼마나 중요한데, 넌 같은 유씨 집안의 딸이면서 좋은 날 축복은 못 해 줄망정 역겨운 말로 날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는구나!”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더는 유선주의 가식을 눈감아 줄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람들 앞에 그녀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심보를 가졌는지 낱낱이 드러낼 생각이었다. 한참을 참고 있던 한씨가 입을 열었다. “댁의 둘째 아가씨는 참으로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는군요. 이 또한 의도된 것입니까? 어제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줄곧 정왕 세자와 장녕 군주가 어울리는 배필이라고 하며 사돈이 되고 싶다더니, 갑자기 둘째 아가씨로 바꾼 것도 그렇고요. 결국 지영이는 어쩔 수 없이 수구라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지요. 유국공부는 이에 대해 합당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권세를 지닌 세가의 귀부인들이었다. 유선주의 뻔한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사람들이 술렁이자 송씨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담 부인, 어제 지영이가 밤새 성질을 부리며 시녀 넷을 처소에서 내쫓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구 역시 지영이 스스로 고집한 일이고요. 우리 집안에서는 늘 이 아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었고, 절대 홀대한 적이 없습니다.”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가문의 불행이지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었다고 불쌍해서 거두어 주었더니, 이런 일을 저지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수구를 던지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이 늙은이가 어린 손녀의 궤변에 놀아났군요.” 그 가벼운 한마디로, 유지영이 일찍부터 배현준과 눈이 맞았다는 사실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분개한 한씨가 반박하려 하자, 유지영은 그녀를 말리고 소리쳤다. “홍주야!” 홍주가 나갔다가 잠시 후 네 시녀를 모두 끌고 돌아왔다. 유지영은 주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주 네가 말한 시녀가 바로 이 아이다. 어제 내가 침소에서 시집을 읽고 있는데,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이닥쳐 방 안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지. 그래서 벌을 내리려 했더니 나머지 셋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자고 하더구나. 종이 주인 말을 듣지 않는데, 곁에 두어서 어디에 쓰겠느냐?” 곧이어 홍주는 상자 하나를 열어 보았는데, 안에는 적지 않은 금은보화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유선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제 이들의 방에서 나온 것들이다. 내가 평소 시녀들을 박대하지는 않아도, 이런 귀중한 것을 하사한 적은 없다.” 유지영은 고개를 돌려 유선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주야, 이렇게 불성실하고 말도 안 듣는 시녀들을 내쫓았는데 뭐 문제라도 있어?” 주향을 본 순간 이미 당황해 정신이 아득해진 유선주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언니의 시녀들이니, 언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죠.” 유지영이 되물었다. “어제 주향이 근거도 없는 소리로 날 모함하며 방 안을 들쑤시기에 멀리 팔아버리려 했다. 그런데 선주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니?” 그 말에 유선주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고, 그 틈을 타 송씨가 끼어들었다. “집안 살림은 내가 관리하는데 내가 왜 모르겠니? 어제 종령원에서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당연히 무슨 일인지 부관에게 캐물었지. 선주는 그걸 지나가다 들은 거고.” 유선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님도 주향을 심문하셨는데 별다른 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선주는 근거도 없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꺼냈을까요? 정말 실수였나요? 아니면 의도적인 모함이었나요?” 송씨는 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젯밤 유지영이 시녀들을 처리한 뒤, 주향은 천한 노비 신분으로 어딘가에 팔려 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송 씨는 뒤에 사람을 붙였고, 이 사실을 안 송씨가 사람을 시켜 주향을 창고에 가두었다가, 노부인의 말을 듣고 멀리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송씨는 이 기회에 유지영의 평판을 한층 더 끌어내릴 생각이었는데, 유지영이 중간에서 사람을 가로챌 줄이야. 주변의 수군거림이 커지자 송씨는 이를 부드득 악물었다. “선주도 가문의 명성을 걱정하다가 실언한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유지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만하거라!” 유씨 노부인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유지영에게 말했다. “집안의 맏언니로서 동생에게 양보하지는 못할망정, 웃어른들이 다 보는 앞에서 동생에게 매질이나 들다니! 당장 사당으로 가서 무릎 꿇고 가훈을 백 번 필사하며 이틀 동안 반성하거라!” 연회는 결국 그렇게 뒤숭숭하게 끝이 나 버렸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뒤, 유씨 노부인은 가장 먼저 네 시녀를 집안에서 내보내고는 한씨에게 해명하듯 말했다. “지영이가 오늘 연회에서 한 행동은 실로 도를 넘었어요.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벌을 내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씨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노부인께서 지영이를 아끼신다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이고, 이 또한 유씨 집안의 집안일이니 제가 간섭할 바는 못 되지요. 오늘은 좋은 소식이 있어 전하러 왔습니다. 형부상서 자리가 비었는데 정왕께서 둘째 대감을 추천하셨습니다. 아마 다음 달이면 국공부 식솔들은 경성으로 복귀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노부인의 안색이 곧바로 환해졌다. “그게 사실입니까?” 한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 그럼 경성에서 뵙겠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노부인은 뒤돌아서 유지영에게 말했다. “어서 외숙모를 바래다드리고 오너라.” 유지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외숙모 한씨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한씨가 당부하듯 말했는데, 말투에는 은은한 불만이 담겨져 있었다. “네 오늘 행동은 너무 과격했어. 앞으로 그 성격 좀 고쳐.” 한씨가 유씨 저택에 온 것은 담씨 노부인의 명 때문이었다. 그녀는 평소 유지영을 그리 대견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인 성격이 이렇게 모나면 결국 자신만 고생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경성에 돌아가면 그 성질부터 좀 죽이고 조용히 지내거라.” 유지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바닥만 바라보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침 감사히 듣겠습니다, 외숙모.” 한씨를 보내고 돌아오니 고씨 어멈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가씨, 노부인께서는 잘못이 있으면 처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위신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어멈은 바로 사당 쪽을 가리켰다. 유지영은 어차피 피해 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주에서는 도와줄 사람도, 기댈 곳도 없으니 참는 수밖에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었다. 그렇게 잠도 못 자고 무릎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참았다. 다음 날, 종령원으로 돌아가 약을 바르려고 했는데, 고씨 어멈이 또 찾아왔다. “아가씨, 노부인께서 찾으십니다.” 유지영은 대충 목을 축이고 밀떡을 몇 조각 입에 넣은 뒤, 절뚝거리며 유씨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송씨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그녀는 유지영을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영이 왔구나.” “예, 숙모님.” 유지영은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의 송씨는 이상할 정도로 친절했다. ‘분명 뭔가 있어.’ “마침 잘 왔다. 네 숙모가 소주로 사람을 보내 가져온 운부 비단인데, 모두 열여섯 필이나 도착했단다. 집안의 어린 아가씨들 옷을 지어 입히고 싶다니, 너도 어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보거라. 네 나이면 한창 꾸밀 나이니 사양하지 말고.” 운부 비단을 보는 순간 유지영의 안색이 급변했다. 전생에도 송씨는 사람을 보내 운부 비단을 구해 왔고, 유지영은 아무 생각 없이 그중 네 필을 골라 옷을 지어 연회장에 입고 나갔다. 유씨 집안에서 운부 비단옷을 입은 처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이 일로 그녀는 어사들에게 탄핵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운부 비단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 탄핵의 이유였다. 특히 붉은색 운부 비단은 짙은 붉은빛을 내기 위해 사람의 피에 담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운부 비단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료는 매우 희귀했고, 수놓이 또한 뛰어난 기교를 필요로 했다. 연일 작업에 시달린 수놓이 시녀들 가운데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이도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운부 비단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탄생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열여섯 필 가운데 네 필만 진짜였지만 말이다. 나머지는 색이 탁하거나 너무 나이 들어 보이는 탓에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오직 붉은색과 연녹색, 상아색, 연노랑색 네 필만 색감과 수놓이가 최상급이었다. 그러니 열여섯 필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집안의 어린 처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다는 말로 유지영의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전생의 유지영은 탄핵의 증거가 명확하다는 이유로 곤장 서른 대를 맞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형벌 탓에 몸에 이상이 생겨 회임도 어려워졌다. 게다가 사치를 부리고 사람 목숨을 가볍게 여긴다는 악명까지 뒤집어써, 온화하며 소박함을 중시하는 유선주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게 되었다. 제8화 “지영아,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느냐?” 송씨는 못 말리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날은 오해가 좀 있었단다. 선주는 내가 따끔히 혼내 두었어.” 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어찌 작은어머니와 선주에게 화를 내겠어요. 운부 비단은 참으로 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들었어요. 일부 무늬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던데, 구하시느라 참 힘드셨겠어요. 감동이에요, 작은어머니.” 그 말을 들은 송씨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역시 그 멍청함은 어디 안 가는구나!’ 유지영은 노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안의 맏언니로서 당연히 동생들에게 양보해야지요. 다른 동생들도 불러서 골라 보게 하는 게 좋겠어요.” 그녀는 송씨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사람을 보내 동생들을 불러오게 했다. 송씨의 안색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주를 제외한 세 소녀가 내전으로 들었다. 셋째인 유지란, 넷째인 유운연, 다섯째인 유채령이었다. “각자 하나씩 돌아가면서 고르면 공평하겠구나.” 유지영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유지란은 가장 먼저 붉은색 비단을 골랐다. 송씨는 헛기침을 하더니 근엄하게 말했다. “색상이 지나치게 화려하구나. 지영이가 피부가 하얗고 고우니 이건 지영이에게 주려고 준비한 거였어.” 그 말을 들은 유지란은 고개를 돌려 유지영의 눈치를 보더니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어차피 비단이 거기서 거기죠. 지란이 네가 마음에 들면 가져가거라. 자매끼리 사양할 것 없어.” 유지영은 웃으며 붉은색 비단을 유지란의 몫으로 정해 주었다. “어차피 저는 이미 붉은색 옷이 많으니까 다른 걸 골라 볼게요.” 유지란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감사해요, 큰언니.” 예상했던 것처럼 나머지 세 필도 다른 동생들에게 돌아갔다. 유지영은 가장 색이 탁한 것으로 골랐다. 비단을 받은 소녀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과 반면, 아직도 음침하게 굳은 송씨의 얼굴을 보고, 유지영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때 셋째 부인이 마침 안으로 들어오더니, 유지란이 들고 있는 비단을 보고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더니, 놀란 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지란이, 넌 평소에 연한 색상을 즐겨 입지 않았니? 어쩌다 오늘은 이렇게 화려한 색상으로 골랐어?” 하지만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듣지 못한 유지란은 붉은 운부 비단을 손에 꼭 쥔 채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예쁜 비단은 정말 처음 봐요. 꽃무늬도 너무 정교하고….” 셋째 부인이 딸의 팔을 꽉 꼬집었다. “넌 아직 어려서 너무 화려한 색상은 어울리지 않아. 이 색상은 우리 지영이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구나.” 셋째 부인은 재빨리 유지란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유지영은 화가 치밀어 오른 듯,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운부 비단 사건에 셋째 부인까지 엮여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늘 조용하게 살아가던 셋째 부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 여인들끼리의 싸움에도 끼지 않았고, 평소에도 그녀에게 살갑게 대하던 사람이었는데 송씨와 짜고 자신을 해하려 할 줄이야. 유지란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운부 비단을 유지영에게 건넸다. “셋째 숙모, 비단이 귀하다 한들 저와 지란이의 자매간 우애보다 귀하겠나요? 지란이는 나이도 어리고 한창 예쁠 때이니, 저는 이 비단이 지란이에게 더 어울린다고 보는데요.” 유지영은 비단을 사양하고는 손끝으로 유지란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란이가 벌써 열네 살이 되었네요. 혼담을 논할 나이도 되었는데, 어여쁜 옷을 입고 밖에 나가면 수많은 남심을 흔들겠어요.” 유지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요, 큰언니….” 유지란이 비단을 들고 돌아오자 셋째 부인은 송씨와 잠깐 시선을 교환했다. “비단 한 필 가지고 뭘 그리 사양들 하느냐.” 사정을 모르는 유씨 노부인이 손사래를 치며 유지란의 것으로 정해 주었다. 유지란은 눈에 띄게 얼굴이 환해졌다.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어린 동생들은 사정을 모른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셋째 부인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귀중한 비단을 지란이에게 주었으니 내가 너무 미안하구나. 이렇게 하자. 이 비단은 옷 두 벌을 짓기에 충분하니, 하나는 지어 지영이 너에게 주마.” 유지영은 더 이상 거절하면 이상할 것 같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셋째 부인은 안심했다. 대화가 한참 오가자 노부인은 송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가 곧 신임 형부상서 직에 오를 것 같구나. 우리 유씨 가문에는 금상첨화인 셈이지. 게다가 한 집안에 친왕 세자비가 둘이나 나왔으니 모두의 이목이 우리 집에 쏠렸을 테니, 앞으로 경성에 가면 처신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전생에 유정혁은 형부상서 관직에 오른 이후 나라의 대부분 형부 안건을 맡게 되었고, 대리시경 직책까지 겸하면서 명실상부 대신들 가운데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경성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송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게 다 단왕께서 추천해 주신 덕분 아니겠어요.” 제9화 “선주는 참 복도 많아요. 이 집안의 복덩이라니까요.” 이내 셋째 부인이 아부를 떨기 시작하자, 송씨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지영아, 그동안 경왕 세자의 평판이 어떤지 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혼인한 뒤에는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네가 잘 붙들어야 한다. 어차피 훗날 경왕부 작위를 잇게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제발 사고를 쳐서 우리 집안에 피해가 가는 일만은 없게 하거라.” 유지영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장 침소로 돌아가 한숨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다행히도 노부인이 이제 돌아가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노부인 처소를 나서는데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왕 세자께서는 오늘도 선주 아가씨와 나들이를 나가셨대. 오찬은 돌아와서 노부인과 함께 드신다던데, 참 자상한 분이야. 선주 아가씨는 복도 많아.” 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을 달고 태어나, 가는 곳마다 그녀와 얽힌 사람들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유씨 노부인이 가장 총애하는 손녀이기도 했다. ‘왜 그리 서둘러 나를 돌려보내려 하나 했더니, 내가 있어서 방해가 됐던 거였구나.’ 유지영은 더 이상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생모인 서 태후는 곧 황제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며 조정의 업무를 관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경성에 올라간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녀를 궁으로 불러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예정이었다. 그날 이후 태후는 곳곳에서 그녀를 도우며 보살펴 주었다. “이 나라 국모의 자리는 우리 지영이 것이어야지.” 서 태후가 어느 날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전생의 그녀는 모녀간의 정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머니라는 큰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자신을 짓밟았던 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종령각으로 돌아오니 한꺼번에 시녀 넷이 사라져서인지 처소는 몹시 조용했다. 그러나 홍주 하나만 곁에 두자니 일손이 부족했다. “혹시 사이가 좋은 자매나 친한 벗은 없느냐? 눈치가 빠르고 충성심만 확실하면 된다.” 유지영이 홍주에게 묻자, 홍주가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인은 그저 하등 시녀에 불과한데, 누가 소인과 친하게 지내려 했겠어요?” 유지영은 부드럽게 홍주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앞으로는 친한 사람도 많이 생길 거야.” 그녀는 종령각의 이등, 삼등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유씨 노부인이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진심으로 아낀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양모인 담혜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저런 어리석고 쓸모없는 계집애만 낳고 갔다며 죽은 맏며느리의 흉을 보기도 했다. 그녀의 양부는 유국공이자 유씨 집안의 장남으로, 육 년 전 변방 수비를 맡으러 떠난 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유지영은 명목상 유국공부의 적장녀였기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라도 집안에서 받는 물질적 대우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종령원에는 일등 시녀 네 명과 이등 시녀 여섯 명, 삼등 시녀 여섯 명, 그리고 허드렛일을 하는 어멈 두 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눈앞에 열 명이 넘는 시녀가 있었지만, 그들의 인신계약서는 유지영의 손에 없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공손해 보여도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아가… 아니, 군주님.” 눈치 빠른 한 이등 시녀가 앞으로 나서더니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군주님 곁에는 홍주 한 명뿐이니 일등 시녀가 세 명이나 부족하지 않습니까? 군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인이 스스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른 시녀들도 저마다 앞으로 나섰다. 삼등 시녀인 홍주도 신분 상승을 했으니 자기라고 안 될 것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유지영은 뒷줄에 선 삼등 시녀들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체격이 다부지고,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지영은 손을 들어 네 사람을 가리켰다. “동금, 춘화, 그리고 임씨 어멈, 운선.” 이름이 불린 네 사람이 고개를 들더니 놀란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내 방에서 일할 사람들이다. 숙모님께 가서 너희의 인신계약서를 받아 오너라.” 유지영이 지시를 내리자마자 동금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군주님, 아무 상의도 없이 가서 시녀들의 인신계약서를 달라고 하면 둘째 부인께서 기분 상하실 겁니다.” 한 이등 시녀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유지영은 나가는 동금의 등을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 숙모님께서 내줄 수 없다고 하시면, 내가 직접 처소로 찾아뵙겠다고 전해라.” 동금은 허둥지둥 달려갔다. 잠시 후 동금이 네 사람의 인신계약서를 들고 돌아와 유지영의 손에 건넸다. 유지영은 문서를 자세히 확인한 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오늘부터 너희 셋은 홍주와 마찬가지로 일등 시녀로 삼겠다. 임씨 어멈은 처소 관리를 맡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군주님.” 네 사람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승급하지 못한 자들이 불복해 입을 열려는 찰나, 유지영의 시선을 받은 동금이 대뜸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 매서운 눈빛에 이등 시녀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군주님께서 그리 하라고 하시면, 그저 따르면 되지. 감히 군주님의 뜻을 거스르려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제10화 동금은 원래 표사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잃은 뒤 전당포에 팔려간 데다가, 전생에서는 실족사로 죽기까지 했다.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전생에 유지영을 배신하지는 않았다. 매일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송씨에게서 문서를 기어코 받아낸 것을 보면 눈치도 빠르고 수완도 있는 듯했다. 나머지는 아직 관찰 대상이었다. “오늘부터 종령각을 배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유지영은 근엄한 표정으로 엄명을 내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주향 일당이 내쳐지는 것을 보았기에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방으로 돌아온 유지영은 피곤한 몸을 침상 위에 뉘었다. 홍주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아픈 무릎에 대주었다. “아가… 아니, 군주님. 동금이 계약서를 가져올 거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유지영은 웃으며 말했다. “정왕 세자께서 지금 할머니와 함께 식사하고 계실 게야. 숙모는 내가 또 소란을 부릴까 두려워서라도 이런 사소한 일은 내 뜻에 따를 테지. 어차피 곧 경성으로 복귀할 텐데, 담씨 가문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 노곤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눈을 붙인 유지영은 밤중이 되어서야 다시 눈을 떴다가 창밖을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잠들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는 어느덧 묘시 삼각이었다. 기척을 들은 홍주가 서둘러 세숫물을 대령했다. “고씨 어멈이 조금 전 다녀갔는데, 요즘은 행장을 꾸리느라 저택 안이 분주할 테니 문안 인사는 면하고 경성에 가서 다시 정식으로 하자고 하셨다네요.” 그동안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문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 유씨 노부인은 이것이 다 그녀의 의지를 단련하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설령 병이 나더라도 꼭 얼굴을 비추어야 훈계를 피할 수 있었다. “정왕 세자가 저택에 머무르셨느냐?” 유지영이 물었다. 홍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군주님께서는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유씨 노부인이 문안 인사를 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온 집안이 합심하여 그녀만 따돌리는 상황이 한바탕 연출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비록 할머니께서 인사를 면하라 하셨어도, 아랫사람으로서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느냐?” 유지영은 옷단장을 마무리하고 동금과 홍촉을 데리고 노부인의 처소로 향했다. 과연 그녀가 예상한 대로, 둘째 숙부네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유선주는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고 얼굴에 해맑은 웃음을 띤 채 맞은편의 배준형과 서로 마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금슬 좋은 부부가 따로 없었다. “할머니!” 유지영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어 화목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사람인 양 굴고 있었다. 유국공부에서 노부인은 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부처님과 인연이 깊다며 오랫동안 소식하고 불공에 전념해 왔기에, 인주에서의 평판이 극히 좋았다. 송씨 또한 어질고 현숙하다는 미명을 얻었고, 유선주는 태어날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모르는 사람들 눈에 그들 셋은 그저 선량한 이들이었다. 유씨 노부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잠깐 사라졌다. 하지만 배준형이 있는 자리였기에, 이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유지영에게 손짓했다. “네가 어쩐 일이냐?” 마치 유지영의 문안 인사가 무척 뜻밖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저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사당에서 반성하느라 무릎이 불편하긴 하지만, 그걸 핑계로 인사를 거른다면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유지영은 앞으로 나아가 예를 행했다. 유씨 노부인의 입가에서 미소가 한층 옅어졌다. “큰언니, 저번에는 제가 언니를 오해했나 봐요. 제가 먼저 사죄드릴게요.” 유선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일어나 그녀에게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유지영이 입을 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예를 행하며 말했다. “역시 언니는 아직도 저를 원망하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