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의 형님

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부군의 형님

GoodNovel Hoàn thành

상인 출신 유소영, 부군의 출세와 집안살림을 도왔지만 돌아온 건 상인 출신이라 간사하고 계산적이라는 말뿐이었다. 혼인한지 2년, 그는 형수를 연모...

Chương (1)

第1章

상인 출신 유소영, 부군의 출세와 집안살림을 도왔지만 돌아온 건 상인 출신이라 간사하고 계산적이라는 말뿐이었다. 혼인한지 2년, 그는 형수를 연모하며 그녀를 독수공방하게 했다. 형님이 사망한 후,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형님의 대를 이을 거라며 형수와의 합방을 말했다. 그리하여 유소영은 뒤돌아서 부고를 당한 줄 알았던 그의 형님을 찾아가게 된다. 사람들은 그녀의 출신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엄청난 의술을 갖고 있었다. ‘이 소란이 언제 끝나나 보자.’ 사람들은 충용 후작의 고 세자가 준수한 외모에 학식이 뛰어난 문관이라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을 몸에 달고 살았다. 그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라면 그가 동생의 부인과 강제로 혼인한 거였다. 몇 년 후, 엄청난 권세를 가졌음에도 사내는 매일 조회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부인이 자꾸 도망칠 궁리만 하니 당연히 빨리 집에 가야지!” 유소영은 절규했다. ‘병약한 사람이라더니!’ 제1화 “형님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도와드린다고요? 어떻게 돕는단 말입니까?” 유소영은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부군인 고장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장에서 승리하고 오늘 막 돌아온 고장훈은 두터운 갑옷을 입은 채,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밤부터 난 청우각에서 묵을 것이오. 형수가 회임할 때까지.” 유소영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주버님께서 돌아가신지 한달이 넘었는데 아버님, 어머님께서 지금까지 사실을 숨기고 상을 치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이미 상의가 끝난 일이고 제게는 통보하러 오신 겁니까?” 고장훈은 혼례식만 치르고 곧바로 변방으로 출정했기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첫날밤을 보내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는 승리하고 돌아온 오늘 미뤘던 첫날밤을 치를 줄 알았건만, 그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여인을 품에 안겠다고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그의 형수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고장훈은 비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싸늘히 대꾸했다. “부모님이 결정하신 일이고 당신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었소. 형수께서 굳이 나한테 당신 의견을 물어보라고 해서 온 것뿐이오.” 유소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형님은 참으로 사려 깊으신 분이로군요. 이렇게 인륜을 저버린 일을 형님께서도 동의하셨나요?” 그 말을 들은 고장훈은 버럭 화를 냈다. “형수는 고상하고 순결하신 분이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충용 후작부를 위한 일이란 말이오! 형님의 후대를 남기기 위해! 당신은 괜한 고집부리지 말고 고개만 끄덕이면 돼. 형수가 안심할 수 있게!” 유소영이 물었다. “만약 제가 허락 못하겠다면요?” 고장훈이 말했다. “그렇다면 휴처(休妻: 고대에 사내가 부인을 집안에서 내치는 경우) 절차를 밟고 새 부인을 들여야겠지!” 유소영의 동공이 흔들렸다. 휴처라니? 지난 2년간의 헌신과 기다림이 참으로 우스워진 순간이었다. 유소영은 더 이상 그에게 어떤 기대도 품지 않기로 했다. “좋아요. 허락하죠.” 고장훈은 실망 가득한 그녀의 눈빛을 보니, 이유 모를 갑갑함을 느꼈다. 그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경고하듯 말했다.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선 안 될 것이오. 특히나 상인 출신에 계산적이기로 유명한 당신의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비밀에 부쳐야겠지.” 유소영은 냉소를 지으며 비꼬듯 말했다. “애당초 충용 후작부가 십만 금의 빚을 떠안았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우리 가문입니다. 지난 2년동안 유씨 가문은 당신의 출세를 아낌없이 도왔지요. 정실 부인의 체면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이제 와서 제 아버지이자 당신의 장인이며, 후작부의 은인이나 되는 분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는 겁니까!” 고장훈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다 지나간 일을 자꾸 입에 담아야 하겠소? 상인 출신에 불과한 당신의 아버지가 내 출세에 도움을 줬다니. 어이가 없군. 형수의 아버지는 이 나라의 재상이시오. 그분이야말로 내 출세의 은인이란 말이지.” 상인에 불과한 장인을 어찌 재상과 비교할 수 있느냐는 말이었다. 유소영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고장훈이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친정인 유씨 가문이 금은으로 쌓아올린 인맥과 사다리 덕분이었다. 경성에서 관원들과 인맥을 넓히고 군량과 군수물자까지, 친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변방에 도착했을 때쯤에 보급물자는 반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계산적인 상인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그녀는 달려가서 귀뺨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냈다. 이때, 누군가가 급하게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도련님, 동서, 싸우지들 말게.” 형수인 임유정이었다. 그녀는 흰 소복을 입은 채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고장훈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밤공기가 쌀쌀한데 어찌 이리 얇게 입고 나오셨습니까?” 유소영은 이렇게 다정한 표정을 지은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냉랭한 태도로 모두를 대했다. 구혼하러 왔을 때도 그러했고 혼례식 당일에도 그랬다.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임유정은 유소영의 손을 잡으며 슬픔에 가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식을 볼 수 없는 신세라, 혼인한지 3년이 되도록 후사를 보지 못하고… 이제 와서 동서까지 힘들게 하다니… 이 못난 형님을 용서해 주게. 나 때문에 부부간에 사이가 틀어지는 건 나도 원치 않아.” 눈물이 비 오듯 흐르는 그녀를 보자, 고장훈은 유소영을 잡아당기며 낮은 소리로 꾸짖었다. “형님이 사고를 당한 이후, 형수는 본래 형님을 따라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하는 것을, 나와 어머니가 간신히 말렸소. 쓸데없는 말은 삼가하시오.” “물론이죠.” 유소영은 담담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임유정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는 부군과 형님께서 후사를 보는 것에 대해 이미 동의하였습니다.” 임유정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하다가 무릎을 꿇으려고 허리를 숙였다. “부군을 대신해 동서에게 감사를 드리겠네….” 고장훈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형수가 어찌 동서에게 무릎을 꿇는단 말입니까! 예는 소영이 형수께 올려야지요! 하물며 형수는 후작부를 위해 한몸 희생하신 것 아닙니까!” 유소영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죽은 부군에게 깊은 정을 보여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고장훈의 품에 기대어 일어나려 하지 않는 모습이라니! 이런 사람이 바로 고장훈이 말한 고상하고 순결한 사람이란 말인가. “쿨럭….” 임유정은 힘없이 기침하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굴었다. 고장훈이 긴장하며 말했다. “제가 처소까지 모시겠습니다, 형수님.” 말을 마친 그는 임유정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촛불 아래 유소영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림자가 반쯤 드리워졌다. 시녀 아민이 들어오더니 분개하며 말했다. “아씨, 저도 다 들었습니다! 정말 파렴치한 집안이로군요!” 유소영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약은, 도착했니?” “예!” 아민은 서둘러 품에서 봉지 하나를 꺼냈다. “아씨, 왜 마님과 장군께 사실 세자께선 기이한 독에 중독되어 가사 상태에 빠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일찍 그분들께 말씀드렸더라면 이런 이상한 일을 꾸미지도 않았을 텐데요…” “설 신의의 제자인 아씨가 침술을 시전하고 만금으로 서역에서 사온 약재까지 있으니 분명 세자를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유소영은 약병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 얘기하지 않은 건 그녀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말을 안 한 건 고장훈이 그녀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든 그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후작부에서 이렇게 역겨운 짓을 벌였으니, 그녀는 세자를 되살려 형님을 존경하고 부군을 사랑한다는 시동생과 형수가 어떻게 사통하는지 직접 지켜보게 하리라. 제2화 고장훈은 임유정을 조심스럽게 침상에 눕혔다. 임유정이 그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도련님, 동서를 원망하지 마세요. 같은 여인으로서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저는 알아요.” 고장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수님은 역시 사려 깊으시네요.” ‘형수는 부군을 잃고도 남을 생각해 주는데, 유소영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대국을 전혀 보지 않는구나.’ 그는 사내가 첩을 두는 건 너무 흔한 일이고 하물며 그는 단지 형님의 혈통을 이어주려고 씨를 빌려주는 것일 뿐이니 크게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임유정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 제가 부덕하여 부군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죠. 만약에… 부군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우리가 이 지경까지….” 고장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형수님. 형님은 어릴 적부터 병약하셨으니, 이를 어찌 형수님 잘못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법, 미래를 생각하셔야지요.” 임유정은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죠.” 세자가 죽으면 그녀는 이 집안에서 의지할 곳이 사라질 테니, 그녀는 반드시 고장훈을 붙잡고 그의 아들을 낳아야 했다. 고장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목이 메었다. 형수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형님과 혼례를 올리자, 그는 딴마음을 품지 않고 그 감정을 접어두기로 했다. 그래서 유소영과 혼인을 한 후, 그녀와 잘 살기 위하여 자신에게 마음을 추스를 2년의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형님이 병으로 돌아가시고 형수에게 자식을 줄 중임을 떠안게 되자, 결국 사심이 동해 버렸다. 그는 하늘이 그의 오랜 순정을 측은히 여겨 숙원을 이뤄준 것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는 맹세코 이 일이 끝나면 완전히 마음을 접고 부인만 지킬 것이라 확신했다. “형수님, 이만 취침하시지요.” 임유정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만큼이나 작고 가냘펐다. 사내의 숨결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눈을 감으며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난향원. 아민은 어두워진 바깥을 바라보며 측은한 눈길로 유소영을 바라보았다. “아씨, 제가 청우각으로 가서 장군께 사실을 설명할게요! 비록 이 혼사가 어르신의 뜻이긴 했지만, 아씨도 장군께 마음이 있었다는 건 저도 압니다.” 유소영은 즉시 엄숙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안 돼! 가지 마!” 지금 사람을 보내면 고장훈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임유정을 안고 이 문을 나선 순간부터 고장훈은 더 이상 그녀의 부군이 아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유소영이 거울 앞에서 단장을 하고 있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연분홍색 얇은 비단 치마를 입고 분칠도 하지 않은 임유정은 곱고 긴 목선에 뻘건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행했다. “형님.” 임유정은 재빨리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일으켰다. “예의는 되었네. 동서가 걱정되어 와봤어. 어젯밤은 편히 쉬었는가?” 아민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어떤 이가 부군을 다른 여인의 처소로 보내고 발편잠을 잘 수 있을까? 대체 왜 여기까지 찾아와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형님. 오히려 저보다 형님께서 더 피로해 보이시네요. 어젯밤에 아주버님을 위해 고생 많으셨겠어요.” 임유정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굳어졌다. 그녀는 일부러 대범한 척하며 말했다. “어젯밤에 도련님에게 동서를 먼저 배려하라 하였는데 듣지 않더군.” 유소영은 고개를 들고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일은 모두 아주버님을 위한 일인데, 조강지처로서 당연히 지지해 드려야지요.” 임유정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의 여인을 빤히 응시했다. ‘정말 개의치 않는 걸까? 아니면 분한데 참고 있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나라의 재상이시고 동서의 아버지는 상인이시지. 난 도련님의 출세길을 도울 수 있지만 동서는 도련님을 위해 뭘 할 수 있는가? 이번에 도련님이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우리 재상부에서 힘을 쓴 것이네.” 유소영은 침묵하며 차가운 눈빛으로 임유정을 응시했다. 작위 문제에서 가장 많은 재력과 인력을 쓴 쪽은 유씨 가문이거늘, 재상부가 뭘 도왔단 말인가? 그녀는 임유정이 정말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공을 가로채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유소영이 말이 없자, 임유정은 그녀가 말문이 막혔다고 생각하여 대놓고 말했다. “도련님이 그해 동서에게 구혼한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어. 지금 그는 전공을 세워 장군에 봉해졌으니, 상인 출신의 딸과는 어울리는 그릇이 아니지.” 유소영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하! 모른 척 넘어가려고?’ 임유정은 눈웃음을 지으며 단아하고 고고한 자태로 말했다. “그럼 내 돌려 말하지 않겠네. 유소영, 자네 스스로 정실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어떤가?” 유소영은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고 태연하게 반문했다. “이것은 형님의 뜻입니까, 아니면 장군과 후작부의 뜻입니까?” 제3화 임유정은 대놓고 경멸에 찬 미소를 짓더니, 유소영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말했다. “사람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는 법이야. 용과 봉황이 짝을 이루는 건 예나 지금이나 쭉 이어져 온 진리이지. 지금 스스로 물러나면 체면은 지킬 수 있을 것이야. 내 말 한마디면 도련님은 언제든 너를 내칠 수 있지.” 유소영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제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후작부에서 이리 저를 내칠 수는 없어요.” 임유정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대체 왜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어? 죽어라 매달리면 나중에 도련님의 자식을 잉태할 기회가 생겨 아들 하나 믿고 이 후작부의 안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거야? 미리 말해두지만 내가 과부가 되었다고 하여 너 따위가 내 세자 부인의 입지를 흔들 수는 없어.” 그녀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은 정이 깊은 사람이야. 그분은 세자 자리를 원치 않으며, 내 아이에게 세자의 자리와 후작부를 물려준다고 하였어. 그러니 너는 평생 날 넘어설 수 없지. 이제 알겠니?” 유소영의 눈빛도 싸늘해졌다. 여자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제는 그가 그녀를 내치는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부군을 바꿔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임유정은 유소영이 말이 없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재상부의 딸로서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안방 여인들의 수싸움을 배웠다. 그러니 유소영이 무슨 수로 그녀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 세자 부인의 자리든, 고장훈의 애정이든, 모두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임유정이 돌아가자, 아민이 분개한 듯 눈을 흘겼다. 참으로 건방진 아낙네가 아닐 수 없었다. “아씨, 대체 저 사람은 무슨 자격으로 아씨에게 스스로 물러나라고 하는 거죠?” 유소영은 고개를 들고 아민을 향해 미소 지었다. “넌 세자 부인의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아민이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소영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장훈이 먼저 자신을 내칠지, 아니면 자신이 임유정의 자리를 꿰찰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아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아씨, 그게 무슨….” 유소영은 불현듯 말을 돌렸다. “어머니께 문안드리러 다녀와야겠구나.” 영향원. 고장훈의 어머니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유소영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어머님께 문안인사 드립니다.” 고 부인은 그녀를 힐끗 보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거라.” “감사합니다, 어머님.” 유소영이 자리에 앉기 바쁘게 고 부인의 경고가 들려왔다. “유정이와 장훈이는 모두 후부를 위한 일이니 너는 대국을 돌보고 대의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후작부는 일반 가문이 아니야. 그러니 안방 여인들의 난잡한 수싸움은 절대 용납하지 못해. 알겠느냐?” 유소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반문했다. “어머님, 아주버님이 이 일을 아시게 될까 걱정도 안 되십니까?” 고 부인은 즉시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준형이는 이미….” 유소영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어머님, 제 말은 아주버님께서 구천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실까, 걱정된다는 뜻이었어요.” 고 부인의 얼굴이 슬픔에 잠겼다. “준형이는 아마 이해할 게다. 유정이와 장훈이도 모두 그를 위한 일이니까. 아들이 없으면 장래에 누가 그 아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고 대를 잇겠느냐?” 물론 더 깊은 이유도 있었다. 충용 후작부는 날로 쇠락해가고 있었다. 작위만 있고 조정에 인맥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유정의 아이는 재상의 외손자이니, 분명 재상의 지원을 받아 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고 부인과 후작이 상의한 후의 결정으로 후작부의 장래를 위한 일이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장남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고 부인은 생각할수록 서글퍼져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형준이가 살아 있었다면… 장원급제한 실력으로 가문을 빛낼 수 있었을 텐데….’ 유소영은 위로 대신, 담담히 말했다. “어머님, 외부에 아주버님의 부고를 숨기시고 시신을 사당에 숨겨두신 건 타당한 일이 아닙니다. 사당은 늘 향을 공양하니 시신이 더 빨리 부패할 테지요. 제 생각에 차라리 장소를 옮기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고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당은 평소 사람이 드나들지 않아, 후작부에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도 문제이긴 했다. 고 부인은 곧 고개를 들고 물었다. “해서 어디에 옮기면 좋겠느냐?” “청우각에 옮겨야지요.” 고 부인은 듣자마자 버럭 역정을 냈다. “안 된다! 너도 알다시피 당분간 장훈이가 청우각에서 지낼 텐데 그럴 수는 없어!” 유소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는 세자가 알더라도 분명 이해할 거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두렵다는 말일까? “청우각 지하에는 술 저장고가 있지요. 서늘하고 은밀하며 본채와도 거리가 있어요.” 시모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자, 유소영은 말을 이었다. “아주버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시신을 잘 보존하는 게 중요합니다. 게다가 아주버님은 지병 때문에 줄곧 형님과 각방을 쓰셨는데 형님께서 갑자기 회임을 하셨다 하면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거예요. 또 밤에 부군과 형님이 밤을 보내고 목욕물을 부르게 될 텐데, 아주버님을 청우각으로 모신다면 당분간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 부인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졌다. 유소영은 이어서 말했다. “죽은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요.” 아민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죽은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세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참으로 잔인하지만 절묘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제4화 고 부인은 재삼 고민했지만 유소영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 준형이를 청우각으로 옮기자꾸나. 시신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얼음을 많이 두고….” 유소영이 제안했다. “매일 처소로 얼음을 나른다면 필히 의심을 살 것입니다. 차라리 한옥관(寒玉棺: 차가운 옥으로 만든 관)을 하나 구해오시는 건 어떨까요?” 한편으로는 지하실에 사람이 드나들면 세자의 독을 해독하는 그녀의 치료를 방해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자가 당한 독은 열독이라 한옥관이 독소를 흩어지게 하는데 유리했다. 고 부인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한옥관? 그건 만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 유소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국을 중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고 부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라 참으로 통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임유정이 언제 회임할지 알 수 없으니, 시신 보존이 급선무였다. “이리도 세심하게 생각해 주니 참 다행이구나. 그럼 네 뜻대로 하거라.” “예.” 찻잔을 내려놓은 고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넌 네 형님에게 잘해야 한다. 그 아이는 우리 집안의 큰 은인이야. 장훈이가 이번에 관직과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유정이 아버지인 임 재상 나으리 덕분이다. 재상께서 너를 좋게 기억하신다면 네 아버지도 출세하여 황상(皇商: 황실에 물자를 공급하는 상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고 부인의 거만한 태도에 아민은 이를 꽉 악물었다. 유소영은 태연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은 부군께서 무조건 작위를 받으실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물론이지. 유정이가 말하길, 이 일을 위해 임 재상께서 폐하께 입이 침이 마르도록 장훈이를 치하했다고 하더구나.” 유소영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고장훈은 앞으로 태어날 형수의 아이를 위해 후작부의 작위를 포기하고 자신은 새로운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유씨 가문의 후원이 없이 오로지 임 재상의 세치혀로 고장훈이 작위를 받을 수 있을지, 그녀는 무척 궁금해졌다. 고 부인은 유소영의 무덤덤한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내가 가르쳐야 하느냐? 네 형님이 몸보신이라도 하게 보양품이라도 장만하거라.” 유소영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어머님, 한옥관을 사고 나면 제 손에는 정말 돈이 없습니다. 형님께 보양품을 사드리려면… 혹 제가 전에 어머님께 맡겨둔 혼수를….” 혼례식이 끝난 다음 날, 시어머니는 그녀의 혼수품을 봉인해 두며 말하기를, 그녀가 과소비하여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신 보관해 주겠노라고 했었다. 고 부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장훈이 녹봉이 있지 않느냐. 그 애가 네게 녹봉을 안 줬어? 장훈이를 불러오거라. 이 일은 내가 대신 해결해 주지. 부인의 혼수품으로 생계를 꾸리는 법이 어디 있다고.” 유소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돌려줄 생각이 없구나.’ 영향원을 나서자, 아민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씨, 아씨의 혼수는 줄곧 마님이 보관하셨는데 2년 동안 매번 이 얘기를 꺼내면 마님께서는 화제를 돌리시네요. 그냥 혼자 독차지하려는 속셈 아닌가요?” 사실 유소영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글쎄 어젯밤 청우각에서 목욕물을 세 번이나 불렀다지 뭐야!” “병약해 보이는 세자께서 밤에는 이렇게 용맹하실 줄이야.” 고 부인이 세자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일을 꽁꽁 숨겨두었기에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니 시녀들이 어젯밤 청우각에서 큰 마님과 동침한 사람이 세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소영과 아민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아민은 뒤에서 수다질하는 시녀들을 쫓아내고는 분개하며 말했다. “아씨, 세자께서 이 얘기를 들었으면 분해서라도 다시 일어나실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아씨는 화도 안 나세요?” 유소영은 화를 내기는커녕, 미소를 지었다. “정말 분노하여 벌떡 일어나신다면, 오히려 내 수고를 더는 셈이지.” “아씨는 지금 농담이 나오세요? 소인은 차라리 아씨께서 후작부의 일을 상관하지 말고 이 집을 당장 떠나시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정직한 성격의 아민은 아씨가 후작부를 떠나 이 역겨운 일들에서 멀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햇살이 스치자, 유소영의 미소가 순간 사라졌다.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야. 그러니 떠나야 할 사람도 내가 아니지.” 그 부덕한 남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물며 상인의 딸이 고위 관원과 혼인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이 이치를 잘 알고 있기에 모든 힘을 동원하여 그녀를 후작부에 시집보냈다. 그는 단지 딸의 여생이 순탄하고 평안하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녀의 집안에는 오랜 아픔이 존재했다. 과거 그녀의 큰 오라버니와 큰 언니는 상인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모함과 핍박을 당해, 한 사람은 미치고 한 사람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과거의 장면이 떠오르자 유소영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전방을 응시하며 단호히 말했다. “해가 진 후에 세자의 시신을 청우각으로 옮기거라.” 앞으로 있을 일을 생각하니 아민도 온몸에 힘이 솟았다. “예, 아씨!” 난향원으로 돌아온 유소영은 가계 장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온 고장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명문가의 규수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랬기에 자연히 유소영에게서 풍기는 상인의 행세나 습관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녀는 그저 책상 앞에 앉아있기만 해도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군!” 놀란 아민이 급기야 예를 행했다. 유소영도 즉시 표정을 수습하고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장군.” 어딘가 소원한 호칭에 고장훈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2년 전을 돌이켜보면 그가 출정하기 전,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부군이라 불렀었다. 그는 어젯밤 일로 그녀가 화가 난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결국 그를 너무 연모하고 잇속만 따지는 옹졸한 상인 출신이라 장원한 대국을 보지 못한 것이라 결론을 지었다. 고장훈은 조용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은 잘 잤소?” “예.” 유소영이 담담히 답했다. “내 오늘 밤은 여기서 묵겠소.” 제5화 유소영은 이곳에서 밤을 자겠다는 고장훈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게다가 마치 큰 은혜를 베푸는 듯한 그의 거만한 태도가 더 불쾌했다. 정말로 자신을 지고지상의 존재로 여기는 것인가? 그녀는 차라리 그가 밤낮으로 청우각에 머물며 임유정과의 사이에서 하루라도 빨리 귀한 자식을 보길 바랐다. 고장훈은 그녀가 침묵하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년이나 이날을 기다렸으니 어찌 안 그렇겠는가! 그러나 고개를 든 유소영의 얼굴에는 그 어떤 희열도 느껴지지 않았고 눈은 죽은 호수처럼 평온하여 아무런 파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버님의 시신이 나날이 부패하고 있으니, 장군께서는 응당 모든 정력을 형님께 집중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고장훈의 마음에는 묘한 불편함이 일었다. 그는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꽤나 풍성한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삼계탕, 굴비 구이 등등 그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값비싼 요리들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러나 시녀는 그의 앞에 수저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난향원 사람들은 참으로 눈치가 없구나.’ 그는 청우각에서 먹었던 음식상을 떠올렸다. 비교를 해보니 그야말로 조촐한 음식상이었다. 고장훈은 순간 불만이 치밀었다. “당신이 형수께 보양품을 사주려 한다는 얘기는 어머니께 들었소. 형수는 동산방의 제비집을 좋아하니 많이 사두게. 그리고 앞으로 청우각의 식사도 부인의 처소와 똑같은 격식으로 차리게. 다른 사람이 보면 부인만 호사를 누린다고 오해받을 수 있고 또한 후작부가 과부가 된 형수를 박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아민은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살림살이는 모두 마님이 주관하고 매달 각 처소에 배정하는 예산이 그 정도였다. 난향원의 음식이 풍성한 것은 유소영이 자신의 지참금을 보태서 마련한 것인데 청우각이 무슨 자격으로 끼니마저 난향원이 책임지라고 한단 말인가. “장군, 예산이 그렇게 충족하지 않습니다.” 유소영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 고장훈이 언성을 높였다. “그럴 리가!” “믿지 못하시겠다면 장부를 확인해 보십시오.” “내 알기로 늘 여윳돈이 남는 줄 아는데?” 유소영은 담담히 답했다. “장군께선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사실 흑자가 나는 쪽은 모두 제 명의로 된 점포들입니다. 후작부의 점포는 간신히 적자를 면했을 뿐이지요. 한 달 전에 아버님께서 남하 순방을 명 받으시어 큰돈을 가져가셨고 지금은 지출이 수입보다 많아 시종들에게 녹봉마저 지급하기 어려운….” 고장훈은 이런 계산적인 것들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소. 가족끼리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계산해야 한단 말이오? 후작부 예산이 부족하면 부인의 개인 예산으로 맞추면 되지. 먼저 부족한 예산을 메꾸고 나중에 갚으면 되지 않소. 지금은 형수가 가장 중요하오.” 유소영은 온화한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장군께서는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제 개인 예산은 이미 아주버님의 한옥관과 얼음을 사는데 다 써버렸습니다.” 고장훈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유소영이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몇몇 고위 관원들에게 장군의 승진을 도와달라 예물도 바쳤지요. 해서 지금은 남은 예산이 정말 얼마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고장훈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형님을 위한 관을 산 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무슨 고위 관원들을 만나 예물을 건넨단 말이오! 관가의 일을 당신 같은 상인의 딸이 뭘 안다고! 그 헛돈을 쓰느니 차라리 임 재상께서 폐하께 몇 마디 해주시는 게 더 낫거늘! 하물며 내 진급 문제는 재상의 도움이 있어 이미 내정된 수순이니, 당신이 굳이 헛돈을 쓸 이유가 뭐가 있다고!” 유소영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네요. 장군 말씀이 맞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니 고장훈도 더 이상 추궁하기 어려웠다.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제때에 어머니와 형수께 여쭤 보시오. 당신은 후작부의 작은 마님이자 내 장군 부인이니 상인들이나 쓰는 옹졸한 행세는 삼가야 하오. 형수처럼 사예(四藝: 악기, 바둑, 서예, 그림 등 교양 있는 규수와 문인의 상징)에 능통하고 약학을 통달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세울 수 있는 하나의 특기는 가져야 하지 않겠소. 스스로 할 일을 찾아 배우도록 하고 엉뚱한 짓은 이제 하지 마시오.” 아민은 반박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유소영은 천부적인 재능으로 어릴 적부터 유명 악사와 현인에게 거문고와 바둑, 서예, 그림 등을 배웠는데 그 조예를 어찌 임유정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유소영은 단지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약학에 관해서는 유소영은 약왕 설 신의의 수제자였다. 평소에 잡다한 서적으로 약학을 배운 임유정이 약학을 통달하다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유소영이 장부를 관리하지 않았더라면 후작부가 무슨 수로 지금의 부유함을 누렸을까? 아민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이를 악물었다. 유소영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지?” 고장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유소영의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을 알 수 없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장군께서 곧 작위를 하사받는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왔네요.” 고장훈은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곧 입궁하여 폐하를 알현해야 하니, 식사는 나중에 같이하도록 하지. 밤에는 비록 여기서 머물지 않더라도 부인을 보러 오리다.”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문을 나설 때까지도 유소영은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장훈이 떠난 방 안. 아민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아씨! 세상에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답니까? 말끝마다 임유정 얘기에서 벗어나질 않으니,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임유정이 장군 부인인 줄 알겠어요! 게다가 동산방의 제비집이라니, 참으로 입이 고급지네요! 저들은 아씨를 재물신으로 알고 매일 은화를 뿌려주길 기대하나 봐요! 아씨도 정말 대단하세요. 말 몇 마디로 벌어들인 은화를 다 써버렸다고 믿게 하였으니, 앞으로 후작부에서 더 이상 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되었네요.” 유소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에게 속한 재물은 자신이 쥐고 관리해야 한다는 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 한 모금 들이켜고는 담담히 말했다. “장부 담당자에게는 다 말해두었겠지?” “어제부터 아씨의 분부대로 더 이상 그 관원들에게 은화를 보내지 말라고 전했어요. 아씨의 도움이 없이 장군께서 무슨 수로 진급할지 두고 보자고요!” 유소영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저녁부터 세자에게 침을 놓아줄 테니 준비하거라. 운이 좋다면 곧 청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야.” 아민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그럼 장군과 임유정이 밤에….” 생각만 해도 흥분이 차올랐다! 제6화 그날 저녁, 군영에서 돌아온 고장훈은 먼저 난향원을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유소영이 몸이 불편하여 일찍 탕약을 복용하고 잠에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안방. 유소영은 침상에 기대에 의서를 읽고 있었다.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밖에서 돌아온 아민이 말했다. “아씨, 장군은 제가 말해서 잘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장군을 피하는 것도 일은 아니에요.” 유소영은 손등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기침을 했다. “최대한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지.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보다는 나아.” 고개를 든 그녀가 물었다. “내가 당부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아민이 웃으며 답했다. “안심하세요, 아씨. 소인이 이미 세자를 청우각으로 모셨습니다. 비록 술 저장고가 지하에 있지만 아씨의 분부대로 대나무 통과 실로 본채와 연결시켜서 안채에서 나는 소리가 모두 저장고 쪽에서 또렷이 들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쿨럭….” 유소영은 세게 기침을 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씨, 풍한이 든 것 같은데 오늘 저녁은 침술을 잠시 미루는 것이 어떤가요?” 유소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괜찮으니 부축 좀 해주거라.” 청우각은 임유정의 거처로, 은밀한 추태를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도록 고 부인은 내원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오직 임유정의 측근 시녀만 남아서 시중을 들도록 했다. 그러고는 대외적으로 세자가 조용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오히려 유소영에게 편리를 제공한 셈이었다. 한밤중이 되자, 그녀는 아민과 함께 청우각 지하실에 도착했다. 지하실에 있는 술 저장고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평소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또 지하에 위치해 있어 더욱 은밀했다. 세자 고준형의 시신은 바로 이곳에 놓여 있었다. 희미한 촛불이 한옥관 속 사내의 얼굴을 비추자, 옥처럼 고운 피부와 맑고 우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민이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아씨, 세자는 참으로 빼어난 용모를 갖고 계시군요. 마치 잠든 선인 같아요!” 유소영은 한옥관을 등지고 침술 도구를 꺼냈다. 아민의 말이 과장된 건 아니었다. 고준형은 여섯 살 나이에 천하에 명성을 떨친 신동이었다. 그가 장원급제하여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던 날, 수많은 소녀들이 그의 풍채를 보려 모여들었고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기까지 했다. 그는 황제의 측근 신하로 지냈고, 또한 책사의 신분으로 군을 따라 북부로 출정해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했던 걸까, 고준형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서 번거로운 정무를 감당하기 힘들어졌고 북부 전쟁이 끝난 후로는 저택에 머물며, 황제가 필요할 때만 입궁하여 조정의 중요 사안을 논의했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지 않았다면 임 재상이 굳이 딸을 병약한 그에게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영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옷을 벗겨라.” 아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씨, 저더러 세자의 옷을 벗기라는 말씀인가요?” 유소영은 뒤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그럼 누가 해?” 아민은 바짝 긴장하며 간신히 손을 내밀어 사내의 허리띠를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 “안 되겠어요, 아씨. 소인은 못 하겠습니다. 세자께서 살아 계시다는 생각이 들면 제가 세자의 순결을 더럽히는 것 같단 말입니다!” 유소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마음에 잡념이 없다면 무엇이 두렵겠느냐?” 아민은 입꼬리를 비틀며 뒤로 물러섰다. “아씨, 소인은 범부라 마음에 잡념이 많습니다. 차라리 제가 나가서 망을 볼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재빨리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민이 도망쳤으니 유소영은 부득이하게 고준형의 옷을 직접 벗겨야 했다. 침을 놓아야 할 위치는 모두 상반신에 있었기에 상의만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손을 뻗었다. 사내의 허리띠를 푸는 건 처음이라 다소 손놀림이 서툴렀다. 하지만 침술을 시행하는 과정은 매우 순탄했다. 미리 서역에서 사온 약물에 담가두었던 은침은 경맥을 소통시키는 동시에 해독 효과가 있었다. 유소영의 침법은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반 시진 후. 그녀는 침을 모두 뽑고 아민을 불렀다. 그녀의 이마에는 이미 식은땀이 맺히고 손목은 시큰거릴 정도로 지쳐 있었다. “아씨!” 아민이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다. 유소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 먼저 나가자꾸나.” 말을 마친 그녀는 관 옆에 놓인 대나무통을 돌아보았다. 청우각. 임유정은 목욕을 하고 있었고 시녀 춘화가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부인, 세자는 술 저장고로 모셔졌습니다. 마님께서는 시신의 부패를 늦추기 위해 안에 얼음을 들여놓았으니 부인께서는 후사를 보는 일에 지장이 없도록 절대 그곳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알겠다.” 임유정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세자는 이제 죽었고 그녀는 앞을 보고 살아야 했다. “도련님은 돌아오셨느냐?” “예, 장군께서는 바깥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후, 목욕을 마친 임유정은 얇은 베치마를 입고 나왔다. 그 모습을 본 고장훈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뜨거워졌다. 임유정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비단 장막이 뜨겁게 겹쳐진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임유정은 고장훈의 허리를 꽉 안고 그의 귓가에 대고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황홀에 취한 고장훈의 표정이 그녀를 만족스럽게 했다. 그녀는 결코 유소영 같은 천한 출신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임유정은 회임만 하면 바로 유소영을 쫓아낼 생각이었다. 고장훈이 자신에게 더욱 깊게 빠져들게 하기 위해, 그녀는 더 간드러지게 교성을 질렀다. 제7화 다음 날, 영향원. 유소영과 임유정은 함께 아침 문안을 왔다. 고 부인은 다정하게 임유정의 손을 잡으며 관심을 표하면서도 유소영은 한 켠에 세워두고 무시로 일관했다. 아민은 고 부인이 속물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편애하며 둘째 며느리의 체면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유소영은 이미 익숙한 상황이라 고 부인의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홀로 차를 마시며 고 부인과 임유정의 대화를 들었다. “장훈이에게 작위를 하사한다는 교지가 어찌하여 지금까지 내려오지 않는 거지?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게 아니야?” 임유정은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안심하세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이번 작위 선정에 조정에서 거의 대부분 관원들이 도련님을 추천했다 하십니다. 폐하께서는 대신들의 의견을 가장 중시하시니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죠. 생각건대 예부에서 교지를 작성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니, 조급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 부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훈이를 추천한 관원들은 재상 나으리의 안면을 봐주신 것이겠지.” ‘봤지? 이게 바로 귀족가 규수의 능력이야. 조정의 일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지. 어디 상인의 딸 따위가 감히.’ 임유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친정에 가서 어머니를 뵈려 합니다. 들렀던 김에 아버지께 언제 교지가 내려질지 여쭤보고 오려고요. 그래야 어머니께서도 잔치 준비를 하시죠.” 고 부인은 너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그래야지.” 곧이어 고 부인은 유소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서 형님에게 감사드리지 않고 뭐 하고 있느냐.” 유소영은 찻잔을 내려놓고 미소 띤 얼굴로 유유히 말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형님.” 재상부. 서출인 임유정이 병든 적모에게 문안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녀는 먼저 아버지의 서재로 찾아갔다. 세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를 대하는 임 재상의 태도는 늘 냉랭했다. “아버지, 고장훈이 작위를 하사받는 건 이미 확정된 일이겠지요?” 임유정은 아버지의 책상으로 다가가며 다정하게 물었다. 임 재상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네 언니가 곧 입궁하게 될 터이니, 앞으로 재상부와 후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너도 이제부터 분수를 좀 지켜야지. 고장훈이 작위를 받든 말든,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임유정은 아버지가 적녀인 언니를 편애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도 친딸인데 억울했다. “아버지, 고장훈은 제 아이의 아버지가 될 사람입니다. 어찌 제가 관심을 안 할 수 있겠어요?” 쾅! 임 재상이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했다. “어리석은 것! 너를 고준형에게 시집보낸 것은 그가 능력이 출중하여 이 아비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가 죽었는데 내가 후작부를 도우리라 기대하는 것이냐? 내가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외손자니, 후작부의 작위이니 하는 것들은 재상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임유정은 서러움이 북받쳤다. “고장훈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입니다.” 임 재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혁혁한 전공?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야! 평담 전쟁은 2년이나 지속되었고 여러 대군이 함께 싸워서 이루어낸 성과이니, 결국엔 군량과 병력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이 기회에 네 큰 오라비의 길을 닦아주려 했는데, 결과는 어찌 되었지? 고장훈의 군량이 먼저 도착했어! 실력을 따지면 그자에게 무슨 재능이 있다고? 남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지. 네 지아비인 고준형은 계략으로 정주를 탈환하고 병상에 누워서도 전장을 지휘하며 무수한 군공을 세웠으니, 그게 진짜 재능이야!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구나. 그런 대단한 사위가 내 편에 섰더라면, 내가 조정에서 더 활개를 펼칠 텐데 말이다.” 임 재상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조정의 일을 어리석은 딸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누가 고장훈의 군량 운송을 도왔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감시관 쪽은 분명히 미리 언질을 해두었는데 누가 포위를 뚫고 고장훈을 도왔을까? “아버지, 전에 많은 대신들이 고장훈을 추천하였다고 하셨는데 이건 틀림없겠지요?” 임유정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래.” 확답을 들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럼 문제없어!’ “그럼 저는 이만 어머니께 문안드리러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임 재상이 일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작위 문제로 근래 황제는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는 신흥 귀족과 세가의 이익이 얽힌 복잡한 문제였다. 며칠 전 조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장훈을 추천했지만 요 며칠 사이 갑자기 풍향이 바뀌었다. 임유정에게 이를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아녀자가 조정의 일을 세세히 알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임 재상은 한창 적녀의 입궁 문제에 신경을 쏟고 있어 후작부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후작부로 돌아온 임유정은 고 부인에게 불려갔다. 유소영도 함께 있었다. 고 부인이 대놓고 물었다. “유정아, 재상께선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임유정이 웃으며 답했다. “안심하세요, 어머니. 변고는 없습니다.” 곧이어 고 부인은 못마땅한 눈으로 유소영을 노려보았다. “보아라. 이 일은 결국 네 형수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았니. 너희 유씨 집안이 아무리 부유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조정의 정보조차 캐내지 못하면서.” 임유정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 부인을 말렸다. “어머님, 그런 말씀 마세요. 사람마다 각자 할 일이 있는 법이죠. 유씨 집안도 나름의 장점이 있겠죠.” 고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피곤할 테니 먼저 돌아가 쉬거라.” 이때, 유소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교지가 여태 내려오지 않으니, 저는 여전히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여 저도 한몫 보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혼수를 모두 꺼내 형수께 드려, 이 일을 위해 힘써주셨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 말이 나오기 바쁘게 고 부인의 표정이 굳었다. 유소영의 혼수 중 몇몇 점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 부인의 손에 있었다. 애당초 유소영이 사치를 부린다는 구실로 혼수를 봉인해 지금까지 영향원의 창고에 보관해두었는데 고 부인은 암묵적으로 그것을 자신의 소유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유소영이 전부 임유정에게 내준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멈칫하던 임유정이 이내 얼굴을 펴며 웃었다. “동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이 천한 것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지? 장훈이 곧 작위를 받을 텐데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불안한 건가?’ 제8화 유소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 사양 말고 받아주세요. 어차피…” 그녀는 일부러 숨을 고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정도는 우리 집안에서 푼돈에 불과하거든요.” 고 부인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참으로 고약한 말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엄청난 재산이 고작 푼돈이라니! “되었다. 이 일은 네가….” “어머님! 부군의 출세와 관련된 일입니다. 제게도 뭔가를 할 기회를 주십시오!” 유소영은 격앙된 말투로 고집했다. 출세가 뜻하는 무거운 의미가 고 부인의 가슴이 와닿자, 고 부인은 순간 갑갑해졌다. 잠깐의 침묵 후, 고 부인은 임유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되었다. 유정이 네가 일단 먼저 받아 두거라.” 임유정은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예, 어머님.” 난향원으로 돌아온 아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었다. “아씨, 왜 혼수를 임유정에게 주신 겁니까?” 유소영은 곱디고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영향원에서 내 혼수를 언제 내놓겠어?” 그 말을 들은 아민은 더욱 분개해했다. 고 부인은 검소한 가풍을 실천한다는 말도 안 되는 구실로 유소영의 혼수를 봉인해 두고 돌려줄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이는 강제로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아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아씨, 혼수품들이 임유정의 손에 들어가면 혹 그 여자가 다 써버리면 어떡하나요?” 유소영은 확신에 찬 어투로 답했다. “감히 그러지는 못할 거야.” 이는 인간의 본성을 안다면 누구나 확신할 수 있는 문제였다. 임유정이 오늘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녀는 고장훈이 반드시 작위를 하사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유소영과 공로를 나누는 것을 허용할 리 없었다. 아민이 또 물었다. “그럼 언제 되찾아오실 건가요?” 유소영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때를 기다려야지.” 아민은 부지런히 유소영의 머리 장신구를 풀었다. “아씨, 오늘 저녁에도 세자께 침을 놓아드리러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소인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세자는 지금 들을 수 있으신가요?” 그건 유소영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동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무예를 익힌 사람이라면 침술 한 번에서 세 번 정도면 청력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세자처럼 병약하여 무공을 아예 모르는 분은 그 이상이 필요할 테지.” 아민은 약간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 “세자께서 빨리 청력을 회복하고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네요. 불륜 현장을 친히 보고 잡으셔야죠!” 그날 오후. 군영에서 돌아온 고장훈은 먼저 난향원을 찾았지만, 유소영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종에게 물었다. “부인은 어디 계시느냐?” 그는 아녀자로서 처소에서 부군의 귀가를 기다리지 않고 어딜 이렇게 돌아다니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종이 답했다. “부인께서는 친정에 가셨습니다.” 고장훈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불만이 극에 달했다. ‘분명 내가 작위를 하사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가서 친정아버지와 뭔가 일을 꾸미려는 것이야.’ 유씨 집안의 속셈은 너무나 뻔했다. 그동안 물심양면 뒷공작을 한 것은 모두 황실 상단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약 유소영이 처신을 잘한다면 작위 문제가 결정된 후, 유씨 집안을 도와주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유씨 저택. 아민이 서재 밖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안에서 유 대감의 분노의 호통이 들려왔다. “고장훈 그 망할 놈이 뭐가 어째? 감히 그런 식으로 내 딸을 모욕하다니!” 분노에 치를 떠는 유 대감에 비해 유소영의 표정은 담담하고 평온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말로 아버지를 달랬다. “크다고 생각하면 큰일이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에요. 사실 귀족가에 시집을 간 이상, 언젠가는 부군이 첩을 들일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양반가 사람이 저 하나만 바라볼 리 없으니까요.” 유 대감은 안쓰러운 눈길로 딸을 바라보았다. 그의 딸은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아비가 경솔했구나. 애당초 집안 배경이 비슷한 혼처를 골랐더라면 네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유소영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귀족 가문이든 평범한 집안이든 사람 마음은 변하기 쉬운 법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초심을 지키며 평생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어요?” 유 대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딸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그 자식이 형수랑 합방하는 걸 개의치 않는다는 거니?” 유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첩실을 들이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겉과 속이 다르고 어리석으며 오만한 것은 용납할 수 없죠. 하물며 그 사람은 그 형수를 위해 저를 내치려고 하는걸요.” “감히!” 유 대감은 분노를 참지 못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소영은 여전히 냉정함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속세는 늘 분주하고 시끄러운 법이고 사람 마음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법입니다. 우리 집안이 재상부와 권세를 비할 바는 못되니, 임유정을 품고 저를 내치려는 것도 인지상정이지요.” 유 대감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해서 넌 어찌 할 생각이냐? 이혼을 원한다면….” “부군을 바꾸려고요.” 유소영은 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싸늘한 웃음을 눈에 담았다. “누구로 바꾼다는 것이냐?” 유소영은 잠자코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고장훈이나 고 부인, 심지어 충용 후작보다도 더 센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으로요.” 유 대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딸은 그 죽은 이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로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제9화 영향원. 혼수품이 하도 많은 탓에 시종들은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며 물건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고 부인은 안방에 앉아 염주를 만지작거렸지만 마음속은 거센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시녀에게 물었다. “다 옮겼느냐?” 시녀가 답했다. “예, 마님.” 곧이어 눈을 뜬 고 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봉인은? 다 확인하였어?” “예, 봉인은 모두 멀쩡합니다.” 고 부인은 그제야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유소영의 혼수품 중 이미 절반 이상은 고 부인이 친정에 보태느라 써버린지 오래였다. 그래서 들키지 않기 위해 봉인 딱지를 붙여둔 것이다. 고 부인은 임유정에게 절대 딱지를 뜯지 말 것을 경고했다. 다행히 순종적이고 착한 임유정은 순순히 시어머니의 뜻에 따라주었다. 며칠 후, 작위만 하사받은 후, 다시 돌려달라고 하면 될 것이다. 청우각. 임유정의 시녀 춘화는 정원에 들어서는 상자들을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 이 많은 것들이 모두 부인 것이 되는 건가요?” 그러나 임유정의 얼굴에는 기쁨이 전혀 없고 오히려 초조함만 가득했다. ‘유소영 이 간사한 년! 장훈이 곧 작위를 받을 것을 알고 내 공로를 가로채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이것들은 모두 창고로 옮겨라. 절대 건들지 말고!”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다 뭐야?” 고장훈은 청우각에 도착하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정원에 있는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임유정은 즉시 표정을 바꾸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고장훈의 입가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유소영은 나를 깊이 연모하고 있는 것이야. 내 작위를 위해 혼수를 모두 꺼내다니.’ 임유정은 그의 표정을 관찰하며 말을 돌렸다. “하지만… 도련님의 작위 문제는 이미 확정된 일인데 이런 것들을 쓸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교지가 내려오면 돌려보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람들이 도련님께서 부인의 혼수로 작위를 바꾼다고 오해하여 평판이 안 좋아지지 않도록 말이죠.” 그 말을 들은 고장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형수님은 생각이 깊으십니다.” 임유정은 살짝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장훈이 작위를 성공적으로 하사받으면 공로는 모두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누구도 가로챌 수 없는 오직 그녀의 공로였다. ‘어리석은 것. 은화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해? 쯪!’ 달빛이 그녀의 말간 얼굴을 밝게 비추었다. 임유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도련님, 이만 쉬지요.”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또한 금기를 깬지 얼마 되지 않은 고장훈이었기에 약간의 유혹에도 마음이 간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한번은 서투르겠지만 두 번 하면 능숙해지는 법, 그는 임유정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임유정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장막 안에서 사내의 거친 숨소리와 여인의 교성이 겹쳐졌다. 한편, 지하실 술 저장고. 아민은 침을 제거하고 있는 유소영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씨, 나갔다가 다시 오는 게 어떨까요?” 친정에서 돌아온 후, 유소영은 또 친히 지하실을 방문했다. 전음통은 세자의 귀 옆에 놓여 있고 주변이 고요하니 위층에서 나는 소리가 지하실까지 전해졌다. 참으로 음란하고 난잡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소영은 저 위에서 즐기고 있는 자가 자신의 부군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듯, 마음에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반면 아직 어린 처녀인 아민은 낯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녀는 관 속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세자의 처지는 참으로 안타깝지만, 정말 준수하시네요!” 처음 세자를 보았을 때, 선인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는 여러 번 봤지만 여전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유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은침을 점검했다. 그녀가 무심코 말했다. “사내의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다방면으로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아민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씨의 말씀은… 세자께서… 능력이 부족하시다는 말씀인가요?” 유소영이 이어서 말했다. “임유정은 건강한 여인이지만, 후작부로 시집온지 3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어. 아민아, 명심하거라. 병약한 사내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는 게 좋아.” 그녀 자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아민은 좋은 사내에게 시집가길 바랐다. 얘기를 들은 아민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자의 귀가 약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피자,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착각이겠지?’ 결국 유소영의 말처럼 무공을 모르는 세자라면 적어도 침술을 세 번 진행해야 청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민은 유소영이 세자의 허리띠로 손을 뻗자, 재빨리 물러났다. 예의상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밖에서 망을 봐야 했다. 다음 날. 유소영은 평소대로 고 부인에게 문안드리러 갔다. 임유정은 일찍부터 와 있었다. 고 부인의 시선이 그녀의 배를 응시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기다려라. 듣기로 장훈이가 오늘 입궁했다고?” 전장이 끝난 직후, 고장훈은 군영에서 잠시 한직을 맡아 평소에는 군영을 돌보며 매일 조회에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부인인 유소영이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임유정이 먼저 답했다. “예. 도련님께서 말하길, 작위 문제 때문이라 합니다. 폐하께서 문무백관 앞에서 결과를 공표하신다네요.” 고 부인은 그 말을 들은 즉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임유정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일이 성사되려는구나!” 곧이어 그녀는 유소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멍하니 앉아서 뭐 하는 게냐? 당장 와서 네 형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지 않고?” 유소영은 자리에 앉은 채로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부군께서 궁에서 돌아오시면 우리 부부가 함께 형님께 감사인사를 해도 늦지 않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문지기의 전갈이 들려왔다.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제10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문 쪽으로 향한 가운데, 고장훈이 급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관복을 입은 모습은 꽤나 늠름하고 준수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고장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털썩 자리에 앉더니 찻잔을 들고 찻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살벌한 그의 표정에 고 부인은 미리 준비해 둔 축하의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 뿐이었다. 그녀는 의문의 눈초리로 임유정을 바라보았다. 임유정 역시 무슨 상황인지 몰라 조바심이 났다. 원래대로면 오늘은 작위를 하사받는 날이니, 고장훈은 기뻐해야 마땅했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오직 그가 차를 들이키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릴 뿐이었다. 이때, 유소영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그에게 물었다. “부군, 형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작위를 하사받게 될 거라고 하시더군요.” 쾅! 고장훈은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힘껏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은 퍼렇게 질려 있었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문제가 생긴 상황이었다. 고 부인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장훈아, 말을 해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니?” 오랜 침묵 끝에, 고장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작위는… 무산되었습니다.” “뭐라?” 고 부인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임유정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아버지께서는 분명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그 자식들이 중간에 다 말을 바꾸었습니다!” 고장훈의 성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는 고 부인을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 인간들은 원래 바람 따라 움직이는 갈대와 같은 자들입니다! 갑자기 한 가문에 두 개의 작위는 있을 수 없다고 하더니, 폐하께서도 이를 동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렸어요!” 유소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형님, 제가 관원들을 잘 구워삶으라고 혼수도 모두 드리지 않았습니까?” 임유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라고 일이 이리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고 부인은 분노에 이가 갈렸다. 너무 화가 나는데 화풀이할 곳이 없었다. 다시 임유정을 돌아보는 고 부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확실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머니, 저는….” 임유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확실하다고, 절대 변수가 없을 거라고 장담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아버지를 통해 들은 정보였을 뿐이다. 시어머니의 책망에 임유정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고장훈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이 일은 형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엔 그 자식들이 앞뒤가 다른 인간들이었기 때문이죠! 특히 새로 과거에 급제한 몇몇 진사놈들 말입니다!” 고 부인은 속으로 다소 원망이 남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장훈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방에 가서 푹 쉬도록 해.” 고장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그가 떠난 후, 유소영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잔뜩 실망한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아민은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씨, 그 사람들 표정 보셨나요? 정말 통쾌하네요! 아씨를 모욕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거죠!” 유소영은 시선을 먼 곳에 둔 채로 미소 지었다. “형제가 서로 우애하는 것은 집안에 고기가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지. 하지만 만약 고기가 단 한 조각뿐이라면 어떨까?” 그녀는 고장훈이 지금 이 순간 어떤 기분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고장훈은 난향원으로 돌아온 직후, 서재에 틀어박혔다. 오후가 되자, 그는 군영으로 나갔고, 그 이후로 유소영은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청우각. 임유정 역시 방에 틀어박혔다. 춘화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무릎 아래는 깨진 자기 조각들이 가득했다. 춘화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전혀 원망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임유정의 눈빛 깊숙이 음산한 빛이 스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아버지가 나를 속인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어….” 아니면 누군가가 손을 써서 관원들을 매수한 걸까? 유소영일까? 그럴 리도 없었다. 유소영은 고장훈을 깊이 연모하여 그의 출세를 위하여 혼수까지 바친 사람인데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조정을 좌우지할 만한 그런 큰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임유정은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지금 당장의 급선무는 빨리 회임을 하여 후작부의 작위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작위가 하나뿐인데 과연 고장훈이 작위를 양보하려 할까? 깊은 밤, 난향원. “아씨, 장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유소영은 장부를 덮고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고장훈은 먼지투성이인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우리도 빨리 아이를 가져야겠소.” 유소영은 즉시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장군, 정신이 혼미해지신 겁니까? 형님도 아직 회임 소식이 없지 않습니까?” 고장훈이 잠시 멈칫했다. 그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오늘 일에 자극받은 탓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대놓고 자신을 거절하는 걸 보면 어쩐지 자신과의 잠자리를 전혀 원치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나빴다. 그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붙잡았다. “언제부터 이리 관대해진 거지? 내가 밤마다 청우각에 머무는 것을 보고도 화도 나지 않는단 말이오?” “아니면 부인은 정녕 나를 붙잡아 두고 싶지 않은 거요?” 유소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로 그의 손길을 밀쳐냈다. “장군, 이건 후작부와 아주버님을 위한 일입니다. 제 서러움 따위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고장훈의 마음은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치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후작부를 위해서, 형님을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하겠지.”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뒤돌아서 방을 나갔다. 아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드디어 가셨네요. 방금 강제로 아씨를 취하려는 건 아닐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이유도 없이 왜 갑자기 아씨와의 아이를 원하는 걸까요?” 유소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배고픈 늑대는 많은데 고기는 적으니까.” 그러나 고장훈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바뀌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청우각. 임유정은 자신을 대하는 고장훈의 태도가 평소보다 냉랭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한번의 정사가 끝난 후, 그는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임유정은 힘껏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형님과의 혼사는 제가 원한 것이 아니었어요! 제 마음속에는 줄곧 당신이 있었단 말입니다.” 고장훈은 순간 벼락에 맞은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 임유정의 손길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하지만 닿을 수 없는 사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 당신의 아이만 낳게 해주세요. 제 그리움을 달랠 수 있게… 제발….” 고장훈은 잠깐 주저하는 듯했지만, 결국엔 임유정의 위로 쓰러졌다. 두 사람의 교성은 조용히 침대 밑의 전음통을 통해 저장고까지 전해졌다. 한옥관 내부.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