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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춘귀
계연수가 열네 살 되던 해에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고, 열여섯 살에 혼인서를 들고 청귀세가인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혼인을 한 지 3년 동안, 비...
Chương (1)
第1章
계연수가 열네 살 되던 해에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고, 열여섯 살에 혼인서를 들고 청귀세가인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혼인을 한 지 3년 동안, 비록 남편의 태도가 냉담했지만 그녀는 아내의 직책을 다하며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남편은 외모가 준수한 데다 앞날이 창창해서 사람들은 늘 그녀에게 만족해야 한다며, 사 씨 가문에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눈이 내리던 날, 부군이 다시 한번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갔을 때 그녀는 비로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열아홉 살이 되던 해, 부군이 후회할 것이라고 조롱하는 소리 속에서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화리서를 들고 떠났다.
계연수는 원래 화리 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강남으로 가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려고 했지만 경성 세가에서 가장 권세가 높고 차가운 남자가 그녀와 혼인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심서준은 추운 밤에 높이 걸려 닿을 수 없는 현달처럼 신분과 지위가 고귀했고, 차갑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나와 혼인을 할지 이틀 동안 고민해 보거라.”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는 다음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싫다면 내가 몇 년 더 기다리지.’
계연수는 알지 못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심서준은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고, 그녀에 대한 소외 뒤에는 온통 자제와 숨겨진 다정함이 있었음을.
제1화
한겨울의 깊은 밤, 휘몰아치는 폭설 소리가 귀가를 스쳤고, 휘장이 바람에 날려 탁탁거리는 소리를 냈다.
계연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휘날리는 휘장을 걷어내고 짙은 눈이 덮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눈보라 속에 섞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뒤에서는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 옥현 오라버니가 우릴 데리러 올까요?”
계연수는 휘장을 걷고 대답 없이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사옥현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눈보라라도 그는 올 것이었다.
오늘 그녀는 원래 이명유와 함께 온천 별장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옥현이 명유가 감기에 걸렸으니 사촌 형수로서 그녀도 명유를 돌봐야 한다고 해서 간 것이었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하더니 당연한 듯 모든 것을 준비했다.
다만 돌아올 때, 큰 눈이 길을 막았고 바퀴가 갈라져 마차가 도중에 갇힌 것이었다.
마부가 말을 타고 돌아가서 소식을 전한 지 거의 두 시진이 지났으니 이제 곧 올 것이었다.
멀리서 전해오는 말발굽 소리는 눈보라 치는 밤에 북소리처럼 울려 퍼졌고,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마침내 말소리가 울리더니 마차 밖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유야.”
곧이어 휘장이 젖히더니 길고 큰 손이 들어왔다.
계연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분명 자신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명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옥현 오라버니, 왜 이제야 오신 겁니까?”
이명유는 부드러운 손을 사옥현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너무 두려웠던 탓인지, 나비처럼 그의 품에 달려들어 흐느꼈다.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는 눈이 내리는 밤에 길고 따뜻한 봄 풍경처럼 사람들을 빠져들게 했다.
계연수는 묵묵히 이명유의 등에 놓인 길쭉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그 손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품에 안긴 사람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두툼한 여우털 옷이 가녀리고 수려한 어깨에 걸쳐졌다.
계연수는 시선을 돌려 휘장을 바라보았다.
휘장은 눈바람에 펄럭였고 눈보라가 들어와 그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소매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명유는 사옥현의 품에서 한참 동안 울다가 남자의 부드러운 위로 속에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안겨 마차에서 나갔다.
계연수는 밖에서 이명유가 흐느끼며 말하는 걸 들었다.
“형수도 마차 안에 있어요.”
남자의 대답은 눈보라 속에 묻혀 계연수는 듣지 못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걸친 망토를 꽉 조이고, 마차 안의 바람에 흔들리는 등이 부서진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을 바라보았다.
곧 휘장이 다시 열렸고, 고귀하고 차가운 얼굴이 그녀 앞에 나타나 오늘 밤의 첫마디를 했다.
“당신들을 데리러 오던 마차가 도중에 눈에 막혀 앞으로 갈 수가 없어서 먼저 말을 타고 온 거야. 명유가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이번 일로 크게 놀란 것 같아. 마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으니 명유 먼저 데려갈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마차가 금방 올 거야.”
계연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네.”
남자의 얼굴은 어둡고 흔들리는 등불 아래에서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그는 계연수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더니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한마디 설명했다.
“올 때 여우털 옷을 한 벌밖에 가져올 수 없었어. 넌 형수니까 명유에게 양보해.”
계연수는 그와 혼인을 하던 날부터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와 혼인을 하면 당연히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도대체 누가 당신 부인인지 따졌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사옥현은 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는 한 마디도 해명하지 않고, 그녀가 억지 부리는 미치광이라도 된 것처럼 얼음 같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계연수는 따지는 것도 이미 지쳐버렸고, 따진다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옥현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십시오. 명유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할 말이 없어 눈을 감았다.
사옥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계연수를 한 번 본 후, 휘장을 내렸다.
마차 밖에서는 곧 말발굽 소리가 났고, 소리는 점점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이때 옆에서 시녀 용춘의 걱정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께서 부인을 혼자 여기에 두고 가다니, 정말 걱정이 안 되는 것일까요?”
계연수는 천천히 몸을 용춘의 어깨에 기대어 발 옆의 드문드문 불빛만 남아 있는 숯불을 바라보았다.
냉기를 한 모금 뱉은 후, 그녀는 뜻밖에도 이런 쓸쓸함이 싫지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말했다.
“용춘아, 나 좀 잘게.”
눈을 감는 순간, 그녀는 3년 전의 자신을 보았다.
그 해 초가을, 그녀는 사 씨 저택 앞에서 사옥현이 나타날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렸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서를 손에 꽉 쥐고 사 씨 저택으로 달려가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고 일부러 침착한 척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계씨 집안의 딸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혼약이 아직 유효한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고, 평생 가장 용감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긴장해서 손이 땀에 흠뻑 젖었고, 무슨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감옥에 갇혔고, 계부는 수색당했으며, 예전에 방문객이 많던 계부는 엎친데 덮친 격이 되었다.
그녀와 어머니는 연루되지 않아 이미 몰락한 외주부에게 얹혀살고 있어서, 사옥현이 이 혼약을 깨려고 해도 아무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인지상정이란 게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계연수도 그때 사옥현이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혼서를 찢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땐 사옥현이 경성에서 이미 약간의 명성을 얻었고, 젊은 나이에 벼슬을 따내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외모까지 준수했기 때문에 경성의 수많은 명문 여인들이 그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혼인을 거부하면 혼서를 찢어버리고 혼약을 없었던 일로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사옥현은 입을 열어 승낙했다.
계연수는 그때 사옥현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잊어버렸다. 다만 그의 목소리만 기억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약간 차가운 늦가을에 그녀에게 온기를 안겨주었다.
“부모의 명령이니 혼약은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조만간 어머니를 모셔와 혼인 날짜를 상의하도록 하지.”
그때 계연수는 평생 자신을 사랑해 줄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기꺼이 도움을 준 사람이니,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사이좋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자신에게 또다시 가정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자신과 혼인을 하겠다고 한 이유는 명성 때문이었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새하얀 겨울날,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멍하니 돌아서 실망스러운 눈과 마주쳤다.
“잘 보거라. 이게 바로 네가 선택한 부군이다.”
또 한 차례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두꺼운 휘장을 뚫고 들어와 꿈속의 사람을 깨웠다.
계연수는 눈을 번쩍 뜨고 이미 다 타버린 숯불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얼어붙은 손으로 헤집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버지가 여전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연수야, 울지 말거라.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없고, 절대적인 좋고 나쁨도 없단다. 그러니 관청의 부침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법이지. 영원히 이길 수 없듯이, 진 사람도 다시 살아날 희망이 있는 거란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거라.”
계연수는 휘장 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추운 겨울 속에서 영원히 멈춘 인연을 끝내야만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제2화
차가운 눈보라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계연수는 밤까지 기다렸지만, 숯불은 이미 다 식어버렸고, 마차 꼭대기에서 흔들리는 등만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녀를 데리러 온다고 했던 마차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오늘 밤, 눈이 많이 내려서 그녀는 마차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긴 밤의 끝에 곧 여명이 찾아왔다.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올 무렵에야 마차가 느릿느릿 도착했다.
마부는 달려와 손에 든 여우털을 건네며 말했다.
“어젯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마침 출장을 가는 관리 때문에 눈을 치우지 않았다면 소인은 지금도 소부인을 데리러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소부인께서 혼자 눈 속에서 어떡하겠습니까?”
계연수는 여우털을 꽉 잡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휘장 밖의 마부는 계속 말을 했다.
“원래 손난로도 준비했는데, 지금쯤 다 식었을 것입니다. 마차 안의 숯불도 많이 준비하지 않아 다 타버렸습니다.”
계연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더니 비난하지 않고 휘장을 열었다.
눈보라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고, 새하얗게 뒤덮인 눈이 그녀의 눈을 아프게 했다.
마부는 계속 말했다.
“어제 나으리께서 소부인과 사촌 아가씨께서 눈 길에 갇혀 있다는 걸 알고 긴장해서 당장 오려고 했습니다. 나으리처럼 바쁜 사람이 공무를 돌볼 시간도 없을 텐데 어젯밤에 글쎄…”
그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뭔가 알아챈 듯 멈추고 몰래 계연수의 눈치를 살폈다.
다만 소부인의 드리워진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는 방금 꺼낸 말을 후회하며 얼른 발판을 놓았다.
계연수는 소리 없이 여우털 옷을 꼭 여미고 마차에서 내렸다.
훼손된 마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두꺼운 눈 속을 밟았지만 뻣뻣한 몸은 이미 감각이 없었고 심지어 눈 속에 있는 발의 감각도 이미 사라졌다.
몇 번이나 넘어지려고 했지만 옆에 있던 용춘이가 부축해서 일으켰다.
용춘은 눈이 빨개져서 조용히 주인을 부축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마차는 사 씨 저택으로 돌아갔고, 문지기 소년은 계연수를 맞으러 다가갔다. 하지만 예전의 온화하고 단정하던 소부인이 지금은 걸음걸이조차 어려워 보이는 모습을 보니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같이 온천 별장으로 갔는데 사촌 아가씨는 나으리께서 직접 데려오고, 소부인은 눈 속에서 하룻밤 갇혀 있었다니.’
사촌 아가씨께서 저택으로 돌아온 후, 저택에서는 한참 바삐 돌아쳤다. 의원까지 불러 사촌 아가씨의 맥을 짚었는데 마치 소부인이 아직 눈 속에 갇혀 있다는 걸 잊은 것 같았다.
애초에 가문 사람들은 모두 나으리께서 사촌 아가씨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그 시선들을 무시하고 간신히 걸음을 옮기며 방으로 돌아갔다. 용춘의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방안의 숯불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지만 계연수는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고 불빛을 바라보며 숯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을 쬐었다.
그녀는 손을 불에 가까이 가져다 댔지만 조금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억울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이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용춘은 계연수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생강차를 끓여 왔다. 그녀는 항상 위의를 중시하던 부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며 목이 메었다.
“소부인, 먼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으십시오. 그럼 몸이 좀 더 빨리 따뜻해질 것입니다.”
계연수는 찻잔을 받았지만 뻣뻣하고 차가운 손가락은 여전히 감각이 없었고, 뜨거운 생강차가 목으로 들어가도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때 휘장이 열리더니 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명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와 숯불 대야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계연수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급히 다가가서 말했다.
“형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이모께서 저를 보냈습니다. 이모께서 형수님께 푹 쉬고, 이모한테는 먼저 가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계연수 옆에 쪼그리고 앉아 관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오라버니께서 저를 저택으로 데려다주신 후, 제가 즉시 형수님을 데리러 가라고 했지만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걱정되어 저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형수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 걸 보니 드디어 제 마음이 놓이는군요.”
“오라버니도 근무 후에 돌아와서 형수님이 무사한 것을 보고서야 안심을 했습니다.”
계연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이명유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노란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여우털을 한 바퀴 감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단정했고, 얼굴색은 불그스름해서 눈보라에 맞은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보호를 아주 잘 받은 꽃봉오리 같았다. 그리고 연약하고 밝은 눈동자의 깊숙한 곳에는 오만함과 경멸이 숨겨져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계연수에게 영원히 자신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연수는 단 한 번도 그녀와 경쟁을 한 적이 없었다.
계연수는 시선을 거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다. 날 보러 올 필요 없다. 네 몸이 더 중요하니까.”
계연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옆에 있는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용춘에게 이명유에게도 차를 대접하라고 했다.
이명유는 계연수의 평온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연수의 여러 가지 표정을 생각했지만 이렇게 침착할 줄은 몰랐다.
예전의 계연수는 항상 그녀에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으니 옥현 오라버니에게 너무 매달리는 건 좋지 않다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분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타이르던 표정, 눈에 비친 상처와 슬픔. 아무튼 이렇게 평온한 표정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계연수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는 걸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옥현 오라버니의 마음속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지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었다면 스스로 저택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사 씨 저택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계연수를 무시했다.
강제로 한 혼인은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왜 이렇게 뻔한 도리를 알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명유는 다른 부드러운 의자에 앉아 시큰둥한 눈빛으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계연수는 여전히 어제 입었던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간단한 비녀가 꽂혀 있었고 머리카락은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계연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차를 마셨다.
창밖의 옅은 빛이 그녀에게 드리워져 그림처럼 하얗고 아름다워 보였고, 품위 있어 보였다.
이건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체면이었다.
이명유는 사실 계연수가 실수를 했을 때 몰아붙여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도 허위적인 가면을 찢으려고 했었다.
이명유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형수님이 걱정돼서 급하게 보러 온 것입니다. 하지만 형수님은 저를 반기지 않는 것 같군요. 혹시 어제 오라버니께서 저를 먼저 데리고 가서 기분이 언짢으신 것입니까?”
용춘은 계연수의 곁에서 이명유의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연약한 척, 불쌍한 척. 하지만 나으리께서는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부인이 소심하다며 부인 탓을 했다.
계연수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자, 춘설차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그녀의 은은한 눈동자는 별처럼 빛이 났고,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난 방금 추운 곳에서 돌아와 몸에 한기가 남아 있어. 넌 추위를 견디지 못하니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너의 오라버니를 걱정하게 하지 말고.”
계연수의 말은 체면도 서고 여유도 있었는데 버림받은 낭패를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이명유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영원히 소원을 이룰 수 없을 것이었다.
이명유는 잠깐 어리둥절해하다가 웃음을 터뜨리며 창밖을 내다보며 등을 곧게 펴고 비아냥거렸다.
“형수님께서 막 시집오던 해에 창밖에 해당화를 잔뜩 심어, 3월의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그녀는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제가 해당화의 냄새를 맡을 수 없어 오라버니께서 저를 위해 형수님이 심은 해당화를 모조리 뽑아버렸지요. 형수님께서 해당화를 가장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올해 3월에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제3화
계연수 뒤에 서 있던 용춘은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
‘이명유가 해당화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한 건, 일이 부인 뜻대로 되는 것이 보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나으리와 소부인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이명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를 하려고 했다. 소부인이 해당화를 좋아하는 건 가주 부인께서 해당화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계 씨 가문의 가주께서 직접 부인을 위해 정원을 가꾸셨고, 당시 가주님과 부인께서도 해당화로 인해 인연을 맺었던 것이었다. 해당화는 소부인의 정신 의탁이었는데 이명유의 말 한마디에 나으리께서는 소부인께서 직접 심은 해당화를 전부 뽑으라고 명령했지. 거의 2년이 다 된 일인데 굳이 끄집어내는 건 소부인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아닌가?’
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 씨 가문으로 시집온 그 해에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사옥현과 알콩달콩 평생을 함께 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사옥현은 청렴하고 단정해서, 그녀는 진작에 그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해당화를 심은 것은 자신이 여기서 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직접 심은 모든 꽃에는 정성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창밖은 이미 아무것도 없어졌고, 한눈에 평평한 흰색만 있을 뿐 다른 색깔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계연수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녀도 슬퍼했지만 아무도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외조모가 함께 슬퍼하게 할 수는 없으니 밤에 혼자 마음의 상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계연수의 손끝은 여전히 약간 차가웠고 따뜻한 차도 온몸을 녹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당화는 어디서나 볼 수 있으니 사람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계연수의 태도에 이명유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명유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끝까지 잡고 놓지 않을 줄은 몰랐다.
다만 가세가 기울었을 뿐인데 자존심도 없다니.
이명유는 그런 사람을 가장 경멸했다.
이명유가 여기에 온 이유는 계연수의 체면을 구기려 온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기다리기 싫었다.
이명유는 몸을 약간 곧게 펴고 더 이상 경멸하고 오만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네가 10년 전 혼서를 들고 오지 않았다면 난 이미 옥현 오라버니의 부인이 되었을 것이야. 네가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지도 2년이 되었으니 내가 옥현 오라버니 마음속의 자리를 알 수 있겠지.”
말을 마친 이명유는 몸을 일으켜 계연수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니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화리를 해. 그럼 내가 오라버니와 이모를 설득해서 너에게 보상을 줄 테니까.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지.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 돼. 오라버니가 형수를 밤새 눈 속에 방치한 걸 보면 모르겠어? 오라버니는 널 좋아하지 않아.”
이명유는 휘장을 열어 떠났고, 발자국 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손을 소매에 넣고 마당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바라보았다. 마당 구석에 이미 크게 자란 배나무를 보더니 그녀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다시 웃었다.
그 배나무는 이명유가 어린 시절, 처음 사 씨 가문에 왔을 때 사옥현과 함께 심은 것이었다. 사옥현은 그 배나무가 남아 있는 한, 그녀는 영원히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그도 영원히 그녀를 보호할 것이라고 했다.
이명유가 계연수를 경멸하는 이유는 그녀가 자존심도 없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매달린다는 것이었다.
방에 남은 계연수는 이명유의 부드러운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용춘의 분한 표정을 보고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먼저 뜨거운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했다.
뜨거운 물이 그녀 몸의 찬 기운을 씻어냈고, 오랫동안 몸을 담그고 나서야 몸이 조금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용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 속에서 밤새 기다리며 찬바람까지 맞았으니, 소부인께서는 십중팔구 추위에 병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의원을 불러서 맥을 짚어 보시지요.”
계연수는 목구멍의 가려운 기운을 참지 못하고 몇 번 기침을 하고 나서야 응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이 왔고,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부인께서 어떻게 이런 추위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감기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용춘이 옆에서 눈시울을 붉히자 계연수는 용춘을 위로했다.
“감기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러자 용춘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소부인께서 언제 이런 억울함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예전엔 비를 조금 맞아도 가주 어르신과 부인께서 그렇게 걱정하셨는데. 밤새 눈을 맞다니.”
계연수의 손끝은 잠깐 멈칫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용춘아. 지금은 예전과 다르지 않느냐.”
계씨 가문은 이미 가세가 기울었고,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더 이상 누군가가 와서 관심을 해주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이때 큰 부인 옆에서 시중을 들던 마마가 왔다. 큰 부인께서도 어젯밤의 일을 알게 되었는지 보양식들을 잔뜩 보내왔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몸조리를 잘 하라며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전했다.
계연수는 물건을 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마마가 떠난 후, 그녀는 다시 용춘에게 보내온 물건들을 모두 잘 받아두라고 했다.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지만 예전엔 그녀도 귀한 것들만 먹어서 보내온 물건이 모두 값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계연수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사 씨 가문은 워낙 청렴하고 조상들이 모두 진사출관하여 규칙과 예절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대놓고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큰 부인께서는 규칙선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인 태도를 취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밤에 사옥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약 냄새를 맡아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들어서자 계연수는 침대에 기대앉았다. 예전에는 항상 한 올도 남김없이 묶어 올렸던 긴 머리카락이 지금은 그녀의 어깨 위로 느슨하게 내려앉았고, 처진 눈썹 아래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다.
방안에는 촛불을 밝게 켜지 않았고, 어두운 불빛이 그녀의 홀옷 위에 드리웠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닫고 머리맡에 놓았다.
사옥현이 밤에 돌아와 계연수가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를 마중 나가지 않고 뒤에서 그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기만 했다.
사옥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계연수를 보며 물었다.
“오늘 명유가 널 보러 왔는데 쫓아냈다면서?”
간단한 진술과 차가운 말투엔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대리시(大理寺)에 오래 머물러서 그런지 진술하는 어조도 심문처럼 들렸다.
‘죄를 묻듯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이명유에게 먼저 갔었나 보군. 이명유가 온갖 수단을 써서 사옥현이 자신을 가장 걱정한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계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런 대화방식과 사옥현에게 지루함을 느꼈다.
제4화
그 생각에 계연수는 멈칫했다.
이런 심문에도 아무런 슬픔이 없다니. 그녀는 사옥현이 정말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기억 속의 옥처럼 따뜻했던 사옥현, 가세가 기울었을 때 그녀의 가정 형편을 신경 쓰지 않는다며 혼인을 청하러 왔던 사옥현, 외부인들에게 청렴한 군자인 사옥현,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졌다.
그녀가 잠시 딴생각을 하자 사옥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수야, 넌 명유처럼 침착한 법을 배워야 해. 후원에 틀어박혀 질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다시 걸어 나갔다.
계연수는 사옥현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책을 펼쳤다.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지 3년 동안 그녀는 정성을 다해 후원을 관리했고,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건을 준비하며 그가 사소한 일로 신경을 쓰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어머니가 가끔 가혹하게 굴어도, 그녀는 그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사옥현의 부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질투심 많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따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옥현의 마음이 이미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용춘은 계연수 곁에 서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요 몇 년 동안 소부인과 나으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나으리를 다시 모셔올 테니 소부인께서 몇 마디 설명하십시오. 사촌 아가씨께서 앞으로도 이간질을 할 텐데 시간이 지나면 더 멀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수는 입술을 가리고 기침을 두 번 하더니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필요 없다.”
그녀는 예전에 천만 번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눈보라에 휩쓸린 연회처럼, 설명을 해도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믿거나 말거나,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자신을 알게 되었다. 눈 속에서 그녀가 사옥현에게 마음이 식었다면, 방금 사옥현에 대한 그 지루함에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옥현에 대한 그녀의 감정도 온데간데 사라졌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사옥현은 이미 방 안에서 옷을 입고 있었다.
계연수는 한 번 보더니 가서 씻기 시작했다.
이건 두 사람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옥현은 그녀의 방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공무로 바빴고, 사건 기록과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가끔, 사옥현이 돌아와도 계연수는 그를 보지 않았고, 아침에 씻을 때만 잠깐 접촉하곤 했다.
유일한 차이점은 오늘의 계연수가 평소처럼 사옥현의 곁으로 가서 그에게 옷을 입히고 따뜻한 수건을 건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옥현은 준비를 마친 후 떠났다. 눈보라가 부는 날이면 그는 항상 일찍 떠나야 했다.
그는 떠나려고 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청동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는 계연수를 보았다.
겨울엔 하늘이 늦게 동을 터, 방안엔 촛불이 환하게 빛을 냈고, 계연수의 몸에 촛불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곧게 앉아 있었고, 검은 머리는 폭포처럼 쏟아졌다. 수려한 얼굴은 강남의 여인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귀에 걸려 있는 비취 귀걸이가 그녀의 보라색 어깨 위에서 미세한 빛을 반사했다.
작고 은은한 자태가 깜박이는 촛불 속에서 마치 하늘빛 비안개 같았다.
사옥현은 계연수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관대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방안에는 여전히 약 냄새가 났다. 사옥현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마차가 제때 너를 데리러 가지 못했고, 네가 밤새 눈 속에 갇혀 있었다고 들었다.”
계연수는 약간 의아한 듯 사옥현을 바라보았고, 입을 열려고 하자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더니 다시 사옥현을 바라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오래 기다렸을 뿐입니다.”
사옥현은 계연수의 억눌린 기침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입을 가리던 해당화를 수놓은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계연수를 보며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예전엔 명유 문제라면 계연수가 무조건 사옥현과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사옥현은 입술을 약간 오므리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 일은 내가 계산을 잘못한 것이니 이따가 집사에게 촉금 한 필을 보내라고 할 게.”
계연수는 촉금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해졌다.
그는 사옥현이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녀가 사 씨 저택으로 시집온 이듬해, 사옥현이 몇 년 묵은 미사결 사건을 해결해 상부에서 상을 내렸는데, 그중에는 촉금 두 필이 있었다.
상을 보내온 날, 온 집안이 기쁨으로 가득 찼고, 계연수도 그 사이에 앉아 사옥현을 위해 기뻐했다.
그날, 사옥현은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한 필의 촉금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남은 한 필을 계연수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이명유에게 주었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주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계연수는 그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다. 하지만 사옥현은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해명도 하지 않고 서재로 가버렸다.
계연수는 거절하고 싶었다. 그녀가 바라는 건 촉금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부군이 왜 자신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때 이후로, 사 씨 저택의 하인들까지도 그녀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그들은 계연수가 사옥현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원래 바람을 보고 노를 젓는 법이었다.
그는 사 씨 가문의 종가 맏아들이니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행동하기 마련이었다.
계연수가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사옥현은 휘장을 열고 나갔다.
사옥현은 그것이 자신이 계연수에게 주는 은혜와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계연수는 흔들리는 휘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시선은 다시 동경 앞으로 돌아가 수수한 옥비녀를 골라 머리에 꽂았다.
오전에 집사는 사옥현이 말했던 촉금을 보내왔다.
집사는 촉금을 보내온 후, 웃으며 아부를 떨었다.
“이건 오늘 아침 나으리께서 떠나기 전에 특별히 분부하신 것인데 소부인에게만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만 보냈다는 건, 나만 없기 때문이겠지.’
계연수는 촉금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보지도 않고 용춘에게 받아서 창고에 가져다 두라고 했다.
그녀는 화리를 한 후에도 이 촉금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는 마당에서 이 삼일 동안 몸조리를 해서야 감기 기운이 좀 나아졌고, 기침도 많이 줄어들었다.
요 며칠 동안 사옥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까다로운 사건을 맡아 하루 종일 관아에 남아 조사를 했다.
계연수는 원래 몰랐지만 시어머니 옆에 있던 마마가 와서 그녀에게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준 것이었다.
그녀는 사옥현의 부인이지만 그에 관한 모든 일은 항상 마지막으로 알게 되었다.
그가 경성에 출장을 갔을 때 보내온 편지도 그녀의 몫은 없었다.
제5화
오늘의 눈보라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계연수는 방에서 나가자 여전히 추위를 느꼈다.
그녀는 몸에 걸친 여우털 망토를 꽉 여미고 등 위에 쌓인 자욱한 눈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앞길에 자욱한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시어머니 임 씨도 요 며칠 병이 나서, 후원의 사람들이 모두 병문안을 갔다. 계연수가 갔을 때는 이미 방안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계연수는 방으로 들어간 후, 망토를 풀어 용춘의 손에 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마마가 그녀를 위해 휘장을 열자, 시끌벅적한 인사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휘장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고 다들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시집온 지 이삼 년 동안, 사 씨 가문의 사람들은 매번 이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사 씨 집안의 며느리로 여기지 않았고 가까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계연수는 여전히 평소처럼 시어머니 임 씨에게 다가가 문안을 드렸다.
임 씨는 계연수에게 몇 마디 관심을 하더니 그녀의 병을 물어본 후에야 한쪽에 앉혔다.
또 한 차례의 인사가 오갔고, 아무도 그날 밤 그녀가 홀로 버려진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녀의 일을 외면했고, 오히려 모두 이명유의 혼사를 토론했다.
이때 둘째 부인이 입을 열었다.
“명유가 성인이 된 지도 벌써 1년이 되었고, 여러 가문을 소개해주었는데 옥현이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니… 명유에게 어떤 부군감을 골라줘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명유는 옥현이가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부군감을 잘 골라줘야지요.”
이때 어떤 형수가 이명유에게 물었다.
“경성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느냐? 네가 마음에 든다면 대부분의 가문엔 모두 시집갈 수 있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명유의 아버지는 선주의 지부였고, 한 지역의 부모관으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다만 어느 해 선주에서 역병이 발생했을 때, 이명유의 아버지가 직접 방역을 하다 그의 부인과 감염되어 모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이명유와 그녀의 동생 이명청만 남게 되었다.
그해 이명유는 겨우 다섯 살이었고, 이명청은 세 살이었다. 가문의 재산이 족속에게 빼앗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임 씨는 여동생이 남긴 남매를 데려왔다.
이 씨 가문의 재산이 워낙 적지 않은 데다 조정에서도 위로금을 내렸다. 사 씨 가문에서는 위로금을 건드리지 않고 이명유와 이명청의 명의로 두었다.
그리고 이명유 아버지의 유서에 따라 재산을 남매에게 반반씩 나누어 주고, 서로 의지해야 하며 재산 때문에 싸워서는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명유는 고아이긴 하지만 손에 쥔 혼수가 많아 그녀가 평생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백성을 위해 희생을 해서, 그녀와 혼인을 하면 혼수품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좋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계연수도 시집와서야 알았다. 만약 자신이 그 해에 혼서를 가져오지 않았다면, 사 씨 사람들은 사옥현과 이명유의 혼사를 더 기뻐했을 것이었다.
이명유는 형수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골라 주실 것입니다.”
그러자 둘째 부인 옆에 있던 사운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는 사촌 언니를 제일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왜 사촌 언니를 오라버니에게 시집보내지 않는 겁니까?”
사운은 겨우 네다섯 살일 뿐이었고, 둘째 부인이 마흔 살에 낳은 어린 딸이었다.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말을 하니, 다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고 웃음을 자아냈다.
웃음소리가 잠시 멈추자, 임 씨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명유의 혼사는 옥현이가 가장 신경을 쓸 것입니다. 가문과 품성, 그리고 외모는 물론이고 재능도 있어야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옥현이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임 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옥현이가 어릴 때부터 명유를 보호해 왔는데, 당연히 명유가 조금의 억울함을 겪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지.”
임 씨는 말을 하면서도 이명유의 손을 꼭 잡고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임 씨가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임 씨는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이명유의 부드러운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넌 착한 아이이니 네가 이해하거라.”
그 실망스러운 말투와 억울함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계연수의 몸에 떨어졌다. 계연수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 씨 가문의 청렴한 명성도 단지 이 정도에 불과하구나.’
이명유의 달콤하면서도 허탈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모, 저는 조금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계연수는 임 씨에 의해 남겨졌다. 임 씨는 훌륭한 가문의 여인이라 일거수일투족이 온화하고 적절했으면 말투도 느리고 부드러웠다.
비록 지금 병이 났지만 여전히 온화한 자세로 침대에 기대어 저택의 몇 년 동안 묵은 장부를 정리했다.
계연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은 항상 그다지 좋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한심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예전에 그녀는 항상 그 혼서가 없었다면 사옥현이 그의 출세를 도울 수 있는 가문의 아가씨와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애초에 이 혼사가 어떻게 정해진 것인지 잊은 것 같았다.
임 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네가 시집온 지 거의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회임 소식이 없는 것이냐? 옥현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밤에 그를 붙잡을 줄도 모르는 것이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너 이러다가 내가 언제 손자를 볼 수 있겠니?”
임 씨의 말에는 피곤함과 엄격함이 배어 있었고, 대놓고 그녀가 무능하다고 하는 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옥현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고, 사옥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이명유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그녀가 사옥현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계연수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임 씨는 계연수가 말을 하지 않자 골치 아파 이마를 주무르며 말했다.
“정말 옥현이의 마음을 사는 법을 모르겠다면 명유에게 물어보거라. 그녀가 옥현이와 어떻게 지내는지 배우라는 말이다.”
계연수가 임 씨의 방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명유는 밖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계연수가 나오는 것을 보고 웃는 얼굴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왜 날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하는지 알아?”
계연수는 이명유의 부드러운 시선과 마주쳤다.
이명유는 웃으며 다가가서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날 아껴서 그런 거야. 혹시 그거 알아? 그날 밤, 오라버니께서 날 데려온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매일 나에게 보양품을 보냈다는 거. 방금 기침하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널 신경 쓴 적 있어?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다줬어? 의원도 혼자 부른 거잖아, 불쌍하게.”
계연수는 걸음을 멈칫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옥현이 모든 사람에게 냉담하고 배려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도 겨울밤이 얼마나 추운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사람은 이명유일뿐이었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계연수는 이명유를 바라보며 여전히 여유로운 자세로 차갑게 말했다.
“넌 자존심도 없어? 매일 다른 사람의 부군에게 매달리다니. 난 사 씨 가문으로 시집을 온 명분이라도 있지, 정말 서로를 흠모한다면 왜 일찍 계씨 가문에 와서 파혼을 상의하지 않고, 이제 와서 나를 못살게 구는 거야? 계씨 가문이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지만, 당초에 사 씨 가문이 혼인을 취소한다면 아버지도 분명 두말없이 동의하셨을 텐데 말이야.”
“그가 혼인을 취소하지 않은 건 널 좋아하지 않아서냐?”
제6화
이명유의 안색이 음침하게 굳었다. 그녀는 계연수가 뒤돌아서 자리를 뜰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계연수를 따라왔던 용춘은 조금 전 그녀의 말을 듣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걱정도 되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또 나으리께 가서 고자질을 하면….”
이런 일은 처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명유는 겉보기에 온순하고 선한 인상을 주지만 뒤에서 간사한 술수를 부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필 사옥현은 그녀를 편애하며 한 번도 부인인 계연수의 말을 믿은 적이 없었다.
계연수는 요 며칠 안에 사옥현과 화리에 관한 일을 상의할 생각이었으니, 이명유가 고자질을 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
그녀와 사옥현은 처음부터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옷깃을 여미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고 먼저 돌아가자꾸나.”
긴 치맛자락이 축축이 젖은 돌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림을 지날 때,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아침에 입도 벙긋 못하는 거 봤나요? 아무리 분해도 지가 참는 것 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애초에 그런 초라한 혼수를 들고 시집을 온 게 뻔뻔한 거지. 옥현이 아니면 누가 그런 거렁뱅이를 거두어 주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년만 끼어들지 않았으면 옥현이도 명유도 잘 어울리는 한쌍이 되었을 텐데.”
계연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좀 불쌍하지 않나요?”
“계씨 집안이 건재할 때 얼마나 위풍당당했나요? 저희 가문은 쳐다도 볼 수 없는 자리에 있었죠. 하루아침에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또 다른 목소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
“동정할 필요 없어. 이게 팔자인 것이지.”
“형님이 왜 그년에게 살림을 안 맡기는지 아니? 그년이 집안의 돈을 빼돌려서 병든 자기 어미의 탕약을 사는데 보탤까 봐 그러는 것이지. 외조부 가문도 몰락했으니 그런 년에게 살림을 맡기면 집안살림이 다 거덜 날 것이야.”
“형님은 줄곧 그년을 경계하고 있었다고.”
대화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용춘은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목소리는 둘째 부인과 그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계연수는 고개를 들고 힘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마른 나뭇잎과 흩날리는 눈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밤, 그녀는 처소 뒤편에 있는 작은방에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이 방은 평소 계연수가 서재로 쓰고 있었다. 사옥현 자신은 매일 서재에 머물면서도 그녀에게는 집안의 서재에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내원의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계연수는 그가 복잡한 공무를 처리하다 보니 타인이 서재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맨 뒤편의 허름한 방에 서재를 만들었다.
이곳은 창고와 맞닿아 있어서 평소에 인적이 드물었다. 계연수 본인도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집안 살림을 돌볼 필요도 없으니 한가할 때면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슴푸레한 등불은 방안을 밝게 비추진 못했지만 책상 하나를 비추기엔 충분했다.
계연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붓대를 들고 서신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계씨 가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외가에도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화리한 후를 미리 대비해 두어야 했다.
서신을 마무리한 그녀는 살며시 품에 안긴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주워온 길고양이지만 사옥현이 싫어해서 이곳에서만 길러왔다.
용춘이 다가와 서신을 접고 봉투를 봉했다. 계연수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능한 한 서둘러야겠어.”
용춘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수는 반쯤 완성된 그림을 펼치고 다시 붓대를 들었다.
사옥현이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에 이른 겨울의 한기가 돌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지만 안채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매번 돌아올 때면 다가와서 망토를 들어주고 따뜻한 탕을 손에 쥐여주던 계연수를 떠올렸다.
그가 언제 돌아오든 그녀는 늘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사옥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어멈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작은 마님은 뒤편의 작은 방에 계십니다. 소인이 불러드릴까요?”
사옥현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뜻을 알아차린 어멈은 조용히 물러갔다.
안채에서 나온 그는 망토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서재로 향했다. 문앞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이 끓고 있었다. 쓴 탕약의 향기가 안뜰을 은은하게 채웠다.
탕약을 다리던 시녀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다급히 일어섰다.
“소인은 작은 마님을 위한 풍한 약을 달이고 있었습니다.”
소인은 그날 계연수가 기침을 몇번 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미 이삼 일이 지난 후였다.
부관이 저택으로 의원을 부른 일도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계연수는 한 번도 병을 앓은 적이 없었다. 늘 잔병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명유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말없이 앞을 향해 걸었다.
계연수는 밤이 되어서야 안채로 돌아왔다. 그림을 너무 집중해서 그리다 보니 사옥현이 돌아왔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늦었던 것이다.
안채로 돌아오니 방 안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등불을 보니 그는 오늘도 안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시녀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나으리께서는 왔다가 가셨습니다.”
계연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시녀가 다급히 말했다.
“나으리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계연수는 옆에 있는 누각을 바라보았다. 주변은 어두컴컴하고 누각 위층의 창문에서만 밝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창가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한눈에 그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계연수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서재이지만 이명유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채로 향했다.
사옥현은 이곳에 돌아와 밤을 묵는 일이 거의 드물었다. 서재로 간 것을 보니 이명유를 위해 간 것 같았다.
최근 그녀는 여전히 기침을 앓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해도 얼마 못가 또 나가버릴 것이다.
잠기가 예민한 그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사옥현을 기다려 하루라도 빨리 화리 사안을 논의하고 싶었다.
시녀가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방금 전에 나으리께 보신탕을 보내드렸는데 다시 돌려보내셨어요. 아직 따뜻한데, 한모금 드시겠어요?”
안채로 들어간 계연수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난로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시녀에게 다시는 사옥현에게 보신탕을 보낼 필요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전에는 싫다고 했지만 그가 바쁜 공무에 지쳐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매일 보내줬던 것이다.
매번 되돌아온 보신탕은 아까워서 그녀가 마셨다.
계연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녀에게 말했다.
“너희가 마시거라. 그리고, 앞으로는 달일 필요 없어.”
시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멍하니 계연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정말… 입니까?”
계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를 물리고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용춘이 탕약을 가져오며 말했다.
“풍한은 대체 언제 나으려나 모르겠네요.”
“가벼운 풍한인 줄 알았는데 이리 오래 갈 줄은 몰랐지.”
계연수는 말없이 탕약을 들었다. 탕약의 쓴맛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형수.”
고개를 들어 보니 사옥현과 이명유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사옥현은 마치 그녀를 지키려는 듯이 그녀보다 한발 앞에서 걸었다.
제7화
전에 매번 그와 이명유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계연수는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
분명 자신은 그의 부인인데 마치 남남처럼 보란듯이 이명유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습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매번 그런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자신은 이곳에 필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그에게 그리 깊게 마음을 준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녀는 애초에 진심으로 그녀와 혼인하고 싶다던 사옥현을 사랑해서일 수도 있었다.
탕약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코끝에 쓴 향기가 맴돌자, 계연수는 단숨에 탕약을 들이마시고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사옥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책망하듯 말했다.
“명유가 너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
계연수는 싸늘한 눈길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명유와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늘 인상을 찌푸리며 이런 말투로 그녀를 비난했다.
그녀가 뭘 하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탕약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사옥현이 멈칫했다.
계연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명유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명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계연수의 손을 잡았다.
“옥현 오라버니 방에서 서책 몇 권을 빌려 가려고 왔는데 형수, 신경 쓰실 건 아니죠?”
“형수가 또 제게 예의 없다고 책망하실까 봐 미리 양해를 구하러 온 것이니, 오라버니께 화내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 제가 말실수를 해서 형수께서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너그러이 양해해 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물까지 글썽였다.
사옥현은 싸늘한 눈으로 계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명유가 내게 책을 빌리러 온 것이니, 속 좁게 굴지 말거라.”
“그리고 말실수를 했어도 형수로서 넓은 도량을 보여주어야지.”
계연수는 피로가 몰려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있었는데 그는 벌써 속 좁게 군다는 죄명을 그녀에게 덮어씌웠다.
고개를 돌려 이명유의 눈을 바라보니 단둘이 있을 때만 보여주었던 오만방자한 눈으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계연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사옥현에게 말했다.
“제가 속 좁게 굴었다고요? 두 사람이 저를 찾아온 게 아닌가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삼가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명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작 책 몇 권 빌리러 온 것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하지? 왜 굳이 나한테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앞으로 오라버니를 찾을 일이 있으면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 없어. 두 사람이 사이가 좋고 집안이 화목하면 좋은 일이지. 두 사람이 왕래가 잦은 것에 대해 난 아무런 불만이 없어. 나도 허무맹랑하게 속 좁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 않단다.”
사옥현은 계연수의 짜증스러운 눈빛과 싸늘한 말투를 보며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눈을 의심했다.
예전에도 이런 사소한 일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버릇이 있었지만 그가 얘기를 꺼내면 늘 순종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는 평소와 너무 달랐다.
예전에 이명유와 연관된 일에 부딪치면 늘 이명유를 공격했는데 오늘은 두 사람이 자주 왕래하는 게 좋다고 말을 했다.
전에는 늘 그에게 이명유와 너무 가깝게 지낸다고 탓하던 그녀였다.
이명유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계연수의 눈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눈빛이 눈에 거슬렸다.
그녀는 서러운 듯 눈물을 흘리며 계연수에게 말했다.
“형수,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시나요?”
“전에는 제가 오라버니께 너무 들러붙는다고 책망하지 않았나요? 저는 그저 오라버니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 모든 일에서 오라버니께 의지하는 습관이 있어서 그렇지 형수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형수가 최근 풍한을 앓는다 들어서 특별히 형수를 위해 보신탕을 지어왔어요. 풍한에 좋은 약재만 넣었으니 이것마저 거절하시진 않겠죠?”
말을 마친 이명유는 시녀를 시켜 삼계탕 한 그릇을 가져오게 했다.
“형수, 제가 직접 끓인 거예요.”
계연수는 이명유의 손에 들린 삼계탕과 이명유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삼계탕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런 상황은 한두 번 있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금방 시집을 온 다음 날, 이명유는 그녀에게 차를 내어드린다며 찻잔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뻗은 순간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뜨거운 찻물이 이명유의 손등에 쏟아졌다.
그날 사옥현은 다급한 얼굴로 이명유를 안고 대청을 나갔다. 그날부터 그녀는 그의 마음에서 질투가 많고 속 좁은 사람이 되었다.
목이 터져라 해명해도 그는 끝끝내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오해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건, 그가 그녀의 해명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자 계연수는 더 이상 이명유의 간계에 농락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용춘을 시켜 그릇을 받게 했다.
그러자 이명유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계연수에게 말했다.
“형수는 제가 그렇게까지 싫은가요? 이건 제가 오후에 직접 형수를 위해 끓인 보신탕이에요. 오후 내내 정성을 들였단 말이에요.”
사옥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명유의 정성이야. 형수로서 언제쯤이면 명유처럼 넓은 아량을 가질 것이야?”
계연수는 비로소 시선을 들어 사옥현을 응시하며 매섭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또 실수로 탕을 명유의 손에 부을까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사옥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계연수는 그의 표정이 어떻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명유를 바라보다가 몸을 굽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참으로 지겹고 역겹구나. 이런 추잡한 수법은 이제 할만큼 했지 않니?”
“이제는 네가 처량해 보일 정도야. 이런 비열한 술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이명유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곧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서 사옥현을 바라보았다.
“형수께선 지금도 저를 용서하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사옥현이 다가와 이명유의 손을 잡더니 정색한 표정으로 계연수에게 말했다.
“연수야, 명유에게 사과하거라.”
계연수는 아무 말도 않고 사옥현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뒤돌아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부부의 연은 이미 오래전에 다한 터라, 더 이상 그와 할 말이 없었다.
누가 옳고 누가 잘못했는지, 누가 결백한지를 두고 그와 다툴 기력도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늘 공정했지만, 유독 그녀에게만은 각박했다.
그런 사람은 그녀의 부군이 될 자격이 없다.
용춘은 계연수가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전에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그녀가 먼저 고개를 숙였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자리를 떠버린 적은 없었다.
‘나으리께서 화가 한번 나시면 또 오랫동안 냉대하실 텐데.’
용춘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계연수를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사옥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명유가 서럽게 사옥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수가 많이 화가 난 것 같네요. 들어가서 형수 좀 달래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말을 마친 그녀는 또 눈물을 글썽였다.
“오늘 제가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요. 좋은 마음에 형수를 위해 보신탕도 만들었는데 안 드실 것 같네요.”
사옥현은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착잡한 눈빛으로 이명유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진정할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겠지.”
곧이어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너도 앞으로 여기 오는 것을 자제하거라. 네 형수이자 내 부인인 사람이다. 요즘은 몸이 안 좋아 감정이 격해질 수도 있으니 네가 이해해 주렴.”
이명유는 눈을 크게 뜨고 사옥현을 바라보며 제 귀를 의심했다.
예전에는 늘 자신의 편을 들어준 사람인데 계연수가 말없이 자리를 떠버렸는데도 오히려 그녀를 옹호하는 말을 하다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였지만, 사옥현은 먼저 몸을 돌렸다.
“가자. 처소까지 데려다주마.”
제8화
화장대 앞에 마주앉은 계연수는 머뭇거리는 용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동거울 속에 비친 수척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장신구를 천천히 풀었다.
“용춘아, 아무 말도 하지 마렴. 나는 내가 뭘 하는지 잘 알고 있어.”
그녀는 사씨 가문의 며느리이자 사옥현의 부인이었다. 사옥현은 가문에서 가장 출세한 장손이었다. 수많은 눈들이 그녀를 감시하며 그녀의 실수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화목을 위해, 집안의 평화를 위해 실수할까 늘 마음을 졸이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했고, 늘 양보하며 사옥현과의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에게 민폐를 끼칠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뻔히 보이는 무겁고 고단한 삶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평생을 이렇게 침울하고 무기력한 굴레에 갇혀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연수는 사옥현이 오늘 밤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을 알았다. 비슷한 일은 예전에도 적지 않았고 그는 화가 나면 여계와 같은 예법서를 그녀의 방으로 보냈다.
그럴 때면 그녀는 혼자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그녀가 잘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결코 좋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느릿느릿 세수를 하고 밖에 있던 시녀를 부르자, 그가 오늘 밤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쯤이면 그와 단둘이서 화리 얘기를 꺼낼 수 있을지도 막막했다.
그녀는 턱을 괴고 창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센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마치 계씨 가문에 변고가 생겼을 때처럼, 불안에 떨던 그때와 비슷했다.
계연수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그날 밤 사옥현은 끝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를 마주치니 얼굴은 냉랭하고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차가운 시선은 늘 그렇듯 무정했고 마치 계연수에게 어서 타협하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
계연수는 본체만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일을 했다.
예전부터 그녀와 사옥현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가 있어 그녀는 단 한걸음도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옷을 차려입고 나서려던 사옥현은 예전이라면 절대 꾸물거리지 않았지만, 유독 오늘따라 계연수가 신경이 쓰였다.
계연수도 소박한 차림에 머리에는 옥비녀 하나만 꽂았다. 등불 아래 그녀의 부드러운 속눈썹이 눈가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녀의 백옥 같은 피부와 빨간 입술, 그리고 색기가 넘치는 눈매는 그녀의 조용한 성격과는 전혀 조화롭지 않았다.
사옥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화장대 앞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용춘에게 어떤 비녀를 고를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유난히 조용했고 마치 그를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관심 어린 말을 건네며 안부 인사를 나누던 습관과는 전혀 달랐다.
사옥현은 잠시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갑자기 진심으로 그녀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젯밤 이명유를 처소로 데려다준 후, 돌아왔다. 방 안쪽에서 그녀의 기침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계연수에게 빚을 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 삼촌은 그를 만나 이 일을 언급하며 그의 행동이 옳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명유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하고 외로운 아이였고 그는 언제까지나 그녀를 잘 돌봐주겠노라 약속했다. 자신의 부인이라면 자신과 함께 이명유를 돌봐주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삼촌은 그가 두고 간 계연수는 얼마나 두려웠을지 아냐고 꾸짖었다.
사내로서 부인을 버려두고 다른 여인을 구하는 것은 이미 상식에 어긋난 일이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눈 오는 밤에 여인을 홀로 버려두고 간 것은 그의 실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마차가 금방 도착해서 계연수를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다시 가지 않았다.
어젯밤 일은 그녀가 먼저 잘못을 인정한다면 참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계연수는 이명유의 형수이고 나이도 이명유보다 많으니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형수가 양보하는 것이 마땅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이명유를 위해 좋은 혼처를 알아보았고 봄이 되면 혼담을 논의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부인이고 평생 함께할 텐데 왜 이리도 편협하게 구는 것일까? 아버지는 그에게 절대 첩을 들이지 말라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는 첩을 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잠시 그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자, 실망감에 사로잡혀 성큼성큼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그에게 망토를 둘러주었다. 계연수도 뒤따라 나와 망토를 걸치고는 문안드리러 시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
사옥현은 냉담한 눈길로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비록 예전에는 계연수가 이런 사소한 일을 해주는 것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갑자기 하던 일을 하지 않으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평소와 같이 차가웠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향하며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는 싸늘한 뒷모습만 보여주었다.
계연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나으리.”
사옥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렇게 그를 부른 적이 없었다. 항상 서방님이라 다정하게 불러주었다. 나으리라는 싸늘한 호칭보다 서방님이라 부르면 두 사람의 사이도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다.
왜 갑자기 호칭을 바꾼 거지?
사옥현은 걸음을 멈추고 계연수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세게 비추어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연청색 망토 위로 드러난 빼어난 기질과 용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사실 처음 계연수를 보았을 때도 그녀의 미모를 감탄했다. 어딘가 어리숙한 구석이 있었지만 검은 머리는 비단결처럼 찰랑이고 눈은 별처럼 맑게 빛났다. 마치 옥으로 빚은 나무처럼 싱그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품성은 용모처럼 순수하고 우아하지 못했고 편협하고 질투가 많아 항상 이명유를 적대했다.
그는 그녀를 부인으로 인정했지만 그녀의 마음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금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3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계연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녁에 일찍 돌아오실 수 있으신지요?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사옥현은 담담히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떠난 후, 계연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사옥현은 그녀의 말을 결코 마음에 새긴 적이 없으니, 돌아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화리서를 직접 써서 그에게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며칠 사이 날씨는 더욱 추워졌다. 복도를 걸으니 찬바람이 그녀의 옷깃을 흔들며 목덜미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계연수는 입김을 내뿜었다. 설이 다가오는 이때 그에게 화리 얘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좋은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