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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웨딩드레스
결혼 5년째, 하지아는 혼인관계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으러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혼인관계증명서가 가짜이며, 남편에게는 따로 법적 아내가 있...
Chương (1)
第1章
결혼 5년째, 하지아는 혼인관계증명서를 다시 발급받으러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혼인관계증명서가 가짜이며, 남편에게는 따로 법적 아내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5년 동안 뜨겁게 이어졌던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남편 박현우가 변호사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된다.
“혜림이는 해외에서 커리어를 쌓고 있어.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이 있어야 비즈니스 세계에서 자리 잡을 수 있어. 내가 반드시 도와줘야 해.”
“그리고 지아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이미 가족과도 연을 끊었어. 절대 떠나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들은 순간, 하지아의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린다.
박현우가 진짜 혼인관계증명서을 들고 돌아왔을 때, 이미 그녀는 자취를 감춘 뒤였고, 그는 다시는 그녀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제1화
“하지아 씨, 확인 결과 하지아 씨의 혼인관계증명서는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으며, 서류는 위조된 것입니다.”
직원의 담담한 한마디에 혼인관계증명서를 재발급받으러 온 하지아는 순간 멍해졌다.
“그럴 리 없어요. 저랑 제 남편 박현우는 5년 전에 혼인신고를 했어요. 다시 한번 확인해 주세요...”
직원은 두 사람의 주민등록 번호를 다시 입력해 조회했다.
“시스템상 박현우 씨는 기혼 상태로 나오지만, 하지아 씨는 미혼으로 확인됩니다.”
하지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박현우의 법적 배우자는 누구죠?”
“강혜림입니다.”
하지아는 의자를 꽉 움켜쥐고 겨우 몸을 지탱했다.
직원이 보여주는 서류에 그녀는 눈이 시려왔다.
처음에는 시스템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강혜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모든 환상이 무너져 내렸다.
5년 전 성대하게 치러진 결혼식, 5년 동안 남부럽지 않게 다정했던 모범 부부, 그녀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결혼 생활이 전부 거짓이었다.
하지아는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는 가짜 혼인관계증명서를 쥔 채 망연자실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갔다.
막 문을 열려던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박하 그룹의 법률 고문이었다.
“박 대표님, 벌써 5년이에요. 이제 사모님께 법적으로 인정되는 신분을 드릴 생각은 없으세요?”
하지아는 숨을 죽인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참 후, 박현우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강혜림은 아직 해외에서 자리 잡는 중이야.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이 있어야 그 치열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버틸 수 있어.”
법률 고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셨어요. 혹시라도 사모님이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떠날 수 있어요.”
박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혜림이는 내 딸까지 낳아준 사람인데 내가 반드시 지킬 거야. 그리고 지아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니 절대 떠나지 않을 거야. 게다가 지아는 나랑 결혼하려고 하씨 가문과 연까지 끊었으니 돌아갈 곳도 없어.”
한여름 8월이었지만 하지아의 몸과 마음은 얼음 속에 떨어진 듯 차가워졌다.
그녀가 그토록 고집을 부리며, 부모와 절연까지 해가며 그와 결혼했던 선택이 모두 박현우의 계산 속에 있었다니.
그동안 품었던 모든 의문도 이 순간에야 풀렸다.
공익사업에는 관심도 없던 박하 그룹이 갑자기 자선 재단을 세운 일, 아이를 싫어하던 박현우가 보육원의 아이 아름에게 유독 다정했던 이유...
최근 그가 아름이를 입양하자고 자주 말하던 것도, 그 아이가 사실 박현우와 강혜림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아는 눈 부신 태양을 올려다보다가 눈앞이 아찔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계단 모서리에 무릎을 세게 부딪혔다.
집 안에 있던 박현우가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조심스럽게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지아야, 어디 불편해? 괜찮아?”
하지아는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 속의 깊은 애정이 과연 어디까지 진짜인지 확인하려는 듯.
하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현우는 당황했다.
“지아야, 혹시 뭐 들은 거야?”
하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더위 먹은 것 같아. 어지럽고 속이 안 좋아.”
박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온 운전기사를 호되게 나무랐다.
“사모님을 어떻게 모신 거야? 이번 달 월급 받고 당장 그만둬.”
하지아는 손을 들어 말렸다.
“날씨가 좋아서 내가 걸어오겠다고 했어. 기사님 탓 아니야.”
박현우는 무릎을 꿇고 앉아 피가 배어 나오는 그녀의 무릎에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었다.
“지아야, 넌 정말 마음이 너무 여리고 착해.”
무려 5년 동안 그녀는 박현우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아는 그의 손을 갑자기 붙잡았다. 여전히 그녀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박현우가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다.
어쩌면 정말 구청 직원의 실수일 수도 있고, 박현우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그녀는 물었다.
“현우야, 혼인관계증명서를 다솜이가 망가뜨렸어. 우리 다시 발급받을까?”
박현우의 눈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건 변호사에게 맡기자. 넌 몸부터 회복해.”
하지아는 절망 속에 눈을 감았다.
제2화
그날 밤, 하지아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부모님의 꾸짖음과 박현우의 달콤한 말이 뒤섞여 들려왔다.
“박현우와 결혼하면 이 집 문턱 다시는 넘지 마라.”
“지아야, 절대 널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 앞으로 내가 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5년 전,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릴 적부터 정해져 있던 약혼까지 파기하며 박현우와의 결혼을 선택했다.
그 일로 아버지는 심장병이 발작했다.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하지만 하지아는 사랑을 믿었다. 그리고 짐 하나 들고 하성시를 떠나 경인시로 왔다.
그 후 5년 동안, 박현우의 사랑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졌다.
친구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아가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갖고 싶다고 하면, 박현우는 사다리라도 놓고 따다 줄 사람이지.”
하지아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었다.
박현우는 실제로 그녀에게 ‘별’을 따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아가 어느 날 천문 잡지에서 푸른 별을 보고 ‘참 특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해 연애 기념일에 그녀는 ‘알비온 스타 네임 레지스트리’에서 발급한 별 이름 등록 증서를 선물 받았다.
그 푸른 별은 이제 그녀만의 것이었다.
박현우는 침실 발코니에 고배율 천체망원경까지 설치해 두었다.
하지아는 거의 매일 그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행복한 결혼 생활로 부모에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만약 결혼이 도박이라면, 그 정교하게 위조된 혼인 관계 증명야말로 그녀가 이 도박에서 패배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혼란 속에서 강혜림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아, 넌 가짜야. 진짜 박씨 가문 사모님은 나야!”
하지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인정 못 해!”
그때 박현우가 강혜림의 뒤에 나타나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아는 마지막 희망처럼 그를 붙잡았다.
“현우야, 빨리 말해줘. 내가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고!”
하지만 박현우는 그녀를 외면하고 강혜림의 손을 잡고 돌아섰다.
“박현우!”
비명을 지르며 그녀는 꿈에서 깨어났다.
“나 여기 있어. 지아야, 악몽 꿨어?”
박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하지아의 눈물이 쏟아졌다.
“현우 씨, 나는 누구야?”
박현우는 잠시 멈칫했다가 웃으며 그녀의 코를 살짝 긁었다.
“넌 하지아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박씨 가문 사모님이지.”
‘정말 그럴까?’
그녀는 묻고 싶었다.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왜 가짜 혼인관계증명서로 자신을 속였냐고.
“현우야, 혼인관계증명서...”
그때 침대 옆에 두었던 박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하지아는 무심코 화면을 봤다.
[혜림]
박현우는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말했다.
“혼인관계증명서는 변호사에게 맡겨서 빨리 처리할게.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
그는 침실을 나서기도 전에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혜림아,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가서 처리할게.”
그와 동시에 하지아의 휴대폰도 울렸다. 그녀가 봉사하던 보육원의 원장이었다.
“하지아 씨, 어떤 부부가 아름이를 입양하려고 해요. 박 대표님께서 전에 입양을 고려한다고 하셨는데 시간 되시면 한번 와 보시겠어요?”
하지아는 옷을 갈아입고 보육원으로 향했다.
계단 입구에 서 있는 박현우를 보고 손을 들려던 순간, 누군가가 달려와 그의 품에 안겼다.
“현우야, 드디어 왔네! 아름이 좀 살려줘!”
박현우는 품에 안긴 강혜림을 달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 딸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않을 거야.”
제3화
‘강혜림이 귀국했어?’
“흑흑, 현우야, 아름이 다른 사람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건 싫어.”
박현우는 그녀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아름을 정식으로 박씨 가문의 호적에 올릴 거야.”
강혜림은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웃음을 되찾았다.
“현우야, 생각해 보면 법적으로 너와 나는 부부잖아. 그 하지아는...”
박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네가 해외에서 힘들까 봐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를 했던 거야. 박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 말고는 난 너에게 뭐든 줄 수 있어. 지아는 잘못한 게 없어. 괜히 건드리지 마.”
강혜림은 표정이 굳었지만 지금은 아름의 일이 급했기에 감정을 눌렀다.
“걱정하지 마. 난 그 여자랑 박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두고 다툴 생각 없어. 애초에 그럴 자격도 없고.”
박현우는 방금 말이 조금 심했다는 걸 깨닫고 급히 몸을 낮춰 그녀를 달랬다.
“무슨 소리야. 네가 자격이 없으면 누가 자격이 있겠어? 넌 박씨 가문에 아름이를 낳아준 공신인데, 우리 어머니도 늘 너를 걱정하고 계셔.”
하지아는 중심을 잃을 뻔했다. 박현우의 어머니가 그와 강혜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니!
눈앞에 시어머니의 고압적인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아가 혼수도 없이 시집왔다는 이유로 박씨 가문에서 탐탁지 않게 여겨졌다.
시어머니는 늘 트집을 잡으며 단 한 번도 좋은 태도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하지아는 그저 정성을 다해 효도하면 언젠가는 받아들일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미 다른 며느리를 받아들인 시어머니가 그녀를 눈에 둘 리가 없었다.
다리가 천근만근이었지만, 하지아는 박현우와 강혜림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박현우는 처음엔 점잖은 척했지만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돌아서자마자 강혜림을 잡아끌어 눌렀다.
“아름의 일은 잠시 제쳐두고, 이제 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그의 몸 일부가 강혜림의 아랫배를 밀어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잡동사니 방으로 들어갔고, 이내 억눌린 신음이 간간히 들려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지아는 온몸이 떨리며 벽을 따라 천천히 주저앉았다.
박현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혜림아, 애까지 낳은 몸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꽉 조여?”
강혜림은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왜? 하지아는 느슨해?”
격렬한 움직임 끝에 박현우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지아는 너무 보수적이야. 너처럼 해외 생활한 애의 개방적인 맛이 없지.”
하지아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늘 고고하고 절제된 태도로, 자신 외의 여자가 다가오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박하 그룹의 대표님이 이렇게 방탕한 사람이었다니.
다시 이어지는 음란한 신음 속에서, 하지아는 벽을 짚고 한 걸음씩 그 자리를 떠났다.
원장은 이미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확인 좀 하려고요. 하지아 씨, 여전히 아름이를 입양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하지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아름의 개인 기록 열람을 요청했다.
기록에는 아름이가 5년 전 봄에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그 시기는 하지아와 박현우가 결혼한 지 반년쯤 되었을 때였다.
즉, 박현우가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청혼하던 그 무렵, 강혜림은 이미 임신 중이었다.
분노와 억울함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하지아는 서류를 원장에게 돌려주었다.
“저는 아름이를 입양할 생각이 없어요. 다른 입양 절차를 진행하셔도 돼요.”
원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아야!”
그때 박현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아름의 서류를 빼앗았다.
“내가 언제 입양 안 한다고 했어? 왜 네가 멋대로 결정해?”
하지아는 차갑게 그를 바라봤다.
“현우 씨도 아름이를 입양하겠다는 거 나랑 상의한 적 없잖아?”
박현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때 강혜림이 그의 뒤에서 나타났다.
“안녕, 지아 씨, 오랜만이네요.”
제4화
박현우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설명했다.
“혜림이는 이 복지시설의 주주야. 오늘 우연히 마주친 거고.”
하지아가 되물었다.
“그게 아름의 입양이랑 무슨 상관인데?”
박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아, 네가 이렇게 냉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아름이는 그렇게 귀엽고 불쌍한데 아무 감정도 안 들어?”
‘내가 냉정하고 무정하다고?’
속고 배신당한 쪽이 오히려 악인이 된 셈이었다.
강혜림이 웃으며 다가와 하지아의 손을 친근하게 잡았다.
“지아 씨, 두 사람이 아름이를 입양할 거라고 해서 정말 기뻤어요. 아름이는 여기서 제일 착한 아이거든요.”
하지아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좋은 아이면 왜 본인이 입양하지 않아요?”
강혜림은 순간 말이 막혀 어색하게 웃었다.
박현우가 나서서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혜림이는 아직 미혼인데 어떻게 아이를 입양해?”
하지아의 가슴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팠다.
박현우는 강혜림에게는 세심했지만, 아름이를 입양했을 때 주변에서 하지아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혼 5년 동안 그는 사업 확장기라는 이유로 그녀의 임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온갖 억측이 떠돌았다.
하지아가 과거 사생활이 문란해 낙태를 여러 번 해서 임신을 못 한다는 소문, 원래 불임이라는 말까지...
심지어 시어머니조차 그녀가 애도 못 낳는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때마다 하지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면 박현우는 값비싼 선물로 달랬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대신 해명해 준 적은 없었다.
정말 사랑했다면 그런 소문 속에서 왜 침묵했을까?
복지시설 아이를 입양하면 그녀가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문은 사실처럼 굳어질 터였다.
하지아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나와의 아이를 원하지 않아?”
박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몇 년 뒤에 갖자. 어때? 알잖아, 지금 회사가 확장 중이라...”
“좋아. 당신 뜻대로 해.”
하지아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미 마음은 무너져 내린 뒤였다. 이제는 그냥 흘러가게 둘 뿐이었다.
박현우는 기뻐하며 그녀를 껴안았다.
“지아야, 역시 넌 제일 착하고 마음이 여려.”
하지아는 그의 귀 옆으로 흩어진 머리카락 너머로, 강혜림의 질투 어린 눈빛을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강혜림은 더는 ‘서류상의 아내’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 앞에 당당한 박씨 가문 사모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하지아의 머릿속에 문득 에픽하이의 [빈 차]가 생각났다.
[갈 길이 먼데 빈 차가 없네...]
이제 그녀는 이 너덜너덜한 관계를 버릴 생각이었다.
누가 이 쓰레기를 주워가든 더는 상관없었다.
박현우는 원장과 함께 절차를 밟으러 갔고, 하지아와 강혜림만 계단 앞에 남았다.
“지아 씨, 혹시 아름이랑 현우가 좀 닮았다고 생각 안 해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부녀 같을걸요?”
하지아는 그 속뜻을 눈치챘다.
“그래요? 인연인가 보네요.”
강혜림은 계속 말을 유도했다.
“아름의 엄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미인이겠죠?”
그녀는 일부러 머리를 넘겨 쇄골에 선명하게 남은 키스 자국을 드러냈다.
“미안해요. 우리 남편이 원래 좀 급해서. 현우도 지아 씨한테 그렇게 굴어요?”
하지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미친개가 먹이를 덮치는 것 같네요.”
강혜림의 얼굴이 굳었다. 반박하려던 순간, 모퉁이에 사람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럼 한번 보죠. 그 미친개가 먹이를 덮치는지, 사람을 덮치는지.”
하지아가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강혜림은 계단 쪽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아!”
비명과 함께 그녀가 굴러떨어졌다.
제5화
하지아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옷자락만 스치며 단추 하나만 떨어뜨렸다.
마침 박현우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강혜림, 그리고 손을 뻗은 채 서 있는 하지아...
박현우는 하지아를 밀쳐내고 달려가 강혜림을 안아 들었다.
“혜림아! 정신 차려!”
강혜림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현우야, 지아 씨 탓하지 마. 그냥 아름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내가 몇 마디 했다가 화나게 했나 봐...”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그의 품에서 기절했다.
박현우는 고개를 번쩍 돌려 바닥에 쓰러진 하지아를 노려봤다.
“하지아, 난 앞에서는 착한 척하고 뒤에서 다른 짓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해.”
그는 강혜림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
“혜림이 무사하기를 빌어.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아래층에서 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하지아는 자갈에 긁힌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피가 흥건했다.
소리를 듣고 나온 원장이 그녀를 부축하며 말을 아꼈다.
하지아는 목에 두른 스카프를 풀어 상처를 감쌌다.
“원장님, 저 여기서 봉사한 지도 꽤 됐잖아요. 전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깡충깡충 뛰는 아름의 모습을 보며 원장이 말했다.
“아름이는 참 복도 많아요. 박 대표님이랑 그렇게 잘 맞으니... 친부녀 같기도 하고요.”
돌아오는 길, 하지아는 5년 동안 한 번도 누르지 않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바로 연결됐다.
주경환의 느긋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하의 하지아가 웬일로 나 같은 사람에게 전화를 다 주네?”
하지아는 그의 비꼬는 말투를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주경환, 우리 혼약 아직 유효해?”
전화 너머에서 그가 피식 웃었다.
“농담도 잘하네. 지금 유부녀 아니야? 애인 찾으려면 사람 잘못 고른 것 같은데.”
하지아는 인내심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만 답해.”
주경환이 수화기에 바짝 다가와 낮게 말했다.
“설마 나랑 불륜이라도 하려는 거야?”
하지아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전화 안 한 거로 할게.”
전화를 끊은 뒤, 하지아는 차를 길가에 세웠다.
휴대폰에는 강혜림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하지아, 5년 동안 가짜 아내로 산 기분이 어때?]
[현우가 지금 뭐 하는지 맞혀볼래?]
이어 도착한 움짤이 도착했다.
박현우가 맞춤 정장을 입은 채 쪼그리고 앉아 강혜림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있었다.
그의 소매에 달린 커프스는 하지아가 골라준 것이었다.
이미 멎었던 손바닥의 상처가 휴대폰을 꽉 쥐는 바람에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주경환이었다.
“하지아, 너는 역시 성격이 급하네. 조금만 더 세심했으면 혼인관계증명서가 가짜라는 걸 진작 알아챘을 텐데?”
주경환은 역시 정보망이 대단했다. 불과 3분 만에 그녀가 5년 만에 진실을 알게 된 사실까지 파악한 것이다.
하지아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주경환, 비꼬는 말 들으려고 전화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주경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유효해. 영원히.”
하지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야?”
주경환은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나의 혼약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뜻이야. 네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언제든 너의 법적 남편이 될 준비가 되어 있어.”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하지아가 입을 열었다.
“경인시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 다음 주 월요일, 하성시 구청 앞에서 봐.”
주경환은 다시 능청스러운 말투로 돌아왔다.
“안 나오면 강아지다?”
“유치하네.”
하지아는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6화
저녁 식사 후, 하지아가 방으로 들어가 쉬려던 순간 현관에서 소리가 났다.
강혜림이 박현우의 팔을 끼고 들어왔고, 뒤에는 여행 가방을 든 고용인들이 따라왔다.
박현우는 고용인들에게 짐을 객실로 옮기라고 지시한 뒤 하지아를 바라봤다.
“혜림이 방을 아직 못 구해서 며칠 우리 집에 머물게 하려고.”
강혜림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잠깐 머무는 거니까 괜찮죠?”
하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상관없어요. 강혜림 씨, 원하시는 만큼 머무세요.”
‘어차피 사흘 뒤면 떠날 테니까.’
박현우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안 화나?”
하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도 곧 나갈 거야.”
박현우가 순간 멈칫했다.
“무슨 뜻이야?”
하지아는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박현우는 그녀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더 묻고 싶었지만 강혜림이 먼저 끼어들었다.
“현우야, 아름이 데리고 놀이공원 가기로 했잖아?”
그 태도와 말투는 완전히 이 집의 안주인 같았다.
박현우는 금세 그녀에게 정신이 팔렸다.
“그래, 지금 바로 데리러 가자.”
그는 하지아를 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지아가 먼저 말했다.
“다녀와. 아름이 집에 오는 걸 미리 축하하는 셈 치고.”
강혜림이 다시 그의 팔을 감았다.
“맞아, 딱 세 식구처럼 말이야.”
하지아는 그녀의 득의양양함을 알아차렸지만 그저 예의상 웃고 돌아섰다.
저녁을 먹고 나니 이미 밤이 깊었다.
하지아가 막 잠들려는 순간, 문밖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강혜림의 애교 섞인 목소리였다.
“현우야, 오늘 하루만 같이 자면 안 돼?”
박현우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혜림아, 지아는 명목상 내 아내야. 이건 도덕적으로 아니지.”
“법적으로는 내가 네 아내야. 걘 가짜고. 나랑 자는 게 더 맞는 거 아닌가?”
하지아는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며 숨을 죽였다.
한참 후, 박현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아름의 엄마야. 내가 널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만 기억해.”
강혜림이 낮게 울먹였다.
“그럼 내가 여기 있는 동안 그 여자랑은 안 잔다고 약속해 줄래?”
박현우가 낮게 알았다고 답했다.
곧 옆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아는 조용히 눈을 뜨고 소리 없이 웃었다.
세 사람이 세 개의 방에서 각자 다른 속셈을 갖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하지아가 내려왔을 때 박현우와 강혜림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아 씨가 푹 자길래 현우더러 깨우지 말라고 했어요.”
그 말은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마치 이 집의 주인은 자신이고, 하지아는 손님인 것 같았다.
하지만 박현우는 바로잡지 않았다.
하지아는 상대하기 싫어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강혜림이 일어나 죽을 한 그릇 떠서 건넸다.
“제가 직접 만든 건데 맛 좀 봐요.”
하지아는 한눈에 그릇 바닥에 가라앉은 밤을 발견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밤 알레르기가 있었다. 한 입만 먹어도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하지아는 그릇을 밀어냈다.
“죄송하지만 저는 밤 못 먹어요.”
강혜림은 곧바로 울먹이며 박현우를 바라봤다.
“나 그냥 나갈게. 길에서 자는 게 여기서 눈치 보는 것보다 낫겠어.”
그러고는 짐을 싸러 가려 했다.
박현우가 급히 붙잡으며 달랬다.
그리고는 하지아를 향해 나무랐다.
“지아야, 빨리 먹어. 혜림이 아침부터 만든 거야.”
하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봤다.
“내가 밤 알레르기 있는 거 알면서도, 내 목숨 걸고 그 사람 기분 맞추라는 거야?”
제7화
박현우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아! 이 집 가장으로서 명령할게. 먹어.”
그때 강혜림은 이미 짐을 들고 내려와 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박현우는 한걸음에 하지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죽 그릇을 들고 그녀의 턱을 잡아 억지로 들이부었다.
“죽 한 그릇 먹는다고 죽겠어?”
하지아는 저항할 힘도 없이 억지로 죽 한 그릇을 삼켜야 했다.
그제야 박현우는 손을 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하지아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콧물과 눈물이 함께 쏟아졌다.
하지만 박현우는 돌아보지도 않고 강혜림을 쫓아 나가 달랬다.
강혜림은 곧 눈이 붉어진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하지아의 옆을 지나가며 박현우가 차갑게 말했다.
“멀쩡하잖아. 괜히 약한 척은.”
하지아의 목은 이미 부어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서... 구급차... 불러줘...”
박현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곧 엄마 될 사람답게 좀 철들어. 빨리 혜림이한테 사과해.”
하지아의 의식은 흐려졌고, 결국 질식으로 기절했다.
박현우는 죽 한 그릇이 그녀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을 줄은 몰랐다.
구급차 안에서 그는 창백한 얼굴로 온몸을 떨며 말했다.
“지아야, 나 겁주지 마...”
하지아는 응급실로 옮겨졌고, 5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살릴 수 없었어요. 환자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걸 가족이 몰랐어요?”
박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죽을 수도 있는 걸 먹게 했다.
그는 깊이 후회했다.
그는 병실에서 하지아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 곁을 지켰다.
목은 여전히 부어 있었다.
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심각한 줄 알았으면 왜 그때 말 안 했어?”
‘더 어떻게 말하라는 거지? 무릎 꿇고 빌었어야 했나?’
하지아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지아 괜찮아. 자책하지 마. 울지 말고.”
그는 휴대폰을 하지아에게 건넸다.
“혜림이 직접 사과하고 싶대.”
하지아는 휴대폰을 귀에 댔다.
강혜림의 목소리가 곧바로 바뀌었다.
“하지아, 죽을 뻔했다면서? 현우가 나한테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누가 더 중요한지 알겠지? 나 네가 밤 알레르기 있는 거 알아. 일부러 그런 거야. 신고해 봐. 증거도 없잖아?”
하지아는 이불을 움켜쥐었다가 다음 순간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박현우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아! 혜림이는 사과하려는 건데 왜 이렇게까지 해?”
하지아는 힘을 짜내 외쳤다.
“나가!”
박현우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간병인 불러놨어. 며칠 혼자 있으면서 생각 좀 해.”
그는 산산이 부서진 휴대폰을 주워 병실을 나갔다.
하지아는 그날 바로 면책서에 서명하고 퇴원했다.
5년 동안 정성 들여 꾸며온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이 저택은 부지 선정부터 인테리어, 소파부터 쓰레기통 하나까지 모두 그녀가 직접 고른 것이었다.
거실 중앙에는 박현우와 찍은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날짜를 따져보면 그때 강혜림은 이미 임신 중이었다.
하지아는 탁자 위의 꽃병을 집어 들어 사진을 향해 힘껏 던졌다.
쾅.
커다란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먼지가 흩날렸다.
가정부가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하지아는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랑 남편이 다시 찍을 거예요. 이건 태워버리세요. 이 집에 있는 저랑 남편의 모든 사진도 다 태워주세요.”
제8화
가정부는 대답하고는 정리를 시작했다. 크고 작은 앨범과 액자를 모두 마당 잔디 위에 쌓아 올렸다.
하지아는 박현우가 아끼던 와인을 몇 병 꺼내 그 위에 부었다.
자신을 위해 한 잔 따르고, 가정부에게도 한 잔 건넸다.
“짠.”
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5년간의 감정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하지아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쌓아놓은 더미 위로 던졌다.
불길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젖혀 술을 단숨에 비웠다. 눈물은 눈꼬리를 타고 옷깃 속으로 흘러내렸다.
남은 건 전부 박현우가 그동안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들이었다. 가방, 드레스, 보석...
하지아는 그것들을 전부 중고 거래 플랫폼에 올리고, 수익 계좌를 복지시설로 변경했다.
박현우는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이 대표님이 선물하신 물건을 전부 온라인에 올려 판매하고 계십니다.”
그는 얼굴이 굳은 채 급히 옷을 걸쳐 입었다.
오는 내내 그는 하지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불안과 초조함에 발걸음이 빨라졌고, 신호등도 몇 개나 무시하며 달렸다.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그는 마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하지아는 와인잔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고, 발밑에는 빈 병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물든 채 이름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박현우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아야, 왜 전화를 안 받아? 놀랐잖아.”
하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놀랐는데?”
박현우는 그녀의 뜨거운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나한테 화나서 숨어버린 줄 알았지.”
술기운을 빌려 하지아는 마음속 의문을 꺼냈다.
“박현우,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박현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없지. 우리는 부부잖아. 서로 솔직해야지.”
하지아는 그의 어깨너머로 멀리 보이는 잿더미를 바라봤다.
마음속 마지막 남아 있던 불씨가, 그가 또다시 거짓을 선택한 순간 완전히 꺼졌다.
박현우는 그녀의 손바닥에 난 딱지를 발견했다.
“지아야, 손은 왜 다쳤어?”
하지아는 그가 원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개한테 물렸어.”
박현우는 안쓰러운 듯 약상자를 가져와 무릎을 꿇고 소독과 붕대를 해주었다.
“넌 왜 이렇게 덜렁거려.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래?”
하지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모든 비바람의 근원이 그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참, 비서한테 들었는데 내가 준 선물 다 팔았다면서?”
하지아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다 낡아서. 새로 바꾸려고.”
박현우는 붕대를 단단히 묶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버려. 내가 더 좋은 거로 사줄게.”
그는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숨결을 스쳤다.
“지아야, 월요일에 아름의 환영회를 열려고 해.”
하지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말을 이었다.
“너 예전에 동남아 아라잔에서 별 보고 싶다고 했잖아. 환영회 끝나고 우리 셋이 같이 별 보러 가자. 어때?”
아라잔의 ‘그린마운트’는 해발 2000m 이상의 최고의 관측지로, 하지아가 늘 가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바로 어제, 그녀는 알비온에서 메일을 받았다.
[하지아 님, 안타깝게도 관측 결과 고객님의 블루 스타는 3일 후 소멸 예정입니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던 별도 이제 곧 사라질 예정이었다.
박현우는 그녀를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지아야, 기분이 안 좋으면 환영회 안 해도...”
하지아는 술이 깬 듯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소리야. 환영회 당연히 해야지. 내가 직접 준비할게.”
박현우의 눈이 환하게 빛나더니 다시 그녀를 꼭 안았다.
“역시 우리 지아야. 다 네 뜻대로 하자. 나도 너한테 다른 서프라이즈 준비했어.”
박현우는 그날, 법적 효력이 있는 혼인관계증명서를 그녀에게 건네 진짜 부부가 되려 했다.
제9화
박현우는 아름의 입양 절차를 핑계로 주말 내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하지아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강혜림은 계속 메시지를 보내왔다.
때로는 남녀가 함께 있는 흐릿한 사진, 때로는 눈 뜨고 보기 힘든 영상, 또 때로는 노골적인 음성 메시지였다.
[하지아, 현우가 아무리 널 사랑한다고 해도 소용없어. 내가 손짓 한 번 하면 바로 내 발밑에 와.]
[아름 환영회 연다면서? 나도 가도 되나? 나랑 아름 사이가 좀 특별하거든.]
이 노골적인 도발에도 하지아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전부 저장만 해두었다.
‘박현우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한다면 나도 답례해야지. 어차피 환영회를 열 거라면 성대하게 열어야 해.’
하지아는 박현우의 절친들, 주요 고객들, 심지어 거의 왕래 없는 친척들까지 모두 초대장을 보냈다.
물론 강혜림도 초대받았다.
처음에 박현우는 반대했지만, 그녀가 하지아를 자극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자 허락했다.
“변호사랑 연락했지? 월요일에 우리 먼저 이혼부터 하자.”
강혜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박현우가 회사에 간 사이 몰래 복지시설로 갔다.
“아름아, 아빠 엄마랑 영원히 같이 살고 싶어?”
아름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하지만 곧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아빠가 비밀 지키라고 했어요. 지아 이모한테 들키면 집에 못 간대요.”
강혜림은 눈을 굴리며 속삭였다.
“환영회 날에는 이렇게 하면 돼... 알겠지, 우리 딸?”
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말대로 할게요.”
예전의 강혜림이 박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노리지 않았던 건, 당시 박현우의 조건이 다른 남자들보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겪은 일들 이후 그녀는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돌아왔다.
주말 밤, 하지아는 마지막으로 침실 망원경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별은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그 별은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빛나더니 완벽한 곡선을 그리며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박현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환영회 준비를 묻는 전화만 했다.
하지아는 화려하게 꾸며진 거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평생 잊지 못하게 해줄게.”
동시에, 그녀는 다음 날 아침 하성시로 돌아가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주경환의 말이 떠올랐다.
“안 나오면 강아지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동이 텄다.
하지아는 짐을 끌고 별장을 나섰다. 이미 검은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쓰며 중얼거렸다.
“안녕, 어리석었던 과거야.”
한편 박현우는 잠에서 벌떡 깼다. 옆에는 강혜림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악몽을 꿨다.
하지아와 함께 별을 보다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녀가 사라지는 꿈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땀을 흘리며 그녀를 찾아 헤맸다.
“지아야!”
강혜림이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현우야, 시끄러워...”
불길한 예감이 든 박현우는 그녀를 밀어내고 급히 옷을 입었다.
가는 길에 그는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구청 문 열리자마자 혼인관계증명서 처리해.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변호사가 확답하자 그는 조금 안심했다.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선 순간, 옆에 검은 승합차 한 대가 나란히 섰다.
그의 휴대폰에는 전날 하지아와의 대화가 떠 있었다.
“평생 잊지 못하게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