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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이별
임하늘의 생일날, 서로에게 전부였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 부주성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고, 장모님의 장례에도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주성...
Chương (1)
第1章
임하늘의 생일날, 서로에게 전부였던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
남편 부주성은 생일을 챙기지 않았고, 장모님의 장례에도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주성은 첫사랑을 데리러 공항에 가 있었다.
제1화
엄마의 유골함을 납골당에 모신 뒤, 임하늘은 이모 한지윤의 전화를 받았다.
[하늘아, 네 엄마도 이제 세상을 떴잖니? 너 혼자 여기 남겨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차라리 이모가 있는 해외로 와서 같이 살자.]
임하늘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아주 큰 결정을 내린 듯,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정말? 와 준다니 정말 다행이다!]
수화기 너머 한지윤의 목소리가 기쁨으로 떨렸다.
[그런데 너... 거기서 결혼했다는 말 들었어. 남편도 너랑 같이 해외로 올 수 있겠니?]
임하늘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우리 곧 이혼해요.”
전화가 끊기기도 전에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주성이 돌아왔다.
임하늘은 눈꺼풀만 살짝 들어 현관 쪽을 봤지만 예전처럼 마중을 나가지는 않았다.
곧 부주성의 친여동생 부서라가 들어왔다.
부서라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오빠가 은아 언니 데리고 왔어. 새언니 같은 가짜는 곧 쫓겨날 거야.”
임하늘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
“가짜?”
부서라는 더 뿌듯한 표정이 됐다.
“은아 언니 보면 바로 알게 될걸.”
말이 끝나자마자 부주성이 진은아를 데리고 들어왔다.
커다란 캐리어와 가방들을 든 박 기사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진은아의 품에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선명한 붉은 장미가 유난히 눈부셔서 임하늘의 눈가가 저절로 붉어졌다.
‘부주성에게는 진은아에게 장미를 사 줄 시간도 있었구나.’
결혼한 지 5년, 부주성은 임하늘에게 꽃 한 송이 사 준 적이 없었다.
“은아가 막 귀국해서 아직 지낼 곳을 못 구했어. 당분간 우리 집에 머물 거야.”
부주성은 임하늘을 보지도 않았고, 말하는 내내 시선은 진은아에게 붙어 있었다.
“내 방 옆 손님방 정리해 둬. 앞으로 은아가 거기 쓸 거니까.”
그건 부탁이 아니고, 명령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닌 듯했다. 임하늘이 이 집의 안주인이 아니라 가사도우미라도 되는 듯, 누군가가 들어와 머무는 일에 동의는 필요 없고 손님방 정리만 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성아, 내가 치울게. 하늘 씨 귀찮게 하지 않아도 돼.”
진은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임하늘은 진은아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임하늘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몸 전체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서라가 말한 ‘가짜’가 무슨 뜻인지, 임하늘은 그때서야 알았다.
진은아의 얼굴은 임하늘과 정말 많이 닮았다.
다만 임하늘은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였고, 진은아의 눈매에는 재벌가 딸에게서 나올 법한 당당한 오만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 거였구나...’
임하늘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으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눈가의 물기를 훔쳤다.
‘그런 거였어. 이제야 알겠네.’
임하늘이 느끼기에, 자신의 삶은 늘 불운의 연속이었다.
운명은 단 한 번도 자기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서로가 의지하며 살았던 엄마마저 자신의 생일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이상했지.’
‘나 같은 불운한 사람이 우연한 만남 한 번에 재벌가 후계자의 눈에 들고...’
‘결국 재벌가 후계자와 결혼까지 한다는 게 말이 되나 했어...’
‘그런 거였구나. 이제야 모든 설명이 맞아떨어졌지.’
‘나는 ... 그저 대용품이었어.’
“왜 울어? 그게 울 일이야? 은아 언니가 며칠만 지내는 건데 그걸로 눈물까지 흘려? 새언니, 속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
부서라가 비웃었다.
임하늘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진은아 씨 때문이 아니야.”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은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성아, 그냥 내가 나갈게.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
부주성의 표정이 곧장 어두워졌다.
“나갈 필요 없어.”
부주성은 진은아를 붙잡고 누구의 반박도 허락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에서는 내가 결정해. 박 기사, 짐 올려요.”
고개를 든 박 기사는 불안한 눈으로 임하늘을 힐끗 보면서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주성도 고개를 돌려 임하늘을 보았다.
“불만 있어?”
내리누르는 듯한 말투 속에는 분명한 협박이 담겨 있었다.
임하늘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어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불만 없어요. 진은아 씨가 들어오는 거, 환영해요.”
‘나도 불만이 있을 리 없지.’
‘어차피 곧 떠날 사람인데, 무슨 불만을 품겠어?’
임하늘은 마지막까지 품위를 잃지 않은 채 물러나려고 했다.
그리고 영원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제2화
부주성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임하늘을 한참 바라보다가 슬쩍 비웃었다.
“불만 없다면 박 기사 도와서 은아 짐도 같이 올려.”
첫사랑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부주성은 일부러 임하늘을 모욕하려고 했다.
임하늘의 낯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이내 웃었다.
“알았어.”
말을 마친 임하늘은 돌아서서 박 기사와 함께 짐을 들었다.
이렇게 얌전하고 순순히 따랐으니 부주성은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는 임하늘의 뒷모습을 보자, 부주성의 가슴속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피어났다.
손님방은 금세 정리됐다.
임하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진은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늘 씨, 나를 받아 줘서 고마워.”
임하늘의 손을 덥석 잡은 진은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가련하게 말했다.
“하늘 씨와 주성이가 없었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정말 몰랐을 거야.”
진은아의 손등이 위로 향하는 바람에 눈부신 빛이 임하늘의 눈을 찔렀다.
진은아의 약지에는 임하늘의 결혼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진은아의 반지는 다이아몬드가 더 크고 더 밝았고 더 눈부셨다.
임하늘의 결혼반지가 값싼 모조품처럼 보일 만큼이었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임하늘의 심장은 다시 아렸다.
‘내 결혼반지마저 값싼 모조품이었구나.’
‘대용품에게 모조품이라. 참 잘 어울리네.’
그때 바깥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 기사가 거대한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와! 누가 케이크 시켰어?”
부서라가 소리쳤다.
“오빠, 은아 언니한테 보낸 거야?”
“은아 생일은 다음 주야.”
부주성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미리 주문해 두긴 했지만, 케이크 가게에서 날짜를 착각했나?”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배달 기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임하늘 님 계신가요? 받으시는 분은 임하늘 님입니다. 이모님이 보내신 케이크인데, 오늘 하루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안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슬픔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 세상에 태어나 줘서 고맙다고, 생일 축하한다고 하셨습니다.”
거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임하늘에게 향했다.
보기 드물게 미안한 기색을 드러낸 부주성이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당신 생일이었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진은아의 생일은 다음 주인데도 부주성은 일찌감치 선물과 케이크를 준비해 두었다.
정작 아내인 임하늘의 생일은 완전히 잊었다.
‘당연하지. 대용품의 생일을 기억하느라 신경 쓸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오늘이 내 생일이었네? 나도 잊고 있었어.”
임하늘은 티 나지 않게 분위기를 풀었다.
“이모가 기억해 줬을 줄은 몰랐네. 나중에 전화해서 고맙다고 해야겠어.”
겸사겸사 출국 준비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도 재촉할 생각이었다.
임하늘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성아, 정말 너무했어. 어떻게 아내 생일을 잊을 수 있어?”
진은아의 말투는 나무라는 듯하면서도 애교가 섞여 있었다.
“하늘 씨,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아, 내가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주성이 선물을 줬는데, 아주 예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어.”
“이 목걸이를 주성이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목에 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푼 진은아가, 웃으면서 목걸이를 임하늘에게 내밀었다.
“하늘 씨, 생일 축하해.”
제3화
목걸이는 아름다웠다.
희귀한 레드 다이아몬드가 하트 모양의 플래티넘 장식 안에 박혀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랑을 상징하는 디자인이었다.
아쉽게도 그 유일한 사랑은 임하늘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아.”
임하늘은 고개를 저으며 웃는 얼굴로 거절했다.
“진은아 씨에게 준 선물인데, 내가 어떻게...”
임하늘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은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걸이도 받지 않을 것이고, 목걸이를 준 남자도 더는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비꼬는 거야?”
부주성이 갑자기 화를 냈다.
“일 때문에 바빠서 당신 생일을 잊은 것뿐이잖아.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임하늘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또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울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내내 웃었고, 말도 예의 바르게 했다.
그런데도 부주성은 왜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비꼰 적 없어.”
임하늘은 눈을 내리깐 채 피로가 가득한 시선을 숨겼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목걸이를 받으면 돼? 받으라고 하면 받을게.”
임하늘은 정말로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진심을 담아 진은아에게 인사했다.
“진은아 씨, 선물 고마워.”
대용품으로서 임하늘은 자신이 충분히 얌전했고 충분히 협조했으며, 부주성의 체면도 세워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목걸이를 받자 부주성의 화는 더 커졌다.
“당신...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
그 한마디를 남기고 부주성은 문을 세게 닫고는 나가버렸다.
목걸이를 받지 않아도 화를 냈고, 받아도 화를 냈다.
그래서 임하늘은 알았다.
목걸이를 받느냐 마느냐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도 부주성은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사랑받는 사람은 뭘 해도 괜찮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틀린다.
한지윤이 보낸 생일 케이크는 컸지만, 임하늘과 함께 먹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모의 마음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임하늘은 혼자 케이크 하나를 억지로 다 먹었다.
결국 배가 터질 듯 불편해져서 화장실에서 한참을 토했다.
참 우스웠다.
임하늘은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 없이 웃었다.
‘어릴 때는 돈이 없어 생일에도 케이크를 못 먹었지.’
‘유리창 밖에 서서 케이크 가게 안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이제는 다 먹지 못할 만큼 큰 케이크가 생겼네.’
‘그런데 위가 아파서 토하고 싶을 만큼 먹어야 한다니...’
어떤 것은 그때 얻지 못하면, 훗날 손에 넣어도 아무 의미가 없다.
...
저녁 무렵, 임하늘은 자기 물건을 대충 정리해서 안방에서 나왔다.
진짜 첫사랑이 돌아왔으니 ‘대용품’은 알아서 물러나야 했다.
더 이상 부주성과 같은 방을 쓸 수 없었다.
진은아가 보고 기분 나빠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짐을 옮기고 있을 때, 진은아가 마침 옆방에서 나왔다.
진은아는 짧은 슬립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치마가 너무 짧아서 가리는 게 거의 없었다.
미끈하게 드러난 어깨와 길고 가는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늘 씨, 오해하지 마. 주성이 안방에 가지 않은 건 하늘 씨를 피해서가 아니라 아직 화가 나 있어서...”
진은아는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카드게임만 했어.”
임하늘은 웃었다.
“나한테 설명할 필요 없어.”
임하늘은 둘이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혼 서류는 이미 작성해 두었다.
내일 기회를 봐서 부주성에게 서명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늘 씨, 역시 오해했네.”
진은아는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주성이는...”
진은아가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임하늘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
“알아. 진은아 씨와 내 남편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잖아. 사이도 무척 좋고. 진은아 씨가 어렵게 귀국했으니,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나눌 이야기도 많겠지.”
“그러니 둘이 마음껏 옛이야기 나누도록 해. 나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임하늘은 돌아서서 나갔다.
진은아만 그 자리에 남아서 오랫동안 의미심장한 눈으로 임하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4화
부주성은 진은아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임하늘은 사실 그 일에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른 아침, 가사도우미 김순미가 임하늘을 뒤뜰로 데리고 가서 비밀스럽게 그 ‘중요 정보’를 알려 주었다.
“사모님, 정신 바짝 차리셔야 해요!”
김순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은아 씨는 딱 봐도 대표님을 흔들려고 들어온 거예요! 어젯밤 입은 옷을 사모님이 못 보셔서 그렇지... 아이고,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임하늘은 담담히 웃었다.
“너무 많이 나가셨어요. 진은아 씨는 부 대표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서, 부 대표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에요.”
“앞으로는 진은아 씨 흉보지 마세요. 부 대표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 거예요.”
그 말에 그대로 얼어붙은 김순미가 고개를 들고는 묘한 눈으로 임하늘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모님, 오늘 왜 이러세요?”
“저 괜찮아요.”
임하늘은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 웃음은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과도 같았다.
임하늘은 계속 웃을 것이다. 더는 울지 않을 것이다.
“아니에요! 오늘 정말 이상하세요!”
김순미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예전에는 저한테 대표님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 때, 항상 편하게 이름을 부르셨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부 대표’라고 하시잖아요!”
임하늘은 긴 속눈썹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부주성과 처음 만났을 때, 임하늘은 부주성을 ‘부 대표’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계속 부주성의 친구들을 따라서 ‘주성 오빠’라고 불렀다.
나중에 둘이 처음 몸을 섞던 밤, 부주성은 임하늘을 침대 위에 눕힌 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서 거칠게 몸을 움직이면서 자신을 ‘성아’라고 부르게 했다.
임하늘은 ‘성아’가 둘만의 애칭이라고 믿었다. 자신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몰래 달콤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제 진은아가 부주성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듣고서야 임하늘은 깨달았다.
그날 밤에 왜 눈을 가렸는지...
임하늘의 눈이 진은아와 가장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닮았다.
그래서 부주성은 임하늘에게 ‘성아’라고 부르게 했다.
몇 번이고 반복하게 했다.
임하늘이 기절할 때까지.
“이모님, 이런 집에서 일할 때 제일 중요한 건 많이 움직이고 적게 말하는 거예요.”
임하늘은 김순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당부했다.
“앞으로 진은아 씨 흉은 보지 마세요.”
임하늘은 곧 떠날 것이다.
진은아가 임하늘 대신 이 집의 안주인이 될 것이다.
김순미가 진은아의 미움을 사면, 결국 나중에 힘들어질 테니까.
...
김순미에게 당부를 마친 뒤, 임하늘은 위층에서 이혼합의서를 가져와 부주성의 서재로 갔다.
업무를 보고 있던 부주성은 임하늘이 들어오자 코웃음을 쳤다.
“이제 잘못한 줄 알겠어?”
“그래.”
임하늘은 담담히 말했다. 부주성이 잘못이라고 한다면 잘못이라고 인정하면 그만이다.
며칠만 지나면 끝인데 다투고 싶지 않았다.
“진작 알아들었으면 아무 일도 없었잖아. 굳이 그렇게 유난을 떨어야 했어?”
부주성은 성가신 얼굴로 말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서랍에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임하늘에게 던졌다.
“생일 선물이야. 열어 봐.”
임하늘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게 말하면 부주성은 또 화를 낼 것이다.
임하늘은 지금 이혼합의서의 서명을 받아야 하니, 부주성을 자극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서 조용히 선물을 받아 들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부주성의 핸드폰이 울렸다. 임하늘이 우연히 화면을 보니 진은아에게서 온 전화였다.
부주성은 임하늘을 힐끗 보고는, 서랍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차갑던 눈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임하늘을 대할 때처럼 차갑지 않았다.
임하늘은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여기 서명해 줘.”
부주성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바로 서명했다.
서명을 끝낸 뒤에도 진은아와 웃으며 통화를 이어 갔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임하늘이 망설이다가 물었다.
“안 읽어 봐도 돼?”
“안 봐도 돼.”
부주성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장모님 쪽 해외 교수 초청 관련 서류잖아. 그건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 내 서명이나 날인이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한 실장에게 전달해.”
“급하지 않은 일로 굳이 나한테 전화하지 말고. 지난번에도 계속 전화하는 바람에 중요한 연락을 몇 건이나 놓쳤다는 거 알잖아.”
제5화
임하늘의 어머니 한애남은 일주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애남은 뇌종양 말기였다.
부주성의 조치로 국내에서 제일 좋은 대학병원에 입원했지만 병세는 날마다 나빠졌다.
심지어 정신이 또렷한 시간은 점점 줄었고, 반대로 혼미한 시간은 늘어났다.
대부분의 시간에는 임하늘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담당의는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했다.
수술을 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을 넘기기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임하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부주성에게 전화해 의견을 묻고 싶었다.
세 번 연속 전화가 끊어졌다. 네 번째에서야 통화가 연결됐지만, 돌아온 것은 다짜고짜 쏟아지는 질책이었다.
[별일도 없는데 왜 전화해? 바쁘니까 귀찮게 하지 마.]
담당의는 임하늘이 부씨 집안의 며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주성이 나서서 해외의 유명한 교수를 초청해서, 국내 의료진과 함께 협진하면 수술 성공률이 올라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임하늘은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핸드폰을 들고 병원 복도에 앉았다.
초조하게 시간을 세며 기다린 끝에 오후 6시가 되었다.
부주성이 보통 퇴근하는 시간이었다.
임하늘은 용기를 내 다시 부주성에게 전화했다.
부주성은 받지 않았다.
임하늘은 야근 중일 거라고 생각했다.
‘괜찮아...’
조금 더 기다리면 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이번에는 더 오래 기다렸다.
밤 12시가 되어 다시 걸었지만, 아무리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임하늘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부주성이 자신의 번호를 차단한 것이었다.
그 뒤 꼬박 일주일 동안 부주성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한애남은 그렇게 시간만 지연되다가 수술의 최적 시기를 놓쳤다.
‘부주성이 정말 그렇게 바빴을까?’
‘그렇게 바쁜 사람이 임하늘을 차단해 둔 일주일 동안...’
‘진은아의 귀국 선물을 고르고 이 여자의 생일 케이크를 예약할 시간은 어떻게 있었을까?’
차마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감고 떨리는 손에 힘을 준 뒤, 임하늘은 이혼합의서를 챙겨 서재를 나왔다.
...
점심에는 김순미가 한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밥을 얻어먹으러 온 부서라는 앉기도 전에 트집을 잡았다.
“새언니, 예전에는 언니가 밥을 했잖아. 오늘은 왜 안 해?”
부서라는 일부러 시비를 걸었다.
“은아 언니가 들어오니까 갑자기 고상한 척하고 싶어졌어? 은아 언니한테 밥해 주기 싫은 거야?”
그 말을 듣자 부주성의 표정이 확연히 굳어졌다. 차가운 눈으로 임하늘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웠다.
부주성의 아내였지만 임하늘에게는 남편의 첫사랑에게 밥을 해 주는 일을 거절할 자격조차 없었다.
“아가씨, 내가 잘하는 음식은 대부분 매운 찌개나 볶음요리잖아.”
임하늘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진은아 씨는 담백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입에 안 맞을 거야.”
“고춧가루 안 넣으면 되잖아?”
부서라는 여전히 못마땅했다.
“서라야, 그러지 마. 하늘 씨는 네 올켄데 존중해야지.”
진은아가 중재하듯 나섰다.
“순미 이모님이 하신 음식도 정말 맛있...”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진은아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면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부주성이 놀라 곧장 달려가 진은아를 부축했다.
“성아, 배가 너무 아파.”
진은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부주성의 품에 힘없이 기댄 모습은 가냘프고 아름다워 보였다.
부주성은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배가 아파?”
옆에 있던 부서라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임하늘을 가리켰다.
“아! 알았어! 언니가 밥을 안 하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네. 은아 언니 음식에 뭘 탄 거지? 찔리니까 일부러 하루 종일 주방에 안 들어간 거야!”
제6화
난데없는 누명에 임하늘은 난감해졌다.
“내가 하루 종일 주방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진은아 씨 음식에 뭘 넣을 기회가 있었겠어?”
“주방에 안 들어갔다고 해서 주방 사람을 매수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지.”
부서라가 싸늘하게 웃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왔을 때 새언니랑 순미 이모님이 정원에서 수상하게 속닥거리던 거 봤어.”
“몰래 무슨 작당을 했는지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그때 은아 언니 음식에 뭘 넣을 상의를 한 거네?”
“아이고, 아가씨! 그런 말씀은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김순미가 억울해했다.
“제가 가사도우미일 뿐인데 어떻게 사람 음식에 독을 타요?”
“그럼 아침에 새언니랑 정원에서 뭘 수상하게 얘기했는데요?”
부서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
김순미는 몰래 임하늘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부주성과 진은아가 있는 자리에서 아침에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었다.
“대답을 못 하시네요? 역시 둘 다 수상하잖아요!”
부서라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은아 언니, 내가 경찰 불러 줄까? 음식에 독을 탔으면, 크게 보면 살인미수잖아!”
‘경찰’이라는 단어를 듣자 진은아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더 심해졌다.
진은아는 부주성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
“성아, 너무 아파! 나 죽는 거 아니야? 무서워...”
진은아가 그렇게 괴로워하자 부주성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진은아를 번쩍 안고 현관으로 뛰었다.
“차 대기시켜! 바로 병원으로 가게!”
나가기 전에 부주성은 임하늘을 노려보았다.
“돌아와서 처리할 거야.”
김순미는 겁에 질렸다. 나이가 쉰 살이 넘은 사람이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사모님, 이 일을 어쩌면 좋아요? 저는 진은아 씨 음식에 아무것도 안 탔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일하러 와서 노후자금 조금 벌려는 거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에요!”
임하늘은 음식에 손댄 사람이 김순미일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만든 사람이 김순미인 이상, 김순미가 다른 누군가를 지목하지 않으면 부주성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부 대표가 돌아와서 물으면, 제가 시켰다고 하세요.”
임하늘은 차분히 말했다.
“괜찮아요. 겁내지 마세요. 모든 잘못을 제게 돌리세요.”
“그게 어떻게 괜찮아요?”
김순미가 다급해졌다.
“사모님, 우리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인정하면 안 돼요!”
임하늘은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사이에 알게 됐다.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부주성은 이미 내가 한 일이라고 믿고 있잖아.’
‘인정해도, 부정해도 결과는 같을 거니까.’
그렇다면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한 사람을 지키는 편이 낫다.
임하늘은 평범한 사람이 괜한 일에 휘말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제가 말한 대로 하세요.”
임하늘의 목소리는 드물게 단호했다.
“걱정 마세요. 저도 생각이 있어요. 괜찮을 거예요.”
병원에서 밤새 소동을 치른 뒤, 새벽이 되어서야 부주성은 진은아를 태우고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추궁이 시작됐다.
“당신... 꽤 영리하더라. 은아가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 땅콩가루를 죽에 뿌렸어...”
“오늘 내가 제때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으면 은아는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어!”
“순미 이모님도 이미 자백했어. 당신이 시켰다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할 기회를 줄게!”
임하늘은 고개를 들어 진은아를 담담히 보았다.
진은아는 작고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말했다.
“하늘 씨, 난 하늘 씨가 날 해치려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아. 분명 사정이 있었던 거지?”
임하늘은 웃었다. 진은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믿어 줘서 고마워. 실제로 나는 해치지 않았어. 순미 이모님은 왜 나를 모함하는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경찰을 부르자. 경찰이 와서 제대로 조사하면 돼. 내 말은 믿지 않아도, 경찰 수사 결과는 믿을 수 있겠지.”
제7화
임하늘이 경찰을 부르자고 하자 진은아와 부주성의 반응은 흥미로웠다.
진은아는 시선을 피했고, 부주성은 분노로 폭발했다.
“임하늘! 내가 당신이 아까워서 경찰을 못 부를 거라고 생각해?”
‘아니, 부주성.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야.’
임하늘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다만 당신의 첫사랑이 경찰을 부르지 못하게 할 거야.’
‘진은아도 알 테니까. 그런 얄팍한 수는 당신은 속여도 경찰은 못 속인다는 걸.’
경찰이 땅콩가루를 뿌린 사람이 진은아 자신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면, 꽤 난처해질 테니까.
역시 다음 장면에서 진은아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아, 그러지 마. 하늘 씨는 어쨌든 네 아내잖아. 나 때문에 하늘 씨를 감옥에 보내면 안 돼.”
“또 나는 이렇게 괜찮아졌잖아. 백번 양보해서 하늘 씨를 생각하지 않는다 해도 부씨 집안을 생각해야지.”
“부성그룹 며느리가 감옥에 갔다는 소문이 나면 주가에도 영향이 갈 거야.”
진은아의 설득 끝에 부주성은 겨우 화를 참으면서 경찰은 부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은아가 마음이 약해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고,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부주성은 임하늘의 목을 움켜쥐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독을 묻힌 듯한 목소리였다.
“은아가 오늘 밤 겪은 고통을 당신도 그대로 겪어야 해.”
“정 선생, 준비해 둔 약 가져와요.”
부주성은 임하늘의 턱을 붙잡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억지로 입에 들이부었다.
약효는 빠르게 퍼졌다.
임하늘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서 떨었다.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부주성은 한쪽에 서서 바닥에서 고통에 뒤틀리는 임하늘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프지? 당신이 탄 죽을 은아가 먹었을 때도 이렇게 아팠어.”
부주성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 고통을 똑똑히 기억해. 아파 봐야 고치겠지.”
임하늘은 손등을 세게 물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나도 놓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부주성, 걱정하지 마. 당신 말대로 이 통증을 단단히 기억할게.’
‘이게 당신을 사랑한 감각이구나. 이게 당신을 사랑한 대가구나.’
‘이제 똑똑히 알았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게.’
임하늘은 하루 종일 아팠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약효가 사라졌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때 이모 한지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임하늘은 간신히 정신을 붙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하늘아, 이모야.]
전화기 너머로 한지윤의 따뜻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출국 절차는 내가 전부 끝냈어. 언제 올래? 이모가 비행기표 끊어 줄게.]
임하늘은 바닥에 누워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날이 밝자마자 떠나고 싶었다.
이곳에는 단 1분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통증에 뒤척인 지금... 임하늘은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간 인형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일도 버거웠다.
이 상태로는 비행기를 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이 모습으로 해외에 도착하면 이모도 마음 아파할 것이다.
그래서 임하늘은 말했다.
“모레 저녁으로 해 주세요. 이혼 절차도 끝났고, 여기 정리만 하면 갈 수 있어요.”
[알았어. 그럼 모레 저녁 일곱 시 비행기로 끊을게. 주민등록증하고 여권 챙겨. 공항에 가서 신분증과 여권으로 바로 발권하면 돼.]
제8화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하루 밤낮을 보낸 뒤에야 임하늘은 겨우 기운을 조금 되찾았다.
오늘은 해외로 떠나는 날이었다.
저녁 7시 비행기.
비행기에 오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새벽빛이 옅게 번질 무렵, 임하늘은 일어났다.
자신의 물건을 전부 정리해서 보육원에 기부했다.
기부한 물건 안에는 지난 몇 년 동안 부주성이 준 선물도 들어 있었다.
옷, 가방, 보석 액세서리...
심지어 결혼반지까지 남기지 않았다.
값나가는 것은 기부해서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게 했다. 값이 나가지 않는 것은 불태웠다.
다시 시작하려면 깨끗하게 떠나야 했다.
부주성의 물건은 단 하나도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다 보니 오후가 되었다.
임하늘이 핸드폰을 보니 벌써 오후 3시였다.
비행기 출발까지 네 시간 남았다.
임하늘이 옷을 갈아입고 공항으로 가려는데, 부서라가 갑자기 앞을 막았다.
“여기서 멍하니 뭐 해? 가자. 나랑 메이크업 받으러 가야지.”
“메이크업?”
임하늘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왜?”
“모르는 척하지 마.”
부서라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오늘 새언니랑 우리 오빠 결혼기념일이잖아. 오빠가 그러더라. 그때 새언니가 시집올 때 부모님이 반대해서 예식도 못 하고 혼인신고만 했다고, 늘 마음에 걸렸대.”
“요즘 은아 언니 일 때문에 새언니를 좀 소홀히 한 것도 맞으니, 결혼 5주년에 맞춰서 결혼식을 다시 해 주고 싶대.”
‘가짜야... 분명 가짜야.’
임하늘은 생각했다.
‘이건 함정이야.’
임하늘과 부주성은 혼인신고를 한 지 5년이 됐다.
부주성은 단 한 번도 결혼식을 다시 해 주겠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 진은아가 돌아온 오늘, 갑자기 임하늘을 위해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못 믿겠어?”
부서라는 경멸 어린 눈으로 임하늘을 훑었다.
“그럼 우리 오빠한테 직접 전화해 보든가. 내가 이 귀찮은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오빠가 시키지 않았으면 나도 새언니한테 신경 안 써.”
임하늘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부주성에게 전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임하늘이 나무토막처럼 멍하니 서 있자 부서라는 인내심을 잃었다.
직접 부주성에게 전화를 건 뒤 핸드폰을 임하늘에게 던졌다.
[여보, 장모님 일은 들었어...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오늘은 내가 제대로 보상해 줄게.]
임하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야. 분명 가짜야.’
‘부주성이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할 리 없어!’
[전부 준비해 뒀어. 서라가 따라가서 옷 갈아입는 거 도와줄 거야. 우리... 예식장에서 보자.]
‘거짓말... 전부 거짓말이야!’
임하늘의 몸이 저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부주성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왜 나한테 결혼식을 해 주려는 거지? 무슨 의도야?’
이 모든 게 가짜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자신이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주성이 맞춰 두었다는 웨딩드레스를 입는 바로 그때, 임하늘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사람은 그런 존재였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기대하게 된다.
‘혹시 이번만은 진짜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불행했으니 이번 한 번쯤은 행복해도 되는 거 아닐까?’
‘가서 확인만 해 보자.’
임하늘은 생각했다.
‘어차피 시간은 아직 있어.’
임하늘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만분의 일 가능성뿐인 결혼식에 갔다.
...
4시에 메이크업이 끝났다.
5시에 예식장이 있는 솔빛호텔에 도착했다.
임하늘이 연회장 문을 밀어 열자, 차가운 물 한 양동이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하하하하하하!”
귓가에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터졌다.
뒤에 서 있던 부서라는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새언니는 진짜 멍청한 여자야. 우리 오빠가 진짜 새언니한테 결혼식을 다시 해 줄 줄 알았어?”
“하하하하하, 바보야. 오늘은 은아 언니 생일이야. 여긴 새언니가 꿈꾸던 결혼식장이 아니라 은아 언니 생일 파티장이거든!”
연회장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모두 진은아의 생일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인 듯했다.
진은아도 있었다. 역시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디자인은 임하늘이 입은 것과 똑같았다.
다만 진은아의 드레스는 물에 젖지 않아서 여전히 풍성하고 아름다웠다.
“이 드레스는 사실 우리 오빠가 은아 언니를 위해 맞춘 거야. 예쁘지? 오빠가 오늘 은아 언니한테 청혼할 거거든.”
“우리 오빠와 은아 언니가 진짜 사랑이고, 새언니는 그 전설 같은 사랑에 끼어든 우스운 조연일 뿐이야.”
“눈치가 있으면 자기 발로 나가야지. 오빠한테 쫓겨나면 더 창피하잖아.”
임하늘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우는 걸까?’
‘처음부터 가짜라는 걸 알았잖아.’
‘임하늘, 넌... 정말 바보야. 그렇게 많이 속고도 또 속아 넘어갔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왔어?’
‘뭘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네가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임하늘은 돌아서서 숨이 막히는 공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최대한 빨리 공항으로 갔다.
곧장 공항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서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를 찢기 시작했다.
‘벗어. 벗어. 전부 벗어.’
이 옷은 너무 조이고 숨이 막혔다.
‘살려줘. 살려줘. 제발 살려줘!’
임하늘은 질식할 듯한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이 끔찍한 웨딩드레스에서 벗어나 이곳을 떠나야 했다.
영원히 떠나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아야 했다.
마침내 임하늘의 미친 듯한 손길에 웨딩드레스는 조각조각 찢어졌다.
임하늘은 새하얀 드레스를 공항 화장실의 더러운 바닥에 버렸다.
가방에서 검은색 슬립 원피스를 꺼내 갈아입었다.
핸드폰이 계속 진동했다. 임하늘이 꺼내 보니 부주성에게서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다.
택시에 탄 뒤부터 계속 걸려온 것 같았다.
서른 통은 족히 넘었다.
하지만 임하늘은 무너져 내린 상태라서, 전화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핸드폰은 아직도 미친 듯이 울렸다.
부주성이 계속 전화하고 있었다.
임하늘은 유심칩을 빼 두 조각으로 부러뜨려 버렸다.
곧 7시였다.
항공권을 발권한 뒤, 임하늘은 보안검색을 통과하고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모든 SNS 계정도 삭제했다.
승무원이 와서 핸드폰을 꺼 달라고 하자 임하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 화면이 꺼졌고, 비행기도 천천히 떠올랐다.
임하늘은 좌석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주성, 안녕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