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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경성 사람들 모두가 조원철을 올곧고 정직하며 금욕적인 사람이라, 바라만 보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말했다. 오직 강유영만이 알고 있었다. 오...
Chương (1)
第1章
경성 사람들 모두가 조원철을 올곧고 정직하며 금욕적인 사람이라, 바라만 보고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말했다.
오직 강유영만이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한 덩이 불과 같다는 것을. 그녀에게 닿는 순간, 거침없이 타올라 뜨겁고도 격렬해진다는 사실을.
은밀한 사정을 주고받던 나날에, 그는 '사랑하는 이'라고 다정하게 그녀를 불러주었지만, 그의 그런 비뚤어진 애정은 점점 그녀를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끌어내렸다.
금욕적이고 정직한 사람?
그건 모두 거짓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날, 조원철의 혼사가 정해졌다.
강유영은 그동안 모든 은자를 들고 도주를 준비하는데, 결국 폭설이 내리던 야밤에 그에게 잡히고 만다.
“어딜 도망치려고?”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
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
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
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있는 별당으로 들어갔다.
강유영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더니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익숙한 감송향이 코끝에 닿자, 강유영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순식간에 번쩍 뜨이더니 당황한 듯, 두 손을 뻗어 사내의 가슴을 밀쳤다. 분홍빛 도톰한 입술이 급하게 움찔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높게 솟은 날카로운 콧날과, 윤기가 도는 얇은 입술, 요염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이목구비와 가지런하게 틀어 올린 머리, 분명히 얼굴은 귀하게 자란 귀공자인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위압감이 풍겼다.
사내의 이름은 조원철.
강유영의 큰 오라버니이자, 변방에서 5년간 나라를 지키다가 반달 전에야 개선가를 울리며 귀경한 대장군이었다.
오늘 집안에서 덕망 높은 스님까지 불러 제를 지내는 이유 역시 그의 공적을 조상님들에게 알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조원철은 그녀를 놓아주고도 바로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내려 지그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전장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라, 풍기는 위압감이 숨이 막혔다.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고 있는데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게 만드는 위엄이 느껴졌다.
반면 강유영의 차림새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까만 머리에는 은비녀 하나만 꽂아 틀어올리고 귀에는 작은 은 귀걸이 한 쌍이 전부였다. 산차화 모양 비녀는 오랜 세월의 흔적 때문에 더욱 초라해 보였다.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하얗고 고운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물기를 머금은 두 눈은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놀란 토끼마냥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강유영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등 뒤에는 차가운 담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소녀는 두 손으로 담벽을 짚고서 그의 품에 반쯤 안긴 상태로 있었다. 마치, 독수리에게 잡힌 토끼처럼 도망칠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조원철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체취가 압도하듯 그녀를 감쌌다. 준수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길고 풍성한 속눈썹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강유영의 마음은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벽에 바짝 붙였다.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났고, 가슴에서 전해지는 떨림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하얘지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조여들었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자꾸만 어젯밤을 떠올리게 했다.
조원철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강유영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바짝 긴장한 그녀와는 대조되게, 그는 느긋하게 품에서 백옥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달콤한 연고의 향기가 퍼지며 두 사람의 체향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오라버니, 뭘 하시려는 건가요?”
강유영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약 발라야지.”
조원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 그럴 필요까지는….”
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 어디라도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그녀는 당황한 듯, 두 손을 저으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얇은 천 사이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뜨거워,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와 조원철은 피가 섞인 남매가 아니었다.
강유영이 여덟 살 나던 해, 국공부는 친딸을 찾았다며 조연화를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강유영이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고 단지 그녀가 강씨라는 것만 전해주었다.
그날 이후로 강유영은 조유영에서 스스로 강유영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자한 국공부에서 친딸을 데려온 이후에도 그녀를 내쫓지 않고 집안에 두고 키워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정체도 불분명한 고아인 그녀가 이 저택에서 어떤 처지일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래도 장남인 조원철이 강직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강유영은 그 덕분에 많은 고초를 면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남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감히 뭔가를 바라지는 못하고 그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조원철은 그녀에게 있어 신과도 같은 존재라 감히 바라보기도 죄송스러운 존재였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조원철이 걱정되어 직접 끓인 숙취 해소탕을 들고 그를 찾아갔었다.
그런데 술에 취할 대로 취한 조원철이 그녀를 누구로 착각한 것인지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사랑’이라 부르며 몸을 밀착해오기 시작했다.
마치 고독한 배가 파도에 휩쓸리듯, 고요했던 그녀의 마음에 거센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가 이 정도로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고, 자신이 하룻밤 내내 그를 돌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도 잠 못드는 밤이 이어졌다.
그는 마치 뜨거운 불길처럼 온몸으로 그녀를 감쌌다. 평소의 냉담하고 금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술에 취한 사람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동이 틀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며 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강유영은 날이 밝기 전에 쑤시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처소로 돌아와 겨우 치마만 갈아입고 사당으로 향해야 했다.
‘오라버니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녀가 잠깐 넋을 놓은 사이, 허리는 이미 큰 손에 잡혀 있었다.
조원철은 능숙하게 허리띠를 잡아당겨 풀었다.
그녀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허리춤이 갑자기 헐렁해지더니 치마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이 드러나고, 곳곳에 남은 붉은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원철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청명하던 눈빛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오라버니….”
강유영은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 수치심이 밀물처럼 그녀를 순식간에 집어삼키고, 홍조는 빠르게 온몸으로 번져갔다.
밤새 취한 그를 받아주느라 그녀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수치심에 발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고 힘껏 깨문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차마 볼 수 없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오랜 시간 칼을 잡아 굳은살이 배긴 그의 손길이 조금 거칠었다.
달콤한 연고의 향기가 점점 짙어지며 강유영의 이성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는 간신히 벽에 기대어 중심을 잡고 주저앉지 않도록,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머릿속은 자꾸만 지난밤의 광경이 떠올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세자는 아직인 것이냐?”
갑자기 문밖에서 진국공 부인 한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는 조원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강유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손발이 차갑게 떨리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와 조원철은 여전히 가문의 족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남매였다.
한씨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이 광경을 목격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상하군요. 소인이 분명 세자께서 이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았는데… 혹, 별당에 들어가 계신 게 아닐까요?”
한 하인의 목소리도 이어서 들려왔다.
곧이어, 그 하인이 쪽문을 두드렸다.
“세자, 안에 계시옵니까?”
어린 하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송곳처럼 강유영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는 마치 불가마에 올려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조급해진 그녀는 애원에 찬 눈으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바깥의 소란은 전혀 듣지 못한 듯,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태연히 손에 연고를 다시 묻히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마치 밖에 있는 한씨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고 세상에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듯했다.
제2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
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투만 들어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다. 어서 정돈하고 나오거라.”
한씨의 말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강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위기가 사라진 것을 직감한 후에야 허벅지에서 청량한 느낌이 퍼지며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조원철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허둥지둥 치마를 여몄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륵 아래로 주저앉았다.
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녀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자, 청량한 감송향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조원철은 몸을 굽혀 느릿느릿 그녀의 허리띠를 다시 매주고 꼼꼼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강유영은 그제야 힘껏 그를 밀쳐내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조원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백옥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담담히 말했다.
“나중에 시녀를 시켜 따뜻한 물수건으로 아랫배를 찜질하거라.”
강유영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젯밤 투정 부리듯 배가 아프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까지 기억할 줄이야.
그녀는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오라버니.”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일은…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강유영은 재빨리 백옥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원철처럼 좋은 집안에 뛰어난 재능, 공적까지 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귀한 집 처자와 혼인할 것이다.
‘나 같은 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이지.’
어젯밤은 그저 사고였던 것이다. 비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지만, 강유영은 제 주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걸 탐내서는 안 돼.’
“그래, 알겠다.”
조원철은 백옥병을 꽉 잡더니 감정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강유영은 담벽에 기댄 채로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별당을 나왔다.
사당 안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이미 미리 와서 모여 있었다.
강유영은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맨 마지막 끝자락으로 가서 섰다.
조원철은 늠름한 자태로 상석에 자리했다. 여의옥 허리띠가 건장하면서 군살 없는 그의 탄탄한 허리선을 강조하고 청남색 두루마기 자락은 무심하게 흘러내려 그 안의 정교한 비단 바지가 살짝 보였다. 옥패와 향낭이 허리춤에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귀하고 금욕적인 기품이 흐르는 가운데, 혈기왕성한 소년의 당당함이 물씬 풍겼다.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그 모습은 지난밤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던 음란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강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사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강유영도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자리를 뜰 참이었다.
“유영아, 이쪽으로 와보거라.”
조원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유영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몰라 몸을 흠칫 떨다가 인파를 거슬러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사당 안에는 조원철과 진국공 부인 한씨만 남았다.
귀부인 한씨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탓에 우아하고 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유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원철아, 목에 상처는 어떻게 된 것이니?”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기다란 목선 위에는 선명한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어젯밤에 깨문 자국이었다.
살짝 풀어진 옷깃 사이로 검붉은 흔적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피부가 하얀 탓에 더욱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모기에 물렸나 봅니다.”
조원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한씨는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네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니 신변에 여자를 두는 것쯤이야 이상할 게 없지. 전장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장가들어 아이까지 봤을 터이니. 동생들 혼사도 너 때문에 미뤄지지 않았느냐. 요즘 내가 괜찮은 혼처를 알아보고 있으니 좀 자중하거라. 바깥에 둔 여인은 잠시 곁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
강유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한 감정이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혔다.
한씨의 말이 맞았다. 경성의 귀족 자제들은 빠르면 열여섯, 늦어도 스무 살 전에는 장가를 간다. 조원철 또래라면 벌써 아이를 여럿 보았을 나이였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 유영이의 차림새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강유영은 연청색의 저고리에 은은한 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재질이지만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행도 이미 지나서 삼 년 전에나 자주 입던 양식이었다. 머리에는 수수한 은비녀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가녀린 몸매를 지닌 탓에 더욱 앳되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씨는 그제야 강유영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조원철을 향해 웃어 보였다.
“녀석, 설마 내가 유영이를 박대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비록 친딸은 아니더라도 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아이인데, 내가 뭐 하러 푸대접을 하겠느냐? 실은 유영이 이 아이가 꾸미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단다. 유영아, 네 오라비한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야지?”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유영을 쥐락펴락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강유영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강유영은 타인의 손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손을 빼내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입기를 좋아해서요.”
한씨는 귀족가 안주인으로서 대놓고 그녀를 박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수수하게 입고 나오면 꾸밈없이 소박한 게 보기 좋다며 역시나 온 집안의 모범이라고 치하했을 뿐이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 말에 담긴 한씨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집에 신세 지는 몸으로, 어찌 안주인의 뜻을 거역하겠는가? 애초에 그녀 역시 비녀며 고운 치마 따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매일 몸을 단장하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여덟 살이 되어서야 신분이 밝혀졌음에도, 한씨는 어릴 적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만 인자한 미소를 지어줬을 뿐, 사람들 없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준 사람은 유모 오씨뿐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머니. 집안 살림은 어머니께서 맡고 계시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는 굳이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한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강유영도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어쨌거나 진국공부의 양녀인 신분이다. 차림새가 추레하면 사람들은 진국공부가 그녀를 박대했을 거라 오해하기 십상이고 이는 집안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네 말이 맞다.”
한씨의 얼굴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유영아, 나중에 내 사람을 시켜 패물들을 처소로 보낼 테니, 복장점 사람도 불러서 옷도 몇 벌 새로 마련하거라.”
한씨는 아들의 성격을 잘 알았다. 강직하고 올곧으며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다. 굳이 이 시점에 아들의 뜻을 거슬러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조원철은 강유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처는 부용원으로 옮기거라.”
강유영은 놀란듯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담담하고 서늘하기까지 한 그 시선은, 마치 어젯밤에 나눴던 다정한 행위는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져, 재빨리 시선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뜻은 감사하지만, 저는 소은원이 편합니다. 번거롭게 옮길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거처인 소은원은 진국공부의 가장 소북쪽 모퉁이에 있는 외딴곳이었다.
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리라고는 바라지 않았다. 단지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부용원은 연화의 처소와 가까운 곳이라, 아마 그 애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
한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딸 조연화는 강유영 때문에 어린 시절 밖에서 고생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줄곧 강유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개 양녀일 뿐이다. 진국공부가 그녀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 이미 인의를 다한 셈인데 여기서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물론 이런 말들을 아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의가 있으면 날 찾아오라 하십시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 서서 단호하게 말하더니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따라오거라.”
강유영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러나 지금 거절한다면 한씨가 뭔가 눈치챌까 두려워, 하는 수없이 그를 따라갔다.
제3화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
“세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
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
“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
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
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저는 소은원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부용원으로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강유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녀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보다는 한참 큰 키에 입은 늘 꾹 다물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사람이었다.
“부용원도 살다 보면 자연히 적응될 것이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서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강유영은 더 이상 무슨 핑계로 거절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부용원은 안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 약국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었다.
소은원은 서북쪽 모퉁이 문으로 바로 나갈 수 있고 문을 지키는 어멈을 잘 구워삶아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부용원으로 옮긴다면 거리가 너무 멀고 보는 눈도 많아 비밀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녀의 유모 오씨 어멈은 삼 년 전 갑자기 큰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이 돌아가 지금은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유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길러준 오씨 어멈을 모른 척할 수 없고 당연히 노후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어멈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그녀는 몰래 약국에 나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약국의 서 의원을 따라 일 년 넘게 배운 덕에 지금은 혼자서 오씨 어멈에게 침을 놓을 수 있는 경지까지 되었다.
오씨 어멈도 처음 병들었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에 어느새 처소 앞에 당도했다.
조원철은 소은원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영은 살며시 옆으로 물러선 후, 그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행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오라버니. 앞으로는 저를 위해 더 마음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더 이상 좋은 핑곗거리도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조원철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자신에게서 선을 긋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유영이 그 시선이 불편해 이대로 돌아설까 망설이고 있을 즈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내 방에 손수건을 두고 갔더구나. 언제 찾으러 올 생각이냐?”
강유영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예의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침에 너무 급하게 그의 방을 빠져나오다가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이 실수였다.
그냥 버리면 될 것을,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일까?
좁은 뜰 안으로 들어섰더니 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녀 서유가 부채를 들고 처마 밑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유영을 본 서유가 다급히 일어서며 예를 행했다.
“아씨, 돌아오셨어요?”
강유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네가 일을 다 하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강유영의 신변에는 시녀가 둘 있었다.
오씨 어멈이 입양한 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 오직 그녀에게만 충성하고 평소에는 자매처럼 정이 깊었다.
반면 서유는 한씨가 보내준 시녀였다.
친딸 조연화가 집으로 돌아온 후, 진국공부에서 강유영의 입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눈치 빠른 하인들은 모조리 그녀의 처소를 떠나버리고, 남게 된 사람이 서유와 단비였다.
그러나 서유는 허드렛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강유영이 몰래 관찰한 결과, 서유는 한씨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태생이 게으를 뿐이었다. 그랬기에 강유영도 굳이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어차피 서유를 내보내면 한씨가 이때다 싶어 첩자를 보내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지런을 떠는 서유가 어딘가 이상했다.
“오셨어요, 아씨?”
이때 서유가 안방에서 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강유영은 서유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니 게으름병이 나았나 보네요.”
서유가 다급히 싹싹 빌었다.
“아씨, 소인이 잘못했어요. 세자께 알리지 말아주세요.”
강유영은 안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으며 대꾸했다.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단비가 다가와 겉옷을 건네받았다.
“어멈은 오늘 좀 어떠셨어요?”
강유영은 다가가서 어멈의 등 뒤에 부드러운 베개를 받쳐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드셨어요. 쌀죽 한 그릇을 다 드셨는걸요.”
단비가 웃으며 어멈의 다리를 주물렀다.
“제가 말도 걸어봤는데 눈을 깜빡이며 응답도 해주셨어요.”
“그래? 어멈, 저 알아보시겠어요?”
강유영은 웃으며 오씨 어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멈이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강유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나아지고 있네요. 어멈, 급할 것 없어요. 지금처럼만 간다면 천천히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씨, 어디 다치셨어요? 몸에서 약냄새가 나네요?”
단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발을 좀 삐끗해서 약 좀 바른 것뿐이야.”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원철이 발라준 약은 향이 좀 강했다.
“어딜 다치셨는데요? 제가 한번 볼게요.”
얘기를 들은 단비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다그쳤다.
강유영은 당황한 어투로 거절했다.
“별것 아니야. 며칠 지나면 낫겠지.”
“그럼 제가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씻고 일찍 쉬셔요. 어멈은 제가 돌볼게요.”
단비는 주인이 안쓰러워 어서 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밤새 시달린 강유영이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풍 뒤로 온 그녀는 옷섶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았다. 끈적하고 뻐근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지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쇄골 아래쪽부터 발목까지 몸 곳곳에 그가 남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살살 좀 하시지.’
그러나 쇄골 위쪽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그녀가 다급해서 한번 깨문 것이 눈에 띄는 곳에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녀는 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목욕을 마치니 피로가 더욱 몰려왔다.
침상에 누웠지만 머리가 혼란스럽고 자꾸만 어젯밤 광경이 떠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아씨, 풍씨 어멈이 오셨어요. 부인께서 아침을 함께 드시자고 하셨답니다.”
단비의 목소리가 잠든 그녀를 깨웠다.
강유영은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후쯤에 잠들었는데 벌써 아침이 되었을 줄이야.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씨, 다친 발이 아직도 아프신 건가요?”
단비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제가 나가서 풍씨 어멈께 오늘은 못 가신다고 말씀드릴까요?”
강유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 간만에 부르셨는데 안 가면 기분 상해 하실 거야.”
그녀는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풍씨 어멈을 따라 한씨의 거처로 갔다.
어멈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아뢰었다.
“부인, 유영 아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훤칠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조회에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주홍색의 관복을 입고서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른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하얗고 준수한 얼굴이 받쳐주니 주홍색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늠름한 풍채가 돋보였다.
방 안에 꺼지지 않은 촛불마저 그를 편애하는 듯,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광테를 두르고 있었다.
강유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라버니도 여기 계실 줄은….’
그의 표정은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눈빛은 담담했다. 수없이 많았던 지난날처럼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뜨거웠던 그날 밤은 혼란스러운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강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예를 행했다.
“어머니, 오라버니를 뵈옵니다.”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그와 그녀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의 덕을 많이 본 것은 사실이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집안의 체면을 위한 당연한 처사였을 뿐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조원철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씨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영아,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강유영은 자리로 가서 앉아 수저를 들고 앞에 놓인 떡을 먹으며, 더 이상 조원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씨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원철에게 양녀라고 박대한 적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한씨는 아들의 목에 남은 이빨자국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만두 하나를 집어 그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밖에 두었다는 그 여자 말이다. 점잖은 가문의 처자는 아니지?”
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 집었던 떡을 접시에 떨구고 말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막혀왔다.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
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
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
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
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곱게 자란 처자라면 사내의 몸에 이런 망측한 자국을 남기지 않았을 테지.”
비록 얼굴 한번 본 적은 없지만, 한씨 입장에서는 예뻐해 줄 수 없는 여자였다. 귀족가에서는 첩실을 들이더라도 출신을 따지는 법이다.
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푹 숙이고 무슨 맛인지 모를 떡만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는 그저 너무 아픈데 소리는 낼 수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을 뿐인데, 그게 그리도 점잖지 못한 행동이었던 걸까?
조원철은 말없이 한씨의 손길을 피하고는 잔에 우유차를 따르고 강유영과 한씨의 앞에 놓아주었다.
강유영은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차를 바라보았다. 평소 단것을 좋아하는 그녀이지만, 지금 상황에 저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저 빨리 먹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한씨는 아들이 말이 없자, 재차 물었다.
“그 아이는 어느 집안 딸이니?”
“유영이와 처지가 같습니다.”
조원철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강유영은 심장이 쪼그라들어 하마터면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조원철은 한마디 덧붙이고는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강유영은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거지?
어머니가 뭔가를 알아챌까 걱정도 안 되시는 걸까?
“유영이가 왜 의지할 곳이 없어? 유영이에겐 우리가 있잖니.”
한씨가 다급히 말했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 아이를 언제까지 밖에 둘 생각이니?”
한씨는 오히려 아들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고아라면 오히려 다루기 쉬웠다.
“어머니께서 돌봐주실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조원철이 물었다.
“내가 보기엔 일단 그 처자를 나한테 맡기고 밖에 있을 곳을 마련해 주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그리고 너희는 잠시 안 만나는 게 좋겠어. 네가 혼인을 하면 그 후에 가마에 실어 조용히 첩으로 들이면 되지 않겠니? 지금은 혼처를 알아볼 중요한 때인데 외실(外室:양반댁 사내가 밖에 두고 만나는 여인)을 두고 있다는 게 밝혀져서 좋을 게 없어.”
한씨는 며느리를 못 들일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귀경한지 고작 반달밖에 안 됐는데도 벌써 혼처를 알아보는 중매자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었다.
단지 아들의 명성이 더럽혀질까 걱정할 뿐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조원철은 무덤덤한 얼굴로 강유영에게 물었다.
강유영은 가슴이 조여들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지?’
당연히 한씨에게 그 처자가 사실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첩실이 되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외실도 아니었다.
그날의 일은 그저 사고였고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이다.
충분한 은자만 모으면 오씨 어멈을 모시고 진국공부를 떠나 이 집안사람들과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갈 것이다.
“너는, 어린애가 뭘 안다고 그런 걸 물어보니?”
한씨는 그저 아들이 처자를 자신에게 맡기는 게 싫어 말을 돌린다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지만 네가 규수들과 맞선을 볼 때 유영이가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겠구나.”
강유영은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조원철의 혼처에 감히 조언을 해준단 말인가?
“어머니께서 봐두신 처자가 있으신 겁니까?”
조원철이 느긋한 어투로 물었다.
“그럼.”
한씨가 답했다.
“왕 태사네 셋째 따님이 그렇게 참하다던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떡을 물고 있던 강유영의 손이 흠칫 떨리더니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왕 태사의 셋째 따님이라면 그녀도 들은 바가 있었다. 태사 부인은 젊었을 적에 경성에 소문난 미인이었으니 그분의 따님이라면 용모도 뛰어날 것이다.
명문 세가의 귀공자와 대갓집 규수. 집안도 어울리고 신분도 걸맞으니,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될 것이다.
‘괜찮겠네.’
조원철은 말없이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았다.
한씨가 들뜬 어투로 계속해서 말했다.
“네가 만나볼 의향이 있다면야 당장 내일이라도 만남을 주선할 수 있겠다.”
한씨는 이 혼사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왕 태사는 현임 황제의 스승으로 지금은 추밀원(樞密院: 고대 중요 국정을 총괄하는 기관) 원사직을 맡고 있고 조정에서는 승상과 맞먹는 위치에 있었다.
조원철은 개선하고 돌아온 후, 황제의 치하를 받고 종이품 어전 지휘사직에 봉해졌다. 어린 나이에 무장 중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으니,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셈이다.
그럼에도 한씨는 아들이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랐다. 왕 태사의 딸과 혼인한다면 자연스럽게 추밀원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이고 더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다.
강유영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젓가락을 쥔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손바닥에 진한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그녀는 묵묵히 손에 힘을 풀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조원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강유영은 가슴이 갑갑해 더 이상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고 말했다.
“배가 불러서 더는 못 먹겠네요. 어머니, 오라버니, 천천히 드세요.”
그녀는 살며시 손바닥에 난 자국을 쓰다듬었다.
‘내일이라니. 참 빠르기도 하네.’
예법상 자리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처소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는 것 같았다.
“부인, 나으리께서 서재에서 급히 찾으십니다. 중요한 서신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해서 부르시는 것 같습니다.”
풍씨 어멈이 들어와서 고했다.
“내 다녀와야겠구나.”
한씨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강유영과 조원철에게 당부했다.
“일단 둘이 먹고 있거라.”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말수가 적은 조원철은 맞은편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유영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 자신을 덮친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천천히 드세요.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압박감을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조원철의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직도 많이 아프냐?”
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온몸이 굳었다.
저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등 뒤에서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이걸 가져가거라.”
조원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리자, 어제 받았던 백옥병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어제 약을 발라서 많이 나아졌어요.”
그녀는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로 작게 답했다.
그저 그에게 뭔가를 더 받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차피 안 될 사람이라면 엮이고 싶지 않았다.
“어디 보자.”
조원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유영은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재빨리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두 발이 허공에 뜨더니 그대로 조원철의 품에 안겨 버렸다.
강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그의 가슴을 밀치며 애원했다.
“오라버니, 이건… 예법에 어긋납니다.”
하물며 이곳은 진국공 부인의 처소인 본채였다.
잠깐 서재로 간 한씨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만약 이러고 있는 모습이 들키기라도 한다면 강유영 입장에서는 모든 게 끝장인 셈이었다.
조원철은 바둥거리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병풍 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손을 쭉 뻗었다.
아까 그가 건넸던 약병이 들려 있었다.
강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거절할 마음으로 받지 않았다.
“내가 도와줄까?”
조원철은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강유영은 그의 손에서 약병을 낚아채고는 뒤돌아서 허리띠를 풀었다. 하얗고 긴 목덜미마저 수치심에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조원철은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강유영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대충 연고를 아무렇게나 바르고는 뒤돌아서 약병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왜 아직도 피가 흐르는 거지?”
조원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강유영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은은한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도 왜 간간이 자꾸 피가 흐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에도 그랬고 목욕을 마친 후에도 그랬다.
다행히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 모르겠고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뒤돌아서 옷매무새를 정돈하려는데 조원철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강유영은 흠칫 몸이 굳었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렇게 정직하고 고지식하던 사람이 지금 어머니의 처소에서 이렇게 황당한 짓을 하고 있다. 하얀색 손수건에 은은한 핏자국이 묻었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점점 열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강유영은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돌렸다.
그가 손을 놓아주자 그녀는 뒤돌아서 황급히 허리띠부터 다시 맸다.
조원철은 당황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손수건을 도로 품에 넣었다.
“원철아?”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나갔던 한씨가 돌아왔다.
강유영은 흠칫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제5화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
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네 오라비는?”
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큰손으로 아프다던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라버니께선… 조회에 나가셨습니다.”
강유영은 그가 시킨 대로 대답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움츠린 목은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가까워….’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긴장한 탓인지,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몸은 이미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녀석, 간다고 말은 하고 가지.”
한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어 말했다.
“네 오라비 혼사가 잘 마무리되면 다음 차례는 너인데, 혹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느냐?”
강유영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애원에 찬 눈으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손길은 멈추었지만 조원철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강유영은 조급한 마음에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움찔거렸다. 한씨가 대답이 늦어 갑갑하다며 병풍 뒤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때,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수줍음 많은 아이에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평소 외출도 거의 안 하는 너인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혼사는 나와 네 아버지가 알아서 하마.”
어차피 한씨도 지나가는 소리로 물어봤을 뿐이다. 강유영의 혼처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진국공부가 그동안 공짜로 길러줬으니 이제는 그 쓸모를 할 때가 온 것이다.
강유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답하려던 찰나, 귓가에 조원철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챙기실 일도 많으시니, 우선 바쁜 일부터 보세요, 어머니. 제 일은 급하지 않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유영은 이미 머리가 혼미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을 뿐이었다.
“그러자꾸나.”
한씨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따가 나랑 창고에 가보자꾸나. 마음에 드는 가구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부용원으로 옮겨주마.”
장남의 혼례가 잘 끝나면 강유영을 시집보낼 것이다. 몇 달 머물 날이 없을 테니, 굳이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로 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이유도 없었다.
“어머니, 부용원으로 옮길 필요는….”
강유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감송향이 은은하게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 입술에 맞닿은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강유영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손을 밀쳐내려 바둥거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촉감에 조원철도 흠칫하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네 오라비 성격 잘 알지 않니. 네가 안 옮긴다고 하면 내가 널 박대하는 줄 알아. 게다가 앞으로 부용원에서 시집을 가면 시댁에서도 널 만만히 보지 않을 게야.”
한씨는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경우가 없었다.
“수락하거라.”
조원철은 강유영을 바짝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강유영은 한씨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얼른 이곳을 뜨고 싶은 생각뿐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뜻에 따를게요.”
그녀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짝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따스한 열기가 옷감 사이로 전해져서 욱신거리던 통증이 조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따스함이 아니었기에 굳이 의미를 둘 마음은 없었다.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물러나자, 서늘함이 몸을 감쌌다.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허전한 감정을 재빨리 수습하고 치맛자락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애써 태연한 척, 병풍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창고로 가자꾸나.”
한씨가 그녀를 불렀다.
강유영은 조용히 한씨를 따라 방을 나섰다.
강유영의 짐은 많지 않았다.
한씨는 시녀 몇 명을 보내 당일로 강유영의 거처를 부용원으로 옮겼다. 덤으로 복장점에서 기성품 의복 몇 벌을 사 오게 하고 패물도 몇 가지 골라 보내주었다.
강유영은 외출하기 불편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단비를 시켜 약방에 보내 오늘은 쉬고 내일 일하러 나간다고 전하도록 했다.
어제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인지, 오늘은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조원철이 내일 맞선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녀는 조원철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며, 그날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결국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른 아침,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누군가가 밀쳐서 깨웠다.
“아씨, 일어나세요.”
강유영은 몽롱한 눈을 뜨고 단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단비가 침상 옆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세자의 측근인 청운님이 오셨어요. 밖에서 아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이지?”
강유영은 조원철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어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청운은 조원철의 심복으로 평소 그의 곁을 떠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왕 태사의 셋째 따님과 맞선을 볼 사람이 왜 청운을 이리로 보낸 걸까?
“그건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단비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소인이 옷단장을 도와드릴까요?”
강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청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뛰어난 무장인 청운은 성격도 좋은 편이었다. 매번 그녀를 보면 공손하게 인사했고 무례하거나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다.
단지 더 이상 조원철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무시하면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기에 불안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조원철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정직하고 올곧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침상을 내려 단비가 옷을 입혀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돌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강유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을 만끽했다. 확실히 부용원은 소은원보다 정원도 넓고 화려했다.
“아씨.”
밖에서 기다리던 청운이 그녀를 보고 예를 행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강유영은 처마 밑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자께서 아씨께 탕약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청운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시녀가 탕약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릇 안에는 적갈색의 탕약이 들어 있었다.
“여기 놓아두거라.”
강유영은 거절하려다가 조원철의 싸늘한 얼굴을 상상하고는 말을 돌렸다.
겉으로 보이는 올곧고 정직한 인상은 거짓이다. 만약 그의 말을 거역한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맞선을 본다면서 왜 굳이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것인지, 강유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자께선 아씨께서 마시는 모습을 꼭 확인하고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청운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강유영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에게는 충분히 선을 그었고 그 역시 곧 약혼녀가 생길 것이다.
다 정리된 일인데 왜 청운을 시켜 탕약을 보내온 걸까?
“만약 아씨께서 안 드신다면, 이따가 직접 약을 들고 찾아오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유영 아씨, 소인을 봐서라도….”
청운이 애원하듯 말끝을 흐렸다.
강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그릇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쓴 탕약이 혀끝에 닿았다. 맛으로 대충 어떤 약재가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삼, 백술, 부령 등 기혈 보충에 좋은 보약이었다.
그녀는 쓴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세자께서 이것도 같이 보내셨습니다.”
청운이 앞으로 다가와 손바닥 크기의 사탕 상자를 강유영에게 건넸다.
“그럼 소인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강유영은 사탕 상자를 단비에게 건네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약방으로 가겠다.”
“아씨, 밤새 잠을 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단비는 별로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하루 더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 없어. 넌 남아서 어멈을 잘 보살피거라.”
말을 마친 강유영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방에 나가지 않으면 당장 다음 달 어멈의 치료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장 의원 혼자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약방에 도착하니 약상자를 메고 외출 준비를 하는 장 의원이 보였다.
“유영이 왔니? 마침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꾸나.”
백발의 노인은 강유영을 보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장 의원은 경성에서도 의술로 손꼽히는 분이었다. 태의원의 초대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거절했다고 한다.
강유영은 약상자를 받아들고 장 의원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의 환자는 화려한 화방(畫舫: 고대의 유람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한 증상을 호소했다고 했다.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장 의원을 맞아주었다.
강유영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은 처음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 호화롭고 부티가 났다.
“이렇게 와줘서 감사하네, 장 의원.”
한씨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강유영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상석에 앉아 장 의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한씨가 보였다.
강유영은 당장 자리를 뜨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유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그녀를 먼저 발견한 한씨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저… 우연히 약방을 지나가다가 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되어 따라왔습니다.”
강유영은 다급한 마음에 대충 둘러댔다.
그 와중에 병풍 뒤에 가려져 안 보이던 조원철의 준수하면서도 근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공이 요동치고 가슴이 멎을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는 한씨가 이곳에서 조원철과 함께 왕 태사의 셋째 딸과 맞선을 보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
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
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
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
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
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무심하게 보이지만, 여전히 고귀함과 절제된 품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맞은편에 앉은 처자를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강유영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온 지도 모르는 듯했다. 강유영은 그제야 바짝 긴장해서 꽉 쥐었던 주먹을 폈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왕씨 가문의 셋째 아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세자께서 개선하실 때, 구경 나갔다가 누각 위에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직접 뵈었답니다. 다들 세자께서는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발랄했다. 고양이처럼 살짝 치켜올린 눈매에 복숭아꽃처럼 분홍빛으로 물든 볼, 눈처럼 하얀 피부, 과연 듣던 대로 미인이었다. 얼굴에는 소녀 특유의 수줍음이 배어 있었고 반짝거리는 눈빛에는 눈앞의 사내를 향한 설렘이 담겨 있었다.
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칭찬입니다, 소저.”
강유영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보아하니 왕 소저는 그가 개선하던 날부터 그를 마음에 둔 듯했다.
어울리는 집안에 장차 그에게 도움이 되는 집안의 딸이니 조원철도 분명 허락할 것이다.
어쩌면 얼마 안 있으면 혼례를 준비할지도 모른다.
“연령이 이 아이는 그렇게 소설 속 영웅을 숭배하더니, 드디어 오늘 만났네요.”
태사 부인인 교씨는 딸의 옆에 앉아 만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성함이 연령이었구나.’
옷자락을 꼭 잡은 강유영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보니 교씨도 이 혼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외간사내가 있는 자리에서 쉽게 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가슴 답답함이나 두근거리는 증세가 있긴 하지만, 과로로 인한 것이니 잘 요양만 하신다면 금세 좋아질 것입니다. 이 알약은 가슴이 갑갑하실 때 한 알씩 드십시오.”
진단을 마친 장 의원이 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한씨에게 건넸다.
정신을 차린 강유영은 서둘러 약병을 받았다.
“제가 시중을 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얼른 약병을 열어 알약 하나를 꺼내 한씨의 손에 쥐여주고 물을 따르러 갔다.
한씨의 심복인 풍씨 어멈이 이미 따른 찻잔을 그녀에게 건넸다.
강유영은 아무런 의심 없이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그러자 뜨거운 온도가 손끝을 덮쳤다.
그녀는 그제야 풍씨 어멈이 끓는 물을 따른 찻잔을 건넸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가락 끝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지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찻잔을 바닥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이걸 집어던진다면 필히 병풍 뒤에서 맞선을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탁자로 다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물이 찰랑이며 손등에 떨어졌다.
“앗!”
그녀는 가쁜 숨을 들이켰지만 이미 신음은 잇몸 사이로 새어 나오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행히 빨리 대처한 덕에 큰 부상은 면할 수 있었다.
“아씨, 괜찮으십니까? 이런, 소인이 정신이 없어서 그만 금방 끓인 물인 줄도 몰랐네요!”
풍씨 어멈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자마자 고자질을 해서 비싼 옷이랑 패물을 뜯어가더니 부용원까지 차지해 버리다니! 참으로 간사한 것!’
한씨는 담담한 눈으로 강유영을 힐끗 보고는 무심한 어투로 물었다.
“괜찮니? 어멈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란다.”
강유영은 시선을 아래에 두고 고개를 저었다.
풍씨 어멈은 한씨의 심복이고 평소 한씨가 귀부인으로서 하지 못할 일을 대신하는 역할이었다. 그런 사람이 상전인 한씨에게 끓는 물을 대접할 리가 없었다. 고의가 아닐 리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반발하지 않을 것을 알고 한 일이다.
한씨가 약을 먹은 후, 강유영이 이만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보드라운 두 손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이쪽이 연화 아씨겠군요?”
왕연령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강유영이 손을 빼고 해명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한씨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우리 집안 양녀인 강유영이란다. 연화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단다.”
얘기를 들은 왕연령은 즉시 손을 놓더니 재수 없다고 작게 속삭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강유영은 오만하고 버릇없는 자태를 보고 있자니 조연화가 떠올랐다. 둘 다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자란 티가 물씬 났다.
이런 두 사람이 만약 시누이와 올케가 된다면 장차 집안이 조용할 날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풍 뒤에서 걸어 나온 조원철은 가장 먼저 빨갛게 데인 강유영의 손등에 시선을 주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쯤에서 신물을 교환하고 비녀를 꽂아줘야지?”
한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맞선을 본 남녀는 서로 마음에 든다면 신물을 교환하고 남자쪽에서 여자에게 비녀를 꽂아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이 혼사가 정해졌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절차이기도 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떠난다는 얘기를 한다면 분명히 눈치 없다고 핀잔을 들을 것이다. 강유영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든 존재감을 낮출 생각이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알싸한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마음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조원철의 혼사가 곧 정해질 테니, 이제 그와는 완전히 연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들킬까 조마조마할 일은 없겠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왕연령은 한씨의 말을 듣고 수줍게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조원철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싸늘히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한씨의 말은 안 들리는 듯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식었다.
눈치 빠른 교씨가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요즘은 젊은이들끼리 서로 알아갈 시간을 좀 더 가지고 혼사를 정한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조원철이 덜컥 거절의 말을 꺼낼까 봐 두려웠다. 아침에 외출하기 전, 조원철은 전도가 유망한 인재이니 필히 혼사를 성사시키라던 부군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것도 좋겠군요.”
한씨는 이때다 싶어 열정적으로 권했다.
“곧 점심 때도 되었으니 같이 주루로 가서 식사라도 하시지요.”
교씨는 흔쾌히 초대에 응했다.
강유영은 기회를 봐서 한씨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화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소리를 들은 강유영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무슨 연유인지, 풍씨 어멈이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몇몇 선원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어멈을 건져올렸다.
간신히 갑판으로 올라온 어멈은 누가 밀었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범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강유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악행을 저질렀으니 하늘이 벌을 내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손등에서는 여전히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약방으로 가서 약을 바를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씨!”
이때, 뒤에서 청류가 쫓아오며 그녀를 불렀다.
그는 조원철의 또 다른 측근으로, 침착하고 과묵한 청운과는 다르게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소년처럼 발랄한 성격이었다.
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세자께서 이걸 꼭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청류는 곧바로 손에 든 물건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화상을 치료하는 연고였다.
강유영의 눈빛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분명히 병풍 뒤에서 왕연령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녀가 다친 건 또 언제 보았을까?
약방으로 돌아간 강유영은 바쁘게 일하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진국공부로 돌아갔다.
부용원으로 돌아오니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강유영은 얼른 소매를 걷어붙이고 단비를 도와 정리하기 시작했다.
몸을 바쁘게 굴려야지 잡생각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아 아씨가 오늘 다녀가셨어요. 연화 아씨가 아씨께서 부용원으로 처소를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 벼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시더군요.”
단비가 옷을 개며 말했다.
강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진국공부에서 그나마 그녀에게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다섯째 아씨인 조월아일 것이다.
단비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투덜거렸다.
“서유 이 계집애는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네요.”
“신경 쓸 것 없어. 우리끼리 정리하자꾸나.”
강유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행히 반 시진 후에 서유가 돌아왔다.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정리한 끝에 마침내 저녁때가 되어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강유영은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고 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을 연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내실 중앙에 조원철이 그녀를 등진 채로 뒷짐을 지고 떡하니 서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등 뒤에서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들어오거라.”
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
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
“언제 오셨나요?”
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
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
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심한 듯 물었다.
“손은 좀 괜찮아졌느냐?”
“예, 다 나았습니다.”
강유영은 짤막하게 답했다.
심한 화상도 아니었고 화상 연고를 바로 발랐기에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나았다.
조원철은 말없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강유영은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용건을 물었다.
“손수건 돌려주러 왔다.”
조원철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기다란 손가락 위에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손수건이 걸쳐져 있었다. 선이 깔끔하고 유려한 손가락에 손등에는 옅은 청색 핏줄이 선명하게 비쳐 보였다. 참으로 보기 좋은 손이었다. 마치 저 손에 무한한 힘이 담긴 듯, 모든 것을 손에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이 손이 그날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자신을 벽으로 밀치던 것을 생각하면,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날 밤 비밀의 장소에 같이 있었던 손수건을 가로챘다.
하지만 조원철은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강유영은 흠칫하다가 힘껏 잡아당겼다.
마침내 손수건이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이라도 이걸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결국 종종걸음으로 다가가서 장롱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었다.
장롱을 닫은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조원철을 힐끗 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오라버니, 이만 돌아가셔야죠.”
단비가 주방에 밥을 가지러 갔는데 그가 이곳에 계속 버티고 있다가는 이따가 돌아온 단비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약 발라야지.”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는 여전히 백옥병이 들려 있었다.
강유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거절하지 않고 약병을 받아 병풍 뒤로 들어갔다.
거절한다면 스스로 한다고 손을 뻗어올지 모른다.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효가 좋아서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터라, 이번에 한번 바른 후에는 더 이상 필요 없을 듯했다.
그녀는 재빨리 약을 바른 후에 병풍 밖으로 나와 약병을 조원철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볼 일이 끝났겠지?
조원철은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오늘은 이만 쉬고 싶네요.”
강유영은 용기를 내어 축객령을 내렸다.
그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마음이 착잡했다.
낮에는 왕연령과 맞선을 보더니 밤중에 찾아오다니. 설마 몰래 자신을 외실로 두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괜찮은 게냐?”
그가 또 물었다.
“예, 다 나았습니다. 앞으로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강유영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용기를 내어 선을 긋기로 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는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다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속으로 그런 느낌을 부정해 버렸다.
조원철에게 다정을 기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영, 착각하지 마!’
“연화 아씨, 사예 아씨, 저희 아씨는 지금 막 쉬시려고 누우셨어요.”
밖에서 단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유영은 화들짝 놀라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조연화와 조사예가 지금 둘이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찌 해명한단 말인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위기의 순간,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조원철의 손을 확 잡아당겨 장롱 쪽으로 데려갔다.
손에 부드럽고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가녀린 손가락이 안쓰러워 힘을 주기에도 아까웠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다가와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마치 굳어버린 것처럼 멍하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장롱 안으로 밀쳤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 예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장롱에 쑤셔 넣기에는 그의 키가 너무 컸다.
허둥대는 사이, 그의 이마가 장롱 모서리에 부딪치고 말았다.
조원철은 겁내지 말라는 말을 조용히 삼키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몸을 낮춰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괜찮으세요?”
강유영은 당황한 마음에 그의 이마를 문질렀다.
지금의 그녀는 이미 깊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오직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 두려우냐?”
조원철은 장롱 안에서 검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두렵죠. 전 오라버니와는 처지가 다르니까요.”
강유영은 허둥지둥 장롱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조원철이라면 당연히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진국공의 장남이자 집안의 세자, 삼군 원수인데다 이제는 어전 지휘사의 자리까지 오른 몸이고 온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태가 벌어지면 진국공부는 분명히 그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덮겠지만, 그 과정에서 제거되는 것은 힘없는 그녀가 될 것이다.
장롱 문이 닫히자, 조원철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이마를 살짝 만져보았다.
한편 강유영이 나가서 문을 열자, 문을 밀치고 들어오려는 조연화와 조사예가 보였다.
“강유영, 이 뻔뻐한 것! 오라버니가 좀 불쌍하게 여겨준다고 고새를 못 참고 부용원에 옮겨달라고 요구하다니! 너 따위가 이런 좋은 곳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진국공부 넷째인 조사예는 서출이었다. 평소 조연화에게 붙어서 아부하며 그녀의 수족 노릇을 했다.
강유영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조사예는 풍만한 몸매에 볼에 젖살이 덜 빠져서 순박한 인상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강유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사예 아씨는 부용원이 무척이나 욕심나나 봅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국공 부인께 가서 거처를 옮겨달라고 간청하지 그러셨나요?”
언제 돌아온 건지, 서유가 다가와서 조사예를 반박했다.
강유영과 단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한 번도 대놓고 강유영의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 서유였다.
요즘따라 뭔가 이상했다.
조사예는 흠칫하더니 서유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네년이 정녕 미쳤구나! 내 이것을 그냥….”
예전에 강유영을 비꼴 때도 늘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던 시녀였다.
오늘은 뭘 잘못 먹었길래 감히 이런 식으로 반발하는 걸까?
“닥치지 못해?”
조연화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화를 끊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강유영을 바라보며 다가와서 냄새까지 맡았다.
맑은 고양이상 눈매에 굉장히 사랑스러운 외모의 소유자였지만 한씨가 너무 애지중지 키운 탓인지 성격은 굉장히 괴팍했다.
조사예는 억울했지만 감히 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 서유를 힘껏 노려보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유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왜 이러는 거지?
“네 몸에서 왜 회춘고의 냄새가 나지?”
조연화는 매서운 눈초리로 강유영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녀는 회춘고의 향기를 너무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열두 살 나던 해, 나들이를 나갔다가 부주의로 넘어져 얼굴을 다쳐 흉터가 생긴 적이 있었다. 온 집안이 이에 안달이 났지만 완전히 흉터를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 한씨가 황후께 부탁하여 겨우 회춘고를 하사받아 세 번을 발랐는데 흉터도 사라지고 전보다 더 매끄러운 피부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춘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황실의 하사품인 회춘고를 강유영이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강유영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이 굳었다.
조원철이 준 연고가 최상급 연고인 줄은 알고 있었다. 통증이 신속히 완화되고 몇 번 안 발랐는데 상처가 거의 다 나을 정도로 효과가 빨랐다. 그런데 그게 그 귀하다는 회춘고일 줄이야!
“이년이 무슨 수로 황실 연고를 구했겠어요?”
조사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지난달에 쪽문으로 어딜 다녀오는 걸 봤는데 내가 보기엔 저 요망한 얼굴로 어디 귀한 분을 홀려서 얻어낸 거겠죠. 생긴 게 딱 여우처럼 생겼잖아요.”
그녀는 증오에 찬 눈으로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조사예는 예전부터 외모가 자신보다 빼어난 강유영을 질투했다.
“사예 아씨도 첩실의 자식 아닌가요? 호박만한 얼굴이 그리 마음에 안 드셨나 보죠? 그래서 저희 아씨를 질투하시는군요.”
강유영이 뭐라 하기 전에 서유가 비아냥거렸다.
정곡을 찌르는 서유의 말에 조사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서유에게 달려들었다.
“조용히 좀 있어!”
조연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호통쳤다.
조사예는 진심으로 짜증이 난 조연화의 눈치를 보고 분노를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 처소 바로 옆으로 이사 온 거, 굉장히 기분 나빠. 원래는 쫓아버릴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네? 네가 하는 거 봐서 결정해야겠어.”
조연화는 의자로 다가가서 앉더니 교만하게 강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춘고 말이야. 네가 스스로 내놓을래? 아니면 내가 수색할까?”
마치 회춘고는 당연히 자신의 소유여야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강유영은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멋대로이고 의심이 많은 조연화이니 없다고 해도 쉽사리 믿지 않을 것이다.
조연화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여봐라, 당장 안을 수색해서 연고 같은 것들은 모조리 꺼내서 가져오거라!”
그녀의 한마디에 수십 명의 시녀와 어멈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몰려들어 이곳저곳 뒤지기 시작했다.
“그만해!”
서유가 다급히 그들을 막아섰다.
단비도 굳은 표정으로 조연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화 아씨, 이러시면 저희가 세자께 알릴 수밖에 없어요. 그 뒷감당을 어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조연화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큰 오라버니를 들먹여도 소용없어. 오라버니께서 강유영을 감싸는 건 그저 진국공부의 평판을 위해서야. 친동생은 나라고! 내실도 뒤지거라!”
강유영은 장롱 속에 숨긴 조원철을 떠올리고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급하게 달려가서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금세 밀려서 문이 열리고 말았다.
단비와 서유도 어멈들에게 제압당했다.
시녀들이 몰려가서 저녁에 금방 정리한 방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달려가서 장롱 문을 열려는 시녀를 밀쳐내고 두 팔을 벌려 장농 앞을 가로막았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이 이상 무례를 부리신다면 저도 큰 오라버니를 찾아가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큰 오라버니 성격은 아씨께서도 잘 아시겠지요. 그분은 가족의 정보다 공정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강유영은 당황한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겉보기에는 침착해 보이지만, 사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한씨는 지나칠 정도로 조연화를 편애했고 진국공은 집안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무법천지인 조연화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는 조원철뿐이었다.
강유영은 그를 내세워 겁을 줘서 이 소란을 그만두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조연화는 강유영의 뒤에 있는 장롱을 노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계속 뒤지거라! 고작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것밖에 더하겠어? 누가 두려워할 줄 알고?”
사흘 정도 사당에 갇히는 대가로 회춘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득이었다.
시녀들이 몰려와 좌우에서 강유영을 붙잡았다.
조연화가 장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강유영은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장롱 안에 숨어 있는 조원철 생각뿐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도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완전히 결백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장롱 문이 열리는 순간, 강유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