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맑은 눈에 사무친 원망을

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그대 맑은 눈에 사무친 원망을

GoodNovel Hoàn thành

“황후가 아이를 더 원하고 있다.” 소무경은 그녀의 침의를 벗기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수태가 잘되는 몸이니, 아이를 하나 더 갖도록 하거라.” ...

Chương (1)

第1章

“황후가 아이를 더 원하고 있다.” 소무경은 그녀의 침의를 벗기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수태가 잘되는 몸이니, 아이를 하나 더 갖도록 하거라.” 열 달 뒤, 서하연은 딸을 낳았다. 산파는 탯줄을 자르자마자 포대기조차 만져보지 못하게 하고는 아이를 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벌써 두 번째였다. 궁 안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황후가 과거 폐하를 따라 전장을 누비다 몸을 상하여 더는 자식을 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지만 않았어도, 이 궁에 다른 여인이 들어올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태사(太師)의 적녀인 서하연은 그저 때를 잘 타고나, 황실의 대를 잇기 위해 이용되는 '씨받이' 에 불과할 뿐이었다. 제1장 3년 전 황자를 낳았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아이의 핏기 어린 얼굴조차 보지 못한 그녀를 두고, 소무경은 친히 아이를 품에 안고 나가며 그저 냉랭한 한마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이 아이는 이제부터 황후의 적장자다. 네가 감히 다른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에게는 울부짖으며 매달릴 기력이 남아있었다. 침상에서 내려가 아이를 쫓아가려 발버둥 치다 시녀들에게 무참히 짓눌리면서도 목을 놓아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그 처절한 발악 끝에 그녀가 배운 것은 궁의 법도였다. 게다가 매일 아침 봉의궁으로 가 문안 인사도 올렸다. 오직 가리개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숨소리라도 훔쳐듣기 위해. 소무경은 처음에는 이를 묵인했으나, 이내 황후가 ‘황자의 정서에 안정이 필요하다’고 넌지시 읊조리자 그녀는 두 번 다시 아이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아이마저 빼앗겼다. 서하연은 오물이 묻은 산실의 침상 위에 멍하니 누워있었다. 마치 혼이 통째로 빠져나간 빈 껍데기처럼. 이제는 정말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산후조리 기간도 채 끝나지 않았건만, 봉의궁의 상궁이 찾아와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문안 인사를 거르지 말라며 전갈을 보냈다. 그렇게 서하연은 채 낫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봉의궁으로 향했다. 황후 유해원은 공주를 품에 안고 어르고 있었다. 그러다 서하연의 창백한 안색을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왔느냐? 숙비(淑妃)의 낯빛이 이리도 험악하니, 내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모양인게로구나.” “그런 불충한 마음은 품은 적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후는 아이를 유모에게 넘겨주며 느릿하게 옷소매를 정리했다. “궁에 들어왔으면 네 본분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지. 폐하께서 너를 맞아들이신 것은 태사의 명망을 높이 보시고 문신들을 장악해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너는...” 그녀는 말을 멈추고는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일 뿐이다. 내게 황자와 공주를 낳아 바치는 것, 그것만이 네 유일한 가치란 말이다.” 전각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황후는 돌연 웃음기를 거두었다. “방금 들어올 때 보니 미간을 찌푸리더구나. 감히 본궁을 향해 불경한 마음을 품은 게지. 마당에 나가 무릎을 꿇고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자성을 하거라.” 박석 바닥 위로 눈이 점차 쌓여갔다. 서하연은 차디찬 눈밭 위에 강제로 꿇려 앉혀졌다. 가만히 전각 안을 들여다보니, 황후는 방금 태어난 지 한 달 된 그녀의 딸을 안고 부드럽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능숙한 몸짓은 마치 진짜 친어머니 같았다. 무릎의 감각이 저릿한 통증에서 마비로, 이내 완전한 무감각으로 변해갔다. 시야가 검게 흐려지려 할 때쯤, 태감의 날카로운 전갈이 울려 퍼졌다. “폐하 납시었사옵니다.” 곤룡포 자락이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쳐 전각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어찌 저 사람을 눈밭에 꿇려둔 것이오?” 소무경의 목소리였다. 황후는 콧소리 섞인 목소리로 교태를 부렸다. “신첩은 그저 궁의 법도를 조금 가르치려 했을 뿐인데, 저리도 병약한 척 가련하게 굴지 뭡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신첩은 무장 가문 출신이라 성정이 곧아 음흉한 꾀를 부릴 줄 모릅니다.” 정신을 잃기 전, 소무경의 무심한 한마디가 서하연의 귓가에 꽂혔다. “그만두시오. 여봐라, 어서 처소로 메어 가도록 하거라.”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린 황혼녘이었다. 소무경은 침상 머리에 앉아있다가,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을 보고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깨어났느냐? 어의 말이 산후 조리 중에 몸이 허해진 데다 한기까지 들어 그렇다더구나. 황후도 악의 없이 한 행동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말거라.” 서하연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한때 그녀의 규방 시절, 꿈속을 누비던 전장의 영웅이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시를 짓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영웅은 눈앞에서 용포를 입은 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로 그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었다. “신첩, 잘 알고 있사옵니다.” 잔잔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황후마마께서는 폐하의 조강지처이시니 신첩이 공경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 감히 원망하는 마음을 품겠습니까.” 한 자, 한 자가 지극히 평온하고 공손했다. 소무경은 순간 멈칫했다. 그의 기억 속 서하연은 이런 여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채 제발 아이를 보게 해달라며 그에게 애원하곤 했고, 거절당하면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때면 그녀의 눈동자 속 빛은 조금씩 흐려져만 갔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썩어 문드러진 고인 물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아이의 일은....” 소무경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찾아내려 애쓰는 듯한 기색이었다. “황후의 밑에서 자라면 적장자가 되는 것이니, 향후...” “아이에게는 과분한 복이지요.” 서하연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심지어 입가에는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지만, 시리도록 차가운 미소였다. “신첩의 신분이 비천하거늘, 황후마마께서 길러주신다니 이는 폐하와 마마의 지극한 은덕이옵니다.” 은덕이라. 소무경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전각 밖에서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친히 인삼탕을 달이시어 눈 오는 날 한기를 쫓으라 청하옵니다. 황자 전하께서도 폐하를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소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위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서하연은 어느새 눈을 감은 채, 다시 잠든 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문가로 걸어가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숙비, 황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내 늘 마음의 빚이 있다. 너는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내 뜻을 헤아려 주길 바란다. 몸을 잘 추스르거라.” 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었다. “다음에 다시 수태를 한다면, 그때는 필히 네 곁에 두고 키우게 하겠다.” 서하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천장을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곁을 지키고 있던 시녀 청아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폐하께서 옥좌에 오르신 지 세 해가 지났더냐?” “예, 마마.” “천하는 태평하느냐.” “북방은 평안을 되찾았고, 남방의 수환 역시 모두 다스려졌사옵니다. 조정 내부에서는 태사 대감께서 문관을 통솔하며 무관들과 소소한 조율을 거치고 있으나, 대세는 더없이 안정적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서하연은 마침내 서서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겨울날 매서운 바람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거면 되었다.” 그녀가 속삭였다. “내 드디어, 죽을 수 있겠구나.” 제2장 삼 년 전, 첫아이를 빼앗기던 그날 밤, 서하연은 죽음을 생각했다. 서하연은 태사의 외동딸로,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통해 도성 안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새 황제가 즉위하여 조정이 어지럽지 않았다면, ‘문신은 마땅히 황제와 뜻을 같이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궁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터였다. 본래대로라면 내로라하는 사대부가에 시집가 시와 술을 나누며 평생을 고귀하고 자유롭게 살았을 목숨이었다. 입궁은 서하연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새 황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했기에 조정이 불안했고 백성들의 삶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문신들의 영수였고, 이 혼인은 군신 간 동맹의 상징이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교지를 받들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스스로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은밀한 기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폐하, 소무경을 연모했으니까. 북방의 전장에서 돌아온 장수, 반란을 진압한 영웅. 대전 위에서 당당하게 백관의 조하를 받던 그의 영명한 모습을 연모했었다. 그리하여 은밀한 기대를 품고 궁궐로 들어온 것이었다. 적어도 한 자락의 진심은 얻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임신 네 달째 되던 날, 후원의 가산 뒤에서 소무경이 황후에게 건네는 말을 훔쳐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황후, 안심하시오. 짐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대뿐이오. 하연이는 그저 황실의 대를 잇기 위한 씨받이일 뿐이니, 아이가 태어나는 대로 황후의 슬하로 데려와 키우게 할 것이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그녀의 모든 환상을 찢어발겼다. 그날 밤, 그녀는 침전에서 날이 샐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그러나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영웅에게 시집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의 바둑돌이자, 아이를 담는 그릇에 불과했을 뿐. 죽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라의 기틀이 겨우 잡혀가던 차라 조정이 지극히 불안했었다. 게다가 후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불효이자 큰 죄이니 아버지에게 누를 끼칠 것이요, 가짜 죽음으로 도망친다면 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이룩한 군신 간의 화합을 저버리는 꼴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궁궐에서 하루하루를 죽은 듯 버텨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유일한 낙이라곤 황후마마께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갈 때, 병풍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옹알이 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비록 희미한 실루엣일지라도, 그것이 그녀를 하루 더 살아가게 하는 초라한 힘이었다. 이제 삼 년이 흘렀다. 달갑지 않게 딸아이까지 낳았고, 두 아이 모두 황후의 아이가 되었다. 천하는 태평해졌고 조정은 안정을 되찾았다. 정치적 바둑돌로서 그녀는 쓰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황실에 핏줄까지 남겼다. 이제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으리라. 서하연은 침상에 누워 날짜를 손꼽아 헤아렸다. 아버지는 이레 뒤, 삼남 지방을 순찰하고 도성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지나온 3년 동안, 아버지는 궁 밖에서 폐하를 위해 문신들을 단속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척결했으며, 그녀는 궁 안에서 현숙한 ‘숙비’의 도리를 다했다. 부녀가 한 명은 조정에서, 한 명은 궁에서 군신상득이라는 연극을 완벽하게 치러낸 것이다. 이제 천하가 태평해졌다. 북방은 고요하고 남방의 우환도 사라졌으니, 조정에서 문신과 무신이 간혹 다툴지언정 대국은 이미 굳건했다. 이제, 바둑돌로서 그녀는 제 몫을 다한 상태였다. 사흘 뒤, 공주의 삼칠일 잔치가 열렸다. 연회는 지극히 성대하게 치러졌다. 봉의궁 정전에는 불빛이 대낮처럼 환했고, 조정의 3품 이상 관원들의 정경부인과 숙부인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소무경이 황후와 함께 입전할 때, 그의 품에는 황자가 안겨 있었다. 어느덧 세 살이 된 아이는 황색 도포를 입고 소무경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바마마” 하고 불렀다. 황후가 팔을 벌려 안으려 하자, 아이는 얌전하게 품으로 안겨들며 “어마마마”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단출한 세 사람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해 보였다. 서하연은 시선을 내리깔고 찻잔을 들었다. 차가 뜨거워서일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숙비가 왔구려.” 황후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몸이 편치않아 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 “공주 전하의 삼칠일은 나라의 대사이옵니다. 그런데 신첩이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예를 갖추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다.” 그때, 황후가 손짓을 했다. “윤성아, 이리 와서 숙비마마께 인사 올리려무나.” 황자 소윤성이 의자에서 내려와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황후 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낯섦이 깃든 눈빛으로 서하연을 바라보았다. “윤성아, 이분은 숙비마마이시란다.” 황후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숙비마마, 평안하셨습니까.” 서하연은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황자 전하께서 대단히 영특하십니다.” “숙비, 그만 앉거라.” 소무경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서하연의 몸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무심히 거두어졌다. 연회는 계속되었다. 외명부 부인들은 공주 아기씨가 백옥처럼 사랑스럽다느니, 황후마마의 자애로움과 폐하의 영명함을 칭송하는 아첨을 늘어놓았다. 한편, 서하연은 조용히 앉아 간간이 젓가락질만 할 뿐이었다. 비록 음식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술잔이 몇 차례 돌았을 무렵, 황후가 문득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생각해 보니, 숙비는 공주의 생모임에도 아직 아이를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지 않느냐.” 순간 연회장이 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서하연이 고개를 들자, 황후의 웃음 띤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오늘은 아주 기쁜 날이니, 모름지기 한 번 안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황후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정말로 아이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대신들의 부인들은 일제히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조심스레 뻗어 아이를 받아 안았다. 강보에 싸인 아이의 몸은 아주 따스했다. 살포시 드러난 작은 얼굴을 바라보니 아이는 어느덧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딸이었다. 그때, 아기를 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갑자기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 즉시 손을 뻗어 아이를 다시 빼앗듯 안아 들고 살살 달래주었다. “오냐, 오냐. 울지 마라. 어미가 여기 있단다.” 기이하게도 아이는 황후의 품으로 돌아가자마자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한편, 연회장 구석에서 부인들이 나직하게 수군거렸다. “역시 기른 정이 무서운 법이지……”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큰 게로군.” “숙비마마가 아직 젊으셔서 아이 안는 법을 모르시는 게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늘이 되어 서하연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는 여전히 아기를 안았던 자세 그대로, 텅 빈 손을 허공에 둔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황후는 아이를 달래며 미안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숙비, 네 탓이 아니다. 공주가 워낙 낯을 가려서 그런게야.” “신첩의 손길이 서툴러 공주 전하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서하연은 눈을 내리깔며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황후마마께서 공주 전하를 양육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시니, 그저 망극할 따름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소무경을 향해 돌아섰다. “폐하, 신첩 몸이 안 좋아 이만 먼저 처소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소무경은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바라보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래, 이만 물러가 쉬도록 하거라.” “망극하옵니다, 폐하.” 서하연은 예를 갖추고 뒤를 돌아 걸어 나갔다. 등 뒤로 쏟아지는 동정과 조롱, 그리고 고소해하는 시선들이 서늘하게 꽂혔다. 봉의궁을 벗어나자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때, 시녀 청아가 그녀를 부축하며 나직이 고했다. “마마, 처소로 가시지요.” “그래.” 몇 걸음 옮기던 서하연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전각 안은 여전히 불빛이 환했다. 창호지 문틈으로는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무경은 황후의 곁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고, 황후는 우러러보며 웃음을 지었으며, 황자는 아비의 도포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참으로 다정하고 온전한 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천륜일 뿐,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서하연은 고개를 돌려 다시 묵묵히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갔다. 제3장 그날 밤 소무경이 처소로 찾아온 것은 자시(子時)가 가까워진 무렵이었다. 이제 막 자리에 들려던 서하연은 전갈을 듣고 서둘러 겉옷을 걸쳤다. 지밀시녀인 청아가 머리를 얹어주려 서두르자, 서하연은 가만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매서운 밤바람을 날것으로 품고 들어선 소무경은, 속적삼 차림에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서하연을 보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를 뵙옵니다.” 서하연이 고개를 숙이며 엎드려 예를 갖추었다. “일어나거라.” 소무경은 탁상 옆에 가 앉으며 스스로 찻잔을 채웠다. “황후가 공주의 이름을 정했다. 하은이라 하기로 하였지. 짐이 생각하기에, 그래도 네가 명색이 생모인데 네 뜻도 물어보아야 마땅할 듯싶어 왔다.” 서하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공주 전하의 어머니는 황후마마이시옵니다. 마마께서 지으신 이름이니 어찌 좋지 않겠사옵니까.” 찻잔을 쥔 소무경의 손가락 끝에 핏기가 가셨다. 고요한 전각 안, 화로 속의 숯이 툭 하고 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네가 그리 생각해주니 다행이구나.” 소무경은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네 처소에 들른 것은, 또 다른 연유가 있어서다. 황자가 올해로 세 살이 되었으니 이제 글공부를 시작해야 하지 않겠느냐. 스승은 황후가 친히 가려 뽑을 것이다.” 서하연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소무경은 잠시 말을 고르듯 뜸을 들였다. “하여… 짐의 생각엔, 네가 앞으로는 황자를 멀리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아이가 아직 어리니 생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괜한 분란이 생길까 염려스러워서 그러는 거다. 그저 황후만을 유일한 어머니로 알고 자라는 것이, 모두에게 평안한 길이 아니겠느냐.” 그제야 서하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빛바랜 촛불 아래, 그녀의 눈동자는 깊은 가을의 못물처럼 잔잔하여 그 어떤 파문도 일지 않았다. “신첩, 폐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그 말에 소무경은 순간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매달려 울기를 바랐다. 예전처럼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대체 왜 제게 이리도 가혹하시냐고 원망이라도 하길 바랐다. 허나 지금 눈앞의 여인은 영혼이 빠져나간 꼭두각시처럼 지나치게 공손할 뿐이었다. “지금 짐을 원망하는 것이냐?” 소무경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신첩이 어찌 감히 폐하를 원망하겠사옵니까.” 소무경은 가슴이 꽉 막혀왔다. 이렇듯 순종적이면서도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날 선 태도는, 과거의 눈물 섞인 애원보다 그를 더 숨 막히게 했다. “서하연! 지금 네 태도가 진정 원망이 아니란 말이냐? 이리 가슴에 앙금을 품고서, 어찌 다시 안심하고 황실의 후사를 도모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서하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뒤틀렸다. 조롱 같기도 했고, 완전히 마비된 마음의 비명 같기도 했다. “폐하께서 대통을 이을 후사가 염려되신다면, 간택을 널리 행하시어 현숙한 규수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이소서. 신첩은 미련하고 덕이 부족하여, 성은을 받들기 두렵사옵니다.” “서하연!” 소무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짐은 황후와 약조한 바가 있다! 너 하나를 후궁으로 들인 것만으로도 당초 약속했던 ‘일생에 단 한 사람만을 마음에 두겠다’는 맹세를 저버린 것인데, 어찌 황후를 또다시 배신하란 말이냐!” 그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순간, 전각 안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잠겼다. 정작 말을 뱉은 소무경 자신도 아차 싶어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 막 연달아 두 아이를 낳고 수척해진 몸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여인에게, 자신이 다른 여인과 나눈 깊은 정을 과시하듯 소리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이보다 더한 불한당 같은 짓이 없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서하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상 가장자리로 기어 나왔다. 그러곤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신첩… 말실수를 하였사옵니다. 폐하와 황후마마의 지극한 정은 만백성의 귀감이 될 천고의 가화이옵니다. 신첩, 이만 폐하를 배웅하겠나이다.” 서하연은 고개를 숙인 채 엎드린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 가냘픈 등줄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더는 단 한마디의 원망도 뱉지 않았다. 소무경은 바닥에 엎드린 청색 비단 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정체 모를 둔탁한 통증이 뒤엉켜 올랐다. 문득 3년 전, 그녀가 처음 궁으로 들어왔을 때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의 그녀는 활짝 웃을 줄 알았다. 후원에 핀 매화 한 가지를 꺾어 들고 아이처럼 기뻐했고, 그가 상소문을 읽을 때면 곁에서 말없이 먹을 갈아주던 여인이었다. 한번은 그가 고개를 들다 눈이 마주치자 다급히 시선을 내리면서도 귓볼까지 발갛게 물들이던 순수한 이였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게 된 것이.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주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보태어 이 비참한 상황을 주워 담고 싶었다. 허나 황제로서의 위엄과, 황후인 유해원을 향한 죄책감이 그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아 맸다. 결국 소무경은 거칠게 소매를 휘두르며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가시지 않은 분노, 그리고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일말의 비겁함을 가득 안은 채. 문이 열렸다 닫히며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들었다. 방 바깥에서 대기하던 청아가 울며 뛰어들어와 서하연을 부축했다. “마마, 마마. 어찌 이리도 스스로를 괴롭히시옵니까…” 서하연은 시녀의 부축을 받아 침상에 누웠다. 그러더니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두 줄기 눈물이 눈가에서 전해져 관자놀이로 빠르게 흘러내렸다. 처음에는 그저 소리 없는 눈물이었다. 그러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억누르고 억누르던 조각난 울음이 목구멍을 찢고 새어 나왔다. 상처 입은 어린 짐승의 비명과도 같은 울음이었다. 그녀는 비단 이불을 맹렬히 끌어당겨 깃을 죽어라 깨물었다. 삐져나오려는 울음을 전부 이불 속으로 삼켜 내는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려 왔다. “마마, 마마… 차라리 소리 내어 우십시오. 그리 참으시면 속이 문드러집니다…” 청아가 가슴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얼마나 흘렀을까. 오열로 흔들리던 어깨가 거짓말처럼 차츰 가라앉았다. 서하연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눈물 범벅이 되었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녀는 눈물이 고여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청아를 빤히 응시했다. 쉰 듯한 목소리였으나, 뱉어내는 음절만큼은 칼날처럼 또렷했다. “청아야. 딱 이번 한 번만이다.” “예?” “우는 것은 딱 오늘뿐이라고.” 서하연은 손을 들어 뺨에 남은 물기들을 거칠게 훔쳐냈다. 뺨을 스치는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앞으로 내 눈물 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의 시선이 청아를 지나쳐 허공의 어느 한 지점에 멎었다. 청아에게 하는 말인지, 혹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 모를 말을 그녀는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럴 가치조차 없으니까.” “그 사람을 위해 흘릴 눈물 따위, 내겐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단 말이다.” 제4장 이튿날, 동틀 녘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이었다. 봉의궁의 상궁이 예고도 없이 서하연의 처소로 들이닥쳤다. 어젯밤 폐하가 숙비의 처소를 나서실 때 기색이 몹시 좋지 않으셨으니, 이는 필시 숙비가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해 폐하의 성심을 어지럽혔음이 자명하니 황후가 친히 황실의 규율을 가르치겠다는 전갈이었다. 길에는 밤새 내린 눈이 얄팍하게 깔려 있었고, 벼려진 칼날 같은 아침 삭풍이 살을 감쌌다. 서하연이 봉의궁 전각 앞 광장에 다다랐을 때, 황후 유해원은 여우 털 가죽옷을 걸치고 화로를 품에 안은 채 회랑 아래 안락하게 앉아 있었다. “숙비는 정녕 제 죄를 모르겠느냐?” 유해원이 느긋하고도 거만하게 입을 열었다. 황후뿐만이 아니었다. 아침 문안을 온 몇 명의 후궁들과 그곳을 지나던 시녀, 태감들까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숙비가 어제 폐하께 대들며 심기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는데, 그것이 정녕 사실인 것이냐?” 황후는 상석에 곧게 앉아 아무 말 없이 호갑을 까딱이며 만질 뿐이었다. 서하연은 무릎을 꿇으며 답했다. “신첩, 결단코 그런 적 없사옵니다.” “없다고?” 유해원이 코웃음을 쳤다. “본궁의 귀가 먹은 줄 아느냐? 폐하께서 어젯밤 네 처소를 나서실 때 안색이 몹시 참담하셨다 들었다. 너는 황제를 모시는 비첩으로서 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진노하시게 만들었으니 그 죄를 어찌 다스려야 마땅하겠느냐?” “신첩이 어리석고 둔하여 그러하오니, 마마께서 명확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어리석고 둔해? 본궁이 보기엔 둔한 게 아니라 딴마음을 품은 게지!” 유해원의 목소리가 순간 서슬 퍼렇게 돌변했다. “어제 폐하께서 옥보를 굽혀 너를 보러 가셨거늘, 너는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감히 폐하를 노하게 하여 발길을 돌리시게 만들었다! 이것이 네 서가에서 배운 예법이더냐? 경성 제일의 재녀라 불리던 네 교양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 서하연은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진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보아하니 여전히 불복하는 낯빛이구나.” 유해원이 냉소를 지었다. “좋다. 규율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면, 본궁이 오늘 친히 가르쳐 주마. 너는 여기서 무릎을 꿇고, <여계(女誡)>와 <내훈(內訓)>을 백 번씩 암송하도록 하거라. 언제 다 외우든, 그 전까진 절대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육궁의 모든 후궁에게 보여주겠노라. 폐하를 공경하지 않고 황후를 존경하지 않는 자의 말로가 어찌 되는지!” 한겨울이라 새벽바람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텅 빈 광장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 오가는 궁인들이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했으나 얼음장 같은 석판 바닥에 처량하게 꿇어앉아 있는 숙비의 모습을 모두가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서하연은 척추를 곧게 세운 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흐트러짐 없이 또렷하고 평온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가 매서운 바람을 뚫고 광장에 울려 퍼졌다. 무릎은 찌르는 듯한 통증을 지나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고 입술은 보라색으로 핏기없이 얼어붙었으나 그녀의 등줄기만큼은 처음과 다름없이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뻗어 있었다. 한 시진이 지나고, 다시 두 시진이 흘렀다. 유해원은 처음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으나, 서하연이 정말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끝까지 암송해 내려가자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특히 간간이 지나가던 품계 낮은 후궁들이나 관사 태감들이 서하연을 향해 은밀한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을 목격한 순간, 황후의 마음속에서 질투와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그만하거라!” 유해원이 매섭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외우기는 유창하게 잘도 외우는구나. 허나 평소 책만 파고들었을 뿐, 성현의 가르침을 단 한 자도 마음 깊이 새기지 않은 모양이지! 네 부친인 서태사는 천하 문인들의 영수라 불리는 자인데, 여식을 고작 이따위로 가르쳤단 말이냐? 이토록 대세를 알지 못하고 군상을 보살필 줄 모르는 딸을 키워냈으니, 그에게도 자식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죄가 크다!” 순간, 줄곧 바닥을 향해 있던 서하연의 속눈썹이 번쩍 치켜올라 갔다. 부친은 그녀의 역린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어떤 모욕과 질타는 견딜 수 있었으나, 부친의 청렴하고 고결한 이름을 누군가 더럽히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도 가당치도 않은 모함으로 소모되는 것은 더더욱. 서하연은 유해원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오랜 시간 추위에 떨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기상은 서리를 품은 추상과도 같았다. “황후 마마께서 신첩을 훈계하시니, 신첩은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신첩의 부친은 평생을 황실에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으며, 조정의 안정과 천하 문인들을 다스르기 위해 밤낮으로 피와 땀을 쏟으셨나이다! 제 아버지는 단 한 순간도 공무에 소홀하신 적이 없으신 분입니다! 마마의 그 말씀은 신첩이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사오며, 또한 이 같은 언사는 충신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폐하의 성명하심을 가릴까 두렵사옵니다!” “네가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게냐?” 유해원은 이성을 잃고 격분하여 그대로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손을 휘둘러 서하연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 날카롭고 청명한 마찰음이 텅 빈 광장에 잔인하게 울려 퍼졌다. 매서운 손찌검에 서하연의 고개가 한쪽으로 사정없이 돌아갔다. 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뺨 위로 붉고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무섭게 부어올랐다. 서하연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입술 터진 틈새로 붉은 혈흔이 베어 나왔지만,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유해원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결코 기세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좋다, 아주 좋아! 대단한 충신의 딸이군! 이리도 영악하고 말재주가 뛰어날 줄이야!” 유해원은 분노로 가슴을 가쁘게 들썩이며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게 아무도 없느냐!” 제5장 “이곳에서 무슨 소란이냐?” 공기를 찢는 묵직한 호통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소무경은 어느새 궁문 앞에 서 있었다. 조회를 방금 마친 듯, 조복조차 갈아입지 못한 차림새였다. 그의 시선이 얼음장 같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뺨이 붉게 부어오른 서하연에게 머물렀다. 이어 잔뜩 독기를 품은 유해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소무경의 미간이 깊게 비틀렸다. 유해원은 소무경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다렸다는 듯 억울한 척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폐하, 숙비의 오만방자함을 좀 보시옵소서! 신첩이 그저 약간의 훈계를 더했을 뿐이거늘, 저 아이는 제 아비인 서태사의 권세를 들먹이며 신첩을 핍박하였습니다! 구구절절 말대꾸를 일삼으며 행실을 뉘우칠 기색조차 보이지 않기에 신첩이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그만...” 소무경은 서하연의 얼굴에 남은 상흔을 가만히 응시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위로 선명하게 돋아난 붉은 종창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무경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미세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눈물을 흘리는 유해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가 끝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황후의 상처. 그 지독한 부채감이 가슴속 통증을 순식간에 짓눌러 버렸다. 그는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황후를 문책하여 그 위엄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소무경은 서하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음성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숙비, 정녕 네 죄를 모르겠느냐? 황후가 육궁을 관장하며 후궁들을 훈육하는 것은 마땅한 본분이거늘, 감히 윗사람을 능멸하고 황후를 진노케 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감당하려 하느냐?” 서하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바닥에 깔린 잔설보다 차가웠고, 살을 에이는 삭풍보다 날카로워 소무경의 가슴 깊은 곳을 찔러왔다. 원망도, 애원도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황량한 깨달음만이 그 맑은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서하연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얼어붙은 바닥에 이마를 갖다 댔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고요했다. “신첩... 죄를 청하옵니다. 폐하와 황후마마의 처분을... 달게 받겠나이다.” ‘처분’이라는 두 글자가 허공에 가볍게 흩어졌으나, 소무경의 심장에는 흡사 거대한 철퇴가 내려앉는 듯한 충격을 주었다. 문득 어젯밤 그녀가 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폐하, 간택을 널리 행하시어 현숙한 규수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이소서.” 그 기억이 도화선이 되어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화가 다시금 치밀어 올랐다. 소무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제왕의 냉혹함만이 남아 있었다. “숙비는 언행이 방자하여 황후를 모독하였으니, 오늘부로 장신궁으로 거처를 옮겨 문을 닫고 자숙하라. 내 전교가 있기 전까지는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장신궁. 서쪽 육궁 중에서도 가장 외진 구석에 자리해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사실상 냉궁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때, 유해원의 두 눈에 잔인한 희열이 스쳤다. 서하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바닥에 엎드린 그녀의 가냘픈 몸을 내려다보던 소무경은 가슴을 짓누르는 정체 모를 조바심에 휩싸였다. 그는 거칠게 소매를 휘두르며 돌아섰다. “가마를 대령하라!” 이윽고 황제의 행차 행렬이 멀어져갔다. 서하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어붙었던 무릎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강하게 밀려왔다. 심복 시녀인 청아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청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마마, 어서 처소로 가시지요…” “그래.” 서하연의 목소리는 아주 가냘팠다. “짐을 챙기거라. 처소를 옮길 것이다.” 장신궁은 아니나 다를까 소문대로 황폐하기 그지없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전각 내부에는 거미줄이 뒤엉켜 있었다. 청아가 아랫사람들을 단속해 온종일 먼지를 털어내고서야 겨우 사람이 누울 만한 온기가 돌았다. 깊은 밤, 청아는 서하연의 얼굴에 약을 바르며 한숨을 쉬었다. 구리거울 속에 비친 서하연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반쪽 뺨은 흉하게 부어올랐고 입술 끝에는 붉은 핏덩이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러나 거울 속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도 고요했다.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심해처럼 기괴할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청아야. 너는 내가 지난 세월 동안 너무 인내하며 살았다고 생각하느냐?” 청아가 약을 바르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게 늘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라 하셨고, 대국을 살피라 가르치셨지.” 서하연은 혼잣말을 하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가르침을 받들어 세 해를 참았다. 내 아이가 품에서 빼앗겨 갈 때도 참았고, 눈밭에 무릎을 꿇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참았으며, 오늘의 이 뺨을 맞으면서도 참았느니라...” 그녀가 고개를 돌려 청아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허나, 내가 인내하여 얻은 것이 무엇이더냐?” 청아는 잠시 멈칫했다. 거울 속에 비친 주인의 낯선 눈빛에 순간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마마… 마마께서는 대감마님을 위해, 그리고 대국을 위해 결단을 내리신 것이옵니다…” “내 아버지를 위해, 대국을 위해…….” 서하연은 나직하게 읊조리며 차가운 거울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그 대가로 나는 언제까지고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되어 남들의 칼날에 휘둘려야 한단 말이냐? 내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고, 아버지의 명예마저 사람들이 마음대로 짓밟게 내버려 두면서?” 그녀가 손가락을 거두자, 손끝에 차디찬 한기가 서려 있었다. “인내가 가져온 것은 오직 한계 없는 모욕과 끝없는 박탈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청아를 바라보았다. 서하연의 눈동자 속에서는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내리더니, 이내 전혀 다른 형상으로 다시 맞춰지고 있었다. “가서 내 자단나무 상자를 가져오너라.” 그 상자는 혼인할 때 서씨 가문에서 가져온 혼수 중 하나로, 줄곧 창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 두었던 물건이었다. 청아가 상자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열자,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옛 물건들이 드러났다. 서책 몇 권과 시고 한 묶음, 몇 점의 인장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빛바랜 그림 한 점이 둘둘 말려 있었다. 서하연은 그림을 꺼내 책상 위에 천천히 펼쳤다. 그림 속에는 세 해 전, 개선 행렬 속에서 말을 타고 눈밭을 가르던 소년 장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의 소무경이었다. 입궁하기 전날 밤, 그를 연모하는 마음을 담아 밤새 그렸던 화폭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가당치도 않게 가소로울 뿐이었다. 서하연은 책상 앞으로 다가가 묵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러더니 화폭 속 사내의 옷자락 귀퉁이에 아주 작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결코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글씨였다. 서하연은 먹이 마르도록 부드럽게 숨을 불어넣은 뒤, 그림을 다시 정성스럽게 말아 청아에게 건넸다.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하거라. 단 한 방울의 먼지도 묻지 않게, 절대 훼손되지 않도록 정갈히 다루어야 한다.” 청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잘 간직해 두거라.” 서하연이 창밖의 짙은 어둠을 처연하게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지않아 이 그림이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테니.” 그 눈빛에 청아는 원인 모를 전율을 느꼈다. “마마,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아무 생각도 없다.” 서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폐하께서 서산으로 군사 열병을 나가시는 날이 언제더냐?” “사흘 뒤이옵니다.” “좋다.” 서하연은 창밖의 마른 가지를 응시하며 차갑게 명했다. “네가 나를 대신해 일을 하나 처리해 주어야겠다.” 그날 밤, 청아는 장신궁의 담벼락을 넘어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제6장 출궁을 앞두고, 소무경은 장신궁을 찾았다. 마당에서 볕을 쬐고 있던 서하연은 그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법을 갖추었다. “짐은 서산에 사흘간 머물 것이다. 너는... 몸을 잘 추스르고 있거라.” 서하연의 여전히 붉게 부어오른 뺨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던 소무경은 끝내 입술을 다물며 말을 삼켰다. “신첩, 폐하를 배웅하옵니다.” 소무경은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더니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백자 병 하나를 꺼내 놓았다. “어혈을 가라앉히는 고약이다. 바르거라.” 서하연은 그것을 받아들었으나, 끝끝내 그의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소무경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서하연은 손에 쥔 백자 병을 가만히 응시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가마 행렬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어 침묵만이 남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때, 바닥에 부딪힌 백자 병이 처참하게 깨어지며 걸쭉한 약고가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마마!” 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왔다. “치우거라.” 서하연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사흘 뒤. 궁내에 은밀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숙비가 입궁하기 전, 마음 깊이 연모하던 정인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시를 주고받으며 가약을 약속했던 수려한 공자가 있었다고. 얄궂은 간택령만 아니었다면 필시 대륙이 칭송할 가약이 되었을 것이라는 살이 붙었다. 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숙비가 궁에서 한 폭의 초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림 속 준수하고 풋풋한 소년은 단연코 폐하가 아니었다는 구체적인 목격담까지 돌았다. 그렇게 추문은 마른 벌판의 들불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육궁을 집어삼켰다. 그날 오후, 황후는 궁의 기강을 바로잡고 해괴한 유언비어를 척결하겠다는 구실로 서하연을 장신궁에서 자신의 처소인 봉의궁으로 압송하듯 불러들였다. “감히 황후를 더럽히고 궁을 모독하다니. 서하연, 네 년이 정녕 미친 것이냐.” 유해원의 음성은 낮았으나 문장마다 서슬 퍼런 독기가 묻어났다. “폐하께서 궁을 비우신 지 단 하루다. 그런데 이토록 추잡하고 천박한 소문이 온 궁을 뒤덮다니. 네 년이 음욕을 참지 못해 날뛴 것이냐, 아니면 본래 너희 서가의 뼈대가 그토록 비루하고 상스러운 것이냐?” 얼음장처럼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서하연은 척추를 대나무처럼 곧게 세우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일 뿐입니다. 황후마마, 마마의 혜안으로 헤아려 주시옵소서.” “터무니가 없어?” 유해원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끝이 서하연의 코앞에서 파르르 떨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그동안 떨던 그 고고하고 청렴한 태도는 모조리 폐하를 기만하기 위한 수작이었던 게지! 속으로는 딴 사내를 품고 겉으로만 정조를 연기한 요물 같으니. 폐하께서 환궁하시는 즉시 상소하여, 너희 서가 여식들의 피를 한 방울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짜내어 조사할 것이다...” “폐하께서는 저를 처벌하지 못하십니다.” 서하연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황후의 말을 끊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으나, 기이할 만큼 또렷하고 단단했다. 유해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더니 이내 극도로 달아오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 지금 무어라 지껄였느냐?” “폐하께서는...” 서하연은 황후의 경악과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한 자, 한 자 조용히 읊조렸다. “신첩에게 그리 무정하지 않으십니다.” 전각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유해원은 제 귀를 의심케 하는 오만한 발언에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와 서하연의 머리맡에 내려선 황후의 음성은 질투와 악의로 짓개겨져 있었다. “서하연, 네 년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본궁은 폐하의 조강지처이니라! 소년 시절부터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평생 단 한 사람만을 곁에 두겠노라 내게 맹세하셨다! 너를 궁에 들인 것은 고작 후사를 잇기 위함이다. 너희 서가의 세력을 달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단 말이다! 폐하의 눈에 너는 그저 숨 쉬는 장식품, 아이를 배는 씨받이일 뿐인데 어찌 감히 정을 논한단 말이냐!” 유해원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갈기갈기 후벼팠다. 삼 년 동안 쌓인 질투의 화염이 한꺼번에 폭발한 순간이었다. 한편, 서하연은 그 표독스러운 일갈을 단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었다. 이윽고 귓가를 찌르던 날카로운 잔음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그녀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와 폐하의 금슬은 신첩이 감히 범접할 수 없지요. 다만, 얼마 전 사서를 읽다 보니 전조의 폭군과 황후 허씨 역시 환난을 함께한 정 깊은 부부였다 하더군요. 허나 그가 옥좌에 오른 이후 양녀 소씨의 아양에 눈이 멀어 황후를 멀리했고, 끝내 모함에 속아 조강지처를 죽이고 제 핏줄을 멸하려 했다고 하옵니다. 만약 허씨가 낳은 적장자가 변방의 군권을 쥐고 제때 도성으로 진격하지 않았다면, 황후는 억울한 원혼이 되어 저승을 떠돌았겠지요.” 괴이할 정도로 평온하고 서늘한 어조였다. 유해원의 안색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고 백지장처럼 변해갔다. 서하연은 황후의 무너져 내리는 안색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감정이 거세된 어조로 칼을 꽂아 넣었다. “역사의 기록은 철과 같아 아주 무겁나이다. 제후와 황후가 갈라서고, 베개를 나란히 하던 부부가 등을 돌리는 것은 허황된 설화가 아닙니다. 바다와 같은 정염도 결국 세월의 풍파에 마모되기 마련이며, 새로운 가인의 미소 앞에 바래기 마련이고, 때로는 끈끈한 혈육의 무게보다 가벼워지는 법이지요.”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시선을 아주 슬쩍, 유해원의 얄팍하고 평평한 아랫배로 던졌다가 이내 내리깔았다. “하물며, 지금 궁의 황자와 공주는 오직 신첩의 몸에서만 태어났사옵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골육을 염려하시어 가끔 장신궁을 찾으시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지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마지막 조롱은 독을 바른 바늘이 되어 유해원이 품은 가장 추악하고 거대한 공포를 정확히 관통했다. '아이! 또 그놈의 아이!' 저 비천한 년이 감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황후를 비웃으며 제 배로 낳은 핏줄을 무기 삼아 황제의 시선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스치듯 지나간 역사 속 황후의 비참한 말로는 유해원의 온몸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한 공포가 이성을 집어삼켰고, 그 공포는 이내 광포한 살의로 치달았다. “천한 년이 감히 본궁을 저주하고 능멸해? 감히 황제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어!” 유해원의 거친 숨이 전각을 울렸다. 그녀는 서슬 퍼런 손가락으로 서하연을 가리키며 나인들과 상궁들을 향해 핏대를 세웠다. “당장 저 년을 뜰아래로 끌어내려라! 감히 궁을 어지럽히고 본궁을 모독한 죄를 물어 곤장 이십 대를... 아니, 삼십 대를 쳐라! 뼈가 부러질 때까지 사정없이 내리쳐서 육궁에게 이 요망한 년의 최후가 어찌 되는지 똑똑히 각인시켜 주거라!” 서하연은 봉의궁의 차가운 청석 마당으로 무자비하게 끌려 나갔다. 바닥에 사정없이 처박힌 그녀의 등 위로 묵직한 곤장이 가차 없이 내리꽂혔다. 둔탁하고 처참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하지만 서하연은 입술을 짓씹으며 단 한 마디의 신음도, 구걸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깊숙이 묻은 채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번지는 극심한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낼 뿐이었다.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바닥을 적셨고 겹겹이 껴입은 옷가지 위로 붉은 선혈이 빠르게 배어 나와 사방을 물들였다. 멀리서 이를 목격한 궁내 궁인들은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해 사라졌다. 삼십 대의 가혹한 형벌이 끝나고, 마당에 남은 것은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서하연의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뿐이었다. 유해원은 화려한 계단 위에서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굽어보았다. “장신궁의 음산한 구석방에 처박고 빗장을 걸어라. 본궁의 친필 수결이 담긴 수칙 없이는 물 한 모금도 들여보내선 안 된다! 폐하께서 환궁하시면 그때 정식으로 거열을 하든 사약을 내리든 할 것이다!” 태감 둘이 걸어 나와 늘어진 서하연의 양팔을 거칠게 붙들어 멨다. 회색빛 청석 길 위로, 그녀의 등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길고 잔인한 궤적을 그리며 번져갔다. 어둡고 스산한 장신궁의 편전 안. 청아는 자지러지게 울며 서하연의 해진 옷을 가위로 잘라내고 상처를 소독했다. “마마, 어찌하여... 어찌하여 황후마마를 도발하셨나이까...” 단단하고 차가운 목상에 엎드린 서하연은 호흡이 끊어질 듯 가쁘면서도, 기이할 정도로 냉소적인 목소리를 냈다. “자극하지 않았다면... 그 오만한 여인이 이토록 서둘러 나를 완전히 없애버릴 궁리를 하겠느냐?” 청아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넓은 바다로 나가 물고기처럼 뛰놀고,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가 되자고?” 서하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지독하게 참담하면서도 비통한 자조섞인 미소였다. “그것은 현실을 도피하려는 나약한 자들이 스스로를 위안하는 허상일 뿐이다. 가해진 훼손은 돌이킬 수 없고, 살점의 흉터는 영원히 남는 법이지. 새로 시작하겠다는 말 따위는 패배자의 변명에 불과해.” 서하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짙은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도, 온기도 없었다. 오직 심연보다 깊은 살의만이 고여있을 뿐이었다. “이 궁이 내게 가르쳐 준 진리는 오직 하나다.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면, 내게 베풀어진 은혜는 대체 무엇으로 갚겠느냐? 오직... 피는 피로, 이는 이로 돌려주는 것뿐이다.” 이윽고 찾아온 깊은 밤. 장신궁은 거대한 무덤처럼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그 야밤에, 장신궁 편전에서 의문의 불길이 치솟았다. 바람에 몸을 실은 불길은 순식간에 거대한 화마가 되어 주전까지 집어삼켰다.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비명과 급박한 타종 소리가 뒤섞여 궁내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밤, 화려한 궁의 전각 한 채를 재로 만든 불길이 그 안에서 불타 죽었어야 할 숙비의 존재마저 소리 소문 없이 지워버렸다는 것을. - 서쪽 산에 위치한 정예 주둔지. 소무경은 탁상 앞에 앉아 은은한 등불 아래서 백옥 팔찌 한 쌍을 소중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낮에 지방의 수령이 상공한 진상품으로, 질감이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고 조각 솜씨 또한 여간 섬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옥을 보자마자 서하연의 가냘픈 손목을 떠올렸다. 살결이 백설처럼 고운 아이니, 이것을 채워두면 필시 제 주인을 만난 듯 빛이 날 터였다. 그리 생각하고 보니 여태껏 서하연에게 제대로 된 정표나 장신구 하나 쥐여준 기억이 없는 듯했다.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아려왔다. 그때, 군막의 천이 거칠게 걷히고 부장군이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폐하! 궁에서 긴급한 파발이 당도하였사옵니다! 장신궁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여, 숙비마마께서... 화마를 피하지 못하시고 훙서하셨나이다!” 순간, 황제의 손가락이 굳어졌다. 그가 쥐고 있던 고결한 백옥 팔찌가 바닥으로 떨어져 수천 개의 파편으로 처참하게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