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GoodNovel Hoàn thành

이별하고 몇 년 뒤, 회사 회의실에서 자신의 아이 아빠인 전 남친 권지헌을 다시 마주치게 된 허설아. 허설아는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이...

Chương (1)

第1章

이별하고 몇 년 뒤, 회사 회의실에서 자신의 아이 아빠인 전 남친 권지헌을 다시 마주치게 된 허설아. 허설아는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이를 빼앗길까 두렵고 모든 걸 잃게 될까 두렵다. 허설아는 애초에 두 사람은 그냥 장난이었다는 권지헌의 말을 떠올리며 직장 내 상하급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권지헌은 주변을 맴도는 여자들이 단 한 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처음 허설아를 다시 본 순간, 권지헌은 허설아가 자신을 버리고 바로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허설아가 아파하길, 후회하기를 바라며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허설아가 벼랑 끝에 선 순간 겉에 다가간 권지헌은 허설아가 앞으로 아이와 함께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진실을 알게 된 그 순간, 권지헌은 줄곧 복수하고 있던 상대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네가 나한테 거리를 두라고 했잖아." "거리는." 권지헌이 허설아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마이너스일 수도 있는 거야." 제1화 허설아는 회사에 낙하산으로 온 상사가 자기 딸의 친아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 권지헌을 마주칠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부서는 젊고 능력 있는 상사가 임명된다며 시끌시끌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권율 그룹 총수 집안 도련님이라고 했다. 인생 이력 하나하나 일반 직장인들은 감히 따라갈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회의실에 서 있는 남자의 맞춤 정장은 원래도 늘씬한 남자를 더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이게 했다. 예전의 풋풋함은 이미 날 선 카리스마로 다듬어져 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위압감이 넘쳤다. 남자는 뼈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PPT 내용을 보며 여유롭게 설명했다.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렸다. 사람들 모두 상사에게 겁에 질린 첫인상을 보일까 봐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허설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빛이 나게 닦인 회의실 바닥은 숨을 곳은 커녕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허설아의 얼굴만 더 선명하게 비췄다. 권씨 집안의 그룹일 줄을 알았지만 그게 권지헌의 권 일 줄은 몰랐다. 허설아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숨이 턱 막혀왔다. 3년이었다. 3년 전에 헤어지고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 담당자 누구예요?" 단상 위에서 무심한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지헌의 시선이 앉아 있는 모든 직원을 훑었지만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도 답이 없었다. 권지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목소리 톤을 높였다. "본인이 맡은 프로젝트도 잊은 겁니까?" 허설아 옆에 있던 동료가 잔뜩 긴장한 채 덜덜 떨며 일어섰다. "대표님, 제 담당입니다." 착각일지는 몰라도 허설아는 고개를 든 순간 왠지 권지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에 허설아는 숨이 턱 멎는 듯했다. 권지헌은 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차갑게 말했다. "내용 보완이 필요해요. 어떻게 이렇게 작성한 걸 보고할 생각을 했어요?" 허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마 허설아를 못 본 듯했다. 지금의 허설아는 3년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허설아는 고개를 최대한 낮추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허설아의 눈앞에 갑자기 빛이 나게 닦인 고급 구두가 우뚝 멈춰 섰다. 마치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짜디짠 바닷물이 허설아의 숨결을 삼켜버린 듯했고 팔다리가 순간 굳어버렸다. 권지헌이 허설아 옆에 멈춰 섰다. 동료가 옆에서 변명했다. "대표님, 이미 고객 피드백은 통과한 상황이어서……" 들고 있던 리모컨을 책상 위로 툭 던진 권지헌이 고개를 들었다. 권지헌은 날 선 시선으로 허설아 옆에 있는 동료를 빤히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미숙한 기획안은 결국 미숙한 거예요. 고객을 핑계로 대충 넘어가는 게 기준이에요? 아니면 회사 일이 장난 같아요?" 고고하게 우위에 서서 평가를 내리는 듯한 시선은 허설아 옆에서 보고하는 동료가 아니라…… 허설아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 모두 권지헌의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발등만 쳐다보았다. 허설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권지헌이 다시 이어 말했다. "보완해서 다시 보고해요." "네, 대표님."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던 그때, 권지헌의 시선이 허설아에게 꽂혔다. 얼굴은 여전히 예뻤지만 예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지금은 깔끔한 오피스룩에 머리카락까지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지만 여전히 빛이 날 정도 하얀 피부에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단 한 번도 권지헌에게 향한 적 없었다. 권지헌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 이런 기획안 보고하면 알아서 책임져요." 늘씬한 손가락이 허설아의 책상 위를 불규칙하게 톡톡 두드렸다. 이건 권지헌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신호라는 걸 허설아는 알고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허설아는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다행히 권지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허설아는 종아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동료들과 자리로 돌아온 허설아는 자리에 앉아 물을 반 컵 벌컥벌컥 비우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권지헌이 지적한 기획안 중에는 허설아 팀이 맡은 프로젝트도 있었다. 거의 부서 전체가 야근 예약이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절규하듯 말했다. "부임 초반엔 원래 세게 잡는다더니 우리 완전 제대로 걸렸어. 설아 씨, 대표님이 왜 계속 우리 옆에만 서 있었는지 알아? 진짜 놀라 죽을 뻔했어!" 허설아는 잠시 멈칫했다. 권지헌이 옆에 서 있었던 건 아마 동료의 답변을 더 잘 듣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팀 프로젝트를 체크할 때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계속 허설아 옆에만 서 있었다. 허설아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눈이라도 마주칠 세라 도망쳤다. 하지만 권지헌은 이미 두 사람의 황당하고 짧았던 만남을 이미 다 잊은 듯했다. 아니면 왜 계속 허설아 옆에 서 있었을까. 신경을 쓰지 않아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권지헌은 건영대 경제학부에서 4년 내내 캠퍼스 킹 자리를 지킨 레전드 존재였다. 허씨 집안 큰딸인 허설아와의 열애는 당시 캠퍼스를 뒤흔들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설아가 권지헌에게 돈을 퍼부어서 몸을 바치게 한 거라고 수군거렸다. 허설아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권지헌은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같았다. 하지만 권지헌은 허설아가 주는 돈을 받은 적 없었다. 그러다 권지헌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허설아는 권지헌의 쇼핑 앱 계정에 접속하여 비싸서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사지 못한 물건이 있으면 선물로 사주려 했다. 그런데 쇼핑 앱에서 권지헌이 다른 사람과 나눈 개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상대는 권지헌을 다정하게 지헌 오빠라고 불렀다. 심지어 권지헌이 허설아를 좋아할 사람 같지 않다고 했다.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권지헌이 답하지 않았으니까. 선물도 예정대로 샀다. 생일 파티에서 선물을 받은 권지헌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고맙다는 말만 했다.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미리 결제하러 갔던 허설아가 룸으로 돌아오는데 안에서 비웃음 가득한 말들이 들려왔다. "허설아가 뻔뻔하게 지헌 오빠한테 들러붙지 않았으면 오빠가 저렇게 속물 같은 여자를 만날 리 없지." "맞아, 돈 좀 있다고 유난이야." 그때, 권지헌의 말이 허설아의 귓가에 때려 박혔다. "나도 사실 허설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권지헌의 말끝을 흐려버렸다. "지헌 오빠가 저런 졸부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했잖아!" 허설아는 그때의 기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프고 손발이 찌릿찌릿 저렸다. 그러다 마침 집안에 일이 생기면서 허설아의 아버지가 허설아를 해외로 보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3년 뒤에 돌아왔더니 낙하산으로 부임한 상사가 권지헌일 줄이야? 전엔 밥도 아르바이트나 장학금으로 겨우 사 먹던 권지헌이 권율 그룹의 외동아들일 줄은 허설아는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대표 사무실 안. 권지헌은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전체 직원 정보를 확인했다. 당연히 허설아도 있었다. 1년 전에 입사한 허설아는 화려한 이력과 뛰어난 능력 덕분에 입사 1년 만에 정규직 전환뿐 아니라 프로젝트 팀장까지 맡게 되었다. 권지헌은 굳은 표정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옆에 서 있던 비서 조민규가 권지헌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대표님, 분부하실 게 있으신가요?" 권지헌은 옆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말했다. "새로 부임해서 프로젝트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네요. 팀장들 소개 좀 부탁할게요." 조민규는 바로 알아듣고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야 허설아 이름이 나왔다. "허설아 씨는 나이가 어리고 본사에서 근무한 지는 1년밖에 안 됩니다. 원래는 해외사업부에 있었는데 실적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실적이 뛰어나?' 권지헌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권지헌 기억 속 허씨 집안 큰따님이 체면을 굽히고 입사했다니? 실적이라는 게 허씨 집안 돈으로 산 건 아닌지도 몰랐다. 어차피 돈으로 모욕감을 주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까. 또한 감정이 깊어질 때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여자였다. 권지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민규가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허설아 씨가 거의 다 도맡았는데 이사회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조민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허설아는 인턴 시절부터 조민규가 직접 챙기며 키운 편이었다. 조민규는 허설아처럼 말수가 적고 튀려고 하지 않고 일을 깔끔하게 하는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을 높이 샀다. 조민규가 잠시 주저하다 몇 마디 거들었다. "혹시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마음껏 혼내시고 기회만 한 번 더 주시면 됩니다." 권지헌이 싸늘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치켜올렸다.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벌써 누군가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건 여전한 듯했다. 조민규는 권지헌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허설아 씨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병이 많이 위중하십니다. 어린 딸도 하나 있는데 아이도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남편은 또……" 권지헌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차갑게 말을 끊었다. "조민규 씨,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요?" 조민규는 화들짝 놀라서 거듭 사과하고 권지헌이 일부러 난처하게 하려는 뜻이 아닌 걸 알고는 허리 숙여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은 대표님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우니 조심히 행동해야겠어.'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권지헌은 조금 전 흘렸던 커피를 닦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 허설아의 직원 정보를 클릭했다. 증명사진은 대학 시절, 허설아가 같이 가자고 졸랐던 그날 찍었던 사진이었다. 스크롤을 더 내려 혼인 상황란에 멈췄다. 기혼이었다. 제2화 부서 전체가 새로 부임한 상사의 압박에 야근을 택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특히 권지헌이 지목까지 한 몇 명의 팀장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퇴근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허설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딸 연희가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전화였다. 허설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연희야, 할머니랑 같이 먼저 자. 엄마 좀 늦게 들어가." 연희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엄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 연희랑 할머니 밥 조금만 먹을게." 허설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곧 울 것 같은 느낌에 허설아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머릿속엔 계속 연희의 앳된 목소리가 맴돌았다. 허설아는 엄마 성을 따랐고 허설아의 아빠는 연 씨였다. 아빠인 연동근이 돌아간 뒤 연동근을 그리워하던 허설아와 허민정은 연희에게 아빠의 성을 따르게 했다. 사실 연희가 권지헌의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권지헌 본인조차 이 세상에 그의 핏줄인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올해 두 살인 연희는 면역 계통의 문제가 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다. 의사는 타고난 귀한 몸이라며 많은 돈을 들여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체질이라 했다. 연희를 데리고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매달 약값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하지만 딸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았다. 허씨 가문이 파산한 뒤, 허설아는 전에 갖고 있던 가방, 주얼리, 차와 집까지 팔아서야 겨우 일부 채무를 갚을 수 있었다. 지금은 허민정과 연희까지 약을 먹어야 했고 가족 모두가 허설아 한 사람의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지헌을 본 순간 놀라서 도망가고 싶고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 허설아는 돈이 필요했다. 옆자리 동료가 연희 전화를 받던 허설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설아 씨 어려 보이는데 딸이 벌써 그렇게 큰 줄 몰랐어. 아이 아빠는?" 주변 사람들 모두 고개를 들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허설아는 가볍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집에 누워 있어. 매달 약을 써야 하거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분위기가 넘쳤다. 동료들 모두 입을 꾹 닫았다. 다들 허설아의 딸과 어머니의 몸이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온 집안에 환자 뿐이고 허설아 혼자 먹여 살려야 한다는 말이잖아? 허설아도 진짜 강인했다. 동료들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빨리 퇴근하기 위해 남은 일에 몰두했다. 부서 밖에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인 구두가 보였다. 맞춤 수트를 입은 남자가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수화기 너머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보세요? 지헌아? 내 말 들려? 엄마가 주말에 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 먹으래." 권지헌은 급히 방향을 틀어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간 없어." "그럼 다다음 주는?" "그때도 안 돼." 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밥 먹으러 오라는 강시우 엄마의 초대는 사실 핑계였고 권지헌에게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회사를 맡자마자 벌써 이렇게 죽기 살기로 일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저번에 설아한테 같이 밥 먹자고 했을 때도 시간이 없다 하더니 누가 보면 다들 대통령 선거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 허설아 이름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강시우는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순간적인 실수였다. 어떻게 상대가 허설아와 사귀었던 권지헌이라는 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강시우는 이를 꽉 깨물고 입을 탁 쳤다. '망할 놈의 입!' 절친인 강시우와 허설아는 대학 시절에도 맨날 같이 붙어 다니며 게임을 하곤 했다. 전엔 권지헌조차 두 사람 사이를 오해할 정도였다. 심지어 몰래 신경 쓰고 견제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허설아가 강시우를 남자로 안 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번은 농구할 때 강시우를 호되게 혼내줬는데 나중에 술을 마신 뒤에야 강시우가 이런 말을 했다. "허설아가 예쁘긴 한데 누가 버텨내겠어? 성격이 난리도 아니야. 조금만 엇나가면 바로 따귀가 날아와. 지헌아, 설아가 네 뺨은 안 때리지?" 옆에서 누군가 바로 말했다. "허설아가 지헌이를 깍듯하게 모셔도 모자랄 판에 뺨을 때려? 간덩이가 아무리 부어도 그건 못 하지!" "하긴." …… 강시우가 막 다른 화제로 넘기려던 찰나, 권지헌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씨 가문 파산했어?" 강시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응, 몇 년 됐어. 지헌아, 허설아 이미 결혼까지 했는데 너 혹시 아직 못 잊은 건 아니지……" "못 잊긴 뭘 못 잊어? 성동의 땅? 아니면 성북의 공장?" 이건 다 강원 그룹이 노리고 있는 프로젝트들이었다. 그 말을 들은 강시우는 정신을 차리고 흥분해하며 말했다. "지헌아, 친구한테 국물이라도 좀 남겨줘야지!" 권지헌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강시우는 여전히 진땀이 났다. '앞으로는 권지헌 앞에서 허설아 얘기를 꺼내면 안 되겠어.' - 프로젝트 수정을 끝내고 나니 깊은 밤이 되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주변 동료들은 전부 퇴근했고 커다란 사무실에 허설아 혼자만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허설아는 고개를 돌리며 뻐근한 목을 풀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사무실 컴퓨터들이 다 꺼졌는지 확인하고 의자들도 전부 제자리에 밀어 넣고 나서야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밤 깊은 시간, 빌딩 안은 유난히 적막했다. 허설아의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뒤에서 허설아의 구두 굽 소리보다 더 묵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남자 구두인 듯했다. 허설아는 모서리를 도는 순간 슬쩍 돌아보았다. 뒤쪽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꽤 크고 머리가 허설아보다 거의 한 뼘 정도는 더 위에 있었다. 남자였다. 아무리 CCTV가 있다고는 해도 늦은 밤에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이 층에 올 리도 없고 방금 허설아가 분명 부서 사람들 모두 퇴근한 걸 확인한 상황이었다…… 허설아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여름에 팔뚝에 솜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전에도 건물에서 심야에 퇴근하던 직원이 변태를 마주쳤다는 뉴스가 난 적 있었다. 그 뒤로 야근은 되도록 12시를 넘기지 말라는 공지가 내려왔다. 허설아는 오늘 새벽 한 시 반까지 야근했다. '이렇게 재수 없는 건 아니겠지?' 허설아는 덜덜 떨며 휴대폰을 꺼내 일부러 전화하는 척 연기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보세요? 자기야, 어디까지 왔어? 퇴근했으니까 빨리 데리러 와. 나 너무 졸려. 거의 도착했다고?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착각일지 모르지만 통화를 마치자 등 뒤에서 따라오던 발소리가 정말 멈췄다. 허설아는 안도의 숨을 쉬며 뛰다시피 엘리베이터로 달려가서 덜덜 떨며 1층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 화면이 켜져 있고 서비스센터의 번호가 보이다가 화면이 꺼졌다. 엘리베이터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에 있던 사람은 방향을 틀어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공간에 라이터 불빛이 탁 튀더니 담배 연기가 피어올라 권지헌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가렸다. 잠시 뒤,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가 손가락에 닿자 권지헌은 담배를 털어 끄고 정신을 다잡았다. 이 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그냥 내려와 본 것뿐인데 야근하던 사람이 허설아일 줄은 몰랐다. 아픈 남편 먹여 살리느라 꽤 열심히 사는 듯했다. 권지헌은 휴대폰을 꺼내 조민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앞으로 자정 12시 넘기는 야근 시간은 야근 수당이 없다고 공지 내려요." 제3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허설아는 조용히 씻고 작은 방으로 가서 허민정과 깊이 잠들어 있는 연희를 확인했다. 허민정이 얼굴을 찡그린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 배고프지? 내가 라면 끊여줄게." 허설아는 바로 일어나려는 허민정을 눌러 앉혔다. "밥 먹었어요. 더 자요." 허민정은 그제야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일하는 허설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허민정은 평소에 연희를 데리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허씨 가문이 파산한 뒤, 허설아는 허민정과 연희를 데리고 회사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오래되고 작은 집을 하나 세 맡아 지내고 있었다. 허설아는 주방에 가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불도 켜지 않은 채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회사 게시판에는 온통 권지헌 얘기뿐이었다. 허설아의 휴대폰도 이미 권지헌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낙하산으로 부임한 상사가 잘생기기까지 했다며 게시판에는 동료들이 찍은 권지헌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밝혀진 과거 자료들은 번지르르한 것이었다. 허설아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다. 대학 시절엔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집안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신성 금융을 창업해 아시아 최연소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권율 그룹에서 유일하게 공개한 후계자가 되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다? 몇 년 동안 허설아는 권지헌이 가난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지헌에게 돈을 쓸 때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예민하게 생각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결국 다 도련님의 장난에 불과했던 거였다. 허설아는 권지헌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사실 허설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에도 두 사람은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기품 넘치고 우아한 권지헌은 성적도 우수해서 전국 최고 점수로 건영대에 입학해서 건영대 명문학과에 진학했다. 제멋대로에 세속적인 허설아는 공부에도 관심이 없어서 건영대가 모집 정원을 늘린 덕분에 점수 커트라인이 제일 낮은 예술대생으로 입학한 것이었다. 지금도 똑같았다. 같은 회사 상하급 관계라 해도 권지헌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어 허설아 같은 일개 직원이 감히 손 닿을 수 없는 고고한 존재였다. 심장이 누군가 움켜쥔 것처럼 욱신거렸다. 컵라면의 뜨거운 수증기가 차오르며 허설아의 마음도 왠지 서글퍼졌다. 허설아는 게시판을 끄고 면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 다음날, 조민규는 회사 단톡방에서 야근 수당 공지를 배포했다. 제한 시간이 12시 이후였기에 영향받은 직원은 많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서까지 야근하는 직원은 몇 없었다. 허설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동료 안초희가 돌아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러면 설아 씨 야근 수당 많이 적어지는 거 아냐?" 안초희는 허설아의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처음엔 나이도 어린 허설아가 악착같이 야근하는 모습을 보며 일부터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해서 반감도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허설아가 한 달 월급으로 두 사람의 약값, 월세, 생활비에 빚까지 모두 감당해야 하고 남는 돈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야 야근 수당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앞으로 심야 야근을 못 하게 되면 허설아는 경제적 수입 일부가 줄어드는 셈이었다. 안초희가 허설아를 툭 치며 말했다. "대표님한테 가서 신청해 보는 건 어때? 어려운 상황 얘기하면 이번 달까지만 예외로 야근하게 할 수도 있잖아?" '권지헌을 찾아가라고?' '무슨 말을 할 수 있는데?' 야근 수당 몇십만 원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신세여서 제발 봐달라고 사정해야 될 지경이라고? 백번 양보해서 권지헌이 들어줄 의향이 있다 해도 허설아는 감히 입밖에 뱉을 자신이 없었다. 허설아는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알바라도 알아보면 돼. 앞으로는 일찍 퇴근해서 연희랑 같이 시간 보내면 돼." 허설아의 딸 얘기에 안초희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 애 옷 몇 벌 좀 작은 게 있는데 연희한테 줄까? 다 한 번밖에 안 입은 거니까 너무 꺼리진 마." 예전 같았으면 부잣집 따님인 허설아가 언제 남이 입던 옷을 받았을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허설아가 입고 있는 옷은 다 허씨 가문이 파산하기 전에 산 것이었다. 새 옷을 살 여유 따윈 없었다. 허설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고맙지. 애들 옷은 한 번 입었던 게 부드럽고 깨끗해서 좋아. 고마워, 초희 씨." 안초희도 집안 형편이 좋아서 포르쉐를 몰고 출근했다. 안초희가 한 번밖에 입지 않았다는 옷들은 거의 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명품들이었다. 허설아는 한 번 씻어서 연희에게 입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허설아가 기꺼이 받아주자 안초희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허설아가 싫어할까 봐 걱정되면서도 도와주고 싶었던 안초희였다. 새 옷을 사주려니 오히려 무례하거나 허설아가 답례를 고민하느라 부담이 될 것 같았기에 작아서 입지 못하는 새 옷을 주는 게 딱 좋을 듯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이상 허설아가 아무리 권지헌을 마주치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날 밤 잠을 설친 허설아가 커피 한 잔 타려고 탕비실에 들어서 고개를 든 순간, 그곳엔 이미 카리스마 넘치는 권지헌이 이미 서 있었다. 탕비실이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키가 크고 근육질인 권지헌은 존재 자체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지금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허설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시선을 떨군 채 입을 열었다. "대표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권지헌은 무덤덤하게 허설아를 쓱 훑어볼 뿐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리를 비켜줄 기색도 전혀 없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린 허설아가 얼음을 추가하고 탕비실을 나가려는데 권지헌이 차갑게 말했다. "기획안 수정은 끝났어요?" 허설아는 컵을 꽉 움켜쥔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네, 조금 있다가 가져다드릴게요." 권지헌이 무슨 괴물이라도 되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권지헌이 차갑게 말했다. "괜찮으니 메일로 보내요. 너무 많이 엮이고 싶지 않네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뒤로 살짝 기대가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모습은 여유로운 품격까지 느껴졌다. 권지헌의 바짓단과 구두를 쳐다보던 허설아가 위로 시선을 옮겼다. 맞춤으로 제작된 수트 바지와 수백만 원짜리 금속 벨트는 권지헌을 더 기품 넘치게 했다. 아무리 허씨 가문이 파산했어도 허설아는 권지헌이 온몸에 걸친 것들을 더하면 수천만 원은 족히 된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권지헌의 움직임 때문일까, 허설아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권지헌의 벨트 아래쪽으로 향했다…… 무시할 수 없는 크기였다. 시선 한 번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허설아는 빠르게 시선을 거두었다. 연애하던 시절 두 사람은 그야말로 당돌했고 절제도 없었다. 허설아는 온갖 취향을 다 시도해 봤고 그러다 뜻밖에 연희가 생긴 것이었다. 뜻밖에 찾아온 거라 해도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라며 허설아는 소중히 여겼다. 더 위로 시선을 옮기자 권지헌의 목덜미에 남은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전에 권지헌은 허설아가 목에 흔적을 남기는 걸 싫어했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은 저런 흔적을 남긴 채 당당하게 출근하다니. 하긴, 권지헌 같은 남자 주변에 여자가 없을 리 없었다. 학생 때도 그랬는데 권율 그룹 후계자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권지헌에게 몰려드는 뛰어난 여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허설아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권지헌이 많이 엮이고 싶지 않듯이 허설아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허설아는 가슴을 찌르듯 숨 막히게 아픈 통증을 꾹 누르며 싱긋 웃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일 외에는 대표님과 엮일 이유가 없죠." 제4화 허설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권지헌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 리 없었다. 그저 뚫어지게 쳐다보는 권지헌의 시선에 온몸이 굳는 듯했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허설아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허설아의 뒷모습을 보던 권지헌이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 허설아는 원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쓰다고 마시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었다. 실핏줄이 가득한 눈으로 점점 사라지는 허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권지헌은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권지헌은 휴대폰을 꺼내 강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헌아, 무슨 일이야?" "허설아, 누구랑 결혼했어?" 전화기 너머 강시우는 권지헌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물음에 얌전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외국에서 혼인신고 했대…… 임신한 걸 알고 그냥 결혼했다던데 나도 설아 남편 본 적 없어." "언제쯤 일이야?" 강시우는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답했다. "그, 그게 너랑 헤어진 뒤에 설아가 남편이랑 같이 해외에 갔다고 들었어……" 강시우도 더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권지헌과 헤어지자마자 초고속 결혼과 임신이라니. 아무리 권지헌이 허설아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수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강시우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권지헌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신호음에 강시우는 도리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권지헌이 계속 캐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강시우는 결국 허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헌이가 네 남편 얘기 물어봤어." 바로 허설아의 답장이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남편은 게이가 아닐 거야." 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 두 사람이 어쩌다 또 만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강시우는 진흙탕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 퇴근할 때까지 권지헌은 메일을 받고도 잠잠했다. 어젯밤 일이 떠올리자 여전히 가슴이 철렁한 허설아는 칼같이 정시에 퇴근하기로 했다. 허설아가 컴퓨터를 끄는 걸 본 안초희가 놀라며 물었다. "오늘은 야근 안 해?" "안 할래. 집에 가서 연희랑 놀아주려고." 두 사람이 웃고 떠들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데, 하루 종일 다시 마주치지 않았던 권지헌을 하필이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안초희와 허설아는 웃음기가 싹 가신 채 잔뜩 긴장해서 옆에 서 있었다. 다행히 권지헌은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이어폰을 낀 채 통화 중이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꼭 같이 식사할게요. 네, 걱정 마세요. 장미 사 가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에서 상대가 권지헌이 아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3년 전, 허설아도 침대 위에서나 권지헌이 이렇게 다정하게 달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아마 권지헌 목에 흔적을 남긴 여자일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몇십 초가 눈 깜짝할 새에 흐르고 권지헌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안초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부러운 듯 말했다. "대표님 방금 여자 친구랑 통화하신 거겠지? 저렇게 다정하시다니. 아무리 냉정한 남자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한없이 부드러워지네." 허설아는 잠시 멈칫하다가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그렇겠지." 차에 태워주겠다는 안초희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허설아는 비좁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갑자기 강시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 조민규가 직원 정보를 소개할 때 가족 상황을 언급한 모양이었다. 전에도 다른 한 상사가 예쁘장하고 도도한 남다른 분위기의 허설아는 집안도 좋고 돈이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승진이나 월급 인상 기회에 허설아를 배제한 적 있었다. 그때도 조민규가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도와주었기에 허설아는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권지헌이 남편 얘기를 물은 건 조금 뜻밖이었다. 허설아의 남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전에 연동근을 데리고 해외로 치료하던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같은 병을 앓는 환자를 만난 적 있었다. 양가 어른의 마지막 바람은 자식들이 결혼하는 것이었다. 허설아와 상대 환자의 아들은 병상 앞에서 양가 아버지에게 꼭 결혼할 거라고 약속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환자는 세상을 떠났고 허설아도 그 남자와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혼인 상황은 허설아가 대충 둘러댄 말일 뿐이었다. 대외적으로 허설아는 항상 유부녀였다. 그때, 허설아는 이미 연희를 낳은 뒤였다. 이 사회에서 남편이 무책임하고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여성은 동정의 대상이었다. 혼전 임신으로 아이 아빠조차 찾지 못하는 여자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마련이었다. 허설아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상관없었지만 사람들이 연희를 색안경을 끼고 보길 원하지 않았다. 쓸 일은 없다고 해도 아이에게 명의상의 아빠가 필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연희의 존재를 절대 알리지 않을 것이다. 권씨 가문 같은 집안은 연희의 존재를 알게 되면 허설아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가거나 모녀를 모욕하거나 아이를 홀대할지도 몰랐다. 어떤 가능성이든 열려 있었다. 권씨 가문은 딸인 연희를 빼앗아 가도 귀하게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허설아는 재벌가에서 아이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마음 한구석에 늘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권지헌의 목적이 무엇이든 허설아는 상관없었다. 허설아에게 중요한 건 딸 연희뿐이었다. - 권씨 가문. 권지헌은 들고 있던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 다발을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희수에게 건네며 짧게 말했다. "엄마가 원하던 꽃이에요." 박희수는 깜짝 놀라서 꽃을 받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원하던 거라니? 귀국하고 나서 계속 집에 돌아오지도 않고 혹시 엄마는 잊은 거야?" "손 씻고 올게요." 권지헌은 말하고 바로 돌아서서 화장실로 향했다. "못된 녀석!" 박희수는 투덜대면서도 이내 다시 미소를 띤 채 들고 있던 꽃다발을 옆에 있는 강지연에게 건넸다. "자, 지헌이가 산 꽃이니 네가 받아. 이런 생화는 젊은이들이 들고 있어야 어울리지, 난 이제 너무 늙었어!" 강지연의 예쁘장한 얼굴에 수줍음과 놀라움이 가득 번졌다. 강지연은 꽃을 받지 않고 손을 씻고 나오는 권지헌을 힐끗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이모, 지헌 오빠가 이모한테 선물한 건데 제가 받으면 안 되죠.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무슨 나이가 많다고 그러세요?" 박희수는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었다. 권지헌의 차가운 말보다 강지연의 살가운 말이 훨씬 듣기 좋았다. "받아, 원래 너 주려고 사라고 한 거야." 강지연이 밥 먹으러 온다는 말에 권지헌에게 꽃을 사 오라고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권지헌이지만 연애를 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평소에도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박희수는 애간장이 타기 시작했다. 권씨 가문 장남이자 장손인 권지헌은 권씨 가문 큰아들의 외동아들이었다. 권씨 가문 어르신 권호승은 아들이 셋 있었고 슬하에 손자 넷과 손녀가 하나 있었는데 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중 어린 동생들은 그렇다 쳐도 나이가 좀 있는 동생들은 큰형인 권지헌이 결혼하지 않았는데 먼저 갈 수 없다며 버티고 있었다. 박희수도 하나뿐인 아들인 권지헌이 빨리 가정을 꾸려 대를 이어주기를 바랐다. 강지연 눈에는 온통 권지헌뿐이었다. 권지헌은 분위기가 남달랐다. 정장을 벗자 안에 입고 있던 조끼가 완벽한 몸매가 도드라지게 했고 손짓과 행동 하나하나가 형용할 수 없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지헌 오빠, 이 꽃… 내가 받아도 돼?” "네 멋대로 부르지 마." 권지헌이 고개를 들고 빨개진 강지연 얼굴을 마주 보았다. "너한테 주는 꽃 아니야. 갖고 싶으면 직접 사." 강지연은 불쌍한 척 아랫입술을 깨물며 불쑥 말을 꺼냈다. "지헌 오빠, 허설아 아직도 기억해?" 제5화 대학 시절, 강지연은 권지헌을 보러 건영대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매번 갈 때마다 오빠인 강시우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그때 권지헌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여자를 종종 보곤 했다. 키가 크고 몸매도 좋고 화려한 옷차림에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하고 눈부신 여자는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강지연은 강시우를 통해 그 여자가 바로 권지헌 여자친구이자 미대생인 허설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차갑고 고고하고 기품 넘치는 권지헌이 보기만 해도 속물 같고 제멋대로인 재벌 집 딸과 사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시우는 권지헌이 가난하긴 하지만 허설아가 돈을 펑펑 쓰면서 만나는 거라 했고 강지연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다 언젠가 협력하면서 권지헌이 사실은 권씨 가문 장손이고 미래 권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지연은 권지헌과 허설아가 잠깐 즐기는 사이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나중에 권지헌에게서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웬일인지 강지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권지헌이 고개를 들고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강지연은 몸서리를 쳤다. 권지헌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올라갈게요. 앞으로 꽃 선물할 거면 내 핑계 대지 마요." 박희수는 언짢은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지연이에게 꽃 좀 선물한 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 권지헌은 이미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지연의 눈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박희수가 강지연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지연아, 방금 네가 말한 허설아라는 사람 누구야?" 박희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강지연은 방금 말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처럼 권지헌을 만났는데 화나게 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래전 동창이에요. 어머님, 방금 지헌 오빠에게 권율 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다는 말 못 했는데 혹시 반대하는 건 아니겠죠?"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이따가 내가 말해줄게." "고마워요, 이모." - 위층, 권지헌 서재. 컴퓨터 화면에는 그룹 재무 보고서가 롤링되며 넘어가고 각 프로젝트팀의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권지헌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증가율이 가장 높은 허설아팀에 시선이 향했다. 낮에 본 허설아는 많이 말라 있었다. 전에도 표준 체형인데 종종 다이어트한다고 떠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깨와 등이 겨우 A4 용지 한 장 정도로 말라 있었다. 프로젝트 기획안 옆에 적힌 담당자의 이름이 허설아인 것을 본 순간 미묘한 감정 변화가 생겼다. 그런데 진짜 허설아일 줄이야. 예술 전공인 허설아는 전에도 공부에 큰 흥미가 없었다. 학교 다닐 때도 늘 어차피 집에 돈이 평생 써도 남을 정도로 많아서 절대 일을 안 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심지어 권율 그룹에서 일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더 놀라운 건 허설아의 기획안이 모든 팀 중 제일 뛰어나다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허설아와 사귄 건 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허설아가 죽어라 매달린 탓에 동의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학 졸업 후 권율 그룹으로 돌아가면 허설아와 헤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기는 의미가 달라졌다. 열정적이고 해맑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꽃 같은 허설아만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도도한 허씨 가문 아가씨가 권지헌 앞에서는 유난히 온순하고 얌전했다. 두 사람은 수도 없이 광란의 밤을 보냈고 놀랍게도 허설아가 권지헌의 모든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권지헌은 마치 열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허설아가 좋아졌다. 권지헌은 미래를 계획하며 심지어 졸업 후 먼저 헤어졌다가 허설아에게 정식으로 정체를 밝히려고 했다. 허설아가 용서하지 않으면 허설아에게 아주 아주 많은 돈과 사랑을 주려 했다.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허설아의 유일한 해결 방법은 바로 돈이었다. 수업은 대리 출석을, 과제는 대리 작성을, 택배조차 사람을 시켜 대리 수령했다. 허설아는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믿었다. 권지헌에게 사귀자고 할 때도 당당하게 돈을 줄 수 있다고 말했었다. 다만 허씨 가문 열 개를 합쳐도 권씨 가문 1년 신탁 비용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버림받은 쪽은 권지헌이었다. 허설아는 미련도 없이 매정하게 떠났다. 권지헌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고 짐을 옮기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권지헌은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야 허설아가 해외로 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권지헌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난 것이다. 강시우조차 허설아가 출국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허설아는 현질로 풀세팅해서 장비가 무적인 게임 아이디까지 강시우에게 팔아버렸다. 권지헌은 기가 막혔다. 먼저 다가와서 권지헌의 세계에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더니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이다. 너무 어이없었다. 권지헌은 허설아가 건영대 비주얼 원탑이자 어려서부터 떠받들려 살아온 권씨 그룹 후계자인 자신을 이렇게 두고 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떻게든 허설아를 찾아보려 했지만 전송한 모든 메시지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허설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싶어 권씨 가문의 인맥을 미리 동원해 찾을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옆 침대에서 강시우가 조용히 수화기를 움켜쥐고 전화받는 소리가 들렸다. 허설아의 전화였다. 그 순간, 권지헌 마음속엔 들불처럼 번지는 증오만 가득했다. 권지헌의 이성을 집어삼키고 자신마저 태워버릴 기세였다 그 통화는 권지헌을 한없이 비웃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누구도 허설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회사를 물려받는 건 일찍 계획된 일이었다. 다만 허설아가 권율 그룹에 있을 줄은 몰랐다. 허설아를 본 순간 권지헌은 굳어버렸다. 허설아가 지금 예전보다 못 하게 지낸다고 속 시원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시가 박힌 듯 답답했다. 그리고 권지헌과 헤어지자마자 결혼했다니. 권지헌은 허설아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과 급하게 헤어진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아이까지 낳았다. 전에 허설아는 아이를 안 좋아한다고 늘 말했다. 둘만의 세상을 충분히 즐기고 아이를 고민하겠다고 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마 권지헌의 아이가 아니었을까. 다른 남자의 아이는 임신하자마자 낳는 걸 보니. 가슴 한가운데 무거운 바위가 짓누르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숨이 턱 막힌 권지헌은 발을 들어 책상 다리를 탁 걷어찼다. 허설아, 아주 대단해. - 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박희수가 접시를 들고 들어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 지연이 마음에 안 들어? 평소에 강시우랑도 사이가 좋아서 사돈 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박희수는 밥도 먹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들이 걱정되었다. 다른 집안이었으면 권지헌의 이런 성격을 받아주기 힘들 것이다. 박희수와 권지헌은 가까운 모자 관계가 아니었다. 권지헌은 어린 시절 권호성 옆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후에는 일 때문에 바빴다. 최근에는 후계자 자리까지 넘겨받으면서 더 차가워지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박희수는 이런 아들이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권지헌은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 싫어요." 권지헌은 이런 부류의 여자들이 익숙했다.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욕망이 번뜩이는 모습이 진저리가 났다. 문득 다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과거에는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차갑기만 한 눈은 권지헌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어가게 했다. "다음부터 집에 손님이 있으면 미리 얘기해요." 손님이 있었으면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싫어도 아가씨한테 예의는 갖춰야지!"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니 박희수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짧게 답했다. "손님인지 나인지 알아서 선택해요." 박희수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분노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참 뒤, 박희수가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성격 참아줄 여자애가 몇이나 있겠어. 지연이가 너 좋아한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권지헌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네." 고개를 든 박희수는 권지헌 목에 남은 흔적을 발견했다. "너 목에 이거……” 제6화 권지헌은 서랍을 열고 알레르기 약 포장지를 뜯어 약을 한 알 삼켰다. "알레르기예요." 박희수는 권지헌 목에 난 자국을 보고 드디어 권지헌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집에 데려오기 불편한 거라 잠시 기대했다. 그런데 알레르기일 줄이야. …… 박희수는 약간 실망한 듯했다. "지헌아, 지연이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대. 네가 자리 마련해줘." "정식 입사 절차 밟으라고 해요. 면접만 통과하면 돼요." 박희수는 언짢아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지연이도 명문대 출신인데 인턴으로 입사하는데도 절차 밟아야 해? 지헌아, 좀 그냥 봐주면 안 돼?" 권지헌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안 돼요." 강지연은 외모도 예쁘고 집안도 수준이 나름 맞는 편이고 무엇보다 몇 년째 권지헌을 좋아했다. 도대체 뭐가 싫다는 걸까? 권지헌을 쳐다보던 박희수는 보면 볼수록 왠지 불안해져서 목소리 톤을 높이며 물었다. "지헌아, 너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지?" 권지헌은 피곤한 듯 말없이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친구 있었어요." 박희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 이어 묻기도 전에 권지헌이 한 마디 덧붙였다. "동성애 경향은 대체로 유전이에요. 제가 의심되면 아빠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박희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박희수는 화를 낼 수도 안 낼 수도 없이 허탈해졌다. 그냥 권지헌이 다 먹은 접시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계속 방에 있으면 권지헌 때문에 속 터져 죽을 것 같았다. - 다음날. 사촌누나 부탁으로 조카 데리러 온 권지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조각 같은 얼굴에 늘씬한 다리로 럭셔리카에 기대선 모습은 한없이 우아하고 분위기가 넘쳐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누군가는 연예인이 촬영하는 게 아닌지 묻기도 했다. 조카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어린이집 선생님이 먼저 달려왔다. "혹시 서준이 보호자님 되시나요? 유치원 다른 어린이와 조금 다퉈서 보호자님이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권지헌은 선글라스를 벗고 선생님 뒤를 따라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이집 안,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없이 훌쩍이고 있었다. 하얀 팔에는 작은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조카인 전서준은 통통한 얼굴로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연희야, 내가 같이 놀자고 하는 거 영광인 줄 알아! 그런데 왜 나를 무시해? 울지 마, 우니까 못생겼잖아." 권지헌은 눈살을 찌푸린 채 성큼성큼 걸어가 계속 거만하게 날뛰는 조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고 잔뜩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전서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권지헌을 본 아이는 앙칼진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권지헌 손에 잡힌 채 덜덜 떨었다. 전서준은 권지헌 사촌누나의 외동아들로 집안의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고 유독 권지헌만 무서워했다. 외삼촌이 화내면 온 집안에 불똥이 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한테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말썽꾸러기인 전서준이 연희와 같이 놀고 싶어했지만 연희가 거절하자 하교 시간에 연희를 밀치고 연희 옷까지 찢어버린 것이다. 권지헌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연희를 안아 올렸다. 연희의 촉촉한 눈을 마주친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권지헌은 연희가 어딘가 눈에 익었고 왠지 모르게 친밀감이 느껴졌다. 목소리도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아프지? 삼촌이 병원 데려가 줄게." "아이 보호자한테 연락해주세요. 제가 모든 손실 다 배상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바람이 스치고, 허겁지겁 뛰어온 허설아는 연희를 안고 있는 사람이 권지헌인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울고 있는 연희만 눈에 들어왔다. 연희는 누구를 닮았는지 유난히 내성적이었다. 울 때면 소리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보는 사람 가슴이 미어지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드러운 손이 권지헌 품에서 연희를 빼앗아 품에 꼭 안고 나직이 다독였다. "연희야, 괜찮아. 엄마 왔어, 울지 마." 연희는 허설아의 어깨에 엎드려 두 팔로 목을 꼭 껴안았다. 연희의 팔에 난 상처들은 본 허설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연희는 다른 아이들보다 면역력이 훨씬 낮고 태어날 때부터 혈소판이 부족하고 혈액 응고 기능 장애가 있어 한 번 다치면 쉽게 낫지 않았다. 연희가 다친 것을 본 허설아는 바로 강경한 태도로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정확한 상황 설명 좀 해주세요!" 옆에 있던 권지헌이 입을 열었다. "서준이 잘못이에요. 우리가 배상할게요." 허설아는 큰 키에도 불구하고 많이 마른 상태였다. 연희는 마치 인형처럼 허설아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허설아 딸이었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권지헌은 아이가 이상하게 자신과 인연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권지헌이 연희를 바라보는 순간, 허설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치 누가 아이를 빼앗으려는 것처럼 연희를 더 꼭 감쌌다. 고개를 든 허설아는 어둡고 깊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선명한 눈썹뼈 때문에 얼핏 보면 눈길이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워 보이지만 사실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예쁜 눈이었다. 계속 연희를 괴롭히던 남자아이가 권지헌 아들이었어? 아니, 아이 성은 전씨였다. 아니면 권지헌이 아이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아이가 누구 성을 따르든 상관없는 정도인 걸까? 허설아는 씁쓸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손이 떨리며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에 불쑥 입을 열었다 . "배상이요? 전서준이 제 딸을 여러 번 괴롭혔는데 어떻게 배상하실 거예요? 제 딸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줬다고요!" 전서준이 연희를 괴롭힌 건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전서준을 힐끗 쳐다보고 곧장 밖에 세워둔 차로 걸어갔다. "차에 타요, 병원 갑시다." 권지헌은 전서준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설아가 연희를 안은 채 움직이지 않자 권지헌이 재촉하며 말했다. "서둘러요." 품에 안긴 연희는 울음을 멈췄지만 숨을 크게 몰아쉬느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지체할 수 없었던 허설아는 서둘러 권지헌 차에 올랐다. 병원에 도착한 허설아는 말할 새도 없이 연희를 안고 곧장 호흡기 내과로 달려가 각종 검사를 받았다. 손에는 약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권지헌은 뒤를 따르며 모든 비용을 결제했다. 그리고 허설아의 딸이 정말 몸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검사 비용을 결제하느라 살펴본 진단서에 연희라는 이름이 보였다. 허설아 남편 성이 연씨인 건가? 전서준 역시 예상 밖인 듯했다. 어린이집에서 연희와 장난칠 때 울었던 게 엄살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아파서였다. 권지헌이 허설아 모녀를 데려다주는 길에 한참 머뭇거리던 전서준은 신호등 앞에 잠시 멈춘 사이, 옆에 있던 허설아와 연희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허설아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전서준이 아이라 해도 화가 났다. 권지헌 아들이 귀한 만큼 연희도 귀한 아이였다. 허설아는 연희의 건강을 애지중지 돌보고 있었다. 다치는 건커녕 우는 일조차 거의 없게 했다. 연희의 몸은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해도 무리가 가는 상황이었다. 오후에 어린이집에 도착했을 때 연희 얼굴에 맺힌 눈물과 울어서 퉁퉁 부은 눈만 떠올려도 허설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허설아가 무시하자 전서준은 다시 연희를 돌아보았다. 연희는 전서준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정성들여 조각한 것처럼 예쁘장한 연희는 사진만 찍어 올려도 캐스팅 매니저들이 어린이 모델로 섭외하겠다는 연락이 쇄도하는 얼굴이었다. 미간 사이는 약간 혼혈 느낌도 났다. 허설아도 전에 연희의 외모가 의아했는데 전에 권지헌이 한 말이 떠올랐다. 박혜수가 아랍계 핏줄이 섞였다고 했었다. 아마 연희도 대를 넘어 유전 되었는지 미간이 아랍계 혼혈 같았다. 그래서 종종 연희의 아빠가 외국인이라는 오해도 받곤 했다. 제7화 전서준이 연희를 놀린 건 연희가 예뻐서였다. "네가 나 용서해주면 앞으로 어린이집에서 내가 너 지켜줄게. 절대 아무도 너 건드리지 못할 거야." 전서준은 이번 일 때문에 연희 엄마가 연희를 전학 보낼까 봐 두려웠다. 사실 허설아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어린이집에 가도 똑같은 일을 겪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허설아는 다정하게 연희의 의견을 물었다. "연희야, 전학 가고 싶어? 아니면 계속 여기 있을래?" 잠시 생각하던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랑 다른 친구들은 다 좋아요." 허설아도 약간의 사심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권지헌이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단속할 테니 연희도 어린이집에서 전서준 같은 말썽꾸러기를 다시는 만날 일 없었다. 전서준도 사과할 줄 아는 걸 보면 답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집 근처 골목에 도착하자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허설아는 별다른 말 없이 연희를 데리고 떠났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뒷모습만 봐도 허설아가 지금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과 많이 달라진 허설아는 마치 단단한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했지만 성격과 사소한 버릇들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화가 나면 늘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의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화내기 미안해서 항상 화를 억누르고 스스로 삭인 뒤 다시 권지헌을 찾아가곤 했다. 권지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하고 오래된 재개발 지역의 낡은 아파트로 월세는 싸지만 회사까지 통근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이 걸렸다. 허설아가 지금 여기서 산다고? 남편이 정말 무능력한 모양이다. 권지헌은 속에서 미묘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핸들을 틀며 전서준에게 물었다. "너 연희 자주 괴롭혔어?" 전서준은 입만 삐죽거리다 몇 번이나 물어서야 겨우 답했다. "아빠가 없다고, 아빠가 버린 아이라고 했어요. 진짜예요, 삼촌. 나 연희 아빠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리고 평소에 나랑 놀아주지 않아서 디저트랑 과일 몇 번 빼앗았어요." "몇 번 밀치기도 했어요. 그리고 연희 원피스가 있는데 만 원이래요. 삼촌, 만 원짜리 옷 본 적 있어요? 어찌나 싸구려인지 살짝 잡아당겼는데 바로 찢어졌어요." "한 번은 연희가 한약 먹길래 내가 버려버렸어요." …… 권지헌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런 말을 허설아 앞에서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아니면 아이를 아끼는 허설아 성격에 더 화가 폭발했을 것이다. 권지헌은 전서준을 사촌 누나집에 데려다준 뒤 사건 경과를 쭉 설명했다. 차가 떠나기도 전에 벌써 집 안에서 전서준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권지헌은 차에 앉아 떠나려는 기색이 없이 느긋하게 전서준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어 휴대폰을 꺼내 회사 내부 메신저를 열어 실명제로 된 계정에서 허설아를 찾았다. 프로필 사진은 일러스트로 된 강아지였다. 손에 꽃을 들고 바보처럼 환하게 웃는 몰티즈라고 하는 강아지 캐릭터였다. 과거의 허설아와 닮아 있었다. 권지헌이 메시지를 보내자 빨간색 느낌표가 나타났다. 그리고 밑에 작은 글씨로 회사 내부 제한으로 다른 부서 간 직접 소통 금지, 상급자를 건너뛰고 소통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적혀 있었다. 권지헌은 말문이 막혔다. 회사 대표가 직원한테 연락하려는데 반드시 비서팀을 거쳐야 한다니. 권지헌은 조민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 아이디 허설아한테 추천 보내요." 조민규는 허설아의 기획안에 또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기절초풍할 듯하며 휴대폰을 든 채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추천을 보내자 허설아는 곧바로 물음표를 하나 보냈다. "?"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세요." 하지만 허설아는 마지막 말을 지우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ok." 허설아는 조민규가 보낸 친구 추천 메시지를 확인했다. 권지헌의 sns 연락처는 권지헌 본인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프로필 사진에 이름은 H였고 계정 아이디는 권지헌의 영어 이름과 생일로 조합되어 있었다. 바로 친구 추가를 하자 권지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앞으로 딸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다 책임질게요." "알겠습니다." 권지헌이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 전서준이 바닥을 뒹굴며 도살장에 끌려가는 아기돼지처럼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상을 본 허설아는 단번에 권지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적당히 하고 그만 화 풀라는 뜻이었다. 권지헌이 아이를 많이 아낀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아마 권지헌이 좋아하는 여자와 낳은 아이여서겠지. 허설아는 마음이 씁쓸했다. 오후에 권지헌이 전서준을 감싸는 모습을 허설아도 다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때리는 것조차 진짜로 때리지 못하고 시늉만 하다니. 하긴, 권지헌 같은 존재는 아이만 갖고 싶다고 하면 낳아줄 여자가 널렸을 것이다. 허설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영상을 태그하고 답장을 보냈다. "확인했습니다." 답장을 끝으로 모든 감정을 다시 삼켰다. - 그날 밤, 아니나 다를까 연희는 열이 났다. 감염을 막기 위해 허설아는 자신과 연희 모두 마스크를 쓰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 검사를 해보니 기존 병들이었다. 의사는 뒤에 있는 커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를 안고 저쪽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수액 준비해야 해요." "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허설아는 자그마한 딸을 안고 작은 칸막이 안에 앉아 다른 손으로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미대 출신인 허설아는 대학교 때부터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때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기에 그냥 좋아서 게임이나 드라마 팬아트를 그렸는데 어쩌다 보니 입소문을 타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지금 허설아는 팔로워 300만인 유명 일러스트 작가였다. 허설아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메시지들이 종종 있었고 시간이 되면 거의 다 받는 편이었다. 다만 그림 그리는 일은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어 한 장 그리는 데 일주일씩 걸렸다. 게다가 연희가 아프면 효율도 많이 떨어졌다. 의뢰 가격 문의 메시지 몇 개를 확인한 허설아는 가격표만 보내고 바로 나왔다 권지헌이 SNS로 전화를 걸어왔다. "딸 옷이 내 차에 있어요." "내일 출근하면 차로 가서 받아 가겠습니다." 허설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하는 걸 발견하고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거라 짐작한 권지헌이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때, 칸막이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르신의 불만 가득한 소리였다. "권지헌도 정말 너무하네. 우리 서준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 좀 사귀는 걸 어떻게 다른 애들 괴롭혔다고 말할 수 있어?" "서준이가 얼마나 놀랐으면 열까지 나겠어!" 권지헌 사촌 누나인 유혜원이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니, 지헌이도 서준이를 위해서 혼낸 거예요. 그리고 서준이한테 오늘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 한 번 말해보라 하세요. 그게 무슨 친구 사귀는 거예요? 그건 그냥 괴롭힌 거예요!" 김현숙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손찌검은 안 되지! 서준이가 지금까지 자라면서 언제 맞아본 적이 있어!" "서준이 말로는 그 계집애가 옷도 겨우 만 원짜리에 애 아빠 얼굴도 본 적 없다며? 딱 봐도 계집애랑 엄마가 일부러 국제학교에 와서 돈 많은 남자 꼬시려는 거야." "틀림없어. 아니면 권지헌 성격에 어떻게 두 사람 집에까지 데려다줘? 서준이도 계집애 엄마가 예쁘다고 하던데 남자나 노리는 천한 것이 분명해! 안 되겠어, 내일 내가 학교에 찾아가서 뻔뻔한 그 계집애 퇴학시키라고 해야지!" 유혜원이 끝내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런 말 지헌이 앞에 가서 똑같이 해보세요." 김현숙도 감히 권지헌 앞에서는 으스대지 못했다. 커튼 안, 허설아는 손발이 차갑게 식어갔고 모욕적인 말들이 귀에 때려 박혀 고막을 찌르는 듯한 고통에 이명이 끊이지 않았다. 허설아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는 사실도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