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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았지만, 내가 재벌이 된다
임신 25주 차, 연지아는 임신 정기검진을 받다가 남편의 외도를 목격했다. 그녀는 몸매가 뚱뚱하고 얼굴도 가꿔지지 않았다. 무거운 몸으로 배를 끌어...
Chương (1)
第1章
임신 25주 차, 연지아는 임신 정기검진을 받다가 남편의 외도를 목격했다.
그녀는 몸매가 뚱뚱하고 얼굴도 가꿔지지 않았다. 무거운 몸으로 배를 끌어안은 채 아름다운 내연녀에게 아주머니 소리나 들으며 남편의 무시를 받았다.
하지만 연지아와 성유원이 처음 만났을 때, 그녀 역시 만인의 여신이었다.
연지아가 몸을 이용해 결혼을 요구했다고 믿는 성유원은 먼저 이혼 얘기를 꺼냈다.
그 순간, 연지아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졌다. 학교에서 직장까지, 8년에 달한 짝사랑과 헌신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아이를 낳고 난 연지아는 단호하게 이혼협의서에 사인하고 떠났다.
...
5년 후.
연지아는 억대의 몸값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아름다운 데다가 능력까지 뛰어난 그녀는 많은 이의 호감을 샀다.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낸 남자는 끝까지 절차를 끝내지 않았다.
연지아는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과거 그녀를 그토록 혐오하던 남자가 이제 와서는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에게 일일히 복수했다.
결국 연지아는 다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우아하게 약혼 소식을 알렸다.
성유원은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이며 넋을 잃은 채 말했다.
“연지아, 다른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꿈도 꾸지 마.”
제1화
임신 25주 차, 연지아는 병원에서 남편의 외도를 목격했다.
검은 코트를 걸친 키 크고 준수한 남자는 품 안의 여리고 고운 소녀를 감싸안고 있었다. 소녀는 흰 코트를 입었고, 볼에는 분홍빛이 은은하게 돌았다. 작은 얼굴은 부드러운 울 머플러에 파묻혀 있었으며, 이목구비는 인형처럼 섬세했다.
연지아는 임신 정기검진 결과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만큼 세게 쥐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었지만, 몸보다 더 차가운 것은 심장을 쑤시는 듯한 통증이었다.
성유원은 멀리서 그녀를 봤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직접 소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주었고, 태도는 다정했다.
늘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정하던 권력자에게도 그렇게 보살피고 따뜻한 면이 있었다.
소녀가 연지아를 알아챈 듯 움직임이 멈췄다. 의아한 눈빛으로 연지아를 한 번 보더니 성유원을 향해 물었다.
“저 아줌마는 왜 계속 오빠를 보고 있어? 오빠, 저 사람 알아?”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연지아는 소녀가 성유원에게 뭐라고 더 말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소녀의 입 모양에서 ‘아줌마’라는 두 글자를 읽어냈을 뿐이었다.
‘아줌마?’
그건 분명 자신을 부르는 말이었다.
연지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올해 겨우 스물넷이었다.
하지만 원래도 약간 통통한 몸에 평범한 얼굴, 검은 패딩에 검은 니트 모자를 눌러쓴 차림이었다. 임신 말기 가까운 몸은 붓고 무거워졌고, 얼굴까지 초췌하니 정말 서너 살 더 많은 여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디에 젊고 반짝이는 소녀와 견주겠나.
성유원은 소녀를 감싸며 차에 태웠다.
연지아는 온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서서 차량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만 바라봤다.
연지아와 성유원은 아이 때문에 결혼했다. 강요된 이 결혼은 성유원 같은 천지의 총아에게 인생의 오점이었다. 그녀 뱃속의 아이는 그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자 도구였다.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반면 그녀는 8년 동안 그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연지아는 자신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며 그를 인생의 이상으로 삼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려 했다.
마침내 그녀는 소원대로 그의 비서가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곁에 설 수 있었다.
그날 밤 무너진 건 성유원만이 아니었다. 더 잔인하게 찢겨나간 건, 그 앞에서 지켜온 그녀의 자존심과 존엄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관계가 끝난 뒤, 그가 자신을 노려보던 혐오의 눈빛을. 마치 손끝에 역겨운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러니 그에게 어울리는 건, 저렇게 예쁘고 빛나는 소녀뿐이겠지.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이어서 아랫배가 한 번 쥐어짜듯 아팠다. 그녀는 급히 한 손으로 배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옆의 돌기둥을 짚었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그녀를 보더니 서둘러 다가와 부축했고, 그녀를 진료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감정이 크게 흔들려 태동이 불안해졌을 뿐이었다.
조금 진정되고 나서 연지아는 병원을 떠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채 혼자 운전해 오션 빌리지로 돌아왔다.
여기는 성유원의 별장이었다. 성유원의 할머니 김미현은 본가 쪽의 경험 많은 도우미를 붙여 그녀를 돌보게 했다.
그런데 그때, 그녀를 돌본다는 두 도우미는 마치 이 집 주인이라도 된 듯 난방이 잘 되는 거실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도우미가 소리를 듣고 문 쪽을 돌아봤다. 연지아가 돌아온 걸 보자 그중 한 명이 일어나 다가와 물었다.
“검사 결과는 어때요?”
오만한 태도에 깔보는 말투였다. 돌봐주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주인 행세를 하며 감시하러 온 사람처럼 굴었다.
연지아는 도우미를 한 번 차갑게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도우미는 불만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물었잖아요.”
연지아는 여전히 무시했다.
도우미는 연지아의 뒷모습을 보며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돼지 같은 게 성씨 집안 사모라고 잘난 척은.”
연지아는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앉았다. 마음은 텅 비었고, 머릿속은 막막했다.
성유원도 성씨 가문도 그녀 같은 며느리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김미현이 나서서 그녀와 성유원에게 혼인신고를 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성유원의 할아버지 성종현이 위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임신한 채 찾아왔고, 성종현에게 후대를 보여주려고 두 사람의 결혼을 밀어붙였다. 겹경사라며.
우연인지, 정말 효험이 있었던 건지, 성종현의 병세는 점차 호전됐다.
그러자 김미현의 태도도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성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업신여겼다.
오늘 그녀가 병원에 간 것도 뱃속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려고 해서였다. 딸이었다.
성유원이 어머니 이서연 쪽에는 이미 병원에서 연락이 갔을 것이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연지아는 생각을 거두고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의 발신자 표시를 보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지도교수 강현수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았다.
“교수님.”
“스탠더대학교에 가서 연수하면서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자리가 하나 있는데, 너 해볼래?”
강현수의 말을 듣고 연지아는 한동안 멍해졌다.
강현수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말을 이으려 했다.
“안 되면 굳이...”
“저 갈게요.”
연지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강현수가 잠시 침묵했다.
연지아가 성유원의 곁에 설 자격을 얻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제야 바란 것을 이룬 듯 결혼까지 하고 임신도 했는데, 그녀가 쉽게 떠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진 남은 이 자리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교수님.”
연지아가 다시 불렀다.
강현수가 말했다.
“그럼 내일 오전 열 시에 내 사무실로 와.”
“네.”
강현수는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연지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먹구름이 걷히고 달이 드러나는 듯한 묘한 허전함이 남았다.
그녀도 이제 깨어나야 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발목에 묶이지 않아. 그리고 돌아서서 너를 한 번 더 봐주지도 않아.’
그녀는 또 김미현의 전화를 받았다. 본가로 한 번 들어오라는 말이었다. 연지아는 알겠다고 했다. 아마도 뱃속 아이 일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기운이 조금 돌아왔다.
먼저 욕실로 가서 제대로 샤워했다.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붓고 둥근 얼굴, 짙은 다크서클, 처진 눈 밑, 깊게 패인 눈두덩, 양쪽 볼에 가득한 잡티.
이렇게 못난 모습 누가 봐도 싫어하겠지.
이런 그녀가 어떻게 성유원 같은 천지의 총아 곁에 설 자격이 있겠나.
그녀는 화장을 하고 분홍색 패딩을 걸쳤다. 흰 둥근 모자까지 쓰자 한결 말끔해 보였다.
원래는 혼자 운전해 본가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을 나서자마자 성유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연지아는 놀랐다.
아마 김미현이 그도 본가로 부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알겠다고 답했다.
별장에서 나오자 남자의 롤스로이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두 시간 전, 이 차는 다른 여자를 태우고 다녔다.
연지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가가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차에 타자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소녀 특유의 달콤하고 산뜻한 향이었다. 차 안에는 분홍색 곰 인형까지 놓여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어린 여자애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자 남자의 손목에 고무줄이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주인인 척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성유원은 그 소녀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연지아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시큰함을 눌러 삼키며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사가 차를 몰아 천천히 출발했다.
연지아는 창밖을 보며 말없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생기기만 해도 소중하게 여기며 거리를 좁히려 했을 것이다. 그가 싫어해도, 싫증 내도, 귀찮게 굴며 화제를 찾아 말을 걸었겠지.
그녀는 순진하게도 이미 부부가 됐고 아이도 생겼으니 앞으로 시간이 길다고 믿었다. 자신이 아내답게, 엄마답게만 하면 언젠가 성유원이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볼 거라고.
하지만 결국 그건 그녀 혼자 꾸는 착각일 뿐이었다.
남자는 그녀의 감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늘 그렇듯 차갑게 한 마디를 던졌다.
“아이 성별이 뭐야?”
“딸이야.
그 말을 들어도 성유원의 깊은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애 낳으면 우리 이혼하자.”
말이 떨어지자 연지아의 손가락이 꽉 조였다.
심장이 누군가에게 세게 움켜잡힌 것처럼 숨이 막혔다.
이 결혼이 오래갈 수 없다는 건 처음부터 알았다.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데도 그가 직접 입으로 꺼내는 순간, 가슴은 여전히 아팠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답했다.
“그래.”
성유원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봤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조금은 의외로 여기는 듯했다.
제2화
성유원은 더 깊이 따져 묻지 않았다.
연지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일 월요일이잖아. 오후에 시간 있어? 우리 가정 법원에 미리 가서 처리하자. 두 달 정도 앞당겨도 상관없지?”
서명해도 한 달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아이를 낳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성유원은 그녀를 바라봤다. 담담하고 차분한 얼굴, 그 눈빛에는 한 겹 더 살피는 기색이 얹혔다. 그는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내가 정한 시간에 가. 그게 언제든.”
연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차가 성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김미현이 그들을 부른 건 확실히 연지아 뱃속 아이 때문이었다.
성씨 가문은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었다.
김미현에게는 아들이 둘이었다. 장남 성정석, 차남 성한민.
성정석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 성주헌은 몇 년 전 결혼해 쌍둥이 아들을 낳았고, 올해 다섯 살이었다. 차남 성민우는 올해 스물넷으로, 아직 미혼이었다.
성한민에게는 성유원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연지아가 딸을 임신한 걸 두고 김미현도 성종현도 무척 기뻐했다.
“역시 경사야. 이 작은 꼬마가 들어오니까 저 사람 병도 좋아졌네.”
김미현이 아이 일에 이렇게 크게 생각하자, 이서연도 따라 맞장구를 치며 연지아에게도 몇 마디 좋게 말했다.
연지아는 옆에 앉아 얌전히 받아 대답했다.
통통한 몸에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이서연의 눈에는 어쩐지 거슬렸지만 김미현 앞이라 티를 내지 않았다.
김미현은 기분이 좋아 값비싼 옥팔찌 하나를 연지아에게 건넸다.
연지아는 놀라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으려 했다.
이서연이 말을 얹었다.
“할머니가 주는 거면 그냥 받으면 돼.”
일반 집안 특유의 소심함이란 역시 격이 안 맞았다.
연지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옥팔찌를 받아 들었다.
“감사해요, 할머니.”
“몸 잘 챙겨. 통통한 아기 낳아야지.”
연지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미현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본가에 남아 저녁까지 먹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유원이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눈가에 웃음이 맺혔고 목소리도 다정했다.
그들은 반려동물을 한 마리 키우는 모양이었다. 성유원은 그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 꼬맹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그는 좋은 아버지가 됐을지도 몰랐다.
“응, 나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성유원은 발코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거기 서 있던 연지아를 봤다. 연지아는 화들짝 놀랐다. 순간 반응이 늦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남자의 얼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슴이 턱 막혀 연지아가 급히 말했다.
“할머니가 너 서재로 오래.”
성유원은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연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슴 안쪽이 찌르듯 아픈 걸 억누르지 못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성유원이 서재에 들어섰다. 김미현과 성종현이 함께 있었다.
김미현이 말했다.
“유원아, 할머니도 네가 지아를 안 좋아하는 거 알아. 그래도 애는 곧 태어나잖니. 지아도 꽤 괜찮아. 좋은 학교 나온 데다가 성격도 순하고. 네 결혼은 안정이 중요해. 가정 챙기고 아이 키우는 데는 딱 맞는 사람이야.”
성유원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미간이 굳게 찌푸려진 걸 보면 기분이 어떤지 다 드러났다.
김미현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연지아의 외모가 확실히 평범한 건 맞았고, 손자 곁에 서면 어울리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성종현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네 혼사에 변수가 생기면 안 된다. 정말 마음이 없으면 네가 말했듯이... 그녀가 선을 넘는 일을 하지 않는 한, 일단 1에서 2년 정도는 두고 보자.”
김미현도 바로 받았다.
“그래. 지금 너를 노리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다들 네 약점 잡아서 기사 만들려고 기다려. 지아 몸조리까지 끝내게 하고 나서 갈라서도 늦지 않아.”
“...”
성유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깊은 눈빛 속에 무슨 생각이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네, 알겠어요.”
연지아가 다시 김미현을 만났을 때, 김미현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유원이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갔어. 조금 있다가 운전기사 보내서 너도 데려다줄게.”
연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니.”
그날, 떠나기 전.
김미현이 연지아에게 당부했다.
“임신했어도 몸은 좀 움직여야 해. 관리도 하고. 예전에 네 시어머니들 임신했을 때는 남편 따라 행사도 다니고, 집안일도 챙겼어. 쉽게 얻은 건, 계속 지키기가 더 어려운 법이야.”
연지아는 그 말속 뜻을 바로 알아챘다.
성씨 가문 며느리 자리는 만만하지 않았다. 자기 자리를 지키려면 지금의 자신부터 바꿔야 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은, 성유원의 체면만 망가뜨릴 뿐이었다.
운동도 하고 요가도 하며 살을 빼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기운이 달려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체중은 더 늘었다.
그래도 김미현 말이 틀리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가라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자리’ 때문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알겠어요.”
밤.
연지아는 뜻밖이었다. 아침에 이혼을 꺼냈던 남자가 집에 돌아왔다.
“너...”
“해장국 하나 만들어서 서재로 가져와.”
말을 끝낸 성유원은 바로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연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부엌으로 가서 국을 끓였다. 그릇에 담아 서재로 가져다줬다.
남자는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눈매는 날카롭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기운이 몸에 맴돌았다.
연지아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재를 나왔다.
그가 집에 와도 둘은 따로 잤다.
남자는 2층 안방에서 자고, 그녀는 1층 손님방에서 잤다.
다음 날.
성유원이 집에 있으니 도우미들이 아침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그는 상석에 앉았는데, 연지아가 보이지 않았다.
평소 그가 집에 있을 때면, 연지아는 다음 날 입을 옷까지 다려놓고 아침도 직접 준비했다. 그야말로 ‘얌전하고 성실한 아내’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다린 옷도 보이지 않았고, 밥도 도우미들이 차려놓은 것이었다.
“아주머니, 연지아는 어디 있어요?”
성유원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유미연이 곧바로 불평을 쏟아냈다.
“도련님, 아침부터 사람 보내서 깨웠는데요, 계속 안 일어나시더라고요. 맨날 밥도 방까지 갖다드려야 하고, 저희가 뭐 물어봐도 퉁명하시고요. 뭘 드실지 여쭤봐도 답이 없으시니 저희가 속을 어떻게 알아요. 임신했다고는 해도 그냥 임신이잖아요. 예전에 서연 사모님께서 도련님 임신하셨을 때는 성 회장님도 얼마나 정성껏 챙기셨는데요. 여기서는 오히려 진짜로 편하게 지내시려고 하시네요.”
성유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서 깨워요.”
“네, 도련님.”
연지아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다만 성유원이 먼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유미연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연지아를 보더니 역겨운 듯 말끝을 비틀었다.
“정말 대단하신 사모님이네요. 저희가 모셔 오길 기다리셨어요?”
연지아가 눈을 들어 차갑게 말했다.
“제가 사모가 아니면 당신이겠어요?”
몇 달 내내 고개 숙이고 말도 없던 연지아였다. 유미연은 연지아가 맞받아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연지아가 이어 말했다.
“앞으로 선을 넘으면, 그동안 뭐 하고 있었는지 할머니께 말씀드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이혼할 거였다. 남은 두 달, 굳이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유미연의 눈이 커졌다.
“당신...”
어제 이서연이 전화를 걸어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한 게 떠올랐다. 딸이라 해도, 이 아이는 성씨 가문 삼대에서 유일한 여자아이였다. 김미현이 이렇게 크게 챙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미연은 이를 악물고 말을 삼켰다.
“도련님께서 다이닝룸에서 기다리세요.”
연지아는 의외였다.
식당으로 내려갔다.
성유원은 식사 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연지아를 한 번 봤다. 흰 니트 롱셔츠는 그녀의 부은 몸에 당겨져 형태가 흐트러졌고, 걸음도 힘이 없어 비틀거렸다. 커다란 배는 마치 여러 번 임신한 것처럼 과장돼 보였다.
연지아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고, 스스로 그와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때 성유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주머니는 본가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야. 너 때문에 뭐든 맞추게 하지 마. 임신한 거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임신한 거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래. 그에게 이 아이는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몰랐다.
이 뜬금없는 핀잔은 분명 유미연이 옆에서 혀를 놀린 탓이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분들이 내가 불편하다고 하면 본가로 돌아가면 돼. 나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연지아는 그릇 속 죽을 천천히 저으며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밥도 자기가 차리고, 옷도 자기가 빨고, 방도 자기가 치웠다. 성유원이 있을 때만 그들은 돌보는 척했을 뿐이었다.
성유원이 미간을 더 깊게 접었다.
연지아는 그게 불쾌하다는 표시라는 걸 알았다.
일이든 생활이든, 성유원은 늘 강했고, 반박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난 알려준 거지, 의견 받자고 한 말 아니야.”
연지아는 고개를 숙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성유원은 그녀의 죽은 듯 가라앉은 얼굴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고는 도우미들에게 앞으로 연지아의 일은 연지아가 알아서 하게 하고 굳이 챙기지 말라고 했다.
연지아는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침 식사 끝나고, 성유원은 집을 나갔다.
연지아는 아현대학교로 향했다.
강현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책상 뒤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는 정장을 말끔히 갖춰 입고 있었다. 오똑한 콧대 위엔 무테안경이 걸려 있었고, 분위기는 성숙하고 안정적이었다.
강현수는 올해 겨우 스물아홉, 아현대학교 경제학과 최연소 정교수였다. 경제학계에서도 이름이 쩌렁쩌렁한 천재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연지아는 손을 들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제3화
강현수는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올려다보자 잠깐 멈칫했다.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다가, 연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강현수는 티 나지 않게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왔네.”
연지아는 마스크를 벗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오랜만이에요.”
강현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이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연지아가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제 모습이 이래서... 교수님 뵙기가 좀 민망했어요.”
강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돌아 나왔다.
“임신하면 몸이 달라지는 게 정상이야. 애 낳고 나면 괜찮아져. 앉아.”
연지아는 소파에 앉았다.
강현수는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 건넸다.
“몸 좀 녹여.”
연지아가 받았다.
“감사합니다.”
강현수는 그녀의 불룩한 배를 한 번 훑어보고 물었다.
“몇 개월이야?”
연지아가 답했다.
“25주예요.”
강현수가 말했다.
“그럼 내년 1월 말에 개강이면 딱 예정일쯤이네.”
연지아가 간절하게 말했다.
“교수님,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입학을 미뤄도 될까요?”
아이를 낳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현수가 표정을 바로 했다.
“왜 가고 싶어?”
연지아는 시선을 떨궜다.
“아이 낳고 나면 남편이 저랑 이혼하자고 했어요. 이 악연도 더 이어가고 싶지 않고요. 제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여섯 달이 길지 않은 시간이라 해도 그녀에게는 한평생처럼 느껴졌다.
강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때 햇살처럼 밝고 사랑스러웠던 애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전히 달라진 걸 보면 그동안 몸과 마음이 얼마나 닳아버렸는지 뻔했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일어서려는 거, 난 그게 기쁘다. 너랑 성유원은 원래 잘 맞는 사이가 아니었어. 앞으로는 너 진짜로 사랑해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될 거야.”
연지아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처음에 강현수는 그녀가 성유원 곁에 비서로 가는 걸 반대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피투성이가 되도록 부딪혀버렸다.
연지아가 문득 물었다.
“교수님 눈에는 성유원이 어떤 사람이에요?”
강현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천천히 말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익이 먼저인 사람. 아마 사랑 같은 건 없을 거야.”
“그렇군요.”
하지만 그가 그 소녀에게 보이던 다정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마도 너무 사랑해야 고개를 숙이는 법이겠지.
그에게 어울리는 건 결국 예쁘고 빛나는 여자뿐이었다.
연지아는 더 묻지 않았다.
강현수가 말했다.
“네가 이미 결정했으면, 그때 내가 입학 연기 신청은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강현수는 신청서 한 장을 꺼내 연지아에게 작성하라고 했다.
연지아는 신청서를 다 썼다.
강현수가 불쑥 물었다.
“아이 낳으면 애는 성씨 가문에 두고?”
연지아는 난감하게 웃었다. 그녀가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성씨 가문에서 잘 키우겠죠.”
강현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마침 내가 조교 한 명이 필요해. 한 달만 하면 돼. 해볼래?”
연지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임신한 뒤, 성유원 쪽에서 그녀를 비서실에서 있으나 마나 한 자리로 옮겨버렸다. 대표 비서 자리에서 한순간에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됐고, 그녀가 쌓아온 노력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지금 그녀에겐 새 일이 필요했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고, 삶을 다시 굴려야 했다.
게다가 이후 연수 준비에도 도움이 될 터였다.
어차피 오늘은 휴가를 내두었다.
연지아는 그대로 남아 조교 일을 시작했다. 원래 강현수의 학생이기도 했고, 성유원 곁에서 고강도로 일하던 시간도 있었으니, 몇 달 무너져 있었어도 손은 빠르게 돌아갔다. 업무를 잡는 것도 능숙했고, 처리도 막힘이 없었다.
그 순간, 연지아는 문득 예전의 자신을 되찾은 듯했다. ‘나’라는 사람이 제대로 존재하는 자리를 다시 만진 느낌이었다.
강현수 말처럼 그녀는 원래 일터에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성유원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는 그저 가끔만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연지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 날.
연지아는 미리 사직서를 준비해 두었다.
성유원은 해성 그룹 산하 금융 사업, 은행과 투자펀드 회사를 맡아 쥐고 있었다.
온통 이해관계가 얽혀 피 냄새가 배어 있는 명예와 돈의 판에서, 그는 오롯이 자기 힘으로 해성의 핵심 산업을 이어받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삼키고 넓혀갔다.
그게 가능하다는 건, 머리와 수완만이 아니라 차갑게 식은 심장까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연지아가 회사에 도착했을 때, 마침 차에서 내리는 성유원과 마주쳤다.
반듯한 체격, 말끔한 정장, 준수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 돈과 지위가 얹힌 남자는 그 자체로 성숙한 매력을 풍겼다.
“성 대표님.”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
연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급히 시선을 내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그녀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그대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연지아는 사직서를 주이빈에게 건넸다.
주이빈은 성유원의 비서였다.
예전에는 그녀의 부하였다.
돌고 돌아, 지금은 연지아가 주이빈 밑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연지아가 갑자기 강등됐을 때, 부서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 연지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표 비서가 됐다.
그 자리는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외형 조건도 중요했다. 그런데 연지아는 얼굴도, 체형도 평범했는데도 뽑혔다. 그만큼 능력 하나로 외적인 조건을 덮을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늘 엄격하던 대표도 한때는 그녀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이빈은 속을 알고 있었다.
연지아는 백조를 탐내는 두꺼비 같은 사람이었다. 침대로 기어올라 출세하려는 부류라고 생각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그래서였을까. 성유원은 그녀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주이빈은 사직서를 한 번 훑고, 그녀의 배로 시선을 옮겼다.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연지아 씨,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게 제일이에요. 거울이나 좀 더 보세요. 애가 생겼다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씨 가문이 어떤 데인지, 본인이 어떤 처지인지도 생각해 보셔야죠.”
연지아와 성유원이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다는 건, 회사 사람들 아무도 몰랐다.
제4화
“세형 재무제표 분석, 점심 퇴근 전까지 마무리해요.”
연지아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비서실에서 말단 직원 자리로 옮겨졌지만, 주이빈은 원래 연지아의 일이 아닌 업무까지 꽤 많이 떠넘겼다.
그런데도 연지아는 하나하나 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묵묵히 회사에 남아 버티는 것도, 결국은 자기 혼자 착각하며 버티는 일일 뿐이었다. 성유원은 그녀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을 테니까.
연지아는 재무제표 분석을 마친 뒤 전자 파일과 출력본을 함께 주이빈에게 제출하고, 배달 음식을 하나 시켰다.
회사에 구내식당이 있긴 했지만, 그녀는 늘 도시락을 챙겨 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았고, 시선이 자기 몸을 훑는 것도 싫었고,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도 피곤했다.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다.
오늘 아침엔 점심을 준비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배달로 때우기로 했다.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먹고 들어온 동료들이 복도로 들어서며 흥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성 대표님 여자친구 진짜 어리더라. 대학생 아니야?”
“그럴걸? 얼굴이 진짜 너무 예쁘던데. 인형 같았어.”
“대표님이 그 애 보는 눈빛이, 진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정하더라. 맨날 엄격하던 사람이 그렇게까지 달라질 줄은 몰랐어. 현실판 재벌 대표랑 귀여운 아내잖아.”
“...”
두 사람은 이야기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가 자리에 앉아 있는 연지아를 보고 잠깐 멈췄다.
연지아는 비서실로 발령 난 뒤, 업무 말고는 사람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더 틀어박혀 지냈고,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마치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는 사람 같았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대표 비서로 반짝이던 사람이었다는 게,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연지아는 배달 기사에게서 전화가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음식을 받으려던 순간, 호텔 직원 두 명이 고급 음식을 들고 프런트에 서서 확인하는 걸 마주쳤다. 프런트 직원은 그들에게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카드키를 찍어줬다.
연지아는 그중 한 직원 손에 들린 와인을 봤다. 한 병에 4억 원쯤 하는 것 같았다. 4억 원이라니, 성유원에게는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연지아는 자기 배달 음식, 족발을 들고 다시 올라갔다.
오후 두 시.
주이빈이 그녀를 찾아와 말했다.
“연지아 씨, 대표님이 찾으세요.”
연지아는 흠칫했다. 마음 한쪽이 이유도 없이 불길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연지아가 대표이사실에 들어서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책상 앞까지 가서 불렀다.
“성 대표님.”
성유원이 그녀를 올려다보는 순간 얼굴은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내던지듯 연지아 얼굴 쪽으로 던졌다.
“이게 네가 만든 분석 보고서야?”
날카로운 A4 종이가 연지아의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이 확 번졌고, 발치에는 서류가 흩어져 떨어졌다. 오늘 오전에 만든 보고서였다.
연지아는 한 손으로 배를 받치며 힘겹게 허리를 굽혀 바닥의 서류를 주웠다.
성유원은 그녀가 배를 붙잡고 천천히 웅크리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연지아는 손에 든 보고서를 살폈다. 몇 군데 숫자가 바로 눈에 띄게 어긋나 있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거 내가 만든 보고서 아니야.”
“그만해. 변명 듣기 싫어.”
연지아는 서류를 꽉 쥐었다.
성유원이 그녀의 능력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변명을 듣기 싫은 게 아니라, 그냥 그녀가 뒤집어쓴 걸로 넘어가려는 거였다.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혐오를 보인다는 게, 연지아는 너무 비참하고 우스웠다.
연지아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용기를 끌어 올려 말했다.
“나 백업해 둔 거 있어. 지금 바로 보내줄게. 그거 확인하고 나서 혼내도 늦지 않아.”
성유원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불쾌함이 검은 눈동자에 또렷했다.
연지아는 온몸이 팽팽해졌다. 뼛속에 박힌 두려움이 있었다. 권력에 대한 두려움, 특히 성유원이 냉정하게 굳은 얼굴을 할 때면, 그녀는 원래 한마디도 제대로 되받아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억지로라도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곧 이혼할 거였다. 그는 원하던 대로 될 테고, 그녀는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테고, 그에게 기대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뭐가 무서운가.
“억울해?”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 목소리는 얼음 조각처럼 차가웠다.
연지아는 그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손끝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유도 안 묻고 나를 몰아가는데, 내가 내 말로 증명하면 안 돼?”
성유원의 얼굴이 완전히 식었다.
“그것도 네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연지아는 심장이 크게 쑤시는 것 같았다. 얼굴빛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렸다.
분홍색 끈 민소매 실크 잠옷을 입은 소녀가 걸어 나왔다. 윤기 나는 검은 긴 머리, 빛이 날 만큼 하얀 피부, 시선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이목구비.
“오빠!”
봄비처럼 부드럽게 스미는 목소리였다.
연지아는 그제야 소녀의 얼굴을 제대로 봤다. 정말로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연지아가 그 얼굴을 잠깐 바라본 것만으로도 남자의 차가운 호통이 터졌다.
“꺼져!”
연지아는 시선을 거두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을 막 나서는 순간, 소녀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고, 성유원은 금세 진정하는 듯했다.
“...”
연지아는 고개를 들어 눈가에 고인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사람 없는 계단 구석으로 가서 한 손으로 난간을 짚었다. 그제야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심장이 조여 오르자 속까지 울렁거렸다.
8년을 사랑한 남자를 마음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일은 뼈를 깎고 살을 떼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다 좋아질 것이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잊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연지아는 겨우 숨을 고르고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계단을 올라가다 정면에서 그 소녀와 마주쳤다. 소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춤 명품으로 치장해 놓은 모습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났다.
주민우가 소녀를 곁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주민우는 성유원의 비서실장이었다.
소녀는 연지아를 보더니 미소를 띠고 다가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오빠가 더는 당신 탓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가방에서 진주 한 알을 꺼냈다. 소녀는 연지아 손을 잡아 그녀의 손바닥에 진주를 올려놓았다.
“이거 드릴게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얼굴에 난 상처도 꼭 손질해요. 여자 얼굴에 흉터 남으면 보기 안 좋잖아요.”
얼마나 예쁘고 착한 소녀인가.
햇살을 뿜는 이 소녀 앞에서, 연지아는 어둠 속에서 허둥대는 광대 같았다.
연지아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주민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차갑게 말했다.
“감사 인사도 안 하세요?”
이 사람은 안연청이었다.
안연청은 손을 거두며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 가요.”
두 사람은 그렇게 떠났다.
연지아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 위의 은빛에 푸른 기가 도는 진주를 바라봤다. 흠 하나 없이 매끈했고, 그 소녀처럼 깨끗해 보였다.
다만 안연청이 성유원이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연지아도 알 수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연지아는 자신이 만든 원본 파일을 다시 출력해 한 부 더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이빈의 앞으로 가져갔다.
주이빈은 종이를 받아 보며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은 만족스러웠다.
“똑똑히 봤죠? 대표 옆에 설 수 있는 여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연지아는 자료를 탁 소리 나게 주이빈 앞에 내려놓았다.
“그래요. 나는 자격 없고, 주이빈 씨도 자격 없어요. 이런 저급한 수법만 쓰는 사람은 앞으로도 뭐가 되기는 어려워요. 나이도 이미 서른이 훌쩍 넘었잖아요. 이제는 꿈 그만 꾸고 빨리 결혼할 사람이나 찾으세요.”
제5화
주이빈의 얼굴빛이 확 변하더니 책상을 세게 치고 벌떡 일어섰다.
“연지아 씨!”
연지아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자리로 돌아온 연지아는 작은 거울을 꺼냈다. 뺨 한쪽에 아주 가느다란 핏자국이 보였다. 자국은 깊지 않았다. 젖은 티슈로 한 번 슥 닦고 나니 더 손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런 얼굴에 흉터 하나 더 생긴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그러다 문득 그 소녀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어쩐지 낯익었다.
퇴근이 가까워질 즈음.
연지아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배우진이 돌아왔으니 집에 와서 같이 밥 먹으라는 말이었다.
연지아는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진 오빠가 돌아왔어요? 15일에 온다더니.”
아버지가 말했다.
“일 정리하고 일찍 들어왔어.”
“알겠어요. 퇴근하자마자 갈게요.”
연지아는 차를 몰아 연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연씨 가문은 서정구의 중간급 아파트 단지에 있었다. 올해 새로 산 넓은 평수의 주택이었다.
아버지는 중형 부동산 회사를 운영했다. 대단한 재벌은 아니어도 살림은 넉넉해서 연지아는 어릴 때부터 비교적 풍족하게 자랐다.
하지만 요즘 부동산 경기가 꺾이면서 반년쯤 전 회사가 투자에 실패해 재정 문제가 심각해졌다.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녀가 성유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고도 억지로 성씨 가문에 찾아가 따지고 요구하라고 몰아붙이지 않았다.
연지아는 하루가 다르게 늙고 초췌해지는 아버지 얼굴을 보며 결국 집안 재산까지 정리해 빚을 갚아야 할 지경이 된 걸 보고 결심했다. 그래서 성씨 가문으로 갔다. 그때 그녀는 사실 속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원하는 걸 얻었다. 성씨 가문이 건넨 큰 예물 덕에 연씨 가문의 빚은 정리됐다. 하지만 그만큼 값을 치렀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도 결국은 자업자득이었다. 남 탓할 일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서자 배난화가 부엌에서 나왔다.
“지아야, 왔네.”
연지아가 아홉 살이던 해,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고 오빠를 데리고 나갔다. 그녀만 남겼다.
그 뒤 배난화가 아버지와 인연이 닿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연인으로 지내며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연지아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히려 싫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지아는 그녀의 선의를 느꼈고, 배우진도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 오빠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새 오빠가 생긴 셈이었다.
연지아가 물었다.
“이모, 아빠랑 오빠... 다들 어디 있어요?”
배난화가 말했다.
“아마 오는 길일 거야. 곧 도착할 테니까 너는 먼저 좀 쉬어.”
“네, 이모.”
“...”
연지아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결혼을 했는데도 아버지는 늘 그녀 방 하나를 남겨두었다. 연지아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다시 손봐둔 방이었다.
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쌓였던 피로와 서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연지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인 앨범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앨범을 들어 펼쳤다. 첫 장에는 찢겨나간 가족사진이 있었다.
사진은 오래되어 빛이 바랬다.
그때 연지아는 여덟 살이었다.
젊고 잘생긴 아버지가 그녀를 안고 있었고, 아버지 옆에는 오빠가 서 있었다. 그해 오빠는 열넷이었다. 다른 쪽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사진은 연지아가 직접 찢어버린 것이었다.
어머니가 왜 오빠를 데리고 떠나 자신과 아버지를 버렸는지 너무 미웠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찢어지는 통증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연지아는 다음 장을 넘겼다.
사진 속 소녀는 십 대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고, 연한 갈색의 짜임 있는 작은 사각모자를 쓴 채, 금빛 은행나무 아래 서 있었다. 햇살이 소녀의 환한 웃음 위에 딱 내려앉아 있었다.
검고 긴 머리, 작은 달걀형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가 초승달처럼 맑고 눈부셨다. 특히 눈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이후 큰 병을 앓았고, 호르몬 약을 먹으며 몸이 점점 불었다. 아무리 살을 빼도 잘 빠지지 않아 굶고 운동하며 더 찌지 않게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연지아는 문득 오늘 그 소녀를 떠올렸다. 이목구비가 사진 속 예전 자신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특히 그 눈이.
제6화
똑똑똑.
“지아야, 다들 돌아왔어.”
배난화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연지아는 별생각 없이 앨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자, 그녀는 환하게 불렀다.
“아빠, 오빠.”
배우진과 연무현이 연지아를 바라봤다.
“지아야, 선물 가져왔어. 와서 보고 마음에 드는지 봐.”
배우진이 손짓했다.
연지아가 들뜬 얼굴로 다가갔다.
“무슨 선물이에요?”
배우진은 한가득 들고 온 봉투들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브랜드 로고가 찍힌 장신구 상자를 하나 꺼내 연지아에게 건넸다.
“열어봐.”
연지아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 열었다. 정교하게 만든 금팔찌였다.
“고마워요, 오빠. 진짜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면 됐어.”
배우진은 손을 뻗어 연지아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배우진은 배난화에게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금팔찌를 따로 사 왔고, 두 사람에게 각각 스킨케어 세트도 챙겨왔다. 연무현에게는 차와 술을 준비했고, 현지 특산품까지 잔뜩 들고 돌아왔다.
집안 분위기는 따뜻하고 편안했다. 연지아는 집에 돌아와서야 숨이 놓였다.
“지아야, 예정일이 언제야?”
배우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의 배는 누가 봐도 임신 말기처럼 커 보이긴 했다.
연지아가 답했다.
“예정일까지는 두 달 남았어요.”
배난화가 웃으며 말했다.
“지아 너, 이거 딸이다.”
연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딸이에요.”
“성별 확인했어?”
연무현이 물었다.
배난화도 뭔가 떠올랐는지 표정이 괜히 굳었다.
“응. 그런데 할머니가 이 아이를 많이 챙기세요.”
연무현은 그제야 한숨을 놓았다.
“그럼 됐다. 아이만 있으면 나중에 너랑 유원이는 천천히라도 좋아질 거야.”
연지아는 시선을 떨궜다. 마음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순간 망설였다. 성유원은 이미 이혼 얘기를 꺼냈는데.
그래도 이건 숨길 수 없는 일이고, 그녀는 오션 빌리지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와 살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저녁 먹고 나서 말하자.’
배난화는 저녁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배우진은 지금 친구와 함께 기술 회사를 공동 창업해 운영 중이었다. 2년 전 회사 준비 초기, 연무현은 망설임 없이 배우진에게 시작 자금을 보태줬다.
지금 회사는 성장세가 아주 좋았고, 주로 AI 기술 분야를 다뤘다. 이번 출장은 협업을 논의하러 간 것이었는데 결과도 매우 순조로웠다.
연무현은 회사 정리와 매각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성씨 가문이 준 예물 덕분에 회사가 숨을 돌렸지만, 지금은 시장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전환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더 버티기 어려웠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는 배우진 회사의 전망을 높게 봤고, 배우진 회사는 연말에 투자 유치 단계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팔고, 그 돈을 배우진 회사에 전부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쁜 소식도 있었다.
연무현은 배난화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배난화는 순간 눈가가 붉어졌다.
오랜 시간 함께 버틴 끝에 마침내 결실이 온 것이다. 연지아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지금껏 배난화와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던 건, 마음 한구석에 어머니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지아는 한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같은 좋은 사람이 있는데, 어머니는 왜 그때 이혼을 하고 떠나야 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이유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 연지아는 이 분위기를 깨기가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도 결국 입을 열었다.
“사실 성유원이 저랑 이혼하려고 해요.”
말이 떨어지자, 식탁 위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모두가 입을 닫았고 표정이 굳었다. 특히 연무현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 근육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이 결과는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뿐이다.
연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사돈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결혼식을 하지 않았고 혼인신고만 했다. 그 뒤로 반년 넘는 동안 두 집은 아무 연락도 없었다.
성유원은 연씨 가문 문턱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설날이나 추석 같은 때에도 성씨 가문은 선물 하나 보내지 않았다.
연지아가 혼자 집에 올 때마다 연무현과 배난화는 명절 선물을 준비해 연지아의 손에 쥐여 주며 성씨 가문에 전해 달라고 했다.
연지아가 성씨 가문에 갖다주면, 김미현은 겉으로는 예의 있게 받아주긴 했다. 하지만 연지아는 김미현이 그 선물을 본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넘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서연은 연지아 앞에서 도우미에게 그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시켰다. 그리고 연지아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자기 집에서 이런 격에 안 맞는 걸 더는 보내지 말라고.
성유원도 연지아에게 이런 의미 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이렇게 기울어진 결혼이 갈라서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연지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이 낳을 때까지는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저,,, 강현수 교수님께도 약속했어요. 내년 2월에 스탠더대학교로 연수 갈 거예요.”
배우진이 먼저 말문을 열어 무거운 공기를 끊었다.
“연수 가는 거 잘했어. 지아 너 정도면 결혼에 갇혀 있을 사람이 아니야.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오빠는 무조건 네 편이야.”
연지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빠.”
연무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끝없는 미안함과 무력함이 묻어 있었다.
“이혼, 하면 되지. 다 아빠가 부족해서 그래. 우리 같은 평범한 집이 성씨 가문 같은 큰 집안을 감히 바라본 게 무리였던 거야.”
연지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겪은 고통이 갑자기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고, 가족은 언제나 그녀 편이었다. 넘지 못할 고비는 없었다.
배난화는 휴지를 가져와 연지아의 붉어진 눈가를 닦아주며 서둘러 달랬다.
가족은 결국 웃으며 저녁을 마무리했다.
그와 동시에.
남교 별장, 이 별장 단지는 20년 넘게 이어져 온 오래된 부촌이라 시설도 많이 낡아 있었다.
벤틀리 한 대가 12동 별장 앞에 천천히 멈췄다. 그 별장은 연씨 가문이 팔아버린 그 집이었다.
차창이 서서히 내려가며 완벽하게 잘생긴 옆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별장 안쪽을 바라봤다. 집 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따뜻한 노란 가로등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내려앉았지만 가라앉은 복잡함과 쓸쓸함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는 전화를 받아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연청아.”
안연청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언제 와? 나 배고픈데, 유원 오빠가 나 먼저 먹으면 안 된대.”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낮고 다정한 남자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언제는 나한테 입조심하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나를 팔아?”
안연청이 콧방귀를 뀌듯 흥 하고 소리를 냈다.
그가 말했다.
“배고프면 먼저 먹어. 나 지금 갈게.”
전화를 끊고, 송나겸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창밖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본 뒤, 창을 올리고 차를 몰아 별장을 떠났다.
제7화
연지아는 그날 밤 연씨 가문에 머물렀다. 그날 밤은 오랜만에 깊고 편안하게 잠든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배난화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지아를 위해 닭곰탕도 따로 끓였고, 회사에 가져갈 영양 도시락도 담아두었다.
연지아는 어젯밤 사직서를 내고 강현수 곁에서 한 달 동안 교수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다들 반대했다. 몸부터 챙기며 태교에 집중하라고 했다.
하지만 연지아는 끝까지 고집했다. 몸이 좀 무거워진 것 말고는 크게 불편한 데가 없었고, 간단한 일 정도는 무리 없었다. 무엇보다 환경을 바꿔서 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오히려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날 것 같았다.
결국 연무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연지아는 부엌에 가서 돕고 싶었지만 배난화가 못 하게 했다.
연지아도 더 고집하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들고, 임산부에게 맞는 필라테스 수업을 검색했다.
마음에 드는 곳 하나를 골라두고 시간 잡아서 상담을 가볼 생각이었다.
계속 화면을 넘기다가 연지아의 얼굴빛이 순간 굳었다.
SNS에 올라온 글 하나가 보였다.
누군가가 9장짜리 모임 사진을 올렸는데, 배경은 어느 고급 프라이빗 클럽이었다.
글을 올린 사람은 서안성. 성유원 주변 사람 중 하나였다. 예전에 연지아가 성유원 비서로 있을 때 연락처를 추가했던 인물이었다.
사진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모임의 밤. 또 염장 구경한 하루, 대체 언제 결혼식 올리냐.]
사진 속에는 성유원과 안연청의 투 샷이 세 장이나 있었다.
가운데 사진에서는 안연청이 볼을 가리고 부끄러운 듯 성유원 품에 기대 있었고, 잘생긴 남자는 큰 손으로 그녀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숙여, 품 안의 여자를 다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콤한 기운이 화면 밖으로 넘칠 것만 같았다.
성유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 눈에는 연지아가 어울릴 자격이 없었을 뿐이다.
서안성이 이 글을 올린 건 어쩌면 일부러 연지아에게 보이게 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연지아는 가슴이 갑자기 조여 왔다. 숨이 막힐 만큼 아팠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가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다. 신경 쓰지 말자, 더는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무심코 배 위로 손이 올라갔다. 불룩하게 솟은 아랫배.
가슴이 천근만근 가라앉았다.
이혼하고 나면, 성유원은 분명 안연청을 바로 맞이할 것이다. 두 사람은 아이도 낳겠지. 성유원은 안연청을 그렇게 좋아하니까, 그 아이도 분명 사랑할 것이다.
‘그럼 내 아이는 어떻게 되지? 그때도 아빠라는 존재가 곁에 있기는 할까?’
“지아야, 밥 먹자.”
배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지아는 흐트러진 생각을 거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거실로 돌아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렀다.
나왔을 때는,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배우진이 연지아를 회사까지 태워다줬다.
차 안에서.
배우진은 연지아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
“지아야, 무슨 일 있어?”
연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배우진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아야, 임신했을 때는 더더욱 속에 쌓아두지 마. 너한테도 애한테도 안 좋아.”
연지아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성유원 밖에 사람이 있더라고요.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긴 한데, 괜찮아요. 제가 조절할게요. 오빠도 걱정하지 마요.”
말은 가볍게 했지만 속이 편할 리 없었다.
배우진은 그녀가 괴로운 걸 알면서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이렇게만 말했다.
“시간 지나면 다 옅어져. 천천히 괜찮아질 거야.”
연지아는 작게 답했다.
“네.”
회사에 도착하자, 연지아는 보온통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배우진에게 인사하고 회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또 성유원을 마주쳤다.
성유원이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던 탓에 연지아가 강등당하고도 계속 출근한 건 매일이라도 그를 보고 싶어서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회사에서 그를 보는 일은 드물었다. 마주쳐도 그는 유난히 차가웠다.
그런데 이틀 연속으로 마주치다니.
남자는 차에서 내려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어깨는 넓고 허리는 잘록했고, 길게 뻗은 다리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각이 선 얼굴과 깊은 이목구비는 언제 봐도 놀랄 만큼 눈부셨고, 분위기는 위압적이었다.
그런 무심한 남자에게도 다정하고 다감한 모습이 있다는 게 더 쓰라렸다.
연지아는 가슴 안쪽이 시큰해져서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켰다. 그리고 예의 있게 불렀다.
“성 대표님.”
성유원은 늘 그랬듯 연지아를 공기처럼 대했다. 오히려 그녀가 있는 걸 알아차린 뒤 표정이 더 차갑게 굳었다. 그는 큰 걸음으로 그녀 앞을 곧장 지나갔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야, 연지아는 숨을 다시 들이켰다. 그녀는 직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어제.
연지아와 주이빈이 그렇게까지 틀어진 뒤라, 오늘 주이빈의 얼굴도 좋을 리 없었다. 주이빈은 다른 사람을 붙여 업무 인수인계를 하게 했다.
연지아는 주이빈의 태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은 빨리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는 게 전부였다.
오전 업무가 끝났다.
날씨가 괜찮았다. 회사 건물 뒤쪽은 공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연지아는 보온통을 들고 내려가 밖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산책도 겸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를 지나가려는 순간, 들어오는 두 사람과 마주쳤다. 그중 하나는 서안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 선 남자는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했으며,분위기도 남달랐다. 성유원의 친구 같았지만 연지아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연지아는 인사할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두 사람을 피해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서안성이 들어오자마자 연지아를 봤다.
통통한 몸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연지아가 피하려 하자, 서안성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연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에는 노골적인 혐오가 떠 있었다.
“눈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안 보이는 건가요? 인사도 안 해요?”
예전, 연지아가 성유원의 비서로 있을 때만 해도 서안성이 겉으로는 꽤 예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 눈에는 못생기고 뚱뚱하고 분수도 모르는 여자였다.
연지아는 시선을 내리며 담담하게 불렀다.
“안녕하세요, 서안성 씨.”
서안성이 비웃었다.
“태도 참. 본인이 진짜 오리에서 백조라도 된 줄 아시나 봐요.”
연지아는 도시락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모멸감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몸을 틀어 서안성을 비켜 가려 했다.
그런데 서안성은 갑자기 길게 뻗은 다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연지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단단한 바닥에 그대로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다.
연지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통증에 이가 덜덜 떨렸다. 손에서 도시락이 튀어 나가 바닥으로 날아갔고, 안에 든 닭곰탕과 도시락이 그대로 쏟아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송나겸도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